황 제 간 택 (皇帝揀擇) 07
: 현명한 여인을 태자빈으로 삼아, 태자빈으로 하여 태자를 정하도록 한다.
이제 완연한 봄이 온 듯 했다.
따뜻한 햇살이 아침 일찍이 창문을 너머 들어왔다.
궁 안이 벛꽃의 향기로 넘실대는 듯 했다.
춘현궁에 들어온 지 2주가 지났고, 이제 저하들께서도 본격적으로 태자 수업을 다니시느라 바빠지셨다.
처음에는 민석 저하께서 제일 먼저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졌고, 그 이후로 준면 저하, 종대 저하, 마지막으로 종인 저하까지 여기저기 수업을 다니셨다.
햇살이 따스한 봄날에, 벛꽃 아래에서 홀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 슬프기는 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에 실내에 있기는 뭔가 아까운 생각에 연못 위에 있는 정자에서 수를 놓기로 했다.
춘현궁은 황자와 빈이 머무는 기간 동안 불필요하게 나인들이 들어오는 일이 자제되었기에 이리 넓은 궁 안에서 나 홀로 있는 기분이 뭔가 새로웠다.
이름 모를 새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 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는가 싶었는데, 급히 나인 하나가 춘현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직 어린 아이가 잔뜩 울상이 된 채로 종종 뛰어 가는 것이 잠깐 내 시선을 사로 잡았다.
헌데, 아이가 얼마 있지 않아 다시 궁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는데 다시 곧 들어왔다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네다섯번을 아이가 왔다가는 것이 내 집중력을 흐트려 놓고 말았다.
"아...!"
거의 마무리가 지어져가는 하얀 손수건 위로 붉은 방울방울이 베여갔다.
잔뜩 밀려오는 쓰라림에 얼굴이 찡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얘야."
다시 춘현궁 전으로 종종 걸어들어가는 아이를 불러 세우자 아이가 화들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예,마마. 부르셨습니까."
"왜 그리 급히 다니는 것이냐."
"아...그것이..."
아이가 쉬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동자를 도룩도룩 굴려 눈을 피했다.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4황자 저하께서... 수업에 나오지 않으시어, 모셔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저하께서 도통 나오시질 않습니다."
"응? 저하께선 아침에 나가시지 않으셨느냐? 들어오시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아마 뒷담을 넘어 들어오신 것 같으신데, 마마, 제발 저하를 움직여주시옵소서. 저하께서 나오시지 않으시면 상궁 마마들께서 경을 치실 것이시온데..."
건드리면 곧 툭,하고 울 것만 같은 아이가 안타까워 내가 곧 저하를 모셔오겠노라, 하였다.
저하의 방 앞에서 굳게 닫혀있는 문을 똑똑 두드리자, 잔뜩 짜증에 베이신 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오늘을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몇 번을 말하느냐! 오늘은 쉬고 싶단 말이다."
울상을 지으시면서 목소리를 내뱉고 계실 저하가 상상이 가,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이럴 때는 영락 없는 아이 같으신데 말이다.
문을 조심스레 열자 다시 한 번 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긴 또 왜 들어오는 것이냐! 절대 나가지 않을테니 그리 알라하지 않았느냐!"
제일 안 쪽 침대에 엎드려 누으셔서 이불로 얼굴까지 감싸신 모습에 다시 한 번 웃음이 새어나왔고, 정말 수업을 듣기 싫으신지 온 몸을 비트시면서 몸부림을 치시는 모습에 결국 조용히 참고 있던 웃음이 푸흣-, 하고 새어 나왔다.
웃음 소리가 들리자 흠칫, 하고 잠깐 몸부림을 멈추시더니 이불을 훽-,하고 걷으시곤 나를 당황함에 물드신 눈으로 바라보셨다.
"ㅂ,빈..."
"ㅎ,저하, 수업을 듣기 싫으시다고 이리 몰래 들어오시면 어찌합니까."
"ㅇ,아니, 그것이 아니라..."
힝,하고 왠지 쫑긋 세워져 있던 귀가 축 쳐지는 듯한 모습이셨다.
벌떡 일어나 앉으신 후, 눈을 데구르를 굴리시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정녕 아이처럼 이러실겁니까,저하."
"아니, 그게요..."
나름 엄한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이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웃음을 쉬이 멈추지 못하자 더더욱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셨다.
"그것이 아니라...아니, 일주일이 넘도록 쉬지도 못하였는데....."
"그래도, 그리 몰래 수업을 빠지시고 들어오시면 아니되옵니다."
"아니, 너무 하잖아요...쉬지 못한 것도 물론 피곤하기는 하지만..."
내가 응?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저하께서는 머뭇머뭇 말을 쉬이 잇지 못하셨다.
"물론 저하께서 힘드신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하지만, 훌륭한 군자가 되시려면..."
"황좌를 누가 가지든 관심 없어요. 그런 골치 아픈 일은 형님들 하라고 하세요."
"저하, 황좌때문이 아닙니다. 저하께서 모범을 보이시지 못하시면, 주위에서 저하의 흉을 봅니다."
"흉 좀 보라지요, 뭐."
"다른 이들이 저하의 흉을 보는 것을 알면, 제가, 마음이 아프지 않습니까."
아, 저하의 얼굴이 다시 붉게 타오르는 듯 했다.
어찌할 줄 모르시고 괜히 이불만을 쿵쿵 치시는데, 저 모습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내가 저하께 벌써 마음을 연 것이구나.
"이 소녀를 봐서라도, 조금만 참아주시면 아니되옵니까?"
"ㅎ,흥. 나는 빈 때문이 아니라, 훌륭한 인물이 되려고 그러는 거예요. 알았죠?"
"예-. 저하께선 당연히 그러시지 않습니까."
모르는 척, 넘겼지만 사실 속으로는 저하가 너무 귀여우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었다.
나도 심경같아서는 무료한 이 생활을 끝내려 저하와 같이 있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나의 도리이거늘.
"대신에, 청이 있습니다. 빈."
"무슨 청이시옵니까?"
"내 성실히 몸과 마음을 갈고 닦으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세요."
붉게 타오르셨던 얼굴을 어디로 지워버리시고, 다시 개구장이처럼 웃으시며 저하께서 말씀하셨다.
"좋습니다. 저하께서 훌륭한 성인이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가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꼭이예요! 약속 분명한 거예요!"
저하께선 곧, 이불을 박차고 흥겨우신 발걸음으로 처소를 나가셨다.
마루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저하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는, 저하께서 나오시자 눈을 동그랗게 뜨곤 저하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부디, 훌륭하신 분으로 성장해주시옵소서.
춘현궁 밖으로 사라지는 저하의 뒷모습에 남모르게 기도했다.
종인 저하께서는, 황좌가 아니더라도 누구보다 훌륭한 성인이 되시라는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 *
그렇게, 그 날 또한 다른 저하분들의 얼굴은 뵈지도 못한 채 밤이 깊어 갔다.
달밤에 뒷뜰에 주저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데, 달은 오늘따라 어찌 저리도 큰 것인지.
내일은, 다른 저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어?"
어둠 속에서 무언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뭐지?
문득, 두려움이 들었다.
이 밤에,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온단 말인가?
순간, 온 몸이 경직되어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뒤, 다행스럽게도 툭,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궁 안의 고양이려나?
그래, 고양이일 것이다.
고양이라고 결론을 지었지만, 엄습해오는 불안 아닌 불안은 나를 처소 안으로 들게 했다.
마치, 때를 기다리며 움츠리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불안에 젖어 있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 날 밤은 고요하게 흘러갔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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