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을것만 같은 이 칠흙같이 어두운 현실에서 날 꺼내줘. 제발. 매달리기도 해봤고 애원도 해봤다 돌아오는건 감정없는 시선뿐이였지만 홍빈이 끝까지 별빛을 놓지 못한 이유는 기억때문이였다. 이제는 혼자만이 가지고 있는 기억. 언젠가 별빛이 말했다. '세상이 미쳐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변하지말자.' 그리 말했던 별빛이기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별빛의 마음을 수도없이 두드리고 식어버린 눈동자에 자신을 채우려 노력하는 홍빈. 왜 더이상 나를 봐주지 않아. 세상이 미쳐버린다해도 우린 변치말자 그리 말했잖아. 널 보고있어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 너는 싫단말이야. 미쳐버린 현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메말라버린 세상. 예전처럼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웃는 사람들도 없다. 서로의 손을 잡고 수줍어하는 사람들도. 사랑해서 싸우거나 사랑하니까 희생하고 사랑하기에 눈물짓는 사랑하기때문에 헤어지는 사랑으로 아팠지만 사랑이 있어서 아름다웠던 세상은 죽어버렸다. 가족. 연인. 친구. 동료. 존재하던 모든 사랑이 사라졌다. 無의세상 그저 기계처럼. 아침이 되면 눈을뜨고 밥을먹고 일을하고 밤이되면 다시 잠에들고.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어도 흔한 대화 한마디 오가지않았고 학교 쉬는시간에도 업무중 쉬는시간에도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은 존재했다. 홍빈은 지독한 이 세상에서 혼자만 간직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버거워 모든것를 놓아버리고 떠나고 싶었지만 그때의 별빛의 말에 아직까지도 죽지못하고 감정이 죽어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다. 무겁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고독. 외로움. 쓸쓸함. 누군가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줬으면. 그것이 별빛이였으면. 꿈이다. 모든것이. 아무리 바라고 기도해봐도 꿈이 아니다. 미친 세상에서 홀로 살아간다는건. 어린아이가 위험한 길가에 주저앉아 울어도 바라봐주는이가 아무도 없는것과 같다. 그럼에도 홍빈은 변해버린 별빛의 곁을 절대 떠나지 않았다. 솔직히 정말 지치지만. 너무 힘들지만. 사실 별빛의 말 하나만 믿고 이제껏 버텨온 사실도 괴롭지만 떠날 수 없었다. 어쩌면 혼자만 기억하고 있는 추억속에 갇혀서 지금의 별빛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별빛이 아무런 의미없는 시선으로 가끔 홍빈의 눈을 바라봐주는것을 위안삼아. 별빛아. 이번에는 네가 내 눈을 3일만에 바라봐줬어. 이미 시선을 거두고 제 할일을 하고 있는 별빛의 등 뒤에 중얼거린다. 얼마나 더 지나고서야 예전처럼 날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봐줄꺼니. 홍빈은 생각했다. 나 참 많이 여려졌다. 이미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아 주먹을 꽉 쥐고 참아내며 생각했다. 차라리 나도 같이 미쳐버리지. 또 생각했다. 정말 세상이 옛날처럼 돌아올까. 별빛과 같은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고 눈을뜨는 생활이 얼마나 반복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별빛은 단 한번도 홍빈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늦게돌아오는 홍빈을 기다려준적이 없다. 늘 홍빈의 몫이였다. 늦는 별빛을 기다리는것도 아침에 모닝키스를 하는것도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잘자라 인사하는것도 주말이면 늘어져있는 별빛의 머리맡을 쓰다듬어 주는일도. 아무런 감정없는 별빛을 애처로울만큼 따뜻하게 혼자 사랑하는것은 늘 홍빈의 몫이였다. 흑백영화를 보는듯 그속에 섞여든 자신만이 빨간 심장을 가진듯 세상속에서 점점 지쳐가던 홍빈이 홀로 기계같은 사람들 속을 방황하다 늦게 집에 들어간 그날, 홍빈은 실낯같은 희망을 보았다. 쇼파에 멍하니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있는 별빛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홍빈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가려는 별빛이 있었다. 홍빈은 놀라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굳어버린 다리를 주먹으로 퍽퍽 내려쳤다. 제발 움직여. 겨우 움직이는 다리로 방 문을 열기위해 손잡이를 잡는 별빛을 향해 걸어간 홍빈은 뒤에서 별빛을 끌어안았다. 너. 나 기다린거지. 기다린거 맞지. 아무말 없던 별빛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홍빈의 팔을 풀어냈다. 늦었어. 작은 입술을 비집고 나온 그 목소리는 예전처럼 사랑을 속삭여주는 목소리는 아니였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탓에 그리 고운 목소리도 아니였다. 하지만 홍빈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들어가는 별빛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이 변해버린 뒤로 처음 듣는 별빛의 목소리였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늦은밤이 다 지나도록 닫혀버린 방 문 앞에 서서 홍빈은 계속 말했다. 정말 어린아이가 우는것 처럼 옷 소매로 눈가가 붉어지도록 눈물을 훔치면서도 계속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설렘 가득한 밤이 다 지나도록. 새벽이 되어서야 곤히 잠든 별빛의 옆에서 세상이 바뀐뒤 처음으로 편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비어있는 옆자리를 확인한 홍빈은 허탈함에 찬 웃음을 지었다. 밤에 있었던 모든 일은 꿈이였나. 홍빈은 제 자신마저도 점점 미쳐가는듯한 현실에 무릎꿇고 싶어졌다. 이불을 끌어당겨 침대위에서 무릎을 끌어앉고 한참을 별빛이 누웠있던 자리를 매만지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자 막 현관을 나서려는 별빛이 보였다.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할 틈도 없이 문을 닫고 나가는 별빛을 보고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가 부엌으로 간 홍빈은 또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 변해버린 뒤 처음. 홍빈이 애처로울만큼 매일매일 힘겹게 닫혀버린 별빛의 마음을 두드리는 걸 알아준것일까. 그 뒤로도 가끔씩 늦는 홍빈을 기다려 주기도 하며 변한 모습을 보여주는 별빛. 하지만 그것도 며칠. 또 다시 감정없는 별빛으로 돌아온것에 절망하기를 수십번. 그리고 어제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길 스치듯 지나가는 소나기를 맨몸으로 받아냈던 홍빈이 앓아누운 오늘 아침. 언제나처럼 일어나자 마자 말도없이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별빛의 손을 꼭 잡은 홍빈은 아픈탓에 유난히도 더 예전모습의 별빛이 보고싶었다. 조금만. 조금만 옆에있어줘. 하지만 이내 잡혀있던 손을 뺀 별빛은 말없이 홍빈을 쳐다보다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갔고 홍빈은 이제 정말 지쳐버려서 포기하고 싶어졌다. 희망고문. 쓸데없는 희망을 품었던 것일까. 한번더 꺾여져버린 가지에서는 꽃이 피지 않으려는 것일까. 체념한듯한 홍빈이 열이올라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방을 나왔을때 막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별빛이 있었다. 홍빈. 낯설게도 별빛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을 들은 홍빈은 이끌리듯 별빛의 앞으로 걸어갔고 자신의 손에 쥐어지는 네모난 상자를 바라보다 이내 별빛앞에서 꽃이지듯 스러질 수 밖에 없었다. 약먹자. 자신을 위해 약을 사러 다녀와준 별빛을 보며 눈물짓는 홍빈. 고마워. 정말 고마워. 눈물을 쏟아내는 홍빈을 보다 자신의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는 별빛. 조금씩 달싹거리던 별빛의 입술을 간신히 비집고 나온말 미안해. 줄탁동시. 굳어버린 별빛의 마음에 서서히 균열을 만들고 이내 깨어버린 홍빈의 지극정성. 한참을 그렇게 눈물 짓던 홍빈은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환하게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