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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속 일기장 전체글ll조회 367l 1
다 알고 있다. 네가 날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넘을 수 없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그냥 친하고 재미있는 형, 정도. 나도 딱 너를 그 정도로만 생각해야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질 않는다. 

 

네가 처음 백현이 얘기를 꺼낼 때 달가운 건 아니었다. 어째서 널 좋아하던 과거의 내가 - 지금도 좋아한다 - 너와 백현이의 사이를 가깝게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재촉하고, 얘기를 들으려 했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 없다. 처음에는 몰랐던 걸까. 정말 몰라서 그런 것들을 지속해 온 걸까. 그 때 다른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짐을 지어주는 꼴이 됐다.  

 

남의 연애에 신경 쓰는 것 따위 그만 뒀어야 했다. 그 상대가 너라는 것 자체가, 내가 짝사랑하고 있는 상대라는 자체로써 이미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몰랐을 리 없다. 과거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든, 아님 미래의 내 걱정 없이 멍청하게 멋대로 행동했든 알 바 없다. 과거는 지났으니 이제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과거의 나를 탓했다.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결국 나는 나다. 계속 탓하던 과거의 나 역시 나의 일부이자 전부다. 나는 너에게 무언가 특별해지고 싶었다. 지금도 나아졌다고 할 건 없는 것 같아보인다. 네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신경쓰고, 네 안부를 묻고, 너에게 답이 오면 다 제쳐두고 너부터 보러가고, 답이 오지 않으면 괜히 서운해지고.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아무것도 의 수준까지는 아니겠지만, 가끔 너와 내 사이의 거리를 재어보려 하면 정말 까마득이 멀어져 있는 느낌이다. 

 

그렇게 서운해하고, 혼자 속 썩이다가도 네 칭찬 한 마디에 기분이 좋아지고, 네가 반 발짝이라도 오려는 기색이 보이면 두 발짝을 마중 나가곤 한다. 여전히. 너에게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미약하게나마 존재한다. 상처받기 두려운 심장이 이제 그만두라고 말한다. 그 말소리가 어느새 반 년을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내 마음을 울리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벗어나기 힘들다. 네게 매여있던 발목은 이제 자유보다 구속에 익숙하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너를 보는 것도 이제 슬프지 않다. 처음에는 네가 너무 멀리 있다는 게 슬펐다. 조금만 더 가까이, 를 몇 번이나 갈구했다. 그렇게 반 년이 지나니 슬픔은 익숙함으로 변질되었다. 너를 볼 수 있다는 게 다행인 거야, 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너를 보는 게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사실만 슬퍼하면 되었다. 

 

네가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너에게는 이미 너의 천사가 있으니까. 천사는 빛이 났다. 서서히 검게 물드는 제 손 끝이 닿으면 부서질 것 만 같은 그런 빛. 나는 검게 물든 손을 뒤로 숨겼다. 천사에게 보였다가는 까만 생각들이 전부 들통날 것 같았다. 보일 수 없는 까만 생각들이 자꾸만 자라난다. 괴로웠다. 네 이야기를 들으며 그에 대한 것들을 알게 될수록 불안했다. 너는 네 천사를 너무도 사랑하니까, 나를 사랑할 여유가 없다는 걸 다시 인식할 때면 마음이 쓰려왔다. 그리고 새까만 색의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네 천사의 아름다움을 훔치고 싶다. 천사의 날개를 꺾고 싶다. 네가 천사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천사에게 상처를 받아 기댈 곳을 찾았으면, 그리고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 

 

나는 네 이야기를 들었다. 네 애인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엽고, 네게 잘 하고, 예쁜지. 아니면, 네 애인이 널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고민도 곧잘 들어줬다. 언젠가 한 번,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내 마음 속으로 깊이 박혀든 네 말. 이런 얘기 할 수 있는 건 형밖에 없어. 너는 별 생각 없이 툭 내뱉었을 수도 있다. 아니, 아마도 그랬을텐데 나는 네 한 마디로 심장이 뛰었다. 너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천사만큼 사랑하지는 않아도, 내 존재가 너에게 항상 인식되어 있다는 게 좋아 미칠 것 같았다. 네 이야기를 들으며 쌓인 상처와 답답함이 한번에 치유되는 느낌. 그럴 리 없지만 너는 나를 조련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너를 어떤 감정으로 바라보는지 알고, 어떻게 이용하면 너의 충실한 강아지가 될 지 생각하고 훈련시키는 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너의 강아지가 기꺼이 되어줄 수 있다. 너의 소유물이 되는 것마저 기쁘다. 나는 이런 널 너무 사랑하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일방적인 관계를 이어가기만 하면 돼.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 했지만 나를 계속 다독였다. 이 불안한 균형이 깨지면 그나마 지켜왔던 것들이 한 번에 무너진다고, 그럼 너와는 영영 작별이라는 걸 되새기며 꾹꾹 버텨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쌓인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꾹꾹 눌러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둔 너를 향한 욕망은 쌓이고 쌓여 마음을 더 무겁게 짓눌렀다. 

 

좋아해. 

… 

너무 좋아해… 종인아. 

…형. 

종인아, 사랑해. 정말, 진심으로… 

형, 저 지금 너무 당황스러워서요. 잠깐, … 아 진짜 왜 울어요. 울고 싶은 건 전데. 

 

미친 게 틀림없었다. 미친 게 아니면, 이럴 수 없는 거였다. 무슨 정신으로 그랬던 건지도 기억나질 않는다. 좋아한다고 말했다. 당사자한테. 임자가 있는 이에게. 나를 좋아할 리 없는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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