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행동강령
클론에게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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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또다시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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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천둥번개 소리에 잠에서 깬 다섯살의 C는 하품을 하며 창가로 갔다.
유치원에서 가지고 놀던 빨간 셀로판 안경을 쓴 것도 아닌데 창문에 튄 빗방울들이 붉게 보였다. C는 눈을 비볐다.
여전히 붉은색. 엄마를 깨울까? 어린 소녀는 덜컥 겁을 먹고 안방으로 달려갔다.
"엄마. 일어나봐."
C의 엄마는 잠에 취해 그녀는 안아올렸다. 아직 잘시간이야.
C는 창문을 가리켰다. 빗방울이 빨개. 꿈이야?
그녀의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엄마, 자? 뒤척이던 C의 엄마는 응. 하고 우물거렸다. 아빠는 야간 근무에 나가고 없었다.
C는 조심스레 다시 창가로 갔다. 올려다 본 까만 하늘은 계속 비를 쏟아냈다. 석진이 오빠 보고싶어. 무섭잖아.
C는 석진이 오빠를 떠올렸다. 그녀와 가장 친한 열살의 이웃집 오빠.
친구 사귀기를 즐기지 않는 C에게 부모님 다음으로 든든한 존재였다.
그는 그런 C에게 말했었다. 미소는 가볍게. 행동은 신중하게. 이렇게 하면 미움 살 일은 없어.
그래서 C는 지금도 그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품에 아끼는 인형을 꼭 안고.
"꼬마야. 넌 잠도 없니?"
창 밖에 서있는 낯선 이에게.
"내가 일을 못하겠잖아."
낯선 이는 손에 들린 것을 흔들었다. 어린 C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가슴께의 마크. 티브이에서 많이 보았던 것이었다. '이제 당신의 다치고 약해진 몸을 건강하게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세뇌된 음성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C는 낯선 이의 얼굴을 마주하기 두려워 눈을 굴렸다.
그의 주머니에 많이 보았던 물건이 삐죽 솟아있었다.
"그거 오빠 거예요."
"오빠? 이 친구말이니?"
낯선 이는 사진을 들이밀었다. 유리창 너머의 종이 속에는 석진이 환하게 웃고있었다.
이상하다. 아는 이웃도 없고 친인척도 없는 집이랬는데. 낯선 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밝혔다.
"아. 네가 그 애구나."
"네?"
"또 보자."
낯선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C는 인형을 안은 채 까무룩 잠에 들었다.
한밤 중의 일은 꿈처럼 흐려졌다. 비가 그치고 세계는 바뀌어 있었다.
티브이에서는 더 이상 '이제 당신의 다치고 약해진 몸을 건강하게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제 당신의 다치고 약해진 몸을 건강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있습니다] 로 끝난 문장은 완벽해졌다.
문장과 함께 뉴스 속보가 계속됐다. 클론 실험이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C는 티브이를 보고 있는 엄마 옆에 앉았다.
"클론 1204 실험은 92년 시작되어 올해로 10년째입니다.
보다 정확한 발표를 위해 10년간 관찰 감독한 결과, 성공적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 말했다. 가슴께의 마크. 어제도 본 것 같았다. 1204. 오빠의 생일. 창 너머의 사진. 주머니에 솟아있던 오빠의 물건.
C는 눈을 감았다.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늘 오빠를 보지 못했던 것은 우연일 것이다. C는 무작정 오빠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날, 그 다음날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C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와 같은 나이인 10살이 되었을 때. C는 오빠를 만날 수 있었다. 새로 받은 새학기 교과서를 구경하고 있는 참이었다.
페이지를 넘기던 C는 갑자기 화장실로 달려갔다. 선명하게 인쇄된 사진과 글자. C는 헛구역질이 나왔다.
[클론 1204의 사진]
비가 그치고 세계가 바뀌었던 그 날.
C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을, C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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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또다시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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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줄 넘버 002. 오후 1시. 클론 0901. 메모리 인독트리네이션.
연구원의 지문과 고유번호를 입력하세요."
멍하니 앉아 있던 C는 안내 음성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옆에 있던 선배가 뭘 그렇게 놀라냐며 놀렸지만 C의 머릿속은 온통 좀 전에 보았던 1204의 모습 뿐이었다.
'...1204?'
'네?'
C의 목소리에 1204는 뒤를 돌아보았었다. 여전히 똑같은 그 얼굴. 드디어 실제로 보았다.
세계가 바뀌고 무작정 기다려왔던.
'안녕하세요.'
여전히 미소는 가볍게. 행동은 신중하게. 를 인사와 함께 실천하고 있는.
C와 가장 친했던 김석진의 모습을.
"선배. 1204도 같은 실험실에 있어요? 여기저기 나오길래 좋은데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봤자 클론이지. 걘 밖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복받은 줄 알아야 돼. 누구는 24년째 실험실 신센데.
나도 6년째 못나가고 있지만."
C는 선배의 말에 0309가 떠올랐다. 24년째 실험실 신세. 그는 외부가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할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서둘러 스케줄 장소인 메모리 스페이스로 갔다.
메모리 인독트리네이션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0309가 말했던 기억주입. 간단해서 더 무서웠다.
유리로 된 스페이스 벽 너머로 뇌파 장치를 하고 누운 0901의 모습이 보였다.
밖에서는 가드너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C는 기억주입 중 그의 반응을 체크한 후 테스트를 하는 일을 했다.
상부에서 내려오는 메모리가 어떤 내용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테스트 과정에도 메모리에 대한 물음은 없었다.
한 연구원이 버튼을 누르자 0901의 짙은 속눈썹이 움직였다. 그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10분간 진행된 기억주입은 0901의 발작과 함께 끝이 났다.
그는 가드너들에게 연행되듯 끌려가 C와 함께 그의 방인 실험실로 이동했다.
"클론 0901. 테스트 진,"
강제로 앉혀진 0901의 테스트를 진행하려는 순간 그녀는 숨을 멈췄다.
0901이 그녀의 목덜미를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테스트 시작 버튼을 누르지 않았기 때문에 수면가스는 작동하지 않았다.
실험시작 이후에는 가드너들도 개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철저히 고립됐다.
C는 발버둥치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죽일 듯 노려보는 그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너 누구야."
"이, 이것 좀."
"누구냐고."
C는 애원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0901은 그녀에게 누구냐는 물음만 되풀이할 뿐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묻는다며 그녀의 목을 더 세게 졸랐을 때. C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C."
그녀의 말에 0901은 홀린 듯 그녀를 껴안았다. C는 정신없이 켁켁댔다.
문득 연구원 R0613 이 아닌 본명을 말한 것을 자각한 C는 그를 뿌리쳤다.
선해진 0901의 눈동자가 그녀를 쫓았다. C는 당황스러움에 손톱을 물었다.
감청되고 있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0901은 분명히 그녀의 본명을 들었을 것이다.
불안해하는 C에게 0901은 말했다.
"확인하고 싶었어."
"뭘?"
"네가 C라는 거."
"무슨 소리야?"
0901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C는 뒤늦게 아파오는 목언저리를 매만졌다.
0901은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냉장고로 가서 차가운 물을 꺼냈다.
클론들이 자학을 하지 못하도록 팩으로 포장된 물이 C의 목에 얹어졌다.
"나를 알아?"
그녀가 물었다. 0901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C이길 바랐어?"
"응."
"아니었다면?"
"죽였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의 눈을 보았으나 감정은 없었다.
C는 궁금했다. 20년간 연구소에서 연구된 클론이 자신을 안다니. 왜?
이상한 일이었다.
"날 어떻게 아는데?"
"매일 보고."
"..."
"매일 꿈꾸니까."
0901은 말했다. 매일 네 기억을 주입당해.
"내 기억을?"
"응."
"어떤 기억인데?"
C는 계속해서 물었다. 0901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에 들린 컨트롤러를 빼앗았다.
그녀가 안돼. 라고 말하며 손을 뻗자 0901가 말했다.
"C."
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의 손가락이 테스트 시작 버튼을 눌렀다.
실험실 벽면의 녹음기 센서에 빛이 들어왔다. 확인한 그는 입을 열었다.
"내 세계는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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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또다시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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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론 0901]
암호닉
[ 캐서린 / 창가의토토 / 안녕엔젤 / 슈크림 / 지니 / CGV / 꾸기 / 꾸기얀 / 뷔티뷔티 / 정꾸야 /
뀨기 / 다우니 / 우주 / 달보드레 / 뷔요미 / 뷔글뷔글 / 느아연 / 슈가맨 / 깨꿍 / 레프 /
동상이몽 / 슈가슈가 / 우와탄 / 꽃소녀 / 초코파이 / 알로에미스트 / 클레임 ] 님
모두 감사합니다.
암호닉 신청은 감사히 받고있습니다.
신청을 원하시면 1편에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