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가씨'를 각색했지만
내용이 돌이킬 수 없는 산을 건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도련님의 표정은 내가 여태까지 봤던 어떤 표정보다도 더 감정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해서 나도 모르게 눈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그저 그를 바라보게 된 것 같았다. 검은 눈동자에는 파도가 구슬프게 세기를 부풀리고 있었고 그 안에 살고있던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지금 내 옆에서 초점 잃은 눈빛으로 도련님을 바라보고 있는 료우토 씨처럼. 은하수와 파도가 한껏 담겨져있던 그들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형용할 수 없는 감각만들이 존재한 채 죽음의 성물이 되어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슬픔, 분노 그 언저리즈음 머물러있는 도련님의 표정은 지금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다 변명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이 어쩌면 절망적,이라는 생각도 들게 되었다. 지금 이 둘은 나를 통해 누구를 보고 있는 것이고, 어떤 추억을 되새기고 있는걸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는 도련님의 아무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새카만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읍!"
곧 보란듯이 그대로 나의 기모노 소매를 거칠게 잡아당겨 입술을 맞대는 도련님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여졌다. 입술에 내려앉는 이제는 익숙할 법도 한 도련님의 부드러운 여린 살의 감촉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옆에 료우토 씨가 있다는 것을 알텐데, 그리고 그가 입술을 맞대는 우리 둘을 바라보는 것도. 의도를 한건지 아니면 아랑곳하지 않는건지 전에 했던 온기를 나눈다는 구실로 나눴던 달콤한 입맞춤과 달리 지금하는 입맞춤은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저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는 급급한 입맞춤처럼 차가웠다. 혀끝에 전달하는 싸늘한 온기가 마치 시체와 혀를 섞는 것만 같았다. 저급한 장면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 접대용 기모노를 입은 하녀와 입을 맞추는 도련님이라니. 그의 순수한 이미지를 절대로 더럽히고 싶지는 않아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런 나의 의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더욱 대담하게 나를 뒤로 밀쳐내는 도련님에 눈가가 빨갛게 물들여졌다. 정말 내가 알고 있던 도련님이 아닌 것 같았다. 옆에서 나와 도련님의 입을 맞추는 장면을 바라보는 료우토 씨의 눈빛을 차마 받아낼 수 없어 눈을 감은 채 엄마 젖을 찾는 아이처럼 급하게 아랫입술을 무는 도련님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
마침내 허벅지에 닿은 서늘한 손길이 도련님의 손이라는 것을 눈치챈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 다른 사람같이 대담하게 허벅지 위에 올려진 도련님의 손에 놀라 힘껏 도련님의 어깨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애초에 성공할 리가 없는 일이었다. 왜 이러시는거지, 도대체 왜? 료우토 씨께 수치심을 주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시는 거라면 성공한 터였다. 지금 눈물을 참기 위해 간신히 가슴 속에 뭉쳐있는 응어리들을 삼키고 있었으니깐. 입술을 닫으려는 나의 낌새를 눈치챈건지 아예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어 신음을 계속 흘리게 하는 도련님의 행동은 나를 두렵게 하기 충분했다.
끼이익-
아무 말도 없이 그런 우리 둘의 행동을 잠시 바라본 료우토 씨께서 별 말 없이 그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마 그와 눈을 마주할 수 없어 더더욱 눈을 꽉 감으며 볼에 눈물 한 방울을 흘러내렸다. 귓가에 생생하게 낡은 문이 닫히는 열고 닫히는 소리가 맴돌았다. 도련님과 하녀가 나누는 입맞춤이라니, 의심만 품었던 그 뚜렷하지 않았던 진실이 성립되는 순간 료우토 씨께서 나에 대해 어느 생각을 할 지도 잘 알 것만 같았다. 료우토 씨도 나가셨으니 이제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도련님의 어깨를 밀쳤지만 그런 나의 손목을 잡으며 더욱 밀어붙이는 도련님의 입술은 거칠기만 했다.
혀가 섞이는 질척한 소리와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옷이 마찰하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가 없어 이 기모노를 입었던 직업을 가진 여자가 된 것만 같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쉴새없이 나의 입 안에 혀를 휘어저으며 강압적으로 나를 뒤로 밀치는 도련님에 숨이 막혀오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혀 신음소리를 낼 때마다 잠시 입술이 잠시 떼어졌는데 마치 도련님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려주는 듯 긴 은실이 늘어뜨려져 나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게 된 것 같다. 그런 내가 괘씸한건지 숨 쉴 틈 없이 거친 숨결이 입술 위에 얹혀졌다. 그만하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 입술에 닿은 숨결에 살짝 물기가 젖어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 도련님께 시선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 틈을 주지도 않고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마침내 입술에서 살짝 짠 맛이 느껴진다고 생각될 때즈음 도련님께서 울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짝 강한 악력으로 도련님의 어깨를 밀쳐내니 순순히 뒤로 물러난 도련님의 새카맣게 빛났던 눈동자는 눈물로 가득차 있었다. 순간 심장이 다시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 놀란 눈으로 도련님을 바라보자 그런 나에게 다가온 도련님께서 입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돌리셨지만 주체할 수 없는 감정 탓인지 흐느끼기 시작하셨다.
"하,으 내가 왜"
"..도련님"
"왜 항상 뺏겨야 하는지 모르겠어"
누군한테 저를 뺏기는건데요, 차마 물을 수 없어 겨우 떨리는 손을 들어 급하게 도련님의 갈색 뒷통수를 안고 쓰다듬었다. 어깨에 닿은 도련님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뜨거운 온기와 액체가 나를 감싸안았다. 나의 손짓이 지속되자 거칠면서도 물기가 젖은 숨결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우시는건지 살짝 그의 어깨가 떨려온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련님의 손자국으로 가득한 빨간 손목이 거침없이 떨려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애써 다잡고 그대로 하얀 얼굴을 잡아 시선을 마주했다. 잔뜩 겁을 먹었던 나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도련님의 눈빛이 서글프게 물들여간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 뺏겨"
"도련님,"
"흐,으, 근데, 스미레, 너마저, 뺏기기 싫어"
뺏기기 싫어. 이 어린아이가 부리는 투정같은 말 한마디가 가슴을 어찌나 아프게 하는지. 괜히 나마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과거의 굴레에 얽매여 나를 지키고 싶어하시는걸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서글프게 눈가를 빨갛게 물들이며 나의 손에 얼굴을 댄 채 서글프게 우시는 도련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코끝이 찡하다는 감각을 느낄 뿐. 천천히 도련님의 등에 팔을 감아 끌어당겨 아이처럼 우시는 도련님을 안았다. 잘못했어요, 귓가에 중얼거리자 도리어 고개를 내저으며 심하게 대해서 미안하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제가, 제가 잘못한거죠 도련님. 제가. 얼마나 슬프고 상처많은 과거사를 안고 자라난건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 과거사를 모두 파헤치면 아마 도련님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으시겠지.
"어디 가지 않아요"
"..스, 미레"
"여기 있을게요 도련님"
그러니깐, 그러니깐... 너무 슬프게 울지 말아주세요. 기약 없는 다짐을 하는 혀끝이 마치 바늘을 댄 것처럼 쓰라리기만 했다. 퐁퐁 솟아오르는 도련님의 눈가를 쉴새없이 닦아주며 떠나지 않을 거라며 주문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도련님께서 안심하시고 숨을 다시 정상적으로 쉴 수 있으시도록. 이마를 맞대며 거짓말을 하는 나의 심장은 찢어질 것처럼 통증을 안겨다주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아기를 돌보는 유모처럼 도련님의 갈색 머리카락을 계속 쓰다듬고 미소를 지었다. 가슴 속 맺혀있는 응어리들을 차마 내 뱉을 생각도 채, 그렇게.
*
한참동안 울음을 터뜨리신 도련님은 지치신건지 금방 잠에 빠져들게 되셨다. 옆에 있어달라고 계속 부탁을 하셨지만 무언가 마음이 불편해 밖을 나왔을 때 복도의 벽에 기대어 서있던 료우토 씨를 마주하게 되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나를 지배해 그대로 그를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팔목을 적지 않은 악력으로 잡아당긴 료우토 씨에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피하는 것밖에 난 할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별 말 하지 않고 그저 정원을 같이 걸을 생각 없냐고 물어본 료우토 씨의 눈동자를 차마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중압적인 명령조가 깔려있는 료우토 씨의 화법에서 나오는 부탁을 나는 거절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항상 도련님과 걸었던 정원이었기 때문에 료우토 씨와 함께 걷는 정원은 또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부엉이가 우는 밤을 맞이한 정원은 마치 누군가를 잡아먹기 위해 입을 벌린 맹수처럼 고요하기만 했고 스산한 바람소리만 공간을 매우고 있었다. 아침에 항상 봤던 싱그러운 생명의 빛들이 모두 꺼진 채 잠을 자는 듯했다. 료우토 씨와 나의 정적을 매운 밤 특유의 소리가 생생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정말 '걸을' 생각인건지 우리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긴, 아까 일을 다시 묻기에는 우리 둘 다 서로 할 말이 없고 괜히 마음이 복잡해질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료우토 씨 특유의 체향과 밤바람이 섞여 나의 코끝을 스쳤다.
"세츠카와 함께 걸었을 때는 이렇게까지 정원이 고요하진 않았어요"
"..."
"항상 빛과 사람들로 가득했거든요 이곳이"
이 저택은 어떤 곳이었고 당신과 도련님 사이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 건가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질문을 애써 삼키며 료우토 씨와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사각사각. 료우토 씨와 내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밟히는 나뭇잎들이 마찰하면서 내는 소리가 살짝 오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료우토 씨는 도련님과 무슨 사이인걸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걷잡을 수 없는 호기심이 나를 좀먹기 시작했다. 항상 도련님과 연관되어 있는 것도 그렇고, 충분히 어울리지 않는 둘인데 항상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렇고 어떤 필연이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 둘이 항상 같이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둘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구도와 그 사이에 끼어있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둘이 벌이는 신경전에 휘말려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나와 세츠카가 무슨 사이인지 궁금해요?"
나의 생각을 읽은건지 잠시 발걸음을 멈춰 나를 바라본 료우토 씨의 눈동자는 마치 추억에 젖어있는 사람처럼 우수에 빛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기도 했고 더 이상 진실을 피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따라오라는 듯 나의 팔목을 잡고 이끄는 료우토 씨의 발걸음을 따라 앞을 나아가자 곧 시야에 들이찬 분홍빛 거대한 벚꽃나무에 순간 왜인지 모르게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마 저 나무에 도련님과 관련된 것이 많기 때문일까, 입술을 깨문 채 의도를 알 수 없는 료우토 씨의 뒷모습만 빤히 바라보았다. 분홍빛 꽃잎들을 하나 둘 떨어트리며 밤바람을 타고 춤을 추는 나무 앞에 서있는 료우토 씨는 분명 도련님과 다른 사람인데 무언가 그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처연하고 사연이 많고.. 무언갈 그리워하는 모습.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뒤를 돌아본 료우토 씨께서 나와 눈을 마주했다. 곧 눈을 사르르 아름답게 접으며 눈웃음을 짓는데 그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해서 나도 모르게 입 안 여린살을 깨물게 된 것 같았다. 이 곳에 왜...라고 묻기도 전 꽃잎을 하나 잡아 체취를 맡은 료우토 씨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벚꽃나무에서 어머니께서 목을 매고 돌아가셨어요"
"...?"
묘하게 기시감이 들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분홍빛 꽃잎이 휘날리는 나무를 가리키는 료우토 씨의 긴 손가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벚꽃나무, 목을 맨 어머니, 악몽 그리고.. 도련님.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어 괜스레 주먹을 꽉 쥐었다. 악몽을 꾸고 울음을 터뜨렸던 도련님께서 다음날 창백하게 질린 손으로 벚꽃나무를 가리키며 어머니께서 목을 매고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하셨던 그 목소리까지 상기되자 팔목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설마. 짧은 한 단어를 계속 중얼거리며 차마 아니기를 바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료우토 씨의 굳게 다물린 입술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나를 무색하게 입을 연 료우토 씨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대로 충격에 몸이 굳어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맞아요"
"..."
"세츠카와 제 몸 속에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요"
그게 무슨... 누군가 내 머리에 망치를 크게 휘두른 듯 머릿속이 다른 의미로 새하얗게 물들여졌다. 말도 되지 않았다, 아니 이게 어떻게.. 끝말을 흐리며 내 위로 소복히 쌓이기 시작하는 꽃잎들을 인지도 못한 채 멍하니 벚꽃나무를 배경으로 나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료우토 씨의 눈을 마주했다. 조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 흐렸던 진실이 뚜렷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 나를 맞이했을 때 그 충격이 너무나도 컸다.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진 나에게 천천히 다가온 료우토 씨가 나의 머리 위에 얹혀진 꽃잎들을 하나하나 떼어주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같지만,"
"..."
"아버지가 달라요"
*
너무 오랜만이죠 독자님들..8ㅅ8 보고싶었어요
이런 망글 기다려주시는 독자님들 댓글 볼 때마다 힘이 솟아오르는 것 같네요 헤헿..
'하녀'가 조금씩 완결에 가까워지면서 그만큼 진실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아요!
혐생이 빨리 끝나야 진도가 후딱후딱 나갈텐데 답답합니당
+암호닉은 계속 받고 있으며 암호닉 정리글로 꼭 다시 찾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