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채용과 지역할당제로 인해 게시판이 시끌시끌합니다. 이런 저런 불만 토로와 환영의 글을 보고 있자니 제 개인적인 경험들이 떠올라 기억을 공유해 봅니다.
저는 한림대 의대 재학 중 무휴학 반수를 해서 당시 서울대 기준 수능 점수로 전국 50등 전후 성적을 받고 서울대 의대로 적을 옮겼습니다. 그래서 지방대 생활을 1년 좀 못 되게 해보고, 서울대 의대 6년을 다니고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공학에 개인적인 흥미가 있어 서울대 졸업을 한 후에 회사 운영을 하면서 한양사이버대와 한국사이버대에서 컴퓨터공학 과목 수강도 해보았습니다. 실제로 서울대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지방대 실정을 모르고, 지방대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서울대 실정을 모르는 상태로 왈가왈부를 하는데 저는 양쪽을 다 겪어본 많지 않은 사람인 셈이죠.
"사악하고 불행한 부자와 착하고 행복한 가난뱅이"의 비교와도 같이, 이런 학벌 논쟁에는 항상 "학사경고 받은 서울대생과 열심히 공부하는 지방대생"이라는 --실제로 본 사람은 없는데 모두가 이야기하고 있는 전설의-- 유니콘과 같은 비유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학번이었던 거의 200명 가량의 동기들 중에서 서울대 의대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이 학교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혹은 공부를 안 해도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지능을 가지고 있다가-- 합격과 동시에 갑자기 공부를 할 의지가 사라져서 평범한 지방대생만큼의 공부도 안 하려 들어 --혹은 갑자기 지능이 급전직하하여-- 인생을 망치는 학생은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방식, 어떤 전형을 통해서든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을 정도의 노력 혹은 실적을 처음 20년의 삶에서 보여주었던 사람이라면 학벌만 믿고 학업을 내팽개칠 정도의 용기(?)는 보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뛰어난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서울대에 합격하기 훨씬 전에 이미 자만해서 성적이 떨어졌거나, 아니면 그렇게 태만해도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을 정도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좀 어영부영 산다고 그 재능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울대 2.0 과 지방대 4.0 중 누가 더 우수한 학생이냐? 라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없이 전자라고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우수함'을 순전히 학력으로만 국한한다면 말이죠. 학습 태도나 (인성과 학점은 비례도, 반비례도 아니고 완전 독립입니다만) 인성 같은 기준은 제외하고요.
제가 서울대 의대에 다닐 때에는 매년 50명씩 학사편입을 받았습니다. 대부분 서울대 다른 학과나 카이스트, 미국 명문대에서 졸업을 하고 의학과(본과) 1학년으로 편입을 해서 4년을 다니게 되는 경우였는데요, 본과 1학년 때 동기들이 우울증 치료를 많이 받았었습니다. 학사 편입을 한 동기들은 다 서울대에서, 아니면 카이스트에서, 거의 만점(올A+)에 가까운 4점대 GPA를 받았던, 공부 기계에 가까운 학생들인데, 의학과 첫 학기에 C학점 폭탄을 우루루 맞고 받아든 2점대 성적표가 너무 낯설었기 때문이지요. 예과 출신 학생들도 대부분이 난다 긴다하는 학교의 전교 1등 아니면 국제 올림피아드 수상자들이었는데, 누군가는 2점대, 1점대 점수를 받아야 하니까,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의대의 상대평가는 특히나 칼같아서 200명 중 100등 정도를 하면 2.8정도(B-)의 학점을 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예과때야 그냥 놀다 보니 그랬다며 낮은 학점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기까지 할 수 있었을지라도, (본과 때 노는 학생은 없었으니까) 최선을 다해 공부했는데 2점대 학점을 받다니 .. 그건 정말 낯선 일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혹은 우리의 대응은? 우울증 약을 먹어가면서라도 더 열심히 공부하는 거죠. 그러면 누군가는 3점대로 올라가고, 누군가는 그냥 계속 2점대에 남아서 C라는 학점에 그냥 익숙해져 가고, 그렇게 꾸역꾸역 남은 4년을 이겨내는 것이죠.
저도 공부라면 그래도 해볼만큼 해본 학생이었는데 그 과목의 모든 수업에서 단 1분도 졸거나 딴생각을 하지 않고, 시험 공부도 열심히 한 과목에서 C+를 받아봤습니다. 결석이란 보통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의대 수업은 고등학교와 같아서 그냥 학생들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 매 시간 교수가 바뀌어 들어옵니다. 이동할 시간 조차 안 주죠. 4년 내내 공강이란 없고요. 제가 본과 2학년 때 2006년 독일 월드컵을 했었는데, 200명 학생 중에 시청 응원 같은 것을 갔던 학생이 10명도 안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새벽부터 아침까지 경기를 했는데요, 9시 수업에 결석을 한 학생은 저를 포함해 4명인가밖에 없었다더군요. 한국 경기를 포함해 월드컵 경기를 하나도 안 본 동기가 태반이었고요.
그래도 이런 학교에서 4.30 (서울대의 경우 straight A+) 을 받는 학생도 있습니다. 천재이거나, 시험준비를 극도로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을 깨우친 시험 기계이거나, 아니면 하루를 28시간처럼 살았던 노력파이거나였죠.
그 중 제가 기억하는 노력파 4점대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 의대는 많게는 매주 드물게는 격주에 걸쳐 시험을 보는데 보통 시험을 월요일에 봅니다. 그래야 주말에 쉬지 않고 공부를 하니까요. --관련해 더 놀라운 에피소드를 회상해 보자면, 연말고사 시험 날짜를 투표로 정했는데, 12월 24일과 26일 중에, 26일이 압도적인 표차로 24일을 이겼답니다. 이유는 26일에 시험을 봐야 공부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있어서-- 아무튼 제가 기억하는 4점대 학생은 주말만 되면 엄지손가락 아랫쪽이 --오르비는 의학도들도 많을테니, 아하~ 하는 느낌이 들도록 설명을 하자면 anatomical snuff box 쪽이-- 뻘겋게 부어올랐다가, 화요일이 되면 다시 가라앉고, 주말이 되면 또 부어오르고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시험이 가까워지면 거의 잠을 안 잤기 때문에 졸음이 올 때면 손을 물어뜯어 잠을 깨서 그랬었지요.
당시에는 서울대의 내신 반영비율이 커서 외고나 과학고 (영재고는 없었고) 출신은 내신이 너무 불리해 정시모집으로 의대에 입학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고를 나와서 정시로 합격했던 한 학생도 4점대 성적이었는데요, 이 친구는 본과 때의 행적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 수능 시험 도중에 (흔히 맹장염이라고 하는) 급성 충수염이 발생해서 극심한 복통 속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배를 움켜쥐고 시험을 봐서 전국 10등 정도 성적을 받았었습니다.
사실 저도 아주 옛날에는 처음 두 번 수능을 망친 것을 두고 독감 탓을 했었는데요--첫 시험에서는 실신도 했고--, 이 친구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그냥 실력이 부족해서 시험을 세 번이나 봤다고 이야기합니다. 요즘엔 이런 걸 참교육 당했다고 하던가요? 겸손을 학습당했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의사고시 준비를 28일 하고도 국시에 무난히 통과해서 의사가 되었으니 저도 일자무식은 아니었을텐데, 이런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3점대라도 받아보려고 발버둥쳤던 기억들이 여전히 선합니다.
오만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제가 경험한 사실은 그러했기에 의견을 피력하면, 저는 서울대 의대 200명 중에 180등 안에 드는 학생은 누구를 데려다 놔도 국내 거의 대부분의 대학교의 거의 대부분의 학과에서 수석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희때는 수시 비중이 30% 이하였고, 수시 정원은 거의 전부 국제 올림피아드 출신이 가져갔고, 대부분은 한창 수능 시험이 어려울 때 그 관문을 뚫고 정시로 들어왔기 때문에 요즘과는 형편이 좀 다를 수는 있다는 전제로) 아주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학생들은 시험을 대하는 기준이 아주 다릅니다. 내신 시험을 대비하건, 수능 시험을 대비하건 간에, 애초에 시험을 대비해 계획하는 학습량 자체가 차이가 납니다. 저는 고등학교 공부를 할 때 "어떤 게 시험에 나와요?" 라는 질문이나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목표가 96점이면 한 문제 정도는 틀리거나 실수해도 되니까 준비를 할 때 어느 정도 여유가 있고, 내용의 경중도 가려가며 시험 준비를 할 수 있겠지만, 목표가 100점이면 그냥 시험 범위의 모든 내용을 (필요에 따라 유도하거나 도출해낼 수 있도록) 이해하고, 이해가 안 되면 싹 다 외워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각주까지 외울 건데 별표가 무슨 상관이겠냐는 것이죠. 평범한 학생이 시험에 대비해 100만큼 공부를 한다면, 상위 10%에 드는 학생은 300정도 공부를 할 것이고, 반에서 1등을 하는 학생은 500, 전교 1등을 하는 학생은 1500 정도 공부를 할 것입니다. 서울대 의대의 200명 중에도 예외가 있을지 모르니 10%는 제한다 치고, 나머지 90%는 시험에 임하는 자세가, 3000 만큼 공부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어디에서 어떤 공부를 해도 100만큼 공부를 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두드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제가 사이버대학에서 컴퓨터공학 한 학기 수업 들으면서 받았던 성적입니다. 모든 강의를 2배속으로 들었는데 실질적으로 공부한 시간은 의학과 다닐 때 공부 강도로 치면 이틀 정도 분량, 그리고 시험 공부는 네 과목 합쳐서 하루 공부하고 받은 것입니다.

두 곳의 사이버대학 수업을 동시에 들었고 다른 학교도 비슷한 성적이었는데, 그쪽은 캡처를 찾을 수가 없네요. 결국 8개 과목 24학점을 다 A+ 받고 (A0이 하나 있었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맞을 겁니다.) + 거기에 다른 분야 학사 (의학사) 있고, + 자격증 있고, + 독학사 시험에서 일정 점수 이상 받은 것 다 학점으로 인정받아 한 학기만에 공학사를 받아서 더 이상 다른 학기 기록도 없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저는 개인적으로는 지방대 수석이라는 타이틀은 회의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경험을 안 해본 분들이 다 같은 대학이다, 다 같은 명문대다 이야기하시는데, 같은 서울대 내에서 다함께 자연대 교양 수업을 들을 때도 서울대 내 학과들 간에 수준 차이가 많이 났었습니다. 그러니 문과는 몰라도 적어도 이공계 쪽은 서울대와 연고대의 같은 학과 간에도 차이가 많이 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이상은 말할 것도 없고요.
주저리주저리 적었는데 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공부도 버릇이라, 좋은 대학 합격했다고 갑자기 인생을 내려놓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요즘 세대 학번은 더더욱 그렇다. 반대로 안 좋은 대학 합격하고 갑자기 개과천선 하는 경우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사례가 없지는 않은데, 무언가 이런 논쟁적인 국면에서 "사고실험"을 위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극단적인 사례가 동원되는 경향이 많다.
2. 서울대 내에서도 학과 간에, 서울대를 벗어나면 대학 간에도 학력 차이가 상당히 존재한다. 그 차이가 너무 심해서 블라인드 채용을 해도 충분한 면접 시간을 주면 다 드러날 것이다.
3. 대학과 학점을 다 블라인드하는 것은 취지를 이해할 수 있는데, 대학을 가리고 학점만 적는다는 것은 혈액형과 별자리를 적어놓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사족으로, 글의 취지와는 좀 어긋나는 이야기지만
회사, 공기업, 정부 .. 퉁쳐서 "사회"가 필요한 사람을 채용할 때,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을 위해 예비된 자리는 그 중 절반도 안 될 것입니다. 환언하면, 공부보다 다른 걸 더 잘 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자리가 세상에는 더 많습니다. 그런 자리에 맞는 사람을 뽑을 때에는 학업 능력이나 출신 대학, 학점을 참고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을 위해 예비된 자리들은 소득이 대체로 높은 직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또 아주 높은 직종들은 아닙니다.
예전에는 그런 자리에 꽤 높은 수준의 권력이 보장되거나(경판, 경검), 안정적인 부가 보장되었지만(의치한) 이제는 세상이 변해서 그렇지도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입시와 취직은 완전히 다른 게임이고, 거기에 같은 잣대를 요구하는 것도 무리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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