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https://instiz.net/name/50660572주소 복사
   
 
로고
인기글
공지가 닫혀있어요 l 열기
필터링
전체 게시물 알림
신설 요청 주식
혹시 미국에서 여행 중이신가요?
여행 l 외국어 l 해외거주 l 해외드라마
l조회 3428
이 글은 3년 전 (2022/8/15) 게시물이에요
많이 스크랩된 글이에요!
나도 스크랩하기 l 카카오톡 공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그애시리즈.txt 라는 글,
작가는 각각 다르고 작자미상에 소설인지 실화인지 아무 정보도 없는 글



내가 열병처럼 앓았던 그 애.txt 


내 열일곱 살 때 그 애는 이미 내 우주였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에게서만 나는 묘한 냄새 같은 것이 있다. 
집의 가정환경에 상관없이 사랑에 둘러싸여 자란 사람은 잘 알아채지 못하지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그런 동류의 냄새를 기막히게도 잘 맡아낸다. 
항상 외로움에 둘러싸여 자란 그 애는 내 냄새를 그렇게 맡고 내게 다가왔었다. 

그 애는 또래 애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도 항상 어딘가 혼자인 듯 겉도는 면이 있었다. 
나름 성격도 밝고 여자 애건 남자 애건간에 그 특유의 싹싹함으로 손쉽게 구워삶는 타입이었지만 
정작 집에는 항상 혼자 돌아가고 
남들 다 있는 핸드폰 하나 없이 항상 주말을 혼자 나는 그런 아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애는 결코 가난한 집 자식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 낡은 지갑 안에는 천원짜리 몇 장과 
동전들과 함께 꼬깃꼬깃 접힌 편의점 영수증 따위만 어지럽게 굴러다녔지만 
그 아이 아버지는 이 지역 대학의 경제학 교수였으며 
그 애의 어머니는 중학교 선생님 출신으로 근처의 나름 이름있는 갤러리를 운영하는 소위 여사님이었고 
두 살 차이나는 그 애의 여동생은 피아노 전공으로 
근교의 학생 콩쿠르에서 상을 휩쓸고 다닌 장래의 기대주였다. 

그 애는 내게 혹은 친구들에게 그런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지역 외곽에 있는 그 으리으리한 3층 주택 대신에 
학교 근처에 조그만 자취방을 얻어 살았다. 
3평이 좀 안 되는 그 습기찬 방에서는 가끔씩 곱등이도 튀어나오고 
소위 돈벌레라 불리는 그리마도 심심찮게 기어나와 신경을 건드렸지만 
그 애는 그런 벌레 따위보다 자기 가족들을 더 무서워했다. 

성적 학대는 아니야. 맞고 자란 것도 아니야. 
그래도 나는 우리 집이 너무 외롭고 무서워. 


다가오는 그 애와 어렵사리 친구가 되고 
어느 누구도 사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 그런 것과 다름없는 관계로 발전하며 
나는 그 애의 자취방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가끔은 학원까지 빠져가며 두드렸던 문이지만 
사실 그 안에 들어가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내가 등을 돌아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그 애는 티비를 봤고 
내가 그 애의 만화책들을 읽으며 낄낄대고 있으면 그 애는 내가 빨아 놓은 제 빨래들을 갰다. 
어쩌다가는 동네 비디오방에서 오래된 DVD들을 잔뜩 빌려와 보기도 했고 
그러던 도중에 서로에게 기대어 발바닥을 서로 맞춰 보고는 했다. 


나는 그 방에서 그 애와 키스를 하고 마침내는 그 애와 잤다. 
미성년이라는 죄의식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때까지 어떤 성적 경험도 전무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거 같다. 
성관계 혹은 순결에 대한 어떤 명확한 개념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난 딱히 그것들이 무섭지 않았고 
그냥 연인의 사랑에 있어서의 당연한 수순을 밟는다는 느낌으로 그 애에게 안겼다. 

지금 돌아보면 올바른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후회는 않는다. 
사랑했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억에 있다. 
그 애가 내 처음이라는 게 좋았다. 두 번째나 세 번째가 아니고 
그 때까지 고요하게 지켜왔던 내 처녀성을 그 애가 앗아감으로서 
내가 세운 그 아이 기억의 묘비에 한 줄 더 적어넣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지만 
어떤 관념적인 첫 번째가 아니라 
몸을 섞음으로서 그 애가 정말 실체적인 기억이 되어 내 몸에 남아 있게 된다는 게 좋았다. 

그 애는 어떤 유서도 남기지 않고 
열일곱 겨울에 학교 숙직들의 샤워실 수건걸이에 고요히 목을 맸다. 
1.6미터도 채 안 되는 그 높이에서 180을 웃도는 그 애가 그 낮은 곳에 목을 매며 얼마나 발악을 했을지 
난 가끔 그 고통의 순간을 상상하고 또 곱씹어 보고는 한다. 

어떤 말도 남기고 떠나지 않았지만 
난 그 애 가족들도 끝내 밝혀내지 못했던 그 애의 자살 원인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 그건 그 애가 처음 내게 다가왔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같은 사람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외로운 냄새. 오직 느낌으로만 알아챌 수 있는 것들. 
그 애는 또래 애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도 항상 어딘가 혼자인 듯 겉도는 면이 있었다. 


기억에는 영속성이라는 게 있어 
나는 그 애가 떠난 뒤 몇 년이 지나고 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났어도 
아직 제대로 남자를 마주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 상실의 고통이 어느 정도 씻겨 내려갔다 믿었어도 
비슷한 향수 냄새를 맡거나 툭 튀어나온 목의 결후같은 걸 바라보다가 보면 
그 사소한 요소들이 바늘처럼 내 기억의 주머니를 툭 터뜨려 
나로 하여금 그 이성과 그 애의 얼굴을 겹쳐보게 만드는 것이다. 

아직 내가 누군가를 또다시 사랑하는 게 무서운 건 
내가 열일곱 살에서 영원히 멈추어버린 그 아이를 아직껏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이 트라우마를 똑바로 직시하고 해소하려 노력하지 않는 이상 
열일곱 겨울에 못박혀 있는 내 어떤 부분이 영원토록 성인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나 역시 알기 때문이다. 

나와 어떤 관계의 종결점도 맺지 않고 그렇게 사라져버린 그 애 때문에 
어딘가 정착할 듯 말 듯 애매하게 떠돌고 있던 그 애와 나의 관계성이 결국은 그 모호한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앞으로 성장하고 나아가 정착하려는 내 무의식적인 부분을 일부러 붙잡아 그 열일곱에 속박해 두려 하고 있음을 
몸만 어른이 된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애.txt 







그 애. 

우리는 개천쪽으로 문이 난 납작한 집들이 게딱지처럼 따닥따닥 붙어있는 동네에서 자랐다. 그 동네에선 누구나 그렇듯 그애와 나도 가난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내 아버지는 번번히 월급이 밀리는 시원찮은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그애의 아버지는 한쪽 안구에 개눈을 박아넣고 지하철에서 구걸을 했다. 내 어머니는 방 한가운데 산처럼 쌓아놓은 개구리인형에 눈을 밖았다. 그애의 어머니는 청계천 골목에서 커피도 팔고 박카스도 팔고 이따금 곱창집 뒷방에서 몸도 팔았다. 우리집은 네 가족이 방두 개짜리 전세금에 쩔쩔맸고, 그애는 화장실 옆에 천막을 치고 아궁이를 걸어 간이부엌을 만든 하코방에서 살았다. 나는 어린이날 탕수육을 못 먹고 짜장면만 먹는다고 울었고, 그애는 엄마가 외박하는 밤이면 아버지의 허리띠를 피해서 맨발로 포도를 다다다닥 달렸다. 말하자면 그렇다. 우리집은 가난했고, 그애는 불행했다. 

가난한 동네는 국민학교도 작았다. 우리는 4학년때 처음 한 반이 되었다. 우연히 그애 집을 지나가다가 길가로 훤히 드러나는 아궁이에다 라면을 끓이는 그애를 보았다. 그애가 입은 늘어난 러닝셔츠엔 김치국물이 묻어있었고 얼굴엔 김치국물 같은 핏자국이 말라붙어있었다. 눈싸움인지 서로를 노려보다가 내가 먼저 말했다. 니네부엌 뽑기만들기에 최고다. 나는 집에서 국자와 설탕을 훔쳐왔고, 국자바닥을 까맣게 태우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사정이 좀 풀려서 우리집은 서울 반대편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친척이 소개시켜준 회사에 나갔다. 월급은 밀리지 않았고 어머니는 부업을 그만두었다. 나는 가끔 그애에게 편지를 썼다. 크리스마스에는 일년동안 쓴 딱딱한 커버의 일기장을 그애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애는 얇은 공책을 하나 보냈다. 일기는 몇 장 되지 않았다. 3월4일 개학했다. 선생님한테 맞았다. 6월1일 딸기를 먹었다. 9월3일 누나가 아파서 아버지가 화냈다. 11월4일 생일이다. 그애는 딸기를 먹으면 일기를 썼다. 딸기를 먹는 것이 일기를 쓸만한 일이었다. 우리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애 아버지는 그애 누나가 보는 앞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나는 그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그애는 이따금 캄캄한 밤이면 아무 연립주택이나 문 열린 옥상에 올라가 스티로플에 키우는 고추며 토마토를 따버린다고 편지를 썼다. 이제 담배를 배웠다고 했다. 나는 새로 들어간 미술부며 롯데리아에서 처음 한 미팅 따위에 대해 썼다. 한번 보자, 만날 얘기했지만 한번도 서로 전화는 하지 않았다. 어느날 그애의 편지가 그쳤고, 나는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고3 생일에 전화가 왔다. 우리는 피맛골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생일선물이라며 신라면 한 박스를 어깨에 메고 온 그애는 왼쪽다리를 절뚝거렸다. 오토바이사고라고 했다. 라면은 구멍가게 앞에 쌓인 것을 그냥 들고 날랐다고 했다. 강변역 앞에서 삐끼한다고 했다. 놀러오면 서비스 기차게 해줄께. 얼큰하게 취해서 그애가 말했다. 아냐. 오지마. 우울한 일이 있으면 나는 그애가 준 신라면을 하나씩 끓여먹었다. 파도 계란도 안 넣고. 뻘겋게 취한 그애의 얼굴 같은 라면국물을. 

나는 미대를 졸업했고 회사원이 되었다. 어느날 그애가 미니홈피로 찾아왔다. 공익으로 지하철에서 자살한 사람의 갈린 살점을 대야에 쓸어담으면서 2년을 보냈다고 했다. 강원도 어디의 도살장에서 소를 잡으면서 또 2년을 보냈다고 했다. 하루에 몇백마리의 소머리에 징을 내려치면서, 하루종일 탁주와 핏물에 젖어서. 어느날 은행에 갔더니 모두 날 피하더라고. 옷은 갈아입었어도 피냄새가 배인거지. 그날 밤 작업장에 앉아있는데 소머리들이 모두 내 얼굴로 보이데.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애는 술집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나직하게, 나는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는 걸까. 

그애가 다단계를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만나지마. 국민학교때 친구 하나가 전화를 해주었다. 그애 연락을 받고, 나는 옥장판이나 정수기라면 하나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취직하고 집에 내놓은 것도 없으니 이참에 생색도 내고. 그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절이 바뀔 때면 가끔 만나서 술을 마셨다. 추운 겨울엔 오뎅탕에 정종. 마음이 따뜻해졌다. 

부천의 어느 물류창고에 직장을 잡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고등학교때 정신을 놓아버린 그애의 누나는 나이차이 많이 나는 홀아비에게 재취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애가 둘인데 다 착한가봐. 손찌검도 안하는 거 같고. 월급은 적어. 그래도 월급나오면 감자탕 사줄께. 

그애는 물류창고에서 트럭에 치여 죽었다. 27살이었다. 



그애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였다. 한번도 말한 적 없었지만 이따금 나는 우리가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손도 잡은 적 없지만 그애의 작고 마른 몸을 안고 매일 잠이 드는 상상도 했다. 언젠가. 난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을까. 그 말 뒤에 그애는 조용히 그러니까 난 소중한 건 아주 귀하게 여길꺼야. 나한텐 그런 게 별로 없으니까. 말했었다. 그러나 내 사랑은 계산이 빠르고 겁이 많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애가 좋았지만 그애의 불행이 두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 수도 있었다. 가난하더라도 불행하지는 않게. 







그 해 새벽.txt 

내가 살던 고향은 새벽이 유난히 짙었다. 동네 옆구리에 낀 바다가 새벽만 되면 해모(안개)를 짙게 끌어올렸다. 
해모가 내려앉은 조용한 새벽의 동네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 녀석과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새벽이 되면 아파트 입구에서 만나 시덥지않은 놀이를 즐겼다. 

하늘에 뜬 별을 누가 먼저 세나, 주차된 자동차들의 번호판에 숫자 7이 몇개나 있을까 같은. 

우리는 그저 우리의 새벽이 해모에 잡아먹히는 것이 싫었다. 
나와 그녀석은 아주 어렸을 때 부터 빤스 한장만 걸치고 동네 절에서 찬물로 등목을 하며, 
법당에 놓인 다과를 몰래 집어먹고 놀았다. 
절 한 가운데에 위치한 아주 커다란 종이 있었는데, 햇볕이 뜨거운 날이면 그 안에 들어가 종 벽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 
무슨 노래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녀석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다 떨어진 슬리퍼를 신고 동네 여기저기를 쏘다녔는데, 
고모는 항상 그 모습을 보고 녀석과 놀지 말라고 나를 꾸지람 했다. 
나는 오히려 그녀석의 다 떨어진 슬리퍼가 좋았다. 
만약 녀석이 때깔 고운 나이키 운동화를 신었다면, 나는 녀석을 좋아하지 않았을 거다. 
내 신발은 항상 메이커가 없는 얇은 운동화 였으니까. 

너희 엄마 야? 그날은 처음으로 그 녀석에게 돌맹이로 얻어맞은 날이었다. 
어느날 늦은 밤에 큰 상가 뒷골목에서 그 녀석 엄마를 본적이 있었다. 
빨간 불빛이 새어나오는 유흥주점 앞에서 목욕탕에서나 쓰는 플라스틱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 다음날 그 녀석을 보자마자 나도모르게 저 말이 튀어나왔다. 녀석은 힘도 셌다. 
돌맹이를 맞고 씩씩대는 나를 크게 넘어뜨리고 도망가는 녀석을 우리 오빠가 잡아다가 한바탕 패주었다. 

그날 저녁 나는 집에 들어가 되려 오빠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곤 저녁밥을 먹고서 몰래 나가 아파트 입구에서 새벽이 될 때 까지 그녀석을 기다렸다. 
그 때 나는 아홉살이었다. 

나는 열아홉이 될 때 까지도 늘 같은 자리에서 그 녀석을 기다렸다. 
십년이 넘도록 우리의 새벽은 여전히 짙었다. 
우리는 항상 손을 잡고 바닷가를 뛰어다니며 온 몸에 해모를 묻혔다. 
나는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늘 어렸다. 그리고 우리는 늘 새벽이었다. 
나른한 오후에 한수원 사택 옥상에 몰래 올라가 햇볕을 맞으며 선처럼 가만히 죽은 듯이 누워있을 때에도, 
우리는 새벽이었다. 
나는 가끔 우리가 혹시 남매는 아닐까 생각했었다. 녀석에게 그걸 말 했을 때 녀석은 크게 웃기만 했다. 
나는 분명히 그 녀석이 속으로 '그래 그럴지도 몰라'라고 생각했다고 믿었다. 

고삼의 반틈을 그녀석과 새벽을 즐기는 것으로 보내고, 
우리가 무얼 하며 돈을 벌어먹고 살지 고민하게 된 것은 여름의 한복판 이었다. 
그해 여름엔 비가 많이 왔다. 어쩌면 올해 여름이 우리 인생일지도 몰라. 내가 말했다. 

그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녀석은 노래를 하고 싶어했다. 
솔직히 그녀석의 노랫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았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나는 녀석에게 우리가 놀던 절에 가자고 졸랐다. 햇볕이 뜨거우니, 종 안으로 들어가자고. 

그 녀석은 내가 알아 듣지 못하는 외국 노래를 계속해서 불렀다. 
종 벽에 기대면 종의 반 허리 에도 안 닿던 우리 키가 10년 새에 종 끄트머리까지 부딪칠 정도로 자랐다. 
우리는 무릎을 굽혀 불편한 모양새로 좁은 종 안에 찌그러져 있었다. 그녀석은 불편한 기색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그녀석은 나의 제국이었다. 나는 녀석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했다. 
녀석에게서 어떤 감정에 대한 대답을 한번도 듣진 못했지만 
그녀석도 분명히 날 사랑하고 있을거라고 한번도 믿지 않은적이 없었다. 
손을 잡고 새벽의 해모 속을 달리는게 사랑이라고 믿었으니까. 

우리는 그 후에도 이따금씩 새벽에 만났다. 
하루는 동네 통닭집 오토바이를 몰래 훔쳐다가 바닷가를 밤새 달리기도 했고, 
한벌뿐인 교복을 입은 채로 얕은 바다에 들어가 뻘에 박힌 조개를 주웠다. 
용돈이 넉넉해서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여유롭게 만나고, 
비싼 레스토랑 음식을 먹으며 부모님 눈을 피해 여관방에 들락거리는 한수원 사택 애들보다는 우리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서른살이 될 때 까지 서로 결혼을 못했다면 그땐 나랑 결혼하자. 
졸업식을 앞둔 어느날에 내가 말했다. 

나는 돈도 엄청 많고 화장실이 세개 있는 집에 사는 몸매 좋은 여자랑 결혼할거야. 서른이 되기 전에는 꼭. 

그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죽고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졸업식날 까지 우리는 한번도 새벽에 만나지 않았다. 

졸업을 하자마자 그녀석은 한수원에 취직했다. 보수가 꽤 많은 모양이었다. 
내가 번화가로 일을 하러 나갈 때 마다 가끔씩 녀석을 마주쳤다. 
옷도 좋은 옷을 걸치고 핸드폰도 고장나지 않은 최신 핸드폰을 가지고 다녔다. 
적어도 녀석이 가난하게 살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다음해에 호주로 떠났다. 어느정도 자리가 잡힌 아버지가 나와 오빠를 데려갔다. 
호주에 산지 3년이 지나도록 나는 한국어밖에 할 줄 몰랐다. 
만일 그녀석이 열아홉때 종 안에서 불렀던 노래의 구절이 생각났다면, 영어를 좀 더 열심히 공부했을지도 모르겠다. 

스물다섯살이 되던 해, 동창의 동창을 건너 건너 받은 고등학교 동창회 소식에, 
주저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연히 그녀석을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새벽이 없어진지 자그마치 5년이었다. 
5년. 

동창회의 밤이 깊어갈 수록 비만 줄기차게 내렸고, 그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에서야 전해들은 이야기로 알았다. 내가 몇주 전 아침 호주인들과 답답한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때, 
그 녀석은 원자로 안에서 냉각수를 몸에 적시며 일했다. 
그 녀석은 피폭(被曝)되었다. 

호주로 돌아가고 싶었다. 녀석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새벽은 오늘도, 내일도 돌아온다. 
정확히 말하면, 도망치고 싶었다. 

우리의 관계가 시간이라면 우리는 새벽 세시였다. 
하루 중 가장 어둡고 짙을 때 우리는 적어도 사랑은 아닐지라도 교감했다. 
나는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석 처럼 불행 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함께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한 기대도 한 적 없다. 그래도 이건 아냐. 

내가 그 뒤로 그 녀석의 죽음 소식을 들을 때 까지 녀석을 한번도 찾아가지 못한 이유는, 
우리는 새벽에 함께 있어야 비로소 사랑을 하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이제 영영 새벽을 달릴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그래서 나도 아팠다. 
누군가를 아픔으로 보듬고 슬픔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지독한 일이었다. 

행복의 원칙은 의외로 간단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불행이 생기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나 그 행복의 원칙이 태어날 때 부터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그녀석이었고, 녀석을 사랑한 나였다. 
그 녀석은 피부가 뒤집어지고 머리털이 다 빠진채 암세포에 온몸을 잡아먹혀 죽어갔다. 
그 녀석이 가장 행복했을 때는 언제일까. 

아마도, 그 해 여름에 종 안에 들어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 노래를 불렀을 때라고 믿고싶다. 
서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그 녀석은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 어딘가에서 화장실이 세개 있는 집에 사는 몸매 좋은 여자와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녀석의 제국은 이제 군주가 없고, 새벽의 해모를 맞으며 뛰어다니는 고등학생도 없고, 
종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없지만 내가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는 아직도 종 안에서 그 해 새벽을 달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발견했다. 대못으로 날카롭게 긁어 놓은 녹슨 낙서 자국을 종 안에서. 

'새벽으로 가자' 








그애, 두꺼비.txt 





80년대 중반에 지어진 아파트들을 지나다 보면, 반지하도 아닌, 지하도 아닌, 지면에 닿은 애매하게 작은 창문이 눈에 띈다. 바닥에 엎드려 눈동자만 살짝 치켜뜬 두꺼비처럼, 지나는 사람들을 노려보던 그곳은 그 애의 보금자리였다.

중학교 시절, 오늘은 얼굴을 맞지 않았다며 방긋 웃으며 멍든 팔을 가리던 그 애. 야윈 손가락에 채 가려지지도 않는 거대한 자국이지만 웃는 모습이 참 빛나서 언뜻 상처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 그래그래 몇 대 맞는 게 뭐가 대수냐 우리집가서 라면이나 끓여먹자. 계란도 넣어줄게. 아 김치는 없다. 

엊그제는 맞기 싫어서 책상 밑으로, 어제는 살고 싶어서 화장실로, 오늘은 살기도 싫어서 현관 문을 열었다고 했다. 신발도 못 신고 뛰쳐나간 그 애를 일주일 뒤에나 만날 수 있었다. 그 애는 치수가 30문은 커 보이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 야야 나 집 생겼다 먹을 거 좀 사서 놀러 와라

용돈을 긁어모아서 같이 먹을 컵라면 2개를 샀다. 그 애가 날 데려간 곳은 완공된 지 얼마 안 된 신식 아파트 단지였다. 라면을 손에 쥔 내 모습이 부끄러워 급하게 라면을 가방에 숨기느라 스티로폼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스티로폼 찌그러지는 소리가 두꺼비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아파트 앞 파란 잔디밭에는 어두운 두꺼비 수백 마리가 번쩍 솟은 아파트를 등에 지고 있었다.

우리는 두꺼비 뱃속으로 들어갔다.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어 화단을 기어 두꺼비의 눈으로 들어갔다. 구두가 내 눈앞에서 덜렁댈 때마다 그 애는 멋쩍게 웃으며 경비실 앞에 놓인 구두를 빌려 쓰고 있다고 했다. 멍자국의 희미해졌지만, 손가락은 더욱 야위었다. 번듯한 신식 아파트 아래 두꺼비 뱃속에서 그 애는 그렇게 살았다. 상석이라며 양보해 준 자리에는 에어컨 박스가 깔려있었다. 익지도 않은 생라면을 허겁지겁 삼키는 모습을 보고 남은 라면 사발을 그 애의 발치로 슬며시 밀었다. 찌그러진 사발에서 짭짤한 라면 국물이 한 방울씩 또르르 흘러내렸다.

계부가 잠이 드는 대낮에 그 애는 집으로 돌아갔다. 운이 좋으면 며칠 동안 집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런 날은 멀끔한 모습으로 창밖으로 손을 흔들곤 했다. 학교에선 그 애를 찾지 않았다. 이런 무관심에 그 애는 한참을 웃었다. 두꺼비 뱃속이 쩌렁쩌렁 울렸다. 많이 울렸다. 웃고 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조금 울었는데, 조금 운다고 조금 슬픈 건 더더욱 아니었다.

가끔 용돈이 생기면 라면이며, 빵이며 먹을거리를 가지고 그 애를 찾았다. 그 애는 착실하게 살림살이를 늘려나갔다. 상석에 있던 에어컨 박스는 스프링 튀어나온 매트리스로, 한쪽 구석에는 20번을 넘게 돌려야 불이 켜지는 부르스타가, 그 애는 여기가 두꺼비 위장 속이라고 했다. 빗물이 가끔 고여 침 삼키듯 흘러온다고 했다.

-집에서 냄비랑 라면 가져왔다. 라면 먹고 가라

그 애는 가끔 라면을 부숴먹었다. 밤에는 부르스타 켜는 소리가 건물로 퍼진다고 했다. 그 애는 눈물이 나면 눈을 꽉 눌렀다. 문득 웃다가도 입꼬리를 꾹 눌렀다. 소리가 나면 들킬까봐, 울다가 눈을 누르던 그 애는 슬픔이 넘치면 잠겨 죽을 거라고 했다.

-기쁨도 똑같다. 뭐든지 넘치면 숨도 못 쉬고 죽는 거라. 아직 죽을 만큼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아서 내가 살아있는거다.

그 애는 죽는 게 죽기보다 싫다고 했다. 계부가 주먹을 들면 책상에 숨었고, 몽둥이를 집어 들면 화장실로 숨었고, 휘두르지도 못할 식칼을 집어 들면 현관을 뛰어나와 제 발로 두꺼비 뱃속으로 들어갔다. 

가끔은 파티를 했다. 값싼 불량식품, 소주병을 늘어두고 한참을 먹다. 그리고 새벽이 되면 경비 눈에 들키지 않게 잔디밭에서 뒹굴었다. 높게 솟은 아파트 벽을 걷고 또 걸었다. 그 애는 어느 집에서 편안하게 잠든 아이와 평행하게 누워 또 그렇게 조금 울었다. 그날 밤 나는, 그 애를 보며 입안 잔뜩 울음을 머금었다가 술과 함께 삼켰다.

장마가 왔다. 난 개도 안 걸리는 여름 감기에 걸려서 일주일간 누워있었다. 장마가 시작되는 날, 장마 핑계로 술을 평소보다 조금 더 먹은 계부는 또 칼을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그 애는 걸어서 집을 나왔다. 다음날, 장마에 지하 주차장이 침수된 날, 아파트 단지엔 구급차가 왔다. 그 다음날, 신문에는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가 1면에 실렸다. 구석쯤 가출 청소년의 사망 사건도 올라갔다. 그 날, 두꺼비 위장에서 가만히 소화되던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처에 고이는 슬픔이라서 그리도 깊었을까. 

넘쳐서 아픈 슬픔이 참으로 길었다. 한참 내려서 목구멍까지 차올라 눈물로 터져 나올 만큼










그애, 피아노.txt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밤이되면 잠을 자는 것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내가 깨어있는 동안 학교에서 무얼 하고 밥으로 어떤 걸 먹고누구와 마주치고 스쳐가는지는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마치죽은 듯이 살았다. 



내가 겪는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버텨왔던 정신과육신이 한계에 맞딱드린순간. 

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새학기가 시작된지 얼마 안된 날, 학급 번호 순서대로 자리를 배정했을 때그애와 나는 처음으로 짝이 되었다. 

그날은 학생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담임선생님께 내는 날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 종이의 가족관계 칸에는 할머니와 동생의 이름 뿐이었다. 

슬쩍만 둘러보아도 나같은 아이는 없었다. 



짝이 된 그애와 나는 태어난 날이 같았다. 며칠이 흐르고 나서야뜬금없이 그애가 먼저 말했다. 

'너 내생일이랑 똑같다.' 사실 그때니 종이 봤어. 

라고 작게 덧붙인 말은 안 듣는게 나았다. 

속에서알 수 없는 무언가가 벅차올랐다. 

너랑 나는 같은 지역에서 한날에똑같이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왔는데, 어째서, 난, 나는, 왜? 



'그럼 우리 엄마아빠 없다는 것도 알겠네' 
한숨처럼 터져나온 말에 그애는 적잖이 당황했다. 

우리의 첫번째짝 생활 한달동안 그애는 두번다시 나에게 말 걸지 않았다. 

그러나나는 수업시간에도 쉬는시간에도 체육시간에도 그애만 봤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고, 밤이 되면 잠드는 내 생활에 의미있는 일이 생긴 것이었다. 

그애의 짝으로 교실에 존재하는 일. 



다음달이 되어 제비뽑기로 짝을 다시 뽑았을때, 나와 그애는 또 짝이되었다. 

그애는 어느날 내 핸드폰번호를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알려줬던게 조금 창피했다. 

그애는 심심할때면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항상 대화의 마지막에는 '잘자'라고 인사했다. 

그애와 대화할때 나는 비로소 가장 열일곱살 같았다. 

내가 살아온 16년은, 달력이 몇장 뜯겨나갔는지 추석이 몇번 지나갔는지 의식하지 않는 세월이었다. 

해가 바뀌어 반이 바뀌면 반이 바뀌는 대로, 그냥 그렇게 살았으니까. 

나에게 나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애는 나의 전부를 이해하고 싶어 했다. 

그애가 알리 없는 외로움과 서러움을. 그애가 그걸 평생 이해 못하길 바랬다. 

그애가 나에게 '힘내'라고 말할때 마다 나는 죽고싶었다. 

차라리 그애를 알기 전이 나았다고 생각했다. 

따지듯이 너 나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을때 그애는 주저없이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음악실로 갔다. 그 후로도 우리는 교회나 문화센터같이 피아노가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어느 목요일의 점심시간, 음악실에서 그애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을때, 

나의 할머니는 동네 뒷산에서 실족사했다. 

내가 상복을 입고 영정앞에 가만히 앉아있던 3일동안 그애는 나를 보기만 하고 돌아갔다. 

우리가 그 뒤로 피아노를 찾아 가는 일은 영영 없었다. 

우리는 한번도 짝이 되지 않은적이 없었다. 적어도 1학기 동안은. 

유난히 더웠던 그 해 여름이 지나고 2학기가 되었을때, 그애는 내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늘 혼자 앉았다. 



우리 동네에서 그애의 집까지는 버스로 정확히 20분 거리였다. 

나는 처음으로 그동네에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20분동안 울었다. 



인적 드문 버스 정류장에서 한시간 30분동안 앉아있었을 때, 그애가 왔다. 

겨우 두살 난 동생을 업고 나타난 그애는 엄마가 우울증에 걸리셨으니 당분간 학교에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때가 10월이었다. 

'우리 생일이 되기 전엔 꼭 갈게' 그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애 품에 안겨 울었다. 

내가 이 지옥에 태어난지 17년만에 생일이라는게 생겼다. 

10월부터 12월까지의 시간은 마치 일천겁의 시간 같았다. 



그리고 11월에 그애의 두살배기 동생이 내 할머니가 간 길을 따라 멀리 갔다. 

그애의 소식을 더이상 들을 수 없었다. 

기다렸던 우리의 생일날은 최악이였다. 

열두살 여동생이 동네 빵집에서 케이크를 몰래 가져오다가 파출소로 잡혀갔다. 

'12월에 언니 생일이다.' 말한 내 잘못이었다. 

동생의 작은 손을 잡고 파출소에서 나오면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밤이 되면 잠이 드는 일도 더이상 없을거라고 동생에게 말했다. 

연락 오지 않는 아빠의 소식을 기다리며 매일 우편함 앞에 서있는 일도, 

할머니가 굴러 떨어진 뒷산 바위에 올라가는 일도, 내 생일이라고 케이크를 훔쳐오는 일도 

절대로, 절대로 다시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18층짜리 낡은 아파트의 옥상에 섰을 때 동생은 울었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더이상 그애의 소식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우리의 생일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태어나서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느낌이었다. 

심장을 조이고 피가 터지는 느낌이 내 숨통을 졸랐다. 

내 소매를 붙들고 '언니 다시는 안그럴게'라고 울부짖는 동생을 안고 도망치듯 옥상에서 내려왔다. 



그 다음날 부터 독감에 걸려 열이 39도까지 치솟았고 머리 끝까지 덮은 이불 안에서 내 뜨거운 숨이 나를 감쌌다. 

나는 아직도 그것이 독감이였는지, 사람들이 말하는 그 열병이였는지 모르겠다. 

며칠 후 우리집 우편함에 꽂혀있는 손편지를 받고서 싹 나은걸 보면 아마도 열병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했다.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꼭 갈거라고 했다. 그리고 잘자라는 말. 편지 내용은 그뿐이었다. 



그애의 편지 한통은 나를 다시 살게 할 충분한 이유였다. 

어쩜 이렇게 운이 없을수가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우리는 힘든길로만 흘러갔다. 

내 발로 걷지도 않았는데 그저 그렇게 흘러갔다. 

어쩌면, 그런 수많은 불운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행운이 되어주라는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그 후로 823일동안 허공에 대고 대화를 했다. 

나는종종 그애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없는 번호라는 안내 메시지를 들으며 하루를 얘기했다. 

가끔은 그애가 죽어버린 건 아닌지 생각했다. 



스무살이 되던 해, 나는 대학교 입학을 포기했다. 당장 등록금을 댈 길이 없었다. 

그래도 그 학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면 그애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학교 교정에 개나리가 막 필 무렵, 그애를 만났다. 

뜨겁고 약하고 하얗던 내 첫사랑.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한참 쳐다보다가 그애의 집으로 갔다. 3년만이었다. 



이곳 저곳, 빨간딱지가 안붙은 곳이 없는 그애의 집에는 차갑고 노란 공기만 맴돌았다. 

그애 엄마의 꿈이자 그애의 꿈이었던 피아노에도 끔찍하게 들러붙어 있는 빨간딱지를 보고 

더이상 그애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대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애는 피아노 앞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그렇게 있었다. 내가 살기에는 너무 괴로운 삶이었다. 



신이 정말로 있다면, 내가 태어난데에도 진실로 좋은 이유가 있느냐고 묻고싶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였다. 



그애가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 나에게 딱 편지 두통을 보내왔고, 

나는 그애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만 2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꼬릿말에는 항상 잘자라고 썼다. 

그애가 보내온 첫 편지는 그애가 상병이었을 때, 다리를 다쳐 많이 아프다는 내용의 편지였고, 

마지막 두번째 편지는 대학교 4학년일 때, 사회에 나가기 두렵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나는 그애의 빨간딱지 가득한 집에 갔을 때 이미 알았다. 

그애를 이 삶에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란 걸. 



지금도 난 잘 모르겠다. 

그애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도. 

그저 가끔 생각한다. 내가 그애에게 보낸 편지에 썼던 말을. 



니가 만일 그곳에서 총을 맞아 한쪽 팔을 절게 된다해도, 한손으로 치는 서툰 피아노소리라도 꼭 다시 듣고 싶어. 








*혹시라도 문제 있으면 알려줘!
대표 사진
익인1
스크랩해놓구 나중에 읽어도 됩니까,, 지금은 졸려서ㅠ 지우지 말아줘잉🥺
3년 전
대표 사진
글쓴이
응!!! 천천히 봐!!!
3년 전
대표 사진
익인2
세 편 읽었는ㄷ 너무 슬퍼서 못 읽겠다 ㅎㅎ ㅠ
3년 전
대표 사진
글쓴이
ㅠㅠ 나도 보고 눈물났어 ㅠㅠㅠ
3년 전
대표 사진
익인3
혹시 지금 있니? 이 글 지워줄 수 있을까?
원작자 지인인데 06년도에 쓴 건데 커뮤에 도는 걸 지금 알아서 더는 커뮤에 도는 걸 원치 않다고 지워달라고 하셔

1년 전
대표 사진
익인4

1년 전
로그인 후 댓글을 달아보세요


이런 글은 어떠세요?

전체 HOT정보/소식팁/자료기타댓글없는글
멜론 이 광고 너무 좋다 ㅠ
6:19 l 조회 1
어제 많이 먹었더니 누워도 배가 볼록하네1
6:17 l 조회 4
헤헤 신입익 인센티브 들어왓다
6:17 l 조회 2
아 배고파 미치게ㅛ네 하 뱃속에 거지가 들어왔어요 1
6:15 l 조회 4
확실한 건 커뮤에 뭘 진지하게 물어보면 안됨3
6:14 l 조회 16
수영배우는 익 여자들 수영복 뭐입어? 원피스 삼각?사각?
6:13 l 조회 9
이성 사랑방 애인이랑 싸워서 약속 안나갈러고 1
6:12 l 조회 10
혹시 버거킹 직원이나 알바있니..??
6:12 l 조회 11
엄빠 두분다 은퇴하시고 집에계신데 새언니가 애를 ㅈ나맡긴다10
6:06 l 조회 122
익들아 너넨 친구 언니나 오빠한테 존칭 제대로 써?5
6:06 l 조회 27
부모님 돌아가신지 2년됐는데 아직 유산 못 받았어!!
6:05 l 조회 66
근데 난 백수일때도 좋았고 일하는것도 좋아5
6:05 l 조회 36
면허증 사진은 여권 처럼 귀 다 까야하잖아
6:04 l 조회 4
돌싱 상사가 꼬시는데 나 좀 말려주라 11
6:04 l 조회 22
2주만나고 차였는데2
6:02 l 조회 61
학생 때 엄마나 아빠가 너무 어리면 ㄹㅇ 뒷말 나옴?6
6:02 l 조회 61
재수하면서 알바 ㄱㄴ하나..10
5:56 l 조회 45
...치과 아침 일찍 다녀올랬는데.... 오픈이 10시..
5:55 l 조회 11
공시 공부 밤낮 바꿔서 하는 익들 있니2
5:54 l 조회 64
파데 몇 펌프쓰니??6
5:48 l 조회 49


12345678910다음
일상
이슈
연예
드영배
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