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6월 독도폭격연습때
한국어민 수십여명 사망·실종
미군 기밀 조사보고서 작성해
일본 독도 영유권 주장 근거
샌프란시스코 조약보다 앞서
“리앙쿠르암(독도)이 한국의 일부라는 것이 분명히 확립됐음에도 불구하고….”
1948년 독도폭격사건 직후 미군 당국이 작성한 기밀 조사보고서에 독도가 ‘한국의 일부(a part of Korea)’로 명확히 확립돼 있었다는 기록이 처음 확인됐다.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들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해 온 상황에서, 그보다 앞선 시기 미국이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확립된 인식을 기록한 문서가 나온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돼 있던 독도 관련 미공개 기록 222쪽을 새로 발굴해 7일 공개했다. 자료는 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가 NARA에서 수집해 재단에 기증한 것으로, 독도폭격사건에 관한 미군의 공식 조사 문서철과 그 안에 편철된 한국 측 문서 5건으로 구성됐다. 독도폭격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6월 8일 미 공군이 독도를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하던 중 한국인 어민 수십여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건이다.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미 극동공군사령부(FEAF)가 1948년 6월 24일 작성한 기밀 조사보고서 ‘독도폭격사건 보고서(Report on Bombing of Liancourt Rocks)’다. 보고서는 “1947년 9월 리앙쿠르암이 한국의 일부라는 것이 분명히 확립됐음에도(definitely established) 이것이 일반에 알려지지 못해 일본의 한 섬으로 인식됐다”고 기록했다. 폭격 연습장을 사용하기 15일 전에 제8군 사령관과 주한미군사령관(USAFIK), 극동해군사령관 등에게 통지할 책임이 극동공군에 있다는 규정도 명시했다. 통보 대상을 주한미군 계통으로 정한 것은 미군이 독도를 일본이 아닌 한국 관할권 영토로 판단했다는 의미다.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일본이 포기할 영토에 독도를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과, 그 협상 과정에서 나온 드 제안(1949년), 러스크 서한(1951년)을 들어 미국이 독도를 일본 관할로 봤다고 주장해왔다. 홍성근 동북아재단 독도실장은 “이번 보고서는 드 제안보다 1년 앞선 시점에, 대외 선전 목적이 없는 군 내부 기밀문서에 독도의 영유권이 한국에 있다는 미국의 확립된 인식이 기록됐다는 점에서 사료적 신뢰도가 높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합국 총사령부 지령(SCAPIN) 제677호(1946년), 1947~1949년 미국 측 대일강화조약 초안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다뤄 온 흐름과도 일맥상통한다”고 강조했다.함께 발견된 문서철 안에서는 사료가 부족했던 1945~1948년 한국의 독도 영유권 행사를 입증하는 한국 측 문서 5종도 발견됐다.
이날 서울 영등포구 독도체험관에서 열린 기증식에 참석한 전 교수는 “자료가 방대하고 디지털화가 안 된 상황에서 하나하나 검색해 확인하며 사료를 수집했다”면서 “자료가 잘 활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기획전시를 통해 독도체험관에서 이 사료를 공개할 예정이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1/0002802907?sid=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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