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미운 사람
마케팅의 기본은 고객이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파악하는 것이다. 고객의 행동에서 어떤 물체에 대한 필요성을 나타내는 신호가 나타나면, 그것을 가장 재빠르게 잡아내는 것이 성공의 필승법인 것이다. 그렇기에 유혹하고자 하는 고객을 잘 관찰하는 것이 옳긴 하지만...
"...저렇게 노려보고 있으면 좀 부담스러운데."
동민은 중얼거리며 앞에 놓인 거울로 자신의 뒤를 몰래 바라본다. 동민의 뒤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민을 바라보는 현민이 있다. 동민이 슬쩍 뒤를 돌아보자, 그 큰 눈이 더 커지더니 재빨리 고개를 숙인다. 동그란 정수리를 보며 동민은 허, 하고 웃는다. 어제 그렇게 패기넘치게 유혹한다던 놈은 어디가고, 쩔쩔 매는 어린애가 하나 있네. 싱겁긴. 역시 어려, 라고 생각하며 여유 넘치는 동민과는 달리 현민은 패닉이다. 이미 자신의 수는 다 알고 있는데, 똑같은 방법으로 접근했다가는 유혹은 커녕 미션 실패다. 라고 말할 게 뻔한 동민이다. 에이씨, 내가 여자면 차라리 야한 옷이나 입고 유혹하겠는데 말이야. 으아아아!!
"괴로운 청춘! 모닝커피를 마시고 힘을 내!"
현민의 앞에 놓여진 아이스 커피. 현민이 눈을 들어 보니, 오늘도 대형견처럼 보이는 경훈이 싱긋 웃는다. 이번 주는 기획팀 쪽으로 갔다며? 고생하네, 한 잔 마셔요!! 경훈은 화이팅, 하고 현민에게 주먹을 흔들어 보인다. 현민은 이 사람처럼 구는 게 동민 취향인가, 생각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계산된 애교를 단번에 간파한 동민의 눈빛이 다시 한 번 생각난다. 뭐야, 이 미연시 최종 보스 같은 인간은!!! 현민은 책상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서 통곡한다. 경훈은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고 현민이 통곡하자 당황해서 쩔쩔맨다.
"ㅇ, 왜 그래요. 커피 알레르기 있어요? 레모네이드로 바꿔올까요?"
아니면 쌍화차?? 쓰러진 주인을 맴도는 큰 개처럼 구는 경훈이다. 그런데 그런 경훈을 빤히 노려보는 사람이 있으니, 준석이다. 차마 동민의 흑역사를 얻기 위해 직접 동민에게 접근은 못하겠고, 주변에서 흑역사를 얻을 방법을 생각해 낸 준석은 먼저 경훈에게 접근하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저 인간을 파악해야 하는데... 분석이 힘들다. 저 사람은 전혀 어른 같지도 않고, 행동 패턴이 너무 단순하다. 단순한 게 오히려 분석하기 힘들지, 분석을 할 건덕지가 없으니까. 거기다 준석은 지금까지 경훈과 거의 말을 섞어본 기억이 없다.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성격 탓에, 무의식적으로 경훈을 피해왔으니까. 그래도 한 번 눈 딱 감고 부딪혀 볼 가치는 있겠지. 결단을 내린 준석은 아직도 현민의 옆에서 무릎을 꿇고 이제는 생수가 좋은 거에요?? 라고 낑낑대는 경훈에게 다가간다. 경훈은 거의 울먹거리다가, 준석이 다가오자 응...? 하고 준석을 바라본다.
"경훈씨. 점심식사 같이 하시지 않겠습니까."
이준석 선수, 직구입니다. 직구 쳤습니다. 경훈은 입사 이래로 말을 잘 섞지도 않았던 준석이 갑자기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니. 예상치도 못한 습격에 네? 하고 어리둥절해진다. 경훈이 어벙벙해하자, 준석은 오늘 12시에 먹는 식사를 같이 하잔 말입니다. 라고 약간 짜증을 낸다. 그 말에 괴로워하던 현민도 고뇌를 그만두고 고개를 빠끔히 든다.
"이 대리님이랑... 저랑... 둘이... 점심...?"
"네."
준석은 1단계 실패인가, 싶어진다. 하긴, 친하지도 않고 말도 제대로 안 하는 사람이 갑자기 밥을 먹자고 하면 오케이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참담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한 가지 준석이 간과한게 있다면, 경훈의 알고리즘이다. 낯선 사람? 곧 친해질 사람! 호의를 보이는 사람? 친해질 수 있는 사람! 친해질 수 있는 사람? 좋은 사람! 좋은 사람? 내 사람! 그렇다면 경훈이 낯선 사람에게서 점심식사 제의를 받았을 때 보일 알맞은 반응은?
"그럼 이따 저랑 찹쌀탕수육 먹으러 가여!!!"
정답.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으러 가자고 한다.
"미션 수행은 아직인가?"
스트레이트. 현민은 밥을 먹다가 컥, 하고 사레가 들릴 뻔한다. 영업 1팀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온 현민은, 맞은 편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동민의 말에 격침을 당한 것이다. 큼큼, 하더니 현민은 일단 시장 조사가 먼저죠. 하고 나름 받아친다. 당신이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요, 현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물을 한 모금 들이킨다. 옆에서 경란이 미션이라니? 하고 물어온다.
"어린 인턴 친구가, 차세대 광고인으로써 성공할 발판이 되는 미션을 하나 내줬죠."
"어머, 그래? 동민씨가 무슨 미션을 내줬어, 현민씨?"
내용은 극비, 미션 성공하면 그때쯤이야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동민이 고개를 가로젓자 경란은 참 나, 라고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식사에 집중한다. 동민은 쿡쿡 웃다가 현민을 바라보며 씨익 웃어보인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던 방식은 내겐 안 통할텐데, 자신 있나 꼬맹이. 현민은 입가를 엄지손가락으로 쓱 닦더니 똑같이 웃어보인다. 도전해보라 이거죠, 빠르고 강하게 훅 들어가 보일겁니다. 이제서야 결심이 섰나보다 싶어 동민은 끄덕인다. 이 무언의 대화를 테이블 끝에서 진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숟가락을 탁 내려놓는다.
"먼저들 들어가요, 나 담배 한 대만."
식사가 끝난 후, 동민은 다른 사람들을 먼저 올려 보내고 바깥의 흡연 구역으로 향한다. 그리고 담배를 하나 꺼내 무는데, 뒤에서 누가 동민의 입에서 담배를 낚아챈다. 뭐야. 약간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보니 불퉁한 표정의 진호다. 담배 끊었다더니, 다시 피려고? 동민이 담배 하나를 권하는데, 진호는 담배는 쳐다보지도 않고 동민을 빤히 바라본다. 뭐야, 무슨 일 있어? 동민의 질문에 진호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삐딱하게 선다.
"어쭈, 상사 앞에서 자세 봐라. 차려."
"아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뭐라고? 동민이 반문하자, 진호는 인턴. 하고 짤막하게 한 마디 내뱉는다. 그래도 동민이 고개만 갸웃하고 알아듣지 못하자, 진호는 한숨을 푸욱 내쉰다. 그리고는 동민의 어깨에 팔을 얹는다. 야, 팔에 살쪘냐. 더럽게 무겁네. 동민의 장난스런 타박에도 진호의 표정은 풀릴 줄 모른다.
"요즘 나한테는 딱딱하게 굴더니, 어린 애 하나 들어오니까 귀여운가 보네."
"인턴이니까 챙겨주는 거지."
왜 이눔아, 엉아가 더 어린 동생 챙기니까 질투나냐? 우쭈쭈 - 동민이 진호의 엉덩이를 툭툭 치자, 진호는 짜증을 내며 동민의 손목을 잡아챈다. 그러자 동민도 지금은 장난칠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잠자코 진호를 바라본다. 진호야, 달래듯 진호를 부르자 진호는 눈을 감는다.
"물론 내가 형한테 고백하면서, 아무것도 기대 안한다고 하긴 했어. 앞으로도 친한 형 동생 사이 되어달라고 한 것도 나고, 그걸 오케이 해 준 형한테 고맙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사이 아니여서 내가 뭐라 말할 수 없는 상황인 거 맞는데..."
역시, 오늘도다. 사실 진호가 질투 때문에 동민에게 은근한 투정을 부리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는 일주일에 한번 꼴로 경훈 때문에 이런 말을 하곤 했었다. 이번엔 경훈보다 별 거 없는 현민 때문에 이러다니, 요즘 좀 쌓인 게 있었나 보네. 두 달 전, 진호가 술에 취해 울면서 동민에게 고백을 했었다. 나, 형 좋아한다고. 이 감정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이 관계의 진전을 강요할 생각도 없다고. 그런데 참으려니 자꾸 좋아한다는 말이 목에서 튀어 나올 것만 같아서 말할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그 다음날 술이 깬 진호는 다시 동민에게 말했다. 내가 형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형은 나에 대한 감정이 나와 같지 않은 걸 안다. 그러니 그냥 날 피하지 말고 좋은 형 동생 관계를 깨지 말아달라. 동민은 진호를 잃기 싫어 오케이했다. 그러나 때때로 질투와 치댐을 행하는 진호였고, 동민은 그걸 전혀 피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어장이면 차라리 형을 포기할텡데, 미운데 좋아서 어쩔수가 업써."
동민을 원망스럽게 보며 툴툴대는 진호다. 다시 말투가 어눌해지는걸 보니, 이제 장난을 쳐도 풀리겠다 싶어진다. 삐죽 튀어나온 입을 쿡 찌르자, 아아 하지망!! 하고 앙탈을 부리는 진호다. 그래서, 싫냐? 동민이 짐짓 심술을 부리자, 진호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고개를 젓는다.
"아니, 미워."
널 어쩌면 좋냐, 진호야.
후... 배가 찢어질 것 같다.
준석은 분명 경훈이 찹쌀탕수육만 말한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하지만 경훈이 중국집에 와서 시킨 것은 짬뽕 두 그릇과, 찹쌀탕수육 작은 것 하나와, 후식인 팥빙수 하나였다. 아니, 이제 가을이 되어가는 데 웬 중국집에서 팥빙수람? 벨트가 조이는 걸 느끼면서 호흡이 가빠오는 준석은 심호흡을 하며 경훈을 바라본다. 키가 큰 만큼 위장도 긴건지, 경훈은 자신이 먹다 남긴 짬뽕을 마저 흡입하고 있었다. 대단하다, 진짜.
"여기가, 쩝, 지이인짜 맛찝이래여, 쩝. 헤헤."
내가 진짜, 장동민 그 인간 흑역사 하나 파자고 이런 사람이랑 밥을 먹고 있다니. 준석은 계획을 바꿔버릴까 싶다. 일단 장동민에 대해 정보를 캐기 전에 김경훈과의 친밀도를 높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밥을 먹으면서 경훈의 최근 연애사에 대한 한심한 이야기들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무슨 일주일만에 좋아하는 사람이 2번이나 바뀌었단다. 대애애애단하신 금사빠다. 아니, 장동민이란 인간은 되게 철두철미한 이미지 아니야? 그런데 이런 사람이랑 제일 친해?
"경훈씨가 이렇게 재미있는 분인줄 알았으면, 진작 친해질 걸 그랬어요. 이런 맛집도 덕분에 오게 되고."
"우리 앞으로 완전완전 친해져요!! 헤헤."
그 놈 흑역사만 내가 고이 간직해서 복수할 수만 있다면, 그 때까진 허락해주지 뭐. 준석은 한 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경훈은 입 안에 면을 머금은 채로 흐뭇하게 웃는다. 준석은 애완견에게 맛있는 간식을 주면 이런 반응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준석씨, 다음에는 일식집가서 같이 맥주에 맛있는 거 먹어요! 제가 요환이 형이랑 같이 가는 데가 있거든요? 거기가 진짜 좋아요. 다음에 요환이 형이랑 같이 셋이 가요!"
"아, 좋죠. 그런데 전 경훈씨랑만 갔으면, 좋겠는데..."
경훈만큼이나 실없어 보이는 요환이랑? 댁 하나로 족합니다, 둘은 거절입니다만. 속으로 결사반대를 외치는 준석이지만, 겉으로는 낯선 사람은 좀 그렇다는 듯 준석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수줍게 말한다. 준석의 마음은 이것이었지만, 금사빠 경훈의 머릿속에는 작은 전구가 하나 켜진다.
'...나랑만? 단둘이?'
초록색 전구다.
퇴근하자마자 현민의 손에 이끌려 온 것은, 성인전용 보드까페다. 성인 전용이라고 해서 야시꾸리한 보드게임이 있나 싶어서 기대한 동민은, 단지 주류를 판매해서 성인전용이라는 말에 뻘쭘해진다. 아, 장차장님 그런 분이셨어요? 나 좀 실망이네. 하고 능글맞게 웃는 현민을 보며 동민은 무슨 작전인지 의아해진다. 이 태도는 무슨 계산인거야. 현민은 동민의 꿰뚫는 눈빛을 피하며, 종업원에게 맥주 두 잔과 이상한 이름의 보드게임을 하나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이게 체스 비슷한 게임인데, 더 재밌어요. 체스 둬 보신 적 있죠?"
"장기류는, 다 자신 있어. 어렸을 때 글보다 먼저 배운 게 장기거든."
"다행이네요, 전 상대가 쉽게 지는 걸 싫어하거든요. 저 바둑기사에요."
3단! 하고 잔망스럽게 손가락 세개를 펴 보이며 현민은 웃어보인다. 그런데 뭐 분위기 있는 바나 가서 유혹해줄줄 알았는데, 보드게임하는 곳에 올 줄은 몰랐네. 요즘 대학생들 데이트 코스인가보지? 동민의 말에 현민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게임과 술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죠. 사람의 욕망이나 밑바닥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는 거에요. 장동민이라는 분을 유혹하기 위해서는, 그 분의 깊은 곳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는 다시 예의 순진한 웃음을 짓는 현민이다. 그렇게까지 계산을 했단 말이야?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봤어, 재미있는 친구네. 동민은 현민과의 시간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자신의 예견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낀다. 알바생이 가져다 준 맥주잔을 들며, 현민은 건배를 하자고 말한다. 동민은 씩 웃으며 잔을 든다.
"뭘 위해서 건배?"
"제 매력에 빠져 눈물 지으실 차장님의 미래를 위해서?"
얘 좀 봐라, 하고 동민이 킥킥 웃자 현민은 자신있어요. 라고 잔을 먼저 부딪혀온다. 당돌해서 좋네, 동민이 이렇게 말하며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킨다. 현민은 현민앓이 1단계에 진입하신 겁니다, 라며 입가에 묻은 맥주 거품을 손등으로 쓱 닦는다. 그리고 게임판을 꺼내어 말을 판 위에 정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민에게 메뉴얼을 건넨다. 이해하시는 데 시간 좀 걸리실 거에요. 동민이 룰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 예상한 현민은 천천히 말을 판 위에 놓는다. 그런데 미처 말을 다 놓기도 전에, 동민은 빈 의자에 메뉴얼을 던진다.
"뭐, 기본 틀은 완전히 장기네. 빨리 말 좀 깔아봐."
"...벌써 다 이해하신 거에요? 안 헷갈리시겠어요?"
"말했잖아, 글보다 장기를 먼저 배웠다고."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현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태어나서 처음 본 사람의 유형인데도 불구하고, 불쾌하기 보다는 재미있는 게임을 하게 된 기분이다. 이기기 어려운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이기기 불가능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현민은 짜릿한 기분까지 든다. 이 기분은 동민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어린애 같더니만, 생각하는 게 나랑 비슷한 종류의 인간같다. 이건 마치 미러전인가. 재미있겠네.
"그래서, 이 게임 지는 사람은 이기는 사람한테 뭘 해줄까요?"
"유혹하는 사람이 정하는 거 아닌가? 오현민의 매력에 빠져 눈물짓게 해 준다며?"
아 그랬죠 라며 고개를 젖히고 웃는 현민을 보며 동민은 서서히 승부욕을 불태운다. 패배를 일깨워주지, 어린 야생마. 현민은 웃음을 멈추더니,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린다.
"진 사람이, 내일 양주 사기로 하죠. 어때요?"
저 양주 거의 못 마셔봤는데, 내일 하나 사주시죠 차장님. 현민의 눈이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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