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붙을 수 있다.
워크샵이 뭐에여? 정현의 말을 듣던 현민은 동민에게 알려달라는 눈빛을 보낸다. 동민은 니네 엠티 같은 거 가지? 비슷한 거야. 라며 귓속말을 한다. 에엥? 회사에서 엠티 같은 걸 가요? 현민의 의아한 눈빛에 동민은 그렇다는 눈빛으로 눈을 깜빡인다.
갑자기 이번 주 주말에 단체 워크샵을 가자는 정현의 말에 천재광고는 술렁인다. 워크샵이란 대학생들의 MT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는 상민의 특성과 무용담을 늘어놓기 좋아하는 정현의 특성이 합쳐지면, (동민의 말을 빌자면) 억지로 웃어야 하는 폭음이 함께하는 꼰대 토크쇼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그걸 알기에 경란은 고개를 내저으며 나지막히 말했다. 어휴, 골이야... 윤선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또 저 지긋지긋한 사람들과 밤새도록 술을 마셔야 하다니.
"아마 이번에 장기자랑 타겟은 너일거야. 준비 단단히 해와."
"...네에? 장기자랑이요? 아, 제바알..."
현민의 표정이 썩어들어가자, 동민은 낄낄거린다. 동민은 자신이 첫 입사 때 워크샵이 생각난다. 그 때 당시의 팀장은 폭탄주 한 사발을 원샷하던지, 노래 한 곡 불러보던지 정하라고 했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게 죽도록 싫었는데, 어찌나 부르라고 성화였는지. 폭탄주를 먹고 죽기는 싫었던 동민은 결국 이 신난 분위기나 다 죽여버리자고 생각하며 잔잔한 발라드를 불렀다. 그러나 분위기가 죽기는 커녕, 어떻게 이렇게 목소리가 감미롭냐며 난리가 났었다. 결국 동민은 워크샵에 갈 때마다 발라드를 부르게 되었다. 그것은 정현과 상민 때문에 지금까지도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나만 죽을 순 없지. 아이돌 춤이나 상큼한 걸로 하나 준비해 와, 어린이. 동민의 말에 현민은 우는 표정을 한다.
한편 준석은 이런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경훈만 바라보고 있다. 경훈이 아까부터 흘끔흘끔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계속 쳐다보다가, 막상 준석이 고개를 돌리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먼 곳을 바라본다. 눈동자 흔들리는 게 뻔히 보이는데. 준석은 참 궁금해졌다. 내가 뭐가 잘나서,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 내가 상처까지 줬는데.
이런 준석의 생각을 알 리 없는 경훈은, 준석이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곁눈질로 느끼면서 식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괜히 눈길을 줬나, 나한테 마음도 없는데. 나쁜 사람이라면서 혼자 잊자고 난리를 쳐 본 경훈이지만, 잊어지긴커녕 준석의 웃는 얼굴, 준석의 애교, 심지어 그 날 밤 눈이 반쯤 풀려 신음을 뱉던 목소리까지.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긴 것처럼 뚜렷하게 기억이 나 미칠 것 같은 경훈이다. 그래서 어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얼굴 보고 깨끗하게 잊자고 결심한 경훈이었다. 준석이 밥도 안 먹고 야근을 한다는 상민의 말에, 바로 퇴근도 안하고 회사를 박차고 뛰쳐나가서 도시락을 샀다. 그리고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펜을 앙 물고 자신을 바라보는 준석. 이건 반칙이잖아. 경훈은 하마터면 울 뻔해서, 준석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누가 그렇게 상처 줘놓고는 심각하게 귀여우래. 그러면 내가 못 잊잖아... 이렇게 시무룩해져 있던 경훈은, 누군가 팔을 퍽퍽 쳐서 화들짝 놀라며 회상에서 깨어난다. 고개를 드니, 정현이 허리에 팔을 올린 채 경훈을 바라보고 있다.
"서서 조는건가, 김사원? 워크샵 갈 때 필요한 것들, 토요일 오전에 연승씨, 유현씨, 현민씨랑 넷이서 먼저 모여서 같이 사와."
"ㅇ, 에? 아, 예."
정현의 말에 경훈은 뒷머리를 벅벅 긁는다. 그리고 유현에게 묻는다. 우리 워크샵 가여? 지금까지 뭘 들었냐, 아오. 유현은 다시 한 번 경훈의 팔을 퍽 때린다.
연승은 죽을 것 같다. 그놈의 워크샵 때문에, 이번 주는 내내 야근이었다. 결국 금요일 밤에는 몸을 가눌 수도 없을 정독로 녹초가 되었다. 그런 아내는 연승에게 공진단 하나를 건넸다. 이거 먹으면 기운이 날 거야. 연승의 아내는 한의사였다. 연승은 내가 아내 복이 있다니까. 라고 생각하며 오늘 아침 공진단을 먹고 나왔다. 벌써부터 기운이 솟는 걸?
"근데 우리는 야근 안 해서 공진단 안 먹어도 힘이 나는데여?"
연승의 공진단 자랑을 빙자한 아내 자랑이 끝나자마자, 경훈이 찬 물을 붓는다. 유현은 큭큭대며 웃었고, 연승은 아오 이게. 라며 때리는 시늉을 한다. 그런데 현민씨는 왜 안 와? 그러게요, 라며 주변을 둘러보는 세 사람. 그런데 저 쪽에서 두 사람이 걸어온다. 현민과 동민이었다. 경훈은 동민을 보더니, 동민이 혀엉 - ! 힘껏 외치며 달려가 매달린다. 혀엉, 보고싶었어 혀엉!! 아우, 저리 좀 가.
"차장님이 어쩐 일이에요?"
"바보들이 뭘 잘 사나, 감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설명이다, 현민은 생각한다. 어젯밤, 현민은 동민과 전화하던 중 내일 아침 장을 봐야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휴, 버스타고 다시 지하철 갈아타야 돼요. 아침부터... 라고 현민이 시무룩해하자, 동민은 그럼 내가 태워줄게. 라고 쿨하게 나왔다. 근데 그럼 저 때문에 차장님 일찍 나오셔야 되잖아요. 현민의 말에 동민은 부러 짜증을 냈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어리래. 어린 애가 뭘 안다고 돌아다니면서 장을 봐. 보호자가 있어야지. 현민은 지금 이 자리에 동민이 있는 것이 이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뿌듯해졌다.
"저 쪽에 마트 하나 있고, 이 쪽에 마트 하나 있으니까. 둘 중에 하나 가요."
"아, 그렇지! 둘 중 하나를 가야 하지!"
유현의 설명에 연승은 놀란 척, 빈정거린다. 가만 보면 동민보다 더 비꼬는 것을 잘하는 사람은 연승이다. 동민은 그런 연승을 보면서 킥킥 웃는다. 유현은 아 그만 놀려요!! 라며 한 쪽 마트로 달려가 버린다. 연승은 척척박사님, 같이 가요! 라며 따라간다. 그런 둘을 보며 동민과 현민이 자지러진다.
"형. 나 진지하게 할 얘기 있어요."
갑자기 매달려 있던 경훈이 진지한 목소리를 낸다. 경훈의 얼굴을 보니, 준석 얘기다. 동민은 현민에게 고개를 돌려 너 저 두사람 따라가서 도와주고 있어. 금방 같이 갈게. 라고 말한다. 현민도 금방 무슨 얘기인지 눈치를 채고, 고개를 끄덕이며 연승과 유현이 사라진 방향으로 뛰어간다. 현민이 멀어지자, 동민은 현민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너, 이준석 포기 못했지."
아니, 어떻게 알았지! 경훈이 화들짝 놀라며 동민의 허리에서 팔을 풀자, 동민은 아이씨, 라며 짜증을 낸다. 넌 뭐냐, 대체. 그렇게 속상하고 상처받았는데도 그렇게 좋아? 동민의 말에 경훈은 응... 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얜 답이 없다. 너 혹시 변태 아니냐? 막 맞는 거 좋아하고, 고통스러운 거 좋아해? 허공에 대고 채찍질하는 시늉을 하는 동민에 경훈은 아아니거등여!! 라며 버럭한다.
"내가 물어봤거든요? 내 마음 알고서 이용한건지, 아니면 그냥 고의가 아니었는지... 그런데 대답을 안 해써...그럼..."
"그렇게 호구니까 여러 놈들한테 휘둘리고나 다니지, 멍청아."
경훈이 더욱 시무룩해하자, 동민은 이제 자신이 하는 말이 경훈에게 어느 방향으로든 중요하게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면서 준석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준석은 자신과 이야기할 때, 전혀 당당하지 않았다. 준석답지 않게 말이 없었고, 계속해서 경훈에게 미안해했다. 회사에서도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불안해하며, 누군가를 자꾸 찾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 동민은 상상했던 것보다 둘의 상황이 좋게 풀릴수도 있겠다 싶어 경훈을 바라보았다. 경훈은 혼자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연애할 운명이 아닌가봐... 왜 이러지... 동민은 경훈을 좀 놀려주기로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할거야? 너라면 또 다른 사람으로 갈아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냐, 이번에는 달라, 형. 나는....계속 준석씨의 늪에서 살아갈 것 같아."
잊고 싶은데, 출구가 없어... 놀고 있네. 동민이 혀를 쯧쯧 차자, 경훈은 머리를 가로젓는다. 형은 몰라... 이 느낌을. 이게 바로 각인이라는 걸까, 형? 하지만 하늘도 너무 무심하시지 않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에게 각인이라니! 아아, 신이시여! 경훈은 비척비척 걸어가 마트의 문에 비운의 주인공처럼 펄썩, 기댄다. 그러나 문이 자동문이었기 때문에 경훈은 문의 힘에 옆으로 밀려 넘어졌다. 동민은 이제 저런 경훈에게 리액션을 하는 것이 지쳐간다. 야, 이준석. 너가 빨리 좀 나서라. 바보가 더 바보가 되고 있어.
진호는 입가에 경련이 일기 시작한다. 동민이 형 말이 맞아써 - 꼰대 토크쇼가 되었어! 그러나 이런 마음의 소리를 밖으로 꺼낼 수는 없고, 그저 자신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떠드는 정현에게 억지로 웃어보인다.
언제나 그랬지만, 워크샵은 노잼이었다. 첫 번째로 상민이 야심차게 준비해 온 보드게임은, 금세 동민과 현민이 장악했다. 게다가 둘이 한 팀이어서, 둘은 다른 팀들을 하나하나 압살하며 게임을 풀어나갔다. 동민에게 대항하던 상민은 게임 초반에 모든 돈을 잃고 손톱만 물어뜯었다. 결국 게임에 걸려 있던 유급휴가는 동민과 현민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현민은 인턴이라 차마 휴가를 쓸 수가 없었고, 동민은 그 휴가를 비싼 값에 팔기로 했다. 누가 저렇게 비싼 값에 휴가를 사나,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그러나 삼고초려가 아닌 3초고려 후, 요환은 차장님 주세요!!! 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폰뱅킹으로 동민의 계좌에 돈을 보냈다. 사모님... 힘내세요... 정문은 요환의 아내에게 오늘도 마음 속으로 힘을 보냈다.
또한 정현이 준비한 장기자랑 쇼는 한 시간도 안 돼서 끝나고 말았다. 현민의 여자 아이돌 춤은 다들 아주 귀여워 죽었지. 그 때 동민도 열심히 박수를 쳤다. 진호가 짜증이 나 동민의 어깨를 앙 물자, 동민은 낄낄 웃었다. 그리고 원래 이런 무대에서는 경훈이 웃긴 짓을 매번 했었는데, 웬일로 이번에는 죄송하다며 입을 꾹 다물고는 나대지를 않았다. 결국 동민이 나서서 노래를 세 곡 내리 열창했고, 상품은 또다시 동민에게 돌아갔다. 이번에도 동민은 그 상품을 팔려고 했다. 누가 그 돈을 내고 또 사, 라고 경란이 비웃기가 무섭게 또 요환이 주세요, 다 주세요!!!! 라고 외쳤다. 요환씨 이번에 월급 보너스 받았대? 경란의 질문에 정문은 고개를 젓는다. 원래 저러세요.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게임이 끝나자마자 고기를 구우며 워크샵의 꽃, 술판이 펼쳐졌다. 동민과 진호는 각각 상민과 정현을 술로 먼저 보내기로 한다. 그래야 좀 더 편한 분위기가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현은 우리 아끼는 진호씨! 라며 일장연설을 하기 시작한다.
"아니, 팀장님 술 한잔 하시죠."
"어허, 진호씨! 우리의 밤은 아직 길어!"
정현은 다시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제 인내심은 안 긴데요... 짜증이 난 진호는 동민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나 싶어 동민의 쪽을 슬쩍 바라본다. 동민의 맞은편엔 얼굴이 대추색이 된 상민이 혀가 풀려서 좌아, 뫄셔뫄셔!! 내과 이기나, 덩밍씨가 이기나 해 붜자거!!! 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동민은 아직도 평온한 얼굴이다. 일단 절반은 성공했네, 싶어 진호는 다시 자신의 테이블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그새 정현의 말이 끝났다보다. 갑자기 큰 컵에 폭탄주를 제조하기 시작한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준석, 경란, 정문, 연승, 유현, 현민은 사색이 된다. 시작되었군! 진호는 아까 동민이 건네주었던 숙취음료를 미리 마셔두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여명이시여, 저를 가호하소서.
아응, 추워. 현민은 코를 킁 들이마신다. 정신이 들어? 누군가의 물음에 현민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동민이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아, 차장니임...헤헤. 현민이 눈을 뜨자 동민은 한 숨 돌린다.
아까 동민은 지옥을 맛보았다. 술자리에서 상민 테이블에는 경훈이, 정현 테이블에서는 현민이 있었다. 경훈의 술버릇 중 하나는 술에 취하면 온갖 자신의 이야기를 다 토해내는 것이었다. 이번에 취하면 준석 얘기가 나올수도 있겠다, 싶었던 동민은 그 사태를 막기 위해 상민의 테이블에 가기로 했었다. 그래서 상민과 둘이 대작을 하며 상민 죽이기 계획을 열심히 실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민이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변수가 있었으니, 하나는 현민의 좁쌀만한 주량이요, 다른 하나는.
"그래서어요 - 제가 어땠는지 아라여!!"
김경훈의 천성적인 트롤링. 아오, 술 마시지 말라니까. 동민이 상민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을때, 경훈은 요환과 미친듯이 달렸던 것이다. 그리고는 둘 다 취해서 별 소리를 다한다. 그런데 상민이 쓰러져서 고개를 돌렸을 때, 경훈은 마침 최근에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랑에 대한 상처를 토로하고 있었다. 이게 ...!! 동민은 낭패다, 싶어 바로 잔을 채워 건배를 제안했다. 경훈은 조치조치!! 라며 그 한 잔을 몽땅 입 안에 털어넣었고. 그 자리에서 푹 쓰러졌다. 잠시 얘 술 좀 깨우고 올게, 라고 경훈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정현의 테이블이 매우 시끌시끌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라며 고개를 돌린 동민은 그대로 굳었다.
"봐바여 - 또 콩이라고 하자나여! 지인짜, 발음 이상해! 못생겨서!"
현민이 취해서 삿대질까지 해 가며 진호에게 바락바락 대들고 있었던 것이다. 진호는 이 콩알만한 게, 야 뭐라고! 라며 핏대를 세우고 있다. 동민은 바로 현민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는 아하하, 우리 어린이가 취했네요! 라며 현민도 밖으로 질질 끌고 나왔다. 하여간, 어린 애들이란. 제법 쌀쌀한 바깥에 한 10분 앉혀놓으니, 먼저 정신이 든 것은 현민이었다.
"...저 언제 나왔어요?"
"홍진호한테 삿대질하면서 소리지를 떄."
...? 제가요? 기억이 없는데요? 현민이 어리둥절해 하자, 동민은 한숨을 내쉰다. 누가 그렇게 많이 마시래. 적당히 빼야지. 팀장님 바로 맞은편에 앉았는데, 어떻게 그래요. 현민이 눈을 감자, 동민은 머리 아파? 라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니요, 라며 손을 뒤로 짚는데, 뭔가 물컹한다. 돌아보니 경훈이 대자로 뻗어있다. 이 분은 왜 이래요? 너랑 똑같지 뭐. 동민은 한숨을 쉬며 현민의 옆에 앉는다.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는 동민을 보며, 현민은 고개를 갸웃한다. 차장님, 무슨 일 있어요? 그래보여? 동민의 반문에 현민은 고개를 끄덕인다. 얘기해봐요, 대장 미니미니! 미니미니가 들어줄게요! 현민의 외침에 동민은 킥킥 웃다가, 급 진지해진다.
"어린이, 너 연애 얼마나 해봤어?"
"아, 저요? 제가 손가락이 열 개 밖에 없어서, 정확히 셀 수가 없네요."
현민의 능글거림에, 카이스트 다니는 게 그것도 못 세! 라며 동민은 핀잔을 준다. 헤헤, 현민이 웃자 동민은 한숨을 쉬더니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왜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한테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만을 강요할까? 그대로 싫은 면도, 좋아하는 사람인데. 싫어하는 면을 잘라내려고 하는걸까, 왜. 그 모든 모습이 있기에 좋아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걸 텐데. 이상한 것 같아, 정말. 동민의 말에 현민은 작년에 사귀었던 자신의 전 여자친구들이 떠오른다.
'너 이런 이미지 아니었는데.'
'나 너 이런 줄 모르고 사귄 거였는데. 나 후회하게 하지마.'
아마 현민의 귀여운 생김새만 보고 나름의 이미지를 바라면서 다가온 거겠지. 그래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그리고 끝내, 그녀들의 이미지에 현민은 맞추지 못했다. 사실 맞출 마음도 없었다. 내가 굳이 왜 널 위해서 날 바꿔야해? 나는 나야. 현민은 이 생각을 고수했고, 결국 두 번 다 시원하게 차였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차장님도 그렇게 받은 상처가 있구나. 현민은 동민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긴 거는 남 상처주게 생긴 사람인데, 은근히 정도 많고 착해서 오히려 상처받는 쪽이었을 것이다. 현민은 그렇게 생각하니 동민을 안아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잠시 넣어두고, 현민은 동민의 손을 끌어와 살짝 잡는다. 뭐해.
"미안해요. 내가 너무 늦게 태어나서, 늦게 나타났죠."
"뭐래냐, 어린이. 아직 술 덜 깼나보지?"
"저번에 그러셨잖아요. 좀 빨리 태어나서 좀 빨리 나타나지 그랬냐고."
내가 빨리 나타났으면, 차장님이 마음 고생 안했을 텐데. 바보들이랑 답답하게 대화하느라 속 터질 일도 없고. 애써 다른 사람들이랑 맞춰가느라 차장님을 잘라내는 고통도 느끼지 않았겠죠?
"그랬으면, 나도 그런 시간 낭비 안했겠죠?"
현민의 말에, 동민은 현민의 손을 꽉 잡는다. 이상하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동민은 하나하나 껍질을 뜯어내듯 그 사람의 본질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현민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알면 알수록 하나씩 동기화가 되는 기분이다. 생각하는 방식도 똑같고. 서로가 눈이 마주칠 때면 주위의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마치 지금처럼. 그렇게 현민과 동민은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은 채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콜록, 콜록. 아으, 츄워어..."
기침 소리에, 동민과 현민은 놀라 손을 뺐다. 경훈은 얼굴을 있는대로 찌푸리며, 추운지 자신의 팔을 연신 문질러댄다. 으어... 뭐야, 여기 밖이잖아. 나 왜 밖에 있어요? 경훈의 말에 동민은 쯧쯧, 혀를 찬다. 마시지 말라니까, 말을 안 듣고 임요환이랑 술을 퍼마셔? 동민의 말에 경훈은 뒷머리를 벅벅 긁는다. 어쩔 수 없었어... 취하지 않으면 잊을 수가 없어... 경훈의 말에 현민은 아, 그 사람이요. 란다. 동민은 드라마를 찍고 있다. 라며 핀잔을 주는데, 멀리서 한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응? 누구지? 현민도 다가오는 사람을 바라본다.
"....이준석 대리님?"
준석은 술 때문에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하고, 추운지 후드 집업을 걸친 채로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었다. 동민이 슬쩍 경훈의 쪽을 바라보니, 경훈은 입을 헤 벌리고 멍한 얼굴로 준석을 바라보고만 있다. 준석은 동민과 현민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경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빨리 빠져줘야겠네. 동민은 현민의 손목을 잡는다. 들어가자, 어린이.
"경훈씨는요?"
"감기에 걸리던 얼어죽던 마음대로 하라고 해."
그리고 현민이 둘 사이의 기류를 눈치채기 전에 발빠르게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동민이다. 문을 닫기 전, 동민은 다시 한 번 두 사람을 바라본다. 준석이 경훈 앞에 멈추어 서서,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 밤이 지나면, 둘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 손잡이에 힘을 가했다. 그렇게 문은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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