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얽히다
또 속이 불편하다. 진호는 배를 문지른다.
여자들은 일찌감치 여자 방에 들어갔다. 연승은 자자, 남은 사람들끼리 마저 마셔요! 라며 잔을 채우기 시작한다. 지금 시간은 새벽 2시가 다 되어간다. 정현과 상민은 저 쪽 구석에서 사이좋게 널브러져 잠들었다. 진호는 아까 정현을 취하게 하려고 미친듯이 술을 마셔댔다. 숙취음료를 안 마셨더라면, 난 진작에 쓰러졌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유현의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이렇게 방 안에 사람이 없어요? 하나, 두울, 스에명, 네 명이나 없어! 유현의 말에 진호는 고개를 들어 방 안을 살핀다. 어, 없다.
"동밍이 형, 어디 갔지?"
진호가 혼잣말을 하자, 요환은 입 안에 과자를 잔뜩 욱여넣으며 말한다. 아까 현민씨랑 경훈이가 취해서 잠시 술 깨운다고 데리고 나갔는데. 요환의 말에 진호는 미간을 구긴다. 또 오현민이야? 대체 동민이 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진호는 둘이 무슨 얘기를 하나 한 번 나가서 들어볼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때, 문이 열리고 현민과 동민이 들어온다. 동민은 잠시 밖을 살피더니, 문을 쾅 닫는다.
"어, 경훈이는?"
"...좀 더 술 깨고 들어온대."
그리고는 동민은 진호의 옆에, 현민은 동민의 맞은편에 앉는다. 동민은 진호를 올려다보며 어디 가? 왜 그러고 서 있어. 라고 묻는다. 진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앉는다. 연승은 자자, 마저 마시고 빨리 자요! 라며 동민과 현민의 앞에 놓인 잔을 채운다. 잔을 내려다보던 동민은 진호를 바라본다. 용케도 안 취하고 잘 버티고 있었네. 동민의 말에 진호는 형 덕분이지 뭐, 라며 동민의 손을 꾹 잡는다. 동민은 잠시 진호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진호를 바라본다. 그 때, 연승이 건배합시다! 라고 외친다. 동민과 진호는 잔을 들어 원샷을 한다. 진호는 문득 동민이 잡힌 손에 서서히 힘을 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약간 비틀어, 진호의 손 안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을 느꼈다. 진호는 손에 힘을 빼고, 아예 동민의 손과 깍지를 꼈다. 그러자 동민이 다시 진호를 바라본다.
안 돼.
진호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동민을 말없이 쳐다본다. 손 빼려고 하지마, 형. 내가 손 잡았을 때 손 뺀 적 없었잖아. 동민은 진호의 눈빛에서 처음으로 조급함을 읽었다. 항상 진호는 자신을 바라볼 때 눈에 여유와 느긋함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들은 단 하나도 없다. 동민은 덩달아 자신도 조바심이 난다. 이게 널 위한 거라는 걸 알아야 하는데. 너에게는 이게 상처가 되겠지. 그래도 빨리 밀어내야만 해, 진호야. 동민은 마음이 아파온다. 하지만 진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진호의 눈빛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이런 둘을, 현민은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하늘로 올라간다. 동민은 짙은 회색의 연기가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하늘에 별이 수놓아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참 별들이 이쁘기도 하다. 마치 어린 아이가 눈물을 매달고 있는 것 같아. 툭, 하고 건들면 금세 아이의 눈물처럼 하늘에서 별이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다. 동민은 담배를 비벼끄고 별들을 빤히 바라본다.
"장난하는 거야?"
밤하늘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동민은 진호의 말소리에 놀란다. 이런 말을 누구한테 하는 거지? 들려오는 방향은 동민의 뒤쪽이다. 소리가 안나게 몸을 왼쪽으로 뉘여 저쪽 어둠을 응시한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서 있는 진호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건, 현민이었다. 동민은 조용히 벽 뒤로 몸을 숨긴다. 다행히 둘 다 동민이 이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아니요. 사실을 말하는 거에요."
"너 나 알아? 니가 뭘 알아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냐?"
화가 나 있는 흥분한 진호의 말투와는 달리, 현민은 덤덤하다. 감정이 없는 것 같다. 동민은 저 둘이 싸울 일이 뭐가 있나 싶어서, 가만히 숨을 죽이고 둘의 말소리에 집중한다. 진호는 하, 하고 짧게 헛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말없이 땅을 바라보고 있는 동그란 머리통을 노려본다. 그러니까, 뭐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포기하라고? 너 되게 뜬금없다."
그게 누군지나 알고 하는 말이야? 진호는 황당해하며 현민에게 쏘아붙인다. 동민은 눈이 커진다. ㅁ, 뭐라고? 현민이 저 말을 했다는 건, 진호가 누굴 좋아하는지 확신을 가졌다는 건데. 현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호를 올려다본다.
"차장님이잖아요."
"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다, 단정지어? 그, 그냥 친한거지."
현민의 말에 동민은 물론이고, 진호도 쓰러질 것처럼 당황한다. 아무도 모르는, 동민과 둘만의 비밀이었는데. 이 꼬맹이가 그걸 왜 알지? 너, 너가 뭘 알아서! 진호의 떨리는 목소리에 현민은 픽 웃는다. 대리님 되게 거짓말 못하시네요. 목소리가 떨려요. 진호는 자신의 목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문다. 헛기침을 두어번 하는 진호를 잠시 보더니, 현민은 다시 땅으로 시선을 거둔다.
"그리고 굳이 그런 목소리 같은 거 없어도 알 수 있었어요."
"...?"
"나랑 비슷하더라고요, 대리님 눈빛이."
처음에 알아차렸을 때는, 거울 보는 줄 알았다니까요. 현민의 말에 진호는 고개를 갸웃한다. 뭔 소리야. 그러자 현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진호와 마주선다. 나도 좋아하거든요.
"장차장님, 내가 좋아한다고요."
역시 그랬다. 진호는 욕이 나올 것 같다. 어렴풋이 현민의 눈빛을, 어느샌가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현민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민도 자신과 똑같이 나를 경계하고 있었구나. 진호는 아무 말 없이 현민을 노려보고 서 있다. 현민은 그런 진호의 시선이 싫지 않다. 이렇게 적대적인 눈빛을 내게 보낸다는 건. 내가 우세하다는 뜻이니까. 그걸 진호도 느끼고 있는 것일테지.
"그래, 근데? 어차피 넌 어린 인턴이잖아. 뭐, 상사의 동경을 좋아하는 감정으로 오해하는 건, 어려서 그럴 수도 있어."
그런 오해는 인턴이 끝나면 다 해결될거다. 조금 힘들겠지만 한 달만 더 참으라구, 꼬맹아. 진호가 애써 깔보는 듯한 말투로 현민에게 말한다. 진호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너는 어리다. 이게 어른들이 불리해져서 할 말이 없을 때 가장 많이 하는 말투 중 하나지. 현민은 픽 웃더니 고개를 젓는다. 여유로워 보이는 현민의 표정에, 진호는 사뭇 당황한다.
"대리님은, 차장님이 왜 좋아요?"
왜 좋냐니. 뜬금 없는 현민의 말에 진호는 갑자기 그걸 왜 물어보나 싶다. 진호는 아무 말 없이 현민을 바라본다. 대답할 기미가 없자, 현민은 웃는 표정을 거두고 정색한다.
"무언가 차장님의 좋은 면을 보고 좋은 사람이구나, 느껴서 그 모습에 반한 거겠죠."
"... 누구나 그런 거 아냐?"
"대부분이 그렇죠. 그리고 그 좋은 모습만을 보면서 접근하죠."
그것밖에 안 보고, 그게 전부인 줄 알고 말이야. 그런데 그런 단면이 전부가 아니라고요. 왜 정육면체를 사각형 하나로만 보는지 모르겠어요. 전개도로 볼 줄 모르면, 한 면 한 면 모두 볼 노력이라도 하던가. 단지 한 면이 전부인줄 알고, 그거에만 기준을 맞추면서. 현민의 중얼거림에, 진호는 갸웃한다. 뭐? 사각형? 전개도? 동민이 형 얘기하다가 갑자기 왜 수학 얘기가 나와?
현민은 아까 동민이 털어놓은 고민이 진호와도 연결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아마도, 동민의 마음은 진호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민이 진호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지 않았다는 것은, 진호가 동민의 모든 면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그걸 동민도 알고 있을거야, 현민은 중얼거린다, 아마 동민의 자상한 면에 이끌렸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 자상한 사람. 진호는 그 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동민의 모습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을 껴안을 수 없다면, 포기했으면 좋겠다. 현민은 진호가 포기하는 것이 제일 좋은 선택지라고 여긴다.
"그러니까 포기하라고요. 대리님은 뭘 몰라요."
"... 뭘 모르는 건 네 쪽이지. 꼬맹아."
미안한데, 이미 동민이 형은 내 맘을 알고 있어. 그리고 이미 많이 흔들리고 있고. 조금 시간이 오래걸려서, 형이 날 힘들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우리 둘은 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진호는 말을 하며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흩뜨린다. 내가 대체 이 어린 애랑 왜 이 새벽에 이런 말을 해야 하지. 기껏 많이 쳐줘봐야 팬심으로 동민이 형을 좋아하고 있을 게 뻔한데. 진호의 답답해 보이는 눈빛을 보며, 현민은 아직도 진호가 단지 자신을 어린아이로만 보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진짜 뭘 모르시네.
"힘들게 한 건 차장님이 아니라 대리님 쪽이에요."
"...뭐?"
"이미 충분히 상처 받았어요. 사람을 단면적으로밖에 볼 줄 모르면서, 모든 걸 다 받아줄 수 있는 척 굴지 말아요. 착각해서 또 상처받잖아."
현민의 말에 진호는 표정이 진지해진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동민의 진지한 곳까지 다 알고 있는 듯하다. 만만치 않은 상대였네. 진호가 으르렁거리듯이 내뱉는다. 아주 재밌는 게임이 되겠네. 현민도 으르렁거린다. 짓밟아드리죠. 제가 이기지 못하는 게임은 안하는 성격이라서요.
이건 무슨 상황이지. 동민은 답답해져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진호와 현민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을 멈추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러가며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여자들은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놀러나왔는데 저렇게 완벽한 메이크업을 할 수 있지? 요환은 대놓고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경란의 아찔하게 위로 뻗은 속눈썹을 빤히 쳐다본다. 그러다가 윤선에게 부담스럽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워크샵의 끝은, 숙취와 초췌함이던가. 요환의 꼴은 거지꼴이다. 어제 네시까지 연승과 유현과 달린 탓에 이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우리 셋만 달리다니, 다른 사람들 다 너무한 거 아닙니까! 진호와 현민은 둘이 싸우기라도 한 건지 냉랭한 분위기에, 준석씨는 바깥에 오래 있다가 들어와서는 일찍 자 버리고, 경훈씨는 뻗고. 차장님은 어제 어디서 뭐했어요! 코빼기도 안 보였잖아요! 요환이 소리치자, 동민은 아, 뭐 그냥... 이라며 말끝을 흐린다. 그런 동민을, 현민과 진호가 동시에 바라본다. 그러다가 둘이 시선이 공중에서 얽힌다.
"뭘 봐, 꼬맹이."
"대리님 본 거 아닙니다만. 관심 갖지 말아주세요."
어제까지 둘이 사이 좋았는데, 갑자기 왜 저래? 연승은 어리둥절해 하며 눈을 크게 뜬다. 한편 그런 둘을 바라보는 동민은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뭔가 다른 생각할 것이 필요해. 라며 시선을 돌리던 동민은 경훈과 준석이 보인다. 둘은 서로 붙어있지도, 얘기를 하지도 않았다. 멀찌감치 서서 서로 할 것을 하고 있던 것이다. 동민은 경훈에게 다가가 나지막히 귓속말을 한다.
"야, 어제 무슨 얘기 했어. 어떻게 됐냐?"
"아, 뭐, 그냥..."
어라? 분명 분위기 좋을 것 같았는데, 설마 배드엔딩인가? 경훈의 얼굴은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이다. 계속 쳐다보고 있어도 입을 꾹 다문 채로 반응이 없는 경훈이다. 나쁘게 풀렸나 싶어, 동민은 더 물어보지는 못하고 뻘쭘해한다. 그렇게 말 없이 경훈의 곁에만 가만히 서 있는 동민이다. 다행히 천재광고 사람들을 픽업할 차량이 도착해서, 동민은 불편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경훈은 차에 올라타 진호의 옆에 앉는다. 진호는 선글라스를 쓰더니 이어폰을 꽂고는 잘 채비를 하기 시작한다. 뭐, 별 상관없지. 싶은 경훈은 대각선 앞에 앉은 준석을 바라본다. 준석은 창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조금 돌려 뒤를 쳐다본다. 경훈과 눈이 마주치자, 준석은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경훈도 그런 준석을 잠시 빤히 쳐다보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는다. 피곤하다, 나도 자야지.
어젯밤, 준석은 무슨 경훈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 없이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경훈은 술이 덜 깬 상태였기에 얼굴에 준석에 대한 감정을 전혀 숨기지 못하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바라만 보며 정적이 이어지는데, 준석이 입을 연 것은 몇 분 정도 지나서였다.
"제가, 좋아요?"
경훈은 그 말투에 힐난이나 비난, 멸시 같은 것은 전혀 들어있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어서, 마치 네, 라는 대답을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자신이 할 대답도 그것 하나 뿐이었다.
"네, 많이 좋아해요."
그 말에 준석은 손가락을 꼬더니, 시선을 땅바닥에 처박는다. 땅 쳐다보려고 나온건가. 그건 아닐텐데. 경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나 준석의 앞에 섰다. 준석씨, 나 봐요. 그러나 준석은 더욱 고개를 숙인다. 결국 준석의 얼굴을 감싸고 힘으로 고개를 들게 했다. 고개가 위로 치켜 올려졌는데도 준석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왜 이렇게 고집이 세요. 경훈의 말에 준석은 입을 간신히 연다.
"많이, 생각해 봤어요."
"........"
"경훈, 경훈씨한텐 미안한 일이지만. 그 날이, 제가 경훈씨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그 날이라면. 내가 고백하고 운 날이구나. 경훈은 아, 하고 잠시 멍하게 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준석이 그런 경훈의 반응에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간다.
"그래서, 많이 생각해봤어요. 그 동안 많이 고맙기도 했고, 많이 미안하기도 했고, 무의식적으로 내가 좀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준석씨가 저를요?"
이렇게 조그맣고 귀여운 사람이, 나를 지켜준다니. 경훈은 분위기상 웃으면 안되는데 순간 픽, 웃고 말았다. 왜 이렇게 귀여워서 이 사람은 나를 힘들게 하나. 준석은 잠시 눈을 굴리더니 경훈을 제대로 바라본다. 거사를 치룬 날의 몽롱한 눈빛과는 달리 경훈을 정확히 바라보는 또렷한 눈빛이다. 그런데 그 날 이후에 제가 제일 많이 느꼈던 게 뭔지 알아요?
"보고싶다는 거였어요."
처음에는 사과하고 싶어서 보고 싶었는데, 점점 사과해야겠다는 생각보다 그냥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보고싶다는 마음이 커지더라구요. 안 보이니까, 더 초조해지기도 하고. 준석의 말에, 경훈은 충격을 받아 팔에서 힘이 빠진다. 그래서 준석의 얼굴을 감싸던 손을 떨어뜨린다. 덕분에 준석의 얼굴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준석의 시선은 아래로 향한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는 경훈은, 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준석을 바라본다. 지, 지금 내가 보고싶다고 한거야? 많이, 보고 싶었다고?
"나는 아직도 경훈씨한테 미안해요. 나는 아직, 경훈씨가 나를 좋아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그리고는 불안한 듯이 후드의 소매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쉽게 이어나가지 못한다. 준석씨...? 경훈이 부르자, 준석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경훈을 본다. 큰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 차 있다.
"그래도, 많이 보고싶고 고맙고 지켜주고 싶었어요."
"........"
"같은 마음이 되도록, 제가 더 큰 마음을 느끼도록 제가 많이 노력할게요. 빨리 쫓아갈게요."
경훈씨를 따라가게 해 줘요.
준석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훈은 간신히 입을 열고 몹시 더듬거리며 그게 무슨 소리에요? 라고 반문했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쉽게 이야기하지? 준석은 고민한다. 그러나 미처 쉽게 설명하기 전에, 경훈이 준석의 두 팔을 덥석 잡는다. 그리고 몸을 약간 구부려서 준석과 시선을 맞춘다.
"... 나, 나 또 준석씨가 말한거. 마음대로 착각할 거에요. 나 좋아한다고, 그렇게 착각하고 우리 애인 사이라고 착각할거에요. 제가 잘못 생각한거면, 또 나 상처 줄거면, 지금 아니라고 말해줘요."
마지막이에요. 덜덜 떠는 경훈을 바라보며, 준석은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이쯤 되면, 거의 비슷한 마음 아닐까? 나도 금사빠네.
"착각 아니에요."
"............."
"맞아요, 경훈씨. 나 경훈씨 좋아요. 좋아해요."
준석이 환하게 웃자, 지금까지 그렁그렁하게 고여있던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린다. 경훈은 잠시 가만히 서있더니, 준석을 천천히 껴안는다. 준석은 경훈의 어깨에 뺨을 묻고 눈을 감는다. 따뜻하다.
"빨리 따라와요. 나 지금까지 너무 외로웠으니까."
"... 거의 비슷한 거 같은데.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아니, 준석씨는 그냥 좋다고 했잖아요."
나는 많이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많이. 투정부리는 듯한 경훈의 말에 준석은 눈물을 매달고는 한참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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