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고려 제 4대 황제 광종의 혼인식이 열린다.
그리고 그 혼인식의 주인공은 광종과 황주원 황후의 고명 딸 황보연화 공주다.
" 폐하, 해상궁이옵니다. 기침은 하셨습니까? "
" .. 그래. "
" 그럼 침소로 들겠습니다. "
황궁 다미원 견습 궁녀에서 최고 상궁까지, 나 역시도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았다. 들어가자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뒤따라 들어오는 궁녀에게 도구를 받아 들곤 전부 물렀다. 항상 해오던 것이지만 오늘만큼은 더 더욱 단 둘만 있고 싶었다. 들어선 순간부터 느껴진 짙은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그의 곁으로 다가가 화장을 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자신을 무시한 것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인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꽤나 부담스럽다. 이내 분첩에 백분을 묻히고 고개를 들어 그 시선과 마주했다. 그와 처음 마주했을 때 처럼 올곧게. 손을 들어 그의 흉에 다가간 순간, 그가 오래 전 남아 이제는 희미해진 흉이 새겨진 손목을 잡았다.
" 하지말거라. "
" 놔주십시오. "
" 왜 네가 하는 것이냐. 오늘 같은 날은 너 말고 다른 궁인이 해도 되지않느냐."
" 시간이 촉박합니다. 한 시각 후에는 황후님의 치장을 도와드려야 합니다. "
" 그리 부르지 마. 아직 그 아이, 황후가 아니다. "
" 이제 곧 폐하와 혼인하실 몸이신데 황후가 아니라뇨. 가당키나 합니까. "
" … "
" 그리고 이 일은 항상 소인이 해오던 일이 아닙니까. 폐하의 흉을 가려드리는 일. 어찌 다른이에게 넘긴단 말입니까. 적어도 이것만큼은 소인이 하고 싶습니다, 끝까지. "
수야. 아, 큰일났다. 해수야. 그 한 마디에 참아왔던 모든 게 무너져버렸다. 왜 그리 다정히 부르는 건지.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죽여 울었다.
궁에 들어오기 전에는 크게 소리내어 울었는데 궁에 입궁하고 나서는 소리 내어 울어 본 적이 없다. 항상 소리 죽여 울었다, 아무도 모르게.
사실 알고있었다. 역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옆자리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역사는 절대 변할 수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정녕 역사는 변할 수가 없는 것일까. 그의 옆에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나의 자리는 없는 걸까.
눈물로 범벅 되어버린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 같았구나. 마음과 마음이 같았다. 그 사람이 울고있었다.
항상 강인해 보이기만 했던, 이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이던 그 사람이 울고 있었다, 나 때문에.
조심스레 분을 그의 얼굴에 묻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는 그의 모습을 애써 외면했다. 도망가자고 할까봐. 내가 먼저 도망가자 저 멀리 아무도 못 찾는 곳으로 도망가자고 할까 두려웠다. 그가 얼마나 힘들게 얻어낸 황제의 자리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 흉이 분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도망가자 하면 정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도망 갈 사람인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수야. 나를 보거라. 어찌 이리 나를 외면하는 게냐. "
" … "
" 내가 왜 황제가 되었는데. 해수, 너를 지키고자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이상 못 할 것이 없다. "
" 듣는 귀가 많습니다, 폐하.""
" 내 비록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아 연화와 이리 혼인 하지만 내 약조하마. 내 모든 이에게 너를 내 하나뿐인 정인이라 알리고 누구보다 성대하게 호화롭게 식을 올려줄 것이다. 이 송악의 모든 고려의 여인들이 너를 우러러 보고 부러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화가났다. 그가 나를 위해 하는 말임을 모르지 않는데. 지금 처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그가 아니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화가났다.
" 제 흉은 어찌하고요? 몸에 흉을 가진 여인은 폐하의 여인이 될 수 없다. 폐하께서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 저도 오상궁마마님 처럼 살라하시는 겁니까? "
" 수야. … "
" 싫습니다. 그리 살다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 허망하게 살다가 죽고싶지 않아. 폐하의 숨겨진 여인 따위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 숨어 사랑하고 연모하고 그리워하고. 폐하께서 스쳐지나가면 그 순간을 몇날이고 몇밤이고 닳고 닳도록 되새기고. 그러다 폐하께서 그 분과 함께 계시는 걸 보고 그렇게 아파하고. 그러다 폐하와 닮은 아기님이 태어난다면. 저는 어찌 할까요. 축하드린다 선물이라도 드리면 만족하시겠습니까? "
" … "
" 치장을 마치었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 내 곁에 있거라. 아니,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있어. 어명이다. 어디든 내가 눈을 돌리면 보이는 곳에 있어라. "
" … "
" 나는 너 없이는 살지 못한다. "
" 곧 대례복을 들여오라 전하겠습니다. "
" 말했지 않느냐. 나는 너를 절대 놓치지 않아. 절대. "
문을 닫고 나와 30보를 걸었다. 겨우 그의 침소에 멀어졌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른 궁인들이 보면 이 좋은 날에, 하늘 마저 푸르른 이 날에 왠 울음이냐 이상하게 볼 것이였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입 안에서 맴돌던. 끝내 말하지 못한 것이 나오지 못하고 삼켜졌다. 연모합니다.
*
공주의 처소. 혼인 준비로 바쁜 궁인들로 활기가 넘친다. 뒤 따라오는 궁녀에게 놓고온 것이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 황후님, 황궁 다미원 최고상궁 해상궁 이옵니다. "
" 들라해라."
" 드시지요. "
오늘 누구보다 아름다울 여인, 행복해야 할 여인. 곧 이 나라의 국모가 될 여인. 들어가자마자 풍기는 짙은 장밋빛 향기가 역해 헛구역질이 나올 뻔 하였다.
" 황후님, 혼인을 진심으로 축하드리옵니다. "
" 하, 정녕 진심으로 하는 말인게냐. 참, 사람 일은 알 수가 없어. 내 너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들을 줄이야. "
" … "
" 사람은 역시 오래 살고 봐야 한다니까. "
" 화장을 시작하겠습니다."
과거에서나, 현대에서나 이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여인 될 사람. 그 여인의 화장을 해주는 나. 하나도 변한 게 없다.
" 어떠하냐? "
" … 예? "
" 네 손으로 직접 폐하의 여인 될 사람의 치장을 돕는 것 말이다. "
" … "
" 네가 그랬지, 내가 사람이 아닌 신분을 먼저 본다고. 그리고 내가 그랬지, 내가 변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
" … "
" 그리고 이 말도 했던 것이 떠오르는 구나. 분수를 알아야지. "
" … "
" 어디, 지금은 제 분수를 잘 알고 있는 가? "
너와 내 신분,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느냐 말이다. 신분 보다 사람, 그렇게 말하던 내가 신분에 가로 막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그 사람 옆에도 설 수가 없었다. 아. 다른 세계, 다른 시간에서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 예,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
역사는 멈추지 않고 흐른다. 과거에서도, 현재에서도, 미래에서도.
하라에서 나온 해수 상궁복 보고 생각나서 쓴 자급자족 망상... 소해는 맴찢...
소와 연화 혼인 때문에 혹시 모를 스포주의! 뒤에 더 쓰고 싶었지만 능력 부족이다.. 8ㅅ8
얼른 뾰요일이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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