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장옥정, 사랑에 살다 - 외로운 선택
100%망상입니다.
소해는 황제와 황후가 되었다는 전제. 그 외는 모두 현실 드라마와 같음.
최지몽은 고려시대->잠깐 현대에 살다옴->다시 고려시대 루트를 탔다는 궁예를 전제.
광종 재위 5년, 간신히 잦아든 호족 숙청은 피바람 잘 날 없던 황궁에 오래간만의 고요였다. 그러나 독수리가 떠난 자리에 매가 돌아오듯 예기치 못한 일은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던 아주 작은 간극과 분란에서 찾아들었다.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겠다, 이건가."
"......"
"밥상까지 물려?"
그렇다 하옵니다. 누군가의 떨리는 읍이 들려오자마자 황제의 손등 위로 시퍼런 핏줄이 돋아났다. 작게 내쉬는 한숨마저 머지않아 시행토록 준비 중인 노비안검법에 관한 안건을 처리하느라 다시금 자취를 감췄지만.
누구 하나만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자리였다. 예전 같았다면 이렇게까지 깊은 골은 없었을지라도, 지금 자신의 모습보다야 훨씬 열과 성을 다해 수의 기분을 풀어줬을 것을 인정한다. 그녀가 무엇을 염려하는 지도, 무엇에 저리 애끓어하는 지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드실 때까지 올려라. 행여나 상을 엎고 그릇을 던진다 해도 물러서지 마."
"예,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애초부터 애증으로 시작해 애정으로 발돋움했던 사이. 그 정이 또 언제 증오로 바뀔 지는 하늘도, 땅도, 심지어는 두 사람조차도 모를 일이다.
"지몽."
"예, 폐하."
"그대는 하늘의 뜻을 받는 사람이니 나와 황후의 일 또한 점지할 수 있는가."
"예?"
"그대가 보기에도 황후가 마음의 문을 닫은 듯 싶어?
미쳤냐며, 그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며 잔뜩 으름장을 놓았으나 가슴 깊숙이 자리한 진심마저 그럴 리 없다. 꼭 한 편의 칼부림처럼 온통 가시와 날만 곤두세웠던 그날이 지나고 끼니를 거부하는 것 외에 단 한 번의 반항 없이 고분고분 갇혀있는 모습이란. 명을 거행하는 모습에 감복해야 할지, 고까워해야 할지.
"내 처음 본 날은 저렇지 않았는데."
"......"
"유폐한다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악을 쓰고, 당신이 뭔데 사람을 가두냐 마냐, 황제면 다냐.."
"..폐하."
"이리 나왔어야 하거늘."
자조적으로 비튼 입꼬리에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이 뚝뚝 묻어져 나온다. 지몽은, 자신이 감히 하늘의 뜻을 받는다 어쩐다 하는 그런 위치에서조차 차마 가늠키 힘들고, 내다보기 힘든 두 사람의 사이에 왜 그 어떤 역사서의 설명조차 없었는지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해수여서, 저리 굳세게 고집을 부리며 외려 나오지 않는 건가. 울고 불고 명을 거두어주시라 하지 않고, 내 바짓가랑이 한 번 잡지 않고."
"무릎을 꿇고 폐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진다 하시면 어찌 바닥에 주저앉냐며 귀한 무릎부터 살피실 폐하가 아닙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제 모습에 픽, 웃는 듯 우는 듯 중얼거리는 황제에게로 지몽은 차마 마주 웃을 수가 없어졌다.
"그대는 날 너무 잘 알아, 때로는 수보다도 더."
사람은 변치 않았다. 변한 건 한 철의 피바람을 겪은 시대뿐이었다.
"잘 되실 겁니다."
"......"
"폐하가 먼저 다가가 보십시오."
"......"
"황후전의 문을 먼저 열고, 죽어도 먹지 않겠다는 상 앞에 마주 보고 앉으시지요."
"....."
"그렇게 함께 해오신 두 분이 아닙니까."
알다시피 소인은 미래를 바꾸는 자가 아닌, 그저 판을 짜는 자입니다.

"황후님, 제발 한 끼만 드시지요. 폐하께서 심려하시옵니다."
"배 터져 죽어도 내가 죽고, 배고파 죽어도 내가 죽는다. 제발 좀 나가있으라 하지 않느냐! 어?"
"그리는 안되시지요."
뭐?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휙, 고개를 돌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보이는 얼굴에 수는 하마터면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최지몽? 당신이 여긴 왜,"
"하대를 하라지 않으셨습니까. 좀 더 편히 부르시지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아니, 중요합니까?"
"중요해, 라고 하문하셔도 됩니다."
"그 무슨.."
정말이지 이런 상황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실랑이다. 혹여 최지몽의 걸음이 전부 황제의 명일까봐 쉽사리 운을 떼지도 못했다.
"폐하께서 황후님이 밥과 찬을 전부 비우시는 걸 보고 나오라 하셨습니다."
"거..짓말."
"참말이옵니다. 제가 뉘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리까?"
"내 기분을 좋게 해주려 그대가 둘러대는 것이라면 크게 벌하지 않을 테니 그만해, 그런 뻔한 말."
허, 참. 대강 미루어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사태가 심각하다. 일전 황제의 의심처럼 마음을 닫은 건 아닐까, 싶었는데 확실히 거기까지는 못 미친 듯 하지만 어쨌든 단단히 마음 상한 게 분명했다.
"폐하를 직접 알현하시겠습니까?"
"유폐하라는 명이 떨어진 걸 모르나.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말라시는데."
"먼저 손을 내밀러 오심을 아신다면 친히 환영해주실 겁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해."
"황후님."
"잘못한 건 폐하가 아니던가? 내 말이라고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인간이 누군데.."
아무리 몸 섞고 사는 지아비라지만 일국의 황제에게 인간이라 칭할 수 있는 것도 전무후무하게 해수가 유일할 것이다. 제 눈앞의 당돌한 상전을 보며 푹, 푹 한숨 쉬는 건 오롯이 황후전 상궁들만의 몫이 아니었다. 최지몽도 마찬가지, 심지어는 황제마저도 한숨을 달고 사시니.
"그건 아십니까?"
"뭘."
"곧 있으면 합궁일입니다."
"뭐?"
그, 그게 지금 와서 무슨 중요한..
"중요합니다, 하고 말고요. 사천대에서 공식적으로 한달에 한 번 점지한 날이 아닙니까?"
"지금 이 상태에서 나더러 폐하께 안기라고?"
한때는 합궁의 합 자만 나와도 부끄럽다 쑥스럽다 온 난리에 손사래까지 치던 황후가 변하긴 변했다. 어느덧 두 사람은 부부로서, 한 지붕 아래 사는 사이로서 전혀 어색하거나 아쉬울 게 없었다. 합궁일 날 불이 꺼지는 황후전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는 상궁들 역시 그래서, 더더욱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지 못했다. 사실상 건국 이래로 가장 제대로 된 황실 부부 생활을 하던 두 웃전이 아니던가. 황제에게도, 황후에게도 분명 그런 곳이고 그런 날이었는데.
"더 싸우기만 할 걸.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이라며, 보름 전에도 합궁을 했던 것 같은데?"
"예? 아, 그.. 그 길일이 두 번이라 그럽니다, 길일이. 딱 요 한달엔 두 번을 함께 하셔야 좋은 아기씨를.."
"됐어. 나보다 폐하께서 더 싫어하실 테야."
사내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건 눈앞에 뻔히 보이는 제 정인을 놔두고 엉뚱한 곳에 마음을 줄 때부터 알아봤다. 편전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찬바람이 부는 군주가 뒤돌아서 황후전의 앞뜰에 첫 발을 들이는 순간 고려의 하늘 아래 가장 정열적인 사내가 되는 이유.
그 시선의 끝, 늘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단 하나의 여인.
"게다가,"
소의 별이 드물에 옅은 빛을 낼 때면 늘 해수가 그의 곁을 지키곤 했었다. 지몽은 아직도, 그걸 기억한다.
"아직까지 아기씨 한 번 들어서지 않을 걸 보면,"
"......"
"후처를 들여야 할 지도 몰라."
황후님! 예상치 못했던 말에 누군가의 작은 탄식이 울려퍼졌다. 고려의 여인으로서 걸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옷을 걸치고, 매달 수 있는 가장 화려한 패물에 온몸이 둘러싸인 채로 지금의 수는 하늘 아래 가장 용기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합방은 예정대로 진행할 겁니다. 차질없이 준비하라 일러두지요."
"지몽...!"
"발도 나아가야 땅을 밟을 수 있는 법입니다."
"......"
"그 땅이 정갈한 흙바닥이든, 더러운 늪이든 그건 상관 없습죠. 두 분의 별은 항시 운명을 같이 한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한 분이 수렁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그건, 다른 한 분도 마찬가지가 될 겁니다.
"같은 날 같은 시의 운명을 우스이 여기지 마세요."
"우습게 여기지 않아."
"......"
"허나 폐하와 나, 예전 같지 않다는 거 자네도 알 거라 생각해. 난 그냥.."
아무리 다 큰 척 해보려 해도 아직은 작고, 여린 황후. 제 정인의 손에 베어져 나가는 수없는 목을 보아왔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피가 묻은 그의 손. 밥 잘 챙겨드시고, 될수록 악몽은 꾸지 마시라며 당돌하게 아닌 척 얘기했던 진심이 언제부터인가 그 피로 얼룩덜룩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에 일그러진 것.
수는 그게 서글픈 것이었다. 제가 바라는 사랑과 먼저 뒷덜미를 움켜쥐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땅의 사랑이 시간이 지날수록 큰 괴리로 다가오는 것만 같아 그게 서러웠던 것이었다. 평생을 걸리라 믿었던 그 연정 하나면 조용히 묻어갈 수 있는 시간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꾸만 그 시간들이 고통과 피와 땀으로 다가와 베갯잎 위로 축축이 물들어가 그게 견디기 힘들어진 셈이었다.
얼마든지 사랑하리라 마음 먹었던 그에게로 가는 길이 점점 더 본래의 빛을 잃고, 누군가의 이름 모를 피로 물들면 물들수록 그녀는 한 발조차 내딛기가 두려웠다. 언젠가는 그 피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소에게 도착한 저를 그가 돌아보지 않을까봐서.
그런 사랑이, 되어버릴까봐서.


인스티즈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