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몽 일기
그 아이, 그러니까 해수가 떠난 그날 황상은 정무를 보던 참이었다. 그 아이가 비록 출궁하여 14황자의 작은부인이 되었지만 황상은 몇 황군을 은밀히 뽑아 그 아이의 소식을 전달받곤 했다. 서신은 매일 밤 황상께서 주무실 시간이 한참은 지난 때에 도착했던 터라 황상은 그때까지 잠을 자지 않은 채 정무에 몰두하시다가, 시간이 다가올수록 눈을 감고 계셨다. 깊은 생각에 잠기신건지 부족한 잠을 주무시는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황군의 기척이 조금이라도 느껴질 때면 눈을 뜨는 것으로 보아 주무신 것은 아닌 듯 했다. 황군은 은밀히 서신을 올리곤 돌아갔는데 그 서신에는 별다른 내용이 적혀있지 않았다. 부인께서 요즘은 통 차를 입에 대지 않으시고, 귀히 여기시던 꽃과 연못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서신을 읽고 계셨다. 황상은 별 내용도 없는, 그 아이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서신을 관료들의 상소문을 볼 때보다 더 찬찬히 한참을 읽으셨다. 그렇게 한참을 되새긴 그 서신을 황상께서는 직접 품에 품고 계시곤 하셨다. 마치 서신에서라도 그 아이를 느끼고 싶으신 것 같았다. 그 아이가 떠난 지 아흐레가 지난 날, 황상은 그 아이를 보러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 아이가 조반을 물리고,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은 채 석반까지 물렸다는 말을 들은 황상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던 그 표정을 드러내보였다, 그 아이를 보러가겠다며 모든 황군을 물리고 홀로 말을 몰고 떠나셨다가, 성문 밖을 조금 지나신 후 얼마가지 않아 차마 그곳에 닿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되돌아 오셨다. 훗날 황상께선 이날의 결심을 두고두고 후회하셨다. 그렇게 아흐레의 밤이 지나고 열흘째 되는 날 14황자의 집에 의원이 드나들었다는 말을 들은 황상은 친히 박수경 장군을 시켜 그 아이의 상태를 파악하고 오라 지시하셨다. 그로부터 두 날이 더 지나고 박수경 장군이 돌아왔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훗날 전해들을 수 있었다. 황상께선 장군과 두시진 동안 깊은 담소를 나누셨는데 그 아이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의원에 말에 따르면 유산으로 인해 이미 많이 지쳐있던 심신이 더 악화되었으며 무릎을 비롯하여 혈이 제대로 돌지 못해 가슴이 자꾸 답답하다는 이야기를 하셨다고 말 하였다. 황상께서는 박수경 장군을 물리시곤 한참이나 앉아계시더니 황궁 첨성대로 가셔서 별을 보며 하루를 지새우셨다. 그 때 별을 보시더니, 문득 일어나시어 붓을 쥐고는 무언가를 써 내리시려고 하셨으나 붓을 놓고 단 한자도 쓰지 못하셨다. 그렇게 열흘하고도 하루가 더 지났다. 오지 않는 서신에 황상께선 왜냐고 여쭈어보셨지만 황군이 돌아오지 않아 정확한 연유를 모르겠다 고했다. 그리고 하루가 더 지나고, 또 다시 하루가 더 지났을 때 황상께서 밤에 조용히 사라지셨다. 석반을 물리시고, 황상이 사라진 후 박수경 장군께서 황군을 풀어 은밀히 황상을 찾았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새벽이 되어 황상께서는 침전으로 드셨는데 궁녀들 말로는 황상께선 화장을 돕던 궁녀를 물리시고 가면을 쓴 채 편전으로 나가셨다. 호족들의 여론이 흉흉해지고 상소가 빗발쳤으나 황상을 그날 이후로 가면을 쓰시곤 그 아이가 만들어준 그것엔 손을 대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두어 달이 지난 후, 14황자께서 서신을 한통 보내시었는데 황상께선 읽지 않으시고 불태우라 명하셨다. 황상께선 고기를 채 입에 대지 않으시고 식사량 자체를 줄이시어 황후께서 직접 식사를 도와 올리셨으나, 보지도 않으신 채 물리셨다. 이후 다시 열흘이 지나고 그 아이의 소식을 들은 황상은 집무 도중 말을 타고 홀로 사가로 가셨으나 이미 때는 지난 뒤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떠난 지 벌써 두해였다.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어제도 온통 정무에만 매달렸다. 무엇을 보든 그 아이 생각이 났다. 처음 그 아이가 떠난 후 하루는 그 아이가 죽은 게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정이의 사가에서 이미 온기를 잃은 그 아이의 손을 붙잡고 계속 그 아이를 불렀다. 그 아이는 끝내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이미 많이 쇠약해진 상태라고 하였다. 유산을 하고 이미 약해질 때로 약해진 몸이 너무나 지쳐버려서, 끝내 견디지 못하고 가버린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그 아이가 마지막 힘을 내 나에게 쓴 서신을, 불태우라고 명했던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 아이는 항상 자신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모든 걸 받고 있다고,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으니 이것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없었다. 그 아이가 선대 황제와 강제로 혼인을 해야 했을 때도, 그 아이가 독차사건에 연루되었을 때도 나는 고문을 받지 않게 도와주지도, 그 아이를 위해 희생한 오상궁을 도와주지도 못했다. 내가 실질적으로 그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었나. 그 아이가 정을 주었던 동생을 살리지도 못하였고, 나의 짐을 덜어주었던 그 아이의 짐을 나는 조금도 덜어주지 못하였다. 은이를 잃었을 때 생각했다. 정말로, 정말로 널 이리 잃을 수도 있겠구나,
수야. 넌 이미 어머니처럼 여기던 오상궁을 잃었고, 너의 육촌언니인 부인을 잃었고, 이 황궁에서 홀로 버텨야 할 너를 나는 또 2년이라는 세월동안 버려두었다. 내가 진정 너에게 해준 것이 무엇일까. 너는 받은 것이 많아 저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항상 누군가를 쉽게 믿고, 따르며 베풀 줄만 알았지 받는 것은 항상 마다하던 너였다. 나는 그런 너를 지키고 싶었다. 수야, 난 너를 지키고 싶었어. 그 모든 것들을 지키기 위해 내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황제가 되었어. 모든 것들에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그런 자리가 되었다. 너에게 이제는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허나 수야, 너는 어찌 그리도 허망하게 가버린 것이냐. 왜 너는 여전히 나에게는 아무것도 받지 않으려 해. 선대 황제는 그리 말하셨다. 황제는 그 어떤 것도 버릴 수 있어야 하는 자리라고. 그래서 나에게 황제의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 걸까.
수야, 나는 너를 아직도 놓을 수 없다. 눈을 감으면 너를 생각한다. 눈을 떠도 너를 생각하지. 봄이 오면 노란 봄옷을 입고 처음 입궁을 하던 너를 떠올리고, 여름이 오면 어여쁜 네가 나와 함께 연못가를 걷는다. 가을이 오면 다미원 뒤뜰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나날을 지난다. 그리고 겨울이 되었을 땐 우리가 함께 맞던 눈이 생각나. 다미원에 가면 네가 생각나고, 네가 백아에게 물어 내가 좋아하는 차를 주었던 그 기 나는 네가 간 뒤로 단 한 번도 그 차를 마실 수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황궁 내에서 정을 붙이던 호숫가에도 차마 갈 수가 없어. 그 배도 단 한 번도 타지 못했다. 흉터를 볼 때, 예전엔 날 내친 어머니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네가 생각이 난다. 네 생각으로 가득차서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네가 흉터를 한 뼘이라고 여기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천천히 흉터를 훑으면서 말갛게 웃어보이던 너를 생각해.
수야, 나는 어찌해야할까. 네가 없는 이 곳에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걸까.
어딜 가도 온통 너뿐이다. 나의 황궁은, 송악은, 이 고려는 온통 너로 차있어. 어둡던 나의 세상을 비춰준 게 너 뿐이라서 나는 너밖에 떠올릴 수가 없다.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건 너 하나라, 나는 그 누구를 보면서 너를 떠올리지도 못한다. 그저, 숨을 쉬면 네가 생각나. 나는 네가 준 서신을 아직도 단 한자도 잊지 못한다. 아마 평생을 그렇게 가슴에 새기고, 보면서 아파하고, 다시 널 되새기고 그리 살겠지.
너는 끝까지 아무것도 받지 않는구나. 얼마 전엔 꿈을 꾸었다. 꽃을 든 네가 나에게 이 꽃이 참으로 어여쁘다며 웃고 있었어. 황궁에는 없는 꽃을 너는 그리도 어여쁘게 들고 서있었다. 너는 황궁과는 어울리지 못한 사람이었다. 너처럼 모질지 못하고, 항상 바보 같은 아이에게 이곳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나는 그 꽃을 기어이 찾아 침소 앞 정원에 심어두었다. 그 꽃은 나흘을 채 가지 못하고 시들시들하더니 결국 가버렸어. 고작 꿈인데, 네가 간 것도 아닌데 그저 꽃일 뿐인데. 나는 그 꽃을 보면서 네 이름을 불렀다. 울음을 토해냈어. 아무리 토해내도 설움이 가시질 않아. 너는 나에게 꽃마저 허락하질 않는구나.
나는 절대 너를 이렇게 보낼 수 없다. 수야, 나는 너를 기다릴 것이다. 바보 같다고 해도 좋다. 그저, 너를 한번만 더 볼 수 있다면, 내가 이 긴 생을 너를 그리며 살 수 있다면 나는 기다릴 것이다.
그러니 수야, 대답해다오. 나를 기억해달라고. 아니다, 이건 너무 너에게 모진 바람이야.
이런 대답 따위 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니까 수야.
내가 널 기다리고, 다시 찾고, 그래서 널 다시 붙잡는다면.
네가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내가 모든 걸 기억하겠다.
네가 기억할 때까지 나는 너를 기다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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