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칼날 무신' 관우(162~219)자는 운장. 촉의 장수로 오호대장의 필두이다. 도리를 존중하고 무예에 뛰어난 희대의 영웅으로 유비, 장비와 의형제의 인연을 맺어 촉의 건국에 진력했다.의리 있고 무용이 뛰어나 '병사 일만명에 필적한다'라는 평을 얻는다.긴 수염으로 인해 '미염공'으라고 칭송받아 그것이 통칭이 된다.의형인 유비와는 또 다른 인간적인 매력으로,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끌어당겼다.<삼국지연의에서 관우>관우가 162년에 태어났다고 설정되어 있으며, 유비, 관우, 장비 3인이 도원결의로서 의형제를 맺었다고 묘사한다. 관우는 태사자가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자 유비와 같이 태사자의 요청에 따라 공융을 구출하러 가서 관해와 90여합의 일기토 끝에 관해를 사살하고 공융을 구출한다.그 후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관우는 공손찬 휘하의 병졸로 참전해 조조의 허락을 받아 술이 식기전에 화웅을 참살하고 연합군의 사수관 점령에 크나큰 공적을 세운다.유비가 서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 관우는 하비 태수의 직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한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하북의 원소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에게 항복할 때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실의 천자에게 항복한다’, ‘유비의 부인 등을 보호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아는 대로 다시 떠난다’는 3가지 조건을 내놓는다. 이 항복을 권유하는 사람으로 나선 자가 장료인데, 여포를 처형할 때 그 부하였던 그를 구해준 것도 관우였다.또한 관도 대전에서 관우는 안량과 함께 원소군의 맹장으로 유명한 문추도 죽였다. 이 공로로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로 봉하고많은 상을 내렸지만, 결국 관우는 유비에게로 돌아갔다고 쓰여 있다.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할 때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실의 천자에게 항복한다’, ‘유비의 부인 등을 보호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아는대로 다시 떠난다’는 3가지 조건을 내놓는다. 이 항복을 권유하는 사람으로 나선 자가 장료인데, 여포(呂布)를 처형할 때 그 부하였던 그를 구해준 것도 관우였다. 그는 삼국지에서도 관우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깊은 유대가 있는 듯이 묘사되고 있다.관우는 조조의 밑에서 유비에게로 떠나는 도중 도중에 5개의 관문을 돌파하고 6명의 장수를 참살한 오관참육장의 설화가 전해지며, 이것은 나중에 적벽에서 패주한 조조를 놔주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관우는 조조를 떠나 유비를 찾아갔다.관우는 적벽 대전에서 대패한 후 화용도로 도망가는 조조를 정에 얽매여 그냥 놓아주고 만다. 제갈량은 이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지만“조조의 운명이 아직 다하지 않으므로 관우에게 의리를 갚게 해도 좋다”라고 말하여 관우를 출진하도록 한다. 그리고 관우가 아무런공도 세우지 못한 채 귀환하자 규율상 제갈량은 “서약에 따라 목을 치겠다.”라고 명령하는데, 유비가 이를 가로막았다. 이후 자존심이 센 관우는 제갈량에게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된다.또한 관우는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조인이 지키고 있던 형북 지방의 번성으로 진격한다. 여기서 방덕과의 대결에서 방덕을 참살하지만 팔을 크게 다쳐 부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뼈를 긁어내며 치료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먹으며 바둑을 두었다 관우가 방덕과의 싸움에서 이 상처를 입었는데, 명의 화타가 그의 상처를 살핀다. 그리고 수술 중에는 마량과 바둑을 계속 두면서 먹고 마셔 화타를 감탄하게 만든다. 관우가 실제로 이런 치료를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다.여몽의 심리전에 의해 군사가 와해되어 맥성으로 후퇴한 관우는 요화를 상용의 유봉과 맹달에게 구원병을 요청한다. 그러나 구원병은 오지 않았고 이후 동오의 제갈근이 찾아온다. 제갈근은 손권에게 항복하여 함께 일하자고 권유한다. 그러나 관우는 유비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이를 뿌리친다. 이후 관우는 조루의 건의에 따라 북문의 포위를 뚫고 서촉으로 탈출하기로 한다. 그날 밤, 관우는 양자 관평,조루와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곳곳에 매복된 오군의 공격을 받아 조루는 난전 중에 죽는다. 그 후, 관우는 미리 매복하고 있던 반장의 부하 마충에게 사로잡히고 뒤따르던 관평 또한 반장의 부하들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관우는 손권에게 끌려가 항복을 권유받으나 "옥은 깰 수 있으나 그 흰빛을 바꿀수 없고, 대나무는 태울 수 있으나 그 곧음을 꺾을 수 없소이다"라고 하며 죽기룰 원하였고 결국 관우와 관평은 참수된다.[정사에서 관우]생애 초창기관우의 초창기 행적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부실하며, 이것은 그와 관련된 군사적인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관우전에 따르면, 하동 해현 출신으로 탁군으로 망명했다가 유비밑에 들게된다. 유비가 평원상으로 진급할 때 관우는 별부사마가 되어 부곡을 다스렸다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관우는 유비의 휘하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선주전에 의하면, 유비는 황건적 토벌과 공손찬휘하에서원소와 싸워 많은 공을 세웠는데, 그 공으로 벼슬을 받은 것이었다면 유비의 휘하에 있던 관우도 전장에서 활약했을 가능성이 높다.특히 계한보신찬의 "藩屏左右,翻飛電發,濟於艱難,贊主洪業"(울타리처럼 좌우를 지키고, 벼락처럼 날아가, 어려움과 곤경에서 구해내어, 주인의 큰 일을 도왔다)를 생각하면 관우는 유비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비의 태수로서..유비가 조조로부터 벗어나 차주를 죽이고 다시 서주를 재탈환했을 때, 관우는 하비성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관우는 태수의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유비가 조조에게 패해 달아나자, 결국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무제기는 이를 짤막하게기록하고 있으나, 관우전은 상세한 내용을 전해준다. 무제기에는 '관우가 달아났다' 정도로 짤막하게 기록되었다. 반면에 관우전에는관우가 조조의 은혜를 갚았으며, 조조는 좌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관우를 관용을 베풀어 놓아주었다는 일화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관우의 무용이 하북을 뒤 흔들다.200년 원소는 “안량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과 재량권을 줘서는 안된다.” 라는 저수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곽도와 순우경을부장으로 임명하고,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이에 대해 조조는 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했다.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군기와 덮개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의 군졸 속에서 단독으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릴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원소와의 전투에서는 안량을 토벌하고 유비의 편지를 받자, 조조 밑을 떠나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자신의 주군 유비를 향해서..조조는 관우를 매우 아껴 그를 설득하여 투항하게한 후 그에게 편장군의 벼슬을 주었고, 그가 안량을 벤 후에는 후의 작위를 내리는등 관우에게 많은 물량공세를 펼치었다. 하지만, 관우는 안량을 베어 빚을 갚은 후 그동안 조조가 보내었던 선물들을 모두 봉해 저택에 고이 두고는 작별을 고하였다. 연의에서 드라마틱하게 묘사된 이 장면은 정사의 내용과 그리 다르지 않다.(드라마틱한 내용은 사실이지만 오관참육장은 허구이다.)당양에서 유비를 구원하는 관우유비에게로 돌아간 관우는 다시 유비를 따라 형주로 들어갔다. 유표의 사후, 유비가 조조에게 쫓겨 당양에서 패했을 때, 관우가 유기가 이끌던 수군을 이끌고와 유비를 구원하는 활약을 펼쳤다.서촉으로 간 유비를 대신해 형주를 지키는 관우유비가 유장에게 조조를 핑계로 유장에게 군사와 물자를 요구하며 슬쩍 찔러보았는데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고 장송과의 밀약이 들통나 유장측의 협력을 얻을수 없게 되자 제갈량, 장비, 조운까지 동원해 익주를 함락시켰다.이후 청니대치에서 관우는 매우 불리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1차로 유비가 방통, 황충, 위연과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촉으로 떠나고 그리고 얼마 후 대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제갈량이 장비, 조운과 함께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유비를 원조하기 위해 떠났다.관우는 2차례에 걸쳐 수만의 병력과 핵심 무장, 참모들을 다 떠나보낸 형주에서 홀로 위군과 대치해야 했다.결국 관우는 악진, 문빙에 의해 패퇴하였다. 남군 바로 위에 위치한 임저가 위에 넘어가고 병참이 문빙에게 불탔으며 부곡 몇 개가 투항하는 피해를 입었다. 청니 대치의 기록이 악진전과 문빙전에만 남아있는 것을 볼 때, 형주 전체를 수복하기 위한 전면공격은 아니고 손권과 전쟁을 벌이기 전에 혹시 모를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형주에서의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국지전 이었던 것으로보인다. 유비는 익주 공략을 우선시하기 위해 형주 전선을 희생하는 도박을 건 것으로 보이며 결국 관우는 별 수 없이 패했다.이후 유비의 입촉에 화난 손권이 형주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이에 손권은 군사를 몰아 형주를 공격했다. 관우는 일군을 이끌고 노숙의 군대와 대치했는데, 관우는 감녕의 별동대에 막혀 강을 건너지 못했다.관우 천하를 진동시키다.216년, 조조는 마침내 위왕이 되고 이 무렵 탕거에서 장합과 장비의 교전이 일어나 장합이 크게 패함으로서 한중 공방전의 서막이 오른다. 218년 법정의 건의로 북진을 한 유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선 조조가 대치하였으나 이미 유비가 요충지를 다 거머쥔 상태에서 나오지를 않았고, 219년에 결국 조조가 그런 유비를 끌어내지 못 하고 철수를 하면서 유비는 한중을 손아귀에 쥐게 된다. 계속된 승리에 촉군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고 이윽고 유비는 한중왕의 자리에 오른다.형주에서 전쟁 준비를 하는 관우한편 형주를 지키는 관우는 병마를 조련시키면서 때를 엿보고 있었다. 그 동안 오는 익양대치 후에도 계속해서 형주를 노리고 있었다.손권과 여몽에게 서주를 공격하는것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지만, 상대적으로 쉬운 형주를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고 관우는 이를 방비해서 공안과 남군에 수비 병력을 다수 배치해놓았다. 219년 촉군의 연승으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 조인은 형주에 진수하고 있었으나 219년 10월 완에서 후음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진압하기 위해 떠나고 이에 관우는 후음과 연계하여 북진을 하는데 이 일은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위의 정예군을 몰살시키는 관우손오와의 동맹이 수복되고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며 촉의 기세가 치솟는 가운데, 조조 최후의 대규모 원정이었던 한중전 패배로 그 권위가 추락했다. 각지에서 손랑,허유 등의 반란이 일어나 중원에 혼란이 일자 관우는 그 틈에 형주의 군세를 이끌고 양양, 번성을 차지하기 위해 북진한다. 조조는 급히 오대장 중 한 명인 우금에게 최정예의 7군을 주어 구원토록 한다.당시의 전투에서 위군과 우금, 방덕은 관우의 이마에 화살을 맞추기도 하는 등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장장 십여일간 계속된 비에한수가 범람하였으므로 칠군은 수몰되었고, 수해를 피한 관우는 배에 타서 허우적대는 위 군을 모조리 화살로 쏘아 죽였다. 우금은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살아남는 군사도 모조리 포로가 되었다. 방덕은 항복하려는 동형, 동초 등의 목을 베고 분전했으나 결국 사로잡히게 된다. 방덕은 끝까지 기개를 잃지 않고 투항을 거부하다처형된다.조인은 여전히 포위된 상태였으며 번성은 5,6장 가량 수몰되었는데 이건 무려 15미터에 가까운 높이이다. 구원을 보낸 최정예병력은 폭우로 인해 수몰되었고, 총사령관은 사로잡혔다. 이 엄청난 전투로 당시 관우의 이름은 온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관우가 온다!! 관우가 와!! 지금 수도는 너무 가까워! 천도해야돼 -천도를 고려하는 조조.당시 조조가 받던 압박감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번성 등이 함락되면 허창과 너무 가까운 위치인걸 생각해 도읍을 옮기는 것을 고려할 정도였다. 이때 호군 장제는 조조의 의견에 반대하며 우금은 홍수에 당했을 뿐, 손권을 이용하여 이 어려움을 해결하자고 한다. 유비와 손권의 사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말에 조조는 용기를 얻고 손권에게 연락을 취하자 장제전에 의하면 손권은 '즉시' 움직였다고 한다. 동맹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관우 하나를 막으려고 동원 할 수 있는 위나라 올스타를 총출동시킨거다. 거기다 오나라는 여몽과 육손까지..서황에 이어 장료까지 전진 배치 시키는 조조조조는 서황을 2차 구원병으로 파견시켰다. 그리고 동남방면의 장료를 관우쪽으로 전진배치시킨다. 당시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고 있었으나 온회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온회는 손권은 걱정할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오히려 장료마저 소집될 것을 확신한다. 이것은 물론 오와 밀약을 맺었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 오군이 합비로 올 일은 절대 없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면 이 조치는 대들보 빼서 기둥으로 쓰는 모양밖에는 안된다. 심지어는 자신마저 서황의 뒤를 이어 남하하기 시작한다. 당시 조조의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였다.만총의 탁월한 판단과 조인의 수비력.급박한 것은 번성의 조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번성은 완전히 물에 잠겨서 도저히 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군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지원군 역시 수몰되었으므로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에 번성을 버리고 달아나자는 자도 있었으나 어떻게든 이곳을 사수하여야 된다는 만총의 말에 조인은 제장들을 다시 모아 결사의 각오를 말하니 모두가 감격하여 다시 군사들의 사기가 올랐다.그리고 실제로 조인의 이런 끈질긴 항전으로 관우는 혹시나 뒤가 끊길까 하는 염려에 섣부른 북진을 하지 못하고 번성에 발이 묶여 당시 한중공방전과 7군의 패배, 그리고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한 상태였던 조조에게 대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게 되고 만다. 만총의 판단이 적절했던 셈.조인을 포위시키고 칠군을 섬멸시킬 때까지 관우는 완벽했고 그 위엄은 온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전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거짓말처럼 바뀌어 버렸고 그 일에는 두 명의 남자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부의 장인이 출동하는데.....조인은 군기를 다독였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여전히 성내에 물이 가득차 빠지지 않고 있었다. 한편 관우는 상용에 있는 유봉과 맹달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으나 유봉과 맹달은 아직 점령하지 얼마 안 되어 군사를 보낼 여지가 없다면서 군악대를 가지고 싸우고 있는 형국이었고 미방의 병량보급 또한 원할하지 못해 관우는 3만 포로의 식량까지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물러나지 않고 영릉군의 상관에 있던 오의 병량고까지 약탈해가며 포위망을 유지시켜 점령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었다.서황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한 것은 이 때였다. 서황은 최악에 상황에 처한 조인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용의주도하게 관우를 살피며 전투를 피하고 지원을 기다렸다. 이에 대한 제장들의 불만이 없지 않았으나 그때 의랑 조엄이 그들을 잘 다독여 내분은 피할 수 있었다. 서황이 지원을 기다린것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서황의 병사들이 대부분 신병이라 관우의 강병을 베겨낼 수 없었기 때문으로, 조조는 직접 서황을 지원할 계획을 세우지만 환계의 조언에 따라 은서와 주개를 파견하고 12영의 군사들이 서황에게 지원군으로 도착해 전투가 시작되자 서황은 그간의 소극적인 움직임이 무색하리만치 어마어마한 싸움을 보여주었다.역전되는 전세.서황은 괴물같은 용맹으로 관우를 패퇴시킴은 물론, 포위망까지 걷어내버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패퇴하는 관우의 뒤를 쫓아 10겹의 포위망을 전부 깨고 추격하는 초인적인 용력을 발휘했다. 이에 도망갈 곳이 없어진 촉군들은 자포자기로 물에 뛰어들어 죽는 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전방에서 서황이 그 가공할 힘으로 관우를 압박하던 때에, 후방에선 동오의 대도독 여몽이 거미줄을 준비하고 있었다.손권은 마지막에 공격하기 전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관우 공격을 비밀로 해달라고 하고 조조의 신하들은 이를 손권의 말대로 비밀에 부쳐야 한다고 했으나 동소가 나서 이 사실을 번성과 관우의 본진에 편지를 쏘아넣게 하니 번성의 병사들은 용기백배. 서황 연합군에 의해 패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양양과 면수 일대를 점거한 상태였던 관우는 무슨 생각인지 이것을 보고도 주저할 뿐 돌아가지 않는다.호삼성은 이를 보고관우는 비록 손권의 편지를 보았으나 스스로 강릉과 공안의 수비가 굳어서 손권이 단시일 안에 뽑아버릴 수 없다고 믿었다. 또한 물의 기세를 통하여 번성에 다가갔는데 이를 풀어놓게 되면 반드시 앞서 세운 공로를 해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가 미루는 이유이다. 라고 해석을 하였다.과연 관우는 오나라의 국경에 둔영의 관측소를 세워둬 언제든지 신호가 오면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성안에 병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의 생각은 맞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몽은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당시의 정세. 여몽은 정예 병사들을 모두 큰 배 안에 숨겨놓고 흰옷을 입고 노를 젓게 하고 상인의 복장을 하고 침입하여 관우가 마지막으로 혹시 몰라 남겨둔 강변의 둔후들을 모조리 붙잡아 묶으니 관우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관우가 경계를 위해 세워둔 둔들을 틀키지 않고 정복한 여몽은 예전에 익양대치에서도 편지 두 장으로 장사, 계양 두 군을 항복시키고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등현지를 이용해 영릉을 얻은 것 처럼 이번에는 기도위로 있다가 손권에게 쫓겨난 우번을 손권에게 억지로 부탁해서 끌고온 후 이용하기로 한다. ▲ 이런 가 유비의 처남이다..아무런 대항도 하지않고 항복하는 미방과 부사인.당시 수비 책임자는 남군의 미방과 공안의 부사인이었는데 당시 미방 등은 군량을 태워먹은 죄로 관우에게 심한 꾸짖음을 들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여몽은 우번에게 그들을 설득하게 한다.먼저 우번이 만나게 된 것은 부사인. 우번은 그를 직접 설득하려고 하나 부사인은 만나주지도 않는다. 우번은 그것을 보고 부사인에게 편지를 쓰는데 부사인이 이것을 보고 자신이 관우에게 당한 서러움이 터진 탓일까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항복한다. 우번은 부사인의 항복을 확인하자마자 이는 휼병[譎兵]이니 응당 부사인을 데리고 가야 하며 군사를 남겨 공안성을 수비해야 한다고 하니 여몽은 부사인을 데리고 미방이 있는 남군으로 간다. 부사인 같은 사람에 비해서 서주부터 유비를 따르고 동생은 유비와 결혼도 했고 촉에 형 미축이 있는 미방이었지만 전부터 관우에게 업신여김을 받던 처지라 부사인을 보자 별 미련도 없이 시원스레 성을 넘겨주고 만다.오록에서는 한술 더 떠서 관우한테 미방과 부사인이 꾸짖음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손권이 이들과 비밀리에 내통해, 이들은 여몽이 오자마자 술과 안주를 바리바리 싸들고 항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미방의 항복은 남군성 사람들로는 "이게 뭥미?"의 상황이었기에 몇몇 사람이 복병을 만들어 성급하게 연회를 여는 여몽을 공격하려 했지만 우번이 이를 예측하고 여몽에게 경고를 하고 여몽 또한 우번의 말을 들어 관악을 장악한 탓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 강릉 군민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몽은 그곳에 잡혀있던 우금과 관우와 그의 장수, 병사들의 가족들을 붙잡았는데 여몽은 그들 모두를 위로하고 보살폈으며, 군대의 약속을 하고 다음과 같은 명령까지도 내린다.여몽은 그 말을 지켜 여몽과 같은 군 사람이 공적인 물건인 관의 갑옷을 지키기 위해 민가에서 삿갓 한 개를 빼앗아서 갑옷을 덮는 사건을 발생했을 때도 군령을 범했는데 고향사람이라고 용서할 수는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목을 베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후 군영 안에서는 두려움에 떨면서 길에 떨어져있는 것조차 줍지 않았다고 한다.거기다가 여몽은 아침저녁으로 측근들에게 기로[33]들을 구휼하고 부족한 것이 있느냐고 묻고 병에 걸린 자에게는 의약품을, 춥고 배고픈 자에게는 옷과 양식을 내어주면서도 관우의 관부의 재물과 보화는 봉쇄하고 손권이 올 때까지 사용하지 않는다. 그때 이제야 소식을 들은 관우는 돌아오는데 길에 확인차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여몽이 원하던 바.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안을 다니며 다른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과 만나보게 하고 편지까지받아가게 한다.이 병사와 장수들의 가족들이야 말로 여몽이 미친듯이 잘 대해주던 그 사람들인지라 그런 그들의 말을 듣고 편지를 받은 관우의 사자가 돌아와 가족들이 병사에게 보낸 편지를 모두 보여주고 얼마나 잘 지내는지를 말로 설명해준다. 그리고 병사들은 모두 자기 집에 무탈하다는 것을 알고, 심지어 평소보다 더 잘 대우받는 것을 알게 되고 저절로 관우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무신의 최후적을 몰아부치던 상황에서 순식간에 근거지를 잃고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관우는 맥성에 들어가 응전을 벌였으나 전세는 기울고도 한참을 기울었다. 급기야 관우는 거짓항복까지 시도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우번의 점괘의 내용대로 반장과 마충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된다.관우는 참살당했고 그 수급은 허도의 조조에게로 보내진다. 이때 손권은 촉에 있다가 유비에 의해 공안으로 쫓겨난 유장을 얻고 그를 익주목으로 삼아 자귀에 주둔하도록 했는데 얼마 안 되어 유장은 죽었다.동아시아에서 영원히 신이 된 관우.관우는 살아있는 당시에도 천하의 명장으로 손꼽히고 있었으며, 이는 현재까지 여러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당나라때는 무안왕이 되었고, 명나라때는 황제로 임명되었으며, 청대 들어서자 관성대제, 관제로 불리우게된다.중국은 관우의 묘가 전국에 퍼쳐 그를 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심지어 한국에서도 서울 한복판의 그의 묘가 있다.바로 1호선 동묘앞역의 동묘가 바로 관우의 묘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임진왜란 후 명나라 만력제가 친필 헌판을 보내준 것이 보관되어있기도하다.1편 합비의 수호신 장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