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숙 씨는 지난해 추석부터 7개월 동안 매 주말 1박2일 일정으로 호남을 찾았다.
지난 대선 때 호남의 많은 이가 문 전 대표를 도왔지만 정작 호남을 얼마나 이해하고 도왔는지 몸소 느껴보고 싶어서다.
집을 떠나면 잠을 잘 못 자는 그가 매주 마을회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겠다고 ‘폭탄선언’을 하자 문 전 대표가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김씨는 “(문 전 대표가) 처음 몇 번 다니다 말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라며 “한 달, 두 달 지났는데도 빠지지 않고 내려오자 나중엔 놀라더라”며 환하게 웃었다.
7개월간 호남의 섬까지 돌며 민심을 들은 김씨는 호남에서 들은 얘기를 ‘보약’이라고 표현했다. 7개월 동안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몸은 물론 마음까지 건강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며 “작은 마을의 어르신들을 직접 뵙고 말씀을 나누다 보면 보약 같은 얘기를 많이 해주신다. 그게 다 내 에너지”라고 강조했다. 매주 방문한 덕에 ‘문재인 호남특보(특별보좌관)’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최근 몇 달간 사람들 만나느라 굉장히 바빴다.
“남편이 일정에 쫓겨 못 만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내 일이다. 그저 사람들과 소통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많이 들으려 한다. 그게 익숙한 일은 아니니까 만나러 갈 때 항상 긴장하고 마치고 와서는 힘들다. 항상 실수하거나 잘못한 게 뭐가 있나 생각한다. 두려운 일이지만 해야 할 일이고,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다시는 실패하고 싶지 않다.”
―작년 추석 때부터 혼자 호남을 계속 찾는다는데.
“2012년 낙선하고 도와주신 분들과 시민단체에 인사 말씀을 드리러 갔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광주 아파트 밀집촌을 지나는데 그 불빛 속에서 내가 앓았던 절망감, 상실감을 느꼈다. 우리를 지지해준 광주의 92%가 이 아픔을 안고 있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지방으로 갈수록 혈연 학연 지연을 더 따지는데, 광주에서는 아무 연고도 없는 저희를 92%라는 압도적 지지로 찍어줬다. 오로지 정권교체의 일념인 것이다. (울먹이며) 하지만 실패하고 나니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그 감정들을 해소해야 했다. 그분들의 실망, 상처를 위로하고, 나도 열심히 했던 걸 위로받고 싶었다.
그래서 광주에 가면서 제 나름의 원칙을 정했다. 언론인은 안 만난다, 정치인도 안 만난다. 그래야 나를 만나려는 분들이 더 진솔하게 힘든 얘기들을 내게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반년 가까이 했더니 그분들이 ‘이제 여기 오지 말고 전남, 전북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더라. ‘아, 내가 이렇게 진심을 여는 순간, 그분들은 마음을 열어 준비했던 말을 나에게 하는구나. 그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요새는 도서지역을 다닌다. 광주는 내가 남편의 모자란 점을 받쳐주는 곳이기도 하고, 거기서 나도 몰랐던 걸 배운다. 서로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를 주고 받는 시간들이었다.”
-어느 섬에 주로 갔나.
“낙월도, 완도 등에 갔고, 지난주에는 소안도에 갔다. 가면 마을회관에서 하루씩 자고 온다. 요새는 시설도 좋고 따뜻해서 편히 잘 수 있다. 가서 지내다 보면 정부가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도서지역에는 고령인구밖에 안 남아 노동력 부족 문제, 의료지원 문제 등 세세히 들어볼 게 너무 많다. 이런 걸 몰랐다. 관념적으로만 알았다. 이렇게 알게 된 걸 문재인 후보에게 얘기해 주고,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해볼 기회를 나도 얻는다. 정치인은 헛약속을 안 해야 한다. 그건 좀 더 세세히 알고 느꼈을 때 가능하다. 이런 게 정치인의 아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 깨달으면서 다닌다.”
-지난 대선 때도 그렇게 했으면 좋았을 걸 싶겠다.
“그때는 알아도 못했을 거다. 2012년 4월에 초선의원이 되고 6월에 대선 후보 경선이 시작됐다. 그때는 당원동지 여러분이 뭔지도 몰랐다. 다만 지난 대선 때 너무 급하게 시간에 쫓겨 30분만 지나면 다른 곳으로 옮겨 다녔는데 만나러 온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번에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만난다. 만나면 얘기를 들어야지 정치인이 무슨 큰 벼슬이라고 눈도장만 찍고 가나. 이분들은 자기들의 권리, 힘든 얘기, 정권교체의 열망을 얘기하겠다며 하루, 이틀을 버리면서 오는 거다. 과연 정치인들은 무엇을 했던가, 오로지 바라기만 하고, 참여해달라는 말만 한 건 아닌가 깨달음이 많았다. 앞으로도 계속하려고 한다.”
―단골 목욕탕이 생겼다고 들었다.
"낯선 곳에 묵다 보니 누굴 만날 때 차림새가 엉망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목욕탕을 찾았는데 6개월쯤 매주 이용하다 보니 할머니들이 '누구냐'고 물어 '문재인 부인'이라고 말씀드렸다. 거기서 생긴 별명이 '문재인의 호남 특보'였다. 최근에는 전남의 섬들을 찾아 마을회관에서 묵고 있다. 3월 8일에는 독립유공자 자손들이 많이 사는 소안도를 찾았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위해 국가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ㅡ문 후보가 고마워하며 잘해주겠다.
“남편이야 항상 나한테 잘해줬다. 신뢰를 주는 사람이고, 따뜻한 사람이다. 표현은 안 해도 내가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자기가 다 해주는 사람이니까. 근데 말투가 좀 그렇다. 경상도 남자고, 법조인으로 살아서 말에 대한 책임감이 너무 크다. 피란민 집안의 가장으로 어렵게 살면서 참을 줄만 알았지 ‘나 어려운데 좀 도와줘’라는 얘기도 할 줄 모른다. 알아서 도와주면 고마워 하면서도 말을 못한다. 쑥스러워서 말 못했던 것, 정서적으로 소통하는 것, 그걸 내가 좀 잘했던 것 같다.(웃음) 남편에게 도움을 주는 것 같고.”
-현재 지지율 중 몇% 정도 본인이 올렸다고 생각하나.
“(웃으며) 그건 모르겠고. 남편이 정치가로서 할 일을 하게끔 돕는 게 내 몫이다. 하지만 국민이 바라는 영역을 넘어서면 그건 나대는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것, 남편이 해야 할 일인데 그래도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12년 대선 때와 어떻게 달라졌나.
"대선 패배 이후 책임감이 더욱 커진 것 같더라. 지금 남편은 정권 교체에 대해 책임감으로 절박하다. 2012년에는 '난 머리 염색 절대 안 한다'고 하더니 지금은 염색도 혼자 한다. 과거에는 자기의 원칙이 우선이었다면 지금은 국민이 원하는 문재인의 모습과 자기 원칙을 맞춰가려고 한다."
―대선 후보로서 남편을 평가해달라.
"처음과 끝이 다 보이는 사람이다.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왔다. 젊을 때 부동산으로 돈 좀 벌고 싶어 주택 청약하러 국민은행에 가려는데 남편이 '집 없는 사람들 위한 것 아니냐. 당신 국가 상대로 사기 치는 거야'라며 말렸다. 그 이후로는 그런 걸로 돈 벌 생각은 접었다. 속으로 '당신, 얼마나 잘사나 보자'고 생각은 했지만(웃음). 지금 국민이 원하는 것은 원칙 있는 대통령 아닌가. 적폐 청산이 필요한 탄핵 국면에서 국민이 남편을 가장 많이 지지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실장 부인으로서 권력의 엄중함을 보지 않았나.
"청와대 민정수석 할 때 남편도 나도 숨죽이고 살았다. 만나자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안 만났다. 나도 옆에서 권력의 무게와 책임감을 지켜봤다. 그래서 지금 아주 많이 두렵다."
―문 후보 안보관에 대해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문제라면 정말 걱정할 필요 없다. 함흥 출신 시아버지는 공산주의가 싫어서 피란 나왔고 남편은 그런 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반공교육을 받았다. 요즘도 미국에 있는 시댁 친척들까지 전화를 걸어와 '아니, 누가 우리 재인이한테 ×××라고 해. 말도 안 된다'며 하소연을 한다. 나도 보수적인 집에서 컸다. 트집 잡을 것이 없어 뭔가 옭아매려고 좌파라고 하는 것 같다."
―자녀 교육에 대한 부부의 철학은.
"무엇보다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우고 싶었다."
―남편을 평소에도 '재인씨'라고 부르나.
"'재인씨'라고도 하고 '여보'라고도 한다. 갑자기 '누구 아빠'라고 부르면 그 사람에게 또 아빠로서의 책임을 지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문 후보께서 대학 시절 시위하다 최루탄을 맞아 실신했을 때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준 인연이 연애의 시작이었다는데, 지어낸 것 아닌가 싶게 로맨틱하다.
“제 친구의 오빠가 문 후보랑 같은 법대에 다녔다. ‘재인이가 멋있는 친구인데 축제 같은 때 늘 혼자 온다’며 1학년 축제 때 소개해줬다. 남자가 무슨 양복 정도는 입고 올 줄 알았는데, 이상한 초록색 잠바에 회색 바지를 턱 입고 왔더라. ‘내가 지금 대접받고 있는 거야?’ 싶으면서 별로였다. 이듬해 유신반대시위를 하는데 비장하게 선두에 서서 교문 앞 장갑차를 향해 돌진하더라. 그런데 그 이상한 초록 잠바에 회색 바지를 똑같이 입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아는 사람 아닌가. 가서 물수건으로 닦아 주는데 문재인씨가 눈을 반짝 뜨더라. 그 후 이렇게 됐다.(웃음) 그 사람은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자유롭게 해줄 것 같아서 좋았다. 나는 성악가니까 외국에 나가는 큰 꿈도 꾸었는데, 내가 온전히 나의 삶을 꾸려도 뭐라 간섭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관습에 의해서 여자는 이렇다는 둥 하지 않을 것 같은 유일한 사람이랄까. 내가 많은 남자를 만나본 건 아니지만.(웃음)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한 가치관이 잘 맞았다. 편안하고.”
-두 분 사진을 보면 남편보다 애정표현에 더 적극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얘기되고는 있다. (섭섭한 듯) 사진마다 그렇더라. 사실 남편이 끊임없이 나를 좋아하고 믿는데, 왜 사진에는 항상 나만 좋아하는 눈빛으로 나오는지 이상하다.(웃음)”
-5년 전과 비교해 정치인으로서 남편의 달라진 점은.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절박하다. 지난 대선에서 정치초년생인 남편이 대선 후보가 된 것은 시대적 호명이었다. 꼭 정권교체 해야겠다, 그런데 기존 정치인보다 당신이 나은 것 같다, 그래서 나온 것 아니겠나. 그걸 못 이루고 난 후 역행하는 시대를 보면서 자신의 실패를 넘어 역사 퇴행에 대한 책임까지 느꼈다. 나도 변했는데 얼마나 절박했겠나. 1~2년 전만 해도 왜 사람들은 나한테 사명을 주듯 ‘문재인씨한테 잘해주세요’ ‘건강 잘 챙겨주세요’ 그러는지 너무 섭섭했다. 이제는 이 사람이 내 남편이 아니다, 깨달았다. 집안에서 소소하게 뭘 못한다고 잔소리하고, 왜 그러냐 섭섭해 하고 그러면 안 되겠더라. 문 후보가 다치지 않게, 건강하게, 안정되게, 올바른 판단을 하게 지켜주는 게 내 일이다.”
-문 후보께서 정치적 고민이나 바깥에서 겪은 속상한 일에 대해서 잘 얘기하는 편인가.
“잘 안 한다. 내가 잘 모르기도 하고. 우리는 대학교 1학년 때 만나서 서로의 인간관계를 잘 알고, 따로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런데 정치인이 되면서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벽이 생긴 거다. 덕분에 좋은 것은 내가 정치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접받은 적이 없기에 한국 정치의 고질병이라고 하는 권력의 병폐, 남용, 그걸 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사람이란 게 처음에는 보좌관이 가방 들어주는 것도 싫다가, 5년 후 재선 의원 부인이 돼 보좌관이 가방을 안 들어주면 이상하게 느낀다. 나는 그런 구태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요즘 이런 일(탄핵과 조기 대선)이 자꾸 벌어지는 걸 보면 두려움에 악몽도 꾼다. 그럴 때 나를 지키면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안심하는 이유가 대접 받는 게 습관이 안 됐다는 거다.”
-미셸 오바마가 새로운 모델로 떠올랐다. 영부인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나답게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 영부인이란 남편이 정치를 잘하도록 도와주는 게 기본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영역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소통능력을 살리고, 과하지 않게 지금처럼만 하면 되지 않을까. 또 요즘 많이 생각하는 게 여성문제다. 우리가 살던 시대의 여성관은 이제 달라졌다. 제 딸과 며느리 모두 아이를 키우는 30대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여성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도록 많은 전문가들과 다양한 연구, 공부를 해보고 싶다. 일하는 여성, 경력단절 여성, 가임 여성들을 도울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 국가가 비혼 여성들에게 꼭 결혼을 하라고 몰아갈 게 아니라 비자발적 비혼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책들을 마련해야 한다. 세세하게 연구하고 공부해서 그런 정책들이 나올 수 있도록 주춧돌을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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