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도선을 넘어 남진하고 있는 인민군 부대

한국전쟁 초기에 혼란을 불러 일으킨 신성모 국방장관(가운데), 그의 경력은 외항선 선장 외에는 전혀 없었다.
왼쪽이 김활란 이대 총장, 오른쪽이 백선엽 장군. 이 두 사람은 국내외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친일파였다.

1950년 6월의 한강 인도교 폭파를 책임졌던 최창식 공병감은 같은 해 9월21일에 부산에서 처형.
박정희 정권 시절 재심이 진행되어 1964년10월23일에 재공판, 명예회복.
대통령의 도주 사실을 뒤늦게 안 대한민국 국회

1951년 7월 부산 피란 시절 전황을 듣는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왼쪽 첫 번째), 신익희 국회의장(왼쪽 두 번째)
무초 주한미국대사(오른쪽 첫 번째). 이 자리에 없는 국회의원들은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해 대부분 납북당한다.
정부고관과 국회의원들의 '탈출경쟁'이 시작되다

국민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이승만 대통령 부부

부산에서도 일본이나 제주도로 도망치려는 지도층 인사들은
일본으로 도망갈 때 필요한 배를 찾고 있었다.
비겁한 고위 관리에게 투숙을 거부한 성남장 주인
대통령과 고위 관리들과 장군들은 집의 가재도구는 물론 심지어 개까지 트럭에 싣고 대전으로 피난갔다.
7월 1일 북한군이 평택에 들어 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위 관리들은 자신들만 전주로 피신했다.
소식이 오보임이 알려지자 그들은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성남장에 투숙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분하여 성남장 주인 김금덕은 투숙을 거부한다.
이것이 유명한 '성남장 사건' 이다.(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 1권, 1983년)
"뜰에는 그 사람들이 타고 온 자동차가 80대 이상이나 주차돼 있었고
그 중에는 가재도구부터 개까지 끌고 온 사람도 있었다."
"식사용 쌀이 하루 다섯 가마나 필요했고 반찬만도 큰 일이었다."
"반찬 타령을 하면서 맛있는 요리를 내오라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위급상황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지 않고 자신들의 안전한 피난 방책 얘기만 나누고 있었다"
"이시영 부통령은 다른 반찬이 있어도 김치와 찌개만을 먹고 검소하게 처신을 해서 훌륭한 인품을 보였다."

중국 대륙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조국의 광복에 일생을 바친,
피난살이 중에도 독립투사의 면모를 잃지 않은 이시영 부통령.
1951년 5월 9일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 중의 하나인
국민방위군 사건을 비판하며 '국민에게 전하는 글' 을 남긴 후 사임한다.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도 의주로 피난을 갔다.
이승만처럼 야반 도주한 것이 아니고 신하들과 격론을 벌인 끝에 공개적으로 떠난 것이다.
신하들도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그들을 안내하고, 식량을 조달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왕의 아들들은 병사를 모으느라 고생을 했고 선비들은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아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한국전쟁 같이 추한 행태를 보인 지도자들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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