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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925
이 글은 8년 전 (2017/12/25) 게시물이에요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 인스티즈



네가 내 얘기를 한다고 들었다 내가 쓰는 것과 내가 읽는 것에 대하여 너의 발목을 타고 흐르는 나의 목소리에 관하여 하나뿐인 나의 라디오에 대하여 까마귀처럼 너희는 모여 앉아 얘기한다고 들었다

 

손미, <소문> 부분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 인스티즈



내내 괴롭다 그네를 타기 전에 그네의 의사를 묻지 않은 것이 바지를 입기 전에 바지의 의사를 묻지 않은 것이 차를 마시기 전에 찻잔의 의사를 묻지 않은 것이


그네의 목표는 희미해지는 것 찻잔에 들어가 목만 내밀고 있다 오랫동안 나를 우려냈는데 왜 아무도 오지 않는 걸까

 우리의 목표는 희미해지는 것 그리고 끝내 희미해지는 것

  

손미, <공중그네> 부분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 인스티즈



병원에 와서 자기 생각을 찾고, 자기를 찾고, 결국 타인마저 고양시키는 그들은 하나같이 슬픔의 왕들이에요 되게 망쳐버린 부분이 있고 꼭 되찾고 싶은 생활이 있습니다


너무 슬플 땐 무서운 게 없더라네요 아무래도 내겐 공포를 지나칠 수 있는 슬픔 같은 건 없으니까, 내가 무언가를 말해도 되는 걸까, 나의 멀쩡한 집과 가족을 어떻게 설명할까


의사가 미소 짓습니다 괜찮으니 이제 제 이야기를 해보라네요 그냥 슬픔의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중인데, 이야기 속에서 나는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는데요


김상혁, <슬픔의 왕> 부분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 인스티즈



한 해골이

비스듬히 비석에 기대어 서서

비석 위에 놓인 다른 해골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섬세한

잔뼈들로 이루어진 손

그토록 조심스럽게 

가지런히 펼쳐진 손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이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을 들여다본다

 

(우린 마주 볼 눈이 없는걸) 

(괜찮아, 이렇게 좀더 있자)


한강, <해부극장>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 인스티즈


 

어딘가를 가려는데

혼자 가기 무서워서 심심해서

누군가와 같이 간다면 그 누군가는

아무라도 좋은가, 생각하다

이왕이면 하필이면

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그랬다


너는 녹슨 이마를 가졌고 

나는 축축한 손을 가졌다

 

나는 축축한 손으로 네 이마를 만졌고

내가 만질 때마다 너는 아팠다

네가 아픈 건 내 죄가 아닌데

나는 죄책감에 시달려

너보다 조금 천천히 걸었다

 

유형진, <허니밀크랜드의 녹슨 이마와 축축한 손> 부분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 인스티즈



그가 음독(飮毒)하며 중얼거렸다는 말

인간은 원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상상한다

 

천문학자가 아니었으며

심지어 정치를 했다는 이력으로 한 죽음을 이해할 필요는 없고

 

눈이 아프도록 흩뿌려진 별 아래

당신의 몸속 세포와

궤도를 도는 행성의 수가 일치할 거라는 상상이 길다

 

저 별이 보입니까

저기 붉은 별 말입니까

 

조용한 물음과 되물음의

시차 아래

점점 수축되어 핵으로만 반짝이던

한 점 별이 하얗게 사라지는 중이다

 

어둠을 찢느라 지쳐버린 별빛은

우리의 눈꺼풀 위로 불시착한 소식들

뒤늦게 도착한 전언처럼

우리는 별의 지금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마주할 수 있을 뿐

 

어떤 죽음은 이력을 지우면서 완성되고

사라지는 별들이 꼬리를 그리는 건

그 속에 담긴 질문이 너무 무거워서일지도 모른다

 

불가능하게 무거운 저 별, 별들

 

이은규, <별들의 시차>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 인스티즈


 

어둠일수록 별을 아끼는 이유

다가올 문장들이 기록되 문장들의 주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해석에의 동경보다 오독을 즐겨 할 것

언제일까 스스로 귀를 자를, 문장의 시간 

 

이은규, <차갑게 타오르는> 부분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 인스티즈



너를 사랑해서 아프다고 소리쳤어 그 소리는 뻗어나가 천장에서 날카롭게 얼어붙지 유리처럼 공중에서 부딪혀 깨지는 소리, 바스라지는 소리, 부서져 흩어지는 소리 화날 때 왜 사람들이 물건을 집어 던지는 줄 알아? 자신의 분노가 얼마만 한 크기인지, 어떤 모양인지 궁금해서 그래 그래서 무엇인가 와장창 소리 나고 부서지고 흩어지고 깨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가슴속에 담겨 있던 화를 눈으로 보는 거야 거친 호흡을 내쉬며 천천히 바라보는 거야 그렇게 관찰된 객관적 상관물이 된 자신의 화를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다 보면 알게 돼 , 나의 화는 별거 아니구나 유리처럼 투명하고, 서리처럼 뾰족하고, 공중에서 깨지고, 흩어지고, 흩어져서 날리고, 날려 사라지는 급기야 어디로 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분노들 싸움이 잦은 집 세간들을 잘 봐 봐 그 집 식구들 얼굴처럼 어딘가 어둡게 그림자를 만드는 찌그러진 구석이 있어 테이프와 순간접착제로 잘 붙였지만 주의 깊은 사람은 금방 알아챌 수 있게 살짝 깨져 있지 전기압력밥솥의 뚜껑도 일그러져 모양이 반듯하지 않지만 처량하게도 제구실을 하며 매일매일 칙 칙 칙 칙 압력을 빼며 밥을 짓지 너를 너무 사랑해서 아프다고, 이렇게 내 안에는 폭발할 게 많은데 참고, 참고, 참고, 참으며 다 끌어 담고 매일매일을 규칙적으로 칙 칙 칙 칙 시간 맞춰 빼주지 않으면 스스로 빠질 수 없는 화를 가득 담고 매일매일 저녁이면 밥 짓는 냄새가 집집마다 흘러나오지

 

 

 

유형진, <雲井6>






게시글의 제목은 손미 시인의 시집 [양파공동체] 시인의 말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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