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식(Baeksik) · 감정은 왜 항상 제멋대로야(ft.Krom,햄찌(HAMZZI))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 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 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진은영, 멜랑콜리아
젓가락, 접시, 소시지, 오렌지 주스, 달걀···
그런 것들이 될 거야
사물이 된다면
달그락거림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은 언제나 숨겨지고
수평선은 어둠을 끌어올리지
어둠에서부터 파도가 밀려오는 거야
눈물이 나는 건
물새떼처럼 알 수 없고
구름처럼 멀리 있는 것들 때문이지
가라앉아서 숨을 쉬자
물고기가 된다면
수영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 삶은 사라지게 될 거야
아무것도 슬프지 않을 거야
박시하, 구체적으로 살고 싶어
그때 덤프트럭에 치인 게 내가 아니라 왜 고양이였을까
그는 그저 죽은 고양이 옆에 동전 몇 개를 두고 왔을 뿐이고
두 갈래 길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하는 동안 그는 왜 세 갈래가 아니냐며 억울해했다
가끔은 그런 걸 고민할 때가 있다 그의 왼편과 오른편 중 어디에 서서 걸어야 할지
그에게 물어봤다면 그게 고민할 만한 거냐고 되물었겠지만
식당에 가면 어디에 앉을지 망설였다 그래서 내가 앉은 곳은 항상 그의 건너편이었다
참지 못할 때마다 나를 벗어나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 그는 세상엔 용서 가능한 일이 너무 많다고 말했는데
쥐인지 참새인지 모를 납작한 사체를 향해 나이만큼 침을 뱉던 날도 있었다 어제였거나 유년이었거나 십 년 뒤의 일이었고
다른 나라에서 어떤 맹인이 귀를 잘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맹인은 칼 대신 동전을 쥐고 있었을까
같이 죽어 버리자고 만났으면서 왜 이런 얘기나 하고 있는 걸까 둘 말고 아무도 없는 방이었고 밤이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옆을 더듬어 그를 찾았다 그러자 그가 존재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서로가 존재하고 있었다
양안다, 우연오차
'그때 우리는 여름의 정점에 있었다. 여름. 과연 그런 때가 있기나 했던 걸까. 모든 게 푸르고 무성하고 절정이었던 때가. 우리가 함께 경험한 게 정말로, 진짜였을까.'
‘같은 말을 여러 번 되뇌면 말의 뜻이 흐릿해지는 때가 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글자는 글자를 넘어서고, 단어는 단어를 넘어선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외계어처럼 들린다. 그럴 때면, 내가 헤아리기 힘든 사랑이니 영원이니 하는 것들이 오히려 가까이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말했듯이, 사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딱 나누는 것 따윈 애초에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삶은 여러 맛을 지닌 채 그저 흘러간다.'
손평원, 아몬드
누군가 내게 주고 간 사는 게 그런 거지라는 놈을 잡아와 사지를 찢어 골목에 버렸다. 세상은 조용했고, 물론 나는 침착했다. 너무도 침착해서 누구도 내가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 후로도 나는 사는 게 그런 거지라는 놈을 보는 족족 잡아다 죽였다. 사는 게 그런 거지라고 말하는 이의 표정을 기억한다. 떠나는 기차 뒤로 우수수 남은 말들처럼, 바람같은. 하지만 그런 알량한 위로의 말들에 속아 주고 싶은 밤이 오면 나는 또 내 우울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골목을 걷는다. 버려진 말들은 여름 속으로 숨었거나 누군가의 가슴에서 다시 뭉게구름으로 피어오르고 있을지 모른다. 고양이도 개도 물어가지 않았던 말의 죽음은 가로등이 켜졌다 꺼졌다 할 때마다 살았다 죽었다 한다.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라고 누구도 말해 주지 않는 밤. 난 내 우울을 펼쳐 놓고 놀고 있다. 아주 나쁘지만 오직 나쁜 것만은 세상에 없다고 편지를 쓴다.
이승희, 여름의 우울
연못에 가라앉아있던 시체는 봄이 되어서야 발견되었다
익사체인지 동사체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그 자리를 가리키며 더 깊은 곳으로 헤엄쳐 갔다
검푸른 물속에서 투명한 해파리를 보기도 했다
어머니가 준 헌금 대신 돌멩이를 내는 날이면
깊은 밤 문든 손바닥에서 철봉 냄새가 났다
한 사람을 떠나 보낼 때마다
목구멍에 돌멩이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봄이 되어도 검은 물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밤이 지나면 또 다른 밤이 시작된다
유년 때문인지 노년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강성은, 이상한 계절
버려야 할 물건이 많다
집 앞은 이미 버려진 물건들로 가득하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내다 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
한밤중 누군가 버리고 갔다
한밤중 누군가 다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
창밖 가로등 아래
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
강성은, 기일(忌日)
정신을 똑바로 차려. 그러면 잠이 쏟아진다. 발이 무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스팔트가 녹고 있어서. 긴 장화를 샀다. 비가 오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한번 사라진 계단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철제 사다리를 어깨에 메고 한참을 걸었다.
‘목적지를 정하면, 도착할 수 없게 된다.’
가지고 있던 지도에 쓰여 있던 말. 나는 백색 지도를 보고 있다.
주머니에 구겨넣자 주머니가 터져 버렸다.
시작을 시작하기 위해선 더 많은 시작이 필요했다.
베란다의 기분. 축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틀렸어. 틀려도 돼.
하얀 목소리가 벽에 칠해진다.
발이 더 무거워졌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너는 무서워하면서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안미옥, 생일 편지
그리고 울었다 우리가 우리라서 다행인 적이 있었다 그쯤에서 멈췄다 왜 우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자꾸 코를 훌쩍이게 됐다 꿈에서 넌 분명 죽었는데 나는 가끔 자는 방법을 까먹었다 그럴 때면 숨 쉬는 법까지 모르게 되는 것 같았다 지겹지만 지루하진 않은 불행이 몇 번이고 찾아왔다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늘었다 어제는 조금 오래 걸었다 바람이 차서 살이 다 아팠다 너는 추워서가 아니라 귀신이 너를 끌고 갈까 봐 발까지 이불을 덮고 잔다고 그랬었다 나는 어두운 건 좋은데 깜깜한 것은 싫다고 너에게 말해 주었었다 우리는 자주 손을 잡았고 그것을 위로라고 착각한 적도 있었다 그랬었다 나와 너는 서로의 미래에 등장한 적은 없다 끝 이후의 것을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산속은 너무 조용해서 눈 내리는 소리도 들린대, 너가 말했었고 나는 들어본 적 없지만 그렇구나 했다 너가 해 준 이야기라서 그냥 믿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눈 내리는 소리를 모르기로 한다 궁금해 하면서 살기로 한다 미워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김소현, 동지(冬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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