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만 같았어도 막 어느 길로 어떻게 들어갔는지 이런 거 다 설명해주고 싶은데 미안하게도 기억이 안 난다.
작년이라 그런지 기억에 남는 건 조금밖에 없어. 그래서 그냥 빨리빨리 말할게.
일단 궐 안에 들어가자마자 신하들하고, 궁녀들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분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다들 비켜서시더라.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처음 보는 복장을 한 웬 이방인이 느닷없이 궐을 들어선 것도 모자라서 당당하게 걸어가니까.
머리끈이 있었지만 묶을 생각은 없었어.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지만, 원래 인생은 마이웨이인 거야. 내 인생 내가 멋대로 살겠다는데.
사실 나 때문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양옆으로 갈라지니까 나도 괜스레 기세등등해졌어.
어차피 여기서 죽으나 한강에서 죽었으나 똑같으니까 뭐, 이왕 조금 더 명 유지할 거 왕 말대로 당차게 살자고 마음먹었어.
근데 계속 가족들이랑 친구들이랑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둘이 아니라 조금 불편하긴 했지.
왕을 따라 들어가는데, 그분이 문 앞에서 따라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전부 막아서더라고.
조금 멋있었어. 막 권위적인 그런 느낌. 역시 왕이구나, 싶었지.
"이제부턴 나와 이 아이만 안에 들어갈 것이니, 아무도 들이지 마라."
"……하오나."
"이것은 명이다."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전하."
나도 놀랐어. 설마 둘만 들어 갈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
그것도 무려 한 나라의 왕과 함께?
이건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진귀한 경험이야. 수능은 망쳤지만, 이걸 자소서에 적어내면.
아 너무 나갔다. 병원에 실려갈지도 몰라. 조선 시대에 갔다 왔다고 망상하는 트레쉬가 여기 있다고 잡아가라고.
아무튼, 그러곤 그분이 내 팔을 잡아끌고 방 안으로 들어갔어. 겨울이라 조금 추웠는데 안은 많이 따뜻하더라.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어. 금방 노곤 해졌지. 이것저것 신기해서 둘러보는 나를 딱히 제지하진 않으셨어.
굉장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연신 나를 쳐다보시기만 하시더라고.
그래도 할 말이 있으셔서 기다리는 눈치시길래 예의가 아닌 듯해서 바닥에 앉았지.
그랬더니 그분도 자리에 앉으시더라고. 나도 푹신한 곳에 앉고 싶었는데. 이게 바로 계급 차이인 건가. 조금 아쉽기도 했어.
나를 정말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시는 거야. 눈 바꾸고 싶더라. 눈이 진짜 예뻤거든.
"어서 너에 대해 얘기해 보아라."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사람인지. 낱낱이 나에게 고하거라.
아, 아까 석진이란 사람이 말했던 호기심이 바로 이런 거였구나.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빠른 질문들에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자 그분이 다시 차근차근 물어보셨어.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조금 고민되더라.
"저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서울이라?"
"그러니까, 여기…… 한양이요."
잠시 다른 곳을 보면서 생각하는 표정이시더니 이내 다시 활짝 웃으면서 한양을 서울이라고 칭하느냐고 되물으셨어.
밝고 인자한 모습을 계속 보고 있으니까 딱 그 생각이 들더라. 이 사람은 정말 최고라고.
훌륭한 리더라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베풀 줄 아는 그런 사람이라는 게 확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모든 걸 얘기할 수가 있었어.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지, 사람들은 어떤지.
어떤 문화가 들어왔으며, 어떻게 변화해 가고 있는지 어떤 것들이 새로 생기고 사라지고 하는지 전부.
그리고 나에 대한 여러 가지 것들을 망설임 없이 얘기했어. 여기서 내 얘기 아무리 말한다 한들 누가 신경이나 쓰겠냐는 생각 덕분이었지.
"참으로 신기한 아이로구나."
어느새 낮은 탁자 같은 곳에 턱을 괴고 얘기하는 나를 따라 턱을 같이 괴고 계시더라고. 안 좋은 거 배우시면 안 되는데.
그것보다도 생각보다 얼굴 사이에 거리가 좁길래 놀래서 다시 바로 앉았지.
턱을 괴고 계신 상태 그대로 한번 피식 웃으시는데 와 진짜 심장 떨렸어. 솔직히 잘생긴 사람이 그러니까 장난 아니더라.
방이 더워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얼굴이 화끈해지길래 뺨을 양손으로 덮으면서 심호흡을 하니까 웃음을 터트리시더라.
"부끄러웠더냐."
"……예?"
"나와 가까이 마주하는 것이 부끄러웠던 게야."
들켰당. 머쓱하게 웃자 그분도 다시 바로 앉으셨어. 역시 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서울로 돌아간다면 나도 독심술이나 배워볼까 하는 멍청한 생각도 좀 해봤고.
부끄러워서 뺨에 있던 손을 옮겨서 그냥 얼굴을 다 가려버렸어.
여중 여고 나와서 가뜩이나 남자 구경 제대로도 못해봤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전화기가 있었더라면 당장 엄마한테 전화해서 딸 시집 갈 거라고 떼를 썼을지도 몰라.
누구랑 결혼이래 갑자기. 엄마, 나 조선의 왕과 결혼을 할 거야!
그래 어쩌면 휴대폰이 없었던 게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어.
"고운 얼굴을 보여주거라."
너님 너 왕 폭행죄로 고소요. 내 심장 폭행죄. 엉엉.
조선 시대 왕은 면접 보고 뽑나요? 언어 구사 능력, 여자 설렘사 자격증 1급 이런 거 보나요?
정말 내 모든 걸 걸고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여기 굉장히 매력적인 곳 같더라.
그래서 집에 돌아갈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지. 엄마 죄송한데 딸 여기서 살게요.
그나저나, 생각해보니 나는 이분 이름도 모르는데.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 눈을 마주하니까 또 씨익 웃으시는 거야. 사고회로 정지. 마비. 오벌도즈. 썸 원 콜 더 닥터.
여기 얼른 어의를 불러다 주세요.
막 두근두근. 심장아 나대지 마……. 제발.
떨리는 호흡을 간신히 정리하고 이번엔 내가 물어봤지.
"저 혹시, 존함이 무엇인지……?"
정국이라 한다. 전정국. 내 어미와 아비 외에 너에게만 알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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