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2호의 그 남자 - 번외
Those bygone years
1년을 넘게 거주하며, 꽤 불어난 짐이 하나 둘 이삿짐 차에 실릴 때 즈음,
밖에서는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소리에 문득 그 날이 떠올랐다. 강남역 한 복판, 내 손을 뿌리치고는 빗속으로 향했던 그녀의 뒷모습.
내게 나쁜 사람이라며, 눈물이 잔뜩 고인 채 나를 보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기억에 남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하루는 일 년 같이 길었다. 며칠을 뜬 눈으로 보냈다.
집안 구석구석, 그녀가 두고 간 시간이 너무도 많아서,
가끔 멍하니 거실 한 구석에 앉아있을 때면 나도 모르게 스멀스멀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곤 했다.
내 얼굴을 붙잡고 여배우와 자기 중 누가 더 예쁘다고 묻던 생경한 표정,
문이 배꼼 열릴 때면 환하게 웃으며 수업하자고 외치던 얼굴,
어설프게 따라하던 중국어 발음, 어깨가 닿을 듯 가까이 앉아 함께 듣던 수많은 노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를 때마다 나는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시간이 지나도, 시큰한 감각은 무뎌지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오랜 시간, 그녀의 잔상은 줄기차게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 집 문고리를 허락 없이 철컥철컥 돌리거나, 문을 쾅쾅 두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피스텔 단지를 걷거나, 7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그녀를 마주치게 될까봐 겁이 났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자리를 떠야 할지, 그 어느 것 하나 자신이 없었다.
그 무엇보다,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면, 스스로 정한 다짐이 모두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가장 두려웠다.
그 때부터였다. 이사할 집을 알아보기 시작한 건.
“포장은 다 됐고요, 이사할 집으로 지금 갈 거니까 현관 앞에 있는 차량에 탑승하시면 돼요”
빈집에서 홀로, 그녀가 남긴 마지막 포스트잇을 보고 있을 즈음이었다.
이삿짐센터 직원은 기나긴 상념을 깨뜨렸다.
그녀가 그랬듯, 나도 마지막으로 펜을 들었다.
글씨를 쓰는 동안, 함께 했던 수많은 시간이 머릿속을 스쳤다.
또 다시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져 단 몇 글자를 쓰는데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거렸다.
‘你不知道的事’
재촉하는 이삿짐 직원과 함께 새로운 집으로 향한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오피스텔 단지를 돌아 나오는 길,
신호에 걸려 멈춘 트럭 안에서, 나는 우연히 그녀와 마주쳤던, 비오는 버스정류장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
어느 새, 해가 바뀌고 새 학기가 시작된 지도 한 달이나 흘렀다.
작년 가을은 누구보다 혹독하게 앓았다.
제법 마음을 추스르고 학교로 돌아왔다고 믿었던 그 때,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에 나는 또 다시 수개월을 지독한 그리움으로 보냈다.
너무도 알고 싶었다. 대체 그렇게 까지 모질게 마음을 먹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렇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고민 끝에, 그 글을 적었을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기에.
교내 카페에서 다 마시지 못한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일어섰다.
다음 수업을 들으러 캠퍼스를 가로 질러 걷는 길에는 꽃들이 제법 예쁘게 폈다.
“아 날씨 너무 좋다. 수업 가기 싫네,”
“졸업하려면 필수잖아. 전공수업도 아닌 걸로 재수강하기 싫으면 얼른 가지?”
친구는 손에 든 휴대폰 액정으로 시간을 흘끗 보더니, 내 팔을 잡아끌었다.
졸업하려면 들어야 하는 교양 필수 과목 중 하나.
수강신청 날, 제일 인기 많은 수업은 인트라넷에 접속이 되자마자 정원이 차버린 탓에, 우린 차선책으로 문화와 관광 수업을 신청했다.
생각보다 강의는 꽤 재밌었다.
가끔 교수님이 중국 문화에 대해 설명하며, 간단한 중국어를 사용 할 때면 가슴 한구석이 아리는 느낌이 들고는 했다.
“자, 조금 있으면 중간고사지? 시험은......”
교수님의 말에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중간고사는 과제로 대체하면 안 되겠냐는 학생들의 요청에 교수님은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레포트로 대체할겁니다. 이렇게 자꾸 시끄럽게 하면 중간, 기말 다 시험 볼 거예요.
중간 레포트는 타문화권에 대해 조사하는 걸로, 국내 거주 외국인과 인터뷰를 진행해오면 됩니다.”
갑작스런 교수님의 말에,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작년, 한 창 더웠던 그 날이 다시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단, 교환학생 대상 인터뷰 금지, 국내 2년 이상 거주자를 대상으로 조사해오면 좋겠어요.
인터뷰 대상자 실명이랑 소속 밝히는 거 잊지 말고.
참, 기말 레포트는 이번에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해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국내 관광 정책의 문제점을 작성할 거니까
이점 유의해서, 인터뷰 진행하시고요.
제출은, 중간고사 기간 끝나고 바로 다음 수업 시간에.”
수업이 끝나고 가방에 교재를 넣으며 친구는 내게 물었다.
“아 진짜, 외국인은 또 어디서 만나, 이태원 갈래?”
“언제?”
“오늘이나, 내일? 이태원 프리덤~”
“나 전공 수업 두 개나 퀴즈 봐.”
친구에게는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말하고는, 나는 꽤 두꺼운 전공 서적을 안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날씨는 제법 따뜻해지고 있었다. 캠퍼스를 걷는 내내, 작년 강남역에서의 기억이 점점 또렷해졌다.
휴대폰을 켜 음악 폴더를 뒤지자, 그날 녹취해둔 음성 파일이 나왔다.
재생 버튼을 누르니 잊고 있던 그날의 인터뷰가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혹시나 인터뷰가 거짓인 게 들킬까, 녹취까지 하겠다고 양해를 구한 덕분이었다.
녹취된 파일은 꽤나 쓸 만했다. 굳이 따로 외국인을 찾지 않고도 과제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녀가 내게 던진 질문도 녹음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는 깜빡했다.
자연스럽게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그녀의 질문, 그리고 질문에 담긴 그의 이름에 나는 입이 바싹 말랐다.
“장위안한테 아저씨라고 불러요? 그거 정말 싫어하는데”
“왜요?”
“가끔 학생들이 놀리려고 그렇게 부르거든요.”
“근데, 아저씨랑 친하신가봐요. 이렇게 대신 나와 주시고....”
“네, 제일 친해요. 우리는 고향도 멀지 않고, 나온 대학도 같고요. 그래서 대화가 잘 통해요. 중국도 배경이 다양하거든요.
근데 우리는 공통점이 많아서 함께 나눌 얘기도 많아요. 아 그리고 특히... ”
종료버튼을 누른다. 그녀의 뒷말은 듣지 않아도, 뇌리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굳이 다시 한 번 확인받고 싶지 않아, 나는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끄고는 이어폰을 둘둘 말아 가방 속에 넣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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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까 알아서 잘하면, 너희 어머니가 걱정하시겠어?”
“뭐 조급하시겠지만, 나는 아직 생각 없으니까”
이제는 선을 볼 때가 되지 않았냐는 어머니의 전화를 끊자마자 이번에는 그의 동료가 핀잔을 주었다.
중국 나이로 서른둘이면 노총각이라는 말에, 장위안은 여기서는 아직 괜찮다며 웃어보였다.
“여기서도 이제 괜찮은 나이는 아니지.”
그녀의 핀잔을 들으며, 장위안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자연스레 다이어리를 펼쳤다.
슥 넘기는 첫 장을 그의 동료가 놓칠 리 없었다.
여전히 그의 다이어리 사이에는 두툼한 포스트잇 뭉치가 껴 있었다.
“아직도 안 버렸어? 버려 좀. 현실적인 줄로만 알았더니, 꽤나 순애보다? 그럼 아예 다시 찾아가든지”
장위안은 민망한 듯 그녀를 한번 보더니, 다시 다이어리에 얼굴을 박고는 스케줄 표에 중국어 녹음 일정을 체크했다.
‘我的歌声里你存在 我深深的脑海里 我的梦里 我的心里 我的歌声里’
어딘가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장위안은 꽤 조용한 교무실에서 홀로 울리는 익숙한 음악에 화들짝 놀랐다.
그는 자신의 가방 안,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 것을 알고, 손을 뻗어 가방을 뒤적였다.
버튼이 잘못 눌린 탓인지, 제멋대로 스트리밍 되는 음악을 그는 재빠르게 꺼버렸다.
휴대폰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고 그의 동료는 단번에 그것이 무슨 노래인 지 알아챘다.
그리고 그를 향해 냉소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대단하다. 장위안. 그놈의 워더거셩리 지겹지도 않아?”
그가 휴대폰을 만지는 사이에 그녀는 그의 다이어리를 뺏어 포스트잇 뭉치를 뜯었다.
“이건 내가 압수”
당황한 그를 뒤로하고, 그녀는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두툼한 포스트잇 뭉치 맨 앞 장에 쓰인 글자를 보고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왜 그가 지겨우리 만큼 그 노래를 듣는지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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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복도를 서성이며, 전화를 할 지, 말 지, 수 없이 고민하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무래도 문자나 메신저보다는 전화가 좀 더 예의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행히도, 작년에 받아두었던 연락처는 휴대폰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신호가 가는 동안 입이 바짝바짝 탔다. 종료버튼을 누를까 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에, 휴대폰에 바짝 귀를 댔다.
한 참을 기다리자, 수화기 너머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당연히 기억한다며, 생각보다 반갑게 인사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녹취록 속 그대로였다.
웬일이냐고 묻는 그의 동료는 내가 자신에게 전화할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지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발음은 일 년 전 즈음 얼굴을 대면했을 때보다는 조금 어눌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한동안 아저씨의 어색한 한국어 발음에 익숙해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발음이 상대적으로 좋게 느껴졌던 거라 생각했다.
약속 시간을 잡고, 나는 강남역 9번 출구 앞 스타벅스로 향했다.
카페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긴장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초조함에 손톱으로 끊임없이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을 즈음, 그녀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향해 손짓 했다.
“오랜만이에요, 얼굴이 많이 말랐어요.”
“아... 뭐... ”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안부를 묻는 그녀 앞에서, 나는 어색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다른 설명은 하지 않고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저번에 인터뷰 해 주신 거요. 사례한다고 했는데, 사실 오늘까지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정신이 없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이건 안 받을게요.”
그녀는 웃으며 봉투를 내 쪽으로 밀었다.
“아니오. 받으셔야 해요. 이제 진짜 제출할거거든요.”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응시했다.
“눈치 채셨을지 모르지만, 그 때했던 인터뷰, 과제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번 학기에 정말로 외국인이랑 인터뷰해오라는 과제 있어서, 그때 했던 내용으로 제출하려고요.
교수님이 오늘 과제를 내주셨는데, 갑자기 기억났어요.
사례 못한 게 떠올라 마음이 찜찜해서요.”
“괜찮아요. 정말.
그런데, 그게 오늘 만나자는 이유, 정말 이게 전부예요?”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의아하게 쳐다보았고,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잠깐의 침묵에 나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어때요? 아직도 그 집 살아요?”
“아니오, 기숙사 들어갔어요.”
“예전 집 안 그리워요?”
“……. 아주 가끔 가보기도 해요.”
질문은 꽤 날카로웠다. 마음을 헤집어 놓는 물음에 나는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음…….”
그녀는 한동안 말을 할지 말지 머뭇거리다가, 이내 생각을 바꾼 듯 입을 열었다.
“.....혹시 워더거셩리(我的歌声里) 라는 노래 알아요?”
여자의 마지막 말에 나는 또 할 말을 잃었다. 가슴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대체. 나는 이제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작년부터, 장위안이 지겹도록 듣는 노래예요.”
그 말에 나는 완전히 얼어버렸다.
그녀의 입에서 결국 나온 그의 이름. 그리고 지겹도록 듣는 노래라니.
심장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표정 보니까 알겠다. 됐어요. 이제.
그런데, 왜 안 찾아 갔어요? 장위안. 학원 알잖아요.”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가 허물지 못하는 벽을, 내가 대신 허물 수는 없다고 믿어왔다.
“.....인연이, 거기까지인 것 같아서요.”
골똘히 생각하는 나를 두고, 여자는 일 년 전에도 그랬듯,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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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
‘부재중이셔서 택배는 경비실에 맡겨두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문자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복도로 나가 수신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최근에 무언가 주문한 적이 없는데, 웬 택배라는 거지.
“저기, 저한테 온 택배가 맞는지 모르겠어서요.”
“오피스텔 701호 사시는 분 아니세요?”
“저, 더 이상 거기 안 사는데....”
택배기사는 수취인에 내 이름이 적혀 있다고 말하며,
이미 경비실에 맡겨놨기 때문에 번거롭지만 내가 직접 가서 찾아야 할 거라 했다.
발신인 란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수업이 파하자 나는 오랜만에 초록색 버스를 타고 오피스텔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익숙한 풍경에 또 다시 가슴이 시큰거렸다.
정류장에서 오피스텔 단지까지 그의 우산을 쓰고 함께 걷던 기억이 떠올랐다.
버스에서 내리며 우산을 피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경비 아저씨 잘 지내셨죠?”
오랜만에 만난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아저씨는 안 그래도 701호로 온 물건에 내 이름이 적혀있어 이상했다고 말하셨다.
아주 작은 상자 하나에는 택배기사분이 말했듯, 발신인이 적혀있지 않았고,
무척 가벼워 어떤 물건일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오피스텔 단지 내 벤치에 앉아 급하게 상자를 뜯었다.
잘 뜯기지 않는 테이프를 가방에서 꺼낸 칼로 쓱쓱 자르자, 상자 틈으로 노란종이가 보였다.
테이프를 거둬내고 상자를 여니 노란 포스트잇 뭉치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보였다.
‘我的歌声里’
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포스트잇.
그 뒤로 그의 집 문 앞에 붙여 놓았던 수많은 글귀가 보였다.
두툼한 포스트잇 뭉치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대체. 왜.
코끝이 시큰해져왔다.
그가 이걸 모아 두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포스트잇을 하나, 둘 넘긴다.
마지막 장에는 내가 그에게 가장 처음으로 남긴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포스트잇을 다 넘기자, 바닥에 깔린 하얀 종이가 드러났다.
“작년에 장위안에게 서로 상처주지 않으려면 선을 그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장위안을, 나는 몰랐나 봐요.
양쪽 다 상처가 아물지 않는 것 같네요.
사과의 의미로 그의 다이어리에 보관되어 있던 쪽지들을 보내요.
여기까지가 내 역할이에요. 加油 (파이팅)
p.s. 인연이라는 건 사실 수많은 선택으로 만들어지는 거 아닐까요? “
눈물이 왈칵 솟았다. 공원 벤치에 앉아, 나는 종이상자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
“돌려줘”
“뭘?”
장위안의 동료는 그가 무엇을 달라고 하는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며 빨간 플러스 펜으로 학생들의 과제를 첨삭했다.
“빨리”
“……멍청하긴.”
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책상 옆에 서있는 그를 무시한 채, 삐뚤빼뚤한 중국어가 가득 적힌 시험지만을 응시했다.
그러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깟 종이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면서, 왜 직접 찾아가지 않는 건데”
“............................”
장위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또 말없이 바닥만 응시했다.
“........내 실수였어, 잘라내라는 말.
시간이 지나면 그저 추억이 될 줄 알았는데, 너는 분명히 아니었어,
그리고,...... 옆집 학생도 아니더라.”
그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아냐고 묻는 그를 뒤로하고, 동료는 첨삭 과제를 들고 교무실을 빠져나가며 말했다.
“궁금하면 직접 물어 보던지, 가끔 예전 오피스텔에 가는 것 같던데”
장위안은 팔짱을 끼고 한 동안 그녀의 책상 옆에 기대 서, 하염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자신의 자리로 향해 가방과 겉옷을 들었다.
교무실을 빠져나가던 그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책상을 열고 포스트잇 한 장을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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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동료에게서 온 종이 상자를 보며 나는 이틀 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손에 쥔 종이 뭉치가 마음에 걸렸다.
그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는 것,
그가 여전히 듣고 있다는 노래,
그리고 그가 모아뒀던 나의 흔적들.
수 없는 생각이 스치고,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리고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스타벅스 창가에 앉아 오랜만에 쓰는 탓에 한 획 한 획 긋는 것조차, 너무도 어색해 저버린 중국어와 한 참을 씨름했다.
역시나 글씨는 엉망이다.
“不管我们能不能再见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不管你会不会忘了我 (당신이 날 잊는다 해도)
我只想告诉你一个秘密 (그저 비밀 하나만 알려주고 싶어요)
함께 우산을 썼던, 그 정류장에서요”
말할 수 없는 비밀, 어깨가 닿을 듯 가까이 앉아 함께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봤던 영화.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게 보다가, 가끔 그는 영상을 멈추고, 좋은 글귀를 말로 설명해주고는 했었다.
흐름을 끊지 말라며, 나는 그를 흘겨보기도 하고, 팔꿈치로 툭 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고집에, 영화를 보고 나면 꼭 명대사를 몇 번이고 반복해야 그 날의 수업은 끝이 났었다.
그는 이 대사를 기억할까.
간신히 적은 글귀를 들고, 나는 그의 학원 앞으로 향했다.
혹시나 그를 마주치지 않을까 손끝까지 긴장이 전해왔다.
그의 학원 앞, 현관 유리문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나는 오랜 시간 공들여 적은 포스트잇을 붙였다.
혹시나 누가 뜯어가지 않을까 테이프로 한 번 더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근두근 터질 것만 같았던 마음은, 의외로 금세 잠잠해졌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 나는 명확한 끝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포스트잇을 붙이고 도망치듯 빠져나와, 다시 예전 오피스텔 단지로 향했다.
버스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밖을 바라본다.
버스 창문에는 가는 빗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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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강사의 말을 듣고 오피스텔을 다시 찾은 지 이 틀이 지났다.
옆집 꼬맹이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흔적도 없어, 그는 괜한 짓을 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혹시, 버스정류장에서 그가 남긴 흔적을 아직 보지 못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상처를 지워내지 못했다고 했던 동료의 말은 거짓이었던 걸까.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이미 깨끗하게 추억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
장위안은 그녀에게 상처가 남지 않기를 내심 바래왔으면서도 은근히 밀려오는 서운함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시큰거렸다.
무사히 수업을 마치고 학원을 나오면서, 장위안은 그의 눈을 의심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학원 현관에 붙은 노란 색 종이를 발견하자, 그는 제법 걸음이 느려졌다.
천천히 걸어 나온 그는 유리문에 붙은 글귀를 한 참이나 바라봤다.
누구에게도 물어볼 필요 없는, 익숙한 필체에
그는 알 수없는 표정으로 테이프를 뜯어내고 종이를 챙겼다.
#
“기사님 멈춰주세요, 죄송해요”
하마터면 긴 상념에 정류장을 놓칠 뻔 했다.
버스가 오피스텔 단지 앞 버스정류장에 거의 도달할 즈음, 나는 뒤늦게 벨을 눌렀다.
갑작스레 브레이크를 밟는 버스안에서, 몸이 휘청 했다.
정류장에 내리자,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그를 기다리는 일.
점점 굵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조금씩 추위가 느껴진다.
정류장 의자에서 일어나 양손으로 팔을 감싸다가, 버스 정류장 구석에서 나부끼는 노란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Those Bygone Years 那些年”
투명한 유리에 붙은 포스트잇에는 영어지만, 분명히 그의 글씨가 적혀있었다.
비가 오자 습기 때문인지, 글씨는 조금씩 번져가고 있었다.
긴장감에 가슴은 더없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글귀를 보자마자,
나는 우리가 함께 봤던 영화의 OST라는 걸 알았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그도, 나도 참 좋아했던 영화.
천옌시를 가리키다가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감쌌던, 그래서 우리 둘, 모두 당황했던, 그 날이 떠올랐다.
글귀는 대체 무슨 뜻인지, 긴장감에 손 끝이 저렸다.
영화처럼 우리의 시절은 아름다웠지만, 결국은 안 된다는 건가.
그는 도대체 언제 왔다 간 거지.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휴대폰을 들고, 나는 귀에 이어폰을 꼽은 채 유튜브 앱을 켰다.
영어로 그가 쓴 글귀를 입력창에 적는 동안 손이 덜덜 떨렸다.
차라리 명쾌한 끝맺음을 원한다고 했지만, 내가 원했던 끝맺음은 이런 게 아니었다.
음악과 함께 나오는 한글 해석에,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흘러나오는 음악과 가사를 보며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又回到最初的起點
다시 처음 그 순간으로 돌아왔어
記憶中妳青澀的臉
기억 속 너의 앳된 얼굴
我們終於來到了這一天
우리는 결국 이 날을 맞이하게 되었네.
桌墊下的老照片
책상 위의 오래된 사진
無數回憶連結
무수한 추억들
今天男孩要赴女孩最後的約
오늘 남자는 여자와의 약속에 가야해
(중략)
那些年錯過的大雨
그 시절 놓쳤던 비와
那些年錯過的愛情
그 시절 놓쳤던 사랑
好想告訴妳
너에게 너무나 말하고 싶어,
告訴妳我沒有忘記
나는 잊지 않았다고, 너에게 말하고 싶어
비오는 버스 정류장,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새어나오는 눈물을 닦고 있을 때 즈음, 귓가에 끼익하는 소음이 들렸다.
노래 가사에 정신을 놓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훔치고 있던 지라 나는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고개를 들자,
그였다. 이제 막 버스에서 내린 그.
너무도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702호의 그 남자.
마치 우연히 만났던 작년 봄처럼
흐려진 시야 사이로 우산을 들고, 내 앞에 서 있는 그가 보였다.
"아저씨......."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는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더니
자신의 우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같이 쓸래? 우산.”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