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해? 빨리 와서 해줘." 침대보를 정리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가씨가 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다. 물이 떨어지는 모양새에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가리키니 뭐 어때서? 하며 어깨를 으쓱한다. 다 알면서도 침대를 빨리 정리하지 않는 나에 대한 불만 표시임이 틀림없다. 침대보를 정리하던 손을 내려놓고 오른손을 치마폭에 숨겼다. 기다리던 아가씨가 그 새를 못참고 다가와 옷깃을 잡아당긴다. 독촉하는 손길에 세안실로 향했다. 왼손으로 수납장을 더듬어 로션을 꺼냈다. 아가씨가 의자에 앉아 물끄럼히 바라보는게 느껴진다. 어렸을 때 부터 항상 그래왔던 익숙한 시선에 자연스럽게 로션을 뚜껑에서 분리하고 무릎을 꿇었다. 최고급으로 구성된 스킨과 로션을 차례대로 펴 발랐다. 눈을 감고 손길을 받아내던 아가씨가 입을 뗀다. "아침에 말이야." 로션을 바르던 손을 멈추고 아가씨와 눈을 마주쳐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해드렸다. 그러나 말을 잇지 못하고 고민하는 아가씨의 모습에 갸우뚱했다. 항상 갑의 입장인 아가씨는 나레게 무언가를 말할때 당당하지 않은 모습인적이 없었다. 단 한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 집 집사가 너 얘기하는거 들었어." 다른 남자가 내가 접점이 생길때를 제외하고.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여 물티슈에 닦아낸 후 립 제품을 수납장에서 꺼내어 다시 아가씨 앞에 앉았다. 화장기가 없는 수수하지만 화려한 아가씨의 눈이 나를 뚫어져라본다.
"어제 저녁에 청소하다가 손가락 베였다며." 성급히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이제는 아연한 눈이 된 아가씨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향한다. "왜 그랬을까? 내가 분명 넌 내 잠시중 끝나면 하루일과도 끝이라고 말했을텐데." 말을 하지 못하는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어설픈 변명을 했다간 그대로 시종 중 누군가의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니까. 아가씨의 입술을 더듬던 손을 무릎위로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가 마음에 안드는 듯 수납장을 발로 밀어냈다. "어제 당번이 누구였지? 박준희?" 익숙한 이름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가벼운 떨림을 놓치지 않고 캐치한 아가씨가 차갑게 웃는다. 무릎을 꿇고 있는 내 몸을 일으켜 내 치마폭과 눈 높이를 맞춘다. 애써 숨기고 있던 오른손을 꺼내든 아가씨가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에 미간을 찌푸린다. 느릿하게 붕대를 쓰다듬던 아가씨가 나른한 목소리로 나를 놀래켰다. "둘이, 굉장히 친한가봐?" 부정도, 변명도 할 수 없는 상황에 그저 아가씨의 눈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 더 화가난 아가씨가 수납장을 부술듯 내려치고 나를 지나쳐 나갔다. 떨리는 손으로 수납장을 정리하고 있는데 밖에서 빨리 오라는 아가씨의 짜증섞인 말에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침대에 누운 아가씨의 이불을 정리해주면서도 저기압의 분위기에 눌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시선이 낮아진 아가씨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똑바로 해." 순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이불을 정리하던 방향을 틀었다. 가볍게 내 손짓을 저지한 아가씨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행동 똑바로 하라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가씨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제야 안심이 된 나는 아가씨의 손을 잡고 잘자라고 한번 흔들었다. 마주 흔든 아가씨의 목소리가 방을 나가려는 발목을 붙잡았다. "저거 정리는 박준희, 시켜." 세안실로 가던 발걸음을 머뭇거리며 뒤돌자 무표정으로 베게에 기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번엔 이렇게 안 끝나." 무엇보다도 진심이 담긴 아가씨의 말뜻을 알기에 나는 그저 수긍할 수 밖이 없었다. 방을 환히 밝히던 불을 껐다. 어둠속에서 아가씨의 금발이 빛난다. 수정 아가씨, 어렸을 때 부터 되풀이 되오던 그 끝없는 집착. 문득 어렸을 적 아가씨의 유학으로 6개월 가량 떨어졌다 다시 만난 그 날이 생각났다. 누구보다도 친구처럼 친했던 우리. 6개월 아가씨가 없는 사이 한 시종과 급격히 친해져서 약혼 직전까지 갔던 그 때. 주인님, 아가씨의 부모님, 의 축복까지 받아가며 언약했던 행복했던 그 때. 돌어와선 누구보다도 기뻐해주고 축하해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수정이는, 없었다. 6개월의 유학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나를 맞아주는 건 아가씨의 광기어린 눈동자였다.
"오랜만이야." "수정아!"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어? 뭐하면서 지냈어?" 이상한 괴리감에 반가움이 앞서던 얼굴에 웃음이 지워졌다. 이내 손을 뻗어온 수정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자주 하던 스킨쉽이지만 왠지 모를 소름에 떨며 수정이를 올려다보았다. "그 새끼랑 재미 좋았어?" "...?" "약혼..?" "수정," "닥치고 내 말 들어." 처음보는 서늘한 모습에 어깨가 설로 움츠려 들었다. "다시는 입 열지마." "뭐라고..?" "명령이야. 네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게 되면 그 빌어먹을 새끼부터 없앨거니까." "...!"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6개월만의 잠자리 정리를 하러 방에 들어갔을 적에 나를 쳐다보던,
"나랑만 의사소통할 수 있으면 된거지. 잘하고 있어." 광기어렸던 그 눈동자는, 내가 마지막으로 본 정수정이었을까 아가씨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