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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탁. 벽난로 안에 넣어 둔 장작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남자는 느긋한 동작으로 협탁에 올려둔 커피잔을 입가에 가져갔다.그의 무릎에 앉아 조그만 손으로 동화책장을 넘기던 어린 아이가 읽던 책을 덮곤 고개를 들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끼익.아이의 미세한 움직임 덕분에 오래된 나무 흔들의자가 잠시 소음을 냈다.눈발이 세차게 휘날리는 까만 바깥 풍경과는 다르게 남자의 조그만 오두막집은 포근하고 따뜻했다.이따금 거센 바람이 낡은 창틀을 두드리고 지나갔다.또렷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던 아이가 두 눈을 몇번 깜빡였다.
"궁금하니?"
아이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아이의 손에 들린 동화책 표지에 적힌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글자를 확인한 남자가 살풋 미소를 지었다.지금부터 아저씨가 해줄 이야기는 앨리스의 진실에 관한 내용이야.다정한 남자의 목소리에 아이가 눈을 빛냈다.남자는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헝클어트렸다. 끼익.작은 움직임에 흔들의자가 잠시 요동을 쳤다.남자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숨을 고르곤 말을 이어갔다.옛날 옛날에,꿈과 희망이 가득한 원더랜드가 있었는데....하트 여왕이 군림하는 평화로운 그곳에,어떤 작은 소녀가 찾아온거야.
그 날은 원더랜드에 새하얀 눈이 가득히 내려앉은 날이었어.눈처럼 하얀 피부에 까만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아주 엉뚱하고,또 유쾌했어.때문에 다른 세계에서 와서 우리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이방인이었지만 모두가 그 아름다운 소녀를 사랑했지.그 소녀의 이름은....어,눈치챘니?그래 맞아.그 소녀가 바로 앨리스였단다. 작은 소녀 앨리스는 원더랜드에 금새 적응을 마쳤어.다 그의 사랑스러운 성격 덕분이었지.앨리스는 나이많은 쐐기벌레와,춤을 좋아하는 모자장수,길쭉한 도도새,카드 병정들과 백성들은 물론,원더랜드의 최고 괴짜라고 소문이 자자한 체셔 고양이와도 어느새 친구가 되어있었어. 그러나 딱 한사람. 친구가 되지 못한 인물이 있었는데, 누구일 것 같니?........응?하하.그래 맞아.똑똑하구나.네 말대로 그 인물은 원더랜드의 최고 권력자인 하트 여왕이었어.하트 여왕은 원더랜드 안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하는 앨리스를 시기하고 있었지.그래서 앨리스에게 터무니없는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단다.일부러 성 안에 흰 장미꽃을 잔뜩 심어두곤 모두 빨간 장미로 바꿔놓으라고 말야.정말 황당하지?하지만 앨리스는 좌절하지 않았어.오히려 씩씩하게 빨간 물감이 가득 담긴 수통을 들고 정원으로 곧장 달려나갔지.이틀 밤을 꼬박 세운 앨리스는 마침내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많은 백장미들을 붉은 장미로 바꾸는 데 성공했단다.그런 앨리스의 집념에 모두들 혀를 내두르곤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러댔고 말야!
이번에도 딱 한명, 하트 여왕만 제외하고 말이지. 심술궂은 하트 여왕은 포기를 모르는 여자였어.하트 여왕은 계속해서 앨리스를 괴롭힐 방법을 찾는 데 몰두했어.하루는 앨리스의 고운 머릿결을 망가뜨리기 위해 머리빗 틈새에 약칠을 해 두고,또 어떤 하루는 앨리스의 방문 앞에 기름칠을 해 두도록 지시해서 앨리스가 발라당 넘어진 일도 있었지. 그리고 그 모든 행패를 뒤에 숨어 몰래 지켜본 이가 있었단다. 바로,하트 여왕의 신하중 하나인 시계토끼였어. 으음.동화책이랑 내용이 조금 다른 것 같다구?그야 당연하지.이 이야기는 아무도 모르는 앨리스의 숨겨진 이야기인걸.그러니 아저씨가 들려준 이야기는 우리끼리의 비밀로 감춰두는거야.알겠지?자,약속.옳지.그럼 다시 원더랜드로 돌아가서, 시계토끼는 하트 여왕의 곁을 가장 오랫동안 지켜 온,그리고 그만큼 하트 여왕의 숨겨진 악날한 본성을 가장 잘 알고있는 충신이었어.그런 그가 어째서 앨리스의 뒤를 몰래 쫓아다녔냐구?과묵한 그의 성격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겠지만,그도 나름대로 하트 여왕의 괴팍함에 단단히 실증이 난 상태였단다. 그런 그에게 있어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사랑스러운 소녀는 아주 흥미로운 대상이 아닐 수 없었지. 그는 소심해서 앨리스에게 말 한번 붙여보지는 못했지만 항상 뒤에 숨어 남몰래 그녀를 도와주었단다.하트 여왕이 몰래 앨리스의 원피스를 가위로 잘라버리면 서툰 솜시로 바느질을 해 놓는다던가,앨리스가 아끼는 머리끈을 마굿간에 던져두면 소리없이 찾아와 깨끗이 세척한 후 창틀에 놓아두고 간다던가 하는 사소한 일들로 말이야. 시계토끼는 앨리스를 동경했어. 지칠대로 지친 거짓 희망뿐인 세계에 날아든 한마리 순수한 나비를.그러던 어느 날,
시계토끼가 하트 여왕의 심부름으로 옆 마을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어. 평소와 다름없이 바쁜 걸음으로 하트 성을 향해 가고있던 시계토끼의 시야에 환하게 만개한 예쁜 꽃들이 들어온거야.어째서인지 시계토끼는 꽃이 핀 나무 앞에 서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어.그 꽃은 마치 사랑스러운 앨리스의 미소같은 싱그러운 빛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주저하던 시계토끼는 결국 높은 나무위로 열심히 기어올라가 가지 하나를 꺾어냈어.그리곤 손에 쥔 가지를 멍하니 내려다보며 한참을 서 있었지.이내 시계토끼는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으로 마구 달려갔어.머릿속엔 오로지 앨리스의 웃는얼굴을 떠올리면서 말야.성에 도착한 시계토끼는 곧장 앨리스가 잠들어 있을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어.그는 굳게 닫힌 앨리스의 방문 앞에 서서 크게 쉼호흡을 했어.그러고도 한참이나 망설이던 시계토끼는 결심한 듯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어.잠시 후 손바닥에 땀이 가득해서 몇번 미끄러지고 난 후에야 방문을 열 수 있었지. 조심스레 방문을 연 시계토끼는 깜짝 놀라고 말았어.분명 잠들어 있어야 할 앨리스가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침대에 앉아 저를 바라보고 있었거든.문턱에 걸쳐선 채 벙쪄있는 시계토끼에게 앨리스는 가볍게 손짓했어.그는 홀린 듯 문을 닫고는 천천히 앨리스에게로 다가갔어. 시계토끼의 손에 들린 꽃송이를 발견한 앨리스는 천진한 웃음을 터뜨렸어.그는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려서 시선을 마주칠 수 없었지.앨리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어.그 꽃,저 주려고 가져오신 거죠?시계토끼는 대답대신 고개를 푹 떨궜어.가까이서 들은 그 아이의 목소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달콤했거든.빨개진 그의 얼굴을 확인한 앨리스가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어. 고마워요.항상 날 도와줘서. 시계토끼는 두 귀를 의심했어.그리곤 퍼뜩 고갤 들어 앨리스의 얼굴을 마주했지.앨리스는 방정맞은 웃음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걸치고 있었어.고마워요.또 한번 앨리스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닫혔어.그와 동시에 숨막히도록 달콤한 음성이 그의 귓가에 울려퍼졌어. 시계토끼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짐을 느꼈어.그만큼 황홀한 상황이었으니까.그는 요동치는 심장이 느껴져서 마른 침을 삼켰어.그리곤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려 앨리스를 바라보았어.그 아이는 여전히 새하얀 미소를 지은 채 저를 응시하고 있었지. 나를 눈치채고 있었어. 아늑하고 조용한 방 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그는 꽃가지를 쥔 손에 조금 힘을 주었어.파스락.조금 말라버린 나뭇가지 껍데기가 갈라졌어.쿵쾅쿵쾅.요란한 심장소리가 앨리스에게 들릴까 조바심이 났어. 나에게 고맙다고 말했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생소하고도 버겁다고,그러면서도 따뜻하다고 시계토끼는 생각했어.그는 문고리를 잡을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마구 떨리는 손으로 손에 쥔 꽃가지를 건네주었어.앨리스에게 말야. 좋은 향기네요. 꽃잎 가까이에 코를 맞대고 숨을 들이킨 앨리스가 나지막히 말했어.시계토끼는 고장나기라도 한 듯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이 두려웠지만 환하게 미소짓는 앨리스를 보며 따라 웃어줄 뿐이었어.이런 느낌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지.
그 날 이후로 많은것이 변했어.
시계토끼는 더 이상 앨리스를 숨어서 지켜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덧붙여 둘은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가끔 정원을 함께 거닐거나,나른한 오후의 티타임을 즐긴다거나,그가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꺾어 온 예쁜 꽃을 앨리스에게 선물한다던가 하는 둥,소소하지만 포근한 나날들을 보내면서. 어딜가나 앨리스의 곁엔 시계토끼가 함께였어.시계토끼는 이제 하트 여왕의 곁에 머무는 날 보다 앨리스를 찾아가는 날이 더 많아졌어.앨리스는 과묵하지만 다정한 시계토끼를 믿고 의지하기 시작했고,시계토끼는 그런 앨리스의 옆자리를 지키는 걸 당연시하기 시작했지. 시계토끼는 그때쯤에야 느즈막히 깨달았어. 누군가 곁에서 따스한 온기를 주길 바라고 있었다는걸. 그 자리에 앨리스가 들어와 버렸다는 걸. 그리고 알아버렸지. 저는 단순히 앨리스를 동경했던게 아냐. 진심으로 갈망하고 있었던 거야.한참 그렇게 시계토끼와 앨리스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조용했던 하트 성 안이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했어. 이방인 소녀가 하트 여왕님이 아끼시는 충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대. 시계토끼가 다른 세계에서 온 작고 하얀 소녀를 사모한다던데? 하트 여왕님의 충신과 앨리스가 밤늦게 성 외곽을 거니는 걸 봤대. 사실은 그 둘이 이미 사랑을 나눈 관계래. 소문은 소문에 소문을,크기에 크기를 더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져만 갔지.그렇게 커다래져 버린 소문이 과연 하트 여왕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을까?그래,맞아.그럴 수 없었어.결국 둘은 하트 여왕앞에 끌려가 무릎을 꿇고야 말았단다. 하트 여왕은 분노도,배신감도,원망도 아닌 슬픔에 찬 얼굴로 시계토끼를 바라보았어.시계토끼는 차마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려버렸어.하트 여왕은 제 앞에 무릎꿇린 앨리스와 시계토끼를 한참이나 말없이 번갈아 보았어.성 내부엔 숨막히는 정적만이 맴돌았지.하트 여왕이 어떤 무시무시한 형벌을 내릴지에 대해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원더랜드의 백성들에게 있어 하트 여왕은 질투심이 많고,욕심도 많은 좋지 못한 지도자였어. 하지만 오랜시간 곁을 지켜온 시계토끼만은 알고 있었어. 실은 그녀도 사랑하는 사람에겐 여리디 여린 여자에 불과하다는 걸.하트 여왕은 사랑해 마지않던 제 하나뿐인 충신에게 차마 가혹한 형벌을 내리지 못했어.그건,그런 그가 사모하는 앨리스에게도 마찬가지였지.하트 여왕은 길고 긴 고민 끝에 끝내 유배령을 내렸어.응?유배령이 뭐냐고?아아.그건 말이지,하트 여왕이 둘을 성에서 멀리 떨어진 삭막한 곳으로 떠나보내기로 한 거야. 이튿날,성 안의 몇몇 신하들이 앨리스와 시계토끼를 배웅하기 위해 성문 앞으로 마중을 나왔어.그들은 사랑스러운 소녀 앨리스가 성을 떠난다는 것에 대한 슬픔을 감추지 못했지.물론 시계토끼에게도 아쉬움을 토로했고 말야. 잠시 후 시계토끼와 앨리스를 실은 마차가 출발했어.마차 밖으로 상체를 내밀어 배웅나온 신하들에게 손을 흔들어 준 시계토끼가 다시 머리를 집어넣고 고개를 돌려 앨리스를 바라봤어.앨리스는 평소의 밝은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기운없이 축 쳐진 모습이었어.그는 조심스레 앨리스를 안아주었어.앨리스는 말없이 시계토끼의 어께에 뺨을 기댔지.시계토끼는 내심 하트 여왕이 마음에 걸렸지만 상관하지 않기로 했어. 앨리스만 곁에 있어준다면 그 무엇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면서. 도착한 곳은 생각보다 훨씬 더 외진 곳에 위치한,작고 초라한 마을이었어.지나오면서 본 마을 풍경은 허름하기 그지 없었지.마차에서 내린 시계토끼는 앨리스의 손을 꼭 잡고 그들 앞에 덩그러니 놓인 오두막집의 문을 열었어.끼익.나무로 된 허술한 문이 열리자 먼지가 자욱하게 쌓인 집안 내부가 드러났어.앨리스는 한숨을 쉬며 집 안으로 들어섰지. 응?앨리스가 왜 한숨을 쉬었냐구?하하.아마 커다란 성에서 지내다가 낡은 오두막집으로 쫓겨나게 되었으니 실망해서 그런게 아닐까?어,아니라구?그럼?....아..앨리스가 시계토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게 아니냐고?....흐음.글쎄.그건 앨리스만 알고 있겠지.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 당시에 시계토끼는 앨리스에게 단단히 빠져 있었으니까 신경 쓰지 못 했을걸.음?그건 너무하다고?하하.그런가.어쩌면 시계토끼가 그런 앨리스의 마음을 알고 있었는데도 모른척 한걸지도 모르고 말이지.. 아무튼,그때까지도 시계토끼는 마냥 행복하기만 했어.마을이 외진 곳에 있으면 어때.집이 오래된 나무로 지어졌으면 어때.전처럼 호화로운 성이 아니면 또 어때.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사랑스러운 소녀가 언제까지고 나와 함께 할 텐데.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행복은 그들 곁에 그리 오래 머물러 있지 못했어.
어느정도 시간이 흘러,
앨리스와 시계토끼가 차차 외딴 마을에 적응하며 살고 있을 때 였어. 시계토끼는 앨리스가 좋아하는 분홍빛 장미들이 심어진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어.앨리스의 발그레한 뺨을 연상시키는 꽃의 색깔을 시계토끼는 아주 마음에 들어 했어.그는 어느새 다 자라 활짝 피어난 꽃들을 보며 살풋 미소지었지. 만약 이 꽃이 시들어서 앨리스가 슬퍼하면 다시 심으면 돼. 그 후에 또 시들면 다시 또 심으면 되고. 또 시들면 또 다시. 그리고 또 다시. 그때,버섯을 캐러 뒷산에 올라갔던 앨리스가 멀리서 부리나케 달려오는게 보였어.시계토끼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앨리스를 향해 몸을 돌렸어.앨리스는 멀리서도 확연히 보일 만큼 밝은 얼굴이었어.그는 고개를 갸웃거렸지. 나,드디어 발견했어! 달려와 시계토끼의 품에 파고든 앨리스는 이제껏 보아온 얼굴 중에 가장 기뻐하는 얼굴로 웃으며 소리쳤어.근래에 빈곤한 생활 덕에 사라진 웃음기를 대신해 늘어만 가는 한숨만 보다가 간만에 본 미소라 시계토끼도 덩달아 기뻐했지. 뭘 발견했는데?시계토끼가 다정한 얼굴로 물었어.앨리스는 감격에서 헤어나오기 힘든지 한참을 마구 횡설수설 하다가 입을 꾹 다물고 숨을 골랐어.그리곤 품에서 얼굴을 떼어낸 앨리스가 온몸 가득 행복을 걸친 채로 들뜬 목소리를 냈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말야.드디어 찾아냈다구! 쿵. 앨리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계토끼는 한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어.너무 놀란 나머지 굳어버린 입에선 아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어.앨리스는 행복에 겨운 나머지 그런 시계토끼를 눈치채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방 뛰어다녔지.시계토끼의 손이 작게 떨려왔어. 그동안 잊고 살았었던 거야. 앨리스가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시계토끼는 앨리스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어.망부석이라도 된 듯 가만히 서서 멍한 눈빛으로 앨리스를 바라 볼 뿐.알록달록 환하게 빛나던 세상이 순식간에 빛을 잃고 칠흑같은 어둠속으로 가라앉았어.전과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어.머리가 어지러웠어. 왜? 어째서? 어째서 지금? 갑자기 시계토끼의 눈에 행복이라고 느끼던 모든 것들이 불행으로 보이기 시작했어.그리고 눈앞에 있는 앨리스가 너무도 위태롭게만 느껴졌어.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금방이라도 저 멀리 날아가 버릴 것 처럼.시계토끼는 서늘한 얼굴로 앨리스를 바라보았어.금새 어두워 진 창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어.장작을 넉넉하게 넣어 둔 덕에 난로가 열심히 불을 지피고 있어서인지 조그만 집 안은 아늑하고 포근했어.저녁 식사를 마친 식탁을 대충 정리한 앨리스가 서둘러 난로 앞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어.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있던 시계토끼가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느끼곤 시선을 돌려 앨리스를 바라보았지. 분명히 그때 내가 떨어졌던 굴이 맞았어. 앨리스는 흥분했는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어.시계토끼는 읽던 책을 접어서 옆에있는 협탁 위에 올려둔 뒤 앨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어.이야기를 들어 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었지.앨리스는 잠시 목청을 가다듬었다가 말을 이어갔어. 확실해.이 세계로 오기 전 떨어뜨린 반지가 굴 앞에 놓여져 있었어. 앨리스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어.시계토끼는 말없이 앨리스를 바라보았어.어느새 아이의 얼굴은 옅어지고 숙녀에 가까워진 얼굴.시계토끼는 무언가 알수없는 감정이 속에서 끓어오르는 걸 느꼈어.그게 무엇인지는 자신도 알수 없었어.하지만 그 감정은 넘치기 직전까지 마구 끓어올랐지.폭발이라도 할 것 처럼 말야. 드디어 돌아가는거야.내 집에. 이어진 앨리스의 말에 시계토끼는 이를 악물었어.돌아간다고.시계토끼는 앨리스의 한마디 한마디에 그 알수없는 감정이 점차 넘쳐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점점 심장에는 무언가로 옥죄이는 듯 한 고통이 스며들기 시작했어. 앨리스가 기쁨에 겨운 눈물을 떨어뜨렸어.한번 터진 눈물은 걷잡을 새도 없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지.이제 제법 숙녀의 모습을 한 앨리스가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어.앨리스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에도 아랑곳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어.모두가 사랑해 마지않던 그 미소. 시계토끼는 문득,앨리스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어. 하트 여왕의 심술에도 기죽지 않던 당찬 소녀. 처음으로 꽃을 건네주었던 그날 밤. 함께 거닐던 하트 성의 정원. 함께 마셨던 따뜻한 차. 순수하고 깨끗한 미소. 눈처럼 뽀얀 살결. 까만 눈동자. 그러자 거짓말처럼 온 마음이 평온해지는 게 느껴졌어.넘쳐 흐르던 감정들이 모두 한꺼번에 쏟아져버리자,답답했던 심장이 다시 차분해졌지.더불어 고통도 서서히 사라져갔어. 곧,무언갈 찾기 위해 시선을 돌리던 시계토끼의 눈에 난로 옆 휑한 벽면이 들어찼어.시계토끼는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려 벽면의 보폭을 확인했어.아,저거면 됐겠다.그는 지난번에 망가진 창틀을 수리하기 위해 잠시 꺼냈었던 장비들을 어디에 두었는지 곰곰히 생각했어.창고에 잘 있겠지.시계토끼는 이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웃었어. 그래 맞아. 나의 나비. 나의 꽃. 나의 작고 순수한 소녀. 언제까지고 너와 함께면 행복할거야. 언제까지고 말야.
"....졸려?"
아이가 남자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고개를 끄덕였다.끼익.끼익.그 반동으로 흔들의자가 느릿하게 앞뒤로 움직였다.남자는 푸스스 웃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가만히 눈을 감고 남자의 손길을 느끼던 아이가 졸린 눈을 하고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춰왔다.이야기가 다 끝났냐는 의미.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에 시계토끼는 어떻게 됐어요?" 아이가 반쯤 감긴 눈을 조그만 손등으로 비비며 졸음이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물어왔다.남자는 상체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아이가 간지럽다는 듯이 몸을 웅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꺄르륵.때묻지 않은 순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아이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럴땐 시계토끼 말고,앨리스에 대해서 물어봐야지." 으응.입술을 삐죽이던 아이가 못이기는척 몸을 베베 꼬며 질문을 정정했다.그러엄,그 후에 시계토끼 말고,앨리스는 어떻게 됐어요?아이의 말에 남자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귀여워.남자가 아이의 손을 끌어당겨 보드라운 손등 위에 쪽 쪽 소리나게 몇번 입을 맞춰주었다. 잠시 고개를 들어올린 남자가 난로 옆 휑한 벽면을 바라보았다.아기자기한 장식들이 걸린 다른 벽면들과는 달리 그 부분의 벽만 이상하리만치 깔끔했다.남자가 가만히 벽면을 보다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중얼거렸다."아마 지금 쯤....앨리스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있지 않을까."
"...." 한참동안이나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남자가 조심스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어느새 곤히 잠든 아이가 남자의 손을 꼬옥 쥔 채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남자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넘겨주었다.끼익.흔들의자가 조금 출렁거렸다.남자는 협탁 위에 놓인 다 식은 커피잔을 들어올려 입가에 가져갔다. 슬쩍 창밖을 보니 거세게 몰아치던 눈보라가 조금 사그라들어 있었다.남자는 다 낡아빠진 창틀을 보며 커피 한 모금을 머금었다.추우면 안되니까 다시 한번 더 손을 봐야겠네.입안을 맴도는 차갑고 씁쓸한 커피 향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고,남자는 생각했다.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휑한 벽면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리만치, 깨끗한 벽면. 남자는 웃었다."언제까지고 함께 행복하자,앨리스."
나의 나비. 나의 꽃. 나의 작고 순수한 소녀. 언제까지고,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