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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혁 온앤오프 샤이니
남우이앤 전체글ll조회 9036l 8

 

 

 

인생그래프꼭짓점
2012.08.11 시작 ~ 2015. 아직 미완결

 

 

 

 

 

1.

 


"나이가…. 85년생? 서른이 코앞이네요?"
"어휴, 서른이 코앞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85년생이면 스물여덟 살, 만으로는 스물일곱 살입니다. 아직 반올림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나이에 민감해 언성을 조금 높이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안경을 추켜올린 남자가 이력서를 꼼꼼히 훑었다.

"요즘 시대엔 스물여덟이면 서른이나 마찬가지죠, 뭘."

요즘 시대가 어떻길래 스물여덟이랑 서른을 동갑으로 친단 말인가. 성규는 나이 얘기에 살짝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래뵈도 아직까진 갓 입학한 대학생으로 알아봐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고 많은데.

"흠…군대는 다녀오셨고…."
"네. 현역으로 정직하게…."
"전에 제일식품 마케팅부에서 일 하셨었네요? 제일식품이면 잘 알려진 곳인데 왜 그만두셨어요?"
"아, 그건 회사와의 작고 사소한 마찰 때문에."
"그건 그렇고 대학이…. 서율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짤뚝짤뚝 끊어대는 남자의 매너에 성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서율대라고 쪼오기 지방 쪽에 있는데 거기 다니면서 장학금도 몇 번 받았."
"요즘엔 서울대도 짝퉁이 나옵니까?"
"네? 서울대 짝퉁이라뇨!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저희 광고기획사엔 거의 서울 상위권 이력서가 올라와서요. 저도 이런 지방 하류대 이력서는 처음이라서…. 뭔가 다를까해서 1차 넘겼더니만… 쯧."

지방 하류대? 쯧? 거기가 등록금이 얼마나 비싼 곳인데! 고개를 숙이고 화를 삭이던 성규,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남자의 면전에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을 가까이 들이댄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저 아저씨."
"뭐?! 아,아저씨?"
"그래요. 아저씨라 했어요. 아줌마 아니잖아요. 뭐 잘못됐어요? 머리도 듬성듬성한 게 골룸같아가지곤 딱 봐도 아저씨 맞구먼."

씩씩대며 두 소매를 벅벅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따다다 쏴대기 시작했다.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끝까지 내가 예의있게 참으려고 했는데, 사람 면전에 대고 나이 얘기를 하질 않나, 서울대 짝퉁이라고 하질 않나. 나이 많은 거? 예라이! 누군 먹고 싶어서 먹었나? 나도 흘러가는 시간 잡을 수만 있으면 꽉 잡아뒀어요, 아저씨. 근데 그게 내 맘대로 돼? 나이 많은 게 죄야?! 게다가 아직 서른도 안 채웠는데 그게 그렇게 흠이냐고! 우워어어!"

실성한 마냥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헤집더니 테이블을 쾅쾅 내려쳤다. 꼭 킹콩같았다.

"이,이 사람이 지금."
"그래! 나 사람이다! 뭐!"

남자는 잔뜩 움츠러들며 뒤로 물러났다. 콧김을 몇 번 흥흥 뿜은 성규는 자신의 이력서를 홱 잡아채 가방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이 개똥같은 회사, 아니지. 개똥이 무슨 죄야.이 개똥만도 못한 회사에선 도저히 내 기분 더러워서 일 못 해. 아니, 안해!"

곱게 맸던 넥타이를 둘둘 풀러 주머니에 쑤셔넣고 그대로 면접실을 빠져나가며 소리쳤다.

"잘 먹고 잘 살아라!"

뒤돌아 남자를 홱 째려본 뒤, 자기네 집 화장실 불끄듯이 면접실 불을 끄고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그러나 이건 상상이다.

"김성규씨."
"……."
"김성규씨!"
"네, 네!"

잠시 상상의 나래에서 뛰놀며 꾸벅꾸벅 졸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자세를 고쳤다. 남자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다.

"잠 못 주무셨나보네요?"
"아뇨. …사실 조금…."

성규의 얇은 이력서를 테이블에 툭 내려놓은 남자가 안경을 벗어 한편에 잘 얹어놓고 나긋나긋,그러나 가슴에 콱콱 비수를 꽂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잘 나간다하는 기업들 광고나 홍보는 다 저희 무한광고사에서 제작, 기획한 것들입니다. 그만큼 저희 광고사,그리 만만하게 볼 곳은 아니에요."

네, 알죠. 잘 알죠.

"김성규씨는 유감이지만 저희 광고사와는…."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이모, 복권 한 장만요."
"학생, 또 사?"
"인생은 한방이잖아요. 여기 오천원이요."

자신을 '학생'이라고 불러주는 아줌마 때문에 성규는 매일 이 슈퍼만 들린다. 즉석복권을 들고 슈퍼에서 나온 성규가 인형뽑기를 테이블 삼아 방금 산 복권을 얹어놓고 가방 안에 굴러다니던 백 원짜리를 꺼내 복권 스크래치를 조심스럽게 벗겨낸다.
 
"제발 제발…. 아…."
"성규학생 또 꽝이야? 어쩜 맨날 꽝만 나올까…."

파리채를 들고 바깥의자에 앉은 슈퍼 아줌마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게요. 맨날 다음 기회만 나오네요. 성규가 씁쓸하게 웃으며 복권을 북북 찢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맨날 다음 기회, 다음 기회. 지긋지긋한 다음 기회."

머릿속에 아까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웅웅 울려댄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죠’ 예의상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지. 괜히 다음 기회가 기다려지잖아. 쓸데없이 희망만 주고. 성규는 한숨을 쉬며 허리를 반쯤 숙인채 오르막길을 넘었다.

"이 놈의 오르막길. 내가 불도저로 다 밀어버릴거야."

작년에도 했던 말이다. 내 인생은 내리막길인데 어쩜 걷는 건 맨날 오르막길일까. 내 인생의 오르막길이 언제였더라. 기억도 안 난다. 가로등만 켜져 있는 언덕의 꼭짓점에 서자 그제야 오래된 단층주택이 보인다. 지금 시간까지 불이 켜져 있는 걸로 보아 아마 봉신 씨가 아직까지 안 자고 성규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허리를 톡톡 두드린 성규가 한숨을 쉬며 울상을 지었다.

"아, 어떡해. 취직한다고 떵떵거렸는데…."

떵떵거리기만 했으면 다행이지. 입고갈만한 멀끔한 옷이 없다고 돈까지 얻어 타서 정장까지 사입었는데 다 찢기게 생겼다. 벌써부터 호미를 들고 새로 산 정장과 내 등짝을 부욱부욱 찢어대는 봉신 씨의 모습이 상상된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보다  더 느린 걸음으로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규가 사는 오래된 단층주택 옆엔 똑같은 단층이지만 근사한 마당이 있는 전원주택이 있다.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그런 주택. 근데 터가 안 좋은 것인지 들어오는 사람마다 몇 개월 안 되어 다시 이사를 가곤 했다. 소문에 의하면 집주인이 신내림을 받아야하는데 안 받고 버티다가 죽었다는 둥, 아무도 안 사는 집에서 소리가 난다는 둥 해괴망측한 소문이 돌았지만 어찌 됐건 간에 굉장히 비싸 보이는 건 분명했다. 검은색 쇠창살로 된 고급대문 앞에 멈춰선 성규가 불이 꺼져 있음에도 '나 비싸요'하는 티를 내고 있는 전원주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언제쯤 이런 집에서 살아볼려나."

저기는 화장실이 내 방만 하겠지. 성규가 씁쓸하게 웃더니 갑자기 손을 양옆으로 움직이며 꽃게처럼 오른쪽으로 열 발자국 움직였다. 조금 전과 비교되는 오래되어 칠이 잔뜩 벗겨진 대문 앞에 선 성규가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고 난 뒤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성규니?]

거봐, 날 기다린 게 분명하다니깐.

"어,엄마. 나야."

바로 문이 철컹 열린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나 보다. 가방을 질끈 고쳐잡은 성규가 평상 놓여진 마당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갔다.


*


"큰 소리 떵떵 치면서 돈까지 받아갔으면서 뭐? 회사 면접관이 맘에 안 들어?"
"진짜야…. 예의없는 말투로 날 막 깎아내렸어."
"그게 뭐 어때서! 이게 아주 호강에 겨워서 팔짝팔짝 날뛰는 소리까지 하고 있네. 국이랑 같이 먹어, 시절아!"

봉신 씨가 버럭 화를 내며 콩나물국을 성규의 밥그릇 옆에 턱 내려놓는다. 성규의 어깨가 평소보다 훨씬 쪼그라들었다.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성규의 앞에 앉은 봉신 씨가 손부채질을 하며 콧김을 흥흥 뿜었다.

"아니, 글쎄 니가 귀머거리야? 벙어리야? 어디 팔다리가 없어?! 속상하게 왜 맨날 떨어져서 오는 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
"안되겠어. 너 그냥 큰 고모부 공장에 들어가."
"뭐어?! 아유, 싫어. 공돌이는 싫어…."
"싫어? 싫어? 공돌이 안 하면 곰돌이 눈깔 붙이면서 한평생 살아볼래? 어휴, 정말…. 서른씩이나 되어서는."

들릴 듯 말듯 나지막히 뱉은 봉신씨의 말에 성규가 버럭 언성을 높인다.

"무슨 서른이야! 아직 스물여덟, 만으론 스물일곱인 이십대라고!"
"어디, 이거 어디 갔어."

봉신 씨가 식탁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무언갈 찾는다. 찾아서 손에 쥔 건 파리채다. 그것도 안에 철심이 박힌.

"아악! 엄마, 엄마! 잘못했어! 어머니, 으악!"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못 살아, 징글징글해!"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던데! 아악!"
"맞고 먹어! 너 이리 안 와!"

쪼르르 달려간 성규가 자신의 방 안에 들어가 방문을 콱 잠갔다. 밖에서 열이 잔뜩 뻗친 봉신 씨가 발을 동동거리며 무어라 소리쳤지만 듣는 둥 마는 둥 힘없이 침대에 누운 성규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흐으엉…흐어…흐으…… 쯥. 이젠 눈물도 안 나오네."

그래도 예전까지만 해도 면접에서 떨어지면 징징 울어댔는데 이젠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나 보다. 귀에 손을 받치고 옆으로 누운 성규가 옷장에 걸린 정장을 보며 또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팀장님, 이번 보고서입니다.’
‘팀장님, 오늘 끝나고 저녁같이 해요~’
‘그래요, 팀장님.’
‘하하, 그럼 오늘은 회식 한 번 할까?’

와아아~ 팀장님 최고~는 얼어 죽을. 신입사원만 되어도 소원이 없겠다. 아아, 일하고 싶다! 노동의 보람찬 맛을 느끼고 싶어. 제 친구들은 월급이 쥐꼬리만 하다느니, 상사가 개념이 없다느니의 불평을 가끔 전화통화를 하며 찡얼거렸지만 성규는 그런 친구들의 입을 바늘과 실로 모조리 꿰매버리고 싶었다. 어디서 실직자한테 그런 배불러 터지는 소리를 하고 있어. 사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성규에게도 나름의 직장이 있었다. 식품회사 마케팅부의 꽃돌이로 불릴 정도로 많은 누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을 했었지만 어이없는 모함으로 인해 해고됐다. 물론 많은 30대 넘은 남정네들의 모함으로 말이다. 정장을 들고 와 조심스럽게 케이스에 넣는 도중에 밖에서 봉신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성규! 나와서 밥은 마저 먹고 들어가!"
"흥, 됐어! 안 먹어!"
"먹지 마! 먹지 마, 샹놈새꺄! 안 먹으면 니 배가 고프지, 내 배가 고프냐? 어후, 속 터져."

궁시렁거리며 정장 케이스를 옷장 안에 걸어둔 성규가 그대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천장에 붙은 야광별이 다른 날보다 옅게 빛났다.


*


"……."

방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집안을 살핀 성규가 까치발을 들고 조심스럽게 부엌으로 향했다. 참아보려 했지만 지나치게 배가 고파 속이 쓰릴 정도였다. 부엌 찬장에서 라면과 냄비를 꺼내려는데 뒤에서 불쑥 봉신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뭐 하니."

물을 채운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얹고 불을 켜려던 성규가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기겁했다. 분홍빛 잠옷에 하얀색 마스크팩를 한 봉신 씨의 해괴망측한 모습에 성규가 꽥! 소리를 질렀다.

"간 떨어질 뻔했잖아! 차림새가 그게 뭐야!"
"도둑인 줄 알고 내가 더 놀랐어,이 자식아. 이 새벽에 부엌에서 뭐해."
"라면…. 배,배가 고파서."

엄마 것도 끓일까? 성규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식탁에 놓여있던 구릿빛 보릿물을 따라 마신 봉신 씨가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지금 먹으면 살찌는 건 물론이고 피부도 까칠해져."
"늙은 아줌마 누가 예쁘게 봐준다고."
"시끄러."
"근데 엄만 왜 일어났어?"
"잠이 편히 오겠니? 한 인간은 가출한 지 석 달이 넘었는데 안 들어와, 한 인간은…. 말해봤자 나만 속 터지지."

전자의 한 인간은 김명수를 말하는 걸 테고 후자의 한 인간은…. 10년 전에 교통사고로 먼저 하늘로 가신 아버지다.

"느이 아버지는 갈 거면 깨끗하게 가지 빚은 왜 잔뜩 남겨놓고 가? 쯧."
"서프라이즈 선물인가 보지."
"못하는 말이 없어, 얘는. 암튼 성규 너! 다음 달까지 취업 못하고 백수건달처럼 탱자탱자 놀꺼면은 일찍 큰 고모부 공장들어가서 일해. 우리 사정 아니깐 특별히 월급도 더 주신댄다."
"장학금까지 타가면서 대학 나왔는데 공돌이 하면 섭하지."
"그럼 넌 장학금까지 받아가매 졸업한 애가 지 하나 홍보를 못하니? 그리고 뭐? 공돌이가 섭해? 섭해!? 지금 빚이 산더미인데. 공돌이가 섭해!"
"아우~봉 신씨. 목소리 좀 낮춰주세요. 새벽이야. 라면 놀래…."
"어휴, 저것도 보면 볼수록 화상이야. 다 먹고 설거지 깨끗하게 해놔!"

봉신 씨가 혀를 끌끌 차며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안방으로 들어가는 봉신 씨의 모습이 유난히 쓸쓸하고 외로워 보인다.

"너무 혼자 살으셨어. 애인이라도 구해줘야 하나."
"다 들려!"
"귀도 밝지."

라면 봉지를 뜯고 면을 넣은 다음 뚜껑을 닫고 냉장고로 향해 구석에 있던 오이지를 꺼냈다. 밥도 미리 퍼 놓고 스프를 마저 넣은 성규가 종아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살 많이 찌려나."

요새 맨날 빈둥거렸는데. 에이, 먹고 빼면 되지. 냄비를 식탁으로 후다닥 옮긴 성규가 의자 위에 아빠 다리를 한 채 라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벌써 찬거리가 다 떨어졌네…."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온 봉신 씨가 냉장고 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이게 다 집에 눌러앉아서 식충처럼 먹는 것만 축내는 김성규 탓이야. 냉장고 문을 닫고 안방으로 들어가 카디건과 지갑을 걸친 뒤 성규가 늦잠자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김성규, 일어나! 해가 중천이야! 장보러 시장가게 얼른 퍼뜩 인나."
"아이, 쯧. 엄마 혼자가…. 귀찮게시리."

인상을 팍 쓰며 등을 돌려 눕자 봉신 씨가 성규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렸다.

"뭐? 귀찮아? 이렇게 디비져 누워있으면 안 귀찮니? 어서 일어나."
"아흐, 정말! 오늘따라 왜 이래…."
"니가 아직도 철없는 고등학생이야? 일찍 좀 일어나봐. 나이는 서른이나 되가지고는."
"몇 번이나 말해야해? 서른이기엔 두 살 모자란다고."

째진 눈으로 휙 봉신 씨를 째려본 성규가 궁시렁거리며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눈은 뜨고 가! 어디 부딪히지 말고!"
"뜬거거든! 누구 놀려?"
"감은 건 줄 알았지."

화장실을 문을 쾅 닫고 들어간 성규가 거울 앞에 서서 금방 자다 일어난 얼굴을 여기저기 살폈다. 아침부터 짜증 나게 눈 얘기하고 난리야.

"…어휴, 그래도 눈이 작아서 눈곱도 안 껴. 좋다, 좋아."

꼼꼼하게 세수를 하고 이를 닦던 성규가 거울 속 자신을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화장실 문을 열고 소리쳤다.

"엄마 엄마 엄마!"
"한번만 불러."
"나 쌍꺼풀 수술이나 할까?"
"올챙이다리물집 터지는 소리 하네. 허튼 데에 버릴 돈이 어딨어."
"엄만 내 눈이 허튼 데야?!"
"얘가 잠이 덜 깼나 아침부터 왜 이래."
"아침부터 깨운 엄마때문이지, 다."
 
다시 거울 앞에선 성규, 짐짓 진지하게 눈을 이리저리 까댄다. 흠…. 여기서 눈만 좀 더 커지면 난리나는 안면인데.


*


재래시장에 도착해 한참 반찬거리를 고르던 봉신 씨가 불쑥 성규에게 물었다.

"반찬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삼겹살."
"반찬거리 말이야."
"반찬이 거기서 거기지. 아무거나 사. 나 아무거나 잘 먹잖아."
"개똥 주워다가 소금간 해서 주면 먹을래?"
"먹어봐서 맛있으면."
"더러워, 정말. 그럼 저녁엔 그냥 삼겹살 먹자. 반찬 하기도 귀찮았는데."
"아이고, 봉신 언니! 오늘은 성규도 같이 나왔네!"
"안녕하세요."

채소가게 아줌마가 봉신 씨와 성규를 보고는 가게 안에서 커피 두 잔을 타와 건넸다.

"고마워."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어째 성규 눈이 저번보다 더 작아진 것 같은데? 아닌가? 호호호호호!"
"아침이라 부어서 그래요, 부어서."

커피를 홀짝이던 성규가 눈을 부릅뜨고는 채소가게 아줌마를 흘겼다.

"늦게까지 자려는거 억지로 깨워서 나왔어. 근데 시장이 왜 이렇게 휑하니?"
"어휴, 말도 마. 요 앞에 대형마트 큰 거 하나 생겨서 다 거기로 가지 시장 찾는 사람 드물어. 그나저나 성규는 어디 일 다녀?"
"아, 잠시 쉬고 있."
"얘? 말도 마. 백수야, 시~퍼런 백수. 집에서 쌀만 축내."

왜 이럴까 우리 엄마? 장바구니를 들고 있던 성규가 인상을 쓴 채 중얼거리며 봉신 씨의 허벅지를 툭 쳤다.

"왜? 백수인 게 민망하긴 한가 보지? 그럼 얼른 취직하던가."
"봉신 언니, 너무 그러지마~ 어디 요즘 세상에 취직이 쉽나? 일자리 따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힘들다고 하더라."
"그래도 별은 우주선 타고 따면 되지. 얘는 우주선도 없어. 만들 머리도 없고. 저기 퍼런 상추랑 깻잎 조금만 줘. 저녁에 삼겹살 먹기로 했거든."
"어어. 파채도 줄까?"
"파채도 조금 주고."
"엄마~ 시금치도 사가야지."
"시금치? 시금치는 왜?"

봉신 씨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갱년기잖아. 밤마다 외롭다며. 시금치에는 생리 활성 물질인 감마리놀렌산이 많이 들어 있거든. 아, 맞다. 아줌마. 여기 약국 어디쯤 있어요? 밤마다 허벅지를 얼마나 찔러대던지 허벅지에 진물이 글쎄, 어휴. 말도 못 해요, 진짜. 울 엄마 불쌍해서 우짤까… 힝."

성규가 '힝'하며 울상을 지은 채 시금치를 한 움큼 집어 봉지에 넣자 봉신 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두 손을 불끈 쥐어 보이며 화이팅까지 해준 성규가 승리의 표정을 지어 보인 뒤 후다닥 달아났다.

"야!!! 김성규, 너 거기 안 서!! 엄머!!!"

쪼리를 신은 발로 성규를 쫓아 달리던 봉신 씨가 스텝이 꼬여 시장 바닥에 대(大)자로 철퍽 넘어졌다. 앞서 도망가던 성규, 깜짝 놀라며 봉신 씨에게 다가간다.


*


찬거리와 삼겹살 거리로 가득한 장바구니를 양쪽 손에 든 성규가 양쪽 팔꿈치에 반창고를 붙인 봉신 씨의 눈치를 보며 안 들리게 중얼거렸다.

"그러길래 누가 달려오래…. 아! 왜 때려!"
"다 들려, 이 자식아. 아유, 다리아퍼."
"…어라."

성규가 걸음을 멈추자 같이 걷던 봉신 씨도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왜 멈춰?"
"옆집…."
"옆집이 왜?"

아무도 안 사는 옆집 대문 앞에 검은색의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아~ 넌 모르는구나. 옆집에 또 이사 온다더라."

듣기론 젊은 남자 둘에 여자 한 명이라던데 젊은 것들이 무슨 돈복을 타고났길래 저런 데에서 산대. 봉신 씨가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그때 옆집 현관문이 열리고 넓디넓은 마당으로 걸어나오는 네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배가 불룩 나오고 머리가 벗겨진 저 아저씨는 공짜 좋아하는 부동산 아저씨. 이 집도 저 아저씨가 소개해준 거라 나름 우리 가족과는 인연이 깊었다. 그리고 뒤따라 나오는 남자 한 명은…. 

"뭐야, 재수없게 비율 봐…."

큰 키에 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인데 키만 큰 게 아니라 얼굴도 작다. 신인아이돌인가? 아니지. 신인 아이돌이 이런 좋은 주택을 왜 찾겠어. 그 다음 뒤따라 나오는 여자는 청순해 보이는 얼굴에 굽슬거리는 웨이브, 그리고 마무리로 호리호리하다 못해 무말랭이처럼 말라빠져 있었다. 대체 어느 나라 부족이길래 유전자가 저래.

"엄마, 저 여자 좀 봐. 연예인아니야?"
"연예인이 왜 이 동네로 이사를 오니. 어머어머. 저것 봐, 성규야. 저 여자 뼈다귀만 걸어 다녀, 시상에나."
"뚱뚱한 것보다는 낫지."
"엄만 저렇게 마른 건 싫다. 건강해보이지가 않어."
"치이…."

마지막으로 현관문을 열고나온 남자는…. 별 게 없었다. 키는 나랑 고만고만한 것 같았고 뭐 얼굴은 나름 생겼다만 첫 번째로 나온 남자의 임팩트가 너무 강했다. 아무튼, 그 세 명은 부동산 아저씨랑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며 마당을 거닐었다.

"얘! 얼른 안 오고 뭐 해! 상추 다 시들겠다!"
"그럼 하나 들어주던가. 치사빤쓰."

성규가 무거운 짐 때문에 펭귄처럼 뒤뚱뒤뚱거리며 대문 앞으로 향했다. 검은색 쇠창살의 옆집 대문을 보다가 칠이 잔뜩 벗겨진 자신의 집 대문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요즘에 빈티지가 유행이니깐…."

애써 자기 위로를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고 나오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부동산 아저씨가 먼저 봉신 씨와 성규에게 인사를 건넸다.

"성규, 오랜만이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봉신 누님. 어디 다녀와?"
"그냥 찬거리랑 이것저것 사느라 시장에."
"아,참. 이럴 게 아니라! 여기 옆집 사시는 분들이니 인사들 나누세요."

부동산 아저씨의 말에 새로 이사 올 사람들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쭈뼛거리다가 얼른 고개를 숙이는데 여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헉!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순재라고 해요."
"푸흡."

순재래 순재. 크크. 성규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봉신 씨를 툭툭 치며 웃었다. 그러나 모두 무표정. 성규는 얼른 웃음을 거뒀다. 기분 나쁜 표정은 커녕 환하게 웃은 순재가 이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밝을 순에 있을 재. 밝은 존재라는 뜻이에요."
"웃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다들 그러는 걸요. 저도 가끔 제 이름 생각하면 웃겨요."

얼굴도 예쁜 여자가 성격도 예쁘네.

"아, 참. 얘는 이성열이라고 제 동생이에요."

키 큰 남자가 아무 말 없이 꾸벅 인사를 했다. 검은 머리 때문인지 아니면 아무 감정 없어 보이는 눈 때문인지는 몰라도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냥 평범한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남우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뭐 부탁까지야…. 필요한 거 있으면 찾아와요."

방금까지 시샘이 섞여 있던 봉신 씨가 그새 말투를 바꾸고 사근사근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온 성규가 거실에 누워 뒹굴 거리며 중얼거렸다.

"우리랑 다른 부족인가 봐."
"부족?"
"우린 다 짧고 몽땅하잖아. 근데 아까 그 이순재라는 여자랑 이성열이라는 남자는 키도 쭉쭉이고 피부도 하얗고 게다가 얼굴도 작아. 난 뭐냐."
"그 대신 넌 눈이 작잖아."
"나 진짜 쌍꺼풀 수술한다?"
"미친놈. 호박 뒤집어깐다고 수박되니."
"어떻게 아들 콤플렉스를 그렇게 후집어대냐."
"취직해."

그럼 엄마 쌈짓돈으로 그 못난 눈 뒤집어까줄께. 싱크대에 서서 상추와 깻잎을 씻던 봉신 씨의 말에 성규가 몸을 팔딱 일으켰다.


*


해가 서산으로 느릿느릿 넘어갈때쯤, 숯불그릴 앞에서 목장갑을 끼고 고기를 굽던 성규가 집게로 그릴을 탕탕 치며 불만을 표출했다.

"왜 내가 구워."
"너 취직하면 쌍꺼풀 수술해주기로 했잖아. 그리고 엄만 눈이 어두침침해서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잘 모르겠더라."
"눈물이 절절 나는 핑계구만."

평상 위에 앉아 고기를 먹던 봉신 씨가 고기 한 점을 먹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우, 퉤퉤! 얘! 너무 짜! 소금 좀 적당히 뿌려!"
"물에 헹궈드시던지요."
"쯧…… 그래도 고기는 명수, 그 시키가 잘 구웠는데."

고기를 뒤적거리며 무심코 뱉은 말에 성규가 괜히 한숨을 쉬었다. 이 쉬키는 어디 가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얼른 집에 들어와서 고기나 굽지.
 
"아들. 짠."
"짠."

봉신씨와 술잔을 쨍 부딪친 성규가 단숨에 술잔을 비워냈고 봉신씨는 한 모금을 마시고는 크으으하는 소리와 함께 고기를 입에 얼른 넣었다.

"왜 이렇게 술이 쓰니."
"그럼 술이 달 때도 있나?"
"예전엔 달았어. 아버지살아계실때 명수랑 너랑 나까지 넷이서 오붓하게 고기 구워먹는 날이면 얼마나 술이 달았는데…."

고등학교 때 내가 상을 타오거나 아주아주 드물긴 하지만 김명수가 상을 타오는 날이면 우리 가족은 상의 가치나 이름을 불문하고 고기파티를 했다. 상을 타오는 것 외에도 생일이나 좋은 일이 있거나 혹은 나쁜 일이 있어도 우린 고기를 먹으며 고기로 풀었다. 얼마나 자주 고기를 먹었으면 우리 고기 굽는 날엔 동네 아는 사람들이 김치, 혹은 버섯을 들고 와 같이 먹을 정도였으니깐.

"갑자기 생각나네."
"뭐가?"
"옛날에 엄마랑 아버지 결혼기념일 날 이벤트 해준다고 폭죽 하다가 마당 잔디랑 꽃밭 다 태워 먹었잖아.기억나?"
"내가 그때 생각하면 자다가도 헛웃음이 나와, 이것아."
"히히. 그날 엄마한테 오지게 혼나고 한동안 우리 마당 새까매서 사람들이 구경왔었는데."

그때가 좋았는데. 맞아. 그때가 좋았어. 성규와 봉신 씨가 주거니 받거니 말을 하다가 둘 다 잠시 말을 멈추고 예전을 회상했다.

"아휴, 고기 좀 더 구워봐."
"…울긴 왜 우냐."
"연기가 매워서 그래, 연기가."
"연기 다 내 쪽으로 오는구먼 무슨….콜록콜록."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는지 카디건 소매로 눈가에 맺힌 조그마한 눈물을 콕 찍은 봉신 씨가 소주 두 병사는건데 한 병만 사 와서 간에 기별도 안 간다며 고기는 자기가 구울 테니 슈퍼가서 더 사오라며 성규를 재촉했다. 군말없이 집안으로 들어가 지갑을 챙겨서 나온 성규가 검은색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슈퍼로 향했다.

"뭐야, 닫혔네."

아줌마 어디 가셨나? 슈퍼 유리문에 바짝 붙어 어두컴컴한 내부를 훑은 성규가 한숨을 쉬며 10분 정도 더 걸어가면 나오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에 들어가니 고등학생으로는 보이는 여자애가 머리는 노랗게 물들여서는 손님이 들어왔는데도 쳐다보지도 않고 핸드폰만 쭈물럭쭈물럭거린다. 나 때는 안 저랬는데 요즘 애들은 정말. 참이슬 두 병을 꺼내와 계산대에 올려놓자 그제야 아르바이트생이 느릿느릿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로또 자동으로 한 장 주세요."


*


편의점에서 나온 성규가 로또를 잘 접어 지갑에 끼워 넣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노랫소리에 맞춰 소주 두 병이 쨍쨍 부딪친다.

"찰랑찰랑~ 찰랑대네. 잔에 담긴 위스키처럼~그 모습이~찰랑대네~사랑이란 한잔 술이던가~"
"내가 내 옷 막 입지말랬지."

성규가 깜짝 놀라 얼른 뒤돌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낡은 가로등 밑에 명수가 손을 휘휘 흔들며 서 있었다.

"김명수?"
"후후, 아임컴백."
"컴백같은 소리하고 있네, 이 상또라이새끼."
"형. 잠깐 내 말 좀, 아악! 아! 아파! "

소주병이 들어있던 편의점 봉투를 내려놓은 성규, 후다닥 명수에게 달려가 여기저기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미친 놈아, 엄마가 너 때문에, 어? 얼마나 속앓이를 했는데 어? 이 시키! 나쁜시키, 샹놈시키, 개놈시키!"
"아, 그만 때려!"

명수가 마구잡이로 때려대던 성규의 손목을 턱 잡았다.

"어? 이 시키가, 이거 안 놔?"
"못 놔."
"놔."
"못 놔."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안 놔!"
"이게 진짜."

다시 때리려고 안 잡힌 손을 들자 명수가 그 손도 얼른 붙잡는다.

"어쭈?"
"내가 예전에 김명수인 줄 알어? 한 번 맞지 두 번 맞을까 봐, 내가?"
"김명수!"
"왜! 김성규!"
"내가 아는 김명수는, 내 동생 김명수는! 하아…."
"……."

꽤 진지한 성규의 목소리에 명수가 성규를 잡았던 손의 힘을 살짝 풀며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

"…무식해서 두 번 맞을 시키야."
"악!"

성규의 발이 명수의 정강이를 시원하게 걷어찼다. 정강이를 감싼 명수가 앓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자 그제야 두 손을 탁탁 턴 성규가 편의점 봉투를 다시 주워들었다.

"정강이 까는 버릇 아직도 못 고쳤냐? 아오, 쓰라려."
"한 번만 더 가출 같은 거로 청소년 코스프레하면 그땐 정강이로 안 끝나. 모가지를 확 비틀어버릴꺼야."
"하아, 씁. 아파…. 으으! 거봐! 까졌잖아!"
"살점이 푹 파이게 찼어야 다시 가출을 안 할텐데."

인상을 쓰며 손가락에 침을 발라 까진 정강이에 펴바르고 호호 불고 있는 명수의 얼굴을 성규는 찬찬히 훑어봤다. 잘난 얼굴이 좀 야위긴 했다. 옷도 명수답지 않게 조촐한 차림이고 석 달 전만 해도 슬림하면서 얇게 머슬이 깔려있던 몸이 비리비리한 멸치가 되어버렸다. 좀 측은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지만 지가 사서 고생한 건데 뭘.

"어떻게 지냈냐, 석 달 동안."
"그냥 여기저기."
"근데 왜 다시 돌아왔어. 음악한다고 편지까지 써놓고 가출한 시키가."
"너가 가출해봐. 딱 석 달까지는 흥분돼. 근데 그다음부턴 고역이야."
"그래? 그렇구나…. 근데 형한테 너가 뭐야, 이 시키야."
"아아! 머리 때리지마!"
"어쭈, 이게 그래도!"
"이씨."

투닥투닥 거리며 집 앞에 도착하자 명수가 대뜸 걸음을 멈추고 성규의 팔목을 잡았다.

"왜?"
"엄마 오늘 컨디션 어때?"
"음…. 지금 술 약간 들어가서 유들거릴 텐데."

어휴, 고기가 왜 이렇게 질겨! 김명수 같은 놈! 안에서 봉신 씨의 외침이 들리고 명수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헉! 어떡해 형? "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나 먼저 들어간다."
"아아, 형. 기다려봐. 성규형님. 제발."
"아니 이 상황을 나보고 어떡하라고?"

밖에 성규니? 봉신 씨의 목소리와 함께 대문이 철컹 열리고 명수가 기겁하며 성규 뒤로 숨었다. 오마이갓! 하필 엄마 손에 들린 게 기다란 연탄집게다. 근데 갑자기 저건 왜 들고 있는 거지?

"왔으면 들어오지 왜 서 있어?"
"어어. 막 들어가려고했어…. 근데 그 연탄집게는 뭐야?"
"불씨가 죽어가서 숯 좀 쑤시려는데 마땅한 게 있어야 말이지. 근데…."

성규 뒤에서 무언가 꿈틀거리자 봉신 씨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뒤에 누구니? 친구?"
"얘? 아냐. 친구는 무슨. 얘 우리집 막내아들."
"막내아들? 막내아들은 명수…."

봉신 씨의 미간이 점점 찌글찌글해지자 성규가 씨익 웃으며 허리를 앞으로 확 숙였다. 덕분에 뒤에 숨어있던 명수와 봉신 씨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느어…너…김명수!!"
"어,엄마. 잘 지내셨,아! 엄마! 아! 엄마! 아악!"
"아! 엄마! 난 왜 때려! 아! 아아!"

명수의 허벅지를 연탄집게로 내려친 봉신 씨가 연탄집게를 내동댕이치더니 매운 손으로 매타작을 시작했다. 명수가 뒤에서 붙잡고 있는 통에 덩달아 얻어맞고 있는 성규가 후다닥 대문안으로 뛰어들어가자 명수도 얼른 뒤따라들어간다. 이번엔 마당 한 편에 세워놓은 빗자루를 집어든 봉신 씨가 평상을 가운데에 두고 명수와 팽팽한 대치를 했다.

"김명수 너 이리 안 와? 오늘 너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아니면 이 빗자루가 죽든지 끝장낼 테니까 당장 이리와. 안 와?"
"엄,엄마. 잘못했어. 이렇게 싹싹빌께, 응? 일단 진정해, 진정."
"진정? 진정?"
"시,심호흡하자. 엄마는 지금 아드레날린 과포화상태라 화를 내고 있는거야. 심호흡하자, 어서. 후우 하아 후우 하아. 에이씨, 야! 김성규! 그만 처먹고 좀 도와줘봐!"
"내가 어떻게 도와주냐! 근데 뭐? 야 김성규? 그만 처먹어? 이 놈 새키가 형한테! 엄마! 잡았어!"
"우아악! 놔! 놔! 에이씨!"

성규, 명수의 츄리닝 바짓가랑이를 꽉 붙들고 놓아주질 않자 바지를 훌렁 벗어 팬티 바람이 된 명수가 집안으로 후다닥 뛰어들어간다. 그리고 그 뒤를 봉신 씨가 바짝 쫓는다. 잠시 후 집안에서 사람 처맞는 소리와 물건 던지는 소리, 봉신 씨의 욕과 명수의 비명이 나란히 들려왔다.

"아아, 고기탄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기 굽던 집게를 집어든 성규가 얼른 불붙은 고기를 뒤집었다.


*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명수가 평상위로 올라오더니 고기를 굽고 있는 성규를 뚫어지게 째려봤다.

"엄마는."
"상추 씻어."
"어휴, 눈빛 봐. 동생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다?"
"내 후드티 좀 벗고 굽지?"
"오오. 지금 치사한 걸로 대결하자는 거야? 그럼 너 내가 여태까지 준 용돈 갚어."
"취직이나 하시지?"
"걱정해줘서 고맙네~ 그것도 나이 스물넷이나 돼서 가출하고 온 고졸 띨띨이가."
"니가 졸업한 지잡대를 가느니 차라리 고졸로 남겠다."
"난 그래도 대학교 때 장학금이라도 받았지. 넌 대학 졸업은커녕 고졸에다가 다니는 대학마저도 휴학이잖아, 띨띨아. 그리고 이게 또 형한테 반말하네."
"아! 진짜 한 번 더 때려라."
"한 번 더 때렸다."
"아! 눈도 땅콩만 한 게."
"뭐? 땅콩!? 이 시키가 진짜!"
"놀구들 있네."

상추 바구니를 들고 있는 봉신 씨의 등장에 명수와 성규가 입을 닫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고기에 있던 기름이 숯불에 떨어지면서 불길이 화르르 올라오자 명수가 인상을 쓰며 성규를 밀어냈다.

"서른이나 되가지고 고기도 못 굽냐."
"스른아니르그. 스믈여들이그든."
"비켜 비켜. 내가 굽게."
"누가 말리냐. 안 말릴 거거든?"

고기 집게를 빼앗아 잡은 명수가 척척 고기를 구워내기 시작했다.

"가출하니깐 어떻디?"
"새로운 세상, 새로운 문명을 접했달까? 훗."
"입만 살았어, 아주."

봉신 씨가 던진 마늘을 홱 잡은 명수, 씨익 웃어보이곤 잡은 마늘을 불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명수의 뒤통수를 성규가 딱 소리 나게 내려쳤다.

"아씨, 진짜 내가 동네북이냐!"
"동네북은 아니고 우리 집 소고정도? 넌 지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해, 이 눔 새캬. 똥구멍으로도 할 말 없는 입장인데 어디서 능글맞게 대꾸하고 있어. 잘 못 했다고, 다신 가출같은 거 안 하겠다고 싹싹 빌어. 피로 각서 쓰기 전에."
"말 잘했다, 성규야. 김명수 너 한 번만 더 가출했다간 호적에서 아주 그냥 확 파버릴 거야."
"이젠 하라 그래도 안 해, 걱정마."

한참 고기를 굽던 명수가 김치 양념을 발라내는 성규를 보더니 봉신 씨에게 그대로 일러바쳤다.

"엄마엄마! 형 또 김치 양념 다 발라낸대~요."
"김성규. 그러면 김치 맛 상한다고 했지."
"아씨, 생강 씹히잖아. 김장할 때 생강 넣지 말던가…."
"니가 애야? 먹기 싫은 거 발라내게?"
"엄마. 서른 전까지는 다 애야. 알면서."
"어휴, 너희 둘 다 징글징글해. 어디서 저런 것들이 나왔어!"
"…엄마 다리 밑에서."

명수가 고기를 구우며 무심코 한 말에 성규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


"우와~ 내 침대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명수가 성규 옆에 놓인 자신의 침대에 풀썩 누우며 몸을 뭉그적거렸다. 세 달 동안 혼자 잘 땐 방안이 썰렁했는데 명수가 다시 돌아오자 방안에 훈훈한 훈기가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누가 집 나가서 개고생하랬냐."
"으으. 보고 싶었어, 형~"
"갑자기 왜 이래. 꺼져. 자게."
"직장도 없는 사람이 일찍 자서 뭐하게."
"야. 곧 생길 거야. 걱정하지 마."
"어떻게?"
"잘."
"그나저나 나 있을 때 살던 옆집 사람들은 또 이사 간 거야?"

창문 너머로 보이는 옆집은 암흑에 싸여있었다.

"어. 근데 또 새로 이사 올 꺼야. 아까 만났거든."
"흐음…내가 고딩 때 말했었지? 저기 진짜 귀신 산다고. 그래서 터가 안 좋은 거야."
"지랄 똥을 한 푸대기 싼다. 귀신은 무슨 ."
"진짜라니까! 옛날에 학교 끝나고 오는데 마당에 이상한 여자가 비틀거리다가 눈비비고 봤는데 없어졌었다고."
"잡초 뽑다가 자빠졌나 보지. 시끄러, 잘 거야."

침대에 누운 성규가 눈을 감고 미동도 않자 몇 번 헛소리를 해대던 명수도 이내 불을 끄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안 골던 코까지 도로롱 도로롱 골아대면서 잔다. 코 고는 소리에 잠에서 깬 성규가 입을 헤 벌리고 눈은 반쯤 뜨고 있는 명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짜식, 몇 달 고생했다고 얼굴 반쪽이 됐네…. 그나저나 쟤까지 집에 있으면 생활비 장난아니게 들 텐데…."

얼른 백수탈출을 해야될 것 같은 촉박함에 뒤숭숭한 마음으로 한참을 뒤척이던 성규가 푸른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2.


"이사는 우리끼리 할 수 있다니깐…."
"아냐, 내가 같이해야 맘이 편할 것 같아서."
"회사는 어쩌고…."
"미리 얘기해 놨어. 걱정 마."

성열아,오늘 컨디션 어때? 우현이 초밥의 고추냉이만 살살 긁어내고 있는 성열에게 묻자 천천히 고개를 올려 우현과 눈을 맞춘 성열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눈까지 마주쳐주다니. 오늘은 정말 컨디션이 괜찮나 보다. 싱긋 웃으며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어준 우현이 다시 밥을 먹으려던 순간 성열이 입을 열었다.

"…좋아."
"! …."
"! …."
 
순재와 우현이 서로 마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빛만 교환했다. 한 달에 한 번 열까말까한 뜸한 입을 연 성열은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해 보였다.

"…그래. 다행이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은 우현이 다시 젓가락을 들었고 조용히 미소 지은 순재도 다시 초밥을 집어들었다.

"근데 집이 너무 넓은 거 아닌가…. 두 사람이 살기엔 너무…."
"나까지 셋이지. 두 사람은 무슨 ."
"어쩌려고 그래. 할머님이 아시면…."
"너네 누나 왜 이렇게 소심하냐, 성열아. 그치?"

우현의 말에 성열이 자신의 옆에 앉은 순재를 빤히 쳐다봤다. '걱정 좀 그만해' 소리는 안 났지만,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휴우, 알았어. 밥 먹자. 그리고 우현이 너 자꾸 맞선 자리 도망가고 그러지 마. 그럴 때마다 나한테 전화하셔서 너 어딨냐고 물어보시는데 나 무지 곤란해."
"…누나한테까지 전화 왔어?"
"그래, 인마. 잘해. 이리저리 뺀질뺀질거리지 말고."
"알았어."

일식집에서 나온 우현이 얼른 차를 빼 오자 자연스럽게 성열이 조수석, 그리고 순재가 뒷좌석에 앉았다.

"마트 들렸다 가자."
"마트는 왜?"
"이사 가면서 필요한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럼 들렸다 가지 뭐."

신호등 앞에서 마트 쪽으로 차를 돌렸다. 일요일 점심시간대라 그런지 마트 주차장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주차도우미직원이 올라가라는 손짓만 하길래 손짓을 다라 계속 올라오다보니 결국 꼭대기 층까지 와버렸다.

"사람 진짜 많네."
"일요일이잖아. 어,성열아 왜?"

성열이 순재의 어깨를 톡톡 치더니 손을 내밀었다. 아, 여기. 순재가 얼른 가방에서 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 건네자 동전을 받아든 성열이 어디론가 익숙하게 향했다.

"성열이 어디가?"
"쟤? 카트 뽑으러."
"아아…."


*


마찬가지로 마트에 들린 성규네 가족. 힐끗 명수를 본 성규가 비웃음이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마트오면서 왠 썬글라스."
"눈이 부었단 말이야."

명수가 살짝 내려간 선글라스를 다시 추켜올리며 투덜댔다. 성규가 '선글라스를 쓸꺼면 거기에 맞춰서 입던가'하고 비웃자 유리창앞에 멈춰선 명수가 잠시 자신의 패션을 재점검했다. 파란색 아디다스 츄리닝 세트에 낡아빠진 뉴발 슬리퍼. 그리고 저 새까만 선글라스.

"…흐음. 내추럴해보이지않아?"
"내추럴? 뇌출혈은 몰라도 내추럴은 전혀 못 찾겠는데? 어디 숨겨뒀니?"

나름 괜찮구먼. 명수가 혼자만 들릴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근데 시장만 찾던 시장순이 봉신 씨가 갑자기 쌩뚱맞게 왠 마트?"
"쪼리 밑창이 죄다 튿어져서. 먹는건 시장이 나은데 옷 같은건 마트가 나아. 명수 너 가서 카트 좀 뽑아와."
"쪼리만 살꺼잖아. 카트는 왜?"

카트를 밀어야 눈치 안 보고 시식을 하지.봉신씨의 말에 명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전을 받아 카트 뽑는 곳으로 향했다.

"……."

카트를 뽑는 곳에 남자 한 명이 서있었다. 짝다리를 짚고 남자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동전넣고 뽑기까지 얼마 안 걸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도통 비킬 생각을 않는다. 철컹철컹. 뭐가 잘 안 되는지 카트 손잡이를 흔들어보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

바로 옆에 직원이 서있는데도 계속 손만 더듬더듬거리는 모습이 답답했던 명수가 고개를 스윽 들이밀었다.

"뭐가 잘 안 되요?"
"……."
"동전이 먹혔나."
"……."
"…아닌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이 없길래 고개를 올려 남자와 시선을 맞추자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뭐하는 거지? 명수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다시 뒤로 빼고 직원을 불렀다. 뒤늦게 다가온 직원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흔히 있는 일인지 주머니에서 드라이버를 꺼내 박혀있던 카트키를 홱 잡아뽑았다.

"카트 중에 카트 키가 찌그러진게 몇 개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아뇨. 괜찬습니다. 죄송까지야."
"……."
"저기… 이 카트 쓰실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카트 손잡이를 꽉 쥔 남자가 명수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재빨리 카트를 밀며 멀리 사라졌다. 순재와 우현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성열이 카트를 멈추고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

다시 멀쩡한 얼굴색으로 돌아온 성열이 순재와 우현의 물음에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며 먼저 카트를 끌고 매장안으로 들어갔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방이 총 다섯개. 큰 방 두 개랑 중간짜리 하나, 작은 방 두 개. 내가 중간 방쓸테니까 큰 방 두 개는 순재랑 성열이가 써. 나머지 작은 방 두 개는 다용도실이나 서재로 쓰자."

새로 이사 온 전원주택 마당에 있는 나무벤치에 나란히 앉은 우현과 성열,순재. 우현이 어디선가 얻어온 주택 평면도를 나무테이블위에 촥 펼치더니 방을 정하기 시작했다. 세 명이 앉아있는 벤치 옆으로는 이삿짐센터직원들이 부지런히 짐을 나르고 있다.

"근데 문제가 있어."
"왜?"

'그게…' 한동안 뜸을 들이던 우현이 이삿짐 직원들이 다닥다닥 붙어 옮기고 있는 피아노로 시선을 옮겼다. 우현의 시선을 따라 순재와 성열도 피아노로 시선을 돌렸다.

"아…."
"거실에…놓을까?"
"다락방."

다락방? 우현이 되묻자 순재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열은 별말없이 턱을 괴고 열심히 집안으로 들어가는 이삿짐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락방 내부는 넓어서 상관없는데 문에 끼지않으려나."
"나도 다락방 문 사이즈랑 피아노랑 안 맞으면 어쩌나하고 걱정했는데 사이즈 재보니까 잘 맞춰서하면 들어가겠더라구."
"그래."

'그럼 피아노는 다락방에 놓자'하고 평면도를 접은 우현이 기지개를 켰다. 저기엔 뭘 해야 좋을까? 순재가 마당 한 편에 있는 흙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음…. 채소키울까?"
"채소? 채소는 키우기 되게 까다로울텐데."
"그런가."
"…꽃 키우자."

꽃? 우현이 되묻자 순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흙밭으로 향했다.

"흙이 촉촉해. 꽃 심으면 잘 자랄 것 같아."

쭈그려앉아 흙을 매만지던 순재가 손을 털고 일어나 성열에게 다가갔다.

"성열아. 저길 꽃밭으로 만들거야. 보이지? 흙도 좋아서 잘 자랄 것 같아."
"……."

성열이 턱을 괸 상태로 흙밭에 시선을 옮겼다.

"꽃밭은 너 담당이야."
"……."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말은 안 해도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 표정을 용케 읽은 순재가 성열의 앞머리를 매만져주며 말을 이었다.

"우현이는 바빠서 잘 못 돌봐줄 것 같고… 나는 키우고 그러는거 잘 몰라서 내가 키우면 다 썩을지도 몰라."
"……."
"괜찮지?"

무언갈 생각하던 성열이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


봉신 씨는 요맘떼. 성규는 설레임. 명수는 죠스바.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물고 집으로 귀가하는데 새로 쪼리를 산 봉신 씨의 발걸음이 유난히 경쾌했다. 비록 가짜지만 쪼리에 박힌 유리보석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거렸다.

"어머머. 이거 반짝거리는 것 좀 봐. 봐도 봐도 예쁘지않니?"
"이만삼천원짜리 치고는 봐줄만하네."
"조용히해. 동네사람들한테 오만원짜리라고 할꺼니깐."

못 말려, 정말.

"어? 옆집 이삿짐왔나봐."
"진짜네? 근데 왜 남의 집 대문앞에 주차하고 난리야."

명수가 선글라스를 벗어 머리에 쓰더니 이삿짐 트럭 바퀴를 발로 툭툭 찼다.

"근데 옆집사람들 대충 어때? 여자야?"
"여자 한 명에 남자 두 명."
"에이….그럼 부부에 아들이겠네?"
"아니. 남자 한 명이랑 여자는 남매야. 그리고 세 명 다 젊어. 두 명은 나랑 나이대가 비슷해보였,"

히이! 그렇게 나이가 많아? 명수가 기겁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성규가 명수를 휙 째려봤다.

"미안. 계속 얘기해."
"암튼 부자인가봐."
"하긴. 여태까지 이 집에 살던 사람들 다 부자였으니깐."

봉신 씨는 집안으로 들어가고 성규와 명수는 나란히 평상에 앉는다.

"너 어떡할거야."
"뭘?"
"대학도 그렇고 이것저것."
"대학은 다시 다니기 그른 것 같고 일단 아르바이트 먼저 하려고."
"어디 자리있어?"
"응. 선웅이형네 가게."
"선웅이형? 아아~ 그 레디락인가 하는 레스토랑?"
"응. 형이 우리 사정 잘 알잖아. 다음주부터 출근하래."
"다행이네."

이젠 형이 말해보지. 명수가 죠스바 막대기를 잘근잘근 씹으며 물었다.

"이 나이에 아르바이트는 그렇고 다시 직장구해서 일해야지."
"아르바이트가 뭐 어때서."
"나중에 나이들고 쭈글쭈글해지면 어떡할건데? 아르바이트는 한때야. 그리고 난 대학까지 나왔잖냐."
"대학나온거가지고 되게 유세떠네."

명수가 투덜대며 집안으로 들어가자 그 뒤에 대고 성규가 소리쳤다.

"아르바이트비는 나눠써야하는거알지!"


*


이삿짐이 집안으로 모두 들어오자 우현과 순재는 더 막막해졌다. 어느새 앞치마를 메고 있는 순재가 박스에서 새 앞치마를 꺼내더니 우현에게 건넸다.

"자."
"이게 뭔데?"
"앞치마. 얼른 메. 정리해야지. 성열이 너도 받아."

소파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있던 성열이 순재가 건네는 앞치마를 받아 군말없이 걸치자 우현도 조용히 앞치마를 맸다.

"일단 각자 방은 각자가 정리하고 거실만 성열이랑 너가 해줘. 난 부엌 정리할게."
"오케이."
"……."

침대나 옷장같은 가구들은 이미 배치를 끝냈고 자질구레한 잡동사니와 인테리어소품들은 거실에 가득 놓여져있었다. 하루 반나절은 걸릴 것 같은 예감에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박스를 열고 하나하나 꺼내던 우현이 액자하나를 들고 멈칫했다. 사진속에는 콩쿠르대회에서 깃털같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순재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우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락방에 올려놓을 짐에 액자를 끼워넣었다. 한참 정리를 하는데 부엌에서 순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참. 떡 주문했어?"
"일요일에 배달해주겠다고 했으니깐 걱정마."

마구잡이로 쌓여있던 짐들이 슬슬 제자리를 찾아갔다. 거실이 유난히 크고 천장도 높아 전에 쓰던 가구들로는 집안이 꽉 차질않아 썰렁해보이는 감이 없지않아있었다.

"흠….뭐가 부족한걸까, 성열아."
"……."

성열과 우현이 나란히 서서 거실을 한번 슥 둘러봤다. 아직 TV와 전자제품들이 안 들어와서 그런가? 내일 일끝나고 오는 길에 가구점에 한번 더 들려야겠다고 생각한 우현이 아직 먼지를 닦지않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막상 노발대발할 할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니 회사에 출근할 엄두가 안난다. 마음속이 심란해 천장만 쳐다보고 누워있는데 성열이 우현의 무릎을 톡톡 쳤다.

"……."

성열이 건넨 신문지를 받아든 우현이 멀뚱히 가만있자 신문지를 소파에 얹은 성열이 그 위에 앉아 우현을 슥 쳐다봤다. 깔고앉으란 뜻이다.


*


"야 김성규!"

저녁을 배불리 먹고 거실에 드러누워 먼저 화장실에 들어간 명수를 기다리며 tv채널을 여기저기 돌려대는데 화장실에서 절규에 가까운 명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저 자식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반말이네.

"동생님. 예쁘게 말하면 혀가 잘려요?"
"지금 예쁘게 말 나올 상황이냐? 이거 뭐야. 너가 다썼지."
 
명수의 손에 들린 건 폼 클렌징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향이 좋아서 샤워할때마다 온 몸 구석구석을 닦다가 한 달전에 몽땅 다 써버린 폼 클렌징. 성규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난 그게 바디 워시인줄알았지."
"바디 워시? 이거 폼 클렌징이야! 이게 얼마짜린 지 알아? 나도 선물받고 병아리 눈동자만큼 짜서 쓰는 건데 이 비싼 걸로 그 저질스런 몸을 닦았다고?"
"나중에 돈 벌면 사줄게! 더럽고 아니꼬와서 정말."

폼 클렌징이 비싸봐야 거기서 거기지, 더럽게 유난떠네. 씩씩거리며 명수가 문을 쾅닫고 들어가자 문에 대고 성규가 주먹을 까보이며 감자를 먹였다. 다시 거실에 드러누워 tv를 보는데 이번엔 안방에서 마스크팩하고 잠잠히 누워있던 봉신 씨가 후다닥 거실로 달려나왔다.

"리모컨 이리 내. 응가하라 1997할 시간이야."
"나 지금 닥치고 윤도현 밴드보고 있잖아."
"넌 재방송 봐. 어머머. 시작한다."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 리모컨을 봉신 씨에게 내준 성규가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며칠 전 일자리를 모집하는 사이트에 뜨는 채용공고 팝업창을 보고 얼른 입사지원을 했었다. 근데 보나마나 떨어졌겠지. 서류에 떡하니 '서율대'라고 써있는데 어느 회사에서 받아주겠어. 요즘은 연고대 나온 사람들도 백수라고 하던데.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치고 무심한 표정으로 턱을 괸채 지원 결과창을 클릭하려는데 거실에서 봉신 씨의 호들갑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머! 준희가 윤제 좋아한대! 세상에!"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지원결과창을 클릭하려는데 이번엔 문이 벌컥 열리고 입이 댓발나온 명수가 들어왔다.

"거봐. 비누로 씻었더니 피부가 땡기잖아."
"너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하냐. 그 한낱 폼 클렌징이 뭐라고."
"한낱 폼 클렌징이 아니라니까! 100% 천연 녹차 성분이 한가득 들어있는거라고! 녹차가 얼마나 피부에 좋은지 알기나하냐? 토코페롤과 비타민C가 풍부해서 기미, 주근깨는 물론이고 피부를 맑고 깨끗하게 유지시켜준다고."
"…미친놈. 그 암기력으로 공부를 해라, 공부를. 정 아까우면 녹차 티백 찢어서 얼굴에 바르던지."

뿐만 아니라 녹차는 피부트러블 완화와 진정에 얼마나…. 계속되는 녹차 예찬론을 한 귀로 흘려보내던 성규가 심드렁하게 모니터를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모니터를 덥석 붙잡았다.

"뭐하냐? 모니터 안으로 들어가게?"
"…일차 서류심사 합격? 야, 이거 붙었다는 거냐?"
"흠. 어디 봐봐."

수건으로 코를 후비적거리며 모니터로 다가온 명수가 드래그까지 해가며 꼼꼼히 읽었다.

"오올. 그런 것 같은데?"
"아싸!"

의자에서 팔짝 일어나 침대위로 올라간 성규가 방방 뛰어댔다. 꺅꺅소리를 지르며 뛰어대는 통에 응가하라 1997을 보던 봉신 씨가 인상을 쓰며 들어왔다.

"시끄러워! 침대위에서 뭐하는 거야!"
"엄마! 나 이제 백수탈출이야! 으하하! 쌍꺼풀 해주기로 했다? 그치!"
"쟤 갑자기 뭐래니."
"입사 지원했는데 서류 합격해서 저래. 냅둬."

명수가 앉아있는 모니터로 다가간 봉신 씨가 '어머머,정말이네!'하고 박수를 쳤다.

"다들 왜 이래. 아직 합격은 아니잖아. 면접봐야지.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는거아니야?"
"그래도 일차에 붙은게어디야! 으하하하! 잠시만 면접일자가….토요일? 히이! 내일 모레잖아!"

뭐 입지? 뭘 준비해야되지? 성규가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난리를 피자 정장부터 세탁소에 맡기라며 기분좋은 잔소리를 한 봉신 씨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을 나갔다.

"야, 김명수! 폼클렌징? 그깟거 백개는 사줄게! "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성규가 요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토요일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준비할 겨를이 없어 불안하긴 했지만 아침에 봉신 씨가 끓여준 비싼 한우 소고기국 덕분에 속은 든든했다. 말끔한 정장차림에 명수의 도움으로 머리까지 멋지게 세운 성규가 정거장에 도착한 버스에 얼른 올라탔다. 마치 성규를 기다린듯이 딱 한 자리가 비어져있길래 얼른 달려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모든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좋아. 이 상태 그대로 면접까지 시원하게 끝내는 거야. 날씨 좋겠다, 컨디션도 좋겠다. 문제될 거 하~나도 없어. 입술을 앙 다문 성규가 서류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오전11시. 시간도 넉넉하다. 콧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풍경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다음 정류장에서 임산부 한 명이 버스에 올라탄다. 힘들게 허리를 받치며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는게 위태로워보여 얼른 자리를 양보했다.

"여기 앉으세요."
"아휴, 괜찮은데….고마워요."

비록 몇 정류장을 더 가야 도착이지만 성규는 뿌듯함에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왔다. 그렇게 한동안 평화롭게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영문도 모르고 실실 웃으며 서있던 성규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동전넣는 통까지 데구르르 굴러갔다.

"아악!"
"괜찮아,총각!?"
"괘,괜찮아요….아아!"

쪽팔림에 얼른 일어난 성규가 발목부터 올라오는 찌릿함에 봉을 붙잡고 인상을 찌푸렸다.


*


"아아…!"

도착지까지 두 정거장이나 남았지만 발목이 심상치않게 아픈까닭에 다음 정거장에서 바로 내렸다. 약국에서 파스를 사 발목에 뿌린 성규가 한 발 내딛었다가 신음을 하며 비틀거렸다. 버스에서 굴렀을때 발목을 삔 탓이다. 휴…. 왠지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했다. 하지만 여기서 좌절하면 안돼. 성규, 이를 악물고 일어나 깽깽이 걸음으로 도로 갓길로 나가 택시를 잡아탄다.

"아저씨. 한동빌딩으로 가주세요. 빨리요."

벌써 12시다. 1시에 면접이라 12시에 도착해 준비하려고 했는데!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려고 서둘러 서류가방에서 거울을 꺼냈다.

"히익!"

버스에서 넘어졌을때 깨진건지 거울에 쩌적쩌적 금이 가 있었다. 조~온나 불길해! 갑자기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성규의 목울대가 한번 일렁거렸다. 징크스가 따로 있진 않았지만 지금 상황은 충분히 성규를 불안케하고도 남을 상황이였다. 

"침착하자,침착. 후우."

택시가 한동빌딩앞에 멈추고 택시비를 계산한 성규가 쩔뚝거리며 택시에서 내렸다. 제일 먼저 손에 들고 있던 거울을 전봇대에 놓여진 쓰레기봉투위로 버린 성규가 빌딩 유리창을 보며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발목이 삐긴 했지만 시간도 안 늦었고 매무새도 완벽해. 긴장하지마. 후우후우."

스스로에게 엄지를 치켜세워주고 빌딩안으로 쩔뚝거리며 들어가는 성규. 그 모습 뒤로 서쪽하늘에서부터 먹구름이 무겁게 다가오고 있었다.


*


한편 명수는 봉신 씨 마저 공장에 출근해 혼자 외로이 집을 지키고 있다.

띵도옹~

침대위에서 만화책을 읽던 명수가 초인종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누구지? 모니터없는 인터폰으로 다가가 누구세요,하고 묻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번에 인사드렸던 이순재입니다. 새로 옆집 이사 온 사람이요.]
"옆집…. 아아, 잠시만요."

이순재? 풉. 명수가 비실비실 웃으며 대문을 열어준 뒤 슬리퍼를 직직 끌고 나갔다. 대문앞엔 성열과 순재가 나란히 서있었다. 성규와 봉신 씨와는 인사를 나누며 만난 적이 있지만 명수는 처음보는 순재가 먼저 인사를 꾸벅하자 명수도 덩달아 인사를 했다. 이 사람들이 옆집 이사온 사람들이구나.

"안녕하세요. 저번에 인사드릴때 못 뵈었던 것 같은데…."
"아,그게…. 제가 여행을 하다가 급 돌아와가지구요. 그때 눈 작고 나이든 사람있죠? 그 사람 동생이에요. 김명수라고 합니다."
"아아… 저는 이순재구요, 얜 제 동생 이성열이에요."

명수가 성열을 쳐다보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지만 성열은 아무런 말없이 땅바닥만 쳐다봤다. 어라, 어디서 많이 봤는데…. 명수가 고개숙인 성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순재가 먼저 나서서 말을 한다.

"죄송해요. 얘가 낯을 심하게 가려서요. 성열아, 인사해야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근데 지금 엄마 없는데….무슨 일이세요?"
"어디 가셨어요?"
"네, 공장 출근이요.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저희가 깜빡하고 전에 살던 집에서 공구함을 안 가지고 와서요."
"공구라 하면…."
"망치랑 드라이버만 있으면 되는데…."
"망치는 있는데 드라이버는 십자요 아님 일자요?"
"십자드라이버요."
"잠시만요."

명수가 옆구리르 긁적거리며 마당 구석에 있던 오래된 나무 상자를 열고 여기저기 뒤적거렸다. 망치와 드라이버를 꺼내 나무 상자 뚜껑을 닫고 대문으로 다가가 조금 투박할 정도로 큰 망치와 드라이버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저기 꽃밭 직접 가꾸신 거에요?"
"아, 저 꽃밭이요?"

마당 한 켠에 이름모를 꽃들이 한 가득 피어있었다. 모두 성규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꽃들이다.

"저거 다 우리 형이 키운거에요. 무지 아끼는 꽃밭이라 건드리면 되게 화내요."
"저희도 마당에 꽃을 키워보려고 하는데….형분이 꽃을 잘 키우시나봐요?"
"꽃 키우는 거 잘해요. 고등학교때 학교 화단도 형이 관리했어요."
"와아.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도 괜찮으려나…."

순재가 조심스럽게 묻자 명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형 오지랖도 넓고 꽃 키우는 거 좋아해서 괜찮을거에요'하고 답했다.

"감사해요. 아, 공구는 쓰고 바로 돌려드릴께요."
"아녜요. 넉넉히 쓰고 돌려주셔도 되요."
"네. 감사합니다."

대문을 닫고 돌아선 명수가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망치 되게 크다, 그치?"
"……."
"어머. 너 어디 아파?"

순재가 드라이버를 든 손등으로 성열의 이마를 짚었다. 얼굴색이 성규네 꽃밭에 있던 빨간 꽃과 비슷했다.

"열도 나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애가 왜 이러지. 성열아, 괜찮아?"
"……."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성큼성큼걸어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버린다.

"……."

집안으로 들어온 성열이 자신의 볼을 두 손으로 꾸욱 눌러봤다. 뜨거웠다.


*


서쪽하늘에서부터 밀려오던 먹구름은 금방 비를 쏟아부었다. 소나기는 아닌 모양이다.

'번거롭게해서 죄송합니다. 정말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

빌딩에서 절뚝절뚝 걸어나온 성규. 입구에 서서 내리는 빗줄기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풀썩 쭈그리고 앉는다. 발목이 시큰거렸다. 성규와 마찬가지로 면접보러왔던 사람들이 줄줄이 빠져나왔다. 모두들 미리 챙겨온 우산을 가방에서 꺼내 빗줄기를 뚫고 유유히 사라졌다. 나만 우산을 안 갖고 온건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집엔 어떻게 돌아가지? 비도 내리고 발목도 아프고 게다가 면접은 떨어졌고 우산도 없다. 완벽한 최악이다. 코를 훌쩍 들이마시며 서류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낸 성규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규! 왠일이야.]
"…동우야."
[여보세요? 너 김성규 맞아?]
"응…. 흑… 바빠?"
[아니. 근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일있어?]

코를 훌쩍이던 성규가 결국 흐느끼며 애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딸꾹질처럼 들썩거리던 울음은 한번 터지고 나니 그 다음부턴 쉴 새 없이 터져나왔다.

[너 울어? 무슨일이야? 성규야!]
"허어엉…엉엉….비 오는데 우산은 없고오 흐어엉…한심해….엉엉…."
[일단 어딘데~ 우산이 없어서 그러는거야? 어?]
"으응…. 우산도 없고 흑, 직업도 없어….난… 난 평생 백수로 살아야하나봐."
[그만 울고 어딘지나 말해봐, 응?]

인생은 지긋지긋한 일의 반복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스물여덟살인 지금, 그런 반복쯤은 거뜬히 이겨낼만큼 충분히 성숙해졌다고 믿고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나이가 모든 걸 보장해주진 않았다. 나이는 보험이 아니였다. 그 사실을 알아 더 서럽게 눈물이 난다. 성공은 영원하지 않고, 실패는 치명적이지 않다라는 말을 여태껏 살아오면서 늘 가슴속으로 품어왔었지만 오늘은…유독 다른날보다 더 서럽다. 실패는, 충분히 치명적이다. 그것도 실패를 많이 경험해본 사람에게는 더더욱.


*

 

빈 잔에 쪼르르 소주를 채운 성규가 단숨에 소주잔을 비워내더니 몸을 부르르 떤다. 그러더니 갑자기 울다 웃다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대학나온애가 띨띨한 짓은 혼자 다 하고 있네. 손님들이 너 이상한 애냐고 물어보더라. 저 남자 아까부터 무섭다고."

동우가 한숨을 쉬며 옆 자리에 앉아 성규의 머리통을 위로해주듯이 살살 쓰다듬었다. 한쪽 팔을 베고 원형 테이블에 누운 성규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울 듯 말 듯 입술을 우물우물거리더니 또 다시 코를 훌쩍거린다. 두 눈가에 눈물이 금세 그렁그렁 맺혔다.

"울지마.뚝 해,뚝! 나이먹고 왜 징징 울고 그래. 인생 쫑났어? 아직 기회 많아. 걱정하지말고 울지도 마. 뚝!"

동우, 자신의 소매를 쭉 끌어당겨 성규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콕콕 눌러 닦아준다.

"기회만 많으면 뭐해애….수확이 없는데…."
"…에휴. 요즘 다 그렇지,뭐."

소주잔을 들어 깔끔히 잔을 비우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얼른 잘익은 고기 한 점을 입안에 집어넣은 동우가 계산서를 힐끗 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도 집은 가. 정신차리고. 오늘 고깃값은 사장인 내가 쏘지."
"고깃값이고 나발이고….나 재워주라….여기 가게 바닥에서 하루만."
"너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인건 알겠는데, 안돼. 얼른 집들어가. 너 주량도 한 병인 애가 벌써 두 병째잖아. 너 혀도 꼬이고 그 작은 눈, 더 작아졌어."
"우씨, 죽을래."
"아!"
"기다려. 나 취직하면 엄마가 쌍꺼풀수술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성규, 팔을 휙 휘저어 동우의 머리를 콩 때리고 다시 눈을 감더니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동우는 안 되겠다싶어 축 늘어진 성규를 일으켜세운다.

"나 잠깐 얘 좀 처리하고 올 테니까 카운터 좀 보고 있어."
"네, 사장님."

신발장 앞 의자에 성규를 앉혀놓고 가게 주차장에 있는 신형 아반떼를 끌고 온 동우가 의자에 앉아있는 성규를 일으켜 조수석에 태우려 하자 동우의 손을 홱 쳐낸다.

"왜 이래. 이거 놔. 걸을 수 있어."
"얼씨구. 고집은 더럽게 쎄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몇 걸음 걷던 성규가 인상을 찌푸리며 발목을 매만졌다. 아직도 시큰거리는 게 꽤 오래갈 것 같아 걱정이다.

"이씨…. 파스…."

서류가방에 굴러다니던 파스통을 꺼내, 몇 번 딸깡딸깡 흔든 뒤 발목에 대고 뿌리자 힘없는 바람만 쉭쉭 나온다. 발목 부은 게 금방 가라앉을 줄 알고 작은 걸 샀더니만….

"여기 약국어딨지….약국…."
"약국은 왜? 파스사게?"
"발목 아파."
"요 앞에 약국있어. 얼른 타."

조수석에 성규를 태우고 안전벨트까지 해준 뒤 옷에 묻은 빗방울 털어내고 차에 올라탔다. 아반떼가 미끄러지듯이 부드럽게 약국으로 향했다. 난 너가 부럽다.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창밖만 보던 성규의 말에 능숙하게 운전을 하던 동우가 물었다.

"뭐가."
"차라리 나도 가게 하나 할 걸…."
"가게 경영이 쉬운 줄 알아? 얼마나 골치아픈 일인데."
"그래도 넌 성공했잖아…. 짜식…. 고등학교 땐 맨날 내가 너 맛난 거 사주고 그랬는데…."
"누가 보면 내가 백만장자인 줄 알겠네."
"너네 고깃집이 이 근방에선 제일 맛있다고 얼마나 소문이 자자한데…."
"약국 다 왔다. 파스는 내가 사올테니깐 그냥 조용히 앉아있어. 시트에 토하면 죽어."

성규의 술주정 비슷한 푸념을 한 귀로 흘린 동우가 지갑을 들고 나가려고 하자 성규, 인상을 팍 쓰며 동우의 팔을 잡아 다시 운전석에 끌어앉힌다.

"나도 돈 있거든~ 내가 사올테니깐 끅, 니가 앉아있어. 새키….꺼억. 시트에 토하면 너도 죽어~"

트림을 거하게 뱉은 성규가 살짝씩 절뚝거리며 횡단보도를 지나 약국안으로 들어갔다.

"아줌, 아니구나. 아저씨. 파스 하나만 주세요. 왜냐면 제가 발목을 아야 아야…."

카운터에 발을 얹으려고 낑낑 대는 성규를 차안에서 지켜보던 동우가 한숨을 쉬며 차에서 내려 약국으로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친구가 술을 많이 마셔서…. 얼마에요?"
"삼천원입니다."

따뜻한 온기에 졸음이 밀려오는지 성규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가지가지하네. 계산을 마친 동우가 의자에 앉아 덩실덩실 흔들리는 성규의 고개를 두 손으로 잡아 고정시켰다.

"잠은 집가서 자."
"내가 언제 잤어잉…."
 
[이번 로또 475회 당첨번호는 칠,십오,이십,삼십이….]
카운터 너머에 있는 tv 속에선 한창 로또 번호를 추첨하고 있었다. 빨간공, 초록공, 파란공, 노란공, 검은공들이 정신없이 뒤섞이더니 하나씩 툭툭 튀어나와 일렬로 줄을 쫙 섰다. 나른한 눈으로 tv를 보던 성규, 그 와중에도 로또 맞춰볼 정신은 있는지 느릿느릿 지갑을 열고 영수증 사이에 있던 로또 용지를 꺼내 손가락으로 하나씩 번호를 맞춰보기 시작한다.

"칠…십오……이십…삼…십이…"
"율무차라도 뽑아줄까?"
"…잠시만…."

눈을 비비적거린 성규는 다시 한번 종이에 적힌 번호를 확인했다.

[475회 당첨 번호 칠, 십오, 이십, 삼십이, 삼십오, 사십. 보너스 번호 삼십구.]

팅팅 부어있던 성규의 눈이 점점 또렷해졌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로또 일등이라도 당첨됐어?"
"동우야, 여섯개…."
"뭐? 뭔 개?"
"여섯 개면 몇 등이지?"
"무슨 소리야?"
"로또…여, 여섯개 맞추면 뭐야?"
"여섯개? 내가 알기론 보너스빼고 여섯개 다 맞추면 일등이구 보너스 포함해서 여섯개 맞추면 이등이지."
"……."

로또 용지가 파르르 떨리기시작했다. 칠 맞췄고 십오 맞췄고 여기까진 그러려니했는데 이십 맞췄고 뒤이어 삼십이, 삼십오에다가 보너스 삼십구까지! 당첨 번호가 로또 용지에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눈을 벅벅 비벼보고 몇 번을 확인해도 또렷하게 인쇄된 여섯글자는 꿈이 아니라 분명 생시였다.

"으어엉!!"

성규, 큰 소리로 약국이 떠나가라 울어재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우를 꽉 끌어안는다. 이등 당첨이야, 당첨! 펄쩍펄쩍 뛰기도 하고 발작을 일으킨 사람처럼 몸을 이리저리 흔든 성규가 종이를 가슴에 품고 숨을 가다듬었다.

"자, 잠깐 이등 당첨금이……. 일, 일억 오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진짜 이등이라고? 이리 줘봐."

로또 용지의 번호와 당첨번호를 차근차근 확인한 동우가 마찬가지로 펄쩍펄쩍 뛰며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 이등이네! 야, 근데 왜 울고 그래."
"흐어어엉!"

약국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성규가 콧물까지 흘려가며 정말 서럽게 목놓아운다. 여태까지 성규가 마음고생한 걸 훤히 잘 아는 동우의 눈가에도 측은함의 눈물이 고였다. 한참을 끅끅대던 성규가 콧물을 들이마시며 봉신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성규 너 어떻게 된거야, 전화 한 통 없이! 면접은? 잘 봤어?]
"이제 면접 안 봐도 돼. 엄마…. 엄마…. 흐어엉."
[이제 면접 안 봐도 된다니? 어머머, 붙었단 소리구나!]
"엄마. 나 로또 이등 당첨됐어."
[뭐? 얘가 무슨 귀신 씨나락 뜯어먹는 소리를 하구 있어. 로또는 뭐고 이등 당첨은 또 뭔 소리야!]
"나 당첨 됐다구 로또 이등."
[너 괜히 면접 떨어져놓고 뒤지게 혼날까봐 거짓말 치는거지? 이놈시키가 어디서!]
"으흐흐흐. 진짜라니까…."
[…정말이야? 정말이야?!]
"일단 집 가서 통화할게.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아파. 끊는다!"

바닥에서 주섬주섬 일어나려던 성규가 다리힘이 풀려 약들이 놓여진 선반을 잡고 간신히 일어났다.

"이거 꿈 아니지? 그치?"
"그래. 꿈 아니야."
"하아….일단 이거로 빚 갚고 남은 걸로는 뭐하지. 아, 나 오줌 쌀 것 같아. 어떡하지. 돈은 어떻게 찾지."

성규가 횡설수설하며 약국을 걸어나왔다. 여태까지 주룩주룩 내리던 비는 어느 정도 사그라들어  있었지만 강한 바람이 조금씩 불고 있었다. 로또 당첨자 중 7%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던데 그 7%가 될 것만 같아 얼른 가슴부분을 꾹 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파란불 깜박거리네. 좀 기다렸다, 성규야!"

싱글벙글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의 성규가 동우의 말은 듣는둥 마는둥하며 로또용지만을 보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순간 하얀 벤츠 한 대가 끼이익 브레이크를 잡으며 성규 바로 앞에서 딱 멈춰섰다. 다행히 치이진 않았지만 으아악!하며 소리를 지른 성규가 물기 가득한 바닥에 벌러덩 넘어졌다. 운전석에서 우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심호흡을 하다가 숨이 막히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일단 쓰러진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선 후다닥 달려나온다. 동우 역시 백설기처럼 하얗게 질려서 성규에게 달려갔다.

"성규야! 괜찮아?"
"괘,괜찮으세요?"
"아야야…."

성규가 환한 헤드라이트 불빛에 인상을 찌푸리며 동우와 우현의 부축을 받으면서 바닥에서 일어났다. 성규의 정장과 와이셔츠가 흙탕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성규는 손바닥이 쓸려 피가 맺힌 상처에 빗물이 들어가 따끔거리는 걸 느끼기도 전에 문득 자신의 손에 로또 용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내 돈… 내 로또!!"
"어디 안 다치셨,"
"아이씨! 저리 꺼져봐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두리번 거리던 성규의 눈에 문득, 벤츠 앞 유리 와이퍼에 무언가 하얀 것이 끼어서 좌우로 왔다갔다거리는게 보였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3.


좀비같이 터덜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와이퍼에 다가간 성규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와이퍼를 억지로 잡아 멈춘 뒤 그 사이에 껴있는 종이를 빼냈다. LOTTO….로또. 일억 오천만원의 값을 하는 로또 용지가 여기저기 잔뜩 빗물에 젖어 찢어져있었다. 성규가 또 털썩 주저앉았다. 팬티에 물기가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지만 성규는 자신의 손에서 힘없이 생을 마감한 로또 용지, 즉 순식간에 증발해버린 일억 오천만원의 허망함에 엉덩이 감각마저 잃어버린듯했다. 우현이 차에서 우산을 꺼내와 성규의 머리위로 펼쳤다.

"저 이,일단 병원부터…."

망연자실한 성규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 우현이 문득 머릿속 구석탱이에 짜져있던 기억을 끌어내어 떠올렸다. 작은 눈에 부루퉁한 표정. 어디서 많이 봤다했더니만. 옆집사는 사람이잖아! 우현이 골치아프게 됐다는 표정으로 늘어져있는 성규의 팔을 잡았다.

"괜찮으세요?"
"…내 돈…."
"네? 무슨 돈이요?"
"내 돈…물어내요… 내 일억 오천만원… 흐어엉, 내 돈 물어내란말이야, 내 돈!!!"

쩌렁쩌렁 소리를 지른 성규가 우현의 멱살과 머리채를 동시에 잡았다 .깜짝 놀란 우현이 성규를 떼어내려했지만 여간해서는 떼어내지질 않는다. 술에 취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듯이, 동우까지 합세했는데도 역부족이다. 어느새 길가던 사람들도, 지나가던 차들도, 약국 약사님도 나와 멈춰서서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다. 아악! 우현이 우산을 내팽겨치고 두 손으로 성규의 손을 잡아 간신히 떼어낸다. 성규의 손에 우현의 머리카락들이 헤드라이트에 한가득 비친다.

"흐어어엉! 내 도온….엉엉!!"
"얘가 술을 많이 마셔서, 죄송해요."

추욱 늘어진 성규가 나란 놈이 그렇지,나란 놈이 그렇지를 반복하며 자기 괴리에 빠져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어디 다친데는 없는 것 같아요."
"네. 힘 보니깐 그래보이네요. 이 분, 제가 바래다드릴게요."
"예? 당신이 누구신데요?."
"이 분 옆집 이웃입니다."
"아아, 그러시구나… 저… 혹시 명함 같은 거 있으세요? 혹시해서요. 요즘 세상이 흉흉하잖아요."

날 못 믿는건가. 우현이 얼른 정장 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을 뽑아 동우에게 건넸다. '볼네드 백화점 기획부 부장 남우현'이란 글씨가 정자로 곧게 새겨져있었다. 볼네드 백화점이라면 CF모델로 요즘 한창 주가인 소련시대와 샤이닝을 쓸정도로 잘 나가는 백화점인데다가 서동그룹이라는 대기업 소속 백화점이라 크기도 겁나 큰 백화점이다. 젊어보이는데 그런 대기업 백화점 부장에 벤츠까지. 동우가 씁쓰름한 침을 삼키며 성규를 우현의 뒷좌석에 태웠다. 길거리의 한바탕 로또 소동은 우현의 벤츠가 유유히 현장을 떠나면서 마무리됐다. 비에 잔뜩 젖은 동우가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차에 올라타 가게로 돌아갔고 길거리는 다시 차들이 쌩쌩 지나가기 시작했다.

"으으….내 도온…."

뒷좌석에 드러누워 자는건지 졸도한건지 축 늘어진 성규가 간간히 울음섞인 목소리로 중얼중얼거렸다. 시트에 뭐 묻는 건 딱 질색인데…. 우현이 인상을 쓰며 재즈 음악이 나오는 라디오의 볼륨을 더 키웠다. 집이 코 앞쯤에 왔을때 재즈 음악을 뚫고 우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간담이 서늘해진 우현이 다급하게 성규를 불렀다.

"기,김성규씨! 이봐요!"
"우으으…."

다행히 한번의 토기는 넘어간건지 성규가 꿈틀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성규의 집앞에 차가 급하게 멈추고 서둘러 운전석에서 내린 우현이 성규를 끌어내다시피 차에서 내려세웠다.

"다 왔으니깐 정신 좀,"
"우우! 우우우웨에엑!"

몸을 들썩거리던 성규가 우현의 어깨를 잡더니 결국 바닥에 따끈따끈한 고기 부침개를 만들었다. 우현, 정말 끔찍하게 싫다는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떤다. 자신의 검정 구두에 요상한 음식 찌꺼기가 잔뜩 묻어있는걸 확인한 우현이 헛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침을 퉤퉤 뱉은 성규가 그제서야 정신이 든건지 가방을 고쳐메고 초인종을 누르더니 곧 집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가버렸다.

"……."

파르르 떨리는 혼자 남은 우현의 손.


*


집 현관문을 잡자마자 서서히 깨어나는 정신이 야속했다. 차라리 계속 흐리멍텅했으면 좋겠는데…. 고개를 몇 번 흔들고 문을 연다.

"로또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진짜 당첨된거야?"
"진짜 이등이야? 진짜? 정말로!?"

명수와 봉신 씨가 동시에 얼굴을 들이밀며 면접은 제치고 이것저것 물어대기 시작했다. 명수와 봉신 씨의 얼굴을 보자 울음이 또 울컥 새어나온다.

"당첨이었는데…로또 용지를…잃어버렸어….흐어엉….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지,엄마? …흐윽…."
"뭐,뭐어?! 진짜야? 거짓말이지?"

성규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자 봉신 씨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명수는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 잃어버려? 너 진짜로 하는 말이야? 정말, 정말 잃어버렸다구?"
"으응….미안해,엄마…."
"면접은, 면접은 어떻게 됐는데?"
"…떨어졌,아야!!! 으허어엉! 엄마아!! 아!"
"에라이, 이 등신같은놈! 넌 맞아도 싸! 어쩜 하는 짓이 그렇게 미련맞어!"

봉신 씨, 성규의 등짝과 온 몸을 사정없이 마구 때린다. 머리를 막고 웅크린 성규가 아픔과 서러움에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 로또는 그렇다쳐! 면접떨어진 놈이 술까지 마시고 늦게 들어와?! 술이 넘어가! 나한테 그냥 맞아죽어 이 자식아!"
"엄마아! 왜 때리고 그래!"

명수는 얼른 성규 앞에 서서 봉신 씨를 잡아말렸다. 한참 씩씩대던 봉신 씨가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때려봤자 나만 힘들지. 아휴,속터져. 울긴 왜 울어! 니가 뭘 잘했다고 울어!"
"엄마아, 그만해."
"저거저거 대학 보내는게 아니라 고등학교 졸업시키자마자 큰 고모부 공장으로 보내는건데. 으유,속 터져 정말…아이고, 아이고 머리야."

봉신 씨를 이끌어 안방으로 격리시킨 명수가 거실에 주저앉아 끅끅 거리는 성규에게 물 한 잔을 떠다가 건넸다.

"엄마 괜히 속상해서 저러는 거야."
"……."

에휴. 마찬가지로 속상한 한숨을 뱉은 명수가 방안으로 들어가 갈아입을 옷을 챙겨 성규에게 건넸다.

"씻고 자. 술냄새에 이상한 냄새도 나니깐."
"…끅…."
"그만 울어라,좀. 동생보기 창피하지도 않냐. 내일 눈 뜨면 그 작은 눈 다 없어지겠다."
"흐어어엉!!!"
"아,알았어. 미안해.안 그럴게."

옷을 받아든 성규, 훌쩍거리며 화장실안으로 들어간다. 세면대 거울로 보이는 몰골은 끔찍했다. 콧물 자국에 펑펑 울어서 눈은 잔뜩 부어있고 머리는 비에 젖어 미역 줄기마냥 흐물거렸다. 세탁소에 따로 맡길 옷들을 욕조 안 바구니에 넣고 뜨거운 물을 틀어 지친 몸을 달랬다. 오늘은 참 깨달은게 많은 날이다. 첫번째.역시 성공은 항상 노력하는 자보단 항상 운이 있는 자에게 따른다. 두번째. 로또는 살만한 게 전~혀 못된다!


*


다음날 아침.


"……."
"……."
"……."

성규네 아침 밥상에 알싸한 정적이 흘렀다. 고개도 안 들고 묵묵히 밥만 먹는 성규와 연이어 한숨만 뱉는 봉신 씨. 그리고 그 중간에 앉아 밥보다 눈치밥을 더 먹는 명수까지, 셋 다 아무 말이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명수가 국을 한 번 후룩 떠먹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아따~! 국이 시원~해."
"……."
"……."
"알았어. 밥이나 먹자… 아, 그리고 나 내일 아침 일찍 아르바이트하러가."
"아르바이트? 니가 무슨 아르바이트?"

밥그릇을 비우고 물을 마시려던 봉신 씨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는 형 가게인데 잘 나가는 레스토랑이야. 밴드가 연주도 해. 밴드라는 말에 봉신 씨, 컵을 거칠게 쾅! 내려놓는다.

"너 또 음악타령이야!? 내가 너 한번만 더 음악타령하면 탬버린으로 귓방맹이 날린다고했지!"
"까,깜짝이야. 뭔 말을 못하겠네. 누가 음악한대! 난 가서 그냥 서빙만 하는거야…. 아니 그리고 무슨 입에 도깨비 방망이 달아놓으셨어? 갈수록 언변이 화려해지니, 원…."
"큼. 아무튼 잘 됐네. 넌 누구처럼 짤리지말고 잘해. 싹싹하게 굴고."
"켁켁!"

가시돋힌 말에 성규는 사레가 들려버렸다. 성규의 밥그릇 앞으로 물잔을 디밀어준 봉신 씨가 싱크대로 향하자 성규에게 명수는 조용히 속삭였다.

"왜 이렇게 기가 죽어있나. 김성규답지않게."
"지금 이 상황에 기 세웠다가 모가지 날라갈 껄."
"그러길래 붙은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호들갑 떨어댈 때부터 알아봤다."
"아픈 곳을 쑤시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네."
"이제 무뎌질때도 되지않았나."
"한번 더 깐족거리면 김치로 싸대기 쳐버릴꺼야."

띵도옹~. 경쾌한 초인종이 울리고 내가 나갈게,하며 느릿느릿 식탁에서 일어난 성규가 슬리퍼를 신고 대문으로 나갔다.

"누구, 엄마야!!"

대문을 열자마자보이는 거대한 망치의 모습에 성규가 소리를 지르며 우현을 밀쳐냈다.

"어우, 깜짝 놀랬잖아요! 추격자도 안 봤어요?"
"안 봤어요."
"그 영화보면 하정우가 슈퍼아줌마한테,"
"그 영화 안 봤다구요."
"…그럼 시간 널널할때 한번 보세요."

우현의 얼굴을 보자 어제 날라갔던 일억 오천만원의 슬픔과 분노가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에 팔짱을 끼고 조금 삐딱한 말투로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신데요."
"망치랑 드라이버 빌린 거 갖다드리려고 왔습니다. 근데 저한테 좋지않은 감정 있으신 것 같아보이네요?"

드라이버와 망치를 받아든 성규가 코웃음을 쳤다.

"일억오천만원이 순식간에 날라갔는데 안 삐딱하고 배겨요?"
"일억오천만원이요?"
"기억 안 나세요?"

하, 구구절절 설명해줘야겠네. 소매를 걷어부친 성규가 어제 우현의 벤츠 와이퍼에 껴서 생을 마감한 로또용지에 대한 슬픈 전설을 말하자 우현은 별 감흥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럼 김성규씨는 생각 안 나세요? 남의 머리 쥐어뜯고 남의 구두에 오바이트한거요.."
"지금 그거랑 로또용지, 아니 일억오천이 증발된거랑 비교가 되요?"
"충분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일억 오천이 얼만큼의 돈인 줄 알아요? 어제 그 쪽이랑 마찰만 없었어도 지금 제 수중엔 일억 오천이 있을 수 있었다구요."
"돈이 그렇게 좋아요?"
"돈이 좋은게 아니라 돈이 필요한 거에요. 좋은거랑 필요는 달라요. 전 지금 돈이 굉장히 급급…. 큼, 아무튼 할 말 다 끝났으면 안녕히 가세요."

대문을 닫으려하자 우현이 얼른 대문을 잡아 다시 열었다. 그리고는 다른 손에 있던 시루떡 접시를 성규에게 건넨다.

"이게 뭐에요."
"시력 안 좋아요? 떡입니다."
"집이 방앗간하세요?"
"이사떡도 몰라요? 어찌됐던간에 이웃으로 잘 지내봅시다."
"딱히 내키진 않네요. 저희 가족이 떡을 쉬쉬해서."
"새로 온 이웃한테 너무 무례한거 아닌가요? 그리고 저도 주는거 안 내켜요."
"그럼 왜 초인종까지 누르셨대요?"
"전 다른 분이 대문을 열어주실 줄 알았죠."
"……."
"……."

성규는 생각했다. 이 남자, 한 마디도 안 지는게 꼭 김명수같네. 우현도 생각했다. 정말 짜증나는 타입이네. 성규와 우현의 눈 사이에 미묘한 스파크가 튀었다.

"그만하죠. 일억오천은 정말 진심으로 미안하게 됐습니다."

지는게 이기는 거라고 생각한 우현이 악수를 청하자 성규가 마음속으로 콧방귀를 흥,하고 뀌었다.

"악수정도는 받아주세요, 김성규씨."
"제 이름 기억하시네요?"
"선천적으로 기억력이 좋거든요."
"이름이 뭐였죠? 전 선천적으로 기억력이 안 좋거든요."
"남우현입니다."
"몇 살이세요?"
"…꼭 말해야해요?"
"그 정도는 알고 지내야 어디가서 이웃이라고 하죠."
"87년생 스물 여섯입니다."
"아아~ 그러시구나. 난 85년생 스물여덟살. 형이라 불러. 떡은 잘 먹어보도록 할게."

나이가 이렇게 유용할때도 있네. 대문을 쾅 닫은 성규가 낄낄 웃으며 망치와 드라이버를 평상에 얹어놓고 접시는 두 손으로 조심히 잡고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밖에 서있던 우현이 잠시 서있다가 대문을 한번 툭 걷어차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시루떡이네?"
"옆집 이사떡."

떡을 식탁에 얹어놓고 다시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든 성규가 방금 전의 통쾌한 마무리를 떠올리며 킥킥 웃어대자 봉신 씨의 싸늘한 대꾸가 이어졌다.

"좋니?"
"……."
"확실히 약속해."
"뭐를?."
"다음달까지 취직 못 하면 큰 고모부 공장으로 들어가는걸로. 이번 달로 하려는거 다음달로 늘려주는거니깐 불평, 불만, 이의제기 그 무엇도 하지마. 엄마 월급으로 생활비 한계야. 알아들어?"
"…알았어…"
"밥먹고 설거지해놔. 잠깐 말숙이네 만나러 가봐야하니깐."

봉신 씨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집을 나가자마자 성규는 수저를 내팽겨치더니 머리를 감싸며 신음을 뱉는다. 공장은 진짜 싫은데…. 반찬을 닫아 냉장고에 넣고 설거지까지 마친 뒤 잘 말려놨던 야채찌꺼기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물기없이 잘 말린 야채찌꺼기들을 꽃밭에 골고루 뿌려준 성규가 그 앞에 쭈그려앉아 소박하게 피어난 꽃들과 꽃나무들을 톡톡 건드리며 마치 사람에게 묻듯이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나 취직 할 수 있을까?"
"……."
"할 수 있겠지?"
"……."
"포기는 김장할때나 쓰는 거라고? 그래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김성규 아직 안 죽었다, 이거야."

성공은 다시 일어서는 자에게만 주어진다고 스스로를 다독인 성규가 입술을 앙 다물고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다음달까지 취직,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하고 말테다. 쭈그려앉아있던 다리를 통통 두들기며 일어나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릴 기세로 기지개를 크게 쭈욱 켰다.


*


"아직도 많이 남았네."

집안으로 들어온 우현이 아직도 식탁에 한가득 놓여있는 떡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옆집 다녀왔어? 순재가 묻자 성규를 떠올렸다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떡 써는거 손 안 아파?"
"괜찮아. 걱정마. 떡 정도는 썰 수 있어."
"무리하지마. 저번처럼 또,"
"괜찮다니깐…. 아,참. 저거 어떻게 심는지알아? "

비닐장갑을 손에 끼고 시루떡을 접시마다 세팅하던 순재가 현관문 앞에 조그맣게 놓여져있는 묘목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키우기 쉬운 치자나무 묘목과 하얀 꽃이 피는 조팝나무 묘목들이었지만 정작 대충 골라잡아 사온 우현은 막상 땅에 박아넣고 심자니 앞이 막막했다. 그냥 쑤셔넣고 흙으로 덮은 다음 물주면 끝아닌가? 우현이 소파에 앉으며 최신형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창을 켰다. '묘목 심는 법'을 치자 검색결과가 뜨기도 전에 불쑥 전화벨이 울린다. 에이씨,누구지? 발신자를 확인했다. < 최우아 여사님 >. 우현의 엄마였다.

"뭐해? 전화 안 받구?"
"어, 받아야지…."

핸드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우현의 뒷모습을 순재가 씁쓸하게 쳐다본다. 방으로 들어온 우현, 침대에 걸터앉아 전화를 받는다.

"네."
[오랜만이야,아들. 오늘 저녁에 식사하기로 한 거 기억나지?]
"시간 없다는 거 굳이 잡으신 거 기억나요."
[하나있는 아들 얼굴 보기가 왜 이리 어려워….할머니도 보고싶어하셔. 올꺼지?]
"할머니가요? 놀랠 노자네요."
[오늘 식사때문에 아버지도 시간냈구 할머니도 시간내셨어. 7시에 회사 앞 일식집이야.]
"오늘은 일식 안 땡겨요. 한식으로 가요."
[그래.…아직도 순재랑 성열이랑 지내?]
"…네."
[집 놔두고 왜 그런데서 지내.]
"편해요. 그 동네처럼 숨막히게 삭막하지가 않거든요.]
[…죄책감 때문이니?]

우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우현아.]
"죄책감 아니에요. 전에도 말했잖아요."
[휴우. 그래,이해해. 그 사고 때문,]
"엄마."
[미안. 엄만 너가 불편할까봐….]
"걱정 안 해도 되요. 나도 이제 스물여섯이고 아직까지도 넘어지면 울면서 엄마찾는 애는 더더욱 아니니깐."
[할머니는 벌써부터 너 결혼생각하신다.]
"결혼이요? 소름돋게 무슨 꿍꿍이신지."
[아무튼 만나서 얘기하자. 한식점 주소는 문자로 보낼께.]
"네."

전화를 끊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할머니,아버지,어머니와 저녁식사라니. 벌써부터 갑갑하고 속에 무언가 얹힌 것 처럼 꽉 막히는 기분이다. 우현, 핸드폰을 침대에 던지듯이 내려놓고 거실로 다시 나온다.

"…어머니셔?"
"응. 저기… 나 오늘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할머니 비위 좀 맞춰야하거든."
"그래. 잘 생각했어. 할머니랑 아버지한테 좀 사근사근하게 굴어봐."
"사근사근? 넌 아직 우리 할머니가 얼마나 계산적이고 영리하신지 몰라서 그래. 날이 갈수록 속이 깊어지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말 길어지면 내가 지거든. 사근사근하게 구는 건 할머니 떡밥을 무는 거랑 마찬가지야."
"떡밥?"

우현이 식탁으로 다가가 떡조각을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알잖아. 할머니랑 아버지가 나한테 나란히 원하는거."
"뭔데?"
"백화점 일 관두고 회사에 자리잡는거."
"백화점 일이나 본사 들어가서 하는 일이나 다를게 뭐야."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유람선타고 여행할 바에는 강물에 발 담그고 있는게 훨씬 나아."
"폭풍이라니? 회사에 무슨 일있어?"
"텃세가 무서운 법이지. 자기들 세상이었던 곳에 갑자기 나타난 놈이 자리를 떡하고 차지하면 호랑이들 성나지. 나한테 손톱을 잔뜩 세울껄? 백화점을 동네 잡화점 취급하는 무서운 사람들이야."

가끔 할머니와 아버지를 뵈러 본사에 갈때면 아버지의 다음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과 우현의 라인에 타려는 사람들로 팽팽하게 나뉘었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많은 편이었지만 우현에게 적대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독기는 예사의 것이 아니였다.  우현은 단지 그 피곤한 세력다툼에 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백화점에서의 일은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잇지않아도 이미 친척들중에 많은 후보들이 쟁쟁하게 자리잡고 있는 터라 그 사이에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다만 할머니와 아버지는 그 자리에 우현을 앉히고 싶으신 거였고 우현은 그 자리가 부담스러울뿐만 아니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암튼 좀 늦을 수도 있으니깐 먼저 자."
"어이구. 누가 기다려준대? 나 떡 정리해야하니깐 성열이랑 나가서 묘목 심고 있어."
"응. 나가자, 성열아."

목장갑을 든 우현이 묘목과 함께 사온 삽을 들고 성열과 마당으로 나갔다.


*


컴퓨터 앞에 앉아 여기저기 사이트를 뒤지며 할만한 일자리를 알아보는 중, 키보드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아직까지 옛날 피처폰에 8bit 벨소리를 쓰는 건 자신밖에 없을거라고 생각한 성규는 액정에 뜬 발신자를 확인하고 폴더를 열었다.

"응. 짱동."
[잘 들어갔나 확인전화.]
"묻지마라. 로또의 꿈에서 아직 헤어나오질 못했으니."
[역시 로또는 아무나 당첨되는 게 아니야.]
"끊는다."
[아아아, 미안미안. 어제 그 옆집 이웃이라는 사람이 잘 데려다줬어?]
"데려다줬냐? 내가 실려온 거지. 난 한 병 이상으로 마시면 안 돼. 필름이 너무 잘 끊겨."
[아는 놈이 두 병을 마시냐! 그나저나 그 남우현이라는 남자 좀 대단하더라.]
"너가 이름은 어떻게 알아?"
[어제 너 그냥 홀랑 맡기기엔 혹시나 싶어서 명함 받았거든. 근데 볼네드 백화점 기획부 부장이더라구.]
"볼네드 백화점이면…."
[니가 수십번 서류 보냈는데 수십번 떨어진 그 백화점.]
"야. 거긴 상위권 나온 애들도 들어갈까말까한 곳이야."
[그래! 그런 볼네드 백화점 부장 정도면….]
"야. 나 지금 일자리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깐 전화끊어."
[어제까지만해도 질질 짜던 놈이 누구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내팽겨친 성규는 인상을 벅벅 쓰고 모니터를 보다가 손에서 마우스를 놓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잘 사는 줄은 알았지만 볼네드 백화점 부장이라니. 그런 우현의 앞에서 술주정하고 차도 얻어타고 토하고 아깐 돈얘기까지 술술 했던 걸 떠올리니 소름이 돋을 정도로 민망해진다.

"아아….아! 쪽팔려! 쪽팔려쪽팔려!"

성규, 발을 동동 구르며 침대에 누워 뒹굴거린다.

"맛이 갔어도 한참 갔어."

방안으로 들어오던 명수가 성규의 상태를 보고는 혀를 찼다.


*


한편 마당 한 편에 서서 삽질을 하던 우현이 잠시 멈추고 목에 걸린 수건으로 땀을 톡톡 닦았다. 그 옆에 쭈그리고 앉은 성열은 조그마한 묘목들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성열아, 거기 제일 작은 거 먼저 줄래?"
"……."
"쪼그만 게 더럽게 무겁네."

묘목을 들고있는 팔에 힘줄이 바짝 섰다. 파놓은 여러개의 구덩이에 네 그루의 묘목과 열 두개의 야생화 씨앗을 조심히 넣은 다음, 다시 천천히 흙으로 덮었다. 지식인에선 지평선보다 높은 무덤식으로 묻으랬으니깐 대충 이 정도면 됐겠지? 땅을 야무지게 두들기고 마당에 있는 호스를 끌어와 살짝씩 물을 줄 때쯤 순재가 주스 두 잔을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벌써 다했네? 여기 주스."
"인터넷에 나온대로 하긴 했는데…."
"싹 언제 나려나."
"아직 묻은 지 5분도 안됐다."
"그런가. 아,참. 그리고 이 꽃밭 이름은 성열이 꽃밭~"
"……."
"……."

성열이 꽃밭. 우현이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터트렸다.

"창의력 점수 빵점이다, 빵점. 네이밍 센스하고는…. 촌스럽게 성열이 꽃밭이 뭐냐. 그치, 성열아?"
"……."

고개를 끄덕이는 성열의 행동에 순재가 입을 삐죽이며 '그럼 다른 이름 있으면 말해보던가'하고 말하자 우현이 삽을 땅에 푹 꽂아넣고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리 꽃밭."
"푸하하! 뭐? 여리 꽃밭? 그러는 너는 참 창의적이다. 저게 맘에 드니, 성열아?"

잠시 생각한 성열이 '성열이 꽃밭'보다는 '여리 꽃밭'이 낫겠다싶어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 진짜로 유치찬란한 여리 꽃밭이 마음에 든다고?"
"……."

성열이 정확히 고개를 두번 끄덕거렸다. 스물넷인 성열이 키우는 꽃밭치고는 이름에서 풍기는 유아틱한 느낌이 없지않아있었지만 성열은 나름 만족하는듯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키우면서 모르는 건 옆집 성규씨한테 물어보면 되겠더라."
"옆집?"
"응. 저번에 공구 빌릴때 마당에 넓게 꽃밭있는거 봤었거든. 동생 분이 그러는데, 옆집 성규씨가 화단을 그렇게 잘 가꾸신대.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도 된댔어.
"……"
"…너 표정이 왜 그래?"
"응? 뭐가?"

꼭 흙먹은 사람처럼 오만상을 쓰고 있잖아. 순재의 말에 우현이 얼굴을 한번 쓱 쓸었다.

"무슨 일 있었어?"

우현이 목장갑을 벗어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무심한 말투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성규와의 로또스토리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순재, 우현의 등짝을 찰싹 때린다.

"아! 왜!"
"니가 잘못했네. 나 같아도 화나겠어."
"너도 돈이 그렇게 좋냐?"
"순식간에 일억이 없어졌는데 화나는 게 당연하지."
"사과했으면 된 거지."
"내가 아는 넌 분명 형식적으로 딱딱하게 일정한 음으로 표정없이 미안하게 됐습니다라고 했을꺼야."
"아아아. 몰라. 나 샤워하러간다. 뒷정리 부탁해!"
"야! 같이 해!"

순재의 외침을 듣는둥 마는둥 귀를 후비적거린 우현이 집안으로 들어가 방에서 옷들을 챙겨 샤워실로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녁식사자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오고 있었고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소화제와 두통약을 챙겨가야겠다.


*


"계란 넣어?"
"어. 넣어. 국물에 풀지말고 덩어리지게."

봉신 씨가 생각외로 늦어지자 저녁대신 간단히 라면을 끓여먹기로 했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성규가 툴툴 거리며 부엌 찬장에서 라면 두 개와 계란 두 개를 꺼냈다. 라면 봉지를 힘주어 터트리고 봉지안에서 스프만 따로 빼내려는데 건더기 스프가 두 개씩이나 들어있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 성규가 라면 봉지를 하나 더 뜯었다. 어라? 이번엔 분말 스프가 두 개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라면 봉지 여기저기를 살폈다. 1+1 행사라는 말은 없는데….

"기분은 좋네."

하나씩 남는 건더기 스프와 분말 스프를 다시 찬장안에 넣고 물이 끓기 시작할때쯤 면을 꺼내 냄비에 넣고 잘 흔들었다. 스프를 넣고 톡톡 깨트린 계란을 라면안에 넣는데 이번엔 노른자가 두 개다.

"……."

젓가락을 든 채로 멈칫한 성규가 혹시나 싶어 나머지 계란도 깨트렸다. 헉! 이번에도 역시 노른자가 두 개다. 혹시 봉신 씨가 쌍란을 사왔나싶어 냉장고를 열고 다른 계란 하나를 꺼내 깨트려봤다. 근데 이번엔 또 노른자가 한 개다. 소름이 오소소 돋기 시작했다. 길조로 봐야하나, 흉조로 봐야하나. 또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이러는 거지….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문자를 받고 도착한 곳은 신사동에 위치한 한식집이었다. 다른 한식집과는 다르게 겉 외관은 스테이크나 와인을 파는 레스토랑처럼 생겼다. 주차장에 벤츠를 주차한 우현이 차에서 내리기전에 미리 몇 번 심호흡을 했다. 할머니와의 기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한다. 잠시라도 틈을 내보였다간 할머니의 꾀임에 넘어갈 수도 있으니.

"될 대로 되라."

한숨을 쉬며 가게안으로 들어가자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남우현님 맞으시죠?"
"네. 제가 남우현인데 님 까지야."
"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 웨이트리스의 뒤를 따라가며 영 찜찜한 표정을 지은 우현이 웨이트리스가 안내한 방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셨어요 할머니?"
"그래. 앉아라."

가운데에 떡 하니 앉아있는 할머니의 위풍은 얼굴에 있는 주름과 달리 빳빳한 기세로 우현을 압도하고 있었다. 정신집중! 우현이 침을 꿀꺽 삼키고 아버지와 최 여사 앞에 조용히 앉았다.

"백화점 일은 할만하니?"
"네. 할만해요."

미리 주문을 해놓은건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한정식이 하나 둘 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 먹어봤자 모래알을 씹는 듯한 기분이겠지만 태연한 척 젓가락을 들었다.

"이 한식점 어때."
"여기요?"

할머니의 물음에 우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최 여사와 아버지를 한번 슥 쳐다봤다.

"음식이 맛나네요."
"맛있게 만들었으니 맛있겠지. 인테리어는."
"인테리어요? 음…. 서양을 베이스로 깔고 한국 전통무늬랑 소품들을 박아놓은게 색다르지만 들어오면서 본 마당이 휑한게 흠이네요. 하지만 종업원도 이쁘고 또…."
"그만하면 됐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요?"

우현의 물음에 최 여사와 아버지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영문을 모르는 우현이 할머니에게 다시 물었다.

"왜요? 제가 뭐 잘 못 말한거라도 있나…."
"이 한식점. 서동에서 나온 한식점이다. 서울에 딱 다섯 곳 있다."
"아아."

우현이 감흥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쯧쯧. 한심한 놈. 회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모를 수도 있죠. 제가 회사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욕심, 아니 하물며 야망같은거 없니?"
"없어요."

우현의 간단명료한 대답에 할머니가 이마를 짚으며 혀를 찼다.

"볼네드 일만으로도 충분히 살만하고 바빠요."
"시끄럽고 볼네드 그만 관둬. 너 말고도 그 자리 오를 사람 많아."
"과연 많을까요. 은근하게 누르시는 분이 계셔서…."

할머니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목을 가다듬었다. 서동그룹의 회장 아들이 꼴랑 백화점 부장으로 진급도 못한채 3년간 같은 자리에 있는 건 맛 좀 보라는 할머니의 압력이었다. 지긋지긋해지면 어련히 알아서 본사에 들어올꺼라 생각한 할머니의 계획은 우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뜬히 일을 해나가면서 산산히 부셔졌다.

"본사들어와서 배워. 혹시나해서 말하는 건데 처음부터 편하게 갈 생각은 하지말아라. 사원부터 시작할테니 밑바닥부터 하나씩 배워."
"전 그렇게 큰 일을 할 그릇이 안되요."
"도대체 왜 이렇게 뻐팅겨! 본사에 안 들어오겠단 이유가 뭐야!"

결국 할머니가 언성을 높이자 최 여사가 조용히 할머니의 찻잔에 맑은 차를 따랐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오랜만의 식사 자리인데."
"능글맞은놈. 아직도 사춘기니?"
"이런 말이 있죠. 어른이 된다는 건 사춘기로부터의 일시적 휴식이다."
"썩을놈."
"아직 안 썩었어요. 싱싱해요."
"재밌니? 늙은 노인네 농락하니깐 재밌어?"
"제가 또 언제 할머니를 농락했어요. 내가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우현이 차를 들이키며 할머니에게 살짝 윙크를 해보이자 아버지와 최 여사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할머니도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터트렸다. 생각보다는 괜찮은 저녁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 결혼은 언제 할꺼야."
"그 얘기가 왜 안 나오나했습니다. 할머니. 저 아직 스물여섯이에요."
"옛날 스물여섯이면 애낳고 노후 준비하는 나이야."
"지금 스물여섯이 안 그렇단 걸 아셔야할텐데."
"못난놈."
"사랑의 표현으로 걸러들을께요."
"결혼 싫으면 약혼이라도 해."
"약혼의 끝이 결혼이죠. 할머니. 누구한테 쫓기세요? 왜 이렇게 다급하게,"
"순재는 정리했니?"

하아, 이 얘기만은 안 나왔으면 좋겠다싶었는데.

"……."
"사귀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아예 남남도 아니야. 그런데 동거까지해? 게다가 너 오피스텔도 따로 있다면서? 두집살림하니,벌써부터?"
"누가 들으면 순재랑 둘만 지내는 줄 알겠네. 성열이는 왜 빼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나는 순재,걔 절대 안된다."
"앞서 나가지마세요. 아무 관계아니니깐."
"아무 관계 아닌 놈이 표정은 왜 그래?"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어야했는데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나보다.

"싱글벙글 웃을 수 없잖아요."
"그냥 내치라는게 아니다. 너가 신경 안 써도 순재랑 성열이. 챙겨줄 사람 많아. 그리고 정 못 미더우면 내가 직접 챙겨주마."
"순재가 들으면 기겁요절하겠네요."
"사고있은지 3년이나 지났어."
"순재랑 성열이에겐 아직도 뚜렷해요. 티는 안 내도 머리 한 구석에서 영원히 잊혀지지않을꺼에요."

방안이 싸늘한 정적으로 휩싸였다. 말을 마친 우현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방을 나갔다.

"어머니. 굳이 그 얘기는…."
"에휴. 불쌍한 놈…."
"……."
"순재 한번 만나봐야겠다. 성열이도 같이."


*


가게 안 화장실마저 고급스러운 모습에 우현이 혀를 내둘렀다.

"여기저기 돈냄새가 나는 구만."

세면대부터 시작해 온통 으리으리하게 만들어놨다. 차가운 물로 손을 씻고 얼굴을 툭툭 두드린 우현이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하다가 무언가 얹힌 듯 답답한 가슴을 두드렸다. 무슨 맛인지 모를 음식들을 태연한척하며 먹으려니 얹힌게 분명하다. 괜찮은 저녁시간이 될 것 같다고 잠시나마 생각한 건 정말 크나큰 착각이였다.

 
*


"수고했어 애들아.조심해서 들어가!"
"네! 내일 뵈요~"
"밤길 조심하고!"

정류장으로 향하는 아르바이트생들에게 큰 소리로 배웅을 한 동우가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야,우리 사장님 진짜 귀엽지않냐."
"내 말이. 아깐 나한테 힘들지않냐고 하면서 웃어주는데 완전 귀엽다고 진짜."

여자 아르바이트생 두 명이 호들갑을 떨며 버스를 놓칠새라 정류장으로 뛰어갔다. 개업한지 3년이 다 되가는 '장동牛'고깃집. 동우의 남다른 센스와 노하우로 승승장구를 하며 며칠전엔 싱싱정보통에 나올 정도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다. 주말엔 미리 예약을 하지않으면 한참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말이다. 맛과 분위기가 좋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장치고는 젊고 신선한 동우의 페이스때문에 고깃집을 찾는 여자들도 대다수였다. 자신이 모아둔 돈으로 고깃집을 연 동우는 마치 제 자식처럼 고깃집을 애지중지했다. 모든 아르바이트생들이 퇴근을 하면 직접 대걸레질을 하고 뒷정리까지 마친 뒤 페브리즈를 칙칙 뿌려야 '장동牛'고깃집은 그제서야 간판이 꺼진다. 이중 잠금으로 되어있는 도어락을 잠그고 셔터까지 내린 동우가 손을 탁탁 털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 심야라디오는 운전하면서 듣기엔 너무 나른한 탓에 최신가요가 나오는 채널로 주파수를 옮겼다.

"내사랑 이제는 안녕 욜디욜리원~"

노래를 흥얼거리며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부모님은 시골에 농사를 짓고 계시고 혼자 서울로 올라온 동우의 생활력은 콧물보다 끈끈했다. 고깃집이 대박나면서 술술 모이는 돈의 대부분은 시골에 계신 부모님에게 드렸고 남은 여분으로 며칠전 좁디 좁은 원룸에서 좀 더 넓은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다.

"…아,맞다! 내일 모레 어무니 생신인데…."

집으로 향하려던 동우가 볼네드 백화점 쪽으로 차를 돌렸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얼굴은 뽀얀 동우와는 달리 약간 거무잡잡했다. 생신이나 명절에 동우가 이쁜 옷을 사서 택배로 부치거나 갖다드리면 마음에 들어하면서도 새까만 얼굴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고이 모셔두기만 했다가 특별한 날에만 기분삼아 입곤 하신다.

"여기 화장품 코너가 몇 층에 있죠?"
"3층에 의류 코너와 함께 있습니다. 즐거운 쇼핑되십시오,고객님."
"네~ 감사합니다."

동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볼네드 백화점은 건물안에 명품관은 물론, 영화관과 레스토랑이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때문에 올때마다 몇 층에 무엇이 있는지 까먹곤 한다. 3층에 도착한 동우가 화장품 코너로 향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선물한 화장품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 꼬부랑 글씨로 써져있어서 어떤게 스킨이고 어떤게 로션이며 여성용인지 남성용인지 분간이 안간다.

"여기 토종화장품, 아니 한글로 써져있는건 없나요?"
"어떤 화장품 찾으시는데요, 고객님?"
"부모님한테 선물해드릴껀데 두 분 모두 시골에서 농사지으세요. 그래서 피부 보호 겸용으로 사려고 하는데…."
"아아,그럼 혹시 부모님 피부가 건성과 지성중에 어느 쪽에 가까우세요?"

만져보질 않아서 잘 모르는데….동우가 대충 중건성이라고 대답하자 직원이 친절히 동우를 다른 코너로 안내했다.

"이 제품이 햇빛에 오래 노출된 피부에 좋고 또 중건성용이라 부모님에게 맞을 것 같네요. 해외에서 만든게 아니라 한국브랜드라서 요즘 고객분들이 많이 찾으세요."
"남성용, 여성용 따로따로에요?"
"따로따로 구입하셔도 되구요. 공용으로 사실 수도 있지만 남성용과 여성용 따로따로 사는게 아무래도 피부엔 더 적합해요."
"아아…."

분명 남성용,여성용 세트를 사면 공용으로 사는 것보다 비쌀 텐데….

"저…. 이 브랜드로 남성용 여성용 따로 사면 대략 얼마 정도 하나요?"
"이 브랜드가 요즘 제일 핫한 브랜드라서요. 49만원정도 합니다."

히익!!!! 딱 만원빠진 오십만원이잖아!!!!!!!!! 동우의 목울대가 한번 울렁거렸다. 그만큼의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화장품이 만원빠진 오십만원씩이나 하다니. 항상 샘플을 쓰거나 저렴한 화장품만 쓰던 동우에게 화장품이 오십만원 가까이라는건 상당한 컬쳐쇼크였다.

"큼….그럼 공용은 얼마정도 해요?"
"32만원입니다,고객님."

동우가 속으로 잠시 고민을 했다. 에이,그래도 생신선물로 드리는건데 이럴때 돈 쓰지 내가 또 언제 돈을 쓰겠어. 좋아, 결정했어!

"저…공용으로 주세요. 선물로 드릴꺼니깐 포장도 해주시구요."


*


화장품을 사고 의류코너에 들린 동우가 부모님 옷을 산 뒤 2층에 위치한 인테리어 코너로 향했다.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클래식한 소품들이 가득한 코너에서 한참을 돌아다니며 집에 어울릴 만한 소품과 가게에 어울리는 리스를 구입하고 마지막으로 오피스텔 욕실에 놓을 선반을 고르는데 보라색으로 되있는 스테인리스 선반이 눈에 확 띄었다. 심플하고 수납공간도 넓은게 마음에 들어 다가가 선반을 잡는 순간, 옆에서 다른 남자의 손이 동시에 선반을 잡았다.

"아."
"……."

동우와 마찬가지로 혼자 쇼핑을 하던 호원이 아,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뗐다. 동우가 큼큼거리며 카트를 밀고 다른 곳으로 향하자 그 뒷모습을 보며 참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호원이 보라색 선반을 카트에 담았다.


*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끝낸 우현이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식사내내 할머니와 묘한 기싸움을 한 탓에 온 몸의 기가 쪽 빨려 빨리 쉬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집 앞에 차를 주차시키고 피곤함이 잔뜩 묻어나는 걸음으로 대문을 밀고 들어가 긴 마당을 지나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리리리-. 잠겼던 현관문이 열리고 순재와 성열이가 깰까봐 조심히 집안으로 들어가 구두를 벗고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거실 불이 환하게 켜진다.

"많이 늦었네?"
"안 잤어?"
"아니. 자다가 소리나서 깼어."
"성열이는?"
"일찍 잠들었어. 신기한게 이사와서는 한번도 울면서 안 깨더라구."
"다행이네."

할머니는? 건강하셔? 순재의 물음에 우현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머니 무슨 약 드시는 것 같아. 갈수록 정정해지셔."
"다행이네."
"다행은 무슨. 나 완전 기 쪽쪽 다 빨리고 왔어."
"하시는 말씀은?"
"똑같은 레퍼토리지."
"피곤할텐데 얼른 들어가 쉬어."
"으응. 깨워서 미안."

방으로 들어온 우현이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원래 뜨거운 물로는 잘 씻지않았지만 오늘만큼은 후덥지근한 물로 온 몸 구석구석을 씻어내렸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의 물기를 말린 우현이 스킨로션도 안 바르고 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


동네가 깜깜한 어둠에 잠기고 우현을 포함해, 대부분 잠을 자고 있는 시간. 성규는 거실에 혼자 베게를 끌어안고 TV를 보고 있었다.이상하리만큼 잠이 오지않는 밤이다. 눈은 좀 뻑뻑한데 정신은 말짱하고 기운도 넘친다. 늦은 밤이라 딱히 볼만한게 없어 채널만 무심히 돌려대는데 영화채널에서 농도짙은 베드신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배우가 가슴이 좀 작긴 했지만 아무튼.

"……."

예전에는 이런거 보면 두근거리고 떨리고 혹시나 방문을 열고 엄마가 나오질 않을까, 가슴 바짝 졸이면서 봤는데 이젠 별로 떨리지도 않는다. 마치 EBS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베드신을 지켜본 성규가 한숨을 쉬며 채널을 돌렸다.

"내가 늙긴 늙었구나."

연애 세포가 바싹 메마른 건지 주위에서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연락이 와도 마냥 귀찮기만하다. 그 자리에 나가는 귀찮음은 물론이요, 또 여자친구가 생기면 챙겨줘야하는것도 귀찮았다. 문자 안 하면 안한다고 난리, 카톡답장 안 하면 안 한,아,맞다. 내 핸드폰으로는 카톡 못하는구나.

"왜 잠이 안 오는 거야…."

낮잠을 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 날에 잠을 푹 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TV앞에서 채널만 돌리며 한참을 뒤척거리던 성규가 냉장고로 향해 캔맥주를 찾아 뒤적거렸다.

"없네? 내가 저번에 사놓은 것 같았는데."

술기운에 자보려고 했지만 술마저 없다. 결국 또 다시 명수의 검정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지갑을 든채 야심한 시간에도 열려있을 편의점으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저번에 갔을때와는 달리 젊은 남자고딩이 씩씩하게 성규에게 인사를 했다. 캔맥주 세 병과 과자 여러봉지를 계산대에 내려놓자 순식간에 계산을 끝낸다.

"만이천원입니다!"
"네? 아, 여기."
"포인트카드 있으세요?"
"아니요. 저기…몇살이세요?"
"저요? 저 고등학교 2학년이요! 요 앞 쑥덕남고에 다녀요."
"그래. 이 시간까지 아르바이트하고 기특하네. 인생 열심히 살아라."

봉투와 거스름돈을 받아들고 편의점을 나와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고2밖에 안된 새파란 아이들도 돈벌겠다고 일하는데 난 뭐하고 있는거지. 성규가 씁쓸하게 웃으며 캔맥주를 따 입안에 맥주를 잔뜩 집어넣었다.

"크으~ 쓰다,써."

봉신 씨 말처럼 행복할때에는 술도 달다던데 언제쯤 술이 달아질까나…. 유난히 별이 밝은 밤이다.


*

 

 

 

갑자기 날이 밝아졌다.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한빛이 번쩍하더니 어느새 자신이 콘트리트 도로위에 잘때 입던 옷 그대로 서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우현이 점점 익숙해져 풍경에 손을 덜덜덜 떨기 시작했다.  절벽에 가려진 코너 건너편에서 차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하얀 중형차가 나타났다. 꿈이구나. 꿈속에서도 꿈인 줄 알고 눈을 비비고 머리를 흔들어보아도 여전히 그 도로위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못한채 그대로였다.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는 중형차안에는  운전석에 탄 자신과 조수석에 탄 순재,그리고 성열과 순재의 부모님까지 타있었다. 저때까지만 해도 즐거운 나들이였는데…. 도로위에 서있는 우현이 보이지 않는 건지 그대로 우현을 뚫고 지나간 차가 반대편에서 오던 차와 굉음을 내며 부딪혔다. 우현의 차를 박은 차는 가드레일에 부딪혀 멈췄지만 우현의 차는 옆으로 기우뚱하더니 잔해를 뿌리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서둘러 자신이 운전하던 차로 달려갔다. 창문이 잔뜩 깨진 차안을 살피자 피에 잔뜩 젖은 자신의 모습과 그리고 뒷자석에 탄,

"……!"

우현이 흠칫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새벽 1시. 침대에 누운지 딱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땀에 잔뜩 젖은 우현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침대에 도로 누웠지만 잠이 홀딱 달아나버렸다. 정말 지긋지긋한 악몽이었다. 잠잠해졌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한번씩 불쑥불쑥 찾아오곤했다. 마치 우현에게 '넌 평생 이 악몽에 갇혀지내야해'라고 사형선고를 하는 것처럼…. 결국 그 뒤로 한참을 뒤척이던 우현이 침대에서 일어나 산책을 하고 오는게 낫겟다싶어 지갑을 들고 조용히 집을 나왔다.


*


벌써 두 번째 캔맥주를 딴 성규가 오징어땅콩을 입에 쏙 넣고 와그작와그작 씹어먹었다. 스스로가 참 왜소해보인다는 생각을 하니 괜히 기분이 울적해진다. 슬슬 술기운이 올라오는 성규가 모자를 뒤집어쓰고 테이블에 머리를 기댔다. 아직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성규뿐만은 아닌듯, 몇번이나 문열리는 종소리가 딸랑딸랑거렸다. 얼른 먹어치우고 집으로 향해야겠다싶어 고개를 들고 다시 캔맥주를 집어들때 편의점에 들어가려던 우현과 눈이 딱 마주쳤다. 성규의 눈썹이 한번 꿈틀거렸다. 손잡이를 잡은채로 성규와 눈싸움 비슷한 신경전을 하던 우현이 결국 먼저 눈길을 치우고 편의점안으로 들어가 캔맥주 한 캔을 계산하고 나와 성규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앉아도 되죠? 다리가 아파서."
"이미 앉았잖아요."

성규, 두번째 캔맥주를 비우고 우현을 보며 맥주캔을 잔뜩 찌그러트리려고 했지만 생각외로 단단한 맥주캔.

"에이씨."

결국 바닥에 맥주캔을 세우고 발로 콱콱 밟아 찌그러트린 성규가 세번째 맥주캔을 따려하자 우현이 그 맥주캔을 가져가 소매로 맥주캔 입구를 슥 닦아 건낸다.

"병 입구에 수만가지 세균이 있대요."

우현이 말을 끝마치고 맥주를 벌컥 들이키자 성규도 뒤따라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입에 묻은 거품을 닦아냈다. 아, 점점 더 알딸딸해져온다.

"술 기운 핑계대고 얘기하는 건데요. 사실 돈이 좀 급급하긴 해요. 그래서 그 쪽 한테 좀 까스럭지게 군 거, 인정합니다."
"아까 반말 잘 하시던데 갑자기 왜 존댓말을 하십니까?"
"그건…내 맘이구요. 아무튼 집에 빚은 많고 동생까지 들어와서 생활비는 더 늘어났는데 일자리는 없고. 그 기분이 얼마나 막막한 줄 알아요? 줄끊어진 낙하산타고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에요. 댁은 모르겠죠. 듣자하니 볼네드 백화점에서 부장으로 있다더만."
"어떻게 알았어요?"
"그 날 제 친구가 말해줬어요. 아무튼간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구질구질한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였어요, 그 로또가."
"사과했잖아요. 더 이상 제가 뭘 어떻게 해요, 그럼? 로또 다시 돌려놓을까요? 시간이라도 되돌려놔요?"
"네. 시간도 돌려놓고 로또도 돌려놔주세요. 못하죠? 못하면서 말은. 다른 사람같았으면 그 돈 갚아내라고 소송까지 걸었을거에요."
"돈 갚아줘요?"

우현의 말에 성규가 흠칫 놀라며 우현을 쳐다봤다.

"갚아주냐구요. 일억오천."
"왜 일억오천이에요. 정신적 피해에 엄마한테 얻어터진 신체적 고통까지 붙혀서 잔뜩 뜯어낼껀데."
"얼마면 되요?"
"댁이 무슨 원빈입니까? 그래요. 일억 오천에 피해보상 넣어서 이억이면 되겠네. 어디 한번 줘봐요,이억."
"농담이에요."
"어휴, 또라이네,또라이야. 굉장한 또라이가 이사를 왔네, 동네에."

성규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캔맥주를 쓰레기통에 넣고 과자봉지를 든 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규의 혼잣말을 들은 우현이 피식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4.


아르바이트 첫날이라 지각하지 않으려고 아침 일찍 일어난 명수가 현관문 바로 앞에서 자신의 검은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한 손엔 검은 봉지를 쥔 채 쿨쿨 자고 있는 성규를 보며 인상을 팍 구겼다. 잘 때 입고 자면 보풀생긴다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신경질적으로  깨우려다가 태아 자세로 너무 곤히 자고 있길래 차마 깨우진 못하고 발로 엉덩이를 한번 툭 찼다.

"…하아암. 어머? 명수 너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나 오늘 아르바이트가잖아. 일찍 가서 준비해야해."
"어머머! 맞다! 아침밥 차려줄게! 기다려."

꽃무늬 핑크 잠옷을 휘날리며 부엌으로 달려간 봉신 씨가 아침밥을 차리는 동안 명수는 외출 준비를 했다. 집안이 소란스러워지자 현관문 앞에서 꼼지락거리며 일어난 성규가 감은 건지 뜬 건지 모를 눈을 벅벅 비벼댔다.

"나 여기서 잔거야? 아, 머리아파…."

성규가 머리를 짚으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누구 하나 성규에게 관심을 두는 이 없었다. 입을 삐죽거리며 봉신 씨와 명수를 한 번씩 흘기고 주섬주섬 일어난 성규가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거실에 놓아두고 식탁에 가 앉았다.

"아, 속아파."
"내 옷 입고 행위퍼포먼스 같은 거 자꾸 할래?"
"니 옷이 내 옷이고 내 옷이 니 옷이지. 형제끼리."
"깨끗하게나 입던가. 나 외출할 때 입는 옷을 왜 자꾸 입고 자냐고."
"내가 일부러 잤냐. 나도 왜 저기서 잤는지 모르겠는데."
"어우. 야, 이부터 닦아라. 주둥이냄새쩔어. 맥주쉰내나, 맥주쉰내."
 
허어허어하아하아. 손을 들어 자신의 입 냄새를 맡은 성규가 해맑게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비엔나 소세지다!"

비엔나 소세지가 들어있는 접시에 젓가락을 들이대자 봉신 씨가 성규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아야! 왜!"
"명수앉으면 그때 먹어."
"…치이."

성규가 젓가락을 쪽쪽 빨며 명수가 식탁에 앉기를 기다렸다. 마치 사료를 먹기전 기다리는 강아지같은 모습이다.


*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일어난 우현은 이미 출근 준비를 다 마치고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향수를 조금 뿌리고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정리한 뒤 방을 나섰다.

"아침밥 진짜 안 먹게?"
"나 원래 오피스텔에 지낼 때부터 아침밥 잘 안 먹었어. 먹으면 배가 불편해서. 배고프면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걱정마."
"그래. 너 편한 대로 해."
"성열아. 형 갔다 올게!"

소파에 앉아 아침 뉴스를 보던 성열이 현관으로 다가와 손을 흔들었다. 순재가 건네는 서류가방을 받아들고 마당으로 나온 우현이 허리와 목을 몇 번 돌려 아직 잠자고 있는 근육들을 깨웠다. 휘파람을 불며 마당을 지나 주차해놓은 차를 리모컨으로 열었을 때 옆집 문이 철커덩 열리고 명수가 하품을 하며 걸어나왔다. 차에 타려던 우현이 누군가 싶어 명수를 빤히 쳐다보자 하품을 하던 명수가 시선을 느끼고는 입을 쩍 벌린 채로 우현의 시선을 마주했다. 명수가 먼저 머쓱하게 인사를 하자 우현도 역시 머쓱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쟤가 동생인가? 형이랑은 다르게 착하네.

"돈 많이 벌어와라."
"넌 집 잘 지켜라."
"죽을래? 내가 개새키냐. 버스타고 가게?"
"어잉."

형제가 참 유별나다는 생각을 하며 무의식중에 성규와 명수의 눈 사이즈를 재던 우현이 성규와 눈이 딱 마주치자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지으며 차에 올라탔다.

"뭐야. 왜 비웃어. 아침부터 재수 없게."
"누구? 옆집 사람?"
"어? 아, 아니야."
"제 얘기한 거 맞는 것 같은데."

성규와 명수 앞에 멈춰선 우현의 벤츠 창문이 지이잉 내려가고 운전석에 타고 있는 우현이 고개를 내밀자, 짝다리를 짚고 후드티 주머니에 양손을 쑤셔 넣은 성규가 삐딱한 말투로 말했다.

"아침부터 왜요."
"그쪽이랑 상관없는 일인데요? 동생분 정류장 가는 것 같은데 가는 길이니깐 태워드릴게요. 타세요."
"왁!! 진짜요? 고맙습니다."
"이웃끼리 뭘요."
"우히히! 형! 나 간다!"

명수를 태운 벤츠가 성규의 앞을 유유히 지나갔다.

"어우~ 재수 없어.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어."

벤츠의 뒷 표정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기분이 더 불쾌해진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은 뭐지. 한편 우현의 차에 탄 명수는 벤츠 내부에 감탄하며 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남우현이에요. 스물여섯입니다."
"아, 저는 김명수고 스물네살이니깐 말 편히 하세요."

형보다는 얌전하네. 우현이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르바이트하러 가니?"
"네. 오늘이 첫날이에요."
"어디로?"
"레디락이라고 까페 비슷한 레스토랑이요."
"레디락? 거기 자주 가는 곳인데."

예전부터 분위기도 좋고 밴드 연주도 수준급이라서 순재와 성열과 함께 자주 갔던 곳이었다.

"…형은 집에 그냥 있고?"
"우리 형이요?"

백수라는 걸 뻔히 알면서 괜스레 묻고 싶어졌다.

"말로는 직장 구한다고는 하는데 모르죠. 근데 안 구하고는 못 배길걸요? 다음 달까지 취직 못 하면 큰 고모부 공장에 확 팔아넘긴다고 엄마가 아주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거든요."
"그것 참 안 됐네."
"전에 제일식품인가? 암튼 그 회사 마케팅부에서 일하다가 그만둔 뒤부터는 취직 못 하고 있어요."

명수가 봇물 터진 듯이 줄줄줄 성규의 과거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우현에게 자신의 과거사를 말한 걸 알면 성규의 작은 두 눈이 발카닥 뒤집힐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그래도 우리 형이 은근 머리는 좋아요. 대학교 때 장학금 받으면서 다니구 대회에서 몇 번 대상도 탔었구요."
"대회?"
"네. 우리 형이 광고 홍보학과 나왔거든요. 요새 기업에서 광고 콘테스트같은 행사 많이들 하잖아요."
"근데 취직이 왜 안 될까?"
"그게요. 사실 대학이 서율대에요. 서울대도 아닌, 서율대."
"서율대?"

차 안에 있는 사람이라곤 자신과 우현밖에 없는데 마치 비밀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소곤거리며 말한 명수가 혀를 끌끌 차며 다시 차 안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기업들이 서울대 연대 고대, 이 세 곳 빼고는 다 쓰레기통에 처넣는대잖아요."
"하긴. 대학 네임이 인생을 좌지우지하니깐."
"어어, 저 여기서 내려주시면 돼요!"
 
우현의 벤츠가 정류장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감사합니다,하고 우렁차게 인사를 하는 명수에게 고개를 끄덕거려준 우현이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명수에게서 성규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은 우현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골때리네."


*


볼네드 회사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삐 움직이던 직원들이 폴더처럼 허리를 접어 우현에게 인사를 한다. 우현보다 높은 직급에 있는 사람들까지 말이다. 일일이 대꾸해주기가 어려워 고개 인사만 해가면서 기획부실로 향했다. 볼네드 백화점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백화점 본사는 볼네드 백화점의 실질적인 업무와 경영을 담당하고 있다. 서동에서 나온 백화점이라서 그런지 건물 외관부터 내관까지 삐까뻔쩍하다.

"하이."

사무실 안에 있는 커피기계 앞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호원이 사원증을 목에 걸며 들어오는 우현을 향해 손을 휙 흔들었다. 대답으로 호원이 엉덩이를 툭 친 우현이 깨끗이 씻어놓은 컵을 꺼내 향긋한 블랙커피를 잔에 따랐다. 우현과 초중고를 같이 나온 호원은 우현의 베스트프렌드이자 든든한 가족과도 같다. 비록 직급은 우현이 팀장 겸 부장이고 호원은 갓 대리가 된 사원이지만 회사 안에서 격식을 차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회사 사람들도 거의 다 호원과 우현의 사이를 알고, 또 그렇다고 해서 친구사이를 빌미로 일을 대충 하거나 소홀히 하지는 않았으니깐.

"굿모닝."
"오늘은 배드 모닝."
"왜?"

호원이 턱 끝으로 깔끔하게 비워져 있는 김복남 씨의 책상을 가리켰다.

"관뒀어?"
"응. 정확히 너 오기 25분 전에 와서는 다 정리해갔어. 시골에 계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홀로 계신 어머니 부양하러 가야한다나 뭐래나 ."
"그래서 그냥 보내줬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얘기할 틈도 없더라."
"그럼 김복남씨 업무는?"
"일단 내가 받아놨는데. 말도 안 되게 많아. 나 이번에 프로젝트 자료 준비하는 것도 빡치는데 김복남씨 업무까지 맡아서 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아."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우현이 골치 아픈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제일 혐오하는 사람이 자기 일을 충실히 하지 않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한테 맡기기에는 요즘 다들 업무가 많아서 문제고."
"일단 미안하지만, 정리만 부탁할게."
"어떡하게?"
"인사부한테 가서 말해봐야지. 다른 팀에서 끌어오던가 아니면 새로 뽑던가.여기 못 들어와서 안달난 사람이 얼마나 쌔고 쌨는데."
"딴 팀에서 데리고 오는거면 좀 똘똘하고 영리한 사람으로 데리고 와라. 띨띨한 애는 싫다."
"우리 회사에 띨띨한 사람은 없어."
"가끔 있어, 지뢰처럼. 성격파탄자라던가 아니면 미친 결벽증이라던가. 조심해."
"알았어. 걱정마."

자리로 향하려던 우현이 호원의 구두 안쪽에 살짝 비치는 보랏빛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또 구두에 보라색 양말 신었냐?"
"나,나는 전혀 그런 적이 없어."
"넌 물러터진 보라색 좀 끊어라."

우현이 혀를 차며 가장 안쪽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볼네드 백화점의 매출 그래프가 지붕을 훌쩍 뚫고 있는 덕분에 다들 업무가 늘어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움푹 팼는데 이런 상황에 업무를 나눠 맡기면 불만이 속속히 터져 나올게 분명했다. 직원들이 시간에 맞춰 하나둘씩 출근하고 곧 사무실 안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팩스 소리, 복사기 지잉지잉거리는 소리로 가득찼다. 한참 일을 하는데 여직원 한 명이 다가와 조그마한 선인장 화분을 우현의 책상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서류를 정리하던 우현이 화분을 한번 돌려보더니 여직원 얼굴을 쳐다봤다. 이게 뭐냐는 표정이다.

"요즘 업무때문에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계시잖아요. 팀장님께 해를 끼치는 못된 전자파를 제가 조금이나마 차단해드리고 싶은,"
"일하다가 찔리기 좋게 생겼네요."
"네?"
"아닙니다. 고마워요. 가서 일 보세요."
"네에…."

우현이 선인장을 구석탱이로 스윽 밀어놓고 다시 서류를 뒤적거리자 여직원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같은 여직원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정리를 마친 서류 뭉텅이를 한쪽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직원 현황 파일을 챙겨 직원의 휴가와 복지,급여와 채용을 관리하는 인사관리부가 있는 7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타려던 사람들이 우현이 타고 있는 걸 보더니 마치 실례라도 저지른 듯이 꾸벅 인사를 하며 다른 쪽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왜 이렇게 피하지.나한테 무슨 썩은내라도 나는걸까? 우현이 셔츠 냄새를 킁킁 맡아보았다. 고급스러운 향수냄새뿐인데. 7층에 내린 우현이 익숙한 걸음으로 누군가를 찾아가더니 회사안에선 보기 드문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이모!"


*


"서동그룹 왕자님께서 직접 여기까지 찾아오고 왠일이래? 레드까펫이라도 깔아놓을걸 그랬나?"
"그냥 이모 생각이 나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은."

접무실에 앉은 우현과 우현의 큰 이모 소영. 소소한 안부를 묻고 난 후 우현이 기획팀 직원 파일을 건네며 이야기를 꺼냈다.

"기획부서에서 직원 한 명이 나갔어."
"언제?"
"오늘 아침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혼자 남으셔서 시골로 내려가겠다네. 그것도 말릴 틈도 없이 말이야."
"관둘만하네."
"이유가 관둘만해도 그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 난 싫어. 당장 업무처리가 문제야. 다른 팀원으로 메꾸는 쪽이 좋을 것 같은데, 내 생각엔."
"그럼 그 쪽 팀은 어쩌구?"
"발등에 불 떨어진 쪽부터 식혀야지."
"그 짓이랑 카드 돌려막기랑 다를 게 뭐야. 흠……. 새로 뽑는 쪽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기획부는 원래 팀원 체인지가 없는 편이잖아. 요즘 매출도 좋고 실적도 좋아서 다른 팀들도 갑자기 팀원이 바뀌는 건 리듬 깨진다고 싫어할테고…. 정 싫으면 너 주위에 유능한 사람 소개도 괜찮구."
"내 주위에 유능한 사람이 어디…."

'그래도 우리 형이 은근 머리는 좋아요. 대학교 때 장학금 받으면서 다니구 대회에서 몇 번 대상도 탔었구요.' 출근하면서 태워줬던 명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에코처럼 웅웅 울렸다.

"뭐 정 없으면 새로,"
"유능한 사람. 한번 찾아볼게."
"늬앙스가 누가 있는 것 같은데?"
"내일 면접 좀 준비해줘."
"뭐? 내일 당장?"
"조금 무리인가?"
"무리는 아니지. 그런데 누구야? 귀띔이나 해줘봐봐. 니가 추천할 만한 사람이면 그냥 보통 사람은 아닐 것 같구."
"그 정도는 아니야. 그나저나 이모부는 잘 계셔?"

너무 잘 계셔서 탈이야. 파일을 정리해 우현에게 건넨 소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쉰 넘은 남자가 집에서 집안일이나 하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한심한지 넌 모를거야."
"요즘은 여자가 돈벌고 남자가 집안일하는 가정들 많아."
"난 안 원한다. 나도 이제 쉬고 싶어. 벌만큼 벌었고 모아둔 돈도 있어서 그냥 훌쩍 세계 여행이라도 하고 싶은데, 떨거지가 많아서 말이지."
"이모부랑 같이 가면 되지. 이모, 나 그만 가볼게."
"그래. 농땡이 피우지말고 열심히해."
"내 사전에 농땡이는 없어."

우현이 파일을 들고 접무실을 나갔다. 문득 일억 오천에 피해보상까지 이억이면 되겠다던 성규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억은 못 갚아도 구렁텅이에서 꺼내주는걸로 퉁치면 되겠지."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한참 영업준비중인 레디락의 문을 열고 들어선 명수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선웅을 찾았다. 반짝반짝 트윙클 티가 나는 명수의 자태에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들의 눈에 하트가 뿅뿅 박혔다.그 중 홀을 관리하는 여직원이 수줍게 다가와 말했다.

"죄송하지만 아직 영업전인데…."
"선웅이형 있어요?"
"사장님 아직 출근 안 하셔가지구요오. 어떤일로…."
"저 여기 오늘부터 출근하기로 한 김명수라고 하는데요."

명수의 말에 대걸레와 손걸레를 손에 쥐고 옹기종기 모여 뒷 편에서 명수를 구경하던 여직원들이 수군거리며 호들갑을 떨기시작했다.

"아직 출근 안 한거면 여기 앉아서 기다려도 되죠?"
"아, 사장실로 안내해드릴게요."
"고마워요."

어머,고맙대,고맙대. 뒤돌아 선 여직원이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여직원 무리에게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장실로 들어가 테이블에 앉자 아까 그 여직원이 후다닥 커피를 타와 명수에게 건넨다.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며 들이키던 명수가 명찰에 써있는 '김차차'라는 이름을 읽고는 푸흡!하고 커피를 뿜었다.이름이 김차차? 차차?

"어머!"
"헉! 죄,죄송해요."

테이블 위에 있던 티슈를 뽑아 김차차의 소매에 튄 커피자국을 닦아주자 차차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뭐하냐, 둘이."
"어? 선웅이형!"
"차차는 나가봐."
"네,사장님."

차차가 후다닥 사장실을 나가고 하품을 하며 선웅이 의자에 앉아 명수가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방금 나간 차차에 대해 물었다.

"이름이 김차차에요?"
"이력서보니깐 본명이던데."
"저 사람 부모님들 참 무책임하네요."
"그나저나 집엔 잘 들어갔냐."

가출하고 며칠동안은 선웅의 집에서 지냈었다. 말로는 어서 정신차리고 집에 들어가라며 꾸중을 했지만 내쫓거나 봉신 씨에게 일러바치진 않았다. 고마우신 분이다.

"첫날 먼지나게 털리고 이젠 괜찮아요."
"성규는? 성규 안 본지도 꽤 됐네."
"백수에요. 집에서 쉬고 있어요."
"걔 노래랑 피아노도 좀 치잖아. 할 거 없음 여기 나와서 연주라도 하던지."
"저희집 피아노 팔아치운지가 언젠데…."
"피아노 팔았어?"
"네. 몇 년 전에요."

피아노에 관심이 있던 성규를 봉신 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아노 학원에 보낸 아버지가 봉신 씨에게 엄청난 욕을 들어가면서 사준 피아노가 있었다. 성규는 그 피아노를 무엇보다도 아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여기저기 돈이 밀려 어쩔 수없이 그나마 돈이 되는 피아노를 팔아치웠다. 피아노가 실려가던날, 성규는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엉엉 울었었다.

"그리고 우리 형 자존심 높은 건 에베레스트 뺨쳐서 아마 안할걸요? 암튼 저 오늘부터 뭐해요?"
"원래 주방쪽에 허드렛일을 시키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깐…."

넌 홀에 나가있는게 낫겠다. 선웅의 말에 명수가 '왜요'라고 되물었다.

"넌 비쥬얼이 되잖아. 홀에서 서빙하면서 단내를 흘려."
"단내요?"
"그래야 여자들이 그 냄새를 맡고 꼬여들지."
"좋은 뜻이죠?"
"그럼. 하늘과 너의 어머님이 주신 선물이지. 유니폼은 아까 차차이 걔, 걔한테 가면 맞는걸로 줄 거야. 테이블 번호는 왼쪽부터 순서대로라서 어렵진 않을 테니깐 차차한테 잘 배우고. 월급은 주방 쪽 말고는 다 정규 아니니깐 똑같아. 가봐."
"고마워요, 형."

갯바위에 붙어있는 따개비처럼 사장실 문 앞에 붙어있던 여직원들이 명수가 문을 열고 나옴과 동시에 우르르 뒤로 밀려났다.

"저 아까, 김…큼…. 김차차씨?"
"네! 제, 제가 김차차인데요."
"선웅이형이 유니폼 받아가라던데…."
"아,네! 따라오세요."

지나치는 명수의 조각 같은 옆모습에 여직원들의 황홀한 눈빛이 찬란하게 아른아른거렸다.


*


한편, 통장에 모아놨던 돈들로 이곳 저곳에 서류를 잔뜩 집어넣은 성규가 한 손에 핸드폰을 꽉 쥔 채 어제 먹고 남은 과자를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었다. 봉신 씨도 출근하고 명수마저 출근했는데 집안의 가장이 이렇게 과자만 처먹고 있다. 아,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다. 나도 쓸모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구…. 성규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띠리링~또로롱~띠리링~또로롱. 폴더 오픈음과 클로즈음이 시끄럽게 울려대다가 드디어 성규의 전화벨이 우렁차게 울렸다. 전화가 끊길세라 서둘러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네! 김성규입니다!"
[네.김성규씨 맞으시죠?]
"네네. 제가 김성규입니다. 성스러울 성에 홀 규자요!"
[네. 다름이 아니라 저희 대출을 이용하시면 고객님께서는 최대 삼천만원까지 대출이 가능하시거든요.]
"……."
[여보세요? 고객님.]
"이런 염병. 내가 왜 니 고객이야! 내가 언제 니 고객한댔어? 에이, 재수가 없으려니깐…. 끊어! 한번만 더 전화하면 머리끄댕이를 아주 그냥 확 불살라버린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성규가 과자를 한가득 집어 입안에 쑤셔넣었다. 어떻게 한 곳에서도 전화가 없을까. 이력서가 그렇게 형편이 없었나? 수상경력도 빠짐없이 넣고 입사용 자기소개서도 훌륭하게 썼는데…. 괜히 쓸데없이 돈만 버린 건 아닌가싶다. 그냥 봉신 씨 말대로 공장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적어도 그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배고파."

근데 지금은 배고픈 게 먼저다. 다 먹은 과자 봉지를 고이 접어 쓰레기통에 넣고 부엌으로 가 커다란 양푼을 꺼냈다. 밥솥을 열어 밥을 푸고 냉장고를 열어 나물반찬과 고추장과 참기름을 양푼에 넣고 고추장이 뭉치지 않게 골고루 비볐다. 금세 고소한 냄새와 매콤한 냄새가 솔솔 올라오기 시작한다.

"으흐으음. 너무 맛있어, 너무 맛있어."

호들갑을 떨며 양푼을 끌어안고 식탁에 앉은 성규가 얼마 안 되어 양푼을 깨끗하게 비웠다.


*


"준비 다 했어?"

순재의 물음에 성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랜만에 순재와 둘이서 외식을 하러 가는 게 설레었던지 성열이 계속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정리했다. 하얀 티셔츠에 붙은 검은 실밥을 떼어준 순재가 성열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면허는 있지만 사고 이후로 조금만 손을 써도 손이 달달달 떨리기 때문에 운전대를 잡아본지도 3년이 지났다. 이젠 오히려 대중교통이 더 편한 편이다.

"일단 밥 먼저 먹구 영화 보러 가자. 그다음엔 쇼핑도 하고. 좋지?"
"……."

아무 말 없이 앞만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오랜 시간 성열을 봐왔던 순재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다는 걸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택시가 집 앞에 도착하고 성열을 먼저 택시에 태우고 뒤따라 탄 순재가 목적지를 말했다.

"시내에 레디락으로 가주세요."

기사아저씨가 내비게이션에 투박한 손으로 레디락을 검색했다. 턱을 괴고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 성열이 머릿속에서 몽글몽글 떠오르는 명수의 얼굴에 눈을 몇 번 꿈벅거렸다. 며칠 전엔 꿈에서 나오더니, 이젠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쉽게 떨쳐지지가 않는다.


*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명수가 마치 레디락에서 쭉 일해왔던 사람처럼 능숙하게 서빙을 했다. 아르바이트 경험이 풍부한 덕분이다. 더불어 명수만의 '접시 내려놓으며 살포시 미소 짓기 스킬'을 시전할 때마다 여자 손님들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움켜잡았다. 한참 서빙을 하며 분주히 돌아다니는데 천으로 가려진 무대 뒷쪽이 살짝 소란스러워졌다. 선웅과 여자 째즈 싱어가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갈 대화하더니 갑자기 손뼉을 친 선웅이 서빙을 하는 명수를 잡아다가 무대 뒤로 끌고 왔다. 마치 BMK를 연상시키는 넉넉한 인상의 싱어가 명수를 보며 물었다.

"서빙하는 애는 왜?"
"얘가 피아노를 좀 치거든?"
"예?"
"오늘 공연 얘로 대충 땜질하자."

명수가 기겁하며 붙잡힌 목덜미를 홱 쳐냈다.

"무슨 소리에요,형! 피아노는 뭐고 공연은 또 뭐에요?"
"너 성규따라서 곧잘 치곤 했잖아."
"말그대로 형 따라서 치는 거였죠! 그리고 그럴 거면 차라리 우리 형을 부르던가요."
"당장 급하니깐 그렇지!"
"갑자기 무슨 일인데요?"
"피아노 치는 애가 오는 길에 사고가 났어. 3시 런치랑 8시 디너 공연이 문제야."
"그래서 지금 그걸 저보고 치라구요?"
"디너는 형이 어떻게 해볼 테니까 런치만 어떻게 해줘봐. 형도 미치겠다. 벨라, 얘가 또 덩치만큼 값을 하거든."

선웅이 턱 끝으로 휙 벨라를 가리켰다. 그러자 벨라가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저 째즈는 들어보지도 않았고 칠 줄도 몰라요. 제가 칠 줄 아는 건 그 존 레논에,"
"oh my love?"

또박또박 '오마이러브'으로 발음하려던 명수가 벨라의 찰지고 쫄깃한 발음에 한번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벨라와 비슷하게 발음했다.

"네. 존 레논의 오마럽이요."
"어때, 벨라? 가능하겠어?"
"나쁘진 않네. 좋아하는 노래라 가사도 알고."
"오케이! 다행이다."
"아니 아니, 잠깐만요!"

지금 상황이 너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그거 예전에 쳐보던 거라 기억도 잘 안 난다구요."
"머리를 쓰지말고 손으로 기억하려고 해봐."
"……."
"잘 생긴 놈이 그것도 못해?"

벨라의 말에 명수가 한숨을 쉬며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고등학교 때 여자친구한테 쳐주려고 성규한테 배운 건데…. 기억이 날까?

"하아…. 선웅이형이 저한테 베푼 은혜를 봐서 일단 한번 해볼게요."
"고맙다, 명수야. 일단 둘이 대충 맞춰보고 있어봐. 앞치마 이리 줘."
"네…."

명수가 앞치마를 풀러 선웅에게 건네고 의자를 끌어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검은 바지와 하얀 와이셔츠가 피아노의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연상시켰다. 영업 중이라 크게 연습할 수가 없어서 우나 코르다를 고정시키고 조심스럽게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명수의 표정이 제법 진지해졌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명수의 손이 조심히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호들갑 떨었던 모습과는 달리, 꽤 안정적인 연주다. 벨라가 피아노 선율 위에 조그맣게 목소리를 얹었다. 2분 남짓한 연주가 끝나고 벨라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꽤 하네?"
"이,이 정도면 돼요?"
"크게 문제는 없겠어."

벨라가 여유롭게 물병을 들고 무대 아래로 내려가자 혼자 남은 명수가 안절부절하며 난리를 부린다. 자기가 노래 부를 것도 아니면서 벨라처럼 목을 풀다가 다리를 달달 떨다가 목을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한다.

"준비 다 됐어?"
"안 됐어도 돼야하잖아요."
"잘할 수 있을 거야. 벨라 말로는 훌륭하다던데?"
"부담 주지 마요. 실수할 것 같으니깐."
"멘트랑 진행은 벨라가 알아서 하니깐 넌 그냥 가만히 있다가 연주만 하면 돼."
"아아아. 떨려."

무대를 가리고 있던 천이 좌우로 걷히고 벨라가 무대에 올라감과 동시에 손님들이 힘차게 박수를 쳤다. 그 소리에 침이 자꾸 바싹바싹 말라온다. 연주하다가 기절하는 건 아닌지 몰라. 마이크를 통해 벨라의 중후한 목소리가 레스토랑 안에 울렸다.

"안녕하세요, 째즈싱어 벨라입니다."

또다시 박수소리. 그놈의 박수 좀 그만 쳤으면 좋겠다. 박수에 맞춰서 심장이 퉁퉁 튕기잖아.

"노래를 하기 전에, 항상 피아노를 치던 친구 아시죠? 안경쓰고 빼빼 마른 멸치 같은…."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친구가 오는 길에 사고를 당해서 급히 다른 친구를 구해봤어요. 박수 부탁해요."

하얀 조명이 명수를 신비한 존재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고 민망함에 명수가 살포시 웃자 어디선가 '잘생겼다!'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벨라의 유들유들한 입담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레스토랑 문이 열리고 순재와 성열이 들어섰다.

"어? 지금 딱 공연시작인가봐! 잘 됐다. 어서 앉자."

무대에서 그리 멀지 않는 자리에 앉은 순재가 예전에 왔을 때 봤던 벨라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주자 벨라가 싱긋 눈인사로 답했다.

"오늘은 특별하게 째즈가 아닌 팝을 불러보려고 해요. 존 레논의 oh my love이라는 곡인데요.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oh my lover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my eyes can see. 내 생애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 내 눈은 알아볼 수 있어요."

벨라가 명수에게 시작해도 좋다는 눈빛을 보내자 곧 잔잔한 피아노 연주가 시작됐다. 서빙을 하던 여직원들이 피아노 치는 명수의 모습에 다들 헤롱헤롱거렸다. 듣기 좋은 피아노 소리와 매력적인 벨라의 목소리에 순재와 성열도 한껏 노래에 취해 주문하는 것도 잊은 채 무대만 쳐다봤다. 무심코 피아노 쪽을 본 순재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성열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성열아. 저기 피아노 치는 사람…. 옆집 명수 씨 아니니?"
"……."
"맞는 것 같은데? 그 치?"
"아…."

순간, 명수와 성열의 시선이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마주쳤다. 성열이 탄성을 내며 얼어붙었다. 조명을 받으며 피아노를 치고 있는 명수의 진지한 모습에 이상하리만큼 거세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가슴안에 커다란 다람쥐 한 마리가 꺼내달라고 방방 뛰는 듯한 기분이다.


*
 

벨라의 무대가 끝나고 무대 밑으로 내려오는데 어찌나 다리가 후들후들 거리던지 몇 번이나 발을 헛디딜뻔했다. 피아노 한 번 쳤을 뿐인데 사람들이 마치 연예인 보듯이 명수를 대했다. 누군가는 싸인을 요청했고 또 누군가는 사진 한 번만 같이 찍어달라며 팔짱을 걸어오기도 했다. 명수가 다시 앞치마를 걸치고 순재와 성열이 앉은 테이블에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일하세요?"
"네. 오늘이 첫날이에요."
"아까 피아노 연주 멋졌어요!"
"실수 많이 한 것 같은데…."

순재의 칭찬에 명수가 민망한 듯 콧잔등을 매만지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근데 이상하게 성열의 얼굴도 덩달아 붉어진다.

"저…. 주문…."
"아, 참. 내 정신 좀 봐. 저는 레몬 샐러드 하나랑 아이스티 한잔 주시구요. 성열인 뭐 먹을래? 스테이크? 파스타?"
"……."

성열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파스타를 가리켰다.

"치킨 파스타 하나만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주문한 메뉴를 체크한 명수가 주방 쪽으로 향했다.

"여기 되게 오랜만에 와본다, 그 치?"
"……."
"어머.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

냅킨을 뽑아 이마에 갖다 대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여기 그렇게 안 더운 것 같은데. 혹시 감기 기운 있나? 순재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고개만 저었다.

"이상하네. 저번에도 그러더니. 정말 괜찮은 거야? 병원 안 가봐도 돼?"
"…응."
"…어?"
"…안 가봐도 돼."
"어어…. 그,그래."

성열이 목소리를 내어 대답하자 순재가 당황을 하며 어물거렸다.

"……."

음식이 나오기 전, 순재가 허밍을 하며 메뉴판을 훑어보는 동안 성열은 서빙하는 명수의 모습을 눈과 머리에 담았다. 가슴안에 다람쥐가 또 슬슬 발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퇴근을 하고 집에 도착한 명수와 봉신 씨가 마루에 앉아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두 눈가에 암울함이 가득한 성규의 모습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명수가 낄낄거리며 성규의 심기를 툭툭 건드렸다.

"표정 봐라. 누가 보면 내일 지구 멸망하는 줄 알겠다?"
"차라리 멸망했으면 좋겠다. 핵전쟁이라도 일어나서 한 순간에 모조리 확 다 쓸어갔으면 좋겠어."
"난 아직 살만한 세상인 것 같은데."
"요즘은 엿장수 안 돌아다니나."
"왜?"
"그 망할 주댕이 좀 엿 바꿔 먹게."
"내 입이 얼마나 고급인데. 아,참! 나 오늘 레디락에서 피아노 쳤어."
"레디락이라면 선웅이형이 하는 레스토랑? 거기서 너가 왜 피아노를 쳐?"
"피아노 치기로 한 사람이 일이 생겨서 대타로 내가 쳤지. 그 옛날에 형이 가르쳐준 존 레논형님꺼."
"오마럽?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

신기하게 손이 기억하고 있더라고. 명수가 손가락을 꾸물꾸물 거리며 입으로 oh my love 멜로디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든 말든 핸드폰이 흥건해질 정도로 손에 쥐고 있던 성규가 시계 시침이 오후 9시를 가리킴과 동시에 손에서 핸드폰을 놨다.

"…명수야."
"엉."
"엄마."
"왜 불러."

나 공장 들어갈까 봐. 성규의 말에 마스크 팩을 붙이려던 봉신 씨가 정말이냐며 되물었다.

"응…."
"……."

막상 또 대학까지 나온 자신의 큰아들이 공장에 들어간다니 봉신 씨의 마음이 착잡해진다.

"휴우…. 취직 그렇게 안 돼?"
"…서류 여기저기 넣었는데 연락이 없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깐 좀 더 기다려봐."
"으응…."
"……."

분위기가 순식간에 착 가라앉았다. TV속에서 나오는 웃음소리만 거실을 메웠다. TV를 틀어놓긴 했지만 어느 누구도 TV를 보는 사람은 없었다. 동상이몽. 모두 거실에 앉아있지만, 머릿속으로는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순간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성규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접니다.]
"그러니깐 저가 누군데요. 수저에요, 레이저에요?"
[…옆집 남우현이요.]
"……."

안 그래도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왜 옆집 또라이까지 난리지.

"무슨 일이신데요."
[할 얘기가 있습니다. 잠깐 나와보세요.]
"인터폰으로 얘기해요. 오래되긴 했어도 듣고 말하는 데는 문제없으니깐."
[나오라면 좀 나와봐요. 손해 볼 거 없으니깐.]
"……에이씨, 진짜."

신경질적으로 슬리퍼를 신은 성규가 쿵쿵 소리를 내며 대문을 열었다. 우현은 퇴근하고 바로 온 건지 아직 정장차림이다. 

"눈빛이 왜 그래요? 내일 지구가 멸망이라도 한답니까?"

명수가 했던 말이다. 이것들이 지금 짜고서 날 놀리는 건가?

"용건만 말하고 가요. 나 지금 상태 안 좋아요."
"취직했어요?"
"뭐요?"
"말 그대로 취직했냐구요. 어제 그랬잖아요. 백수라고."
"지금 누구 놀려요?"

대문 사이로 고개만 빼꼼히 내놓던 성규가 씩씩거리며 대문을 쾅 닫고 나왔다.

"취직 못 했어요. 어느 곳에서도 안 찾아줍디다!"
"안됐네요."
"지금 불난 집에 기름 뿌려요?"

성규의 어깨너머로 집을 훑어본 우현이 집에 불났어요?하고 되묻자 더는 참지 못한 성규가 버럭 소리쳤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는 누구 염장 지르러 왔어요?!"
"땍땍거리지 좀 마요. 누가 보면 목구멍에 마이크라도 매달아 놓은 줄 알겠습니다."
"너 진짜 또라이구나?"
"말 가려가면서 합시다."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받아요."

성규의 말을 끊은 우현이 A4용지 한 장을 성규에게 건넸다.

"어쩌라구요. 백화점 찌라시에요?"
"받으면 알잖아요. 받아요."
"싫어요."
"받아요."
"싫어요."
"받아요."
"싫어요."
"좀 받으라구요."
"안 받는다구요."
"짜증 나게 하지말고 받으랄 때 받아요."
"짜증은 지금 누가 났는데요. 어! 이 사람이 진짜, 왜 이래요!"
"어지간히 열받게 하네."

성규의 손목을 붙든 우현이 억지로 성규의 손에 종이를 쥐여준다. 어쩔 수 없이 종이를 받아든 성규가 신경질적으로 우현을 째려본 후 손에 들린 종이를 홱 눈앞에 가져다댔다. 밤이라서 그런지 가로등 불빛만으로는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스마트폰쓰죠."
"네."
"플래시 좀 켜봐요. 어두워서 도통 보이질 않네."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우현이 종이에 대고 플래쉬를 켜자, 용케 불빛을 감지한 벌레와 나방들이 달려들기 시작한다. 손을 휘저으며 내용을 읽던 성규가 놀람과 어리둥절함이 섞인 표정으로 우현을 쳐다봤다.

"이게 뭐에요?"
"거기 안 쓰여있어요? 볼네드 백화점 기획부 사원 공개채용. 인쇄가 잘 안 됐나."
"그 뜻으로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이걸 나보고 어쩌라구요. 와서 구경하라구요?"
"구경만 하고 싶으면 해도 상관없어요. 난 기회를 주는 거니깐."
"무슨 기회요."
"일억 오천을 돌려받을 기회."
"이봐요. 남우현씨."
"왜요. 김성규씨."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나는거 감수하고 말하는 건데, 나 여기 입사 지원했다가 면접도 못 보고 떨어진 게 수십 번이에요. 볼네드에 입사 지원을 하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로또를 하나 더 사지,내가."
"속는 셈 치고 면접이나 봐요."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잘 봐요. 여기 한 명 뽑는다고 쓰여있죠? 이 말은 무슨 말인지 알아요? 드넓은 태평양에서 슈퍼스타케이를 하는데, 수억마리의 물고기들중에서 힘 좋고 날쌘 황금 물고기를 딱 한 마리만 뽑는다는 소리에요. 그 한 마리에 나 같은 날치가 뽑힐 확률이 얼마나 돼보여요?"
"그럼 눈 딱 감고 보세요, 면접. 떨어질 거 뻔하다면서요. 미친 척하고 한 번만 보라구요."
"안 미치고 멀쩡한데 미친 척을 왜 해요, 내가? 아니,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에요?"
"전에 제일 식품에서 일했다면서요."
"얼씨구. 남 뒷조사까지?"
"대학 다니면서 장학금도 타고 기업콘테스트에서 상도 받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그렇게 없습니까?"
"…대 나왔어요."

기어들어가는 성규의 목소리에 우현이 짜증을 내며 되물었다.

"뭐라는지 하나도 안 들려요."
"서율대 나왔다고요! 서울대도 아닌 서율대!"
"앞으론 속독하지 말고 정독하세요. 꼼꼼히."
"잠깐만요. 아니 무슨 서류도 안 넣었는데 면접을 보라고 하는 거에요?"
"즉석 평가에요. 내일 면접 보러올 때 이력서랑 상 받은 거 있으면 다 가져와요. 수상작도 같이."

그러더니 쿨하게 뒤돌아 먼저 집으로 들어가버린다.

"아니 누가 면접 본댔어? 그리고 내가 얼마나 정독을 하는데. 저 또라이시키. 아오, 열불나."

갖은 욕을 하며 마당으로 들어선 성규가 클립으로 같이 꽂혀있는 우현의 명함을 홱 뽑았다. 마치 우현의 얼굴이라도 그려져 있는 것처럼 한껏 노려보더니 꼬깃꼬깃 접어 마당에 내팽개치고 발로 콱콱 밟았다.

"뭘 정독하라는 거야."

집안 불빛에 비추어 종이를 꼼꼼히 읽던 성규가 마지막 문장을 읽고 잠시 멍해졌다. '서율대도 상관없습니다.'

"뭐야,이거…."

나한테 장난친 건가? 아니지. 이렇게 인쇄에 명함까지 꽂아놓고 장난할 성격은 아닌 것 같아 보였는데…. 좀 싸이코같긴 해도.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성규가 다시 마당으로 가 발로 밟아놓았던 명함을 다시 주워서 판판하게 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다들 잘 분위기인건지 봉신 씨의 방은 굳게 닫혀있었고 TV도 꺼져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던 명수가 성규를 한번 보더니 다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진짜 큰고모부 공장에 들어갈 생각이야?"
"……."
"내가 말로만 놀렸지, 사실 공장은 좀 아니다. 차라리 쥐꼬리만한 월급이라도 회사다니는 게 낫지않을까?"
"……."
"어이. 김성규."
"어?"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그게 뭔데?"
"아냐. 아무것도."

책상위에 우현에게 받은 종이와 너덜너덜해진 명함을 얹어놓은 성규가 침대에 누워 잠시 고민을 했다. 면접보나 안 보나 나한테 손해는 없을텐데. '서율대도 상관없습니다'라는 문구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한참 뒤척거리던 성규가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공장들어가기로 한 거, 떨어지면 맘 편히 공장가고! 붙을리는 없겠지만 붙으면 당당하게 다니면 되는거야. 입술을 앙 다물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한 명만 뽑는다니…. 경쟁률 장난아니겠는데.


*


다음날 아침. 명수와 함께 일찍 일어난 성규가 동네 세탁소에서 자신의 정장을 찾아와 입고는 거울앞에 서서 외출 준비를 했다. 아침밥상을 치우던 봉신 씨가 방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성규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 어디 맞선 보러 가니?"
"맞선은 무슨 맞선. "
"그럼 아침부터 그렇게 차려입고 어딜가는데?"

그러게. 무슨 면접이 아침 10시부터인지 모르겠네. 얼굴에 붓기도 안 빠졌는데.

"10시에…. 아니 그냥 잠깐 누구 만나러. 김명수! 나 머리 좀 만져줘."

면접보러간다고 말하면 봉신 씨가 또 쓸데없이 기대할까싶어 봉신 씨에겐 말하지않기로 마음먹었다. 거울앞에 앉아 능숙하게 왁스를 가져온 명수가 손에 왁스를 바르고 성규의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면접보러가는거지?"
"…어떻게 알았어?"
"서류 챙기는거 다봤어."
"엄마한텐 비밀로 해. 그냥 조용히 보고 오게."
"걱정마. 근데 형은 머리 세우면 진짜 못 생겼다니깐."
"시끄러워. 이마가 보여야 첫인상이 밝아보인댔거든?"
"다 됐다."
"땡큐. 아르바이트 잘 갔다와라. 엄마. 나 다녀올게!"

어젯밤에 챙겨놓았던 이력서와 수상경력서류를 서류가방에 넣은 성규가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그런데 불길하게도, 집에서 나오자마자 우현의 하얀 벤츠와 마주쳤다. 운전석 창문이 지이잉 내려가고 꼴도 보기 싫은 우현의 얼굴이 나타났다.

"결국 보러갈꺼면서."
"큼….상관마요. 그 쪽이랑 관계없잖아요."
"왜 없습니까. 붙으면 저한테 팀장님 소리하면서 일해야할텐데."
"저도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압니다. 그리고 아직 붙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김칫국 드링킹하시면 사레들려요."
"태워줄게요,타요."
"허, 내가 왜요."
"싫음 말구요."

우현의 벤츠가 미련없이 성규를 지나쳐 멀어져갔다. 그렇다고 진짜가네. 가다가 펑크나 나라. 성규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정류장으로 향했다. 면접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지나친 기대는 쓰고 떫은 실망을 안기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축 처졌던 마음에 날개가 뿅뿅 솟았다.


*


물뿌리개를 들고 마당으로 나온 성열이 여리꽃밭 앞에 앉아 조금씩 물을 뿌려주었다. 흙이 촉촉히 젖을 정도로만 물을 뿌려주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옆집 대문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열이 슬쩍 고개를 대문 쪽으로 돌리자 검은색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레디락으로 출근하는 명수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잠깐 봤을 뿐인데도 성열의 얼굴이 또 빨개졌다. 물뿌리개가 기우뚱하며 성열의 신발을 흠뻑 적셨다.


*


시내에 위치한 볼네드 백화점은 버스를 두 번만 갈아타면 도착이지만 본사를 가려니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탔는지모른다. 지하철역에서 내리자 바로 보이는 볼네드 백화점 본사의 높은 층수에 성규가 입을 떡 벌렸다.

"사람처럼 일년에 몇 미터씩 자라는거아냐? 저러다 화성 찍겠네."

근데 진짜 면접이 있긴 한건가? 정장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본사로 들어가긴 했지만 다들 목에 사원증을 하나씩 걸고 있었다. 혹시 늦은건가싶어 서류가방을 고쳐잡은 성규가 후다닥 본사로 뛰어들어갔다. 고급스러운 실내 모습에 속으로 연신 감탄을 하며 서둘러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금처럼 반짝거리는 엘리베이터의 모습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어제 우현이 준 용지에 적혀있던 7층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구석에 섰다. 중간중간 사람들이 타고 내릴때마다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엘리트적인 느낌과 세련된 모습에 성규는 괜히 숨을 흐읍!하고 들이마셨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멈추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나온 성규가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리했다.

"저…면접실이 어디죠?"
"김성규씨 되시나요?"
"예? 아,네네. 제가 김성규…인데요?"
"이 쪽으로 오세요."

아니 그건 그렇고 내 이름은 어떻게…. 더 묻기전 성규의 말을 끊은 여직원이 성규를 아무도 없는 대기실로 안내했다.

"……."

왜 아무도 없는거지? 쭈뼛거리며 대기실에 들어선 성규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구석에 놓인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뭐야. 무섭게시리 왜 아무도 없어."

대기실에 걸린 시계는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해야할 대기실에 혼자 앉아있자니 괜히 오슬오슬 소름이 돋아왔다. 서류가방을 끌어안고 10시가 되기만을 기다리는데 10시가 채 되기도 전에 방금 나갔던 여직원이 다시 들어오더니 면접실로 들어오란다. 이번 역시 자기 할 말만 하고 나가려던 여직원을 성규가 불러세웠다.

"저,저기! 죄송한데요."
"네?"
"오늘 면접보는 사람이 저뿐인가요?"
"면접실로 들어오세요."

여직원이 또 다시 성규의 말을 끊는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면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이게 왠 일? 넓직한 면접실에 50대로 보이는 여자 면접관 한 명이 전부다. 면접관 앞에 놓여진 의자 앞에 서있자 면접관이 앉으라는 제스쳐를 해보였다. 면접관이 여자든 남자든, 늙든 젊든 일단 자신감이 생명이다. 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니깐!


*

 

 

 

면접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질문에 대한 대답도 완벽했고, 면접관이 부드럽게 대해줘서 긴장도 금방 풀려 또박또박 자신감있게 할말 다 하고 나온 것 같아 후련하기까지 했다. 많은 의미가 담긴 한숨을 내쉬며 면접실에서 나온 성규가 회사 1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빨리 달달한 걸 입안에 가득 넣고 싶다.

"아이스 라떼 한 잔 주세요. 시럽 마구마구 넣어주시구요."
"사천원입니다. 사원증있으세요?"
"네? 아, 아뇨…. 사원증은 왜요?"
"사원증 있으시면 40% 깎아드리거든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네에…."

성규가 계산대에 지갑을 꺼내놓고 스탬프 카드를 하나 집어 지갑사이에 끼워넣으려다가 멈칫한다. 내가 이걸 왜 넣지. 여기 또 올 일도 없으면서. 그래도 혹시 몰라 지갑사이에 잘 끼워넣고 도로 가방에 넣었다. 계산대에 턱을 괴고 메뉴판에 적힌 커피 종류들을 하나씩 세보는데 옆에서 익숙한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럽빼고 주세요."
"……."
"면접은 잘 봤습니까."

아,참. 이 남자 여기 다닌댔지. 난 이 남자 추천으로 여길 온거고.

"네, 뭐.그럭저럭."
"그럼 전 일억 갚았습니다."

빨대를 잘근잘끈 씹으며 라떼를 들이키던 성규가 무슨 소리냐며 띠꺼운 표정으로 우현을 쳐다봤다.

"받은 기억없는데요?"
"이제 여기서 일하면서 벌어야죠."
"쓸데없는 배짱이 좀 있으시네요. 그 쪽이 나 붙여주기라도 할꺼에요?"
"원한다면."
"그나저나 팀장이라면서 굉장히 한가해보이네요?"
"회사에도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이라는 게 있어요."
"누군 회사 안 다녀봤나."
"누가 안 다녀봤다고 했어요?"
"그리고 여기 붙어도 내 실력으로 붙은거니깐 이거로 일억, 아니 일억 오천 퉁칠 생각은 말아요."
"그게 왜 온전한 그 쪽 실력입니까. 내가 어제 직접 찾아가서 안내에, 정보제공까지 해줬는데."
"그래요. 정말 고맙네요. 붙으면 절이라도 굽신굽신 할테니깐 커피나 받아요."

아까부터 커피를 건네고 있었던 여직원을 가리킨 성규가 성큼성큼 커피숍을 나오려는데 우현이 다시 성규를 불렀다.

"뭐요."
"머리 안 세우는게 나을 것 같네요. 사나워보이니깐."
"그래요? 그럼 그 쪽은 숨을 안 쉬는게 나을 것 같네요."

우현이 비웃자 기분이 확 나빠진 성규가 욕을 중얼거리며 커피숍을 나왔다.

"지깟게 부장이면 부장이지, 무슨 사장이라도 돼? 지가 뭔데 날 붙여주기라도 한대? 지가 뭐, 무슨 접착제야? 딱풀이야? 밥풀이야?!"

인상을 팍 쓰자 팔(八)자 눈썹이 더 아래로 내려간다. 혼잣말로 연신 욕을 해대며 지나가는 성규를 한 남학생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자 성규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뭘 꼬라! 디질라고!"

코끼리 발걸음처럼 쿵쿵거리며 멀어지는 성규를 남학생이 황당하단 표정으로 쳐다봤다.


*


"나 왔어."

집안이 잠잠하다. 다들 출근을 한 터라 지이잉-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와 틱틱틱 시계 초침 소리만 조용히 들려온다. 서류가방을 문앞에 던지듯이 내려놓고 부엌 식탁으로 가 보릿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정장을 벗어 케이스에 넣어놓고 얼른 샤워를 마쳤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터는데 아까 우현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머리 안 세우는게 나을 것 같네요. 사나워보이니깐' 우스꽝스러운 말투로 우현을 흉내낸 성규가 수건으로 거울을 퍽 쳤다.

"넌 밥맛도 아니야,짜샤. 밥이 아까워,밥이."

스킨과 로션을 착착착 두드려 바르고 마당으로 나온 성규가 꽃밭으로 향했다.

"에효. 느그들은 어째 맨날 활짝핀 봄이니?"

형형색색으로 피어있는 꽃들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린 성규가 부러움이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너네들처럼 내 인생도 활짝 펴야할텐데 봉우리 상태로 썩어가고만 있네.

"그래도 다행이다. 너네들이라도 피어있어서."

무릎을 짚고 일어나 마당 한 구석에 세워놓았던 훌라우프를 집어들었다.

"살빼야돼,살."

오늘 먹은 카라멜 마끼야또가 198kcal인데다가 시럽을 4번이나 펌핑했으니 봉신 씨와 명수가 퇴근하기전까지는 계속 돌려야될 것 같다.


*


"……."

순재가 뿔테 안경을 쓰고 두꺼운 소설책을 읽다가 불현듯 너무 조용한 집안분위기에 조금은 큰 목소리로 성열을 불렀다.

"성열아, 뭐해?"
"……."

방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다. 소설책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성열의 방으로 다가가 두어번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하얗고 넓직한 방안에 성열은 없었다. 보통때라면 침대에 앉아 큐브를 맞추거나 아니면 순재처럼 책을 읽고 있어야하는데. 방문을 닫고 혹시나 싶어 자신의 방과 우현의 방,그리고 다용도실까지 모든 방의 문을 열어봐도 성열은 온데간데 없었다. 나가는 모습 못 봤었는데. 도대체 얘가 어딜 간거지. 잠시 무언갈 생각하던 순재가 다락방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첫 발을 계단에 올리는 순간, 다락방 문 너머로 '띵'하고 피아노 건반 소리가 들려왔다. 순재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조용하더니 곧 몇 초 안되는 멜로디가 연주되더니 이내 건반 뚜껑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간 순재가 표정을 숨기고 다락방 문을 열었다. 다락방에 하나뿐인 커다란 창문으로 햇빛이 뽀얗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 햇빛을 맞으며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성열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것처럼 가볍고 약해보였다.

"배 안고파? 누나가 떡볶이해줄게. 얼른 내려와."
"……."

성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피아노 의자를 밀어놓고 다락방을 내려갔다. 성열이 나간 뒤 다락방 문을 닫고 나가려던 순재가 하얀 피아노를 한번 돌아봤다. 마치 자기 자신이 그 곳에 서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가슴이 답답해져 얼른 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


"이모,여기 커피."
"땡큐. 시럽 안 넣었지?"
"어. 이모 단 거 싫어하잖아."
"기억력도 좋아."

우현이 건넨 아메리카노를 받아든 소영이 성규의 이력서와 수상서류들을 뒤적거렸다.

"1985년생 김성규. 스물여덟치고는 앳된 얼굴이네. 포토샵했나? 사진이랑 다르던데. 아무튼 두 형제중의 장남.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편모슬하."
"편모슬하라니?"
"너가 추천한 사람인데 너도 몰랐단 말이야? 여기 가족사항에 쓰여있잖아."
"아,아냐. 계속해."
"근데 왜 가짜 면접까지 시킨거야? 니가 추천해주는 사람은 그냥 채용할 수도 있었는데."
"이 사람, 콩으로 메주쑤는거 알면서도 내가 말하면 안 믿을 사람이거든."
"신뢰를 잃었구나."
"암튼 이모가 보기엔 어때? 너무 형편없나?"
"아니, 괜찮아. 수상 실적도 뛰어나고 면접 태도도 성실해. 가장 좋은 게 일단 눈이 반짝반짝 살아있더라구."
"눈?"

그 조그마한 눈이 반짝거려봤자 얼마나 반짝거린다고.

"요즘 사람들같지않게 생동감넘치고 묘한 기를 풍기는 사람이야. 대학만 서율대일 뿐이지, 여기 있는 사람들이랑 견줄만 하겠어. 넌 어때?"
"이모 눈썰미 하나는 끝내주니깐 틀린 말은 안 하겠지."
"그럼 됐네. 언제부터 출근으로 해?"
"내일 당장."
"그렇게나 빨리?"
"김성규씨 돈이 아주 급한 사람이거든. 암튼 오늘 고생많았어."
"나중에 밥이나 사."
"알았어."

우현이 성규의 이력서와 서류들을 챙겨 접무실을 나왔다. 기획부실로 향하며 성규의 이력서를 다시 한번 훑어봤다. 생각외로 훌륭한 이력서다.


*

 

 

 

 

"큰 고모부한테는 좀 기다려보라고 얘기해놨어,일단은."

저녁 식사하던 봉신 씨의 갑작스런 말에 명수와 성규가 봉신씨를 쳐다봤다. 공장으로 처넣어버린다고 으름장을 놓을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갑자기 유들유들해진 봉신 씨의 말투에 명수가 젓가락을 입에 문 채 물었다.

"무슨 일있어?"
"대학교 다닐때 장학금 탔다고 친척들한테 얼마나 자랑을 했었는데 이제와서 큰 고모부 공장에서 일하는거 알면 사람들이 얼마나 너랑 날 비웃겠어. 난 그거 싫어. 나 비웃는건 못참아도 너 비웃는 건 더더욱 못 참아."
"엄마아…."
"그러니까 이 악 물고 취직해 자식아."

봉신 씨의 말에 감동을 먹은 성규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코를 훌쩍인다. 밥그릇을 거의 다 비웠을때쯤, 거실 바닥에 놓여있던 성규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식탁에서 일어나 수저를 든채 거실 바닥에 있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누구지."

모르는 번호인데….

"여보세요?"
[접니다.]
"누구, 아…."

이젠 목소리만 들어도 아는지, 우현이 딱 한마디 했을 뿐인데도 성규의 인상이 팍! 구겨진다.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아냈어요? 짜증나게."
[이력서에 있던데요?]
"제 이력서를 왜 마음대로 열람해요."
[새로 팀에 들어올 직원인데 팀장이 미리 이력서도 못 봅니까?]
"…네? 뭐라구요?"
[내일부터 출근입니다. 9시 출근 8시 퇴근.]
"뭔 소리에요? 알아듣게 말해봐요."
[왜 못 알아들어요? 제가 영어로 말했어요?]
"출근이라뇨? 거기 볼네드로 출근하라구요? 내가 왜요."
[취직됐으니깐요.]
"진심이에요? 진짜 내일부터 출근해요?"
"어머머,그게 무슨 소리야?"

컵을 들고 달려온 봉신 씨가 전화기에 귀를 가져다대려고 하자, 팔로 봉신 씨를 밀어낸 성규가 처음으로 우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기획부실은 4층입니다.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지각하는거 혐오하니깐 시간 맞춰오세요.]

그러더니 전화가 뚝 끊긴다. 얼떨떨한 표정의 성규에게 봉신 씨가 이것 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출근이라니? 뭐야뭐야 얼른 말해봐!"

얼떨떨한 표정에서 점점 기쁜 표정, 그리고 곧 울듯한 표정이 된 성규가 우아악!소리를 지르며 봉신 씨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볼네드 백화점 취직됐대! 내일부터 출근하래!"
"정말? 정말이니?"

서로 손을 붙잡은채 왔다갔다 앉았다 일어났다 난리도 아니다. 그러다 갑자기 성규가 코를 훌쩍이더니 눈물방울이 그렁그렁맺힌다.

"흐어엉. 이제 백수아니야."
"울긴 왜 울어."
"좀 과하다?"

봉신 씨와 명수가 황당한 표정으로 성규를 보았다. 드디어 내 인생의 꽃 봉우리도 슬슬 만개할 준비를 하는 구나.


*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까지 마친 성규가 새벽부터 일어난 봉신 씨가 날카롭게 각을 잡아준 와이셔츠를 입는다. 자신감이 생기니 오늘따라 옷빨도 더 잘 받는 것 같다. 양치를 하며 다가온 명수가 왁스통을 꺼내왔다.

"머리 만져줄게."
"어? 아냐. 오늘은 머리 안 만지려고."
"왜? 첫 출근이잖아."
"그럴 일이 있어."
"그래. 형은 안 세우는 게 낫다니깐."

명수가 왁스통 뚜껑을 닫고 서랍에 도로 집어넣었다. 정장 마이를 걸치고 길쭉한 넥타이까지 능숙하게 맨 성규가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거울을 보며 윙크를 날렸다.

"김성규 출동 준비 완료."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5.


"오늘부터 앞으로 우리와 함께 일할 신입사원입니다."

사무실의 가운데쯤 되는 곳에 서있는 우현과 성규. 스무명 정도되는 직원이 날카로운 눈으로 성규를 위아래로 스캔했다. 성규의 목울대가 움찔거렸다.

"이름은 김성규씨입니다."

성규가 얼른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성규라고 합니다. 같이 일하게 되서 영광이고 앞으로 잘 부탁,"
"그럼 이제 일합시다."

아오, 싸가지. 왜 말하는데 끊고 난리야! 성규가 입을 삐죽삐죽거렸다. 일하자는 우현의 말에 성규를 스캔하고있던 직원들이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뻘쭘하고 무안한 성규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얼른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다른 사람에 비해 휑한 자리이지만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모르겠다. 실실 웃으며 온전한 자신의 자리를 쓰다듬어보는데 우현이 다가와 사원증을 건넨다.

"점심시간은 1시부터 2시 반까지에요. 쉬는 시간은 쉬고 싶을때 쉬면 됩니다."
"진짜요?"
"일은 다 끝내놓고 쉬어야죠."

그럼 그렇지. 성규가 컴퓨터를 켜고 아크릴으로 된 사원증을 목에 걸었다. 자꾸 절로 웃음이 나서 혼자 끅끅거리는데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호원이 먼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넨다.

"잘 부탁해요. 이호원이에요. 사람들은 호 대리라고 부르죠."

호원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확인한 성규가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네,이호원 대리님. 아니, 호 대리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죠…."

그런데 호원이 앉아있는 방석부터 시작해, 모니터에 붙어있는 포스트잇, 손에 쥐고 있는 볼펜, 책상위에 놓인 볼펜통, 일렬로 서있는 파일,마지막으로 마우스 패드까지 모두 보라색이다.

"보라색 좋아하시나봐요?"
"어후, 사랑하죠."
"아아,그러시구나…. 책에서 읽었는데 보라색은 우아함,화려함,풍부함,고독등의 다양한 느낌이 섞여있는 색이래요. 옛날부터 왕실에서 쓰던 색깔로 품위있는 고상함이랑 외로움과 슬픔을 느끼게 해서 예술감, 신앙심을 자아해내기도 하구요. 심리적으로는 두려움을 해소하고 불안한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정신적인 보호 기능까지 한다네요."
"성규씨."
"네?"
"우리 서로 잘 지내봅시다."

호원이 성규의 손을 덥석 잡고 입을 앙 다문채 신뢰섞인 눈빛을 쏘아댔다.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빼낸 성규가 마우스를 잡기도 전에 우현이 다가와 한가득 쌓여있는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성규의 작은 눈이 커다래졌다.

"이,이게 다…."
"당장 급한 서류들이니까 목차별로 다 정리해주시구요, 한 부씩 복사해서 전 직원들한테 나눠주세요. 복사기는 저 쪽."
"참…많네요."
"일하기 싫어요?"
"누가 싫댔어요?"
"동네에선 사회지만 여기는 회사 안이에요. 공과 사는 구분할줄알죠? 적어도 회사안에서 서로에 대한 예의는 지켜주세요."
"예, 팀장님."

성규가 또박또박 끊어말하자 말없이 목차 표를 건넨 우현이 쌩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까 자기소개할때 말 끊은 사람이 예의는 무슨. 어디서부터 손대야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자, 의자를 질질 끌고 다가온 호원이 서류 정리하는 법을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아시겠죠? 맨 위부터 중간까지 하다가 중간부턴 밑에서 뽑아 정리하는게 쉬워요."
"아아,그렇구나. 감사합니다."

마이를 벗어 의자에 걸어둔 성규가 본격적으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손이 빠르시네요."
"아, 원래 손이 재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요."
"몇 센티인지 재볼까요?"
"예?"
"농담입니다. 하하하하."

뭐야,이건 또. 성규가 이상한 개그를 치고 혼자 좋다고 웃는 호원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다시 서류 정리에 집중했다.


*


한편, 기계소리가 가득한 버섯 포장 공장. 굵은 송이버섯들이 워크 벨트를 따라 위생 복장을 한 아줌마들에게 다가오자 빠른 손으로 버섯을 낚아채 박스에 줄을 맞춰 잘 정리해넣는다.
 
"아,맞다. 큼큼…. 우리 아들 취직했잖아~"

머리에 하얀 위생 모자를 쓰고 주황색 고무장갑을 낀 봉신 씨가 싱글벙글 웃으며 하는 말에, 같이 일하던 아줌마들이 잘됐다며 어디에 취직했냐고 묻자 별 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저기 뭐였더라~ 볼네드 백화점?"
"볼네드 백화점? 거기면 대기업에서 나온 백화점아니야?"
"그렇다네? 호호호."
"어머어머, 부럽다."
"그러게. 아휴, 내 아들내미는 아직도 백수인디."
"걱정마, 곧 취직될꺼야~"

봉신 씨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거운 표정으로 버섯들을 정리했다.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


성규씨,이거 팩스로 부탁해요. 이거 복사 좀 해주실래요. 이 서류들 좀 5층에 있는…. 이것도 저기 3층에….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하아…."

책상에 볼을 대고 엎드린 성규가 바들바들떨리는 손을 진정시켰다. 열 손가락 지문에 잉크가 잔뜩 묻어 새까맣게 반질거렸다. 서류정리는 아까 전 끝냈지만 복사와 택배,팩스 심부름을 하느라 다리도 아프고 입도 바짝바짝 말라갔다. 가방에서 니베아를 꺼내 음빠음빠거리며 입술에 바르고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밥먹으러가요,성규씨."
"네? 밥이요? 아아,네!"

오후 1시. 점심시간이었다. 그제서야 배고픔을 느낀 성규가 호원을 따라나섰다.

"회사에 사원식당이 있어서 따로 나가서 안 먹어도 되요."
"우와,정말요?"
"나가서 먹을 사람은 나가서 먹어도 되는데, 회사에서 주는 점심도 꽤 맛좋고 메뉴도 다양하거든요. 그 대신 사원증 잃어버리면 못 먹으니깐 사원증 꼭 챙기셔야해요."
"아! 사원증 잠깐 풀러놓고 왔는데! 잠시만요!"

성규가 다시 후다닥 사무실로 들어가 책상위에 올려놨던 사원증을 집어들었다. 다시 나가려는데 우현이 앉아있는 쪽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직까지도 일하고 있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가 천천히 다가가 말을 건넸다.

"저기 티,팀장님."

아직까지 입에 안 붙는 팀장님소리를 하자 우현이 고개를 슥 들어 성규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에요."
"점심시간인데 점심 안 먹나해서요."
"……."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우현이 그제야 점심시간인걸 알고 마이를 걸쳤다. 완전 일벌레네. 우현이 나오든말든 먼저 사무실을 나온 성규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호원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사원들이 먼저 우루루 내려가고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우현이 옆에 와 선다. 호원과 반말로 대화를 주고 받는 걸보니 원래부터 알던 사이같은데 그 사이에 껴있자니 여간 뻘쭘한게 아니다.

"그나저나 성규씨는 몇 살이에요?"
"저요? 전 85년생 스물여덟살이요."
"와, 저희보다 두 살이나 더 많네요?"

네,그렇게 됐네요. 이제는 나이얘기에도 꽤 여유로워졌다.

"손으로 땅바닥 기어다녔어요?"

우현이 성규의 시커먼 손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루종일 복사에 인쇄해봐요. 안 시커멓고 배기나. 어? 엘리베이터왔다. 호대리님 먼저 타세요."
"호잇."

호원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타고 뒤따라 성규가 타려는데 우현이 성규의 어깨를 툭 치고 먼저 엘리베이터를 탄다. 콧구멍으로 후우 하고 뜨거운 숨을 뿜은 성규가 우현을 한번 째려보며 엘리베이터 중간에 섰다. 2층에 위치한 사원식당은 말로만 식당이지, 고급 뷔페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우와."

입구에 있는 세면대에 손을 씻고 호원과 우현이 능숙하게 접시와 수저를 뽑자 성규도 얼른 뒤따라 손을 씻고 마찬가지로 접시와 수저를 뽑았다. 뷔페식으로 되어있는 음식을 보자 성규의 두 눈이 번쩍 트인다.

"완전 레스토랑이네요."
"그쵸?"
"오오, 해산물도 있어."

역시 돈많은 회사는 스케일부터 다르다니깐. 음식을 담은 식판을 들고 적당한 자리를 찾아앉자 자연스럽게 호원이 다가와 앉는다. 호원까진 그러려니 생각한 성규가 한 숟갈 막 뜨려는데 우현이 호원의 옆자리에 식판을 내려놓는다. 아, 부담스럽게 같이 먹어야하는거야?

"할 말 있어요?"
"아니에요. 맛있게 드시라구요."

성규가 떫은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반찬으로 나온 불고기를 집어먹었다. 와, 맛있다. 한식점에서 전문적으로 파는듯한 불고기의 맛이 난다. 허기가 졌던 성규의 양 볼이 음식으로 빵빵해졌다. 한참 맛나게 먹던 성규가 우현의 식판 모서리에 따로 얹어져있는 당근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당근 안 드세요?"
"네. 안 먹습니다."
"이 맛있는 걸 왜 안 드세요?"

우현이 내가 왜 그걸 말해야하냐는 표정으로 성규를 슥 쳐다보자 입안에 있던 음식물을 우물우물 씹어삼킨 성규가 당근의 효능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당근이 얼마나 몸에 좋은데요. 팩틴이라는 식물 섬유가 풍부해서 배변활동도 도와주고 몸안에 있는 독소나 세포손상을 예방에 줘서 노화예방에도 아주 좋아요."
"그럼 김성규씨나 많이 드세요. 노화예방하려면."

이걸 그냥 숟가락으로 대갈통을 한 대 확! 성규가 꾸욱 참으며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성규에게 당근 효능을 듣고 당근만 골라먹던 호원이 진심어린 말투로 말했다.

"성규씨 되게 유식하시네요? 보라색도 그렇고 이 당근도 그렇고."
"유식까지는 아니고 그냥 책 읽는 걸 좋아해서요."
"아아…. 근데 우현이랑 아는 사이인가봐요?"

호원의 말에 성규와 우현이 서로를 마주봤다. 예, 알죠. 아주 잘 알죠.

"저희 바로 옆집 살아요."
"아, 새로 이사했다던 그 집이 성규씨네 옆집이야?"
"유감스럽게 그렇게 됐네."
"팀장님."
"왜요,김성규 사원님."
"…관둬요. 내 입만 아프니깐. 호대리님. 먼저 올라갈게요."

밥을 싹싹 비운 성규가 식판을 반납하고 먼저 식당을 나갔다.

"너 왜 그렇게 틱틱 시비걸어?"
"내가 언제."
"김성규씨 좋은 사람이야."

보라색을 예찬해줬다고,보라색을. 나의 보라색…. 호원이 중얼중얼거리며 밥을 입안에 꾸역꾸역밀어넣었다.


*


퇴근을 하기전까지도 오로지 복사기와 팩스기 사이에서만 왔다갔다거렸다. 마치 심부름하는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손톱도 시커멓네."

첫 출근은 언제나 힘든 법이지만 간만에 일을 해서 그런지 온 몸 여기저기가 콕콕 쑤셔왔다. 직원들이 모두 다 나가고 마지막으로 마이를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성규가 동시에 같이 일어난 우현을 보고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첫 출근 수고하셨어요."

대답은 커녕 눈길조차 주지않은 성규가 들으라는듯이 콧노래를 부르며 사무실을 나섰다. 또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 마주선 성규와 우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앞서있던 직원들이 우루루 몸을 싣는다. 뒤따라 우현과 성규가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삐이이 - 하는 경량초과음이 들려온다. 우현과 성규가 서로 내리라는 식으로 힐끗힐끗 쳐다보다가 결국 우현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그 모습을 보고 풉하고 비웃던 성규가 우현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경량초과음이 멈추질않자 표정을 굳히며 자신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그제서야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층수가 하나씩 내려가기 시작한다. 거울같은 엘리베이터의 문으로 우현을 보자 입가에 꼴좋다라는 식으로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성규가 뒤를 홱 돌자 우현이 얼른 입가에 웃음을 거둔다.

"왜 비웃어요?"
"안 비웃었는데요."
"비웃었잖아요."
"안 비웃었어요. 그냥 웃은 겁니다. 웃는 것도 허락맡고 돈내가면서 웃어야합니까?"
"그럼 그렇게 웃지 좀 마세요. 그게 얼마나 기분 드럽게,"

성규가 말하는 도중에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우현이 듣기싫다는 표정으로 휙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뒤따라 쿵쾅쿵쾅 성규가 올라타자 우현이 인상을 구긴다.

"엘리베이터 고장나요. 쿵쾅거리지마요."
"잘 나가는 회사니깐 엘리베이터도 튼튼하겠죠."
"무게에 비례해요."
"혹시 도마뱀이세요?"
"제가 도마뱀같이 생겼습니까?"
"아뇨. 자꾸 말을 뚝뚝 잘라먹잖아요. 뭐가 무게에 비례하는데요."
"몸무게가 무거운 사람이 뛸 수록 엘리베이터가 고장날 위험도 증가하죠. 그래서 비례관계."

이거 내가 무겁단 소리아냐?! 성규가 허!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제 몸무게가 몇인지, 팀장님이 소수점자리까지 정확히 아세요?"
"저보단 무겁겠죠."
"…말을 말아야지."

1층에 내린 성규와 우현. 성규는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향했고 우현은 주차장으로 가 자신의 벤츠를 끌고나왔다. 사내대장부 걸음으로 걷는 성규의 옆에 우현의 벤츠가 멈춰섰다.

"타요."
"싫…."

싫어요,라고 말하려다가 저번처럼 진짜 지나쳐가버릴까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조수석문을 열고 차에 탔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하고 우현이 튼 라디오에선 분위기좋은 째즈음악이 흘러나왔다. 기분좋게 듣는 우현과 달리, 성규는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무슨 이런 음산한 노래를 들으면서 운전을 해요? 딴거 틀어도 되죠?"

우현이 싫다고 하기도전에 얼른 다른 주파수 채널을 눌렀다. 하필 나오는 노래가 박진영의 엘리베이터다.

[엘리베이터안에서 우린 사랑을 나누지 그 누구도 모르게 음~]
"……."
"…죄송해요."

성규가 다시 손을 뻗어 째즈음악이 나오던 채널로 주파수를 바꿨다. 한참 영어로 씨부렁거리는 째즈음악을 들으며 창밖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성규가 갑자기 끼어드는 스포츠카를 보고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우현의 어깨를 팍팍 내려쳤다.

"어어어! 조심해요!"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얘진 우현이 얼른 브레이크를 잡았다. 덕분에 조수석 앞 서랍에 머리를 '쿵'하고 들이박은 성규가 울상을 지으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아,아파라. 우이씨, 뭐 저딴 새끼가 다 있어! 저 또라이시키!"

반쯤 운전석으로 몸을 들이민 성규가 클락션을 빵빵 거칠게 내려치며 눌러댔다.

"뭐해요! 얼른 출발…."
"……."
"…이봐요,팀장님. 출발 안 하고 뭐해요?"
"…하아,하아."
"팀장님?"

얼굴이 잔뜩 질려서 숨쉬기가 힘든 듯, 거친 호흡을 뱉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가 깜짝놀라 우현을 잡아흔들었다. 

"괜찮아요? 팀장님!"
"…허억…허억."

핸들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은 우현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듯 보였다. 도로 한 가운데 멈춰선터라 뒤에 서있던 버스와 차들이 무섭게 클락션을 울려대자 마음이 급해진 성규가 우현의 뺨을 찰싹찰싹 내려쳤다.

"정신 좀 차려봐요,좀! 팀장님! 팀장님! 야! 남우현! 눈 좀 떠보라고, 이 자식아! 에이씨!"

결국 조수석에서 내린 성규가 운전석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벨트를 푼 다음 우현을 끌어내렸다. 뒤에 차들도 우현이 끌려나오는 모습을 보자 예사 상황이 아닌 걸 알았는지 별말없이 다른 차선으로 바꾸어 지나간다. 끙끙거리며 우현을 뒷자석에 태운 성규가 얼른 운전석에 올라탔다. 무슨 소리냐고? 이래뵈도 대학때 운전면허는 따놨걸랑. 근데 차가 없어서 면허만 따놓고 운전해본건 동우 차로 한 두…번 있었나?

"이,일단 벨트를 메고 의,의자 조절."

주행시험 볼때를 떠올리며 의자를 조절한 성규가 운전대를 꽉 잡았다. 차가 벤츠라서 그런지 더 긴장된다. 사고나면 이거 장난아니게 깨질텐데. 심호흡을 한 성규가 엑셀을 살며시 밟자 느릿느릿 차가 움직이기시작한다.

"으허어, 움직인다. 어떡해,어떡해."

동우를 부를 걸 그랬나? 하지만 이미 차는 천천히 속도를 내기시작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벤츠를 다른 차들이 얼른 가라는 식으로 빵빵대자 성규가 창문을 열고 욕을 뱉었다.

"빵은 빵집에서 찾아 이 시키들아! 빵빵 좀 그만해! 진짜 디진다!"
 
그제서야 빵빵거리는 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3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한 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했다. 우현의 집앞에 멈춰선 성규가 그제서야 한숨을 쉬며 운전대에 머리를 쿵하고 내려놓았다.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잘 안난다. 그래도 안하다가 해본 실력치고는 전문 드라이버 수준인데? 역시 카트라이더를 간간히 한 게 큰 도움이 됐군.

"…여기…어디에요?"

낄낄거리며 웃던 성규가 뒤에서 부스스 일어나는 우현을 보고는 정신이 확 들었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람 놀래키는 것도 적정선이 있지, 갑자기 그렇게 기절을 하면 어떡해요! 내가 운전면허만 없었어봐!"
"여기가 어디냐구요…."
"어디긴 어디에요! 짜증나게 붙어있는 팀장님 집이랑 우리 집이지! 아오,진짜 내가 여기까지 바짝 쫄면서 운전하고 온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거리네. 왜 갑자기 기절을 하고 그래요. 사람 요절할 뻔 했잖아요! 차 한 대 끼어든거 가지고 기절까지 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예?"

우현이 아무 말 없이 좌석에 몸을 기대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어딘가가 불편한 듯 주먹으로 가슴을 쳐대며 기침을 하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가 짐짓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심장병이라도 있어요?"
"아뇨. 미안합니다."

당연히 미안해야죠. 장가도 못 가보고 숨질 뻔 했는데. 성규가 투덜거리며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호흡을 가다듬은 우현이 성규를 따라 차에서 내리자마자 비틀거리며 주저앉으려던걸 성규가 간신히 붙잡아세웠다.

"어어! 진짜 괜찮은거에요?"
"…네."
"얼굴 아직도 수제비 반죽같이 하얘요."

이 와중에 수제비 반죽에 비유하는 성규의 말에 우현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비웃는 것 보니 좀 괜찮은가보네요. 대리운전비 받으려다가 팀장님 상태 메롱한 것 같아서 그냥 스킵해드릴게요. 내일 뵈요."

성규가 대충 목을 숙여 인사를 한 뒤 대문으로 향해 초인종을 눌렀다. 대문이 열리고 집안으로 들어가기전 아직도 차에 기대어 서있는 우현을 힐끗 돌아본 성규가 의아한 표정으로 대문을 철컹 닫았다.


*


"첫 출근 어땠어? 싹싹하게 굴었어?"
"걱정마. 나 배고프다. 밥줘."
"응. 너 주려고 엄마가 훈제 오리고기 사왔어."
"헐. 내 생일때도 안 해주던 오리괴기."

명수가 질투섞인 목소리로 투정을 부리며 식탁에 앉았다. 까만 손을 씻고 식탁에 앉은 성규가 명수를 향해 메롱을 해보이며 브이를 하자 명수가 봉신 씨 몰래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발로 명수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먹는데 뒤늦게 거실 마루 한편에 놓여있는 종이가방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다 뭐래?"
"아아,맞다. 너 그런 백화점으로 출근하려면 그 후줄근한 정장으로는 안되겠다싶어서 몇 벌 사왔어."
"히익! 이거 다 비싼 브랜드인데 어떻게 샀대."
"이모들한테 자랑하니깐 금방 돈 보내주더라. 옷 하나 사입히라고."

하긴 이모들은 다 잘 사니깐. 성규가 정장들을 챙겨 방안에 넣어두고 다시 식탁에 와 앉았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은 어때?"
"그냥 그래. 자기할일에 바쁘지,뭐. 아, 내 옆자리에 앉은 이호원이라는 사람은 대리인데 나한테 좀 잘해줘."
"다행이네. 직원은 대충 몇명이야?"
"스무명 정도."
"꽤 많네…. 상사한텐 잘 보였어?"
"상사?"

상사라하믄…남우현? 성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비비드한 옐로우 컬러의 머스타드소스에 훈제오리를 콕 찍어 입안에 넣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사가 우리 옆집살아."
"옆집? 그 박우현인가 뭔가하는 총각?"
"박우현이 아니라 남우현. 기획부 부장 겸 팀장이래."
"왠지 벤츠몰고 다닐때 부터 알아봤다니깐. 나도 벤츠사줘,엄마."

봉신 씨가 명수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무튼 잘됐네,성규야. 친하게 지내. 그래야 회사 생활 조금이라도 편해지지."
"그 또라이, 아니 그 팀장이랑 친해지느니 차라리 제갈성규로 성씨를 바꾼다. 방금전까지 내가 얼마나 스펙터클한 퇴근길을 밟았는지 엄마랑 명수는 눈곱만치도 모를거야. 아우, 어깨결려."

잔뜩 긴장한채로 한 시간 동안 운전을 했더니 어깨가 잔뜩 결렸다. 그나저나 아직도 밖에 서있으려나? 성규가 거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봤지만 대문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 잘…들어갔겠지,뭐. 내 알바가 아니니깐.


*


다음날 아침. 이젠 명수와 나란히 출근준비를 하는 성규가 새로 사온 정장을 입어봤다.

"이거 핏 죽인다."
"올…. 귀티 좀 나는데?"
"내가 한 귀티하지. 형 먼저 간다! 엄마, 나 갔다올게."
"잠깐잠깐! 이거."

봉신 씨가 종이가방 두 개를 들고나와 성규에게 건넸다.

"어우,묵직해. 이게 다 뭐야?"
"생과일 주스야. 일회용 병에 담았으니깐 사무실 직원들한테 돌려. 스무병이랑 넉넉하게 다섯병 더 넣었으니깐."
"힘들게 이런 거 왜해…. 안 해도 되는데…."
"아들 화이팅!"

눈물이 날 것 같아 억지로 활짝 웃은 성규가 주먹을 쥐어 화이팅을 해보이곤 씩씩하고 대문을 나섰다. 종이가방이 좀 묵직하긴 했지만 마음만은 날아갈듯이 가벼웠다. 저 멀리 정류장이 보일때쯤, 뒤에서 갑자기 클락션 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깜짝이야! 놀랬잖아요! 사람 놀래키는 게 취미에요?"
"취미까지는 아닌데."

돌아보니 우현이다. 아,잘됐다. 나 좀 탈게요. 당당하게 뒷좌석문을 열고 종이가방을 실은 성규가 빙 돌아와 조수석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보는데 이상하게 차가 출발을 하지않는다.

"왜 안가요? 동전 넣어야 가요?"
"벨트 안 맸잖아요."
"아아."

성규가 벨트를 매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 출발한다. 그리고 시작된 무거운 정적.

"……."
"……."
"……."
"……."

생색내는 건 아닌데요, 고맙다는 말은 하면서 삽시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성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제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요? 만약에 저 없었으면 팀장님 어쩔 뻔 했어요?"
"미안하다고 했잖습니까."
"미안한 건 갑자기 차 멈춰서 사고날뻔한게 미안한거구요. 장롱면허인 제가 집까지 데려다드린거에대한 고마움을 표현해야죠."
"장롱면허에요?"
"큼…네."
"운전 안 한지 몇 년이나 됐는데요?"
"…스무살때 친구꺼로 몇 번 해보고…거의 8,9년만에 해봤어요."
"김성규씨 먼저 사과하세요."
"제가 왜요."

8,9년만에 하는 운전실력으로 제 벤츠 몰았잖아요. 사고났으면 어쩔뻔했어요. 우현의 말에 성규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을 꺼낸 내가 머저리지.

"…뒤에 저 종이가방은 뭐에요."
"폭탄이요. 사무실 터트려버리려구요."
"……."
"…엄마가 사무실 직원들 주라고 생과일 주스 만들어주셨어요."
"잘 됐네요. 목 탔었는데 줘봐요."

궁시렁거리며 몸을 돌려 종이가방에서 주스 한 병을 꺼내 우현에게 건넸다.

"이런 병도 따로 팔아요?"
"마트가면 다 팔아요. 안 받고 뭐하세요?"
"운전하는데 두 손 놓고 병 땁니까?"

한숨을 쉰 성규가 뚜껑을 열고 우현에게 건넸다.

"…맛있네요."
"당연하죠. 누가 만든건데."
"오늘 회식이 있을거에요."

회식이란 말에 성규의 귀가 쫑긋거렸다.

"매출 신장에 대한 회식도 할겸 김성규씨 환영식도 그냥 같이하려구요."
"꼭 하기싫은데 하는 것 처럼 말하시네요."
"피곤한 건 질색이라."
"고깃집으로 갈꺼면 제가 원하는 대로 가면 안돼요?"
"왜요?"
"친한 친구가 고깃집을 하거든요. 장동牛 고깃집이라고 맛좋고 유명해요. 이 정돈 해줄 수 있잖아요."
"그럼 그렇게 해요. 스무명정도 가니깐 미리 얘기해놓는게 좋을거에요."
"네."

다시 창밖을 보려던 성규가 어제 일이 생각나 물었다.

"어젠 왜 그런거에요?"

성규의 질문에 우현이 아무 대답없이 회사 주차장으로 핸들을 돌린다.

"…운전병이에요?"
"……."
"아니면 급성 발작인가."
"원래 그렇게 질문을 많이 하는 성격입니까?"
"이런 말이 있죠. 제대로 질문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정보수집기술이다."
"이런 말도 있어요. 알면 다친다. 내려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의 성규가 종이가방과 자신의 서류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직원들이 우현의 차에서 내리는 성규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신경쓰지않고 후다닥 회사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성규씨,좋은 아침."
"안녕하세요,호대리님."
"그건 뭐에요?"
"아, 여기요."

종이가방을 보며 묻는 호원에게 병 하나를 건넸다.

"주스네요? 직접 산거에요?"
"아뇨. 어머니가 직원분들 드리라고 직접 만드셨어요."
"이걸 직접이요? 우와.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아이,뭘요."

아까 먼저 마셨던 우현을 제외한 사무실 직원들에게 하나씩 나눠준 다음, 종이가방안에 남아있는 병을 꺼냈다. 딱 두 병남네. 하나는 내가 먹고 또 하나는….

"팀장님."
"아까 먹었는데요?"
"하나가 남네요. 그냥 드세요."
"고마워요."

빈 종이가방을 접어 가방안에 잘 집어넣었다. 하는 일이 복사와 서류정리뿐인지라 컴퓨터를 켜지않아도 되지만 뭔가 세련된 분위기를 내보고싶어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한참 밀린 서류정리와 심부름을 하며 일을 하는데 호원이 자기 쪽으로 와보라는 손짓을 했다.

"네, 호 대리님."
"이거."
"예?"
"이거이거."

호원이 건넨건 포도맛 사탕이었다. 저 주시는거에요? 성규가 사탕을 받으며 묻자 호원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사탕도 보라색이네요."
"그렇죠. 하하하하."

저 국어책뺨치는 웃음소리는 뭐람. 입이 좀 텁텁했는데 잘 됐다싶어 얼른 알사탕 껍질을 까 입안에 넣었다.


*


"나야."
[어어. 왜?]

점심을 먹은 후, 회사 앞 편의점에서 구입한 칫솔과 치약으로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던 성규가 핸드폰을 꺼내 동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가게 문 열지?"
[당연하지. 월요일빼고 다 여는거 알면서.]
"나 취직한 건 알고 있나?"
[이열~ 취직했어? 어디? 편의점? 공장? 설마 호스트,]
"볼네드 백화점."
[뭐? 잠깐, 뭐라고?]
"볼네드 백화점!"

성규가 온몸을 베베 꼬며 실실 웃었다.

[볼네드 백화점이라했어, 방금?]
"그래. 귓볼할때 볼! 네네치킨할때 네! 드러워할때 드! 아, 더러워인가? 아무튼 볼네드!"
[진짜? 와. 완전 설상가상이네.]
"…지금 이 상황에 적절한 사자성어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취직했어."
[그거 자랑하려고 전화한거야?]
"아, 그게 아니라 오늘 우리 사무실 회식이 있는데 너네 고깃집으로 가려고."
[나야 좋지. 몇 명 정도?]
"스무명 정도니깐 테이블 자리 좀 만들어줘. 퇴근시간은 8시."
[알았어.]
"내가 추천해서 가는거다? 알지?"
[생색은. 끊어. 영업준비하느라 바빠.]
"알았숑! 좀 이따 봐."

전화를 끊은 성규가 입안에 가득한 거품을 퉤하고 뱉었다.

"아아아왈와아아…퉤!"

맑은 물로 가글을 하는데, 갑자기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저기요,하는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가글하던 물을 삼킨 성규가 화들짝 놀라며 칸막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누,누구세요!"
"…접니다."
"저가 누구…팀장님이세요?"
"…네."
"아우, 안에 있으면 있다고 인기척을 해야할 거 아니에요! 똥통에 빠져죽은 귀신인 줄 알았네."
"김성규씨는 볼일보면서 나 여기 있어요,하고 소리치면서 볼일봅니까?"
"아무튼요! …근데 왜 불렀어요?"
"……."
"팀장님?"
"저…."
"네. 말씀하세요."

칫솔을 탁탁 털어 물기를 턴 성규가 마지막으로 입을 헹궜다.

"휴지…좀 갖다주실래요."

칸막이안에서 들려오는 우현의 말에 푸흡!하고 거울에 물을 뿜었다.

"휴지 없어요?"
"…네."

우현이 욕을 중얼거리며 텅텅 빈 휴지걸이를 잡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렸다. 반면 칸막이 밖의 성규는 아주 신이 잔뜩 났다.

"아유, 없으면 전화라도 하시지…."
"핸드폰. 책상에 위에 있어요."
"근데 팀장님. 제가 당근에 팩틴이라는 섬유가 배변활동에 좋다고 말했죠? 지금 냄새 완전 고약한 거 알아요? 어디서 한겨울 동치미 썩는 냄새가 나네."

성규가 입을 틀어막고 키득거렸다. 벌써 변기에 앉아있은지 20분이 지난 우현은 저려오는 다리를 툭툭 두드리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잔말말고 휴지나 갖다주세요."
"네,팀장님. 근데 엠보싱있는걸로 드려요, 아님 없는걸로 드려요?"
"그냥 아무거나 가져오세요."
"네. 아,참.빨간 휴지 드려요, 파란 휴지 드려요?"
"김성규씨."
"알았어요. 갑니다,가요. 휴지갖고 올테니깐 조금만 기다리세요!"

화장실을 나온 성규가 사무실 테이블에 있던 휴지를 들고 우현이 있는 화장실 칸막이 앞으로 향했다.

"휴지가 왔어요~ 보드랍고 깨끗한 휴지가 왔어요~ 문 좀 열어봐요."
"그냥 이 밑으로 주세요."
"쯧. 다음부턴 확인하고 싸세요. 여기요."

칸막이 밑으로 휴지를 넣어준 성규가 키득키득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가방에 칫솔과 치약을 넣고 십분정도남은 점심시간을 즐기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고 손에 물기를 털며 들어오는 우현이 보인다. 성규가 씨익 웃으며 시선을 보내자 우현이 고개를 홱 피하며 자리에 가 앉는다.

"꼴 좋다. 있는 척 다하더니 오늘 제대로 깨졌네."

아유,꼬셔. 쌤통이다. 성규가 흥얼거리며 책상위에 있는 서류들을 정리한다. 출근한지 이틀밖에 안됐지만 다른 회사보다 빠르게 적응이 되었다. 같은 사무실 직원들은 자기 할일에 바빠 성규에게 심부름외에는 별 말을 걸지않았고 그나마 호원이 시시콜콜한 농담을 하며 성규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사실 자기가 한 농담에 자기 혼자 빵터져서 웃는 호원이 귀찮고 개뿔딱지 웃기지도 않았지만, 어쩌랴. 자신은 신입사원이고 호원은 대리인데 억지로 웃어주는수밖에.


*


피곤하다며 빠진 4명을 제외한 기획부 직원들이 각자 차에서 내려 고깃집 안으로 들어갔다. 동우가 미리 말해놓은 성규의 인상착의를 알아본 알바생이 테이블 다섯개를 붙혀 만든 기다란 테이블로 기획부 직원들을 안내했다. 고깃집 안을 두리번거린 성규가 알바생에게 물었다.

"동우가 안 보이네요?"
"아까 꼬마애가 사장님 하얀 남방에 냉면그릇을 엎었거든요. 옷갈아입고 오신다고 아까 가셨으니 이제 곧 들어오실거에요."
"네,고마워요."

알바생에게 싱긋 웃어준 성규가 빈 자리에 앉으려는데 우연인지, 아니면 하늘의 고약한 장난인지는 몰라도 하필 호원의 옆자리이자 우현의 바로 앞자리만 비어있다. 편하게 먹으려고 했는데…. 시큰둥한 표정의 성규가 꾸물꾸물 우현의 앞자리에 앉았다. 호원이 가게를 한번 둘러보더니 감탄을 하며 성규에게 물었다.

"여기가 성규씨 친구네 고깃집이에요?"
"네. 친구 이름 그대로 장동우 고깃집이에요."
"장사 진짜 잘 되네요. 테이블이 꽉 찼네."

테이블이 꽉 찬 건 물론이고, 미리 예약을 하지않고 찾아온 손님들은 자리가 없어 야외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

"……."
"……."
"팀장님."
"네."
"당근 많이 드세요."
"시끄럽습니다."
"전 정말 팀장님의 건강이 너무 염려되서 하는 말이에요."

인간은 다섯가지의 즐거움이 있어요. 성규가 손가락 다섯개를 쫙 펴보이며 말하자, 우현과 호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쳐다봤다.

"첫번째. 먹을때의 즐거움. 두번째. 잠을 잘때의 즐거움. 세번째. 사랑을 할때의 즐거움. 네번째. 살아있음의 즐거움."
"……."
"마지막 다섯번째."
"……."

배변의 즐거움. 이 말을 들은 우현은 헛기침을 하며 물을 들이켰고 호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죠. 배변도 즐거움에 속하죠'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현이 날카로운 눈으로 성규를 흘기자 성규 역시 지지않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우현을 쳐다본다. 밑반찬이 놓여질때쯤 저 멀리 하얀 남방에서 보라색 후드티로 갈아 입은 동우가 고깃집안으로 들어온다.

"어,동우다."

자리에서 일어난 성규가 동우에게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호원과 우현의 시선이 그 쪽으로 향한다. 조잘거리며 이야기를 하는 성규와 동우에게서 눈을 뗀 우현이 자신의 빈잔을 호원에게 들이밀었다.

"나 물 좀."
"……."
"이호원. 나 물 좀 따라달라고."

우현이 두 번 씩이나 말했는데도 호원의 눈은 보라색 후드티를 입고 있는 동우에게로 향해있었다.

"우현아."
"물이나 따르라고."
"사랑에 빠지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는 줄 알아?"
"무슨 소리야 갑자기…. 뭐 대충 따지면… 일주일?"
"난 방금 알았다."

더도말고 딱 2초면 돼.


*


두 시간 정도의 회식이 끝나고 성규는 완전히 졸도를 했다. 직원들이 따라주는 술을 주는대로 받아마시다보니 일어난 참사였다. 동우가 술에 떡이 되어 테이블에 널부러져있는 성규에게 다가왔다. 성규의 하얀 볼을 착착 때려보더니 우현에게 묻는다.

"얘 대충 얼마나 마셨어요?"
"세어보진않아서 모르겠는데 주는대로 먹더군요."
"얘 주량이 한 병 될까말까인데…. 야,김성규! 일어나봐."
"푸르르르."

추욱 늘어진채 푸르르 푸르르 입술만 풀고있는 성규를 우현이 번쩍 일으켜세웠다.

"김성규씨. 정신 좀 차려봐요."
"으으…."
"…일단 제 차에 태웁시다."

빗속의 악몽이 떠오른 우현이 뒷자석 문을 열고 성규를 태운뒤 고깃집안에서 꺼내온 검은 비닐봉지를 성규의 입에 마스크처럼 매달았다. 직원들이 하나 둘씩 고깃집을 빠져나가자 동우가 소지품을 놓고가지않았을까하는 마음에 직원들이 앉았던

자리를 살폈다. 

"……."
"아,뭐 놓고 가신 거 있으세요?"

테이블 곁에 서서 두 손에 박하사탕을 가득 쥔 채 서있던 호원이 동우의 물음에 입술을 우물쭈물거리다가 곧 '그 옷, 되게 잘 어울려요'하고 말하더니 후다닥 고깃집을 뛰쳐나간다.

"…옷?"

동우가 자신의 차림을 살폈다. 브랜드도 없는 이만원짜리 싸구려 후드티인데….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답답한 기분에 눈을 뜨니 온 사방이 컴컴했다. 회식한 것 까진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집에 왔는지는 도통 생각이 안 난다.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와 거실 마루로 향했다. 누군가가 아직 안 자는 건지 주방 불빛이 환히 켜져있었다. 근데 뒷 모습이 남자다. 누구지? 명수라기엔 머리도 짧고 키도 작은데…도둑인가? 간질거리는 볼을 긁으며 누구세요,하고 묻자 놀랍게도 고개를 돌린 남자는 성규의 아버지였다.

"아부지!"

성규가 깜짝 놀라며 가스레인지앞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는 아버지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아부지 뭐해,여기서!"
"욘석아. 내 집인데 내가 맘대로 들어오지도 못하냐?"
"아니 아,아부지는 십년전에…."

놀라지마.꿈이다. 아버지가 계란을 라면 냄비에 넣으며 하는 말에 성규가 얼빵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꿈이라고?"
"그래,꿈. 얼른 비켜. 뜨거우니깐."

라면 냄비를 식탁에 내려놓은 아버지가 성규 몫의 젓가락도 꺼내왔다.

"엄마는?"
"방안에서 자고 있어. 얼마나 깊게 자는지 꿈에 들어가려고 해도 못 들어가겠더라. 얼른 먹어. 숙취엔 라면이 최고니깐."
"으응."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의 성규가 뜨거운 라면을 후후 불어 입안에 넣었다. 아무 맛도 나질 않았다.

"진짜 꿈이네…."
"자식. 의심은."

푸스스 웃던 성규가 문득 자신의 옆 침대에 있는 명수에 대해 물었다.

"명수한테는 갔다온거야?"
"아니. 명수한테는 못 가."
"왜?"
"다 이유가 있으니깐 묻지말어."
"……."
"성규야."
"응,아부지."
"…힘드니?"

많은 뜻이 함축된 말에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아부지."
"그래,성규야."
"…그냥…그냥 너무 힘들어. 아부지."
"뭐가 그렇게 힘들어?"
"사는게 어려워서…그래서 너무 힘들어."

아직 철들려면 멀었네. 아버지가 조용히 웃으며 성규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러나 손이 닿는 느낌은 나지않았다.

"성규야."

고개를 숙인 성규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아빠가 부르면 대답해야지."
"…으응."
"가장 큰 위험은 말이다. 위험이 없는 삶이야."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성규가 고개를 들었다.

"좋은 일이 오기전엔 위험이 먼저 오는 법이거든. 왜냐? 널 테스트 해보려고."
"……."
"그 위험을 이겨내면 그만큼의 좋은 일이 오는거구 만약에 그 위험을 이겨내지못하면 하늘이 딱 정해줘. 이 아이는 아직 이 위험을 넘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않구나,하구."
"……."
"무슨 말인지 알지?"

성규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사내자식이 울긴 왜 울어."
"…아부지."
"왜."
"아부지는 하늘에서 행복해?"

성규의 질문에 아버지가 잠시 시간을 보더니 식탁에서 일어났다.

"아빠 가봐야겠다."
"벌써? 벌써 간다고?"

명수가 널 깨우려고 안간힘을 쓰잖냐. 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현관에 있던 구두를 신고는 마당으로 나갔다. 눈물을 훔치고 뒤늦게 일어난 성규가 아버지를 따라나가려던 순간,

"아주 가지가지한다."

명수의 찰진 손바닥이 성규의 엉덩이를 내려쳤다.

"웃다가 울다가. 꿈에서 시트콤찍냐?"
"……."

아침이다. 성규가 와이셔츠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팔짱을 한 채 자신을 보고 있는 명수의 두 눈엔 한심하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어제 기억이나 나냐? 이젠 형은 회사는 짤린거나 마찬가지야. 얼레리 꼴레리~ 짤렸대요~ 짤렸대요."
"명수야."
"왜, 못난아."
"꿈에 아부지 왔다갔다."
"…어?"
"예전 그 모습 그대로더라."
 
침대에서 내려온 성규가 터덜터덜 화장실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명수가 씁쓸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아,속쓰려…."
"얼른 이거 먹고 속차리고 회사가."

성규가 콩나물 해장국을 호호 불며 웃었다.

"진짜 취직하니까 대우가 달라지는구나. 해장국도 만들어주고."
"시끄러. 회사가서 옆집 팀장총각한테 싹싹 빌어. 어제 일만 생각하면 내가 아주 그냥…어휴."
"어제? 어제 왜…."

잔뜩 까치집을 지은 머리를 헤집으며 어제 기억을 떠올렸다. 동우네 고깃집에서 회식을 한 것 까진 기억이 나는데….

"내가 뭐 실수했어?"

그 말에 밥상을 차리던 봉신 씨와 방에서 나오던 명수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왜왜! 무슨일인데?

"설마 쥐어패기라도 했어? 그럼 다행인데."
"다행? 다행 좋아하시네. 어제 형이 팀장아저씨 정장에 잔뜩 토했어."

성규의 손에 들려있던 숟가락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방바닥에 떨어졌다.


*


제발 마주치지 말아라. 먼저 출근했어라,제발,제발,제발. 성규가 대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우현의 차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안 보이는 것 같긴 한데. 좀 더 고개를 내빼고 좌우를 살핀 다음에야 조심스럽게 대문을 나왔다.

"…에이씽,난 몰라잉."

성규가 잔뜩 울상을 짓더니 발을 동동 굴렀다. 가서 뭐라하지. 아아,난 몰라. 머리를 쥐어때리기도 하고 돌멩이를 걷어차기도 하며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고급스런 클락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등골이 순간 서늘해졌다. 오랫동안 기름칠을 안 한 목각인형처럼 뻣뻣하게 목을 돌리자 역시 보이는 건 우현의 하얀 벤츠였다. 성규의 옆으로 다가온 벤츠의 창문이 다른 날과는 달리, 오싹한 소리를 내며 내려갔다.

"아,안녕하세요, 팀장님."
"타세요."
"안 그러셔도 됩니다, 팀장님."
"할 말 많으니깐 잔 말 말고 타라구요."
"넵."

얼른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 좌불안석으로 손장난만 치던 성규가 입을 열지않고 운전만 하는 우현을 힐끗힐끗 보다가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젠 정말정말 진심으로 죄송해요."
"뭐가요."
"그…팀장님 옷에…제가 멋대로 부침개를…."
"기억하시나봐요?"
"아침에 엄마랑 동생이 말해줘가지구요. 아무튼 세탁비를 원하시면 세탁비 드릴게요."
"괜찮아요,버렸으니깐."
"버렸다구요?"
"제가 김성규씨 옷에 잔뜩 오바이트하면, 김성규씨는 그거 입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뇨.."
"…버릇입니까?"
"뭐가요."
"마시면 다시 뱉어서 확인하는거."
"버,버릇은 아니고….어제 이것저것 많이 먹어서."
"술을 어디서 먹던 상관은 안하는데, 회사 회식때는 술병 만지지도 말고 입에 대지도 마세요."
"예."

오늘 하루는 절대 깝치지말아야겠다.


*


순재가 아침 설거지를 하고 할 일을 하는 동안, 하얀 침대에 누워있는 성열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동그란 조명의 형태가 점점 바뀌더니 짠!하고 명수의 얼굴이 나타났다. 성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장에 나타난 명수의 얼굴을 마주했다. 볼이 붉어지기시작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것도 잠시 눈을 살짝 비비자 금세 사라져버리고 만다. 성열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명수."

성열이 창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소리보다 작은 목소리로 명수의 이름을 되뇌여봤다. 부끄럽다. 이상하게 입이 간질간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름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전신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까만 눈, 하얀 피부, 커다란 눈, 그리고…벌게진 볼. 성열이 두 손으로 분홍빛 뺨을 감쌌다. 예상대로 뜨끈뜨끈거렸다. 며칠 전부터 이러더니 피아노 연주를 보고 온 뒤부터는 증상이 더 심해졌다. 명수만 생각하면 얼굴에 열이 나고 어지럽고 가슴엔 다람쥐가 생긴다. 그리고 계속 생각을 하다보면 보고싶어졌다. 책상으로 다가간 성열이 맨 아래 서랍을 열어 자신의 갈색 지갑을 꺼냈다. 주민등록증,현금 카드,도서관 대출증,네잎클로버를 처음 찾았을때 코팅한 것까지 모두 그대로다.

"……."

신사임당이 그려져있는 오만원도 그대로인걸 확인한 성열이 잠시 무언갈 고민하며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러더니 곧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자 소파위에 있는 쿠션을 정리하던 순재가 고개를 돌려 성열을 한번 보고 다시 쿠션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성열이 너 꽃밭에 물 줬어?"
"……."
"자꾸 까먹으면 안돼. 얼른 가서,"
"…누나."

테이블 위에 널부러진 잡지책을 정리하려던 순재가 잠시 멈칫했다.

"…어. 성열아,왜?"
"…나."
"…응."
"잠깐 나갔다와도돼?"

자신없이는 몇 년 간 한번도 외출을 안하던 성열의 말에, 순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6.

 

"진짜 조심해야 한다?"
"……."

가방을 메고 마당에 서 있는 성열에게 차 조심, 길 조심, 개 조심, 그리고 사람 조심까지 읊어댄 순재가 성열의 하늘색 남방에 붙은 검은 실밥을 떼어낸다.

"정말 어디 가는지 말 안 해줄 거야?"
"……."

잠시 고민하더니 끄덕끄덕거린다.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잡은 성열.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대문을 열고 나온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해! 알았지? 전화 어떻게 거는지 알지? 길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고!"

성열이 대답 대신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확실히 이사 오고 난 후부터 말수도 늘고 표정도 훨씬 밝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순재가 뭉클한 마음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똑같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을 흔들어준다. 오르막길을 넘어 성열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순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긴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걱정 안 해도 되겠지."

그래. 이제 성열이도 24살이니까. 근데 도대체 어딜 가길래 말도 안 하는 거지….


*


"……."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성열이 잠시 고민을 했다. 택시를 타면 레디락까지 금방인데 가지고 있는 오만원으로는 빠듯하고 그렇다고 버스를 타자니 이리저리 갈아타야 하는 게 아직 조금은 엄두가 안 나고…. 한참 고민하던 성열. 결국, 정류장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껌 한 통을 사고 거스름돈을 받는 아주 사소하고 흔한 일인데도 식은땀이 나고 가슴까지 두근거린다. 항상 같이 다니던 순재가 없는 탓이다.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 천백오십원을 내고 자리에 앉은 성열이 안도의 숨을 들이켰다. 아직 혼자 앉아있는 게 어색하고 낯설어 그저 멍한 눈으로 창밖만 쳐다봤다. 그때 가방 안에 있던 스마트폰에 알림이 울렸다. 우현이 최근에 사준 최신형 스마트폰이었지만 연락할 사람도 없고 항상 순재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들고 다닐 일도 없어 책상 서랍 한편에만 계속 넣어놨더니 액정엔 남들은 다 있는 흠집 하나 없이 맨질맨질거린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화이팅. - 누나 -] 순재에게 온 문자다. 성열이 검지로 화면을 톡톡 두드려보았지만, 도통 어떻게 답장을 보내는지 알 수가 없어 한참을 헤매다가 간신히 '응'이라는 짧은 답장을 보냈다.


*


"아아, 속쓰려."

용지 부족이라고 에러가 뜬 복사기에 A4용지를 채워넣고 뚜껑을 닫은 성규가 복사기에 얼굴을 대고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때 위이잉하며 복사기가 작동되더니 잔뜩 찌그러진 성규 얼굴이 여러 장 복사되어 나온다.

"…잘 나왔네요."
"쥐어터진 만두처럼 나왔는데 잘 나오긴 뭐가 잘 나와요! 이리 줘요."

우현의 손에 들린 종이와 계속해서 복사되어나오는 종이들을 꺼내 분쇄기에 모조리 집어넣었다.

"마음 안 아픕니까? 본인 얼굴이 분쇄기에 갈렸는데."
"제가 팀장님한테 지은 죄도 있고 해서 오늘은 그냥 조용히 지내려고 하니깐 괜히 긁지 말아주세요. 아으, 속쓰려."
"속 쓰립니까?"
"네. 쓰라려죽겠습니다. 그러니깐 자꾸 말 시키지 마요. 말할 때마다 쓰리니까. 아으으…."

쓰린 배를 움켜쥐고 자리로 가 앉았다. 점심시간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어떻게 버티지. 키보드에 얼굴을 대고 누워 배를 쓰담쓰담하는데 무언가가 키보드 옆으로 툭 떨어진다. 포도맛 요플레다. 그리고 그 요플레를 던지듯이 내려놓은 건 우현이었고.

"요플레네요? 이거 저 주시는 거에요? 어디서 났어요? 설마 직접 사오신 거에요?"
"하나씩 물어보세요. 정신 사나워요. 휴게실 냉장고에 있던 건데 아무튼 이거 먹고 속 좀 차리세요. 빌빌거리는 거 질색이니깐."

이 말만 남긴 우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자리로 돌아가 버린다. 저 소갈머리 없는 놈이 웬일이지? 매우 츤데레돋네. 갑작스러운 호의에 어색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성규가 잠시 요플레를 이리저리 살폈다. 혹시 안에 청산가리라던가 쥐약 같은 걸 넣은 건 아니겠지? 요플레 껍질을 벗기고 껍질에 묻어있던 요플레를 혀로 스윽 핥았다. 으음, 새콤달콤해. 독이 없는 걸 확인한 성규가 후루루 짭짭 요플레를 깨끗하게 비우고 쓰레기통에 넣었다. 좀 나아진 속을 어루만지며 서류정리를 하는데 한동안 자리에 없던 호원이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움찔하며 호원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대리님?"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후우."

쾅!소리나게 키보드를 내리치더니 어금니를 꽉 물고 중얼거린다.

"누가 훔쳐먹었어요."
"뭐를요?"
"휴게실 냉장고에 숨겨놨던 제 포도맛 요플레요. 하나 남은 거였는데…."
"……."
"근데 성규씨."
"예, 예!"
"…성규씨한테서 포도 요플레 냄새가 나네요."

꿀꺽 침을 한번 삼켰다.

"잘 못 맡으신 거겠죠. 제가 집에서 포도향 나는 샴푸를 쓰는데 그 냄새인가? 하하."
"하긴 성규씨는 아니겠죠…. 아, 현기증난다…. 그거 먹을 생각에 설레었는데…."

현기증이 나는 듯 머리를 부여잡은 호원이 책상에 엎드렸다. 호원이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동안, 쓰레기통 바닥에 있던 요플레 통 위에 다른 쓰레기를 왕창 집어넣었다. 그리고 우현을 쳐다보자 우현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저 우라질 놈이 날 골탕먹이려고! 저거저거 진짜 또라이아니야?
 

*


레디락 근처 정류장에서 내린 성열이 시간을 확인했다. 1시 20분. 택시를 탔으면 훨씬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

내가 여길 어쩌자고 왔지. 성열이 정류장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쉰다. 드넓은 사막에 아무런 대책 없이 혼자 덩그러니 놓인 것 같은 기분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그러기엔 여기까지 온 노고가 모두 말짱 꽝이 되어버릴텐데.

"……."

피아노 치던 명수의 모습을 떠올린 성열이 입술을 앙 다물고 의자에서 일어나 레디락으로 향했다. 자신이 지금 어떤 마음인지 모르는 성열은 그저 피아노 치는 명수를 딱 한번만 더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번만 더 본다면 괜찮아질 것도 같았다. 얼마 안 걸어 도착한 레디락안에선 경쾌한 째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우후우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레디락 안으로 들어갔다. 움츠러든 걸음으로 서둘러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공연 중인 무대를 살폈다. 삐쩍 마른 사람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선율은 듣기 좋았지만, 명수가 아니였다. 성열이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앞치마를 맨 여직원이 성열에게 다가왔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어…저…아메리카노…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주문을 했으니 이젠 나가지도 못하게 생겼다. 가방을 꼬옥 끌어안은 성열이 명수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저 멀리 다른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고 있는 명수의 모습이 보이고 성열의 얼굴에 핑크빛 기운이 살짝 감돌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콩닥거리고 부끄러운 걸까?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맑은 하늘에 떠도는 따뜻한 바람을 타고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 어머머!"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내려놓으려던 여직원의 팔을,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꼬마가 툭 치고는 소변이 급한지 화장실로 후다닥 뛰어가 버린다. 덕분에 성열의 하늘색 남방에 갈색 아메리카노가 잔뜩 쏟아져버렸다. 갓 나온 커피의 뜨거움에 놀란 성열이 '앗, 뜨거!'하고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홀의 총 책임자인 차차가 깜짝 놀라 성열에게 급히 달려왔고 누군가는 얼음을 가지러 주방으로 뛰어들어가며 째즈 공연으로 나른하던 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째즈 공연을 하던 벨라가 잠시 손짓을 해 연주를 멈춘다. 커피를 엎지른 여직원과 차차가 냅킨을 뽑아 커피를 닦아내며 연신 성열에게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아, 어떡해! 괜찮으세요?"
"……."
"일단 병원으로,"
"…괜찮아요…."

솔직히 전혀 안 괜찮다. 남방 안에 하얀 나시티를 입긴 했지만, 꽤 많은 커피의 양이 나시티까지 듬뿍 적신 탓에 옆구리 부분이 따끔따끔 거리며 쓰라려왔다.

"성열씨. 정말 괜찮아요?"

들려오는 명수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리 있던 명수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 이름을 불러준 건가? 성열씨라고? 성열이 부끄러움에 어찌할 줄 몰라하며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사장실에 있던 선웅이 소란스러운 홀로 나와 여직원에게 상황 설명을 듣고는 서둘러 성열에게로 다가왔다.

"명수야. 손님 얼른 탈의실로 모시고 가."
"네, 형. 아니 사장님."

이 쪽으로 오세요. 명수가 성열의 어깨를 잡고 부축하며 탈의실로 향했다. 성열에게 커피를 엎질렀던 여직원은 차차에게 아주 된통 혼쭐이 나고 있었다. 탈의실로 들어온 명수가 자신의 캐비넷을 열고 자신이 아침에 입고 왔던 명수의 전매특허 검은 후드티를 성열에게 건넸다.

"어제 빤 거 오늘 처음 입고 온 거라 냄새 안 날거에요."
"…감사합니다."
"피부는 괜찮아요? 화상 입었을 것 같은데…."

나긋나긋하고 친절한 명수의 말투에 성열의 심장은 이미 평소보다 두세 배로 거칠게 뛰고 있었다.

"한번 봐봐요. 어떻게 됐나."
"…네?"
"화상 입은 거면 바로 병원에 가야 해요. 안 그러면 흉지거든요. 함 봐봐요."
"아, 아뇨…. 괜찮아요."
"그러면 다행이구요."
"저…."
"네."
"…옷…갈아입으려구요…."
"네? 아아, 네. 그럼 갈아입고 나오세요."

명수가 탈의실을 나가자마자 성열이 그제서야 후아!하고 거친 숨을 뱉었다. 얼마나 긴장하고 떨렸는지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얼른 다시 집에 돌아가고 싶어진 성열이 커피가 묻은 남방을 벗고 명수가 준 후드티를 입었다. 검은색 후드티 때문에 성열의 뽀얀 피부가 더욱 빛을 냈다. 아까부터 화끈거리고 따끔거리는 옆구리 부분을 확인했다.

"……."

뽀얀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옷이 스칠 때 따끔거리는 걸 참으며 탈의실을 나가자 아까 커피를 엎지른 여직원이 어쩔 줄 몰라하며 성열에게 연신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선웅이 자신의 명함을 들고 와 성열에게 건넸다.

"병원 가서 치료받으시구요. 치료받은 뒤엔 꼭 전화주세요."
"그리고 여기 가방이요."

명수가 들고온 가방을 성열에게 건넸다. 성열이 가방을 메며 작은 목소리로 여직원을 보며 말했다.

"…저… 괜찮으니깐… 저 직원분한테…너무 뭐라 안 그러셔도 되요."

그리고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조용히 레디락 문을 열고 나간다. 그 뒷모습을 명수와 선웅이 나란히 쳐다봤다.

"…되게 이상하네. 다른 손님 같았으면 아주 난리를 피웠을 텐데 말이야."
"저 사람 누나 말로는 낯을 많이 가린대요."
"니가 어떻게 알아?"
"우리 옆집에 사는 이웃이거든요. 저 오늘 퇴근할 때 유니폼 좀 빌려 입고 갈게요."
"맘대로 해. 야, 저기 손님이 찾으시잖아. 얼른 가봐."
"알았어요."

명수가 다시 쟁반을 들고 서빙을 하기 시작했다.


*


"일찍 왔네? 너 그 옷은 뭐야?"
"……."

조금 들뜬 표정의 성열이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뒤따라 들어온 순재가 이것저것 묻기 바쁘다.

"좋은 일 있었어? 어디 갔다 온 거야? 그 옷은 어디서 난 거고? 누나 궁금해 죽겠다."
"……."
"진짜 말 안 할 거야?"

끄덕끄덕.

"치이…. 나중에 말하고 싶을 때 꼭 말해야 된다?"
"……."
"…성열아."
"…응."

성열의 대답에 순재가 흐뭇하게 웃었다.

"아니야. 그냥 너 다시 말하는 모습 보니깐 너무 좋아서…. 피곤할 텐데 낮잠이라도 한숨 자."

순재가 방을 나가자 후드티를 벗어 옷걸이에 건 뒤, 오늘 메고 갔던 가방 안에서 약봉지를 꺼냈다. 연고를 조심히 데인 부분에 바르고 화상 밴드까지 붙였다. 나시티를 벗고 긴 팔로 갈아입은 성열이 침대에 누워 목까지 이불을 덮었다.

"……."

또 명수가 떠오른다. 명수가 이름을 불러줬었다. 성열씨라고 했던가? 극존칭이긴 하지만 어쨌든 간에 자기를 부르던 명수의 목소리만 생각하면 엄지발가락부터 정수리까지 전율이 이르는 기분이다. 침대에 누워 딱 잠들려고 하는 순간, 밖에서 순재가 성열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러댔다. 느릿느릿 침대에서 일어난 성열이 문을 열고 나가자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순재가 마당 꽃밭에 앉아 자신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신발을 신고 꽃밭으로 다가가자 순재가 기쁜 목소리로 이제 막 돋아난 새싹을 가리켰다.

"이거 봐. 물 주려고 나왔는데 싹이 난 거 있지."

신기한 표정으로 막 자라난 초록 새싹을 살짝 톡 건드려본 성열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햇빛만 받고 물만 제대로 주면 자라는 건 금방일거야."
"…응."

성열의 마음속은 이미 알록달록한 꽃밭이었다.


*

 

볼네드에 다닌 지도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지만 성규가 하는 일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출근하자마자 복사에 팩스에 택배심부름에 자잘한 심부름에 서류정리까지. 아,참. 요즘엔 하나 더 추가됐다. 서류 컴퓨터로 옮겨치기. 마치 공장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서류에 깨알같이 적혀있는 글씨를 컴퓨터로 옮겨치다가 문득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에 가려고 엉덩이를 떼자마자 우현에게서 쪽지가 왔다. [잠깐 와보세요]. 아씨, 오줌 마려운데. 끙차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늦게 오면 지랄할 우현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네,팀장님."

우현이 성규의 눈앞에 복사한 서류를 흔들어 보인다.

"이게 뭡니까."
"종이잖아요."
"…장난해요?"
"흠…."

종이를 받아들고 자세히 살핀 성규는 그제야 종이의 인쇄가 거꾸로 됐다는 걸 깨달았다.

"아…. 다시 해올게요. 이리 주세요."
"됐어요. 그냥 내가 하고 말지."
"죄송합니다."

우현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나온 성규가 사무실을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보고 손을 씻은 다음,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려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성열과 순재와 마주쳤다. 성규가 사무실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어? 성규씨!"

순재가 성규를 알아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성규씨가 여긴 어떻게…."
"아, 저 일주일 전부터 여기서 일하고 있어요."
"우현이랑 같이요?"
"네. 팀장님이 얘기 안 했나 봐요?"
"우현이가 회사얘긴 잘 않거든요. 아, 잘 됐다. 곧 점심시간인데 우리 같이 점심 먹어요."

순재의 말에 성규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 여기 사원식당에서 먹으면 돼요."
"에이. 괜찮아요. 같이 먹어요, 이웃끼리. 오늘 초밥 먹기로 했거든요. 초밥 좋아하세요?"

초밥 먹어본 적이 언제였더라. 재작년 아는 사람 결혼식 때 뷔페에서 먹어본 기억말고는….

"네. 완전 좋아하긴 하는데…."
"그럼 같이 가요. 성열아, 괜찮지?"
"……."

성열이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어, 저기 온다. 우현아!"

사무실에서 정장 마이를 걸치며 나오던 우현이 같이 서 있는 순재와 성규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성규씨랑 같이 먹자. 어차피 점심시간이잖아."
"……."
"그래, 그럼."
"가요, 성규씨."

넷이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우현의 벤츠가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자연스레 뒷좌석에 타려는 성규를 우현이 홱 잡아 세운다.

"김성규씨는 조수석에 타요."
"왜요?"
"이유는 묻지 말고 그냥 타라면 타요."
"이유는 말해줘야 타죠."
"김성규씨."
"왜요, 팀장님."
"왜 그래, 우현아. 성규씨 미안해요. 제가 조수석을 좀 무서워해서요."
"아아…. 그럼 제가 그냥 조수석 탈게요. 그리고 팀장님. 대화는 저렇게 하는 거에요. 아셨죠? 흥."

성규가 우현을 째려보며 조수석에 올라타 벨트를 맸다. 어이없는 웃음을 지은 우현이 순재와 성열이 탄 뒷좌석 문을 닫아주고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김성규씨."
"네."
"자꾸 왜 제 눈치 봅니까?"
"누가요? 제가요? 전 팀장님 눈치 안 봤는데요."
"다 보여요. 제 눈이 사시인 줄 알아요?"
"아뇨. 지금 12시 50분인데요?"

순재가 둘의 유치한 말싸움에 푸하하,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사라진 우현과 성규를 찾던 호원이 혼자서 쓸쓸히 사원식당으로 향했다.


*


마치 일본에 와있는 듯한 분위기의 일식집에 성규가 차에서 내려 입을 쩍 벌렸다. 순재와 성열이 먼저 일식집 안으로 들어가고 뒤따라 들어가려던 우현을 불러세웠다.

"팀장님. 여기 되게 비쌀 것 같은데…."
"김성규씨한테 계산하라고 안 할 테니깐 걱정 마세요."
"그냥 얻어먹기만 하는 게 미안해서 그러죠. "
"그럼 춤이라도 추던가요."
"입안에 꽈배기 들었어요? 어째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비꼬아서 말해요? 그것도 진짜 능력인데."
"칭찬이면 고맙게 들을게요."

역시 내 입만 아프지. 성규가 고개를 저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해주는 사람이 일본식 의상을 입고 있었고 가게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수족관 안에는 성규의 머리통만한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진귀한 풍경에 성규가 잠시 넋을 잃고 천천히 수족관으로 다가가 유리에 머리를 맞대고 물고기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63빌딩 아쿠아리움 뺨친다.

"얼른얼른오면 안 됩니까?"
"네? 아, 네네."

우현의 짜증 섞인 부름에 성규가 후다닥 방안으로 들어갔다. 다다미 식으로 되어있는 방안에는 곳곳에 일본 분위기가 나는 소품들이 가득했다. 순재와 성열이 나란히 앉아 어쩔 수 없이 우현과 붙어앉게 돼버렸다.

"여기 무슨 박물관 같네요."
"그쵸? 여기 오면 먹기보단 구경만 하다가 가기 일쑤에요."

얼마나 돈이 많길래 이런 곳에 와서 구경만 하다가 간다는 거지? 성규가 종업원이 따라주는 녹차를 홀짝홀짝 들이켜며 슬쩍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살폈다. 헉! 동그라미가 기본 다섯 개씩이다.

"켁켁! 쿨럭!"

요절할 만한 가격에 사레가 들린 성규에게 순재가 깜짝 놀라 찬물을 건넸다. 하지만 바로 옆에 앉아있는 우현은 기침을 해대는 성규를 한번 힐끗 보고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종업원에게 주문을 이어간다. 순재가 건네주는 물을 마시고 목을 진정시킨 성규가 순재 몰래 우현을 흘겼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커다란 접시엔 생선 머리가 통째로 있었고 초밥은 꽃 모양으로 형형색색 올려져 있었다. 젓가락으로 초밥을 집어 순재와 성열의 접시에 놓아준 우현이 성규의 접시에도 초밥을 하나 놓아준다. 처음으로 진심 섞인 감사를 표한 성규가 접시에 있던 초밥을 입안에 넣었다. 처음 느껴보는 신선한 맛에 혀가 움찔움찔 거리며 기겁을 할 정도다. 그 뒤로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식사를 하는데, 문득 접시에 초밥을 올려놓고 고추냉이만 긁어내는 성열의 행동을 성규가 유심히 살폈다.

"성열씨. 고추냉이 안 먹어요?"
"……."

성규의 말에 성열이 젓가락질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입안에 있던 밥알들을 씹어넘기고 성열이 골라낸 고추냉이를 젓가락으로 집어든 성규가 고추냉이의 효능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이거 먹으면 쓰고 맵죠?"
"…네."

성열이 조그맣게 대답하자 성규가 마치 유치원 선생님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생선회 먹을 땐 고추냉이랑 같이 먹어야 식중독을 예방할 수 있어요. 고추냉이가 태양빛 다음의 강한 살균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우현과 순재도 어느새 성규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또 식욕을 풍성하게 해주는 작용도 하고 심근경색도 예방해줘서 골라내고 먹으면 좀 아까운 음식이에요. 많이 먹으면 속이 좀 쓰리긴 하지만."
"무슨 학교 영양사라도 했어요?"

우현의 말에 성규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다방면에 지식이 좀 많아가지구요. 그리고 팀장님은 아까처럼 상관 마시고 초밥이나 드세요."
"와. 근데 진짜 성규씨 대단하네요. 난 몰랐었는데…."

순재의 말에 성규가 어색하게 웃으며 녹차를 들이켰다. 초밥 하나를 집고 한참 고민을 하던 성열이 이번엔 고추냉이를 골라내지 않고 온전한 초밥을 입에 넣는다.

"그나저나 순재씨는 직업이 뭐에요?"

우현의 젓가락질이 잠시 멈췄다. 반면에 순재는 아무렇지 않게 환히 웃으며 대답을 했다.

"미술도 하고 피아노도 쳤었는데…. 지금은 잠시 쉬고 있어요."
"화가 겸 피아니스트네요?"
"미술은 그냥 취미로 잠깐 했었어요. 아,참. 저번에 레디락에서 명수씨 피아노 치는 거 봤었는데 전문적으로 배운 거에요?"

명수 이야기에 성열의 귀가 쫑긋거렸다.

"아뇨. 제가 가르쳐준 거에요."
"성규씨도 피아노칠 줄 알아요?"
"조금이요. 손가락도 길쭉하고 또래 중에서도 조금 잘 쳐서 피아노 선생님이 맨날 대학교도 피아노 쪽으로 가라고 하셨었는데, 어떻게 살다 보니깐 볼네드에 취직해서 복사나 하고 있네요."

은근히 가시가 돋친 말에 우현이 헛기침했다.

"근데 순재씨는 왜 쉬고 계신 거에요?"
"김성규씨."

성규의 질문에 우현이 조금 굳은 표정으로 성규를 쳐다본다.

"왜요?"
"그냥 초밥이나 드세요."
"제가 그냥 먹었지 현란하게 팝핀이라도 추면서 먹었어요?"

성규와 우현의 틱틱대는 말싸움에 순재가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


식사를 마치고 나온 성규가 기지개를 켜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설치되어있는 인형뽑기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한때 인형뽑기 전설로 불리면서 인형뽑기 안에 있는 인형이나 상품들을 모조리 쓸어가 슈퍼아저씨나 아줌마한테 맨날 핀잔듣고 그랬었는데.

"인형뽑기네요?"

어느새 다가온 순재와 성열이 인형뽑기 안에 있는 상품들을 살폈다. 인형은 물론이고 장난감과 라이터도 잔뜩 들어있다. 인형뽑기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세 사람에게 우현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팀장님."
"네."
"천원만 꿔주세요."
"뭐라구요?"
"천원만 꿔달라구요. 좀 이따가 사무실 가면 드릴게요."
"나한테 천원 맡겨놨습니까?"
"누가 맡겨놨댔어요? 꿔달라고 하잖아요. 빨리 줘봐요. 내가 이래뵈도 인형뽑기 테크니션으로 불리는 사람이거든요."
"오천원짜리밖에 없어요."
"그럼 그거라도 줘요."

우현의 손에 들린 오천원을 홱 채 간 성규가 휘파람을 불며 인형뽑기에 오천원을 넣었다. 그 모습을 본 우현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못 뽑기만 해봐요."
"걱정 마세요. 순재씨, 성열씨. 원하는 거 있으면 골라봐요. 다 뽑아줄게요. 팀장님도요."
"으음…. 그럼 전 저기 악어인형이요. 성열아, 넌?"

인형뽑기 유리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리저리 살핀 성열이 철사로 잔뜩 묶여있는 피아노 모양 오르골을 가리켰다. 흠. 저건 좀 난이도가 높겠는데? 성규가 손을 풀며 우현에게도 물었다.

"팀장님은요?"
"전 필요 없습니다. 애도 아니고."
"그럼 제가 골라 드릴게요. 저기 갓파인형보여요? 팀장님이랑 완전 판박이네. 저거로 뽑아 드릴게요."

갓파라면 저기 초록색에 머리 발랑 까진 요괴 인형을 가리키는 건가? 우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뇨. 갓파말고 저기 김성규씨처럼 눈 째진 엽기토끼로 뽑아주세요."
"뭐요? 눈 째진?"
"그럼 머리숱 없는 갓파는 듣기 좋은 줄 아세요? 뽑아주세요, 엽기토끼. "
"아,싫어요. 엽기토끼는 제가 제일 혐오하고 증오하는 인형이니깐 그냥 갓파로 가지세요."

빨간 레버를 잡고 본격적으로 인형뽑기를 시작했다. 먼저 순재가 뽑아달라던 악어 인형으로 집게를 이동시킨 성규가 까치발을 들고 수직으로 집게를 내려보며 아주 세심하게 집게를 움직였다.

"누가 보면 다이아몬드라도 훔치는 줄 알겠네."
"방해하지 마요. 지금 초집중이니깐…. 좋아쓰. 그럼 하강!"

하강버튼을 꾹 누르자 집게가 스르르 내려가 악어 몸통을 정확히 잡았다. 그리고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골인 지점에 악어 인형을 내려놓는다.

"어머! 한 번에 바로 뽑혔어요!"
"아싸!"

순재가 통에서 악어인형을 꺼내 들었다. 다음은 갓파인형! 성규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게를 이번엔 구석에 있는 갓파인형쪽으로 옮겼다.

"아, 왜 쟨 누구처럼 재수 없게 구석에 짱박혀있는거야."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리에요?"
"전혀요. …오케이. 하강!"

성규의 하얀 손가락이 하강버튼을 꾹 눌렀다. 머리통을 잡힌 갓파인형이 순순히 끌려오는가 싶더니 골인 지점 바로 앞에서 툭,하고 떨어진다.

"아오! 저 못생긴 게 누구처럼 말도 지지리 안 듣네."
"……."
"왜요. 팀장님 얘기 아니니깐 인상 좀 펴세요. 누가 보면 인형뽑기 털러 온 사람인 줄 알겠네."

성규가 다시 레버를 움직여 갓파인형을 잡아올렸다. 그리고 정확히 골인 지점에 떨어진 갓파인형을 꺼내 우현에게 건넸다.

"받아요."
"이게 나라구요?"
"제가 팀장님이랬어요? 닮았다고만 했지. 빨리 받아요. 오르골 뽑아야 하니깐."

우현에게 갓파인형을 휙 밀어주고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레버를 쥐었다. 덩달아 순재와 성열도 진지하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현 혼자만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갓파인형을 툭툭 치고 있다.

"아아, 제발제발…."

피아노 오르골이 천천히 끌려오나 싶더니 바닥에 곤두박질친다. 오르골 밑에 철사로 꽁꽁 묶여있는 무거운 찰흙 때문이다.

"이 사기꾼 놈들. 찰흙은 왜 매달아 놓고 난리야."
"그냥 가죠. 못 뽑을 것 같은데."
"아직 10판 남았어요. 기다려요."

그 후 십분이 지나서야 간신히 오르골을 뽑은 성규가 우왁!하는 소리를 내며 오르골을 꺼내 성열에게 건넸다. 성열이 얼른 포장을 뜯고 피아노 오르골의 태엽을 감아돌렸다. 감았던 손을 놓자 맑은 오르골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르골치고는 소리가 되게 맑네요."
"그러게요."
"……."

피아노 앞에는 쇠로 만들어진 작은 소년이 앉아있었다. 그 소년의 모습에 자연스레 명수의 모습이 겹치기 시작한다.


*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우현을 마다하고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도착한 순재와 성열. 집 앞에 세워져 있는 검은색 차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곧 차 문이 열리고 우현의 할머니와 어머니인 최 여사가 차에서 내리자, 순재와 성열이 깜짝 놀라 얼른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


순재가 내온 홍차를 한 모금 마신 할머니가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긴장한 순재가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집이 좋네. 단층치고는 천장도 높고…."
"그렇죠, 어머니? 그나저나 마당에 밭 있던데 뭐 심었니?"
"네. 성열이가 키우는 꽃밭인데 이제 막 싹이 나기 시작했어요."
"손은 괜찮니?"

거두절미하고 물어보는 할머니의 물음에 순재가 '네'하고 대답했다.

"물리 치료는 받고 있고?"
"네. 꼬박꼬박 다니고 있어요."
"그래. 괜찮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생활비는 안 부족하고?"
"네. 피아노곡으로도 많이 들어오고 또 이모님께서 보내주시는 돈도 있어서 부족하진 않아요."
"다행이구나. 그럼 이만 가자."

집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소파에서 일어나 갈 채비를 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순재가 적잖이 당황했다.

"그냥 너랑 성열이 잘 지내는지 보러온 거야. 남우현 그놈한테는 말하지 말고."
"…네, 할머님."

할머니와 최 여사를 따라 순재와 성열이 마당으로 나왔다. 할머니가 차에 올라타고 마당에 남은 최 여사가 순재의 손을 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할머니가 점점 약해지셔."
"어디 편찮으신 거에요?"
"아니. 늙느라 그러시지…. 아무튼 어려운 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전화해. 반찬 같은 것도 괜찮구."
"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성열이는 아직도 말 잘 안 하니?"
"이사 오기 전까진 잘 안 했었는데 이사 오고 난 뒤부턴 말문을 많이 열었어요. 표정도 밝아지구요."
"그래. 할머니 기다리시겠다. 그만 가볼게."

할머니와 최 여사를 태운 차가 오르막길을 넘어 사라지고 난 후에야 잔뜩 뭉쳐있던 긴장이 풀렸다.

"우윽."
"…누,누나."
"하아…. 왜 이러지…. 너무 긴장했,우욱."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한 순재가 급히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근 뒤 변기에 대고 점시에 먹었던 모든 음식들을 게워낸 순재가 물을 내리고 세면대에 서서 입을 헹군뒤 아직도 미식거리는 배를 살살 문질렀다.

"긴장해서 속이 다 뒤집혔나보네…."

순재가 씁쓸하게 웃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화장실 문앞에 걱정스러운 표정의 성열이 서있었다. 

"너무 긴장했나봐."
"…괜찮아?"
"응,누나 괜찮아. 걱정마."

성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준 순재가 배를 문지르며 침실로 향했다.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잠시 무언갈 생각하던 최 여사가 옆 자리에 앉은 할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왜."
"할 말 더 있으신 거 아니셨어요?"
"…얘가 삐쩍 말라있는데 어떻게 얘길해. 에효,불쌍한 것…."

할머니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


"이거 김성규씨가 처리하세요."
"예? 왜요? 제가 기껏 뽑아준 거잖아요."
"제가 이걸 어따 씁니까? 잘 때 끌어안고 잘까요? 아니면 심심할 때 얘랑 대화라도 할까요?"

회사로 돌아온 우현과 성규가 인형 하나 가지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티격태격했다. 우현은 자기가 무슨 애냐며 인형을 떠밀었고 성규는 그래도 뽑아준 사람 성의가 있지, 어쩜 그러냐고 다시 인형을 떠밀었다.

"누가 뽑아 달랬어요?"
"진짜 너무하네요."
"이건 김성규씨가 가지고 가서 명절날 사촌 동생 오면 걔한테나 주시구요, 빨리 오천원 갚으세요."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땡하고 열리자 성큼성큼 먼저 사무실로 향한다. 갓파인형의 얼굴을 후려친 성규가 궁시렁거리며 뒤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우현이랑 점심 드시고 오나 봐요?"

옆자리 호원이 낮은 목소리로 물어오자 성규가 갓파인형을 가방 안에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아,네. 둘이서만 먹은 건 절대 아니구요. 옆집에 사시는 다른 분들이랑도 같이,"
"순재누나랑 성열이요?"
"어? 아, 맞다. 호대리님 팀장님이랑 친하다 그랬었죠. 네. 순재씨랑 성열씨랑 같이요. 이거 왜 안 들어가는 거야 짜증나게."

구두를 벗은 성규가 양말 신은 발로 갓파인형의 머리통을 팍팍 짓밟자 그제서야 가방 지퍼가 잠긴다. 후유~ 간신히 집어넣었네. 근데 호원의 표정이 이상하다. 평소답지 않게 시무룩하고 자꾸 볼펜만 또각또각 거리고 일도 안 한 채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호대리님.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에요. 성규씨는 성규씨 일하세요. 전 저 혼자 일하면 되니깐."
"…호대리님?"
"안 들려요. 이어폰 꽂을 거에요."

호원이 아예 성규를 등지고 의자를 돌려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성규가 호원을 부르며 어깨를 톡톡 건드리자 호원이 어깨를 휙 저어 성규의 손길을 거부했다.

"……."

뭐야. 삐친 거야?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주 5일제 근무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는 점이 아무리 우현이 재수없게 굴어도 볼네드를 관둘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명수도 토요일, 일요일은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지라 옆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읽으며 뒹굴거리고 있었다.

"야, 명수야."
"와이."
"나 쌍꺼풀 수술 진짜 할까?"
"돌았냐."
"왜애! 나름 괜찮을 것 같은데."
"차라리 지금부터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고 엄마 말 잘 듣고 교회 열심히 다녀."
"왜?"
"그래서 다시 태어나는 게 더 효율적이거든."
"죽을래?"

아, 약올라. 명수 저 녀석은 얼굴도 갸름하고 피부도 좋고 눈도 커다란데 왜 난 이 모양이지. 어딜 가서 못생겼다는 말은 못 들었지만 동생에 비해 눈이 작다는 소리는 유난히 많이 들었었다.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돼."
"내가 왜."
"너 태어나기 전에 못생긴 유전자는 내가 다 골라서 태어났잖아."
"고마워서 눈물 나네, 눈물 나."
"재수없는 시키."

그때 띵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안 내면 나가보기 가위 바위 보!"
"보!"

명수 바위, 성규 가위. 성규가 인상을 쓰며 침대에서 일어나 인터폰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접니다.]

우현의 목소리다.

"주말에만 안 보고 살면 안 돼요?"
[제가 뭐라 했습니까?]
"암튼 왜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
"물어보세요. 아프게 물진 마시구."
[회사 아니라고 너무 막 대하는거아녜요?]
"막 대했으면 두 살 어린 동생한테 벌써 말 놨죠. 빨리 용건만 간단히 말해요."
[꽃밭에 나무를 심었거든요?]
"팀장님을 심었다구요?"
[…재밌습니까?]
"나름이요. 계속 말해보세요."
[아무튼 나무를 심었는데 시들시들 거리네요. 벌레도 좀 꼬인 것 같고.]
"벌레요? 냄새는 안 나구요?"
[냄새는 안 맡아봤는데 좀 나와보면 안 돼요?]
"알았어요. 기다려요."

성규가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와 대문을 열었다.

"나무가 정확히 어떤데요."
"말 한 게 전부에요."
"잎 색깔은요?"
"…제대로 보질 않아서…."
"쯧쯧."
"직접 와서 보던가요."
"그러죠, 뭐. 이웃끼리 이 정돈 해줄 수 있으니깐."

옆집 마당으로 향하자 순재와 성열이 꽃밭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성규가 다가오자 인기척을 느낀 순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제부터 이상하더니 오늘은 벌레도 꼬였어요."
"흠…."

성규가 성열의 옆에 쭈그려 앉아 나무의 잎을 살피고 뿌리 부분의 흙을 조금 파헤쳐 냄새를 킁킁 맡더니 우현에게 묻는다.

"썩은 내는 안 나는 것 같은데…. 이 치자나무만 이래요?"
"치자나무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딱 보면 알죠. 아무튼 이 치자나무만 이런 거에요?"
"네."
"약은 줬어요?"
"약을 왜 줘요. 자연 그대로에서 기르려고 한 건데."
"이거 내다 팔 거에요?"
"네?"
"이거 내다 팔 거냐구요."
"이걸 왜 내다 팔아요. 마당에 심어놓고 기르려고 하는 건데."
"기르려고 하는 거면 약도 주고 거름도 주고 해야죠. 나무도 사람이랑 똑같아서 아프면 약 먹고 영양실조걸리면 영양제 주는거에요."
"성규씨 진짜 대박이네요. 저 소름 돋았어요. 박사같아요, 박사."

박사까지야…. 순재의 칭찬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성규가 쑥쓰러운 듯이 웃었다.

"일단 약치기에는 너무 어린 묘목이니깐 나가서 영양제 사오세요."
"저 말입니까?"

우현이 주말에 나가기 귀찮다는 표정을 짓자 성규가 우현에게 손을 내민다.
 
"그럼 제가 갔다 올게요, 차 키 주세요."
"아뇨. 제가 갔다 올게요."

우현이 영양제를 사러 가고 파헤쳤던 부분을 다시 흙으로 덮어준 성규가 순재와 성열에게 공짜 강의를 시작했다.

"물은 너무 많이 줘도 안 되고 조금 줘도 안 돼요. 많이 주면 썩고 조금 주면 뿌리가 다 타버려요. 그러니깐 적당히. 그리고 묘목이 자라면서 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지지대를 만들어줘야 해요."
"지지대요?"
"네. 굵고 딱딱한 막대기를 꽂고 하는 건데 이걸 안 해주면 나무가 휘어요. 그리고 꽃 심은 쪽엔 미니 천막 만들어주는 게 좋을 텐데…."
"미니 천막은 뭐에요?"
"비가 심하게 오거나 하면 이 새싹들 다 썩어버리거든요. 또 꽃피고 나서 햇빛 강한 날에는 꽃잎이 다 시들어버리기도 하구요."
"미니 천막도 사는 거에요?"
"명수가 그건 잘 만드는데…. 잠시만요."

쭈그려 앉아있던 몸을 일으킨 성규가 담벼락으로 걸어가 명수를 불렀다. 방 창문이 열리고 띠꺼운 표정의 명수가 담벼락에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있는 성규를 부루퉁한 얼굴로 쳐다봤다.

"남의 집에서 뭐하냐?"
"너 잠깐 나와봐라."
"왜."
"옆집 미니 천막 좀 만들어줘. 너 그거 하난 잘하잖아."
"안녕하세요,명수씨."

성규 옆에서 순재의 머리가 쑥 올라왔다. 명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 성규가 괜히 명수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우리 명수가 망치질이랑 톱질은 이 동네에서 최고예요! 미니 천막도 금방 뚝딱 만든다니깐요! 세상에나! 뭐? 만들어주겠다고? 그럼 재료 챙겨서 이쪽으로 빨리 와!"
"……."
"고마워요,명수씨."
"아니에요."

김성규 넌 뒤졌어. 조금 이따 봐. 메시지가 담긴 눈빛을 성규에게 쏴준 명수가 궁시렁거리며 마당에 있는 작은 창고로 들어가 공구함과 널빤지, 그리고 쓰다남은 비닐을 챙겨 들고 옆집 마당으로 향했다.

"주말인데 쉬지도 못 하시구… 정말 죄송해요."
"아유, 아니에요."

저 망할 형 새끼가 죄송해야죠.

"전 들어가서 음료수 좀 챙겨 나올게요."

순재가 집안으로 들어가고 성열과 명수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상처는 괜찮아요?"
"…네."
"다행이네요."

명수의 다정한 말투에 성열의 가슴이 또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재료들을 꽃밭 옆에 내려놓은 명수가 성규의 귓가에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읊조렸다.

"내가 언제 공짜 노동 한댔어, 이 말괄량이 삐삐같은 놈아."
"좀 해주면 어때서."
"오지랖은 이 마당보다 넓다니깐."
"화이팅."
"꺼져있어 봐."

본격적으로 제작에 돌입했다. 널빤지를 길이에 맞춰 슥삭슥삭 자르고 꽃밭 네 귀퉁이에 꽂은 다음 가운데 지점에도 하나를 푹 꽂는다. 햇빛이 쨍쨍한 날이라 금세 땀이 흐르고 이마에서부터 흐른 땀방울은 또르르 굴러가 턱끝에서 톡 하고 떨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열이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명수에게 들리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해하며 얼른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수건을 꺼내왔다.

"아,고마워요."

성열이 건넨 수건을 목에 걸치고 땀을 닦은 명수가 다시 톱질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녀같은 표정의 성열이 아무말도, 아무 표현도 못하고 그저 명수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서 얼굴만 붉히고 있다.


*


미니 천막은 금세 뚝딱 만들어졌다. 명수와 성규를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는 집안으로 초대한 순재가 과일을 깎으러 주방으로 향했다.

"집 되게 좋다."
"그러게. 거실이 우리 마당만 하네."
"성열씨 집구경 좀 해도 돼요?"
"…네."

성규가 쿠션을 끌어안고 집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차마 방 안에 들어가는 건 실례일 것 같아 여기저기 걸린 액자와 소품들을 구경하는데 문득 구석에 쪽에 놓인 계단을 본 성규가 성열에게 물었다.

"여긴 다락방으로 가는 계단이에요?"
"네."
"언젠간 한번은 꼭 다락방이 있는 집에 살고 싶었는데…. 한번 들어가 봐도 돼요?"
"…더러울 텐데."
"에이, 괜찮아요. 다락방은 원래 다들 창고로 쓰니깐."

조심스럽게 계단에 발을 디디고 올라가 갈색의 문을 열었다.

"우와…."

다락방도 널찍하네. 성규가 감탄을 하며 다락방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상자들과 액자가 한쪽에 가득했고 가운데에 놓인 피아노는 하나뿐인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고 있었다. 마치 무대 위의 피아노를 비추는 핀조명같이…. 액자 속의 사진은 순재의 피아노 대회 상장들이었고 낡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번쩍거리는 트로피들이었다. 수많은 트로피와 사진에서 눈을 뗀 성규가 빛을 받고 있는 피아노로 다가갔다. 덮여있던 하얀 천을 살짝 치우고 쿠션을 의자 옆에 올려놓은다음 피아노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한번 쳐봐도 되겠지?

"……."

잠시 심호흡을 한 성규가 곧 연주를 시작했다. 명수가 레디락에서 쳤던 oh my love였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7.

 

명수가 연주했던 곡과 똑같은 곡이었지만 성규의 피아노 실력이 더 뛰어나서그런지 묘하게 곡의 느낌이 달랐다. 무언가… 더 애틋하다고 해야하나? 연주를 하는 성규의 얼굴은 진지함과 약간의 슬픈 표정이 어우러져있었다. 뒤늦게 들어온 명수와 순재가 문 쪽에 서서 가만히 성규의 연주를 듣고 있다. 명수는 그저 그런 표정이었지만 순재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성규를 비추고 있다. 우현, 새삼 성규가 다르게 보인다. 연주가 끝나고 성규가 시선을 문쪽에 옮겼을때 어느샌가 와있던 우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큼큼. 헛기침을 한 성규가 피아노 뚜껑을 닫고 천을 다시 덮었다. 순재와 성열이 짝짝 박수를 친다.

"진짜 감미로웠어요."
"에이…. 쑥쓰럽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훌륭하네요."

우현의 말에 성규가 찌릿 눈을 째렸다.

"칭찬은 고마운데 속담은 좀 가려가면서 쓰세요. 영양제는 사왔어요?"

성규가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우현에게 다가가 우현이 들고있는 봉지를 확인했다.

"잘 사왔네. 그럼 마당으로 갑시다. 나무한테 주사 한 방 놔주러."

우현과 성규,명수가 다락방을 나섰지만 순재와 성열은 한동안 다락방을 나가지않고 피아노만 조용히 쳐다본다.

"…나가자,성열아."
"…응."

순재와 성열마저 나가자, 다락방엔 다시 정적이 찾아든다. 잠시동안 따뜻했던 다락방에 또 다시 찬기운이 차기시작했다.


*


성규와 명수가 집으로 돌아가고 집안엔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성규씨 피아노 진짜 잘 치더라."
"…그러게."

우현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한동안 TV소리만 거실에 맴돌때 한 손에 종이가방을 든 성열이 방에서 나왔다.

"그 가방은 뭐야?"
"……."

우현의 질문에 대답은 커녕 시선도 안 준 성열이 급하게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우현아."
"어?"

쟤 요즘 이상해. 순재가 의심가득한 눈으로 대문을 열고 나가는 성열을 쳐다봤다.

"뭐가?"
"얘가 말수도 늘고 표정도 밝아지고 며칠전엔 혼자 외출도 했다니깐."
"외출을 했다고?"
"그렇다니깐."
"그럼 좋은거잖아. 그게 왜 이상해?"
"아냐아냐. 뭔가 이상해. 혼자 얼굴도 붉어졌다가 다시 하얘지고 한숨만 쉰다니깐."
"……."

흠….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던 우현이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렸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건가…."
"뭐어?"
"농담이야."
"…가만…그런 것 같기도하구…."
"성열이가 여자 만날 일이 있긴 하나?"
"점점 옛날 성열이로 돌아오는것같아서 좋긴 한데…. 갑자기 저러니깐 적응이 안 되네."

방안에서 우현의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소파에서 일어나 얼른 방으로 가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최 여사다.

"네. 무슨 일이세요?"
[우현아. 희망병원으로 와. 할머니 쓰러지셨어.]

 

*

 

땀을 흠뻑 흘린 명수는 샤워를 한다며 옷가치를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고 거실 마루에 앉은 성규는 발톱을 톡톡 깎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새끼발톱을 깎으려는데 또 초인종이 울린다. 이번에도 우현인가 싶어 툴툴거리며 인터폰을 눌렀다.

"또 팀장님이면 짜증 낼 거에요."
[…….]
"벨튀인가? 이눔의 시키들! 아직도 벨튀하는 시키들이 있어?"
[…저…옆집 성열이요.]
"아, 잠깐만요."

서둘러 대문을 열어주고 밖으로 나갔다. 한 손에 종이가방을 든 성열이 서있었다.

"…이거…."

성열이 종이가방을 성규에게 건넨다. 명수가 나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잔뜩 드는 성열이 그저 인사만 꾸벅하더니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뭐지…. 어라, 이거 명수 옷인데."

종이가방안에서 나온 건 명수가 아끼는 검은 후드티였다. 요새 얘가 이걸 안 입길래 이상했는데 성열씨가 가지고 있었구나…. 근데 왜 이걸 성열씨가 갖고 있는거지?

"어디 갔다와?"
"아니. 잠깐 뭐 좀 받으러. 야, 근데 이걸 왜 성열씨가 가지고 있어?"

샤워를 하고 나오던 명수가 잊고 있었던 후드티를 받아들고 아무것도 아니란 말과 함께 후드티에 코를 박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빨았나보네…."

익숙치않은 향긋한 냄새가 났다.


*

 

무슨 정신으로 병원까지 운전해 왔는지 모르겠다. VIP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에 기대 최 여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할머니!"
"비행기 타고 왔냐. 어째 이리 빨리 왔어?"
"이건 또 무슨 이벤트에요."

우현이 의자를 끌어다앉으며 한숨을 쉰다. 링겔액이 한방울씩 톡톡 떨어지고 있었다.

"할머니 왜 쓰러지신거에요?"
"과로때문이야. 요새 한식점때문에 좀 많이 바쁘셨거든."

과로라는 말에 우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 할머니가 안 그러셔도 한식점은 잘 돌아가요."
"사람 마음이 또 그렇지가 않은 걸 어쩌냐?"
"할머니보단 젊은 사람들 뇌가 더 싱싱하고 두뇌회전도 빠르니깐 젊은 사람들한테 맡기고 할머닌 그냥 좀 쉬세요."
"자식이 못 하는 말이 없어."

할머니가 사과껍질을 우현에게 던진다.

"쉬긴 내가 왜 쉬어! 이리 멀쩡한데."
"멀쩡하신 분이 링겔 꽂고 병원에 누워계십니까?"
"걱정말어! 링겔만 맞고 바로 일어날거니깐."

나 그렇게 쉽게 안 죽는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하자 우현이가 고개를 저으며 최 여사가 깎아놓은 사과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누가 죽는대요?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이랑 말할 때마다 그 사람 기를 쪽쪽 훔쳐가잖아요. 오래 사실거에요."
"시끄러. 말 안 드는 손자, 보기싫으니깐 얼른 가."
"에에? 제가 언제 말을 안 들었어요?"
"내가 원하는 게 별거니? 그냥 집에 들어와서 아범밑에서 제대로 회사 다니다가 결혼해서 평범하게 사는게 그렇게 힘들어? 할미말 들으면 어디가 덧나?"
"그게 평범해요?"
"그럼 특출나니?"
"서동그룹 왕자님으로 태어난 이상 평범하게 사는 건 불가능해요."
"왕자?"
"네."

이모는 저보고 왕자라던데. 우현의 말에 할머니가 콧방귀를 뀌었다.

"왕자는 성안에 있어야 왕자인게다."
"서동이라는 성이요?"
"알긴 아네. 암튼 얼른 회사 들어와."
"아프시면서 그 말은 안 빼먹으시네요."
"나 멀쩡하다."
"눈이 퀭 하세요."
"시력 탓이야."
"아닐텐데."
"너 김박사네 딸 알지. 이쁘고 참하던데 너한테 관심있나보더라."
"얼굴도 모르는데요?"
"창립 파티날 만났었잖아."
"할머니 쉬세요. 이만 가볼게요."

우현이 또 다시 시작한 맞선이야기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퇴원하실때 전화하세요. 맛난 거 사드릴게요. 엄마. 가볼게요."
"조심히 가라. 운전 조심하고."
"역시 미운정이 무섭다니까."
"보기 싫어. 얼른 가."
"거짓말. 매일 보고 싶으셔서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는거잖아요."

할머니가 아무 말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며칠 후, 평상시처럼 출근한 성규는 직원들이 손에 하나씩 선물을 들고 있는게 의아해 호원에게 물었다.

"오늘 크리스마스에요? 아니면 마니또 파티인가? 다들 손에 선물이 하나씩 있네요?"
"오늘 무슨 날인지몰라요?"
"오늘은 수요일이잖아요."
"그것보다 중요한 우현이 생일이기도 하죠."
"팀장님 생일이요?"
"네. 우현이한테 잘 보이려고 하나씩 사들고 온거에요."
"아…."

성규씨는 아무 것도 안 사왔어요? 호원의 물음에 성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금 호대리님이 말해주셔서 알았어요. 에이,그리고 팀장님한테 잘 보여서 이득될 것도 없잖아요."
"왜 없어요. 우현이가 나중에 서동그룹만 물려받으면 경제를 손에 쥐고 주물럭거릴 사람인데."
"서동…그룹이라뇨?"
"서동그룹 몰라요?"
"왜 모르겠어요. 우리집 김치냉장고도 서동에서 나온 제품이고 제 동생이 쓰는 스마트폰도 서동에서 만든건데…."
"그 서동그룹 아들이잖아요,우현이가."

서동그룹이면 완전 재벌이잖아!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서동그룹 아들이면 완전 재벌가의 상속자아니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저렇게 알랑방구를 뽕뽕 뀌는거죠."

젊은 나이에 으리으리한 집으로 이사를 왔길래 그냥 잘 사는 부잣집 아들인가 싶었더니 이건 완전 신문에서나 보던 사람이었잖아? 새삼스럽게 우현이 먼 세상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만약 바닥이라면 저 사람은 하늘 높이에서 개미처럼 작은 나를 내려다보고있는 기분이겠지?

"완전 대박이네요."
"근데 우현이는 저런 선물 받는거 안 좋아해요."
"왜요?"
"권력에 빌붙는 사람들을 싫어하거든요."

나름 정의로운 사람이구나. 성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컴퓨터 전원을 켰다. 회사용 메신저를 켜고 접속해 있는 우현에게 쪽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뭐라 적지…."

팀장님. 생일 축하드리구요. 생일빵으로 박살날 준비…. 아,이건 아니야. 한참을 지웠다썼다하며 고민한 성규가 짤막하게 '팀장님^.^생일축하드려요*^0^*'라고 이모티콘까지 섞어 쪽지를 보냈다. 하지만 답장은 없었다.

"답장을 바란 내가 등신이지…. 아아,됐어. 생일이든 말든 내가 알게 뭐야."

난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돼! 그렇게 다짐한 성규가 일을 시작했지만 자꾸 마음 한 켠이 찜찜했다.


*


"오늘도 나가게?"
"…응."
"어디 가는건데?"

이번에도 환한 미소만 짓는다.

"도서관 가는거야?"

도리도리.

"그럼 영화보러?"

또 도리도리.

"뭐야. 우현이말대로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거야?"
"……."

이쁘게 차려입고 신발을 신던 성열의 손이 잠시 멈춘다. 그 손을 캐치한 순재가 다시 한번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몰라."
"몰라? 그럼 없다는 소리는 아니네?"
"……."
"…수상해. 냄새가 나."

순재가 팔짱을 낀 채 말하자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성열이 킁킁 냄새를 맡고는 순재에게 말했다.

"…진짜 난다."
"응?"
"…탄 냄새."
"탄 냄새? …아,맞다! 오븐!"

화들짝 놀란 순재가 서둘러 주방 오븐으로 달려갔다.


*


집을 나선 성열이 이젠 능숙하게 버스를 타고 레디락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하지만 막상 들어갈 생각을 하니 떨린 건 여전하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핑크색 남방을 입고 오늘은 뿔테 안경까지 썼다. 긴장하면 가방 끈을 부여잡는 습관이 있는 성열

이 백팩 가방 끈을 꽉 부여잡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레디락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레디락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나무 문에 머리를 부딪힌 성열이 으아,하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헉! 괜찮아요!?"

양 손에 쓰레기 봉투를 들고 문을 뻥 찼던 명수가 깜짝 놀라 쓰레기 봉투를 던지듯 내려놓고 바닥에 넘어진 성열의 손을 잡아일으켰다. 이마에 혹이 날 정도로 아팠지만 명수의 말 한 마디에 아픈 것도 잊은 성열이 어색하게 웃었다.

"괘,괜찮아요…."
"아닌데. 이마 무지 빨간데…."

부끄러운 성열의 마음을 모르는 명수가 코 앞까지 다가와 이마 부분을 살짝 들추고 요리조리 살폈다. 가까이에서 마주하니 더 떨린다. 숨이 멎을 지경이다.

"피는 안 나네요. 다행이다."
"……."
"왜 안 들어가고 여기 서있어요?"

방금 부딪혔으니깐. 성열이 가방끈 잡은 손만 꼼지락거린다. 쓰레기봉투를 레디락 옆 쓰레기 수거함에 넣은 명수가 레디락 문을 열고 성열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있는 성열이 얼른 레디락 안으로 들어갔다


*

 

 


퇴근을 준비하던 성규가 잠시 고민을 했다. 케이크라도 사줘야하나? 아무것도 안 줬다고 미움 받는건 아니겠지?

"성규씨. 내일 봐요."
"네, 호대리님. 들어가세요."

호원이 먼저 사무실을 나가고 우현과 둘만 남게 된 성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팀장님."
"네."
"생일축하드려요."
"고맙습니다."
"뭐 갖고 싶은거 있으세요?"

서류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우현이 성규의 말에 피식 웃었다.

"지금 저 비웃었죠."
"아뇨. 진심을 담아 웃은 건데요. 선물같은 거 필요없습니다. 축하한다는 말이면 돼요. 갖고 싶은 게 생기면 제가 사면 되구요."

돈 많다고 자랑하는거야,뭐야? 어우,재수없어.

"미역국은 먹었어요?"
"미역을 싫어해서요."
"그래도 생일인데 먹어야죠. 국수같은건요?"
"국수는 왜요?"

면발을 먹어야 오래 사는 거 몰라요? 성규가 가방을 챙겨들고 나란히 우현과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제 퇴근후 우현의 차를 타고 집으로 귀가하는게 보통일이 된 성규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탄다.

"노래라도 불러주던가요."
"무슨 노래요? 생일 축하 노래요?"
"오늘 아무도 안 불러줬거든요."
"순재씨랑 성열씨도요?"
"둘 다 노래엔 젬병이에요."
"전 멍석 안 깔아주면 노래 안 합니다."

우현이 또 한번 피식 웃었다. 왜 자꾸 바람 빠지게 웃는 거야. 성규가 서류가방을 끌어안고 힐끗힐끗 운전하는 우현의 모습을 살폈다. 새삼 우현이 달라 보인다. 이제보니 귀티가 좔좔 흐르고 좀 잘 생기기도 한 것 같고…. 그래도 재수없는 건 여전해! 집앞에서 차가 멈추고 벨트를 푼 성규가 차에서 내려 한번 더 축하 인사를 건넸다.
 
"집에 가서 라면이라도 끓여드세요. 아셨죠?"
"귀찮아요. 이 시간에 라면은 몸에도 해롭고."
"몸에 해로운 거 따져가면서 살면 먹을 거 못 먹고, 즐길 거 못 즐겨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미련없이 돌아선 성규가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전진해 자신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직원들이 준 선물을 챙겨들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우현, 다시 뒤돌아나오더니 전봇대 밑 쓰레기 봉투 사이에 종이가방을 얹어놓는다.


*


"다녀왔습니다~"
"아들 왔어?"
"응. 김명수는 아직 안 왔어?"
"오늘은 좀 늦나봐. 밥은?"
"생각없어."

방안으로 들어가 서류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 정장 마이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넥타이를 풀어 책상의자에 걸쳐놓으려다 문득 책상위에 놓인 갓파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오케이."

좋은 생각이 났다.


*

 

레디락에서 나올땐 낮이었지만 우현의 선물을 사러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져버렸다. 밤에 혼자 나와본 적은 없었는데…. 슬슬 불안해진 성열이 순재에게 전화를 할까말까 망설이던때에 이어폰을 꽂고 휘파람을 불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다가온 명수가 자기의 옆에 섰다. 아직 성열을 발견하지 못한 건지 스마트폰만 쭈물쭈물거리던 명수가 뒤늦게 성열을 발견하고는 아는 체를 해왔다.

"또 만났네요."
"…네."
"지금 집에 가는 거에요?"
"…네."
"……큼."

짧게 대답하는 성열때문에 덩달아 무안해진 명수가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고 휘파람을 분다. 집까지 명수와 함께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또 떨려오기시작했다. 버스가 도착하고 버스에 올라타 자리를 살피자 하필이면 뒤 쪽에 놓인 커플석만 비어있다. 먼저 버스에 올라탄 성열이 창문 쪽에 앉자 '앉아도 되죠?'하며 성열의 옆자리에 명수가 털썩 앉았다. 명수는 아무렇지않게 노래를 들었지만 성열은 고개를 숙인채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가 가방 똑딱이를 똑딱거렸다가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달린 버스가 집 정류장에서 멈추고 명수와 성열이 나란히 버스에서 내렸다. 집까지는 떨려서 어떻게 걸어가나? 
 
"…대학생이에요?"
"네? 아아…. 잠시 휴학…했어요…."
"아아, 저도 휴학중인데."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아스팔트인가, 뭉글뭉글한 구름인가? 조금만 더 가벼웠다면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한참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집앞에 도착해버렸다. 길 것만 같았던 시간은 예상외로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명수가 먼저 작별 인사를 하고 초인종을 누르자 대문이 열리고 검은 후드티를 뒤집어쓴 성규가 나왔다.

"이제 오냐? 어? 성열씨랑 같이 온거야?"
"어. 어쩌다보니. 그 요상한 인형은 왜 들고 나온거야?"

성규의 손에 들린 갓파인형을 보며 묻자 성규가 그저 씨익 웃고 성열에게 인사를 한다.

"성열씨! 잘 가요."
"…네."

성규와 명수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성열이 조용한 걸음으로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어디 가? 이 시간에."
"잠깐 요 앞 편의점에 갔다오려고."
"편의점 가면서 인형은 왜 들고 나왔대."
"몰라도 돼, 짜샤."

인형을 옆구리에 낀 성규가 씩씩한 걸음으로 오르막길을 넘기시작했다.


*

 
편의점에 도착한 성규가 머리를 긁적이며 냉동고로 향한다. 일반 빵집에 비해 좀 비싸긴 했지만 큰 맘 먹고 큰 사이즈의 케이크를 계산대에 올려놨다.

"삼만 오천원입니다."
"…아, 잠시만요."

라면 코너에서 후루루 국수도 집어왔다.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에서 나와 케이크가 녹을까싶어 얼른 우현의 집으로 향했다. 잠시 케이크를 바닥에 내려놓고 초인종을 눌렀다. 딸칵 소리와 함께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요?]
"난 거 어떻게 알았어요?"
[모니터로 다 보여요.]

인터폰에 카메라도 달렸구나. 성규가 속으로 감탄을 하며 이상하게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잠깐 나와보세요."
[싫어요.]
"왜요."
[귀찮아서요.]
"그러지말고 좀 나와봐요."
[…알았어요.]

얼른 케이크를 집어들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편안한 차림의 우현이 걸어나왔다. 마당을 지나 대문으로 다가온 우현이 대문을 열지 않고 고개만 살짝 내밀어 성규를 쳐다본다.

"…케이크네요?"
"큼…. 그냥 말로만 하긴 뭐해서 하나 샀어요. 피같은 내 돈으로 직접 산거니깐 싹싹 핥아드셔야해요."
"생크림 별로 싫어하는데."
"잘 됐네요. 녹차에요."

바람빠진 웃음을 내며 대문을 열고 나온 우현이 대문앞에 앉아있는 갓파 인형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이건 또 뭡니까."
"걔가 팀장님이랑 살겠대요."
"뭐요?"

설마 이게 생일선물입니까? 성규가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거렸다.

"케이크는 들어가서 순재씨랑 성열씨랑 맛나게 드시구요. 여기 국수."

까만 봉지안에 든 후루루국수를 확인한 우현이 평소 비릿한 웃음과는 달리 정말 웃겨서 웃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특이하네요."
"뭐가요."
"받아본 생일 선물중에서 제일 특이하다구요."
"칭찬이에요?"
"네. 적어도 웃음은 줬으니깐요."
"하긴 팀장님 그렇게 웃는거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그러자 바로 정색을 한다. 진짜 성격파탄자다.

"팀장님 혹시 어릴때 크게 상처받았어요? 웃기면 웃고 아니면 아닌거지. 또 그거 말했다고 정색하기는…. 아무튼 그 갓파인형. 버리지마요."
"안 버립니다."
"진짜죠?"
"그럼 가짜로 안 버리는 것도 있습니까?"
"알았어요. 한번 믿어보죠. 그거 침실에 두세요."
"왜 하필 침실이에요?"
"인형은 침실에 놔야 마음을 안정시켜주거든요. 일종의 심리적 친구랄까? 힘든 일있거나 고민같은건 다 그 갓파인형한테 얘기하세요."
"그럼 얘가 해결이라도 해줍니까?"
"아뇨. 그 대신 고민을 들어주죠. 고민을 들어줄 대상이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아,참. 그리고 노래."
"노래요?"

큼큼. 잠시 목을 가다듬은 성규가 두 손을 잡고 마치 동요대회에 나간 어린이같은 포즈를 취하더니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축하합니다~생일축하합니다~. 사…."
"……."
"…사람같은 팀장님~ 생일 축하 합니다! 후오오오오! "
"사람같은 팀장님은 뭐에요?"
"언어유희도 몰라요? 지금 시간이… 생일 지나기 전까지 두 시간 남았네요. 그럼 두 시간 즐겁게 보내세요."

우현에게 인사를 한 성규가 미련없이 집으로 들어가버린다. 케이크과 갓파인형을 끌어안고 한 손엔 후루루 국수를 들고 잠시 멍하니 있던 우현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보면 볼수록 골때리는 사람이다. 성규가 준 선물들을 끌어안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순재와 성열이 다가와 구경하기 시작한다.

"어머. 이 인형 저번에 성규씨가 뽑아준 인형이잖아? 케이크랑 국수도 있네? 이거 다 성규씨가 준거야?"
"어."
"지금 보니깐 진짜 닮긴했네."

갓파 인형을 우현의 얼굴옆에 들이대며 말하자 우현이 인상을 쓴다.

"…진짜 닮았어?"
"그렇다니깐. 암튼 성규씨 정말 재밌는 사람이야. 생일날 인형은 나도 못 받아봤는데."
"놀리지마."

케이크와 후루루 국수를 식탁에 내려놓고 침실로 들어가, 침대 옆 선반 위에 갓파 인형을 올려놓았다.

"……."

얘가 고민을 들어준다고? 말도 안돼. 미소를 지은 우현이 갓파인형 머리부분을 툭 하고 쳤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주말 이틀 전. 룰루랄라 즐거운 기분으로 일을 하는 성규에게 자꾸 호원이 귀찮게 굴었다. 할말이 가득한 표정으로 성규를 불렀다가 막상 성규가 대답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결국 서류를 손에서 놓은 성규가 호원의 의자를 잡아돌렸다.

"왜, 왜 이러세요."
"빨리 말하세요."
"뭘요?"
"할 말 있잖아요, 저한테."
"없,없어요."
"아녜요. 호대리님 분명히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호 대리님 표정관리 진짜 안 되는거알아요?"
"…저 성규씨."
"거봐요, 있으면서."

고기 먹으러 안 갈래요? 호원의 말에 성규가 엥?하는 표정을 지었다. 고기? 고기라면 당연히 콜인데….

"그 말이 끝이에요?"
"하하하. 그냥 말하기 쑥쓰러워서."
"그게 왜 쑥쓰러워요. 그냥 말하면 되지. 그럼 퇴근하고 가요."
"저……. 그때 회식 때 갔던 곳으로 갈까요?"
"동우네요? 당연히 거기로 가야죠. 친구네인데."
"하하하하.그렇죠? 그쵸? 맞지요? 하하하하하. 그럼 일하세요. 고기는 제가 쏠게요."

금세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바뀐 호원이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아, 이 회사엔 왜 이렇게 나사빠진 사람들이 많은거야…. 복사할 서류들을 챙긴 성규가 사무실 구석에 있는 복사기로 향했다. 복사기 앞엔 우현이 서있었다. 성규가 인사를 하자 우현이 쳐다도보지않고 복사기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선 복사기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린다. 

"복사기가 잘 안 돼요?"
"아까까진 됐었는데 갑자기 말을 안 들어요."
"비켜봐요."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올린 성규가 복사기 옆구리를 발로 팡팡 찬다. 우현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때리면 말을 듣거든요."
"그럴거면 소매는 왜 걷어올렸습니까? 그러다 고장나요. 살살 하세요."
"흠…. 때려도 말을 안 듣는 것 보니 멘탈이 문제네. 어디 보자."

복사기 하단부의 손잡이를 잡고 뜯어낸 성규가 휙휙 안을 살폈다. 제일식품회사에 있을때도 주구장창 복사담당이여서 복사기에 대한 지식은 다른 사람들보다 빠삭했다.

"…찾았다! 여기 봐요. 종이 찌끄래기 꼈잖아요."
"아…. 못 봤어요."
"고기도 씹어본 사람이 씹는다고 복사기도 만져본 사람만이 알죠."

성규가 톱니바퀴처럼 생긴 부분에 낀 종이 조각을 잡았다.

"으으…. 왜 이렇게 안 빠지지."
"나와요. 제가 뽑을게요."
"아니에요. 거의 다 뽑혔어요."

조금 세게 힘을 주어 종이 조각을 잡아당겼다. 종이 조각이 뽑히는동시에 무언가 찌릿한 기분이 손가락에 느껴졌다.

"…으아. 피난다."
"거봐요! 제가 한다니깐!"

성규의 검지를 잡은 우현이 인상을 쓰며 상처를 살폈다. 꿰맬 정도는 아니지만 꽤 깊게 베였다. 언성을 높히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가 움찔거리며 당황했다.

"왜,왜 화를 내고 그래요."
"피 나잖아요!"
"베였으니깐 피가 나죠! 안 베였으면 피가 나겠어요?"
"입 다물어요. 토할 것 같으니깐."

뭐? 토? 이 또라이시키! 베인 건 난데 왜 지가 성질부리고 난리야! 성규의 손을 잡은 우현이 휴게실로 들어가자 여직원들이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성규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핏방울이 톡톡 떨어진다. 휴게실로 들어온 우현이 서랍에서 약통을 꺼내 쾅쾅거리며 거칠게 열더니 연고 뚜껑을 열어 성규의 손에 뿌직뿌직 소리가 날 정도로 가득히 연고를 짠다.

"…저기요, 팀장님."
"부르지마세요."
"왜 이렇게 오바하고 난리에요?"
"…피 싫어합니다."
"그럼 저는 좋아하는 줄 알아요?"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아무튼 피 혐오하니깐 제 앞에서 피 같은 거 보이지마세요. 이건 김성규씨 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들이 제 앞에서 지키고있는 철칙이니까 앞으로 꼭 지키세요."
"규칙도 아니라 철칙인 걸 보니까 어지간히 혐오하나 보네요."
"말 좀 줄여요, 그리고."
"지켜야할게 참 많네요. 알기 쉽게 책이라도 출간하시지. …아, 무슨 연고를 그렇게 많이 짜발라요!"

누가 보면 온몸에 다 바르는 줄 알겠네. 얼씨구! 붕대까지?

"아아, 팀장님. 붕대는 진짜 아니에요."
"가만히 있어요."
"하아. 미쳐불겠네."

결국 붕대까지 두툼히 감아준 우현이 반창고로 붕대를 고정시켜준다.

"이야…. 순식간에 병자 만들어놨네요?"
"핏방울들, 대걸레로 다 닦아놓으세요. 속 메스꺼우니깐."

이 말만 남긴 우현이 휴게실을 휙 나가버린다. 우현의 뒷모습에 대고 주먹질을 한 성규가 뻣뻣한 손가락을 매만지며 대걸레를 가지러 화장실로 향했다.


*


퇴근 후, 호원과 성규 둘이서만 고깃집으로 향했다. 예의상 우현에게 같이 가실래요?하고 물어봤지만 피곤하다며 단박에 거절 당했다.

"오늘은 자리가 없네요. 좀 기다려야겠다."
"……."

고개를 쭉 뺀 호원이 가게안을 두리번두리번거렸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 행동에 성규가 같이 두리번거리며 묻는다.

"누구 찾으세요?"
"아뇨,아뇨."
"두리번거리셨잖아요."
"그,그냥 목이 좀 아파서 이렇게 이렇게 운동. 스트레칭."

호원이 횡설수설하며 목을 마구잡이로 돌려댄다. 야외 테이블에 앉은 성규가 다리를 흔들거리며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동우가 안 보이네…. 동우 있어야 서비스도 많이 받는데…."
"그 친구분이요?"
"작게 말했는데 들렸어요?"
"네?"
"무지 작게 말했는데…."
"아…. 그냥 들렸어요."
"동우가 있으면 고기도 팍팍 주고 상추랑 그런 것도 팍팍 주거든요. 근데 걔 웃음소리가 안 들리는 걸 보니 잠깐 어디 갔나봐요."
"그렇구나…."

약간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은 호원의 성규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점점 줄이 줄어들고 성규와 호원이 들어갈때쯤 어디선가 달려온 동우가 성규의 등에 폴짝 업혔다.

"으하하하하하! 언제 왔어?"
"아, 무거워! 얼른 내려와!"

오늘은 그냥 평범한 옷에 선글라스를 낀 동우의 모습에 호원이 잠시 실망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동우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 호원이 덜컹거리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어? 저번에 봤던 분이네. 안녕하세요."

에구머니나! 선글라스 테두리가 진한 보라색이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8.

 

치이이 -
불판 위의 고기들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고 있다. 한 손에 집게를 쥐고, 다른 한 손엔 가위를 쥔 성규가 능숙하게 고기를 굽는 동안 호원은 자꾸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린다.

"친구분은 많이 바쁘신가봐요?"
"아, 동우요? 아뇨. 가만히 있어도 어련히 장사 잘 되는데 혼자 나대느라 저래요."

선글라스를 벗어 목에 건 동우가 테이블을 여기저기 옮겨가며 손님들과 신나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서빙하는 알바생보다 바쁘고 정신없어 보인다.

"쟤가 가게 손님들을 거의 다 친구처럼 대하거든요. 그래서 단골도 많구요."
"아아…."

형광등 100개 켜놓은 듯이 환한 동우의 눈웃음에 호원이 잠시 시린 눈을 만지작거렸다. 왠지 다른 곳보다 동우의 주변만 더 환한 듯한 느낌이다. 한참을 바삐 돌아다니던 동우가 드디어 성규의 테이블에 도착했다.

"우하, 바쁘다,바빠."
"나돌아다니니깐 바쁘지."
"찾는 사람이 많은걸 어떡해."
"그나저나 이거 불편해죽겠네."

붕대가 두툼히 감긴 검지 때문에 가위 잡기가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손은 또 왜 이래? 동우가 물어오자 별 거 아니라고 대답한 성규가 붕대 반창고를 떼고 꽁꽁 말려져있던 붕대를 모조리 풀어냈다. 잔뜩 처바른 연고 때문에 상처가 하얗게 불어있었다.

"요거 조금 베인 것 가지고 붕대만거야?"
"내가 한 거 아냐. 갓파같이 생긴게…. 큼, 아무튼 나 손 아프니깐 니가 고기 좀 구워라. 호 대리님. 그 쪽에 있는 건 익었으니깐 드셔도 되요. 고기 드시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네,네."

정말 고기를 구워줄 모양인지 가위와 집게를 집어든 동우가 고깃집 사장님다운 능수능란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샤샤샥 자르기 시작한다. 한참 갈비를 뜯던 호원이 동우에게 불쑥 말을 건넸다.

"…멋지네요."
"네? 뭐가요?"
"그 선글라스요."
"아, 이거요? 가게 오다가 어떤 아저씨가 만원에 팔길래 샀어요."
"한번… 써봐도 될까요?"
"그럼요. 잠시만요."

동우, 냅킨을 뽑아 선글라스에 튄 기름을 닦아낸다. 동우의 배려에 감탄한 호원이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히 선글라스를 받아썼다. 정장에 선글라스. 호원이의 쉬크한 매력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한다.

"우와. 진짜 잘 어울려요! 그 영화 이름이… 아, 테트리스! 테트리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같아요."
"하하하하하. 저도 봤어요, 테트리스. 앤디 워쇼스키가 주연이였죠."

입이 터질 정도로 쌈을 쑤셔넣고 햄스터처럼 우물거리던 성규가 잠시 멈칫하며 곰곰히 생각했다. 앤디 워쇼스키가 주연으로 나온 테트리스…. 그거 매트릭스 아니였나?


*


호원이 계산을 하는 동안 신발장 위에 놓인 섬유탈취제를 온 몸 구석구석에 골고루 뿌렸다. 매콤한 박하사탕을 입안에 잔뜩 넣고 기다리는데 호원이 한 손에 선글라스를 들고 나온다.

"어? 동우가 줬어요?"
"하하하하하. 네. 제가 됐다고~ 됐다고~ 하는데 계속 가져가라고~ 가져가라고~하셔가지구요…."

누가 보면 저 선글라스가 십만원은 하는 줄 알겠네. 하지만 호원은 선글라스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선글라스와 카운터에 서서 계산서를 정리하는 동우를 번갈아 쳐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성규씨."
"네. 왜요?"
"성규씨는 참 좋은 친구를 둔 것 같아요."
"에이. 호대리님은 서동그룹 아드님인 팀장님이랑 친구면서. 동우랑 저랑은 쨉도 안 되죠."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며 이쑤시개를 찾던 호원이 동우의 전화번호가 적힌 고깃집 명함을 한장 집어 정장 안 주머니에 스윽 넣는다.


*


호원의 차에서 내린 성규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우렁차게 조수석 문을 닫았다. 우현의 하얀 벤츠가 집앞 가로등밑에 세워져있다.

"…운전하다가 기절을 하질 않나, 피 조금 난 거 가지고 오버를 하질 않나…."

알면 알수록 또라이같다니깐. 검지 손가락을 보며 중얼거린 성규가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마루에서 TV를 보던 명수가 미세하게 풍기는 고기 냄새를 맡고는 킁킁거리며 다가온다.

"킁킁…. 고기 먹고 왔지? 동우형 가게에서."
"탈취제 뿌렸는데도 냄새나냐?"
"응. 달달한 갈비냄새."
"얼씨구. 동네 멍뭉이들이 친구하자고 안 그러디? 엄마는?"
"방금전에 아줌마들이랑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오더니 바로 뻗어서 자."

가방을 침대위로 던지고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긴 성규가 하품을 하며 화장실로 향한다. 벗은 옷들을 욕조 안 빨래통에 넣고 샤워기물을 틀자, 한참이 지난 후에야 조금씩 따뜻한 물이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드릅게 따끔거리네."

상처가 난 손가락에 비누 거품이 들어가자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쓰라려 온다. 따끔거리는 손가락을 최대한 사용하지않고 샤워를 마친 성규가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나와, 거실 서랍에서 약통을 꺼내 바닥에 철퍽 주저앉았다. 혼자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기가 힘들어 엄지 발가락으로 TV를 보고 있는 명수의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왜."
"나 이것 좀 해줘."
"뭘."
"여기 아야했어."
"뭐?"
"TV 좀 끄고 와봐. 형 다쳤다고."
"몰랐지. 봐봐."

명수, 검지손가락을 홱 채가더니 이리저리 만지작만지작거린다. 성규가 오만상을 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파!"
"쉿! 엄마 깨겠다!"
"살살해."
"알았어. 근데 왜 다쳤어?"
"묻지말고 빨리 소독이나 해줘."
"안 봐도 비디오지. 꼴값떨다가 다쳤지?"
"아니거든. 아아! 쓰라려."
"다쳐도 어쩜 이렇게 밴드 붙히기 애매하게 다치냐."

상처부위 빨간약을 톡톡 두드리고 연고까지 발라준 명수가 밴드를 붙히려다가 잠시 고민을 했다.

"왜 세로로 다쳤어? 가로로 다치지."
"내가 세로로 다쳐야지~하고 세로로 다쳤냐?"
"쯧. 거즈 붙혀야겠네."

하얀 거즈를 상처부위에 대고 반창고를 대충 잘라 거즈 주변에다가 척척 붙혀주더니 다시 TV를 향해 벌러덩 드러눕는다.

"호랑이 새끼를 키웠네. 좀 제대로 해주면 안되냐?"
"제대로 했잖아. 아, 졸려. 잘래."

TV를 끈 명수가 하품을 하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궁시렁거리며 약통을 치우는데 문득, 차라리 우현이 해줬던 붕대가 더 쌈박하고 깔끔하단 생각이 들었다.


*


오늘은 주말을 앞둔 즐거운 금요일. T.G.I Friday. 즉 Thanks God, It's Friday.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문을 열고 나오자,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우현의 차가 성규의 앞에 딱 멈춰선다.

"8시 10분. 맨날 이 시간이네요?"
"팀장님도요."

이젠 타도 되냐고 묻지도 않고 자연스레 조수석에 올라탄다.

"무슨 좋은 일 있습니까?"
"아뇨. 왜요?"
"방학 앞둔 초등학생마냥 신나보여서요."
"비유를 해도 꼭…. 내일 주말이잖아요."
"주말이 왜요?"
"쉬잖아요."
"전 집에서도 서류 보는데요?"
"누가 보래요? 전 안 봐요. 그래서 신난거고. 저번처럼 기절하지말고 운전이나 제대로 하세요."
"기절 안 했어요."
"그럼 졸도?"
"그냥…그냥 잠깐 어지러웠을뿐이에요."

자존심 세우기는. 성규가 콧방귀를 뀌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현의 운전은 언제나 항상 부드럽고 안정적이다. 운전 매너가 탄탄하고 어느 상황에서도 추월하거나 클락션을 누르는 일이 없다. 우현의 차를 타며 성규가 관찰한 결과였다. 여자들이 왜 운전하는 남자가 멋있다고 하는 지 알 것 같다. 에이,부러워. 얼른 차를 사던가해야지. 평소와는 다르게 회사 정문에 차가 멈추자 성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벨트를 풀며 묻는다.

"왜 주차장으로 안 가요?"
"전 갈 곳이 있어요. 김성규씨만 내리세요."
"네. 그럴려고 했어요."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린 성규가 회사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이제 익숙한 일터가 된 볼네드 건물을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나도 이제 대기업 다니는 회사원이지롱."

킁큭킷쿱킥 요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회전문을 열고 들어간 성규가 마주치는 회사 직원들에게 일일이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기획부실 문을 열고 들어가 여기저기 인사를 하며 자리로 향하려던 성규, 동우가 줬던 선글라스를 끼고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호원을 보고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저게 뭐하는 짓이야. 성규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자 호원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때요?"
"멋있으세요."
"하하하하. 아니에요. 아닙니다. 멋있긴 하하하하."

입이 귀에 걸리셨구만 아니긴 무슨…. 작은 거울을 꺼내어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는 호원을 무시하고 컴퓨터를 켜는 순간, 옆에서 찰칵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하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금 셀카찍은 것 같았는데. 잘 못 들었나…. 정장 마이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본격적으로 일을 하려는데 또각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직원 네 명이 성규에게 다가온다.

"저…김성규씨."
"네?"
"궁금한게 있는데…."
"저한테요?"
"네. 물어봐도 되요?"
"제가 아는 거면 성심성의껏 대답해드릴게요. 뭔데요?"
"남팀장님이랑 매일 같이 출근하던데 무슨 사이에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팀장님이랑 저요? 그거야 당연히 팀장과 사원사이죠. 비즈니스 관계라고나 할까."
"바로 옆집사는 사이라던데."

엄멈머.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성규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근데 그게 왜요?"
"진짜 팀장님 같이 동거하는 여자있어요? 진짜에요?"
"애인사이래요?"
"설마 약혼자는 아니죠? 그쵸?"

뭐야, 이 여자들. 완전 남우현 팬클럽이잖아. 근데 동거하는 여자라면 순재씨를 말하는건가? 성규가 여직원들에게 향해있던 몸을 책상쪽으로 돌렸다.

"그건 팀장님 사생활이라 제가 따로 말씀드리기가 곤란하네요. 직접 물어보시는게 빠르실텐데. 그리고 알고 있다고 해도 팀장님 사생활을 함부로 말해드릴수도 없어요. 알고 있지도 않지만. 아무튼 대답은 이만하면 됐죠?"

가시가 섞인 성규의 말에 여직원들이 숙덕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일이나 하셔. 잿밥에 관심은 말구. 성규가 혀를 차며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괜시리 짜증이 났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거야! 궁시렁거리면서 거칠게 마우스를 클릭하는데 옆에서 또 한번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대리님! 셀카 좀 그만 찍으세요! 일 좀 합시다!"
"아,해,해야죠!"

성규의 버럭에 깜짝 놀란 호원이 급히 선글라스를 벗고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


회사도 제치고 우현이 도착한 곳은 할머니가 입원해있던 병원이었다. 바깥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있는 최 여사와 할머니를 보고는 우현이 급히 차에서 내린다.

"왜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그냥 안에 계시지."
"안은 답답해. 그리고 방금 나왔어."

최 여사의 부축을 받으며 벤치에서 일어난 할머니가 우현의 차로 향했다.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아침 먹었다. 회사로 가자."

우현이 벨트를 잡으려던 손을 멈추고 뒷좌석으로 몸을 홱 돌려 할머니를 쳐다봤다. 농담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지만 할머니의 표정은 꽤나 담담했다.

"할머니 오늘 퇴원하셨어요."
"오늘 퇴원한 거 나도 알아."
"그럼 오늘 운전기사가 저라는 것도 아셔야죠. 집으로 모셔다드릴테니깐 푹 쉬세요."

과감하게 핸들을 집쪽으로 돌렸다. 말을 해도 안 들어먹는 우현을 잘 아는 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


회사 점심 시간. 성규와 마주보고앉은 호원이 잔뜩 집어온 핫도그를 먹으며 회사 여직원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 안에 여직원들은 우현이와의 신데렐라 로망스를 꿈꾸고 있어요."
"신데렐라 로망스요?"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로망스죠. 부잣집 아들이랑 가련한 여주인공이 만나 서로 사랑을 하게 되는 그런 꿈의 로망스."
"그러니까 팀장님이랑 어떻게 잘 되서 결혼까지 골인하는걸 원하고 있는거에요?"
"그렇죠."
"호 대리님. 신데렐라 원작 결말이 뭔지 아세요?"
"뭔데요?"

성규가 수저를 손에서 잠시 내려놓았다.

"우리가 아는 신데렐라 스토리는요, 독일의 그림형제라는 작가가 샤를 페로의 원작에서 잔인한 부분만 빼고 아름답게 각색한 내용이에요. 원래 결말대로라면 못된 언니들과 계모는 새들한테 눈이 쪼여 먹히고 평생 장님으로 살아가게되죠. 신데렐라 로망스가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건데 신데렐라 로망스를 바라고 있어, 쯧."
"그래도 신데렐라 로망스는 모든 여자들이 한번쯤은 꿈꾸지않나요?"
"신데렐라 로망스에서 신데렐라로 출연할지 계모로 출연할지 아니면 언니들로 출연하게될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신데렐라 로망스를 바란대요? 마음맞는 사람이랑 하는게 결혼이에요. 얼굴따지고 능력따지고 집안따져서하면 그게 결혼입니까? 계약이지. 종신 계약."

성규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진다.

"…근데 왜 이렇게 흥분해요? 무섭게…."
"제가 세상에서 제일 경멸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 노력없이 성공하려는 사람들이거든요."
"우현이랑 마인드가 똑같네요? 우현이도 노력없이 성공하려는 사람들 싫어하는데…."
"아무튼간에 제가 지식 하나 알려드렸으니깐 핫도그 하나만 먹을게요."

호원이 울상을 지었다. 알려달라고 한적없는데….


*


오후 3시. 오늘도 이쁘게 차려입고 레디락에 온 성열이 항상 부끄부끄하던 표정과는 달리 잔뜩 부루퉁해서는 오렌지 주스에 꽂힌 빨대만 잘근잘근씹어대고 있다. 자리에 앉은지 한 시간이 다 되어가지만 명수와 말 한 마디조차도 못 나눴다. 그렇다고 명수가 성열을 못 본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반대편 테이블에 앉아있는 여자들에게 있었다. 신몰남 명수에게 뿅 가서는 시도때도 없이 명수만 불러대는 통에 아예 명수 담당 테이블이 되어버렸다. 성열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게다가 가끔씩 여자들에게 눈부신 웃음을 지어보일때면 가방끈을 잡은 성열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

결국 가방을 챙겨 일어난 성열이 주스값을 계산하고 레디락에서 나와 터덜터덜 정류장으로 향했다. 날씨는 좋은데 기분은 끝도 없이 우울하다. 정류장 벤치에 털썩 앉은 성열이 답답한 한숨만 연거푸 내뱉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명수가 밉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많이 밉다. 명수한테 짜증도 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하고 벤치에서 일어나 버스에 올라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큰 소리로 불러세웠다.

"허억…허억. 이거…허억."

검은색 앞치마를 맨채로 달려온 명수가 성열의 스마트폰을 건넸다.

"이거…하아, 성열씨 자리에 있던데 성열씨 거 맞죠?"
"…아,네."
"계속 불렀는데 안 들리셨나봐요. 하아…."

명수가 숨을 가다듬으며 환히 웃는다. 밉다는 말 취소. 솔직히 인간적으로 너무….

"…감사합니다."

너무……멋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퇴근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우현은 회사에 출근하지않았다. 볼일있다더니 회사를 빠질 정도로 급한 일인가? 퇴근길에 유용했던 교통수단이 없어지자 어쩔 수 없이 버스와 지하철을 타야했다. 퇴근길에 앉을 자리 없을텐데…. 좋은 꾀가 생각난 성규가 동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짱동!"
[어어.]
"오늘은 불금불금! 불타는 금요일! 가게야? 술 한 잔 할까?"
[지금 단체 손님 몰려서 무지 바빠! 끊어! 나중에 통화하자! 뿅!]
"뭐 임마?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가 끊겼다. 이게 바쁘다고 친구를 내쳐? 성규가 입을 삐죽거리다가 퇴근 준비를 하는 호원에게 의자를 질질 끌며 다가갔다.

"호 대리님! 퇴근하고 어디가세요?"
"당연히 집에 가야죠."
"아…. 그러시구나."

호원의 차도 못 얻어타게생겼다. 저번에 보니깐 반대쪽에 살던데…. 결국 혼자 쓸쓸히 회사를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장동우 말고는 같이 술 마셔줄 사람도 없네…. 에이씨. 하늘은 또 왜 저렇게 시커먼거야."

평소 간간히 보이던 별마저 안 보이는 새까만 밤하늘이다. 콩나물 시루처럼 퇴근하는 회사원들로 빽빽한 지하철에 올라타 집과 가장 가까운 역에서 내려 다시 정류장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우현의 차로 오고갈때는 금방이었는데…. 한참 정류장을 향해 걷던 성규가 길가의 야외포장마차를 발견하고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직도 그 이모가 하고 있으려나?"

술도 땡기고 집에 바로 들어가기엔 아쉬운 날이라서 야외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테이블 사이로 분주히 서빙하고 있는 주인이모는 예전 성규가 면접에 떨어진 슬픔으로 술에 취해 엉엉 울때마다 다독여주던 그 주인이모였다.

"이모!"
"어어! 오랜만이네! 이름이…성규! 그래,맞다,성규! 왜 이렇게 간만에 왔어?"
"그냥 좀 바빴어요. 취직했거든."
"드디어 취직했어? 맨날 와서 질질 짜고 가더니만."
"에이. 그게 언제적일인데….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랑 김밥이랑…홍합탕이랑 오돌뼈 주먹밥이랑 순대 주세요. 간이랑 허파많이많이!"
"먹는 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기다려. 금방 가져다줄게."

나무젓가락을 꺼내 손으로 돌돌 말며 미리 입을 푸르르하고 풀었다. 오늘은 마시고 먹고 죽는거야.

 

*

 

저녁이 되서야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나온 우현이 서둘러 차 시동을 걸었다. 저녁이 되기전에 돌아가려던 계획은 할머니가 여러 얘기와 잔소리로 우현을 붙잡아놓으면서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넓디 넓은 저택이지만 이상하게 저 집 안에만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라디오를 켜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팝송이 흘러나왔다. 팝송을 따라부르며 차 안의 모든 창문을 열자 시원하고 매쾌한 밤공기가 한가득 들어온다. 괜시리 술이 생각나는 밤이다.

"…많이 밀리네."

차들이 시원하게 나아가질 못하고 조금씩 찔끔찔끔거리며 움직인다. 앞 차와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전진하는데 매쾌하던 밤공기에 미미한 음식냄새가 섞여들어왔다. 어디서 들어오는 냄새인가했더니 길가에 주황빛을 내며 장사중인 야외포장마차가 보인다. 대학다닐땐 순재와 자주 가곤 했었는데….

"…어?"

그냥 지나치려던 포장마차 야외 테이블에 익숙한 얼굴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

 

*

 

잡다한 안주가 가득한 테이블 위에 사이다 한 병,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이 깔끔히 비워진 채로 세워져있다. 평소 소주 한 병이면 헬렐레하는 주량이지만 술이 땡기는 날이라서 그런지 취했는데도 더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어라. 끅. 다 먹었다."

소주 방울이 톡톡 떨어지는 빈 소주병을 내려놓은 성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하더니 소주병을 집어들고 이모에게 '이몽~ 나 한 병 더 가져갈게!'하고 소리친다. 푸흐흐 웃으며 뒤를 돌자 어느새 자신의 테이블에 우현이 앉아있다.

"…허깨비인가."

눈을 슥슥 비벼봤지만 나무젓가락을 뽑고 손으로 돌돌 비비고 있는 남자는 확실한 우현이 맞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온 성규가 우현에게 홱 삿대질을 한다.

"우이씨, 내 가방!"

소주병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우현이 깔고앉은 자신의 서류가방을 힘을 줘 잡아뺀다.

"혼자 먹으면서 뭘 이렇게 많이 시켰어요?"
"너 무어야. 너 언제 왔어"
"지금 반말?"
"내가 끅, 너보다 두 살이나 많아서 반말했다,이 시캬."

우현이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주 단단히 취한 모양이다. 눈도 풀린 걸 보니.

"둘러보세요. 빈 자리가 있나."

성규가 고개를 휙휙 돌려 주위 테이블을 확인했다. 모든 테이블이 손님들로 가득 차있다. 대부분 넥타이를 맨 회사원들이다.

"언제 다 찼지. 에이씨…."
"좀 먹어도 되죠? 저녁을 시원찮게 먹어서요."
"어어! 누가 먹으래!"

김밥을 향해 젓가락질을 하려고 하자 성규가 우현의 손등을 찰싹 내려친다.

"치사하게 이럴 거에요?"
"그래. 치사하게 이럴 거다."
"……."
"……뭘 봐 이 시캬."
"…저기요! 여기 테이블에 우동 한 그릇만 주세요."

끅! 딸꾹질을 한 성규가 새로 가져온 소주의 뚜껑을 따고 자신의 빈잔에 소주를 따랐다.

"……너도 따라주까?"
"운전해야해요."
"그럼 말고."
"그리고 우리가 아직 반말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말 좀 가려서 하죠?"
"니가 뭔데 반말할 사이의 옳고 그름을 따져?"
"그럼 나도 반말할까?"
"이게 형한테 주글라고."

단숨에 소주잔을 비운 성규가 '크으~'하며 순대 간을 집어 입에 넣는다.

"생긴건 와인만 먹게 생긴 사람이 여긴 어쩐 일이래."
"와인만 먹게 생긴건 어떻게 생긴건데요?"
"거울 안 보고 살아?"
"자주는 안 봐요."
"그럼 보고 살아, 앞으로…. 끅."
"지금 이렇게 반말하고 추태부린거 내일 아침이면 후회하실텐데?"
"후회는 과거에 목 매다는 사람만 하는거야, 짜샤. 난 다 잊을거거든? 그러니깐 너도 잊어라…."

주인이모가 우현의 앞에 따끈한 우동을 내려놓았다. 서동그룹 큰 아들이 포장마차에서 우동이라니. 언밸런스한 모습에 성규가 킥킥거리며 웃는다.

"왜 웃습니까. 사람 기분나쁘게."
"서동그룹의 아들이 포장마차에서 우동이나 먹고 있구…."
"……."

우현의 젓가락질이 잠시 멈춰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뭐를? 서동 ?"
"…네."
"며칠전에 호대리님이 말해줘서 알았지. 왜? 난 알면 안 되는 기밀사항이라도 됐었나?"
"그건 아니죠. 그 쪽이 뭐라고."
"참나. 내가 얼마나 잠재력이 많은 사람인데…."
"근데 왜 이호원은 호대리님이고 나한텐 반말합니까?"
"너는 말야… 그래,넌…재수가 없다. 맞아, 재수가 없어."

빈잔을 다시 채우더니 이번에도 역시 원샷한다. 슬슬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부럽다…."
"뭐가요."
"너…."

성규가 젓가락으로 우현을 콕 집어 가리킨다.

"머니머니도 많지, 집도 있지, 붕붕 차도 있지…."
"부러우면 지는거에요."
"부러워해야 이길 수도 있는거야."
"…그런가."
"그래도 조금은 고맙다…. 끅."
"나한테요?"
"그래애…. 너 덕분에 취직도 하고 빚도 갚을 수…."

자기도 모르게 꺼낸 '빚'이라는 말에 성규가 아랫입술을 삐죽내밀고 울상을 지었다.

"우리 집 빚이 저어~기 언덕보다 높을껄?"
"재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체감이라는게 은근 정확한 법이거드은…."

어느새 우현은 우동도 먹지않고 자기도 모르게 성규가 하는 술주정을 다 들어주고 있다. 참 희한한 일이다.

"나 사실 피아노 되게 잘 쳐! 너도 봤지? 딩동딩동 잘 치는거. 난 참 재능이 많았는데…."
"지금 자화자찬하는거에요?"
"그래, 시키야. 내 자랑 좀 했다. 불만있냐?"
"자꾸 시키시키거리는데 듣는 시키 기분 좀 나쁘네요."
"그럼 골라내고 듣던가…."
"…돈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고 돈 밖에 없는 사람은 더 가난하다는 말 알아요?"
"어떤 나사풀린 놈이 그딴 소릴 지껄여. 쯧."
"김성규씨는 돈 말고 많은 걸 가졌잖아요. 재능도 있고 지식도 많고."
"어쭈. 재수탱이가 왠일로 칭찬을?"
"재수탱이요?"
"그래, 이 재수탱아."

우현이 피식 웃자 성규가 눈을 바싹 부릅뜬다.

"그렇게 웃지말라고 짜샤…. 웃을거면 하하호호 소리내서 웃어. 그렇게 바람빠진 튜브처럼 피식피식 웃지말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김성규씨 눈이 아예 감기려고 하니까."
"뭐어? 이씨…. 너 지금 나 눈 작다고 놀리는 거지…! 이 새키 이거."

성규가 휙 손을 휘둘러 우현의 머리통을 때린다. 졸지에 얻어맞은 우현이 얼이 빠진 표정을 짓자 성규가 두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휙 벌린다.

"걱정마. 조만간 쌍커풀 수술해서 개구리, 아니지. 개구리는 너무 작으니까…아! 소새끼! 그래! 소새끼 눈망울처럼 커다란 눈이 될테니깐 그때까지 놀리기만 해봐. 너 주거~ 이씨…."
"왜 성형을 해요. 그 눈도 괜찮은데."
"니가 내 눈으로 28년 살아보던가…."

가방을 챙겨 일어난 성규가 주인 이모한테 다가가 우현의 우동값까지 계산을 한다.

"내가 너 우동 계산했다! 그러니깐… 나 차 태워줘…."

우현이 결국 웃고 만다.


*


해롱거리는 성규를 부축하며 초인종을 누르고 명수에게 성규를 떠넘긴 우현이 어깨를 두드리며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우현에게 술 냄새가 확 풍겨오자 순재가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막는다.

"어후. 술 냄새. 술 마셨어?"
"나 술 마시고 운전 안 하는 거 알잖아."
"근데 술 냄새가 왜 나지…."
"김성규씨 술 취해서 잠깐 부축했는데 옮아왔나 봐."
"성규씨 술 많이 취했나 봐? 이렇게 술 냄새가 밸 정도면."
"말도마. 어휴…."
"저녁은 먹었어?"
"응. 성열이는? 자?"
"일찍 잠들었어. 오늘도 나갔다 왔거든."
"짜식. 대견하네. 나 피곤하다. 먼저 들어가 잘게."
"응."

방안으로 들어온 우현이 정장을 입은 채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내가 너 우동 계산했다! 그러니깐… 나 차 태워줘….'

정말 난생처음 만나보는 타입이다. 우현이 서동 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태도가 변하곤 했다. 선물을 바친다거나 아부를 한다거나. 그러나 성규는 남달랐다. 어째 더 막 대하는 것 같다.

"…재밌네."

그래. 김성규씨는 참 재밌는 사람이다.


*

 

 

학수고대하던 토요일.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에 앉아있는 성규의 표정은 어두침침했다.

"…아으, 낯깎여서 못 살아…."

어젯밤, 술에 잔뜩 취해 우현에게 꼬장을 부린 게 생각나 눈앞이 막막해져 왔다.

"아아, 난 몰라….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술 취해서 생쑈를 한 거지."

바로 옆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던 명수의 말에 성규가 자기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래도 토는 안 해서 다행이다…."

정말 토까지 했다면 날 앞마당에 파묻었을지도 몰라. 일단 사과는 해야 될 것 같아 핸드폰을 집어들고 전화번호부에서 우현의 연락처를 찾았다. 심호흡을 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기본 컬러링인 봄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잠시 뒤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여보세요'도 아니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네'란다. 소름 돋아서 멀미가 날 것 같다.

"…어디세요?"
[집입니다.]
"저…제가 어젯밤은,"
[지지대는 언제 만들어주실 겁니까?]
"…네?"
[지지대가 없으면 나무가 휜다면서요.]
"그,그렇죠."
[만들어주던지 아니면 사서 오던지.]

그러더니 전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던 성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폴더를 닫았다. 뜻밖에 별말이 없다. 그래서 더 무섭다.

"어제 팀장이 나 부축해서 왔을 때 있잖아. 팀장도 술 취했었어?"
"아니. 되게 멀쩡했어. 말도 또박또박하고."

근데 왜 이러지…. 분명 한 소리 들을 것 같았었는데….

"야. 일어나."
"왜?"
"옆집 가야 해."
"옆집? 옆집은 왜?"
"닥치고 연장 챙겨."

이거라도 안 하면 난 죽어.


*

 

 


"…김성규 죽여버려."

여리 꽃밭에 앉아 호미로 지지대 꽂을 자리를 파고 있던 명수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성규가 못 들은 척하며 자신의 옆에 쭈그려앉아있는 성열에게 물었다.

"근데 순재씨가 안 보이네요?"
"마트…갔어요."
"아아. 마트,"

'찌릿' 벤치에 앉아있는 우현과 시선이 마주치자 성규가 얼른 꽃밭으로 시선을 돌린다.

"가셨…구나. 큼큼…. 그나저나 성열씨는 몇 살이에요?"
"저 스물네살이요…."
"어? 스물넷이요? 우리 명수랑 동갑이네? 둘이 친구로 지내면 되겠다!"

성규가 박수를 짝 치며 말하자 성열이 얼굴이 빨개져서는 손가락으로 흙만 만지작거린다. 명수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호미질만 한다.

"그냥 편하게 '명수야'하고 불러요. 친구끼리."
"아… 괘,괜찮아요."
"에이. 얼른."
"아아…."

성열이 곤란해하며 무릎에 얼굴을 묻자 벤치에 앉아있던 우현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가온다. 우현의 눈빛이 '적당히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성규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여기 흙 부분 좀 잡아봐봐."
"여기?"
"응."

성규가 흙 부분을 뭉쳐 잡자 널빤지 기둥을 땅에 쑤셔 박은 명수가 망치질을 한다. 기둥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박아넣은 명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탁탁 털었다. 삼각형 모양의 지지대가 금세 완성되었다.

"이건 나무를 심고 나무가 아직 땅에 뿌리를 못 내렸을 때 설치하는 거에요. 어느 정도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렸을 때 빼주시면 돼요."
"김성규씨가 알아서 와서 빼주시면 되겠네요."
"왜 제가 그걸…."
"왜요? 하기 싫으세요?"
"…누가 싫댔어요. 제가 해야죠, 다름아닌 제가."

내가 저 재수탱이앞에선 다신 술을 안 마실 테야. 우현과 명수와 성열이 손을 씻으러 꽃밭 옆에 있는 수돗가로 향했다. 우현이 분사 호스를 잡고 살짝씩 뿌리는 물에 성열과 명수가 나란히 손을 씻는다.

"김성규씨는 손 안 씻습니까?"
"씻어야죠."

소매를 걷은 성규가 수돗가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흙묻은 손에 물방울이 톡톡톡 떨어진다.

"안 뿌려주세요?"
"뿌리고 있잖아요."
"…물 몇 방울로 손을 어떻게 씻어요."
"더 틀어줘요?"
"네. 그래야 씻죠."
"알았어요, 그럼."

우현이 분사 호스를 잡은 손에 세게 힘을 줬다. 푸슉! 굵은 물줄기가 분사되면서 성규의 소매를 잔뜩 적셨다. 우현, 피식 웃는다. 성규가 후우- 하고 앞머리를 불며 마음속으로 참을 인 자를 새겼다. 어제 지은 죄가 있으니 내가 참아야지. 참자, 참어.

"누가 샤워한댔어요? 손만 닦게,"

푸슈슈슉! 조금 전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이 성규의 얼굴과 머리를 적셨다. 젖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후우. 그래. 이것도 참아야지. 성규가 푸흐,하고 입에 들어간 물을 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리자 또 한 번 거센 물줄기가 얼굴을 때린다. 옘병 이젠 못 참겠다.

"아, 실수. 죄송해요."

분사 호스를 내려놓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우현이 벤치 쪽으로 향한다. 쭈그려 앉은 채로 굳어있던 성규, 분사 호스를 덥석 잡아들고 벌떡 일어나더니 우현의 뒷모습을 겨냥했다. 내가 두 번은 참는데 세 번은 못 참지. 성규 손에 들린 분사 호스에서 우현을 향해 거친 야생마같은 물줄기가 뿜어져나온다. 시원한 물줄기는 우현의 뒷모습을 흠뻑 적셨다. 그 모습을 보던 명수와 성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한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9.

 

뒤가 잔뜩 젖은 우현이 딱딱히 굳은 채로 홱 뒤돌자 성규가 얼른 분사 호스를 내려놓는다.

"어어. 저도 실수. 이게 당기면 물이 나가는 거였구나…."

성규가 시치미를 떼며 환히 웃자 비릿한 웃음을 지은 우현이 천천히 성규에게 다가갔다. 성규, 잔뜩 쫄아서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난다. 도망가려고 뒤돌았지만 목덜미를 잡혀버렸다.

"아아! 놔요! 놔! 팀장님이 먼저 시작했잖아요!"
"시작은 어젯밤에 김성규씨가 하지 않았나?"

하늘을 향해 몇 번 물을 분사한 우현이 분사 호스를 정확히 성규의 정수리에 꽂았다.

"지,진짜 뿌리기만 해봐요! 아악! 이거 놔!"
"지금 또 반말했습니까?"
"…요! 이거 놔요!"

콧방귀를 뀐 우현이 그대로 물을 분사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물이 온몸을 타고 흘러내린다. 오슬오슬 돋아오는 소름에 성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울 자리 봐가면서 발 뻗으세요."
"……."

우현이 그제서야 성규를 놓아준다. 잠잠히 있던 성규가 갑자기 우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입안에 머금고 있던 물을 우현에 얼굴에 내뿜었다.

"푸훕!"

성규의 아밀라아제가 섞인 물이 우현의 얼굴을 때렸다.

"명수야! 튀어!!!!"
"어어? 형! 같이 가!"

성규가 명수의 손을 잡고 후다닥 마당을 도망쳐나왔다. 택시에서 내리던 순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성규씨!"
"아,안녕하세요!"
"어머, 왜 이렇게 잔뜩 젖었어요?"
"그,그게…아무튼 다음에 뵈요!"

성규와 명수가 대문을 발로 차듯이 열고는 재빨리 들어간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본 순재가 우현이 서있는 마당으로 들어갔다.

"성규씨랑 명수씨 왜 저렇게 급하게…."
"……."
"우현아?"

수돗가에 서서 망부석처럼 굳어버린 우현이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순재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성열을 쳐다보자 성열이 머리를 긁적이며 순재의 짐을 받아 집안으로 들어간다.

"너도 젖었네? 물놀이라도 한 거야?"
"…후우."

손으로 젖은 얼굴을 쓸어내린 우현이 분사 호스를 발로 홱 걷어찬다.


*


집으로 돌아와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성규가 옷을 갈아입고 거실 마루에 앉았다.

"팀장아저씨랑 많이 친한가봐?"
"팀장아저씨는 무슨.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데."
"그럼 팀장형님인가."
"시끄러."
"미취학 아동들처럼 즐겁게 잘 놀던데?"
"넌 그게 즐거워보였냐?"

난 지금이라도 그 놈이 쳐들어올까봐 심장이 쿵덕거리는데….


*


주말엔 거의 헬스장으로 향하던 호원이 오늘은 왠일로 전신거울을 보며 옷을 차려입고 있다. 휘파람까지 불면서 말이다.

"좋았어."

향수까지 두어번 뿌린 호원이 차키를 들고 오피스텔을 나오려다가 다시 들어오더니 동우가 줬던 선글라스를 챙긴다. 멋드러지게 차려입고 호원이 향한 곳은 동우의 고깃집이었다. 선글라스를 낀 호원이 고깃집 안으로 들어가며 동우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저녁시간 전인데도 불구하고 고깃집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몇 분이세요?"
"아…저 혼자요."
"이 쪽으로 오세요."

알바생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호원을 이상한 눈으로 보며 가운데에 비어있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동우의 웃음소리가 들리질않는다.

"동우씨,아니아니 그 사장님은 안 계신가요?"
"잠깐 볼일때문에 나가셨는데 곧 오실 거에요."

물수건을 뜯어 손을 벅벅 닦은 호원이 다 쓴 물수건으로 바나나를 만들며 동우를 기다렸다. 워낙 사고체계가 단순하고 복잡하지않은 호원은 동우가 남자라는 사실이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첫눈에 마음에 들었고 친해지고 싶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무턱대고 고깃집에 찾아온 것이었다. 휘파람을 불며 물수건으로 학도 접어보며 시간을 때우는데 문득 옆자리에 앉은 커플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지금 그 새끼를 만나겠다는거야 뭐야!"
"누가 만났댔어? 왜 이렇게 앞서나가! 그냥 오빠 친구들 중엔 그 오빠가 제일 괜찮은 것 같다고 했지!"
"와 나 미치겠네. 넌 지금 그게 우리 1주년에 할 말이냐?"
"진짜 오빠랑은 뭔 말이 안 통해! 그리고 1주년이 뭐 별거라고…."
"뭐? 이런 우라질. 너 지금 뭐라그랬어!"

고깃집 안의 손님들이 모두 다 그 커플을 구경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물수건으로 여러 작품을 만들던 호원이 고깃집 안으로 들어오는 동우를 발견하고는 잠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색 티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동우의 패션엔 보라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알바생에게 대충 상황 설명을 들은 동우가 서둘러 그 테이블로 다가갔다. 근육질로 우락부락한 남자는 술이 어느정도 들어가 얼굴이 벌게진 상태였고 여자도 마찬가지로 술에 취해 언행의 거침이 없어보였다.

"저 일단 흥분 좀 가라앉히시고…."
"넌 뭐야!"

근육질 남자가 동우를 밀쳤다. 동우가 살짝 비틀거린다.

"오빤 그게 문제야!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고 내 생각은 하기나해?
"니 눈엔 내 단점만 보이지? 이기적인 니 모습은 괜찮은 줄 아냐? 너 내 카드 훔쳐서 몰래 빽 샀을때 내가 그때도 이해해줬지? 기억이나 나냐?"
"겨우 백만원짜리 산거가지고 그러는거야? 진짜 치사하고 아니꼬와서. 그럼 헤어지면 되겠네! 힘만 쌔고 무식한, 꺄악!"
"에이씨! 아가리 안 다물어!"

근육질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술이 들어간 탓이다. 고깃집 안이 술렁거렸고 깜짝 놀란 동우가 머리채를 잡은 남자의 손을 잡아말렸다.

"소,손님. 그래도 여자분한테 이러시면…!."
"저리 안 꺼져!"
"우악!"

근육으로 울퉁불퉁한 손이 동우를 거세게 내팽겨친다. 동우가 테이블에 한번 부딪힌 뒤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테이블이 엎어져 접시들이 깨지면서 고깃집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남자가 뺨을 때릴 모양인지 손을 번쩍 들었을때 선글라스를 쓴 호원이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이 에테몬같은 놈은 또 뭐야!"
"에테몬? 그게 뭔데?"
"이 새끼 뭐야!"

근육질 남자가 호원의 손을 뿌리치려했지만 호원의 아귀 힘에 손이 스물스물 밑으로 내려간다. 헬스로 단련된 호원의 힘은 그리 쉽게 내칠만한 게 아니였다.

"여기는 쌈박질 하는 곳이 아니에요. 쌈을 싸먹는 곳이지."
"뭐,뭐?"
"암튼 나가서 해결해요."

남자의 손을 떠밀듯이 놓자 남자가 조금 진정이 됐는지 욕을 뱉으며 여자를 데리고 사라졌다. 선글라스를 벗어 수트 앞주머니에 꽂은 호원이 바닥에 넘어져있는 동우를 부축해 일으킨다.

"괜찮아요? 어디 안 다쳤어요?"
"아…피난다."

팔꿈치 살갗이 벗겨져 피가 맺혀있었다.

"어? 그때 성규랑 오셨던 분 맞죠?"
"네. 이호원이라고 합니다. 그나저나 팔꿈치 많이 까졌네요."
"카운터 서랍에 연고랑 밴드있어서 괜찮아요."

알바생들이 테이블을 세우고 서둘러 대걸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술렁거렸던 고깃집은 다시 고기굽는 소리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로 가득찼다.

"죄송해요. 고기 드시러 왔는데 불편하게…."
"아닙니다. 여자를 때리는 인간들은 면상을 불판에 확 지져버려야해요. 이리 주세요. 제가 발라드릴께요."
"아, 감사합니다."

세심한 손길로 동우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준다.

"보라색 좋아하세요?"

호원이 기겁하며 물러난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양말이요."

동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려보니 바지 밑으로 보라색 양말이 살짝씩 보이고 있다.

"그냥 보라색을 보면 마음이 편해져서요. …다 됐다."

밴드까지 곱게 붙혀준 호원이 물티슈를 뽑아 연고가 묻은 손가락을 닦아낸다.

"다음에 또 그런 놈들 오면 상대하지말고 경찰부르세요. 그게 편하니깐."
"우하하하. 그래야겠어요."

동우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환히 웃는다. 이상하다.

"……."

보라색 없이 흐뭇한 이 기분은 뭘까.


*

 

 

 

 

 

 

"덕분에 20번도 넘게 했어요."
"…뭐를요."
"세수를요."

성규가 헛기침을 하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두 눈을 잠시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월요일이다. 그래도 야박하지는 않은 우현이 너그러히 성규를 차에 태웠다. 성규가 조금 불쌍한 척을 하긴 했지만.

"도마뱀도 급하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법이에요."
"차라리 꼬리면 말도 안 합니다. 더럽게 침을…."
"침이라뇨! 물이랑 섞여서…큼. 양치 꼬박꼬박 하거든요? 걱정마세요. 염증같은건 안 날테니깐."
"그리고 다음부턴 술 좀 적당히 드세요."
"걱정해주시는거에요?"
"네."
"…정말요?"
"김성규씨가 다치거나 술취해서 깡패들한테 얻어터지는건 걱정이 안 되는데 김성규씨때문에 피해입을 사람들이 걱정되서요. 몹시."

말 참 밉게 하네. 그래도 아직까진 죄가 남아있어 성규가 찍소리도 하지않고 인중을 긁적거렸다. 문득 성규가 취중에 했던 말이 떠오른 우현이 일부러 담담한 말투로 말을 꺼냈다.

"쌍커풀 수술은 하지마요. 돈 아까우니까."
"…뭐라구요?"
"김성규씨 입으로 직접 그랬잖아요. 소새끼처럼 커다란 눈이 되겠다고."
"제가 언제요! 그리고 돈이 아깝다뇨! 그것도 나름대로의 투자라구요."
"투자도 가망이 있는 곳에 하는 게 투자입니다."
"지금 제 눈에 가망이 없단 얘기에요?"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없다고 생각할까요? 내 얼굴인데."
"제 말은 눈만 고칠거면 아예 하지말란 소립니다."
"왜요."
"눈만 문제가 아니니깐."
"허이고. 그러는 팀장님은 갓파닮은 주제에 남의 외모가지고 이래라저래라할 입장은 못 되지않아요?"
"뭐요? 갓파요?"
"인신공격은 팀장님이 먼저 했어요."
"내려서 버스타고 갈래요?"
"협박하시는거에요?"
"협박으로 들었다면 협박이고 부탁으로 들은거면 부탁이죠."
"그럼 전 거절할께요. 거절로 들으세요."

둘 다 조금도 지지않고 대꾸한다. 궁시렁거리던 성규가 창문에 붙어있는 모기를 향해 손을 내려쳤다.

"아,놓쳤다. 팀장님쪽으로 갔어요."
"뭐가요."
"모기요. 새까만 모기라서 잡아야할텐데…. 어, 팀장님 허벅지!"

성규의 손이 우현의 허벅지를 세게 내려쳤다.

"아아! 뭐하는 짓입니까!"
"모기모기! 아, 도망갔다. 가만히 좀 있어봐요!"
"김성규씨나 가만히 있으세요, 좀! 지금 운전하는거 안보여요?!"
"제가 운전대 내려쳤어요? 그냥 운전하세요."

모기가 위잉하고 날아가더니 정확히 우현의 그 곳에 안착했다.

"……."
"여,여긴 안돼요."

우현의 얼굴에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다행히 다시 날아오른 모기가 우현의 가슴팍에 살포시 앉았다.

"어! 팀장님 가슴팍에!"
"윽!"
"잡았다!"

신이 난 성규가 휴지를 뽑아 터진 모기의 시체를 닦아냈다.

"저한테 고마워해야해요. 제가 안 잡았으면 차안에 숨어있다가 팀장님 피를 쪽쪽 빨아먹을 수도 있었을 놈이니깐요. 뭐…팀장님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사람이긴하지만."

우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주방에 서서 설거지를 하는 순재에게 성열이 쪼르르 다가왔다.

"이젠 너 어디가는지 궁금하지도 않다,뭐."
"…저…누나."
"왜?"
"…나 용돈 좀."

용돈? 순재가 되묻자 성열이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갑자기 왠 용돈? 설거지를 마친 순재가 물기를 닦고 방으로 들어가 지갑을 꺼냈다.

"얼마 정도?"
"그냥…적당히."
"적당히가 얼만데?"
"…음…."

성열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였다.

"오만원이면 오만원이지 삼만원은 뭐야."

순재가 오만원 짜리를 꺼내 성열에게 건넸다.

"근데 용돈은 왜?"
"쓸데가 있어서…."
"그것도 비밀이야?"
"…미안."
"치이. 그래도 오늘은 일찍와. 저녁에 스테이크할꺼니깐."
"응. 알았어."
"조심히 다녀와!"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성열에게 소리친 순재가 기분좋게 웃으며 욕실로 향했다. 핑크색 칫솔에 치약을 짜고 양치를 하려는데 갑자기 속이 메슥거린다.

"우윽…하아."

간신히 토기는 넘겼지만 계속해서 속이 울렁거리며 얼굴에 열도 오르기 시작했다.

"…피곤해서 그런가."

조금 나른한 기분이 들긴했다.

"한숨자면 낫겠지…."


*


널찍한 기획부실, 키보드 소리와 종잇장 넘기는 소리만 들린다. 모두 모니터를 보며 예리한 눈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제일 끝에 위치한 우현의 눈은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예리했다. 성규 역시 예리한 눈빛으로 빌어먹을 복사기의 버튼을….

"이러다 복사기랑 합체하겠네."

원래 신입사원이 하는 일이 이런 허드렛일이지만 신입사원이라도 귀찮은 건 귀찮은거다.

"복사해주는 알바를 쓰던가… 쯧."

학교다닐때와 비슷하다. 학교 다닐때에도 쉬는 시간이랑 점심 시간만 기다렸는데 회사에 입사한 지금도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만 기다리고 있다.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아,배고파."

다행히 점심시간 10분 전이다. 조금만 참으면 돼, 조금만…. 배를 어루만지며 복사한 서류를 배달한 성규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호원과 시시콜콜한 농담을 하며 점심을 먹으러 갈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우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며칠전까지만 해도 같이…! 하아, 알았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

핸드폰을 집어던지듯이 책상에 내려놓은 우현이 정장 마이를 들고 빠르게 사무실을 나갔다. 모든 직원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우현이 열고나간 문만 멍하니 쳐다봤다.

"갑자기 왜 저래요?"
"모르겠네요. 무슨 일 난 거 같은데…."

호원과 성규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만 끔벅끔벅거렸다.


*


'우현아, 놀라지마. 할머님이 방금 돌아가셨어. 원래 고혈압도 있으시고 심장도 약하셨잖아. 정기검진 받으시다가 쓰러지셨는데….'

청천벽력이라는 말이 지금 상황에서 쓰는 말인 것 같다. 우현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병원 복도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이미 최여사와 아버지, 회사 고위 관계자들, 그리고 사촌들까지 병원에 다 모여있었다.

"말도 안돼."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다.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 생각도 안나는 우현과는 달리 장례식장과 발인장소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서동그룹을 키워온 할머니의 죽음은 경제 뉴스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기자들이 찾아오기도 했고 주식 변동에 관련된 기사도 나돌기 시작했다. 소식은 빠른 속도로 퍼져 어느새 빈소앞은 근조화환으로 빽빽했다. 빈소에 앉아있는 우현이 멍한 눈으로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쳐다봤다.

"……."

분명 며칠전까지만 해도 얘기를 나누고 나에게 잔소리도 했는데 …. 갑작스런 할머니의 죽음에 다들 슬피 울었지만 우현만은 울지않았다. 다만 그 중에서 제일 슬픈 건 우현이었고 다들 그 사실을 알고 있는듯했다. 우현의 아버지가 다가와 우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


한참 밥을 먹던 호원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하더니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표정이 왜 그래요? 보이스 피싱이라도 당했어요?"
"우현이네 할머니 돌아가셨대요."
"아…. 그래서 아까…."
"기사까지 났나봐요."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기사라뇨?"
"서동그룹을 처음부터 쭉 키우신 분이거든요. 직원들 퇴근하고 모두 장례식장에 갈 모양이에요."

사원 식당이 할머니의 사망소식으로 떠들썩했다.

"옷 갈아입고 가야하나…."
"아뇨. 그냥 가도 상관없을거에요. 끝나고 제 차 타고 가요."
"네…."

몇 분전 다급하게 사무실을 나가던 우현의 모습을 떠올린 성규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


장례식장은 여러 기업들 대표 이사들, 볼네드를 포함해 서동그룹에서 나온 회사들의 직원들로 북적거렸다.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스무명씩 들어가 절을 하거나 종교에 따라 기도를 하고 나오는 방식이었다. 성규와 호원의 차례가 되자 조금 긴장한 호원과는 달리 이미 한번 장례를 치른 경험이 있는 성규는 꽤 담담한 표정이었다. 절을 하고 나오는데 들어오던 순재와 성열과 마주쳤다. 인사할 분위기가 아니라 간단히 목례만 했다. 호원이 오랜만에 보는 성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줬다. 순재와 성열이 빈소로 들어가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성규가 호원에게 물었다.

"팀장님이 안 보이네요?"
"그러게요. 지금 우현이가 가장 힘들텐데…. 어릴때 우현이네 놀러가면 할머니가 맨날 용돈 주시고 그랬었어요. 우현이도 할머니랑 많이 친했었구요. 아, 집까지는 제가 바래다드릴게요."

호원이 지하주차장으로 향하고 병원 입구에 서있던 성규가 병원 앞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우현을 발견했다.

"……."

다가갈 수 없는 어두운 아우라를 가득 풍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느낀건지 우현을 보아도 다가가지못한채 한숨만 쉬며 그냥 지나쳤다. 서류가방을 꽉 잡은 성규가 입술을 앙 다물고는 우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팀장님."
"……."

성규, 우현의 옆자리에 앉아 슬쩍 우현의 표정을 살핀다. 슬픈 무표정이었다.

"……."
"큼…. 우리 아부지 돌아가셨을때 일인데요."

그제서야 우현이 고개를 돌려 성규를 쳐다본다.

"아부지를 다신 못 본다는게 믿기지도 않고 너무 슬프고 약올라서 발만 동동 구르면서 울고있는데 사촌형이 와서 그러더라구요.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는 말이 있다고…. 나중에 찾아보니까 영국 시인이 한 말이었어요."
"……."
"생각해보면 정말 훌륭한 위로의 말인데 그땐 그 말이 똥구멍으로도 안 들리더라구요. 분하고 슬픈 사람한테 그런 말이 위로가 될 것 같냐고 화도 냈구요."
"……."
"지금 팀장님도 그때의 저랑 똑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도 곧게 안 들리고 화만 나고 답답하고…."
"……."
"…기운내세요. 이건 팀장님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나보다 두 살 어린 인간 남우현한테 하는 말이에요. 그럼 전 호대리님이 기다려서 이만 가볼께요."

혼자 떠들다 일어난 성규가 병원 입구에 서있는 호원의 차에 올라탔다. 호원의 차가 병원을 빠져나가고 벤치에 앉아 성규가 해준 말들을 곱씹어본 우현이 피식 웃었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

 

 

 

 

 

 

 


*


고작 이틀 뒤. 우현은 다시 출근을 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사람처럼 멀쩡한 얼굴로. 사람들은 그런 우현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정말 독한 놈이라고.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10.

 

대문을 열고 나오자 우현의 차가 대문앞에 멈춰서있었다. 날 기다린건가?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어 먼저 조수석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쩐 일로 기다려주십니까?"
"먼저 가면 회사에서 내내 째려볼거잖아요."
"잘 아시네."

성규,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탄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거창하지않고 소박하게 마무리됐다. 살아생전 할머니의 뜻이었다.

"…고마워요."
"네?"
"고맙다구요."

뜬금없는 우현의 말. 성규가 잠시 생각했다. 뭐가 고마웠지, 나한테?

"그 날. 김성규씨가 해준 말 있잖아요."
"무슨 말이요?"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
"그게 제가 한 말인가요. 셸리라는 영국 시인이 한 말이지. 아무튼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어쩔때 보면 저보다 아는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대학교 다닐때 장학금타고 다녔다고 얘기 안 했어요, 제가? 서울대에서 작대기 하나 빠진 서율대도 장학금타고 다니려면 올에이쁠로 과탑이어야되요."
"잘 났네요."
"못 난 건 아니니깐."

어떻게 된 게 한 마디도 안 진다. 톡 치면 툭 하고 쳐내는 성규의 화법에 자꾸 이기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면서도 뭔가 재밌기도 하고….

"다음주 주말에 1박 2일로 회사 야유회가 있어요."
"야유회요? 다들 일밖에 안 할 것 같은 사람들이 놀 줄도 아나보네요? 어디로 가요? 바다? 강? 계곡?"
"산중턱에 있는 학교요."

산중턱에 있는 학교? 성규가 눈살을 찌푸렸다.

"수업받으면서 놉니까? 쉬는 시간, 점심 시간 지켜가면서 숙제도 하고?"
"폐교를 펜션으로 개조해놓은 곳이에요. 회사 인원이 많은 저희한테는 딱이죠. 넓고 깨끗하고 근처에 계곡도 있어요."
"그래도 산중턱에 있는 펜션에서 잔다는게 좀 그렇네요."
"왜요?"
"벌레랑 모기가 많잖아요."
"귀신도 많아요."

우현의 말에 성규가 화들짝 놀란다.

"뻥이죠?"

그러자 어깨를 으쓱. 뭐야, 저 리액션은. 뻥이라는거야,아님 진짜라는거야.

"기획부랑 홍보부만 갈 예정이에요. 회사 전체가 가기엔 인원이 너무 많아서."
"산중턱까지 차타고 올라가요?"
"산길이 있긴 한데 버스는 못 들어가요."
"아, 산 타는 거 싫어하는데."
"케이블카 있으니까 걱정마세요."
"케이블카도 있어요?"
"야유회때 직원들이 불편해하길래 서동건설에 부탁해서 건설했습니다."
"아주 대~단하네요. 그냥 산중턱에 있는 펜션을 서울로 옮겨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그게 나을 걸 그랬나…."

진지한 우현의 말에 성규가 혀를 내둘렀다. 하긴 서동그룹인데 뭘 못 하겠어. 바다도 두 쪽으로 가를 대기업인데.

"각 부서 신입사원들이 제일 바쁠거에요, 아마."
"언젠 안 바빴나요. 이거 하랴 저거 하랴 맨날 바빴지."

그나저나 은근히 설렌다. 마치 수학여행가기 일주일 전의 기분처럼….

"팀장님도 가요?"
"안 갔으면 좋겠습니까?"
"그런 건 아닌데 야유회같은 거 귀찮아하실 것 같아서요."
"저도 갑니다. 안 가면 뒷말이 많아서요. 내색은 안 하겠지만."

안 하는게 아니라 못 하는 거겠지. 아, 춥다. 몸을 부르르 떤 성규가 에어컨을 껐다.

"왜 끕니까?"
"추워서요."
"뭐가 추워요. 이런 쨍쨍한 날씨에."
"아, 몰라요. 그냥 좀 으슬으슬거려서요. 거의 다 왔으니깐 그냥 끄고 가요."
"누가 보면 김성규씨 차인 줄 알겠네요."
"에어컨 하나 끈거가지고 무슨…."

회사 주차장에 차가 멈추고 성규와 우현이 나란히 차에서 내렸다. 또 그새 시비가 붙어 티격태격댄다.


*


열심히 서빙을 하던 명수가 레디락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성열을 보며 고개 숙여 인사를 하려다가 멋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성열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뭐지…. 친구 하기로 한 거 아니였나?

"어…아,안녕."
"……."

성열의 얼굴이 폭발직전이다.

"큼…. 좀 불편한가?"
"아녜요! 아니! 그게…아니야…."
"그럼 그냥 편하게 친구로 지내자. 동갑이고 또 옆집사는 사이니깐."
"……."
"싫…어?"

명수가 묻자 성열이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그래. 그럼 친구하자."
"으응…그,그래."

대담한 성격의 명수, 소심한 성격의 성열이 미묘하게 뒤섞였다.


*


"이상하네…."

몸이 으슬으슬거리는데 아주 추워죽겠다.

"호대리님."
"네?"
"호대리님 정장 마이 좀 잠시 덮어도 될까요?"
"네. 덮으세요."
"감사합니다."
"추워요?"
"조금 으슬으슬거리네요."
"감기 기운 있는거아니에요?"
"에이. 누가 이런 화창한 날씨에 감기를 걸려요."

성규가 대수롭지않게 생각하며 호원의 정장 마이를 껴입었다. 한참 일을 하는데 코에서 뜨끈한 액체가 주륵 흘러내린다. 코피인가싶어서 급히 휴지를 뜯어 코를 막았다.

"아,뭐야…콧물이네."

킁킁하고 코를 들이킨 성규가 다시 일에 집중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또 주륵.

"왜 이러지."

맑은 콧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린다.

"감기 맞는 것 같은데요?"
"감기 증상 없었는데…."
"지금 있잖아요."
"크흥…." 

휴지를 뜯어 콧물이 미친듯이 흘러나오는 두 콧구멍을 틀어막았다. 코를 막은채 입으로 호흡을 하니, 목도 금세 따끔따끔거려왔다.

"진짜 감기인가."
"감기면 쉬어야하는거아니에요?"
"콧물 조금 나는 것 뿐이에요. 걱정마세요."

하지만 점심 시간이 다가오자 몸에서 슬슬 강한 반응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머리도 지끈거리고 얼굴에 열도 바싹 올랐다. 콧물은 말할 것도 없었고.

"성규씨. 점심시간이에요."
"벌써요?"
"괜찮아요? 감기 심한 거 같은데…."
"괜찮아요…."
"아뇨. 전 옮을까봐."

성규가 엎드려있던 고개를 들어 살짝 호원을 흘겼다.

"농담이에요, 농담."
"전 생각없으니깐 호대리님 식사하세요…크흥. 코가 잔뜩 막혀서 킁, 맛도 못 느낄 것 같아요."
"안 가고 뭐해?"

우현이 사원증을 목에 걸며 다가왔다.

"성규씨가 아파서."
"김성규씨? 어디 아파요?"
"감기기운이 조금 있는 것 뿐이에요…킁."
"……."

우현, 성규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더니 마치 병걸린 강아지를 검사하듯 성규의 윗입술을 들어 잇몸을 확인한다.

"지금 동물 진찰해요??"
"열 꽤 많이 나는 것 같은데, 많이 아프면 조퇴하세요."
"…그래도 되요?"
"아파서 빌빌거리는 것보단 낫죠."
"팀장님 대회 나가실래요?"
"무슨 대회요?"
"말 밉게 하는 대회요. 챔피언 먹겠네요, 출전하시면."

성규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눈이 뜨거웠다. 서류가방을 챙겨 일어서자 어지럼증은 더 심해졌다. 호원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집까지 어떻게 가게요?"
"지하철이랑 버스타고 가면 금방이에요…킁. 왜요? 호 대리님이 차로 데려다주시게요?"
"아,아뇨…. 전 밥먹으러…."

호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가방을 메고 우현을 한번 쳐다본 성규가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덮고 있던 호원의 정장 마이를 의자에 잘 걸쳐놨다.

"왜 저보고는 그런 표정 지어요?"
"제 표정이 어땠는데요?"
"말할 필요도 없다는 표정."
"……."

독심술은 우리 봉신 씨만 쓰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아녜요."
"태워다드려요?"
"……."

성규가 깜짝 놀라 우현을 쳐다봤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우현이 차키를 집어들고 있었다.

"저 정말 태워다주시려구요?"
"싫어요?"
"싫은 건 아닌데…."
"싫으신 것 같은데?"
"아뇨아뇨. 좋아요. 좋습니다. …그럼 팀장님 점심은요?"
"하루 안 먹는다고 죽진않아요."
"전 죽을 것 같던데…킁."
"김성규씨는 비정상이니깐요."

이 말을 남긴 우현이 먼저 사무실을 휙 나가버린다. 머리가 지끈거려 더 이상 대꾸하기도 귀찮은 성규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채 사무실을 나섰다.


*

 

"다녀왔습니다."
"쉿!"

늦은 저녁. 현관문이 열리고 알바를 마친 명수가 들어온다. 국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온 후다닥 달려나온 봉신 씨가 손가락을 입에 대더니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린다.

"너네 형 아파서 끙끙대다가 방금 잠들었으니깐 최대한 조용조용히."
"어디가 아픈데?"
"감기몸살."
"요즘같이 좋은 날씨에 감기?"
"내 말이. 얘가 완전히 맛이 가서 헤롱헤롱거려. 저녁 안 먹었지? 기다려. 죽 쑤던거 마저 쑤고 차려줄게."
"응."

명수가 조심스럽게 성규가 자고 있는 방안으로 들어간다. 끙끙 앓고있는 성규에게서 뿜어져나온 무겁고 뜨거운 기운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답답함에 인상을 찌푸린 명수가 살금살금 성규에게 다가갔다.

"…어우, 완전 뜨겁네."

몸이 완전 불덩이다. 이마에 닿아오는 손길에 성규가 눈을 부스스 뜬다.

"…왔냐…."
"아, 쏘리. 깨우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냐…."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스모 선수 오십명이 온몸에 앉아있는 기분이랄까."
"실감나네. 약은 먹었어?"
"아까 낮에…."
"쯧쯧. 푹 자라. 난 오늘 거실에서 자야겠다."

침대위에 가지런히 개어진 자신의 이불과 베개를 거실로 옮긴 명수가 방문을 소리 안 나게 닫았다.

"병원 안 가도 되려나?"
"가자그래도 싫다는 걸 어째. 감기는 푹 자는게 최고래나 뭐래나. 무식한 건 누굴 닮아서 저렇게 무식한 건지…. 그나저나 죽이 너무 묽은가…."

끓고있는 죽을 호호 불어 맛 본 봉신 씨가 죽을 담은 그릇과 동치미를 담은 그릇, 그리고 약봉지와 물을 얹은 쟁반을 들고 성규에게 향했다.

"너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이거 먹고 약 한 번 더 먹어."
"아아…싫어어…."
"빈 속에 골골대면 더 안 나아."
"킁…. 아, 귀찮아…."
"일어나. 얼른."

결국 몸을 일으킨 성규가 쟁반 위에 있는 숟가락으로 죽을 떠 입에 넣었다. 으엑, 너무 묽다.

"왜 이렇게 묽어…. 이유식도 이것보단 질겠다…."
"물 조절을 잘 못해서 그래. 맛으로 먹지말고 배 채운다는 생각으로 먹어."

느릿느릿 한참을 움직여 죽을 비운 성규가 약을 먹고 다시 병든 강아지처럼 끙끙대며 침대에 누웠다.

"내일 회사는 어떡하게?"
"몰라…. 내일이면 낫겠지…."
"그래. 얼른 자."

방문을 닫고 나온 봉신 씨가 싱크대에 죽 그릇과 수저를 담그고 서둘러 명수의 저녁상을 차리기 시작한다.


*


다음날 아침.

"……."

이상하네. 아침 8시 10분이면 부루퉁한 얼굴의 성규가 대문을 열고 나와야하는데 오늘은 어째 감감무소식이다.

"늦잠자나?"

차안의 시계와 성규네 대문을 번갈아본 우현이 혀를 차며 엑셀을 살짝 밟았다. 우현의 벤츠가 성규네 대문을 지나쳐 몇 미터 전진하다가 잠시 멈춘 뒤, 다시 후진해 성규네 대문앞에 멈춰선다. 운전석이 열리고 귀찮은 표정의 우현이 대문에 달린 초인종을 눌렀다.

[…팀장님이죠.]
"어떻게 알았어요?"
[지금 8시 10분 콜록콜록…아…. 잠시만요….]

대문이 열리고 얼굴에 홍조를 띈 성규가 정장 차림이 아닌 체육복 차림으로 걸어나온다. 성규에게서 뜨끈한 기운이 느껴진다.

"많이 아픈가보네요."
"아아…나을 줄 알았는데, 콜록. …도졌어요, 감기가. 오늘 새벽엔 콜록콜록, 39도까지 올라가서 진짜, 콜록, 저승사자랑 하이파이브하고 왔다구요…."

말하면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대문에 기대어 관자놀이를 꾹꾹 주무른다.

"상태보니 오늘 출근은 못 하겠네요."
"…죄송해요, 콜록."
"병가 조퇴 시에는 급여의 70%만 지급되고 날짜에 따라,"
"…그 얘기를 지금 꼭 해야해요?"
"네."

우현이 덤덤하게 말하자 성규가 입술을 댓발 내민다. 현관문이 열리고 레디락으로 출근하는 명수와 버섯 공장으로 출근하는 봉신 씨가 나란히 나오다가 우현을 보고는 인사를 한다.

"어?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우현, 봉신 씨에게 간단한 목례를 한다.

"아휴, 얘가 아파서 출근도 못하고…."
"아닙니다. 일보단 건강이 중요하죠."

성규가 웃기지도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실룩거렸다.

"그나저나 간호해줄 사람이 없어서 큰일이네."
"콜록콜록…내가 애야? 콜록, 얼른 출근이나해…. 명수도, 얼른."

찜찜한 표정의 봉신 씨와 명수가 우현에게 짧게 인사를 하고 출근길을 나섰다.

"집에 혼자 있어요? 아픈데?"
"콜록, 어쩔 수 없죠…."
"……."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 성규가 체육복 지퍼를 바싹 끌어올렸다. 문득 해외로 한달동안 출장나갔을때 음식이 안 맞아 주구장창 설사를 하며 혼자 끙끙 앓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몸조리 꼭 잘하세요."
"얼른 출근이나 하세요. 지각하시겠어요."
"……."

퀭한 성규의 얼굴을 보며 혀를 찬 우현이 벤츠에 올라타 출발하기 전, 대문을 닫고 들어가는 성규의 뒷모습을 한번 힐끗 쳐다봤다. 다른 의미로 눈엣가시다. 몹시 밉거나 싫어서 눈에 거슬리는게 아니라 자꾸만 신경쓰이는 눈엣가시.


*


볼을 부풀리고 따분한 표정으로 일을 하던 호원이 한숨을 쉬며 서류를 집어들었다. 성규가 없으니 심심해죽을 지경이다. 우현에게 다가간 호원이 하품을 하며 서류를 건넸다.

"여기 서류."
"어. 거기 위에 얹어놔."
"그나저나 옆자리에 성규씨가 없으니깐 심심해죽겠어."
"넌 회사 놀러오냐. 정신없이 일해봐, 심심할 틈이 있나."
"성규씨 많이 아파?"

열 때문에 발갛고 시도때도없이 기침을 해대던 퀭한 성규의 모습이 떠오른다.

"조금…."
"거 참 어쩜 좋냐."
"……."
"문자라도 넣어줘야지. 에휴."

호원이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성규에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주사기 모양의 이모티콘을 첨부해 성규에게 보내자 얼마 안 가 답장이 온다. [감사해요ㅠㅇㅠ]

"성규씨가 감사하다네."
"……."
"점심은 먹었으려나."

이 자식은 왜 여기 서서 문자를 하는거야. 우현이 귀찮은 표정으로 귀를 긁적거렸다가 다시 일에 집중했다.

"안 먹었다네. 집에 혼자 있어서 그런지 귀찮아서 안 먹게 되네요,라고 왔어. 아픈데 집에 혼자 있,"
"야."
"응?"
"일해라."
"응."

호원이 군말없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한참 키보드를 두들기던 우현이 짜증섞인 표정으로 마른 세수를 한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핸드폰을 집어든다.


*


"아아…죽겠다…."

이불을 뒤집어쓴 성규, 침대위에서 뒹굴거리며 앓는 소리를 뱉는다.

"속도 쓰리네…. 콜록콜록."

베개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숨만 훅훅 내쉬는데 띵동,하고 초인종이 울린다.

"……."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쓰고 그냥 아무도 없는 척 하려고 했더니 초인종이 한번 더 울린다.

"……."

잠잠한가 싶더니 초인종이 또 다시 울렸다. 오만상을 쓰며 침대에서 기어나온 성규가 터덜터덜 거실로 나와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성규씨.]
"순재씨? 콜록콜록, 잠시만요!"

순재 목소리다. 깜짝 놀란 성규가 눈곱을 떼고 머리를 정리한 뒤, 서둘러 대문을 열었다.

"콜록, 안녕하세요."
"성규씨 괜찮아요?"

순재는 품안에 커다란 보따리를 안고 있었다.

"네, 콜록. 미열이 조금 있긴한데 새벽보단 많이 가라앉았어요…. 근데…저 아픈 건 어떻게…."
"아까 우현이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팀장님한테서요? 성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성규씨 많이 아픈데 집에 혼자 있다고 해서요. 여기 과일이랑 감기몸살에 좋은 칡 달인 물이에요."

건네받은 보따리는 무척이나 묵직했다.

"죄송해서 어쩌죠…."
"아니에요. 근데 얼굴이 완전 반쪽이 되셨어요."

성규가 멋쩍게 웃으며 메마른 볼을 만지작거렸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른 나으시라는 말을 끝인사로 순재가 집으로 돌아갔다. 보따리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온 성규가 식탁위에 보따리를 올려놓고 재채기를 하며 보따리의 매듭을 풀렀다.

"우와…."

과일중에서도 비싼 블루베리와 골드 키위, 제주특산 망고, 선인장 열매로 드래곤 후르츠라 불리는 용과까지. 게다가 커다란 보온병엔 뜨끈한 칡 달인 물이 가득 들어있다.

"이게 다 얼마야…."

역시 잘 사는 집은 과일 스케일도 다르네. 이거 다 사려면 우리집 일주일 반찬값은 다 쏟아부어야될것같다. 근데 왜 우현이 순재에게 전화를 했을까. 성규가 멍하니 과일들을 바라보다가 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일하세요?"
[네.]
"콜록, 신경써주셔서 감사하다구요."
[네.]
"무슨 치킨이세요? '네네'말고는 할 말이 그렇게 없어요?"
[과일 많이 드세요. 웰빙 시대니까.]

성규가 헛웃음을 지으며 블루베리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새콤하고 달콤한게 비싼 값을 한다.

"암튼 이 은혜는 언젠간 갚겠습니다. 빚지고는 못 살죠."
[그러던가요. 바빠요. 끊습니다.]

전화가 뚝 끊기고 기지개를 켠 성규가 컵을 꺼내와 보온병에 든 칡물을 조심스럽게 따라마셨다. 목이 조금은 개운해지는 기분이다


*


다음날 아침. 성규가 상쾌한 얼굴로 머리를 감고 나와 식탁에 앉는다. 봉신 씨, 계란찜을 식탁으로 내려놓으며 말끔한 성규의 상태를 보고 묻는다.

"다 나았나보네?"
"응. 칡 달인 물이 효과 직빵이더라구."

이미 앉아서 밥을 먹던 명수가 계란찜을 호호 불어 떠먹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옆집 그 팀장형님이랑 순재라는 여자분이랑은 부부사이야?"
"아닌 것 같은데…. 성열씨도 같이 사는 걸 보면…."
"궁금하네."
"오지랖은."
"형도 만만치않아."
"둘 다 시끄러. 얼른 먹고 출근준비나 해. 성규 너 아직 감기기운 남아있으니깐 나돌지말고."
"알았어."

아침 식사를 마친 성규가 양치를 한 뒤, 서류가방을 들고 집을 나왔다. 대문을 닫자마자 바로 옆집 대문이 열리고 우현이 걸어나온다.

"다 나았나보네요?"
"덕분에요. 정신력빼면 시체거든요, 제가."
"서른이 가장 잦은 병치레가 많은 나이래요. 조심하세요."
"또 시작이네…. 어떻게 하면 저를 화나게 할지 밤새 연구하세요, 혹시?"
"연구 안 해요. 다 애드립이지."
"그만 능멸하실래요?"

성규가 이를 바득바득갈았다. 가라앉아있던 열이 다시 뻗치는 기분이다.

"만약 제 동생이 팀장님이었으면 팀장님은 벌써 어디 하나 부러졌어요. 빨리 차 문이나 열어요."

벤츠 뒷바퀴를 성규가 발로 툭툭 찬다.

"그렇게 차다가 타이어 터지면, 물어낼거에요?"
"일억 오천에서 헐면 되겠죠, 뭐."
"일억 오천 아직도 언급하시네요?"
"워낙 임팩트가 큰 액수라서."

한 마디도 안 지고 쏘아대는걸 보니 정말 다 나은 것 모양이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며칠 뒤. 야유회 당일. 명수에게서 큰 백팩을 빌려 짐을 싼 성규가 설레는 얼굴로 대문앞에 서있다. 대문에 멈춰선 우현의 차 뒷좌석에 가방을 실은 성규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우현 역시 편안한 평상복차림이다.

"누가 보면 수학여행가는 고등학생인 줄 알겠네요."
"동안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게요."
"근데 무슨 출발은 아침 8시에 해요?"
"버스타고 강원도까지 가려면 8시에는 출발해야죠."
"하암…."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한 성규가 수납공간에 들어있는 자일리톨을 꺼내 뚜껑을 열고 두어개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는다.

"야유회 가서 뭐해요?"
"다른 회사랑 똑같아요. 전에 회사에선 야유회 안 갔어요?"
"거기선 1박으로 안 가고 당일치기로 갔었어요. 무슨 이름모를 산이었는데 비가 주룩주룩와서 산중턱까지 갔다가 그냥 내려왔죠. 최악이었어요."

다행히 오늘 날씨는 좋네요. 조수석 창문을 연 성규가 기분좋게 아침공기를 들이쉬려는데 갑자기 문이 지이잉 하고 닫힌다.

"억! 머리 잘릴 뻔 했잖아요!"
"춥습니다."

성규, 째진 눈으로 우현을 노려본다. 회사에 도착하자 넓직한 회사 마당에 이미 버스 한 대와 큰 탑차 세 대가 나란히 주차되어있었고 평상복 차림의 직원들이 보인다. 기획부와 홍보부만 가는 건데도 인원이 꽤 많다. 차에서 내린 우현과 성규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각 부서마다 인원체크를 끝냈다. 총 52명. 어마어마한 인원이다. 인원체크가 먼저 끝난 홍보부부터 차례대로 버스에 올라타기 시작한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보라색 선글라스를 쓴 호원이 불쑥 다가와 성규의 팔을 잡았다.

"버스타게요?"
"그럼요?"
"우현이 차 타고 가요, 그냥."
"팀장님차요? 팀장님도 버스타는 거 아니에요?"
"우현이 버스 안 타거든요, 잘."
"아아…. 에이, 그냥 버스 탈게요. 저만 따로 팀장님 차 타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하지않을까요?"
"걱정말아요. 뭐라안하니깐."
"그,그래도…."
"같이 타요. 저 놈이랑 둘이서만 가면 심심해요."

우현의 벤츠가 훨씬 더 쿠션도 좋고 안락함도 있긴 있는데…. 호원이 성규를 끌고 주차장에 있는 우현의 벤츠로 향했다. 차 안에 타있던 우현이 호원에게 끌려오는 성규를 보곤 눈썹을 꿈틀거린다.

"성규씨도 같이 타자. 탈 자리 넉넉하잖아."

우현의 의사따윈 내팽개친 호원이 휘파람을 불며 뒷좌석에 올라탄다. 성규, 뻘쭘히 서있다가 조수석 창문으로 고개를 쑥 들이민다.

"타도 되요?"
"버스타고 가라하면 궁시렁댈껍니까?"
"…약간…."
"타던가요."

아싸. 성규가 조수석 문을 열고 폴짝 올라탔다. 말 많은 호원과 시끄러운 성규가 같은 공간안에 있다니. 우현이 짜증스런 표정으로 벨트를 맸다.


*


강원도로 향하는 차안. 초반에 열심히 수다를 떨던 호원은 선글라스를 쓴 채로 뒷좌석에 가로로 누워 곯아떨어졌다. 고속도로는 나들이 가는 차들로 빽빽하다.

"휴게소 안 들려요?"

지나치는 휴게소를 보며 묻자 우현이 앞만 보며 대답한다.

"다음 휴게소에서 아마 들릴거에요. 왜요? 화장실 급해요?"
"아뇨. 허기져서요."
"아침 안 먹었어요?"
"…먹긴 먹었는데…."

그럼 그렇지. 우현이 예상했다는듯한 표정을 짓자 성규가 입을 삐죽거린다.

"음식이 위로 들어가면 두 시간안에 모두 소화되서 위 밖으로 배출되요. 그리고 지금은 그 두 시간을 훨씬 지났구요."
"누가 뭐라했어요?"
"……."
"그렇게 째려보지 좀 마세요. 김성규씨같은 눈으로 째려보면 무서워요."
"제 앞에서 눈 얘기,나이 얘기 금지인 거 말하지않았어요?"
"까먹은 거로 쳐요."

우현의 차가 버스를 따라 휴게소로 진입했다. 큰 큐모의 휴게소에 성규의 눈이 반짝반짝거린다. 온통 먹거리 천지다. 차가 멈춘 걸 느낀 호원이 부스스 머리를 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사람 진짜 많네요."
"그러게요."

나란히 차에서 내린 호원과 성규가 쭈욱 기지개를 켰다. 핫도그와 튀김류 쪽에서 바삐 돌아다니는 두 사람과 달리 커피숍에서 간단히 아메리카노를 하나를 산 우현은 벤치에 앉아 두 손과 입에 잔뜩 먹거리를 물고 오는 두 사람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그거 다 먹게요?"
"팀장님도 먹어볼래요? 맛있는데."

달달한 델리만쥬를 우현의 입가에 들이밀자 우현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뒤로 내뺀다.

"허기진 김성규씨나 많이 잡수세요."
"에이, 그러지 말고 하나 드세요."
"안 먹, 읍."
"그냥 먹으랄때 먹어라, 좀."

호원이 성규 손에 있던 델리만쥬를 억지로 우현의 입에 쑤셔넣었다. 입에 들어온 이상 뱉기엔 뭐해서 그냥 조금 씹어보는데 어라, 맛있다.

"얼마나 더 가야해요, 호 대리님?"
"한 두 시간 정도?"
"와, 한참 더 가야되네요…."

호원과 성규가 수다를 떨며 먹거리를 하나씩 처리해갈때 우현이 델리만쥬를 한 개 집더니 입에 쏙 넣는다.


*


"……."

성규와 호원이 입을 벌린채 잠들었다. 이제야 차 안이 평화롭다. 라디오에서 달콤한 목소리의 여자DJ가 사연을 읽고 있었고 시간은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쨍쨍한 햇빛에 성규가 눈을 움찔움찔거린다.

"……."

차가 잠시 밀리는 틈을 타 조수석 서랍을 연 우현이 햇빛가리개를 꺼내 성규 쪽 창문에 턱 하고 붙혀준다. 그제서야 찌푸려져있던 성규의 눈살이 펴졌다.


*


"김성규씨."
"……."
"김성규씨!"
"아…5분만 더…."

찰싹! 우현이 성규의 뺨을 살짝 치자 성규가 흠칫하면서 눈을 뜬다.

"도착했어요. 얼른 내려요."

뒷좌석의 호원도 주섬주섬 선글라스를 챙겨쓰며 일어났다. 12시 40분. 태양이 미친듯이 작렬했다. 산 입구엔 주차장과 케이블카 탑승장 밖에 없어서 그런지 넓직하다못해 한산한 느낌이 들게 했다. 버스에서 내린 직원들이 가방과 여러 짐들을 들고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향했고 탑차는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탑차를 보던 성규가 우현에게 물었다.

"팀장님. 이 차도 산길 올라갈 수 있잖아요."
"차 스크래치나요. 그리고 차타고 올라가면 케이블카 설치한 의미가 없죠."

이미 줄에 서있는 호원이 우현과 성규를 향해 손짓을 한다.

"그럼 이 케이블카는 서동회사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거에요?"
"네. 여기 폐교 펜션도 서동꺼에요."
"아, 서동에서 지은 거에요?"
"아뇨. 산거에요."

괜히 물어본 것 같다. 줄이 점점 줄기 시작하고 어느새 탈 차례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대충 보니 10명씩 타는 것 같은데…. 잠깐, 그럼 설마. 호원까지 케이블카에 타자 케이블카 관리인이 성규와 우현을 못 타게 막는다.

"죄송한데 두 분은 다음 케이블카에 탑승해주세요."
"예? 왜요!"
"정원이 열 명이라서요. 죄송합니다."
"이씨…."

담담하게 다음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우현과 달리 성규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바닥만 툭툭 찼다. 다음 케이블카 문이 열리고 성규와 우현이 나란히 케이블카에 올라탄다. 넓직한 공간에 두 명이서만 있자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다. 우현과 성규, 서로 반대편 의자에 앉는다. 창밖을 내다보자 초록 나무들이 광활하게 펼쳐져있다. 백팩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성규가 카메라로 그 모습을 담기 시작한다.

"그게 카메라도 되요?"
"…그래요. 잘 됩니다! 쯧."

아랑곳하지않고 연신 찰칵대던 성규가 셀카도 찍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는 우현, 참 가관이다,라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케이블카가 서서히 하차하는 곳에 가까워지자 성규와 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케이블카 속도가 줄어들며 잠시 흔들리자 성규가 엄마야,하고 깜짝 놀라며 우현의 팔뚝을 잡더니 다시 깜짝 놀라며 손을 뗀다.

"왜,왜 이렇게 부실하게 만들었어요! 깜짝 놀랬네."

민망함에 소리치듯이 말한 성규가 문이 열리자마자 후다닥 케이블카에서 내린다. 우현, 헛웃음을 지으며 따라내린다.

"우와…."

폐교 펜션이라고 했을때, 그냥 망한 학교를 대충 수리해놓은 정도로 생각했는데 생각외로 매우 근사했다. 페인트칠은 물론이고 잔디가 깔린 운동장에 말끔한 축구 골대가 놓여있었고 외곽엔 나무 테이블과 벤치가 파라솔이 활짝 펼쳐져있었다.

"이래서 서동서동하는구나…."

감탄을 뱉는 성규와 무심한 표정의 우현이 학교 중앙현관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방을 정하고 있었지만 우현은 그 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예전부터 마지막 방은 우현과 호원만이 썼으니깐. 호원도 익숙하게 짐을 들고 마지막 방으로 향했다. 호원과 우현이 짐을 대충 정리하는데 방문이 열리고 성규가 고개를 쏙 내민다.

"무슨 일이에요?"
"방이 모자라요."
"무슨 소리에요? 작년까지만 해도 넉넉했는데."
"그게 홍보부에 여직원들이 새로 들어와서 두 방을 여직원들이 통째로 써야한다네요…. 어쩌죠?"
"우리랑 같이 쓰면 되죠. 그게 뭐 별일이라고."

호원의 말에 우현이 골치아프게 됐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11.

 

한참 바쁜 레디락 레스토랑.
주방과 홀을 바삐 오가며 서빙을 하던 명수가 쟁반을 든 채로 잠시 레디락 안 테이블들을 쭈욱 훑어본다.

"…흠."

성열이 보이질 않는다. 따로 명수와 약속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찾아와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커피나 차를 마시곤 했었는데…. 오늘은 까먹고 못 온 걸까, 아님 바빠서 못 온 걸까? 잠시 생각하던 명수가 다시 바쁘게 서빙을 하기 시작했다.


*


아침 일찍 야유회에 가는 우현을 배웅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늦잠을 자버린 순재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요즘 들어 잠이 좀 많이지긴 했다. 기지개를 켜고 시간을 확인하니,.오후 1시. 세상에나. 해가 중천을 이미 넘어갔을 시간이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나온 순재가 머리를 묶으며 집안을 둘러봤다. 성열인 외출을 했나?

"성열아!"
"……."

방안에도 없는 걸 보니, 역시 외출했나보네. 말도 없이 나가다니. 성열이 약간 괘씸해지려고하는 순재가 스트레칭을 하며 욕실로 향해 세수와 양치를 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 주방으로 향하려는데 다락방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


다락방 안.
성열, 진지한 얼굴로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에 무언갈 열심히 끄적인다. 성열의 검은 머리칼이 햇살에 반짝반짝 빛난다. 노란 연필을 잡은 하얀 손가락이 재빠르게, 그리고 부드럽게 악보위에 음표를 그려넣는다.

"……."

그리곤 그 음표들을 피아노 건반으로 옮겨본다. 감미롭고 달콤한 음이지만 정작 자기 맘에는 들지않는지, 인상을 써가며 지우개로 음표 몇 개를 벅벅 지운다. 다시 음표를 그려넣고 피아노로 연주해보려던 순간,

"성열아?"

문이 열리더니 순재가 들어온다. 피아노 위에 올려져있던 악보를 후다닥 덮은 성열이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외출한 줄 알았더니 여기 있었어, 계속?"
"…으응."

성열의 옆자리에 앉은 순재가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건반들을 살짝씩 눌러본다.

"오랜만에 쳐볼까?"

성열이 벙찐 표정으로 잠시 순재를 쳐다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건반에 두 손을 얹는다.

"시작!"

순재의 말과 함께 젓가락 행진곡이 경쾌하게 연주된다. 똥똥똥 똥똥똥 땅땅땅 땅땅땅…. 연주가 끝난 후, 성열과 순재가 나란히 마주보고 환히 웃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순재가 애써 감춘다.

"근데 저 악보는 뭐야?"
"…아,아무것도 아냐! 어,얼른 내려가자!"
"어어! 뭔데그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성열이 순재를 밀어내며 다락방을 나와 문을 닫는다. 문이 닫히며 피아노 의자에 얹어져있던 악보 맨 첫 장이 바닥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Want to see ms'

보고싶은 ms. 악보 제목이었다.


*


기획부와 홍보부의 전체적 평균 나이는 28.5세. 다들 젊고 싱싱한 피가 흐르는 사회인들이었고 성규는 신입사원치고는 조금 많은 나이에 해당됐다.

"어우, 무슨 축구야…."

운동과는 담쌓은 성규는 축구 경기에 출전하지도 않으면서 볼멘소리를 하며 벤치에 앉았다. 점심은 제육볶음이 일품인 밥차로 해결했고 저녁은 바베큐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온통 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 성규와는 다르게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호원과 우현은 열심히 몸을 풀고 있다. 사내 친선경기지만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은 뜨거운 승부욕으로 활활 불타올랐다. 성규가 앉아있는 벤치 앞에 우루루 뭉쳐있는 여직원들은 꺅꺅 소리를 질러대며 우현과 호원에게만 편파적인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시끄러워 죽겠네. 짜증섞인 표정으로 귀를 후빈 성규, 혀를 차며 자리를 옮긴다. 날씨는 왜 이리 더운거야. 부채질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는데 허리를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던 우현과 눈이 마주친다.

"…왜요?"
"응원 안 합니까?"
"더워서요."

우현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다. 흥, 응원도 내켜야 하는 게 응원이지. 성규가 입을 삐죽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빈 페트병 두 개를 주워오더니 팡팡 두드린다.

"비! 아! 씨! 티! 오! 알! 와! 빅토리! 빅토리! 호대리님 파이팅! 팀장님도 화이팅!"

성규의 응원소리를 들은 호원이 브이를 하며 윙크를 날렸지만 우현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다.


*


축구 경기는 2 : 1로 기획부가 이겼다. 첫번째 골은 우현이 넣었고, 두번째 골은 호원이 넣었다. 땀을 식히려 계곡으로 가는 길, 성규가 넌지시 축구 얘길 꺼낸다.

"축구 잘 봤어요. 호 대리님이랑 팀장님이 제일 재빠르던데."
"고등학교때 우현이랑 맨날 같이 축구했거든요. 그땐 내가 더 잘 했는데 이젠 얘가 더 잘해요."
"에이. 제가 보기엔 호 대리님이 더 잘하시던데요?"
"하하하하. 그런가?"

두 손엔 물총을 쥐고 있는 호원이 껄껄 웃었다. 놀고들 있네. 우현이 작게 콧방귀를 뀌며 계곡으로 향하는 비탈진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뒤이어 내려오던 성규가 비탈길을 천천히 내려오다가 순간 삐끗하더니 앞서가는 우현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엄마야!"
"아! 조심 좀 해요! 애도 아니고."
"조심했거든요!"

귀찮고 짜증난 표정의 우현이 성규의 손목을 붙들고 천천히 비탈길을 내려가자, 그 모습을 빤히 보던 호원, 우현에게 손을 내민다.

"나도,나도 잡아줘."
"넌 니가 내려와, 인마."

호원이 궁시렁거리며 폴짝폴짝 뛰어 비탈길을 내려온다. 기획부와 홍보부 직원들이 맑은 계곡물을 보자마자 너나 할 것 없이 계곡물에 풍덩 뛰어들었다. 미친듯이 물장구를 치며 노는 직원들과는 다르게 첨벙첨벙 발만 담그고 있던 성규가 홱 뒤돌아 바위 위에 앉아만있는 우현을 쳐다봤다.

"팀장님은 물에 안 들어가세요?"
"찝찝해서요. 그러는 김성규씨는요."
"전 발 담갔잖아요."
"그 김에 얼굴까지 담그세요."

생각해서 물어본건데 대답하는 싸가지하고는. 성규가 혀를 차며 하얀 발가락만 꼬물꼬물거리다가 무언갈 발견했는지 쭈그려앉아 열심히 돌멩이 사이를 뒤적거린다.

"…잡았다!"

엄지와 검지로 요상한 물체를 잡은 성규가 씨익 웃으며 바위 위에 앉아있는 우현에게 다가간다.

"팀장님."
"왜요."
"물이 맑은가봐요. 가재가 사는 걸 보면."

그러더니 우현의 무릎 위에 가재를 슥 올려놓는다. 소리는 안 질렀지만 깜짝 놀란 우현이 몸을 벌떡 일으켜 무릎에 붙은 가재를 거칠게 떼어낸다. 호흡까지 거칠어진걸 보니 꽤 많이 놀란 모양이다. 성규가 배를 잡고 깔깔 웃기 시작했다.

"아, 웃겨. 팀장님 방금 표정 진짜 못 생겼었던 거 알아요?"
"죽을래요?"
"아뇨. 더 살래요. 아이고, 배꼽이야."

눈가에 맺힌 눈물까지 닦아낸 성규가 룰루랄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물총에 물을 채우고 있는 호원에게 향했다. 아직도 바위 위에 찰싹 붙어있는 가재를 발로 휙 걷어찬 우현이 성규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호원이 물총에 몇 번 압력을 주더니 성규의 엉덩이에 찍 물줄기를 쏜다.

"앗! 따가워요!"
"성능좋네요. 역시 비싼 건 제 값을 한다니깐. 하나 가질래요?"
"정말요? 아싸!"

물총을 받아든 성규가 물을 가득 채우고 몇 번 펌프질을 한 뒤 하늘을 향해 물총을 쐈다. 커다란 크기에 맞게 물줄기도 굵직굵직하다.

"…유치하긴."

서로 물총을 쏴대며 노는 성규와 호원을 향해 중얼거린 우현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한참을 놀던 성규가 물통에 물을 리필하더니 바위에 앉아있는 우현을 향해 물총을 찍 쏜다.

"…찍."
"……하지마요."
"계곡엔 젖을 생각으로 와야죠. 뽀송뽀송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아, 하지말라니깐요."
"에이, 왜요. 같이 놀면 덧나나."
"그래, 짜샤."

호원과 성규가 양쪽에서 물을 찍찍 쏴댄다.

"아씨, 진짜!"

우현이 바위에서 벌떡 일어나자 성규와 호원이 모두 움찔하며 뒤로 물러난다.

"하지마요. 한번만 더,"
"찍."

호원의 물총이 정확히 우현의 얼굴에 물줄기를 명중시켰다.

"…찍."

이번엔 호원이 아닌 성규다. 흠뻑 젖은 얼굴을 쓸어내린 우현이 굳은 얼굴로 바위에서 내려오자 눈치빠른 호원은 이미 후다닥 달아났다. 뒤늦게 달아나려던 성규의 뒷덜미를 낚아챈 우현, 직원들이 다이빙하고 있는 높은 바위로 향한다.

"아, 알았어요! 안 할게요! 서,설마. 하지마요!"

다이빙을 하려던 남자직원들이 우현에게 끌려오는 성규를 보며 환호성을 지른다. 소리지르지마! 지르지마 새끼들아! 지르지마! 마음속으로 바락바락 소리친 성규가 우현의 품을 벗어나려고 아둥바둥거렸지만 힘줄이 솟아있는 우현의 팔뚝을 내치기엔 역부족이었다.

"살려줘요. 아, 진짜, 그럼 시,심장에 물만 묻힐게요."

뒤에서 성규를 붙들고 있는 우현이 슬금슬금 바위 끝 쪽으로 성규를 내몰자 성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한다. 다행히 바위 아래의 계곡물은 꽤 깊어서 바닥에 대가리를 빻을 일은 없겠지만, 높은 바위에서 내려다보는 계곡물은 꽤 오싹한 느낌을 줬다. 성규를 거의 바위 끝으로 끌고 갔을때,

"어어!"
"으아악!"

어디선가 후다닥 달려온 호원이 우현의 등을 세게 밀쳤다. 풍덩! 바위 끝에 서있던 우현과 성규가 나란히 계곡물에 빠졌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운동장 한 편, 쭈욱 늘어선 바베큐 그릴 위에 삼겹살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다. 계곡에서 우현과 커플 다이빙을 하게 된 성규가 물먹은 코를 들이키며 나무젓가락만 쪽쪽 빨고 있자 빈 접시에 고기를 가득 담아온 호원이 헤실헤실 웃으며 성규앞에 접시를 내려놓는다.

"성규씨. 이거 먹어요. 내가 구워온 거에요."
"킁. 감사해요."

다이빙 직후, 온몸 구석구석 파고드는 차디찬 계곡물에 정신을 못 차린 채, 우현의 어깨만 붙잡고 동동 매달렸던 걸로 기억한다. 마치 코알라 새끼처럼…. 우현은 성규와 꽤 먼 테이블에 앉아 홍보부 부장들과 따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잘 붙들어준 우현에게 잠자리 눈동자만큼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었지만.

"아이구. 우리 신입 성규씨 잔이 비어있네?"
"아, 괜찮은데…. 하하."

소주병을 든 기획부 거남 대리가 다가오더니 벌게진 얼굴로 성규의 컵에 소주를 한가득 채워준다. 얼른 두 손으로 컵을 쥐고 술을 받은 성규가 꾸벅 인사를 하며 맑은 소주를 들이켰다. 야외에서 먹으니 평소보다 두 배로 더 감칠맛이 난다. 그 후로 성규의 술잔은 여러 상사가 번갈아가며 가득 채워주었다. 성규뿐만 아니라 다른 신입사원들도 상사가 따라준 술을 이미 연거푸 마셔서 얼굴이 벌게진 상태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현이 조용히 성규에게 다가갔다.

"김성규씨."
"네, 왜요?"
"같이 방 쓰면서 술 냄새 풀풀 풍기는거 질색이에요."
"예?"
"적당히 마시라고요, 적당히."

그러더니 성규의 종이컵에 가득 들어있던 술을 잠시 한 눈 팔고 있는 호원의 잔에 휙 부어버린다. 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린 성규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그러는 팀장님은 안 마셨어요?"
"네. 전 이렇게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마시는 건 별로라서 입에도 안 댔어요."
"쳇. 걱정 마세요. 적당히 마셨으니깐. "
"적당히 마신 사람이 귀 끝은 왜 빨간데요?"

얼른 두 귀를 잡아가리는 성규의 모습에 우현이 소리 없이 웃으며 성규의 앞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는다. 술을 마시거나 쑥쓰러울때면 양 쪽 귀가 빨개지는 특이 현상을 우현이 알아챘다는게 조금은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그렇게 이 사람한테  다 보여줬었나,하는 마음이 든다. 한참 바베큐 파티가 마무리 될때쯤, 노래방 기계의 마이크를 잡은 직원이 사회자 역할을 하며 장기자랑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일만 하는 일쟁이들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다들 노는 것도 선수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우현과 달리, 성규는 꽤 신이 났는지 어깨까지 들썩여가며 박수를 쳐댄다. 확실히 취했다. 아무리 봐도 나보다 두 살이나 많다는게 믿겨지지가 않는다. 하얗고 보들보들하게 생긴 액면가로 봐서는 나보다 한참 동생같은데. 장기자랑 순서는 무대에 올라간 사람이 자신의 다음 순서를 찍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참 열기가 무르익었을때 기획부 여직원이 쑥쓰러운 얼굴로 호원을 가리켰다. 머쓱하게 웃은 호원이 뒷머리를 매만지며 무대로 나가자 기획부와 홍보부의 모든 직원이 환호성을 질러댄다.

"환호성 장난아니네…."
"쟤 하는 거 보면 왜 그런지 알거에요."

호원이 번호를 누르고 자세를 잡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른 '난 알아요'의 반주가 시작되자,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쓴 호원이 몇 번 몸을 풀더니 본격적으로 랩을 시작했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이제는 나도 알 수가 알 수가 있어요!"

완전 연예인이다. 노래 실력은 물론, 춤추는 몸짓부터 무대 매너까지!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갑자기 바닥에 엎드린 호원이 다리를 번쩍 들어올려 요즘 인피니티인가 뭔가하는 그룹이 추는 전갈춤을 선보였다. 운동장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노래가 끝났지만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멈추질 않는다. 숨을 가다듬은 호원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마이크에 대고 성규의 이름을 호명했다.

"성규씨."
"예,예?"
"나오세요. 다음 차례."

아무것도 준비 안 했는데! 얼떨떨한 표정의 성규가 귀가 빨개져서는 주춤거리며 일어나 무대로 올라가 마이크를 건네받는다.

"큼큼. 아아…! 안녕하세요오. 기획부 신입사원 김성규라고 합니다."

인사만 했을뿐인데 환호성이 터진다. 약간 어리숙해보이면서도 얼굴에 홍조를 띠우고 있는 성규의 모습은 나이에 맞지않게 깜찍했다. 방금전까지 심드렁하던 우현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턱을 괴고 무대에 올라가 있는 성규를 쳐다봤다.

"어…. 제가 춤은 정말 젬병이거든요? 근데 노래 하나는 자신있어가지구요. 히히. 잠시만요. "

술이 약간 들어간 성규가 말꼬리를 질질 끌며 히죽 웃더니 노래방 책을 뒤져 선곡을 한다. 그 모습에 직원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박수를 보냈다.

"성규씨 귀엽네."

호원의 말에 우현이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멈칫한다. 귀엽긴 무슨….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시작 버튼을 누르자 토이의 '좋은 사람'이 흘러나온다.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은 성규가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다. 여직원들이 '귀엽다!'하고 크게 소리치자 성규의 귀가 더 빨개진다.

"니가 웃으면 나도 좋아~ 넌 장난이라 해도~ 널 기다렸던 날, 널 보고 싶던 밤~ 내겐 벅찬 행복 가득한데~."

노래 하난 자신있다더니 정말이구나. 맨날 틱틱대고 딱따구리처럼 쏘아대는 말투만 들어서 잘 몰랐는데 꽤 듣기 좋은 목소리다. 성규의 노래가 끝나자 호원 못지않은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감사합니다. 다음 순서는 제가 뽑으면 되는거죠? 저는 그럼…."

서스럼없이 우현을 가리킨 성규가 '팀장님! 나오세요!'하고 크게 외친다. 순간, 분위기가 잠시 애매모호해졌다.

"얼른 안 나오시고 뭐해요! 얼른얼른!"

성규가 빨리 나오라는듯이 손짓하자 인상을 구긴 우현이 어거지상을 쓰며 무대로 올라갔다. 여직원들이 기대에 잔뜩 젖은 얼굴로 우현을 쳐다본다. 저 얼굴에 노래까지 잘 하면 정말 뿅 갈지도 몰라! 야유회 장기자랑에서 우현이 호명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직원들은 성규의 당돌함에 놀랐고, 또 우현이 진짜 노래를 할까,하는 호기심도 들어왔다.
 
"기획부 팀장 남우현입니다."

무뚝뚝한 인사에도 직원들이 환호를 한다. 생존법칙이다. 무조건 리액션하기. 성규, 자리로 돌아와앉아 빨개진 볼을 식히며 무대로 시선을 옮긴다. 마이크를 잡고 어정쩡하게 서있는 우현의 폼이란. 어디 한번 당해봐라,하는 식의 표정을 지은 성규가 오이를 집어 오독오독 씹어먹으며 박수를 쳤다.

"성규씨 가수해도 되겠어요?"
"에이. 호 대리님에 비하면 새발의 피죠."
"그나저나 이번이 처음이네요. 우현이 장기자랑순서에 노래하는거."
"야유회 오면서 한번도 안 불렀어요?"
"다들 배짱이 없어서 우현이 이름을 안 불렀었거든요. 나도 우현이 성격 잘 아니까 안 불렀었구요."
"그럼 호 대리님도 팀장님 노래 처음 듣는거에요?"
"아뇨. 고등학교 축제 때 한번 들어봤어요. 잘 하더라구요."

성규, 내심 우현의 노래가 기대된다. 별 말 없이 노래 번호를 꾹꾹 누른 우현이 목을 가다듬었다.

"어? 이 노래…."

익숙한 멜로디. 이기찬의 '미인'. 좋아하는 노래라서 가사도 외우고, 꽤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통화연결음을 차지했던 노래였는데…. 이젠 질려서 바꿨지만.

"다시 사랑한다 해도 다른 누군갈 만나도. 나는 너와 같은 사람 다신 만나지 못해."

백 번 천 번을 말해도 울며 다짐을 해 봐도 떠나가는 네 얼굴 보고 싶은 내가 정말 싫어. 성규가 우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노래를 따라불렀다. 이미 여직원들은 우현의 노래에 반쯤 맛이 가버렸다. 그런데 노래가 좀 많이 애절하다.

"미친놈. 저러다 울겠네."

호원의 말에 성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목소리에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게 코 끝이 찡해질 정도다.

"감사합니다."

노래가 끝났다. 호원과 성규, 그리고 우현까지. 수준급의 노래 콤보로 여직원들의 유스타키오관이 녹아내렸다. 자리로 돌아와앉은 우현이 목이 타는지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노래. 잘 들었어요, 팀장님."
"김성규씨도요."

이 어색함은 뭐지? 우현을 무대로 불러낸 건 자신이었지만 이상하게 쑥쓰럽고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성규가 오이로 괜한 쌈장만 꾹꾹 짓눌렀다.


*


바베큐 파티가 마무리 되고 슬슬 잠에 들 시간. 교실을 개조해놓은 특성상, 샤워실과 화장실은 바깥 쪽에 따로 위치해있었다. 단체로 씻는 공동 샤워실이 아니라 한 명씩 쓰는 칸막이 샤워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그 뒷편에 있는 화장실은 깨끗하긴 했지만 조금 음습한 기운을 풍겼다. 문득, 귀신이 많다는 우현의 말이 진짜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샤워를 마치고 방안으로 들어오자 가방에서 주섬주섬 보드게임을 꺼내는 호원의 모습이 보인다.

"그게 뭐에요?"
"할리갈리! 할 줄 알죠?"
"당연히 알죠."

수건을 목에 걸고 호원과 카드를 정리하는데 물통에 물을 받아온 우현이 바닥에 난잡하게 펼쳐진 할리갈리 카드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린다.

"이게 다 뭐야. 잠잘 시간에."
"야, 우현아. 너도 와서 앉아. 두 명이서 하면 재미없어."
"그래요. 팀장님도 해요."

피곤해서 얼른 자고 싶기만한 우현을 호원이 억지로 끌어다 자리에 앉힌다. 카드를 골고루 섞던 호원,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깐 돈 걸고 할래요?"
"돈이요?"
"그래야 승부욕도 불타죠. 두 바퀴에 만원씩."
"히이! 만원씩이나요?"

성규, 기겁하는 표정으로 가방을 끌고와 지갑을 꺼내 지갑 안에 든 금액을 확인한다. 만원짜리 여덟장. 할까말까 고민을 하는데 우현이 성규의 지갑 안을 힐끗 보더니 피식 비웃음을 날린다. 자존심이 팍! 상한 성규가 일부러 자신있는 척을 하며 바로 콜을 때렸다.

"콜! 좋아요! 해요!"
"오케이. 야, 남우현. 가서 지갑 챙겨와."
"아, 귀찮게 진짜…."
"그럼 누구부터 뽑을래요?"
"호 대리님부터 하세요."
"아싸. 그럼 나 먼저."

그렇게 시작된 26세 호원과 우현, 그리고 28세 성규의 할리갈리 게임. 게임을 시작할때, 그들은 그 게임이 단순히 '게임'으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정확히 20분 후.

"……."
"……."
"…땡!"

성규가 뒤집는 카드를 확인한 우현이 재빠르게 종을 내리쳤다. 바닥에 깔려있는 바나나 두 개와 성규가 뒤집은 바나나 세 개. 총 다섯개. 우현이 씩 웃으며 가운데에 놓인 만원짜리를 모조리 쓸어갔고 호원과 성규의 표정은 바싹 썩어갔다.

"아, 짜증나."

벌써 6만원을 잃었다. 호원과 성규의 6만원을 가져가 총 12만원을 얻게된 우현이 돈을 착착 접어 지갑에 끼워넣었다. 제일 하기 싫어하더니만! 재수없는 인간!

"이제 그만 하죠. 둘 다 많이 잃은 것 같은데."
"그래. 성규씨, 우리 이제 그만해요. 이러다 장기도 잃을 것 같아."

호원이 훌쩍거리며 카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성규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지갑을 열었다. 휴우…, 정말 딸랑 이만원 남았, 아우 화나.

"피 같은 제 돈이니깐 꼭 좋은데 쓰세요. 허튼데 쓰지말고."
"걱정마세요. 허튼데 안 쓸테니깐. 이제 좀 잡시다, 제발."
"그럴려고 했어요."

베게를 끌어안고 침대에 눕자, 우현이 당신이 왜 거길 눕냐는 표정으로 성규를 툭툭 친다.

"왜요? 자는 시간이라 자려고 했는데."
"내려가서 자요."
"저 침대 아니면 못 자요. 바닥에서 자면 삭신이 쑤셔서."
"나도 마찬가지에요. 침대에서 주무시고 싶으면 이호원 침대가서 주무세요."
"그럼 공평하게, 가위바위보 합시다. 예? 그럼 됐죠?"
"이보세요."
"제 이름 이보 아닌데요?"
"김성규씨. 이 방은 저랑 이호원만 쓰던 방입니다. 더불어 이 침대도 마찬가지구요."
"이젠 제가 왔으니깐 다시 정해야죠."

우현이 결국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안 내면 바닥, 가위 바위 보!"
"…!"
"아싸!"

모두가 보자기를 낸 가운데, 혼자 바위를 낸 우현,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쥐며 어금니를 꽉 깨문다. 신이 난 성규와 호원이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캐비넷을 열고 이불을 꺼내온 우현이 바닥에 이불을 깔고 한숨을 쉬며 드러누웠다.

"…팀장님."
"잡니다."
"에이, 안 주무시면서."
"또 뭐가 문젠데요."
"살래요?"
"뭘요."
"침대요. 12만원에 팔게요."

우현이 콧방귀를 뀌며 등돌려눕자 성규가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린다.

"…그럼 10만원?"
"술기운에 잠도 안 옵니까?"
"알았어요. 자면 되잖아요…. 자는 것도 강제야."

그제서야 방안이 잠잠해졌다. 호원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팝송을 들으며 성규의 두 눈이 점점 무거워졌다.


*


어두컴컴한 집안. 순재의 방문을 빼꼼히 열어 안대를 쓰고 자고 있는 순재를 확인한 성열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다락방으로 향한다.

"……."

다락방 불을 켜고 피아노 앞에 앉은 성열이 바닥에 떨어져있던 악보를 주워들고 다시 곡을 쓰기 시작한다. 직접 연주하며 곡을 쓰는게 쉬웠지만 자고 있는 순재때문에 피아노 건반을 치는 대신, 머릿속으로 건반을 떠올리며 곡을 써내려갔다.

"……."

잠시후, 다락방 문이 살짝 열리더니 파자마 차림의 순재가 성열의 모습을 몰래 훔쳐본다. 쟤가 지금 이 새벽에 다락방에서 뭘 하고 있는거지? 문을 열고 들어가 묻기에는 성열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 개굴개굴 개구리 소리, 우엉우엉 이름 모를 새소리까지. 산중턱에 있는 펜션이라서 그런지 이 모든 자연의 소리가 생생한 입체사운드로 들려온다. 오줌이 마려워 잠에서 깬 성규가 침대에서 꾸물꾸물거리며 일어났다.

"……."

바닥에서 자고있어야할 우현이 없다.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은 성규가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한다.

"으으… 추워…."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있는 성규가 소름이 돋아오는 팔뚝을 슥슥 비볐다. 강원도가 다른 곳보다 추운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
"……."

현관 앞 벤치에 카디건을 걸친 우현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하얀 팔뚝을 비벼대며 다가간 성규, 자다깬 목소리로 우현을 부른다.

"…팀장니임…."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현이 깜짝 놀라며 뒤돌아본다.

"… 깜짝 놀랬잖아요!"
"킁…여기서 뭐하세요…. 추운데…."
"바닥이 배겨서 잠이 안 옵니다, 잠이."
"그럼 가위바위보 이기지 그러셨어요…. 하아암…."

성규, 하품을 하며 중얼거리더니 터덜터덜 화장실로 걸어간다. 조금 으슬으슬해진 우현이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으아아아아악! 으악! 으아아악!"

화장실에서 성규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갔다.

"갑자기 무슨,"
"배,배,뱀!"
"…!…."

소변기 옆에 꿈틀거리는 저 생명체는 뱀이 분명했다. 성규는 단단히 놀랬는지 어버버거리며 화장실 구석에 박혀 눈물콧물만 질질 흘리고 있었다. 꽤 큼지막한 뱀 사이즈에 우현도 조금 겁을 먹었는지 애써 움직이지않는 몸을 움직여 화장실 벽에 걸려있는 집게를 잡아들었다.

"가,가만히 있어요."
"흐어어어엉!"
"뱀 처음 봐요!? 울긴 왜 울,"
"물렸다구요! 흐어엉!"

슬리퍼를 신은 성규의 발등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흐어어엉! 독사면 어떡해요! 난 몰라! 혼삿길도 안 가봤는데 황천길가게 생겼어, 으어어엉!"
"그 빌어먹을 입 좀 다물어요!"

독사면 정말 큰일나는데. 미간까지 찌푸리며 성규에게 짜증을 낸 우현이 집게를 조심히 뱀 몸통을 집은 뒤, 뱀의 대가리 모양을 살폈다. 머리가 삼각형이면 독사고, 둥그스름하면 독이 없는 뱀이라고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이 뱀은 참 정체성이 없게 생겼다. 일단 뱀을 화장실 밖으로 질질 끌어냈다. 산쪽으로 휙휙 쳐내자 반항 한번 없이 조용히 사라진다. 저렇게 얌전한 놈인데 도대체 왜 물린 걸까.

"흐어어엉!"
"아니 어떻게 했길래 저렇게 온순한 뱀이 뭅니까?"
"잠결에 모르고 밟았어요, 으허어어엉!"

이럴 줄 알았어. 일단 애처럼 엉엉 울고 있는 성규에게 다가가 발등을 살폈다. 뱀이 물자마자 기겁을 하고 뿌리친 탓에, 가로로 길게 상처가 나있었다.

"느낌은 좀 어때요?"
"아무 느낌도 안 나요! 버,벌써 마비된건가? 나 죽나봐요! 흐엉…."
"일단 병원부터 갑시다."
"흐어어어엉!"

때아닌 소란에 잠에서 깬 직원들이 모두 화장실 앞에 모여있었다. 성규가 절뚝거리며 우현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자 여기저기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만약 독사한테 물린거면은 진짜 보통일이 아니다, 심각한 일이다,하며 성규의 공포심을 더욱 불러일으키는 얘기들만 해대고 있다. 호원이 어디선가 구해온 노끈으로 성규의 발목 윗 부분을 묶는다. 우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병원에 가야하는데 어떡하지?"
"그러게."

케이블카는 전원이 내려간 상태다. 테이블과 노래방 기기를 날랐던 탑차는 내일 아침까지 오지 않을텐데…. 그때 우현의 눈에 펜션 한 쪽에 세워진 낡아빠진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라도 타야겠다. 호원아. 방에 들어가서 내 차키랑 지갑 좀 가지고 나와줘. 내 가방 제일 앞 주머니에 있어."
"응!"

훌쩍거리는 성규를 벤치에 앉히고 자전거를 끌어왔다. 우현,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있는 안장을 닦지도 않고 철퍽 앉아 페달에 발을 올린다.

"타요. 산 입구까지는 이거 타고 가야하니깐."
"흐엉…."

쭈뼛거리며 다가온 성규가 뒤에 올라탔다. 호원이 가져온 차키와 지갑을 성규에게 맡긴 우현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낡은 자전거에서 끼릭끼릭거리는 요상한 소리가 났다.

"흐어엉…."
"그만 좀 울어요."
"다리 절단해야된다고 하면 어떡해요! 으어어엉!"

성규가 엉엉 울며 우현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우현의 카디건이 금세 눈물로 젖었다. 사실 우현도 겁이 났다. 정말 의사가 다리를 절단해야한다고 하면 어쩌지? 내 다리는 아니지만 다리 한 쪽이 없는 성규를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져오는 기분이다.

"그러길래 가만히 있는 뱀을 왜 밟아서 이 난리에요!"
"화장실에 뱀이 있을 줄 내가 알았어요? 흐으으…."

뱀을 밟았을때 그 물컹함이란! 성규가 그때 그 감촉을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살 좀, 빼요. 페달이 안 굴러지네."

성규, 우현의 말에 눈물젖은 눈으로 우현의 등을 홱 째려본다.

"지금 그 말이 나와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죽는다는 말 쉽게 하는거 아니에요. 그리고 요즘 의료기술이 얼마나 휘황찬란한데요."
"…나 죽으면, 울 엄마아… 흐윽… 명수야아…흐으윽."

그러더니 또 울기 시작한다.

"미치겠네."
"흐어어엉…. 으으…추워."
"어떡할까요? 히터라도 틀어요?"
"말장난할 기분 아니에요."

이거 입어요. 자전거를 잠시 멈춘 우현이 입고있던 카디건을 벗어 성규에게 건넨다. 카디건 안의 반팔티는 이미 땀에 젖어있었다.

"…팀장님은요."
"돼지같은 김성규씨 싣고 오느라 더워죽을 것 같으니깐 그거 걸치고 그만 좀 징징대요."
"우이씽…."

돼지라는 말에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카디건은 주섬주섬 끼워입는다. 몇 분을 더 달려 도착한 산입구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성규를 부축해 조수석에 태운다.

"발 어때요? 부었어요?"
"아뇨오…. 그냥 피만 조금…."
"욱신거리진않아요?"
"모르겠어요. 종아리가 욱신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 묻지마요. 무서워죽겠으니깐."

그나저나 이 시간에 병원 문이 열렸으려나. 차 시동을 건 우현이 서둘러 시내로 차를 몰았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독사의 침샘에서 분비되는 트립신과 유사한프로테아제는 단백질분해작용으로 혈관벽을 가해하여 혈압을 하강시키고 혈액을 응고시킵니다. 다행히 혈압도 정상이고 독소 반응도 없고 그냥 날라리 뱀한테 물리신 것 같네요. 상처부위에 되도록 물 안 닿게 하세요. 항생제 처방해드릴테니 받아가시구요. 그리고 주사 한 방 맞으셔야겠네요."

다행히 시내의 종합병원은 새벽까지 진찰을 받고 있었다. 엉덩이 주사를 맞은 성규, 뻘쭘한 표정으로 엉덩이를 문지르며 주사실에서 나온다. 절뚝거리는 것도 근육이 놀래서란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우현이 헛웃음을 지으며 반창고가 붙혀진 성규의 발목을 쳐다봤다.

"…진짜 놀랬다구요, 난…."
"누가 뭐래요? 쪽팔려서 어떻게 돌아갈래요? 눈물 콧물 질질 다 짜놓고."
"…킁."

병원 약국에서 약을 처방받는 동안, 슬리퍼 밖으로 튀어나온 발가락만 꼼지락대던 성규가 카디건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꺼냈다.

"고마워요."
"구체적으로."
"……자전거도 고맙고, 이 카디건도 고맙고…."
"병원비랑 약값, 아까 김성규씨한테서 딴 돈으로 냈어요."
"…그 얘긴 또 왜 꺼내요. 짜증나게…."
"그래도 다행이네요. 다리 절단 안 해서."
"창피하니깐 웃지마요."
"내가 언제 웃었어요."
"지금 웃고 있잖아요."

우현이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졌다.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


주차장에 멈출 줄 알았던 차가 산길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성규가 깜짝 놀란 눈으로 우현을 휙 쳐다봤다.

"자전거는 어떡하고요?"
"내일 가져다놓으면 되죠."
"…근데 산길 올라가면 스크래치 난다면서요?"
"종아리 아프다면서요. 차보단 사람이 먼저잖아요."

후웁. 성규가 숨을 들이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갑자기 뭐야, 이 낯간지러운 멘트는.

"저 김성규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야박하고 치졸한 사람 아닙니다."
"누가 야박하고 치졸하대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재수없고 재수없고 또 재수도 없고 게다가 재수도 없는 그냥 재수없는 인간. 근데 자주 부딪히며 지내다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재수없는 인간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내 말은, 선량함을 베이스로 깔고 그 위에 토핑으로 재수없음을 끼얹은 타입이랄까?

"성규씨! 괜찮아요? 다리는? 다리는 멀쩡해요? 안 잘랐어요?"

아직까지 안 자고 기다린 호원과 직원 몇 명이 걱정스런 얼굴로 조수석에서 내린 성규의 몸을 살핀다.

"그냥 독없는 뱀한테 물린거래요…."
"다행이네요. 전 성규씨 다리 절단되는 줄 알고 휠체어라도 사줘야하나했는데…."
"다들 죄송해요. 괜히…."

직원들이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하나 둘씩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뽀송뽀송한 자신과는 달리 땀을 흠뻑 흘린 우현은 한번 더 샤워를 마치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호원은 성규를 부축해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침대에 눕자마자 다시 잠들었다. 침대위에 앉아 발등에 붙혀진 반창고를 매만지던 성규. 샤워를 마치고 들어오는 우현을 보며 말한다.

"팀장님. 정 못 주무시겠으면 침대에서 주무실래요?"
"가격 깎아주게요?"
"깎아달라면 깎아줄수도 있구…."
"잠이나 자세요."
"네."

군소리없이 고분고분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펑펑 울어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지끈거려왔다.


*


다음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길.

"아, 피곤하다…."

벤츠 뒷좌석에 벌렁 누운 호원이 숨을 쉬는듯하더니 바로 곯아떨어졌다. 아침에도 못 일어나는 걸 우현이 간신히 걷어차서 깨웠었는데 참 잠 많다. 반면에 우현은 피곤한 기색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까지 단정하게 입은 채 묵묵히 운전을 하고 있었다.

"…팀장님은 안 피곤하세요?"
"누구 덕분에 조금이요."
"……."

맞는 말이다. 새벽에 그 난리를 폈는데 안 피곤할리가 없었다. 하품을 연달아 하던 성규가 몇 번 눈을 꿈벅거리더니 이내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안 그래도 작은 눈이 펑펑 울어댄 탓에 더 작아졌다. 잠든 성규를 위해 우현이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갠 뒤 기지개를 켜며 마당으로 나온 순재, 여리 꽃밭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를 보더니 환히 웃으며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성열아!"
"……."

늦잠자는 줄만 알았던 성열의 방엔 차가운 냉기만 흘렀다. 책상위에 핸드폰과 지갑도 그대로인걸 보면 아직 집안에….

"…아!"

방문을 닫은 순재, 서둘러 다락방으로 향한다. 문을 열자 피아노 건반에 기대 연필을 쥔 채 잠이 든 성열의 모습이 보인다.

"…미 아마스 빈?"

지우개 가루가 가득한 악보를 든 순재가 곤히 잠든 성열을 깨우는 것도 잊은채 음표들을 눈으로 읽어내려갔다. Mi amas vin? 서둘러 성열을 흔들어 깨웠다.

"성열아. 성열아."
"…으음."

뽀얀 얼굴에 건반 자국이 빨갛게 남아있다.

"너 여기서 잠들었어."

순재의 말에 성열이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봤다. 새벽까지 정신없이 곡을 쓰다 깜박 잠이 들은 모양이다.

"근데 성열아."
"…으응."
"이 곡, 너가 쓴거야?"
"…!…."

순재의 손에 들린 악보를 빼앗은 성열이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씻어야겠다며 다락방을 나갔다.

"…Mi amas vin."

미 아마스 빈은 사랑해라는 뜻이었는데...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12.


야유회가 있은지 일주일 후. 기계적인 사무실의 모습도 어느정도 이젠 익숙해졌다. 우현과는 여전히 티격태격이다. 둘 다 자존심이라면 하늘을 찌르고 옥황상제 똥꼬도 찌를 자존심이라, 자그마한 시비도 지지않으려고 서로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변한게 있다면, 우현이 성규와의 말싸움에 조금 재미를 붙혔단 점이다. 한참 일하던 우현이 기지개를 켜며 빈 커피잔을 들고 휴게실로 향했다.

"……."

우현,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찌푸린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커피 믹스 꼭지와 테이블에 묻은 커피자국, 가득찬 쓰레기통, 널부러진 A4포장용지,그리고 온갖 사무용품….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우현이 휴게실에서 나와 일을 하고 있는 성규에게 다가가 등을 톡톡 두드렸다.

"네?"
"따라와보세요."

그러더니 먼저 휙 휴게실로 들어가버린다. 저 인간이 또 왜 저러지. 껄끄러운 표정으로 휴게실을 따라 들어갔다.

"깨끗합니까?"
"뭐가요? 제 자신이요? 어, 아침에 샤워하고 왔는데…."

성규가 자기 와이셔츠 냄새를 킁킁 맡는다.

"김성규씨 말고 이 휴게실 말이에요. 보기에 깨끗하냐구요."
"…아뇨."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요?"
"…치울게요. 치우면 되잖아요, 치우면."

나도 나름 할 일이 있고 바쁜 사람인데 이 정돈 자기가 좀 하면 덧나나? 쭈그려앉아 쓰레기를 줍는데 우현이 나가지않고 팔짱을 낀 채 청소하는 모습을 감시라도 하려는듯이 의자에 앉아있다.

"청소하는거 처음봐요? 구경났어요?"
"아뇨. 감시났는데요?"
"…상종을 말아야지."

물티슈를 뽑아서 커피자국이 남은 테이블을 벅벅 닦아내고 쓰레기통도 새로 비웠다.

"휴우, 됐죠?"
"저 화분 좀 옮겨봐요. 그 쪽으로."
"이 쪽으로요?"
"아뇨. 그 반대편."
"…이 쪽이요?"
"흠…. 아니다. 그냥 원래대로가 낫겠네요. 그럼 수고해요."

우현이 빈 커피잔에 커피를 따르고 휙 휴게실을 나가버린다. 저런 우라질. 어째 요즘 들어 시비거는 횟수가 더 늘어난 것같다. 빈 종이컵을 꺼내 커피를 따르고 각설탕을 잔뜩 넣은 성규가 우현을 속으로 씹어대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


[진짜진짜 꼭! 꼭 와야한다? 너 온다고 하니깐 안 오겠다던 애들도 다 온다고 했단 말야]
"아,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진짜지?! 그럼 8시에 플러스 호프알지? 거기로 와! 사랑해!]
"끊어."

명수가 혀를 차며 전화를 끊는다.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선우의 전화였다. 생일 겸 고등학교 동창회 식으로 고등학교때 친구들 다 부르는데 너가 없으면 되겠냐고. 청남고등학교의 전설, 김명수가 빠져서 되겠냐고 안달복달을 하며 징징 짜대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응해버렸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레디락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정류장에 멈춘 버스에서 성열이 내린다. 명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휙 들자, 성열도 어색하게 웃어주며 뻣뻣하게 손을 들어 흔들어준다.

"안녕. 오랜만이네?"
"으응…."
"맨날 오다가 안 오니깐 궁금하더라. 무슨 일 났는 줄 알고."

명수딴에는 자주 오던 성열이 요새 들어 안 오길래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지만 성열의 얼굴은 순식간에 원숭이 엉덩이처럼 빨개졌다.

"…바,바빠서요. 아니 바빠서.."
"근데 어디 불편해? 얼굴이 빨갛네."
"조,조금 더워서…."
"안에 시원해. 들어가."
 
성열, 습관적으로 고개를 꾸벅하고 레디락안으로 들어간다. 일주일 만에 보는 명수의 얼굴은 여전히 잘 생겼고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났다. 빨간 볼을 가리며 자리에 앉은 성열에게 명수가 메뉴판을 건넨다.

"전, 아니 난 레몬에이드."
"응. 조금만 기다려."

미소를 지은 명수가 커피와 티를 만드는 바(Bar)로 향했다. 성열이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가방 지퍼를 만지작거렸다. 무슨 정신으로 이걸 전해주려고 왔는지 모르겠다. 저번에 피아노 치는 걸로 보아 악보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악보만 들고왔는데 만약 못 읽으면 어떡하지? 이런 저런 고민을 하던 성열, 결국 명수를 위해 쓴 악보를 꺼내지 못한 채 한숨을 쉬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래. 아직은, 조금 무리다.


*


사고 이후, 정말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순재, 들뜬 표정으로 베이커리안으로 들어간다.

"순재야!"
"이순재!"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두 명의 여자가 순재를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반갑게 손을 흔든다. 서로 얼싸안고 방방 뛰더니 순재의 몸을 살핀다.

"정말… 괜찮은거야?"
"응. 걱정마. 많이 기다렸지?"
"아니. 일단 앉자."
"진짜 얼마만이냐."
"그러게."

미리 주문해 놓은 디저트와 케잌, 초콜릿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커피를 한모금 마신 순재가 먼저 안부를 묻는다.

"아, 맞다. 민정이 너 결혼했다면서?"
"결혼한지 2년이 넘었는데 얘는. 그리고… 이제 나 여자 아니야."
"무슨 소리야?"
"여자가 아니라 엄마라고, 엄마."

민정의 말에 순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으로 입을 가린다. 그럼 저 뱃속에….

"진짜야? 어머! 언제?"
"나도 안지는 얼마 안 됐어. 4개월이래."

민정이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하긴. 다들 서른에서 한 살 빠진 스물아홉들이니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민정의 옆에 앉아있던 단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성열인, 잘 지내니?"
"…응. 요즘 다시 말도 하고 표정도 밝아지고 많이 좋아졌어. 요즘엔 혼자 외출도 해."
"다행이다."
"너 피아노는 다시 안 칠거야?"

순재, 대답없이 그저 잔잔히 웃는다.

"너랑 성열이, 둘 다 하얗고 길쭉길쭉해서 둘이 피아노 치는 모습보면 정말 소설 속 주인공들 같았는데…."
"맞아."

성열이 곡을 쓰고, 그 곡을 순재가 연주하고. 하얗고 키도 크고 비주얼까지 완벽한 순재와  피아니스트 사이에서 '피아노 요정 남매'로 유명했다. 하지만 사고로 순재가 손을 크게 다치면서 성열도 자연스레 피아노를 멀리하게 됐다. 피아노를 계속 치고 싶고 작곡도 계속 하고 싶지만 누나를 위해서, 누나도 피아노를 치고 싶어하지만 손이 불편해서 못 치는 걸 아니까.

"나 사실 많이 못 되게 굴었었어, 성열이한테. 사고나서 엄마아빠 잃고 손도 다치면서 제정신이 아니었지. 내 자랑거리는 피아노 뿐이었는데…. 그래서 성열이 피아노 치는 거, 내가 많이 시샘하고 질투했다? 내가 더 잘치는데, 내가 더 잘 칠 수 있는데하구…. 근데 그걸 성열이도 느꼈었나봐. 어느날부터 말도 안 하고 피아노도 안 치더라. 마치 아무것도 못하는 나랑 똑같아지려는 것처럼…."
"……."
"……."
"휴우…. 성열인 다시 피아노 치게 할거야. 작곡도 계속하게 해야지. 성열인 누구보다 재능이 많은 아이니깐."
"나쁜 기집애. 그렇다고 잠수는 왜 타! 친구들한텐 연락도 한번 안 하구…."
"미안해~ 사고나고 많이 바빴어. 호주가서 으스러진 손 여러번 수술하고 재활치료하고 마음 추스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그러다보니까 여유가 없었어."
"그 연하남이랑은 어떻게 된거야?"
 
단희가 묻자, 옆에 앉은 민정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치를 줬다. 그 모습에 순재가 씁쓸하게 웃으며 딸기 타르트를 잘게 잘라 입에 넣는다. 달달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지만, 이상하게 씁쓸했다. 우현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일까. 예전엔 서로 마음을 나눈 연인사이었지만 지금은? 사고 후, 둘 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자연스레 접었다. 이제 사랑이 아닌 우정을 바탕으로 지내는 두 사람은, 사랑의 애틋함같은 건 과거에 묻기로 했다. 암묵적으로. 언젠가 우현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기꺼이 축복하고 그 사랑의 영원을 기도하며 흔적없이 사라지고 싶다. 그냥 잠시동안 우현의 맘속에 '이순재'라는 사람이 머물렀었다,하고.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어느덧 퇴근 시간. 엘리베이터 앞. 어깨가 뭉친 우현이 어깨를 휙휙 돌리다 실수로 옆에 서있던 성규의 팔뚝을 툭 쳤다.

"실수."

짧게 내뱉는 말에 성규가 입을 씰룩거린다. 분명 일부러 했을거야, 재수없는 인간. 신경끄는게 상책이라 생각하며 호원과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내려가는가싶더니 바로 밑층인 3층에서 멈춘다. 문이 열리고 직원들이 우루루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

어쩔 수 없이 구석으로 밀리게 된 성규와 우현, 하필 자세가 성규가 구석에 서있고 그 앞에 우현이 성규를 보며 서있는 자세다. 좁아터진 엘리베이터에서 저리 꺼지라고 할 수도 없고 차마 밀쳐내지도 못하겠는 성규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성규의 동그란 머리통에서 은은한 샴푸냄새가 났고 우현의 가슴팍에선 알싸한 향수냄새가 콧속으로 훅 끼쳐들어왔다. 서로 생각한다. 그리 나쁜 냄새는 아니군. 호원은 반대쪽 구석에서 애니팡만 두들기고 있다. 1층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우루루 몰려나가고 우현도 휙 뒤돌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내일 봐요! 내일 보자!"

성규와 우현에게 한번씩 손을 흔들어준 호원이 차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먼저 빠져나갔다. 운전석에 타려던 우현이 앞 유리에 끈적하게 흐르고 있는 새똥을 보고는 오만상을 지으며 성규를 부른다.

"김성규씨. 나와봐요."
"왜요."

조수석에 앉아 벨트를 매려던 성규가 고개만 쑥 내밀고 대답했다. 새똥 좀 치우세요. 우현이 손가락으로 새똥을 가리키며 휴지를 꺼내 성규에게 내민다. 아니, 지 차면서 왜 나보고 닦으래?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왜 내가 닦아요, 팀장님 차인데? 그리고 내가 무슨 청소부에요?"
"좀 닦아줘요. 도저히 못 닦겠어서 부탁하는거니깐."
"아오, 깔끔은 어지간히 떨어요, 진짜."

휴지를 북북 뜯어내 유리창에 묻은 새똥을 닦아냈다.

"이것도 못해요, 이것도?"
"아, 저리 치워요."

휴지를 들이밀며 말하는 성규를 더럽다는 듯이 쳐다본 우현이 얼른 운전석에 올라탔다.

"이건 어떡하구요?"

성규가 자신의 손에 들린 휴지를 보며 물었다.

"주머니에 넣었다가 집가서 버려요."
"…지금 장난해요?"
"진심인데."
"나도 진심 화나려고 하는데."
"그럼 회사 입구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와요. 기다릴 테니까."

우현과 몇 마디만 더했다면 미친듯이 울부짖으며 앞 유리를 모조리 깨버릴 것 같다. 결국 쓰레기통에 휴지를 버리고 온 성규가 조수석에 올라타며 우현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혼잣말을 했다.

"스물여섯이나 먹은 사람이 자기 차에 묻은 새똥도 못 닦아? 어휴."
"누군 스물여덟먹어서 참 좋겠네."
"뭐라구요?"
"혼잣말 한건데요?"
"나 들으라는식으로 했잖아요."
"그건 김성규씨도 마찬가지아닌가."
"그리고 왜 자꾸 반말 믹스해요?"
"그냥."

그러더니 휙 후진을 한다. 뻔뻔하고 재수없는건 기네스북에 올라도 될 감이다.

"팀장님 생리하세요?"
"뭐요? 내가 여자로 보여요?"
"아뇨. 팀장님같은 여자면 진짜 끔찍하죠. 내 말은 왜 자꾸 요즘에 툭툭 시비거시냐구요."
"소소한 낙 정도로 알아둬요."
"소소하게 맞아본 적있어요?"
"때려봐요. 폭행죄로 고소하면 되니깐."
"야!"
"왜."
"…잠깐, 뭐,뭐?!"
"왜. 왜 부르냐고."

평소라면 왜 반말하냐고 인상을 굳혀야할 우현이 오늘은 똑같이 받아친다. 어버버버거리며 당황하자 우현이 당해보란 식으로 연이어 반말을 뱉는다.

"불렀으면 말을 해. 벙한 표정 짓지말고."
"…너,너."
"다음부턴 반말하면 똑같이 반말할 테니깐 그렇게 알아두세요."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성규의 가방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성규, 우현을 노려보며 전화를 받는다.

"어, 엄마. 왜."
[퇴근하고 오는 길이니?]
"응. 왜?"
[그럼 편의점에 들려서 세제랑 엄마 마스크 팩 좀 사와. 오미자 성분 들어간거 뭔지 알지? 그거 없으면 그냥 알로에 사와.]
"알았어. 끊어."

성규, 전화를 끊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저기 앞에 편의점 좀 들려줘요."
"왜요."
"전화내용 못 들었어요?"
"엿듣길 바랬어요?"
"진짜 사사건건…. 저희 어머니인 나봉신씨가! 편의점에 들러서 세제랑 팩 좀 사오라네요!"
"알았어요. 뭐 어려운 일은 아니니깐."

우현, 바로 앞에 보이는 편의점 앞에 차를 세운다. 지갑을 들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 성규가 집에서 쓰는 세제와 미용 코너에 있는 팩을 대충 집어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저… 핫바 하나 얼마에요?"
"1500원 입니다."

보온기 안에 들어있는 핫바를 두 개 집으려던 성규,

"그냥 하나만 계산할게요."

우현이 괘씸해 하나만 계산대에 올려놨다. 입에 핫바를 물고 차에 탄 성규가 유치하긴 하지만 일부러 쩝쩝소리를 내며 핫바를 먹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우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혼자 먹으니깐 맛있어요?"
"네.혼자 먹으니깐 맛있어요."
"동생데리고 그러고 싶어요?"
"동생? 하이고. 난 팀장님같은 동생 둔 적 없어요. 있으면 나한테 반은 콱 죽었죠! 안 가고 뭐해요? 얼른 출발, 어어!"

성규의 손을 힘주어 잡은 우현이 앙,하고 덥석 핫바를 물었다. 핫바의 반절이 순식간에 우현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성규, 말을 잇지못한채 손만 부들부들떤다. 내 핫바가…!

"아, 맛있다."
"에이씨! 야! 너 다 먹어라!"

우물우물거리는 우현의 입속에 나머지 핫바를 구겨넣었다. 편의점 앞에 세워진 우현의 벤츠가 좌우로 흔들흔들거린다.


*


집으로 가기전, 마트에 들린 호원이 카트에 캔맥주와 여러 인스턴트 식품들을 가득 담았다. 헬스를 하며 인스턴트 식품은 되도록 멀리하려했지만 음식 솜씨가 완전 시궁창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문득 예전에 김치찌개 끓인다고 나댔다가 김치지짐이를 만들었던 기억이 스물스물 떠올랐다. 그래도 밥은 할 줄 알아 다행이다. 그때 누군가가 호원에게 다가와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호원씨 맞죠!"
"어? 동우씨. 안녕하세요."

하늘색 후드티를 입은 동우의 모습에 호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지금 퇴근하시나봐요?"
"네. 집에 먹을게 없길래 이것저것 좀 사느라구요. 하하하하."
"근데 다 인스턴트네요?"

호원의 카트에 담긴 것들을 보며 동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집에 혼자 사세요?"
"네. 솔로플레이하고 있어요. 요 앞에 울림오피스텔있죠? 거기 살아요."
"어? 난 태양빌라사는데! 그래도 이런 거 많이 먹으면 몸에 해로워요."

인스턴트가 가득한 호원의 카트와 달리, 동우의 카트안엔 형형색색의 채소들로 가득했다.

"요리 잘 하시나봐요?"
"잘 한다고 말하긴 좀 그렇고… 좋아해요! 이것저것 만들어보고 싶은 것도 많구!"

동우가 헤헤헤하며 웃는다. 꼭 채소같은 사람이다. 비타민이 넘치는 채소같은 사람.

"나중에 놀러가야겠네요. 맛있는거 얻어먹으러."
"맛은 장담 못 하는데 오면 꼭 해드릴게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도중,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몇 살 안되어 보이는 꼬마아이가 엄마를 목놓아부르며 엉엉 울고 있었다. 혼자인 걸 보니, 아마 엄마가 한 눈 판 사이에 잠시 떨어져나온 것 같았다. 카트를 동우에게 맡긴 호원이 쪼르르 아이에게 달려간다.

"꼬마야. 왜 울어?"
"엄마아아아! 으아아아앙!"
"어우. 목소리도 크네. 엄마 잃어버렸어? 응? 아, 엄마가 널 잃어버린건가. 아무튼."
"으어어어엉!"
"엄마 찾아줄게. 걱정하지마. 뚝!"

엄지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눈물을 닦아준 호원이 근처에 서있던 직원을 불러 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린 것 같으니 부탁한다며 아이를 맡겼다. 직원이 무전기로 몇 번 무전을 나누더니 곧 아이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허겁지겁 달려와 아이를 끌어안고 간다.

"와…. 호원씨 방금 되게 자상하고 멋있었어요."
"하하하하. 제가요? 하하하하. 뭘요. 하하하하."

호원, 칭찬 참 좋아한다. 더 살 게 있다는 동우와 헤어져 계산대로 향하면서 입으로 계속 뭐라 중얼중얼거린다.

"…되게 자상하고…되게 멋있는…남자 이호원. 하학학학학학."

카트를 씽씽 구르며 계산대에 도착한 호원이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인스턴트 식품을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


핫바를 처음부터 하나만 사온 니 잘못이다, 아니다, 내가 왜 니것까지 두개를 사와야하며 그렇다고 왜 뺏어먹느냐, 아니다, 나이도 많으면서 치사하다, 꺼져라, 나이얘기 닥쳐라. 집앞에 올때까지 쉴새없이 말다툼을 한 성규와 우현. 성규의 대문앞에서 차가 서자 그제서야 좀 잠잠해졌다. 손에 쥐고 있던 핫바 껍질을 차 안에 홱 버리더니 우현이 쫓아올까싶어 후다닥 집안으로 뛰어들어간다. 그 모습에 우현이 끅끅거리며 웃다가 정색을 하고는 자신의 집앞에 차를 세운다. 성규가 내던지고 간 쓰레기를 집으려고 고개를 돌리자 조수석에 놓여진 성규의 핸드폰이 눈에 들어온다.

"…칠칠맞기는."

성규의 핸드폰을 집어들고 폴더를 열었다. 구시대적인 디자인에, '항상 웃자^^성규 화이팅!'이라고 쓰여진 바탕화면 문구도 어지간히 촌스럽다. 피식 웃은 우현이 좀 더 폰을 구경할 심산으로 사진첩을 열었다. 꽤 오랫동안 쓴 핸드폰인지, 사진 저장 갯수가 357개나 된다. 명수와 같이 찍은 셀카부터 봉신 씨와 함께 찍은 사진, 바다에서 찍은 사진, 그리고 주변 풍경을 찍은 사진까지. 쓸데없는 사진들도 많았다. 우중충한 하늘을 찍었다거나, 길가에 꼬질꼬질한 고양이를 찍었다거나. 그리고 한가득 찍은 엽사까지. 성규와 명수의 끔직할 정도로 골때린 엽사에 우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콧구멍에 동전을 넣고 찍은 사진, 입에 새우깡을 꽂아넣고 드라큘라처럼 찍은 사진, 올빽한 명수 사진….

"핸드폰에 카메라 기능 없었으면 큰일날 뻔했네."

사진첩에 있는 모든 사진을 관람한 우현, 이번엔 전화번호부를 열어본다. 많은 연락처 중에, 과연 자신은 어떤 이름으로 저장되어있을까.

"…밴댕이…소갈딱지?"

이게 무슨 뜻이지? 왠지 좋은 어감은 아닌데. 찜찜한 표정을 지은 우현이 편집버튼을 눌러 '멋진 남팀장님'으로 이름을 바꿔놓는다. 흡족한 표정으로 전화번호부를 닫고 알림창이 떠있는 달력 버튼을 눌렀다. [D-7][D-8]. 화면 상단에 나란히 숫자가 떠있다. 꾹꾹 버튼을 움직여 디데이 문구를 누르자 팝업창이 화면에 뜬다. [내 생일 D-6][아부지 보러가는 날 D-7]

"……."

성규 생일 바로 다음날이 아버지 기일인 것 같았다. 참 슬픈 우연이다. 생일 바로 다음날이 아버지 기일이라니. 왠지 성규가 측은해진 우현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간다. 먼저 돌려주기귀찮았다. 뭐, 없어진 줄 알면 찾아오겠지.



"스물네살이 무슨 동창회? 졸업한지 얼마나 됐다고? 까분다, 까불어."
"신경끄셔. 내 친구 선우알지? 걔 생일 겸 그냥 모인다고 해서."

전신 거울앞에 선 명수, 머리까지 왁스로 만져가며 꽃단장을 하고 있다. 정장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둔 성규가 봉신 씨에게 세제와 팩을 내민다.

"이게 뭐야. 오미자 아니면 알로에 사오랬더니 레몬이잖아. 어휴, 이럴 줄 알았어. 귀찮아도 내가 가서 사는 건데."

레몬 팩을 꺼내든 봉신 씨가 오미자와 알로에가 아니라며 잔소리를 해댄다.

"그냥 아무거나 하셔. 밥 줘. 배고파."
"어휴, 못 살아. 레몬은 시큼해서 싫은데."

봉신 씨, 팩들을 냉장고 제일 아랫칸에 넣고 반찬들을 꺼낸다.

"나 오늘 늦게 올지도 모르니까 대문 잠그지마."
"너무 늦게 오지말구. 술 되도록 마시지마!"
"내가 형인 줄 알어? 간다!"

멋드러지게 차려입은 명수가 휙휙 손을 흔들며 집을 나간다. 밥과 국을 퍼 성규의 앞에 내려놓은 봉신 씨가 달력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음주 금요일, 너 생일이네."
"…응."

성규 생일은 금요일, 아버지 기일은 토요일. 주말에 걸쳐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봉수 아저씨 핸드폰 번호, 너한테 있지?"
"응. 내가 작년에 저장해놨어. 잠깐만."

수저를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간 성규가 가방을 뒤적뒤적거렸다.

"…어?"

가방안의 내용물을 침대위에 탈탈 털어도 없다. 정장 주머니를 뒤져봐도 없다.

"어디갔지?!"

성규,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 거실에도, 식탁에도 핸드폰은 없었다. 망했다! 잘 까먹는 성격이라서 모든 중요한 건 메모장에 적어놨는데! 게다가 그 많은 엽사들!

"아, 어떡하지!"
"왜? 무슨 일인데?"
"핸드폰 없어졌어! 아까 엄마랑 통화하고나서 그…."

아! 성규가 손가락을 부딪혀 딱 소리를 내더니 급히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간다.

"차 안에 두고 내린 것 같은데…."

우현의 벤츠 유리창에 찰싹 달라붙은 성규가 차 안 여기저기를 살폈다. 만약 그 재수없는 인간이 들고 내렸으면 분명히 안에 있는 망할 엽사들을 다 봤을텐데! 혹시나 문이 열려있을까싶어 조수석 손잡이를 홱 잡아당겼다. 그러자 갑자기 차 불빛이 번쩍 하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삐용삐용거리기 시작한다. 온 동네를 쩌렁쩌렁 울리는 경보음 소리에 성규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헉! 어떡해!"
"삐용삐용삐용!"
"야,야! 조용히해! 아씨!"

벤츠 본네트를 팡팡 내려친 성규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할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뭡니까?!"
"……나에요."

울타리에 선 우현이 위에서 성규를 내려다보며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낸다. 성규의 오래된 핸드폰이다.

"…혹시 이거 찾아요?"
"어! 내 핸드폰!"

울타리로 달려온 성규가 우현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홱 채간다.
 
"혹시 봤어요?"
"뭘요."
"안에 있는거요."
"안에 있는게 뭔데요?"
"아녜요, 아무것도."
"예를 들어, 엽사 같은거요?"

성규의 어깨가 흠칫, 떨린다. 아, 젠장. 봤구나.

"봐,봤어요!? 왜 봐요, 왜! 남의 핸드폰을 왜 뒤지냐구요! 왜! 왜!"
"누가 보고 싶어서 본 줄 알아요? 핸드폰을 줏었으니 누구껀지 확인해야할거아니에요. 그래서 본거에요."
"팀장님 차에 나 말고 탈 사람이 어딨다고!"
"내 차가 김성규씨 전용 택시에요? 다른 사람이 탔을 수도 있는거지."
"에이씨!"

하여튼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한다니깐. 아우, 쪽팔려. 우현을 흘긴 성규가 쾅! 소리를 내며 대문을 닫았다. 피식 웃은 우현도 집안으로 들어간다.


*


"김명수!"
"어머, 진짜 김명수네!"

명수가 호프집안으로 들어서자 길게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친구들이 반갑게 웃어주며 명수를 맞이한다. 거의 연예인 급이다.

"봤지? 봤지? 내 말이 맞지? 진짜 명수 온댔잖아, 이 시키들아! 인누와, 명수얌. 요기요기 앉어."

명수를 끌어당겨 자신의 옆자리에 앉힌 선우가 싱글벙글웃으며 잔을 가져와 맥주를 따라준다.

"애들 진짜 거의 다 모였네."
"그라췌! 내 생일인데 암. 모이고 말고."
"명수야, 오랜만이다?"

선우의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던 미희가 묘한 웃음을 띠우며 명수에게 인사를 건넨다. 고등학교 때 자기 입으로 자기가 명수 애인이라고 소문내며 다녔을 정도로 명수에게 집착했던 미희. 아직도 그 마음이 남은 건지 명수를 보는 눈빛이 사뭇 음산하기까지하다.

"…너 코했냐?"

명수의 말에 미희가 헛기침을 하며 코를 매만졌다.

"무,무슨 소리야."
"흠…. 광대도 깎은 것 같은데."
"야야, 오랜만에 만나서 그게 할 말이냐? 일단 건배하자, 건배. 차선우를 위하여!"

선우가 명수의 말을 막으며 건배를 제안했다. 친구들이 하나같이 잔을 들고 서로 쨍쨍 부딪히며 시원하게 잔을 비운다.

"명수는 애인있니?"

미희의 물음. 명수가 땅콩 껍질을 벗기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안 키워."
"왜?"
"귀찮아."
"에이. 귀찮게 안 하는 여자친구를 만나면 되지. 마치 나처럼. 호호호."
"지금 나 땅콩 까먹는거 제일 귀찮게 하는 게 넌데?"
"큼…. 암튼 여전히 잘 생겼다, 명수야."

미희의 꼴 사나운 추파를 보며 친구들마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친구사이만 아니였다면 완전 스토커 수준이다. 하지만 명수는 크게 신경쓰지않고 간간히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만 홀짝홀짝 들이켰다. 문득, 선우 앞에 잔뜩 쌓여있는 선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선물 못 사와서 미안하다."
"야, 닥쳐. 너 자체가 선물이야."
"미친놈."
"아잉. 아, 참. 성규 형님은 잘 지내? 같이 오지 그랬어?"
"취직해서 바빠. 나 하나 온 걸로 부족하냐?"
"엄멈머? 누가 부족하댔어?"

선우가 능글맞게 웃으며 명수의 어깨에 노란 머리를 부비적거린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애들과 대학 졸업을 앞둔 여자애들 모두 취업을 준비하는 듯 보였다.

"명수, 넌 진짜 모델해야된다니깐. 아님 배우도 괜찮고. 너 같은 비주얼은 공동체 사회에서 썩기 아까운 얼굴이야."
"맞아. 고등학교때 너 몇 번 캐스팅도 왔었잖아."
"길거리에 나가면 여기저기서 명함내밀고 난리도 아니였는데."

쏟아지는 칭찬에 명수가 그저 심드렁한 얼굴로 땅콩만 하나씩 톡톡 입안에 넣었다. 재수없을지몰라도 이젠 하도 들어서 질릴 정도였다.

"누가 들으면 내 생일인 줄 알겠네. 차선우 칭찬이나 해."
"맞다. 시키들아, 내 칭찬도 좀 해."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고 얼추 술기운이 슬슬 올라올때, 자리에서 일어난 명수가 화장실로 향하는 걸 미희가 조용히 뒤따랐다.

"김명수."
"아이씨, 깜짝이야."

볼일을 보고 손을 씻고 나오던 명수가 문앞에 서있는 미희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너 정말 여자친구 없어?"
"아, 얘가 또 시작이네. 오늘은 좋게 좋게 술만 마시고 가자, 미희야. 응?"
"누가 나쁘게 마시쟀어? 너도 참 웃겨. 호호호."
"별게 다 웃기네. 너 오줌싸러 온 거 아냐? 오줌 싸. 나 간다."

휙 지나쳐 가는 명수를 보며 미희가 중얼거렸다.

"저게 매력이라니깐…. 튕기긴."


*


"우현아. 바빠?"
"아니 전혀. 왜?"
"잠깐 차 한 잔 할래?"
"차? 이 밤에? 뭐, 알았어."

서류를 덮은 우현이 순재를 따라 거실로 나왔다.

"나…성열이 데리고 다시 호주로 갈까?"
"…뭐?"

찻잔을 마시던 손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의 순재를 살폈다. 무슨 일 있었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성열이 피아노도 다시 치고 싶어하는 것 같고 곡 쓰는 것도 계속 하게 해주고 싶어서."
"……."
"너무 갑작스럽나?"
"…어, 조금…."
"당장 가겠다는 건 아니고. 언젠간 그렇게 하고 싶어. 성열이 대학교도 다시 다녀야되니까."
"그래. 성열이한테도 그게 좋을 것 같다…. 근데, 나중에. 좀 더 나중에 얘기하자. 아직은 좀 그렇다."

우현의 말에 순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락방에서 내려오려던 성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이야기를 엿듣다가 다시 다락방 안으로 들어간다. 소리안나게 방문을 닫은 성열, 문앞에 주저앉아 악보만 만지작거린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정말 순재 말대로 다시 호주로 돌아가게 된다면? 호주로 돌아가 학교도 다시 다니고 피아노도 다시 치고 곡도 다시 배우는 건 정말 즐겁고 설레는 일이다. 또 바라던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하지만….

"하아…."

한숨을 내쉰 성열이 불을 켜지 않은채 다락방 창문을 활짝 연다. 며칠전만해도 댕글댕글하던 달이 어느새 반쪽이 되어있었다. 별도 없고 반달만 덩그러니 떠있는 쓸쓸한 밤하늘이다.

"아, 진짜 싫다고."
"왜? 아니 이유가 없잖아, 이유가."

어디선가 명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명수의 목소리라면 100m에서도 캐치해낼 성열이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레임으로 가득차던 성열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야. 여자가 좀 도도해져봐. 구차하게 이러고 싶냐?"
"니 앞에선 자존심 세우기 싫어."

명수가 어떤 여자와 함께 서있었다.

"나 너한테 상처주기 정말 싫거든? 친구라서 참고 또 참고 있는거니깐 그만하고 가라."
"아니 애인도 없으면서 왜 나랑 못 사귀겠단 건데?"
"내가 널 안 좋아한다구요, 미희님. 제발 그냥 가시라구요."
"괜찮아. 사귀면서 만들어가면돼."

악보를 쥐고 있는 성열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악보 귀퉁이가 꼬깃꼬깃 접히기 시작한다.

"나 들어간다. 잘 가라. 그리고 선우한테 미리 말해놨어. 내 번호 가르쳐주지말라고."
"번호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지."
"그래. 식은 죽 마음껏 처드시던지 말던지."
"아아~ 박력넘쳐. 이래서 내가 널 포기할 수 없다니까. 들어가, 명수야! 푹쉬고 다음에 봐!"

머리를 벅벅 긁은 명수가 짜증을 내며 대문을 쾅 닫았다.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은 미희의 모습에 성열의 눈이 화르르 불탄다. 감히 너같은 난쟁이 똥자루가 명수를?

"짜식, 좋으면서…아야!"

뒤돌아가려던 미희, 무언가에 머리통을 맞고 인상을 찌푸린다.

"…아씨, 뭐야!"

잠자리 지우개? 바닥에 떨어져있던 지우개를 집어든 미희가 욕을 뱉으며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렸다.

"어떤 새끼가 던진 거야!"
"……."
 
다락방 창문 밑으로 고개를 숙인 성열,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오려고 한다. 욕을 씨부렁거린 미희가 구둣소리를 내며 오르막길을 지나 사라지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명수가 그 난쟁이 똥자루같은 여자한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보여 다행이다. 성열이 실실 웃으며 창문을 닫았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13.

 

바쁜 저녁과는 달리 점심시간의 장동牛 고깃집은 꽤 한가했다. 카운터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의자를 흔들흔들거리던 동우에게 여자 한 명이 다가오더니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동우오빠! 오랜만이다!"
"예? 누구…."
"뭐? 누구? 섭섭하게 왜 이래."
"…너…미애? 미애구나! 우하하하! 이게 얼마만이야!"
"오빠 가게 한번 들려야지했는데 이제야 들리네. 고깃집이 무슨 까페처럼 생겼어?"
"고깃집이 꼭 고깃집같아야한다는 패러다임은 버려. 암튼 고기 먹으러 온거야? 혼자?"
"아니. 공짜티켓 생겨서 친구랑 영화보기로 했는데 걔가 펑크낸 거 있지. 그래서 그냥 집가려던 길에 잠깐 들린거야. 아, 그럼 그냥 오빠가 이거 가질래?"

미애가 가방안에서 티켓 두 장을 꺼내 동우에게 건넸다.

"…보라돌이의 습격?"
"응. 이번에 개봉한 좀비 영화. 티켓 내일까지니까 오빠 여자친구랑 보러 가."
"나 여자친구없는데…."
"그럼 친구랑 가던가. 암튼 난 간다! 다음에 친구들이랑 한번 올게!"
"응. 잘 가! 차 조심하고!"

휙휙 손을 흔들어준 동우가 다시 의자에 앉아 티켓을 만지작거렸다. 나 애인없는데 누구랑 보러가지? 아, 성규. 성규가 있었구나. 가게 전화기를 든 동우가 성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친구! 뭐해!"
[일 한다, 왜]
"내일 뭐해? 영화보러갈래?"
[무슨 영화]
"좀비영화인데 제목이…보라돌이의 습격."
[……제목이 왜 그따구냐. 귀찮아. 딴 사람이랑 봐.]
"내가 너 말고 서울에 친구가 어딨어."
[이번 기회에 만들던지. 끊는다, 뿅.]

뚝 끊긴 전화를 보며 인중을 실룩거린 동우가 영화제목을 중얼거렸다. 보라돌이의습격…. 보라돌이? 문득 보라색을 좋아하는 호원이 떠올랐다. 같이 볼 사람도 없고 혼자 볼 마음도 없었기에 두 장 다 호원에게 줄 심산으로 성규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야, 꺼져. 안 본다고.]
"아니아니. 옆에 호원씨있어?"
[호원씨? 호 대리님?]

동우의 전화를 받은 성규가 의아한 표정으로 호원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호 대리님. 여기 전화요."
"누군데요?"
"제 친구 동우인데 호 대리님 바꿔달라네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호원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동우씨."
[저…혹시 영화 좋아하세요?]
"영화요?"
[저한테 영화티켓 두 장이 생겼는데 그냥 호원씨,]
"제,제가 퇴근하고 9시 가게 앞으로 갈게요!"
[아, 네! 그럼 9시에 가게 앞에서 뵈요!]

멍하니 전화를 끊은 호원이 비실비실 웃기 시작한다.

"동우가 뭐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하하하."

이건…이건 분명 데이트 신청이 아닌가!


*


분사 호스로 여리 꽃밭에 물을 주고 있는 성열, 잘 자라고 있는 나무와 만개하는 꽃들을 보니 내심 흐뭇하고 기특한 마음이 든다.

"…휴우."

자꾸 그 미희라는 여자가 머리속에 맴돈다. 다행히 명수가 끔찍히도 싫어하는게 한눈에 봐도 티가 났지만 그렇다고 배제할 수 없는 인물이다. 만약, 정말 만약에 명수의 마음이 미희에게 돌아서 둘이 사귀게 된다면? 따지고 보면 자신과 미희는 똑같은 위치에 서있지않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호스를 수돗가에 걸어두고 발을 탁탁 털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킁킁."

달달하면서도 쾌쾌한 탄 냄새에 킁킁거리며 들어선 성열이 거실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순재를 보고는 서둘러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간다. 오븐에서 회색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다.

"아,앗 뜨거!"

겁도 없이 뜨거운 손잡이를 덥석 잡더니 깜짝 놀라 손을 뗀다. 손을 호호 불며 울상을 짓던 성열이 벽에 걸린 주방장갑을 끼고 오븐을 열어 팬을 꺼냈다.

"…다 탔다."

순재가 만들어주겠다던 쿠키는 노릇노릇을 뛰어넘어 거뭇거뭇하게 다 타버렸다. 바스락거리는 쿠키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거실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순재를 깨웠다.

"누나."
"으음…."
"누나 일어나봐."
"…응, 성열아. 왜?"
"쿠키 다 탔어."
"쿠키? 무슨…. 어머!"

탄 냄새를 맡은 순재,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간다.

"어떡해. 다 탔네, 진짜."
"……."
"아아. 아까워서 어떡해."
"…피곤해?"
"어젯밤에 푹 잤었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쿠키는 누나가 다시 만들어줄게. 조금만 기다려."

여전히 졸린 눈의 순재가 쿠키를 모두 쓰레기통에 넣고 다시 재료들을 꺼내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더 많이 만들어서 성규씨도 줘야겠다."
"……명수도.."
"응? 뭐라고?"
"…아니야. 나도 만들래."
"그래, 그럼. 얼른 손 씻고 와."
   
싱크대에서 박박 손을 씻은 성열이 식탁에 앉아 순재가 미리 만들어놓은 반죽을 건네받았다.

"하트모양이네?"
"으응? 어…어어."

별 모양을 만들던 순재가 하트모양을 여러개 만들고 있는 성열을 보며 물었다. 장난치다 들킨 아이처럼 흠칫한 성열, '그냥 하트가 예뻐서'하고 얼버무리며 고개를 숙이고 초코칩을 하트에 콕콕 박아넣는다.


*


퇴근을 할 준비를 하며 이것저것 가방에 챙겨넣는 성규에게 애처로운 표정의 한 여직원이 살며시 다가왔다.

"저…성규씨."
"네? 무슨 일이세요?"
"사실 제가 오늘 남자친구랑 3주년이라서 퇴근 후에 만나기로 했거든요? 근데 업무 마감이 밀렸지뭐에요. 그것 좀 어떻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여직원의 표정은 지독하게 애처로웠다. 하지만 집에 가서 샤워하고 따뜻한 방바닥에 드러누워 TV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던 성규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가방끈만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린다. 옆자리에 호원은 벌써 퇴근했는지 자리에 없었다. 여직원이 한번 더 애절하게 부탁하려고 할때, 마이를 걸치며 다가온 우현이 불쑥 사이가 끼어들었다.

"자기가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져야죠."

우현의 말에 얼굴이 빨개진 여직원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안 가요? 안 가면 나 혼자 가고."
"아,아뇨. 가야죠."

먼저 휙 나가버리는 우현을 서둘러 따라나갔다. 조수석에 탄 성규가 우현에게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남자친구랑 3주년이라는데……."
"그럼 김성규씨가 다시 가서 남은 일 다 마무리하고 올래요? 나 안 말려요."
"그게 아니라,"
"누가 김성규씨 위해서 그런 말 한 줄 알아요?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전 불성실한 사람을 제일 혐오해요."
"그래도 기념일이라잖아요."
"기념일이 대수에요?"

성규가 그 말에 혀를 내둘렀다.

"팀장님 연애 안 해봤어요?"
"그러는 김성규씨는 해봤어요?"
"어휴, 전 난리났었죠."

하도 안 해봐서 난리라는 건 비밀. 하지만 우현의 의미심장한 비웃음에 성규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창틀을 만지작거렸다.

"…나 궁금한게 하나있어요."
"뭔데요."
"물어봐도 되요?"
"안된다하면 계속 궁금해할거에요?"
"아마도요."
"그럼 물어봐요."
"……순재씨랑은 무슨 사이에요?"
"……."

괜히 물어보라고 했나. 우현이 대답은 않고 묵묵히 운전만 한다.

"아니, 같이 사는데 연인 같지는 않고…또 연인이 아닌데 같이 사는 것도 이상해서…."
"……."
"연인이에요?"
"……."
"아님 그냥 의남매?"

묵묵부답. 긍정도, 부정도 하지않는다.

"…그냥."
"……."
"사람과 사람사이에요."

사람과 사람 사이? 의미모를 대답에 더 궁금해졌다.

"팀장님이랑 나랑도 사람과 사람사이잖아요. 너무 광범위한 대답이었어요."
"그 정도로 만족해요. 신경써서 대답한 거니까."
"그냥 예,아니오로 대답하면 쉬울텐데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대답하고 싶어요?"
"네."
"알겠어요."

사람과 사람사이라는게 도대체 무얼 뜻하는지 감이 안 온다.

"그러는 팀장님이야말로 연애 해봤어요?"
"원래 선천적으로 오지랖이 넓어요?"
"내 오지랖이 끼치는 영역에 팀장님이 들어온 거잖아요. 그리고 물어봐도 된다고 한 사람은 팀장님이었으면서."
"내가 초딩인 줄 알아요? 연애도 못해보게."
"초딩들이 왜요? 요즘 초딩들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아, 시끄러워요. 쓰잘데기없는 말 그만하고 내리기나 해요."

어느새 집앞이다. 입을 삐죽거리며 차에서 내린 성규, 조수석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제 할말을 한다.

"그래도 사람이 사랑을 해가면서 살아야 사람다운거에요. 팀장님은 내가 보기엔 너무 감정이 메말랐어요."
"김성규씨나 하세요, 실컷."
"걱정마세요. 실컷 할테니까."
"할 수나 있으려나."
"왜요. 내가 어때서요."
"나이많고 차 없고 성격도 까칠한 남잘 누가 좋아합니까?"
"흥. 나이적고 차 있어도 맨날 비꼬고 성격 파탄자인 남자를 여자들이 더 싫어한단 걸 아셔야지."

대문이 열리고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성규가 다시 쪼르르 나오더니 벤츠 앞바퀴를 발로 콩! 차고는 다시 휙 들어가버린다.


*


동우가 기다린다는 생각에 쏜살같이 고깃집 안으로 달려온 호원이 옷 매무새와 멋드러지게 세워진 머리를 정돈하고 차에서 내렸다. 북적이는 가게 앞 테이블에 앉아있던 동우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온다.

"되게 일찍 왔네요?"
"하하하하. 네. 불꽃같은 사나이라서요. 하하하하."
"아, 여기 티켓이요."

어라? 티켓 두 장을 받아든 호원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천천히 내려간다.

"아는 동생이 줬는데 그냥 호원씨 주려구요. 재밌게 보세요! 우하하하."
"……아."

같이 영화보자는 뜻이 아니라 그냥 티켓을 준다는 얘기였구나. 그랬구나…. 티켓을 받은 호원이 아무 말도 없이 서있자 동우는 슬쩍 호원의 안색을 살폈다.

"무슨… 문제있어요? 영화가 별로인가…."
"아뇨. 아니에요, 아무것도."
"다행이다. 영화 제목 보니깐 호원씨가 보라색 좋아하는게 떠올라서요."
"네…네."
"그럼 다음에 봐요!"
"저,저,저기 동우씨."

가게안으로 들어가려던 동우를 불러세운 호원,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일 시간있으세요?'하고 동우에게 한발짝 앞으로 다가선다.

"저, 그러니까 제가 같이 볼 사람이 없는데 어, 서울에 별로 친구가 없, 아, 남우현이라고 있는데 걘 영화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좀 또라이같은게 걔가 저랑 초등학교때부터,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그 내일 혼자 보기 좀 그러니까 동우씨가 시간만 되면,"
"영화 같이 보자구요?"
"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였어요."
"잘 됐다! 나도 사실 성규말고는 친구가 없어서 혼자 보기 민망했거든요."

내려가있던 호원의 입꼬리가 다시 비실비실 올라가기 시작했다.


*
 

"뭐? 맞선!?"

성규가 숟가락을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버럭 언성을 높혔다. '그래, 맞선'하고 태연하게 말하는 봉신 씨의 모습에 더 열이 뻗친다.

"무슨 맞선이야!"
"공장 주임 아저씨 딸내미인데. 애가 싹싹하고 착하다더라."
"아니 착하고 나발이고 생판 모르는 사람이랑 내가 왜!"
"우리 형은 좋겠네. 여자도 만나고~"

낄낄거리며 말하는 명수의 머리를 쥐어박은 성규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난리를 폈다.

"아, 싫어싫어싫어! 나 내일 쉬는 날! 쉴꺼야! 안 나가, 맞선!"
"밥상머리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버르장머리없게! 시끄럽고. 내일 점심에 약속 잡아놨으니까 나가서 잘 해."
"뭘 잘 해! 왜 나한테 안 물어보고 마음대로 잡냐고! 왜! 왜! 왜애!!! 아야!"

결국 봉신 씨의 숟가락에 머리통을 맞았다.

"엄마 말 들어! 너 이제 서른이야. 지금 아니면 연애할 시간 없어!"
"내가 무슨 서른이야!"
"그럼 내가 대신 나갈까?"

숟가락을 입에 물고 히죽 웃는 명수의 머리를 성규가 또 한번 쥐어박았다.

"아, 짜증나 진짜…. 몇 살인데?"
"서른 둘."
"뭐어?! 서른 둘?"
"너랑 4살 차이야. 궁합도 안 본대잖니."
"엄마 제정신이야? 스물여덟밖에 안 된 아들은 서른 둘이나 된 늙어죽죽한 아줌마한테 떠밀고 싶어?"
"누가 결혼하래? 살림차려서 애 낳으랬어? 그냥 한번 만나보라는건데 왜 난리야!"
"아아, 몰라! …쩝… 사진이나 내놔봐."
"무슨 사진."
"그 여자 사진말야."
"없어."
"뭐? 없다고?"
"최근에 찍은 사진이 별로 없대."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야? 얼굴도 모르는 여자랑 맞선을 보라고?"
"못 생기면 어때! 마음씨만 착하면 되지!"
"그건 엄마 생각이지! 난 싫어! 난 예쁘고 마음씨도 착한 여자랑 결혼할거라고!"
"얼씨구! 그런 착한 여자는 너보다 나은 놈들이 벌써 채갔어, 자식아!"
"뭐!?"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불붙은 성규와 봉신 씨의 말다툼에 혀를 끌끌 차며 식탁에서 일어난 명수가 젓가락을 든 채 인터폰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아, 저…]
"누구요?"
[나,나…서,성열이.]
"아, 잠깐만."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고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나가 대문을 열었다.

"…여,여기…."

성열이 손에 들고 있던 박스를 수줍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쿠키…."
"쿠키?"

상자를 열자 여러 모양의 초코 쿠키가 가지런히 담겨있었다.

"오…. 이거 우리 주는거야?"
"으응."
"직접 만든거?"
"누나랑 내가 만들었어."
"하트 모양도 있네."
"어? 어어…."

하트 모양을 집어들고 한 입 깨물어 맛을 봤다. 달달하고 쌉싸름한 초코 맛이 물씬 풍긴다.

"으음, 완전 맛있다!"

다행이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암튼 잘 먹을게. 잘 가!"

성열의 어깨를 토닥거리듯이 툭툭 친 명수가 쿠키를 먹으며 대문을 닫았다.

"……."

성열이 베시시 웃으며 명수의 손이 닿았던 어깨를 매만졌다. 간질간질 화끈화끈.


*


"그 여자가 누군지 얼굴도 모르는데 만나라구요?"

넥타이를 풀던 우현이 허리에 손을 얹고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짐짓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도 너가 이런거 싫어하는거 잘 알아. 근데 그 자리에선 엄마도 어쩔 수,]
"알아요, 무슨 말인지. 내일 일단 약속엔 나갈게요. 근데, 그 이상은 바라지마세요. 끊어요."
[미안해, 아들.]

전화를 끊고 침대에 홱 던지듯 내려놓은 우현이 풀던 넥타이를 마저 풀었다. 황금같은 주말을 생판 처음보는 여자를 상대해야한다니. 끔찍하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와이셔츠 단추 하나 끼우고 한숨 한 번, 양말 한 짝 신으며 한숨 두 번. 정장 마이를 걸치며 한숨 세 번, 졸린 눈 비벼대며 한숨 네 번. 맞선 자리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자니 한숨만 푹푹 나온다. 늦게까지 퍼질러 자고 있는 명수가 얄미워보여 침대 위에 있던 베게를 명수의 얼굴로 휙 던졌다.

"윽…."

부스스한 머리를 비벼대며 고개를 들어 성규를 한번 슥 쳐다본 명수가 다시 베게에 머리를 박고 잠들었다. 나도 저렇게 늦잠잘 수 있는데….

"잘 해. 점잖게 말하고."
"몰라. 평소대로 할거야."

툴툴거리며 집을 나왔더니 지랄맞게 날씨마저 화창하다. 햇빛을 받아 알록달록 빛이 나는 꽃밭의 꽃들,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나뭇잎들, 평상에 앉아 있는 잠자리까지.

"에이씨…."

차라리 비가 주룩주룩 내렸으면 좋으련만. 맞선 장소는 프랑스 디저트를 전문으로 하는 라프레즈라는 디저트 전문점이었다. 그래. 가서 디저트나 실컷 먹어야지. 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내려 시간을 보며 서둘러 라프레즈로 발을 재촉했다. 약속 시간은 12시지만 그래도 남자가 좀 더 일찍 나가있는게 매너라고 생각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점심까지 같이 먹어야할 것 같은 불안감을 애써 떨쳐내며 라프레즈의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 어지간히 많네."

게다가 전부 다 커플이다. 하긴, 이런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디저트 전문점에 커플로 넘쳐나는게 이상한 일만은 아니지. 그나저나 자리가 거의 다 꽉 차서 앉을 곳이 없어보인다.

"어서오세요. 혼자 오셨어요?"
"아뇨. 조금 있다가 한 명 더 올 거에요. 근데 자리가 있나요?"
"네. 이 쪽으로 오세요."

젊은 종업원이 안내해주는 자리를 따라가니 , 세상에. 바로 옆 테이블에 우현이 앉아 커피잔을 들고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다. 심심함에 가득 차있던 우현이 성규를 발견하고는 잠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가 곧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김성규씨가 여긴 왜 왔어요?"
"제가 묻고 싶네요. 팀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저도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자리에 앉아 맞선 상대가 오기 전에 입이라도 달랠 생각으로 종업원이 건네는 메뉴판을 펼쳤다. 마스카포네치즈 티라미수, 마카롱, 비스코티, 피칸파이, 파나코타, 샤를로트 등등. 성규, 당황하며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메뉴 이름들을 훑는다. 사진이라도 붙혀주지, 몹쓸 놈들. 그 모습을 보던 우현이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새침하게 우현을 흘긴 성규가 아무거나 휙 가리켜 주문을 한다.

"비,비스코티? 이거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우현, 여전히 웃고 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비스코티가 뭔지나 알아요?"
"…먹는 거…. 아니, 참나. 모를 수도 있죠! 팀장님은 프랑스라도 다녀왔나봐요?"
"네. 고등학교 졸업하고 몇 년동안 잠깐이요."
"……."
"군대 다녀와서도 몇 번 갔었고 회사 일 때문에도 몇 번 갔었어요."
"…잘난 척도 가지가지야."

본전도 못 찾은 성규가 코를 긁적거리며 푹신한 쿠션에 머리를 기댔다. 여기저기서 커플들이 하하호호거리며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데, 참 눈꼴시려서 못 봐주겠다.

"세상에 할 짓 없는 인간들은 죄다 모아놨네, 에이 쯧."
"김성규씨 맞선보러 나온 거 아니에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느낌에."
"엄마가 하도 나가래서 나온거에요, 난."
"마찬가지네요."
"…팀장님도?"

우현이 대답없이 커피를 한모금 들이켰다.

"아, 쪽팔리게 같이 맞선보는거에요?"
"뭐가 쪽팔려요."
"몰라요."

종업원이 다가와 나무바구니에 담긴 비스코티를 내려놓는다. 비스코티가 가지런히 담겨져있었다.
 
"주문하신 비스코티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고소한 냄새의 비스코티 한 조각을 씹는 순간 '와그작!'하는 소리가 성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의 우현, 자신이 먹던 커피를 성규의 앞에 놓아준다.

"딱딱하죠?"
"…저,전혀요. 맛만 좋구만."
"그거 커피나 차에 찍어먹는 거에요."
"……."

잠시 머뭇거린 성규가 손에 들린 비스코티를 우현이 내민 커피에 살짝 찍어 맛을 봤다. 맛있다. 아까보다 훨씬 부드럽고 달콤쌉싸래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

"미리 말해주지, 좀…."
 
성규의 중얼거림을 들은 우현이 잡지를 한 쪽으로 치워두며 찌뿌둥한 몸을 뒤척거렸다. 그때, 라프레즈의 유리문이 열리고 늘씬한 청순녀와 뚱뚱하고 사납게 생긴 기쎈녀가 들어온다. 제발 저 앞에 오는 청순한 여자가 자신에게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속으로 연신 기도를 하는 성규에게 청순녀가 다가왔다. 올레! 힐끗 옆테이블을 보자 썩은 표정의 우현이 자신의 앞에 선 뚱뚱한 기쎈녀를 떨떠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푸흡, 웃음이 터진 성규에게 청순녀가 말을 건넸다.

"혹시 남우현씨 되세요?"

엥? 지금 나한테 남우현이라고 물은 건가? 성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때 우현의 테이블로 갔던 기쎈녀가 우현에게 물었다.

"혹시 김성규씨?"
"아뇨. 잘 못 찾아오셨네요. 옆 테이블이에요."

우현,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성규를 가리키자, 망연자실한 표정의 성규도 '아뇨. 옆 테이블이에요'하고 엄지로 우현을 가리킨다. 기쎈녀와 청순녀가 서로 자리를 바꿨다. 우현은 뭐가 그리 웃긴지 피식피식 웃고 있었고, 성규는 자신의 앞에 앉은 기쎈녀에 눌려 우현이 놓아준 커피만 계속 들이켰다. 기쎈녀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실망할 사람이 누군데! 성규는 당장 봉신 씨에게 전화해 따지고 싶었다.

"반가워요. 장춘동이라고 해요."

캬아. 이름 한번 죽인다. 장춘동. 잘 못 들으면 장충동인 줄 알겠네. 저 오동통한 손은 족발같긴 하다만. 아아,아니지. 이런 외모지상주의자 같은 생각은 하지말자. 여자는 거,겉보단 마,맘이 더 중요하니깐. 성규가 애써 자신의 맘을 토닥이며  '전 김성규에요'하고 미소를 지은 채 꾸벅 인사를 했다. 액면가는 40대초반같은데. 짙은 화장에 새빨간 립스틱, 짝 달라붙는 검은 원피스에 손가락에 끼워진 굵은 알의 반지까지. 성규가 싫어하는 요소는 골고루 다 갖췄다. 반면에 청순녀는 피부도 하얗고 날씬하고 머리도 긴 생머리다. 웃을때 보이는 하얀 이가 그녀를 더 청순해보이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우현은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성규도 장춘동이라는 이 기쎈녀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기쎈녀도 성규가 그리 마음에 드는 눈치가 아니었다.

"직업이 뭐에요?"
"회사원이에요."
"어디 회사?"
"볼네드 백화점이요."
"월급 얼마에요?"

멋져! 뭐 이따구로 직설적인 여자가 다 있어! 눈은 청순녀에게 향해있지만 귀는 성규와 기쎈녀의 대화를 엿듣던 우현이 흥미진진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과연 성규가 어떻게 대답을 할까.

"어느정도요. 그러는 장춘동씨는 직업이 뭔데요."
"전 술집하나 운영하고 있어요. 이름은 마돈나라는 술집인데,"

점입가경은 이럴때 쓰는 말이다. 술집에 대해 줄줄히 설명을 늘어놓는 모습에 점점 호감이 뚝뚝 떨어진다. 뭐, 처음 볼때부터 호감은 없었지만.

"차는 당연히 있겠죠? 우리 자리나 옮겨요."
"저…차 없는디요."
"차가 없어요?"
"면허는 있는데 아직 차는 없네요. 근데 당연한 거 아닌가. 군대 갔다와서 다시 복학하고 취업준비하면서 졸업하고 사회나오니까 스물 다섯에 바싹 돈 번 건 다 등록금 대출받은거에 썼는데 차 살 돈이 어딨어요. 살기바빠 죽겠는데."

우현이 피식 웃었다. 덕분에 이 쪽 대화가 점점 더 지루해지고 있다.

"우현씨?"
"네."
"제 소개가 재밌으셨나보네요. 웃으시는 거 보니까."
"아닙니다. 잠시 딴 생각을 해서."

청순녀는 내색 한 번 않고 조용조용한 말투로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조근조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빠한테 듣기론 김성규씨가 주택에 사신다고 들었는데."
"네. 주택에 살죠."
"몇 평이에요?"
"그건 부동산 아저씨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전화 연결해드릴까요?"
"어휴…. 나보다 4살이나 어리다길래 철부지일꺼란 각오는 하고 나왔는데, 생각보다 더 영~ 아니네요."

그 말에 성규가 콧방귀를 뀌며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얼른 집에 가서 발톱에 낀 때나 벗겨야겠어요. 이 시간보단 그 시간이 더 값질 것 같네요. 그럼 차 있고 집 넓은 영계 만나세요. 화이팅."
"뭐,뭐라구요?"

주먹을 불끈 쥐어보인 성규가 미련없이 카운터로 가 자신이 먹은 비스코티를 계산하고 라프레즈 문을 열고 씩씩하게 걸어나왔다. 그 모습에 우현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디가세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요. 그럼 좋은 분 만나세요."

커피값을 계산한 우현, 서둘러 성규를 뒤쫓아 따라간다.

"김성규씨!"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우현의 목소리에 휙 뒤돌아본 성규. 퉁명스런 말투로 말한다.

"흥. 그 청순녀랑 잘 해보시지 왜 나오셨어요?"
"유감스럽게도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 한다니깐."
"뭐라고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럼 전 제 갈 길 갈테니까 팀장님도 갈 길 가세요."
"배 안 고파요?"
"……조금요."
"맞선 망친 사람들끼리 점심이나 먹어요."
"난 안 망쳤어요. 내가 깔끔하게 끝낸거지."
"그거나 그거나."
"엄연히 달라요!"

버럭! 소리친 성규가 성큼성큼 걷다가 다시 뒤돌아 우현을 보며 말했다.

"팀장님이 사는 거죠?"


*


한편 동우와 만나기로 한 호원이 거울을 보며 한껏 멋을 내고 있다. 체크무늬 하얀 셔츠에 아이보리색 가디건, 그리고 왁스를 바르지않고 차분히 내린 머리. 훈훈한 대딩같은 모습에 거을을 보며 한번 씨익 웃어준 호원이 차키를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차에 올라타 서랍에서 방향제를 꺼내 차안에 몇 번 칙칙 뿌려 잡냄새를 없애고 쓰레기통도 깔끔히 비운 상태에서 한번 더 체크를 마친 후에야 차를 출발시킨다. 자일리톨을 씹어 입안에 향긋한 민트향이 퍼지게 하는 건 필수.

"으으…떨려."

동우의 고깃집이 가까워지자 가슴이 쿵쾅쿵쾅대고 콧구멍이 벌렁벌렁거린다.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호원의 차를 발견한 동우가 환히 웃으며 달려가 조수석에 폴짝 올라탔다.

"와! 조수석에 타는 건 되게 오랜만인 것같네…. 호원씨 좋은 아침!"
"동우씨도요."

후진할때는 조수석 뒷부분을 잡고 목선을 강조하며! 지식인에 나온 그대로 멋지게 후진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동우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호원, 씁쓸하게 웃었다. 영화관에 도착해 차를 주차시키고 차에서 내리며 호원이 동우에게 물었다.

"동우씨는 무서운 영화 잘 봐요?"
"음…. 잘 보는 편은 아닌데 둘이 보면 좀 낫더라구요."

영화관 로비로 향하는 복도에 현재 상영중인 영화 포스터들이 붙어있었다. 하나하나 훑으며 지나가던 호원이 한 포스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

쌍화탕. 조인선과 주진몽, 그리고 송지요가 나오는 동성애 영화였다.

"동우씨. 이 영화 알아요?"
"쌍화탕이요? 이거 꽤 난리던데."

잠시 고민하던 호원. 최대한 담담한 말투로 묻는다.

"동우씨는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성애요? 흠…."
"……."

동우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괜히 물어봤나하는 마음도 든다. 저 입에서 '혐오해요'라는 말이 나온다면 또는 '끔찍해요'라는 말이 나온다면, 아.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너무 위험한 걸 물어본 듯 싶다.

"난 괜찮다고 생각해요. 죄도 아니고 사람이 사람 좋아한다는데 동성애 반대하는 사람들 보면 어휴…."

내심 바랬던 대답이 동우 입에서 나오자 호원은 자신도 모르게 동우의 손을 덥석 잡을 뻔 했다.

"아, 팝콘이랑 콜라는 내가 살게요."
"네? 뭘 사요?"
"팝콘이랑 콜라요. 차 내가 얻어탔,"
"됐어요. 제가 살게요. 돈 쓰지 마요."

지갑을 들고 팝콘과 콜라를 사려는 동우의 손을 호원이 슥 밀어넣는다. 동우가 계산한다면 왠지 자존심이 상할 것 같다. 마치 여자친구에게 얻어먹는 남자친구처럼 말이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14.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되는데요."

우현이 먼저 앞서 걷는 성규의 등에 대고 불만을 토로했다.

"거의 다 왔어요. 좀만 더 가면 돼요."

궁시렁거리는 우현을 무시하며 성규는 계속 걷고 또 걸었다. 정말 맛있는 곳을 안다며 무작정 우현을 끌고 와서는 어딜 가는지, 어떤 음식인지 말해주진 않고 이 넓은 시장통을 횡단할 기세로 걷고만 있다.

"여기에 진짜 맛있는 게 있어요?"

비릿한 생선냄새, 여러 음식 냄새, 그리고 약간 꼬리꼬리한 냄새까지. 앞서걷던 성규가 슬쩍 뒤에 따라오는 우현의 인상을 살폈다. 와…. 칼만 안 들었지, 완전 날강도 인상이네.

"인상 좀 펴지그래요? 시장 털러왔어요?"
"다리 아파요."
"까펫이라도 깔아드려요?"
"그냥 내가 가자는데 가자고 했잖아요. 귀찮게…."
"팀장님 가자는 곳은 한 끼에 십만원씩 하는 곳이잖아요. 난 그런 사치스런 곳에서 먹으면 배가 뒤틀리거든요. 세상에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 아, 저깄다."

'20년 전통 떡볶이 전골'이라는 간판을 발견한 성규는 싱글벙글 웃으며 분식집 안으로 들어갔지만 불이 깜박거리는 간판과 오래된 출입문을 훑은 우현은 깨림칙하다는 눈으로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점심시간이라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엉덩이를 붙힌 성규가 얼른 앉으라는 식으로 손짓을 한다. 냅킨을 뽑아 우현의 앞과 자신의 앞에 놓고 그 위에 포크와 수저를 나란히 놓는다. 그리곤 종업원에게 '떡볶이 전골 2인분이요'하고 큰 소리로 주문을 한다.

"맛있다는 곳이 겨우 이런 분식집이었어요?"
"겨우라뇨. 여기가 얼마나 맛있는데요."
"이건 그 쪽이 계산해요."
"내가 왜요? 점심은 팀장님이 사기로 했잖아요. 남아일언 중천금 몰라요?"
"며칠 전에 월급 받았을꺼아니에요. 벌써 다 썼어요?"

오래 쓴 듯한 숟가락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뻔뻔하게 말하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좋아요. 기부하는 셈치고 내가 계산할테니까 가서 물 좀 떠와요."
"난 목 안 말라요."
"내가 마르니까 얼른 떠와요. 두번 말하게 하지 말고."

마지못해 일어난 우현이 터덜터덜 걸어가 살균기에서 컵 두 개를 꺼내 물을 따라온다. 잠시 후, 커다란 전골냄비에 떡들과 여러 햄들과 라면사리, 삶은 계란이 보글보글거리며 담겨나온다.

"맛있겠다. 다 끓여서 나온 거니깐 건져 먹어도 되요."
"젓가락 없어요?"
"팀장님은 레스토랑가서 스테이크 먹을때 젓가락달라그래요?"
"여기가 레스토랑이에요?"
"비슷하죠. 그냥 먹어요, 좀. 아, 뜨거."

포크를 쥐고 성규의 먹는 모습만 보던 우현이 떡을 하나 집어먹는다.

"맛있죠."
"…나쁘진 않네요."
"거봐요. 맛있어할거면서."
"누가 맛있대요? 배고파서 먹는거지."
"거 참. 맛있다고 하면 벼락이라도 맞아요? 접시 줘봐요. 라면사리 다 익었네."

우현의 접시에 라면사리와 삶은 계란, 그리고 여러 햄들을 팍팍 얹어준다. 가오를 지키며 띄엄띄엄먹던 우현, 시간이 지나자 먼저 국자로 햄들을 건져먹는다.

"아, 햄만 건져먹지마요! 귀하게 자란 티내나."
"그 쪽이 라면사리 다 건져먹은 건 생각안해요?"
"라면사리는 저렴하잖아요."
"햄도 저렴해요."
"에이씨."

또 티격태격이다.


*


콜라와 팝콘을 들고 상영관에 들어선 호원과 동우, 열심히 눈을 굴려 자리를 찾는다.

"커플들 진짜 많다…."
"주말인데다가 공포영화라서 그런가봐요."
"공포영화인게 왜요?"

자리에 앉은 동우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콜라에 꽂힌 빨대를 잘근잘끈 씹으며 묻는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근데 영화관 와서 영화보는거 진짜 오랜만이네요. 항상 TV에서 하는 거만 봤었는데."
"저도요."
"호원씨는 여자친구 없었어요?"
"대학교때 한번 있었다가 헤어지고 난 후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어요."
"왜요? 호원씨 되게 잘 생겨서 여자들이 되게 좋아할 것 같은데…."
"하하하하. 잘 생겼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어서…."

샤워하고 난 후 거울을 볼때마다 어디서 이렇게 이기적인 인물이 태어났을까하며 혼자 심취하던 호원이 할 말은 아니었다.

"동우씨도 진짜 잘 생기셨어요."

진짜 웃는게 예뻐요.

"에이, 뭘요."
"그리고 성격도 착하시잖아요."

천사인 줄 알았다니깐요.

"우히히. 그런가."
"아, 그리고 그냥 편하게 말 놓으세요. 제가 동생인데."
"그래! 사실 나 많이 불편했어! 우하하하학."

호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우가 답답했다는 듯이 덥석 말을 놓는다.

"그리고 호원아. 너도 그냥 말 놓고 편하게 형이라 불러. 동우씨 동우씨하니까 나도 불편한 거 있지."
"그래도 되요?"
"에이. 당연하지. 편하게 놔!"
"그래, 동우형."

'동우형'이라는 말이 참 간질간질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시작한다!"

상영관 안의 불이 꺼지고 동우가 호들갑을 떨며 얼른 핸드폰을 매너모드로 바꿔놓는다. 몇 편의 광고가 지나고 곧 음산한 음악과 함께 영화가 시작됐다.

"우엑."

청소년 관람 불가에 맞게 꽤 잔인한 장면들이 나온다. 보라색의 좀비들이 여자를 잡아 살점을 뜯어먹는 장면이나 전기톱으로 좀비의 머리통을 베어버리는 장면이 나올때마다 동우는 깜짝깜짝 놀라며 '우힉!'하고 숨을 들이켰다. 금발의 여주인공이 권총을 들고 식량을 구하러 혼자 어두운 백화점 안으로 들어간다. 불이 꺼진 백화점엔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이 전부였다.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를 걸어내려가 지하에 위치한 식료품 층에 도착한 여주인공이 허겁지겁 가방에 여러 식료품들을 담는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여주인공이 일어섰을때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좀비가 '꾸웨에엑!'하는 소리를 내며 여주인공을 덮쳤다. 그러자 동시다발적으로 상영관 안의 여자들이 '꺄악!'하고 옆에 앉은 남자친구의 팔뚝에 얼굴을 묻는다.

"우아아악!"

동우 역시 호원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이런 장면이 연출되길 바라긴했지만 막상 동우의 몸이 자신에게 반쯤은 달라붙자 손에서 땀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조,좀비 갔어?"
"응. 갔어요."
"으하……."

그제서야 고개를 살며시 든다.

"많이 무서우면 말해요. 중간에 나가게."
"아냐아냐. 안 무서워."

안 무섭긴 무슨. 그렇게 한참 영화를 보는데 어디선가 후루룩 짭짭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

동우는 보지 못했지만 호원은 봤다. 구석에 있는 커플석에 앉은 두 남녀가 찐하게 엉겨붙어 키스하는 모습을.

"…저것들 완전 제대로 하네."
"으응? 뭐라고?"
"아,아니에요."

그 후로도 몇 번씩이나 좀비들이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럴때마다 동우는 기겁을 하며 호원에게 달라붙었고 호원의 광대는 점점 치솟았다.


*


밥을 먹고 나온 성규가 '그럼 나 먼저 갑니다'하고 우현이 차를 세워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한참을 걷던 성규가 무언가 찜찜한 기분에 휙 뒤돌아보니 우현이 따라오고 있다.

"왜 따라와요."
"안 따라가는데요."
"내가 바본 줄 알아요?"
"조금?"
"…말을 섞은 내 잘못이지."
"근데 어디 가요?"
"그렇게 궁금하면 GPS박아두고 위치추적이라도 하던가요."
"어이구! 성규야!"

채소가게 아줌마가 지나가는 성규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그래그래. 봉신 언니없이 어쩐 일이야? 뒤에 예쁜 동생까지 달구."
"예? 예쁜 동생이요?

성규, 인상을 팍 찌푸리며 우현을 쳐다본다. 생글생글 웃음을 띠운 우현이 채소가게 아줌마한테 꾸벅 인사를 하고 있다. 참나. 같잖다.
 
"온통 미운 구석만 덕지덕지 붙어있는데 예쁜 동생은 무슨."

중얼거리며 다시 앞서 걷는 성규를 우현이 얼른 뒤따라붙었다. 시장을 빠져나와 성규가 향한 곳은 분수대가 있는 큰 규모의 공원이었다.

"날씨 더럽게 좋네."

나들이 나온 커플들에겐 축복에 가까운 날씨지만 외로운 솔로 성규에겐 염장을 지르는 날씨다. 밥을 먹고 바로 나왔더니 입이 텁텁한 성규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으로 향했다.

"아저씨. 하나에 얼마에요?"
"이천원이유."
"두 개 주세요. 이건 팀장님이 사세요. 아까 점심은 내가 샀으니깐."

우현, 별 말없이 지갑에서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 계산을 하고 아이스크림 두 개를 받아 성규에게 하나를 건넨다. 자주 먹어본 성규와 달리 이렇게 기다란 아이스크림은 처음 먹어보는 우현, 입가에 하얗게 아이스크림이 묻었다.

"애에요? 다 묻히고 먹게?"

마치 동생을 대하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입가를 닦아준다. 입가에 닿는 손길에 우현이 살짝 놀라며 고개를 뒤로 빼자 성규의 인상이 확 찌푸려진다.

"표정봐. 왜요? 코딱지 판 손으로 만졌을까봐요? 걱정마요. 깨끗하니까."

엄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콘에 감겨있던 냅킨에 닦았다. 화창한 날씨에 남자 둘이서 아이스크림에 공원 산책이라니. 남들이 보면 충분히 오해할 상황이었지만 성규와 우현 둘 다 그리 신경쓰지않는 눈치였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분수대가 있는 공원 중앙으로 향하자 분수대 안에 있는 금색 항아리에 여러 커플이 동전을 던져놓고 있었다. 참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우현과 달리, 성규는 이미 가방을 뒤적거려 동전을 찾고 있다.

"설마 저 항아리에 동전 넣게요?"
"소원이 이루워진다잖아요."
"소원이 아니라 허튼 기대겠죠."
"희망이라는 좋은 단어가 있는데 꼭 그렇게 삐딱한 단어를 써야겠어요? …에이씨, 동전없네."

가방을 탈탈 털어봐도 동전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던져보고 싶은데…."

성규, 눈썹이 축 처져서는 아쉬운 듯이 계속 커플들이 던지는 동전만 쳐다본다.

"정 아쉬우면 발 걷고 들어가서 남들이 던진 동전 주워오던가요."
"동전 하나 하나에 사람들 소원이 같이 던져졌을텐데 어떻게 남의 소원에 손을 대요."
"……이거 들고 있어봐요, 먹지말고."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은 맡긴 우현이 두리번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 인간이 또 왜 저래."

분수대 앞 벤치에 앉은 지 한참이 지나고 난 뒤에야 우현이 나타났다.

"뭐하다 이제 와요! 아이스크림 다 녹아서 손만 버렸,"
"시끄럽고 이거나 받아요."

우현이 동전이 가득 담겨있는 묵직한 봉지를 성규에게 내밀었다. 성규의 깜짝 놀라며 묵직한 봉지를 받아들었다.

"이게 다 뭐에요?"
"동전이잖아요."
"누가 동전인 줄 몰라서 물어요? 무식하게 많으니깐 그렇죠…."
"100개에요."
"백원짜리가 100개면……. 만원이나 썼어요? 미쳤네, 미쳤어."
"싫으면 내놔요. 나나 던지게."
"흥. 아깐 허튼 기대라면서요. 그리고 줬다뺐는게 어딨어요? 내가 다 던질 거에요."

아이스크림 콘을 쓰레기통에 넣은 성규가 봉지를 안아들고 분수대를 향해섰다. 봉지안에서 첫번째 동전을 꺼낸 성규, 황금항아리 안으로 동전을 던져넣는다. 그리고는 두 눈을 꼭 감고 깍지를 낀채 소원을 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멀뚱히 있던 우현이 그 모습에 살짝 웃는다. 가끔, 정말 가끔보면 나이에 맞지않게 참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 같다.


*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사람들이 하나둘씩 상영관을 나간다. 마지막 장면이 하이라이트였다. 좀비 바이러스가 박멸되고 몇 년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여주인공이 묵혀있던 지하실 창고 문을 열었을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좀비의 출현이란…. 그 부분에선 긴장을 풀고있던 호원도 흠칫했다. 동우는 말할 것도 없이 기겁을 했고.

"형."
"…아아."

동우의 눈가가 촉촉했다. 운듯싶다.

"많이 놀랬나봐요?"
"죽는 줄 알았어…."

부들부들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동우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호원과 함께 상영관에서 나왔다.

"배고프다…."
"점심 먹어요, 우리. 형 뭐 좋아해요?"
"난 다 잘 먹어!"

눈가가 촉촉한 채로 싱글벙글 웃는 모습에 호원이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진짜 말문이 막히게 뷰티풀하다.

"그럼 저기 베니존스로 가요."
"베,베니존스? 저기 비싸지않아? 점심은 내가 사려고 했는데…."
"점심을 왜 형이 사요. 제가 살게요."
"그래도,"
"제가 사요. 형은 오늘 돈 쓰지마요."
"으응…."

단호한 호원이 말투에 동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자신이 형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호원이 좀 더 듬직하고 의젓한 것같다.

"그럼 지금 가게는 누가 봐요?"
"아는 누나한테 잠깐 맡겼어."
"아는 누나요?"
"응. 대학교 때 만난 누난데 내가 엄마 다음으로 가장 믿고 따르는 누나 한 명있어."
"그냥 아는 누나죠?"
"응. 그냥 아는 누나. 왜?"
"아녜요. 하하하하. 뭐 먹을래요, 형?"
"난 아무거나 괜찮아. 사실 이런데 잘 안 와봐서…."

이제 자주오면 되죠, 저랑. 자기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에 호원이 움찔하며 얼른 동우의 눈치를 살폈다.

"우하하. 그럼 되겠네."
"하하하하……휴우."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쉰 호원이 메뉴판을 펼치고 이것저것 가득 주문을 하자 동우의 두 눈이 왕방울만해진다.

"그렇게 많이 시켜?"
"하하하하. 그냥 형 많이 먹이고 싶어서요."
"나 돼지될텐데…."

형은 돼지가 되도 예쁠거에요. 뒷 말은 숨긴 호원이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동우의 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은은한 금색의 머리카락, 하얗고 뽀얀 피부, 웃을때 휘는 눈, 예쁜 코, 빨간 입술, 그리고 보듬어주고싶은 조금은 작은 키까지. 온몸이 러블리하다.

"……예쁘다."
"응?"
"아,아니에요. 하하하하."

곧 주문한 음식들이 줄줄히 서빙되어 나왔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신이 난 동우의 모습에 먹지않아도 배부르단 표현이 조금은 이해갈 것 같았다.

"와, 맛있겠다."
"많이 먹어요, 형."
"응! 호원이 너도!"

동우가 어설프게 스테이크를 썰자 '제가 해줄게요'하고 접시를 휙 가져간 호원이 능숙하게 슥삭슥삭 스테이크를 썰었다.

"호원이 넌 되게 자상한 것 같아."

아마 형한테만 자상할 것 같아요.

"제가 뭘요."
"누군지 몰라도 호원이랑 사귀는 여자친구는 진짜 좋겠다."
"…여자친구 관심없어요."
"왜?"

여자친구보단 형이 더 좋거든요.

"그냥 귀찮아서요."
"차도남이네?"
"차도남이요? 그게 뭐에요?"
"차가운 도시남자!"
"하하하하. 그 정돈 아니에요…. 형은 여자친구 없어요?"
"응. 1년전에 헤어졌어."
"아아…."

표정은 안타깝다는 표정이었지만 속으론 나이스!하고 쾌재를 불렀다.

"이상형이 뭐야?"
"이상형이요? 저는…."
"응응."
"일단 웃는게 예쁘구요. 나이가 저보다 많아도 제가 의지하기보단 아껴주고 싶은 사람이요."
"흠…어렵네."

바로 당신이잖아, 이 사람아. 동우가 빵빵한 양볼을 우물거리며 곰곰히 생각하는 모습이 너무 앙증맞아 호원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동우의 금색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어내렸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에 닿고 나서야 자신이 한 짓을 알아챈 호원이 어색하게 먼지를 터는 시늉을 한다.

"머,먼지가 묻어있네."
"아, 고마워."
"그럼 형은 이상형이 뭔데요?"
"나? 나는… 음, 일단 정직하고 용기있는 사람."
"그리고요?"
"또 날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이면 돼."
"…곧 생기겠네요."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느낌이 와요."

아직 용기는 없지만 정직과 동우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선 지지않을 자신이 있었다.


*


"이게 아흔 아홉번째, 아오 지긋지긋해."

성규가 툴툴거리며 손에 남은 두 동전을 꼭 쥐었다. 하도 빌어댔더니 소원도 바닥났다. 세계평화가 이뤄지게 해주세요, 전쟁이 없어지게 해주세요, 발톱에 때가 안 끼게 해주세요, 길을 걷다 새똥에 안 맞게 해주세요. 아주 별의 별 소원은 다 빈 것 같다.

"아, 참. 제일 중요한 걸 안했네. 쌍커풀 수술 올해안에 꼭 하게 해주세요."
"그 놈의 쌍커풀 수술은."
"하찮게 여기지마요. 내 삶의 질이 달린 문제니깐."
"그 작은 눈도 괜찮아요."

뭐가 어째요? 우현딴에는 나름 진심을 말한건데 성규에겐 비꼬는 말로 들렸나보다.

"좋은 뜻으로 말한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안 작아요."
"…또 장난치는거죠."
"방금은 진심이었어요. 쌍꺼풀 수술 하지마요. 김성규씨 눈, 작은대로 매력있어요."

이 작은 눈에 매력이라니? 또 자신을 놀리나싶었지만 덤덤한 우현의 표정을 보아 정말 진심인 것 같았다.

"큼…. 마지막 동전은 그 쪽이 던져요. 이제 소원 말할 것도 없으니까."

성규가 꼭 쥐고 있어서그런지 동전이 뜨끈뜨끈하다.

"……"

우현, 동전을 들고 꽤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한다. 한참을 생각하던 우현이 동전을 항아리 안으로 던졌다. 팅! 소리를 내며 항아리 모서리를 맞은 동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상에나. 얼마나 삐딱한 소원을 빌었길래 저렇게 동전이 튕겨져 나와요?"
"…오히려 잘 됐네요."
"뭐가요?"
"아녜요. 이만 가요. 바람은 충분히 쐰 것 같으니깐."
"참나. 누가 보면 억지로 끌고 온 줄 알겠네."
"나 덕분에 소원 빌었잖아요. 소원 이뤄지면 나한테 고마워해야할걸요."
"참 뻔뻔하긴."

둘이 공원 입구를 나란히 걸어나간다. 우현이 뭐라뭐라하자 성규가 인상을 팍 구기고 바락바락 소리를 친다. 그렇게 독설을 주거니받거니하다보니 금세 차가 세워진 곳에 도착했다.

"우와."

앞 유리창에 유흥업소 전단지가 끼워져있다. 반은 벗어던진 예쁜 누나가 수박통만한 가슴과 볼링공만한 엉덩이를 들이밀고 있는 전단지를 잡아뺀 성규가 우현에게 그 전단지를 휘휘 흔들어보인다.

"누가 팀장님 주고 갔나봐요."
"아, 치워요. 비위상하니까."
"이 여자도 돈 벌겠다고 하는건데 비위상할 것까지야."
"빨리 타기나 해요."
"네."

전단지를 휙 버린 성규가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


"호원아, 오늘 즐거웠어!"
"네. 저두요."
"담에 또 보러가자!"
"네, 형. 그럼 다음에 봐요."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동우에게 살짝 손을 들어 인사를 한 호원이 차를 출발시켰다. 동우에겐 그저 아는 동생과 영화 한 번 같이 본 하루였겠지만 호원에게 오늘 하루는 꽤 큰 의의가 있었다. 자기 마음에 대한 확신이 섰다. 동우가 좋다.
웃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아른거리고 같이 있으면 설렌다. 그리고 자꾸 보듬어주고 싶다, 아까처럼.

"미치겠다."

좀 많이 좋은 것 같다.


*


역시나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봉신 씨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꾸역꾸역 듣고만 있던 성규, 샤워하고 난 후에도 쏟아지는 잔소리에 결국 한마디한다.

"어후, 엄마! 엄마 말대로 나도 이제 서른이야.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말은 잘해요, 말은."
"말이라도 잘해야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잔소리를 차단한 성규가 침대에 벌렁 누웠다. 옆 침대에 먼저 누워있던 명수가 하품을 하며 읽던 만화책을 한쪽에 밀어두고 낮잠을 자기위해 제대로 몸을 뉘인다.

"맞선은 어땠어?"
"돈 많은 술집 마담이 나왔다. 뚱뚱한데다가 기까지 쎄고 돈도 어지간히 밝혀."
"다 갖췄네. 팔방미인이구만."
"팔방폭탄이겠지. 야, 잘 생각해. 내 아내가 곧 니 형수야. 그런 여자가 형수였음 좋겠냐? 아으, 피곤해."
"맞선이 꽤 길었나봐?"
"아니. 일찍 망치고 나왔는데, 잠깐 공원 들려서 바람 좀 쐬다가 왔어."
"누구랑? 혼자?"
"아니."
"그럼? 형 여자친구있어?"
"있겠냐."
"아, 맞다맞다. 하긴."
"…야! 있을 수도 있지! 니가 잘난 연애박사인 건 알겠는데 나,나도 꽤 매력적으로 생겼거든?"
"어떤 정신나간 놈이 그런 소릴해."
"……."

김성규씨 눈, 작은대로 매력있어요.
공원에서 우현이 했던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있어. 정신나간 놈 한 명."

그냥 맘에 없는 말일 수도 있었겠지만 성규에게 그 말은 자신의 눈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되는 계기가 됐다. 주위에서 하도 작다고 놀려서 그렇지, 막상 보면 그렇게 작은 눈도 아니다! 그렇다고 명수놈처럼 커다란 눈은 아니였지만. 그리고 작아도 꽤 작은 대로 괜찮지…않나?

"야. 명수야."
"왜."
"내 눈있잖아."
"작잖아."
"알아, 나도 짜샤. 내 말은, 누가 나보고 내 눈이 작은대로 나름 매력이 있다고 했걸랑? 진짜일까?"
"그 사람 주관으로 봤을땐 진짜겠지만 객관적으로 봤을땐, 작아. 많이."
"…많이 작아?"
"엄마가 말한 거 기억안나? 형 낳고 일년동안 눈 못 뜨는지 알고 걱정했다고."
"…에이씨."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었다. 왜 그 인간은 그런 말을 해서 헷갈리게 만들어….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어둑어둑한 밤.

"……."

잠자던 성열의 눈이 조금씩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쓰지않던 인상까지 쓰더니 괴로운 듯이 몸을 뒤척거리며 끙끙 앓는 소리는 낸다. 어느새 얼굴과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무도 깨워주는 사람이 없어 계속 괴로워하며 악몽에 시달리던 성열의 입가로 서서히 울음소리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으윽…끄윽…."

바로 옆방에서 잠을 자던 우현, 잠결에 들리는 미세한 울음소리에 잠시 몸을 뒤척였다가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급히 성열의 방으로 향한다.

"성열아!"
"하아…하아…흐으윽."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주며 뺨을 살짝 토닥거리자 성열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뜬다. 눈 앞에 우현을 확인한 성열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우현, 애처럼 엉엉 우는 성열을 끌어안아 다독거려준다. 이사오고 나서 많이 나아졌다생각했는데, 아직은 아니였다.

"괜찮아 괜찮아. 형이야."

원래 성열이 악몽에 시달리며 울때마다 가장 먼저 듣고 달려오는건 순재였다.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주는 것도 순재였고. 하지만 오늘은 어째 많이 피곤한 모양인지 성열이 엉엉 우는데도 올 생각을 않는다. 한참이나 우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히끅거리던 성열이 조금 진정이 되자 성열의 머리칼을 한번 더 정리해준 우현이 성열을 다시 침대에 눕혔다.

"형 계속 있을꺼니까 걱정말고 푹 자."
"……."

고개를 끄덕거린 성열이 우현의 손을 꼭 잡고 다시 눈을 감았다.


*


다음날 아침. 아침일찍부터 울리는 벨소리에 순재가 느릿느릿 일어나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저 미숙이 핸드폰 아닌가요?]
"하아…네에…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전화가 뚝 끊기고 침대맡에 핸드폰을 내려놓은 순재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아, 피곤해…."

손목에 걸려있던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으며 거실로 걸어나왔다. 평소와 다르게 성열의 방문이 열려있다. 졸린 두 눈을 두드리며 성열의 방으로 향한 순재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자고있는 우현과 성열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얘가 왜 여기서 잠을 자고 있어. 우현아, 우현아."
"…어…으으."

성열의 손을 살며시 내려놓은 우현이 눈곱을 떼며 몸을 일으켰다.

"너 왜 여기서 자고 있어?"
"하아…어제 성열이가 악몽을 꿔서."
"뭐? 정말? 어젯밤에?"
"응. 그래서 달래주고하다가 잠들었나보네."
"나 왜 못 들었지…. 아…."
"그러게 말야. 제일 먼저 달려오더니…. 어제 많이 피곤했나봐?"
"크게 피곤할 일 없었는데 이상하게 피곤하네…."
"성열이 깨우지마. 거의 아침 다 되서 잠들었으니까."
"응."

흐트러진 이불을 다시 꼭꼭 덮어준 순재가 커튼을 쳐 햇빛을 가렸다. 곤히 잠든 성열의 뺨에 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15.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마 가을이 시작됨을 알리는 비일 것이다. 가을비는 모든 잎들을 축축하게 젖게 만들었고 탁했던 공기를 맑게 정화시켰다. 쓰레기 봉투를 수거함에 넣은 명수, 얼른 레디락 처마 밑으로 후다닥 달려들어와 어깨와 머리에 묻은 빗방울들을 털어낸다.

"으으, 추워."
 
입을 동그랗게 모아 허어, 하고 숨을 내뱉자 몽글몽글 하얀 입김이 뿜어져나온다. 오슬오슬 소름이 돋는 팔뚝을 비벼대며 얼른 문을 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


"……."

뜨거운 물에 샤워를 마치고 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 뽀얀 수증기가 성열을 뒤따라나온다. 보일러를 튼건지 방에 훈훈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머리를 털며 넓직한 창문으로 다가간 성열, 수건으로 얼굴 물기를 톡톡 닦으며 창문을 살짝 연다. 찬 기운이 훅 들어왔지만 춥기보단 악몽으로 지쳐있던 머리를 맑게 깨워줬다.

"……."

여리 꽃밭에 세워진 미니천막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들을 꽤 듬직하게 막아주고 있었다. 명수가 천막을 만들어주지않았더라면 분명 알록달록한 꽃잎들이 비를 맞아 모두 다 우수수 떨어졌을거다. 비가 점점 더 거세게 들이치길래 얼른 창문을 닫고 침대에 앉아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창문만 멍하니 쳐다봤다. 어젯밤의 꿈, 자꾸 생각난다. 원래 꿈이라하면 생각해내려할수록 잊혀지기 마련인데, 어쩜 그 꿈은 잊으려해도 생각나는걸까. 평생 곁에 맴돌 꿈이라면?

"…성열아. 코코아라도 먹을래? 아님 커피?"
"……."

순재의 말에도 대답하지않은채 침대에 앉아 미동도 없이 창문만 바라본다. 대답이 돌아오지않자 '그럼 생각나면 말해'하고 조용히 말한 순재가 문을 닫고 나갔다.


*


"아, 뭐야. 우산 왜 이래."

차에서 내리려던 성규가 우산을 붙잡고 끙끙 씨름을 하고 있다.

"왜요?"
"이게, 잘, 안, 으으, 왜, 안 펴져, 아!"

결국 우산 윗부분에 손이 찝혀버렸다. 저번에 한번 비가 내릴때만 해도 멀쩡했었는데 그새 녹슬었나보다.

"우산 살 돈 없어요?"
"없겠어요? 아끼려하는거지. 저번에만 해도 멀쩡했다구요."
"기다려봐요."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돌린 우현이 뒷좌석에서 다 읽은 신문을 꺼내 성규에게 내밀었다.

"이거라도 쓰고 가요."
"……."
"아, 걱정말아요. 난 우산 있어서 괜찮으니깐."
"…그 우산 같이 좀 쓰면 벼락이라도 맞아요?"
"혹시 모르잖아요."
"회사 입구까지만 같이 써요."

우현의 손에 들린 우산을 홱 채간 성규가 조수석 문을 열고 우산을 편 뒤, 운전석으로 쪼르르 달려가 문을 벌컥 열어준다.

"우산 빌려쓰니깐 이 정돈 해드릴게요. 뭐해요, 얼른 안 내리고."

피식,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우현이 차키를 뽑아들고 차에서 내렸다.

"우산 좀 똑바로 들어봐요. 어깨 다 젖잖아요."
"내 어깨도 마찬가지에요. 군소리 좀 하지마요."
"이거 내 우산이에요."
"들고 있는 건 나에요. 자꾸 궁시렁대면 들고 확 튈 꺼에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 똑바로 들어요."
"똑바로 들었지 내가 뭐 브레이크댄스라도 추면서 흔들었어요? 되게 말많아, 진짜."

나란히 우산을 쓴채로 회사 입구에 들어섰다. 여직원들이 선망에 가득찬 눈으로 성규를 쳐다봤고 그 시선에 조금은 민망해진 성규는 뒷머리만 긁적거리며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우현의 뒤만 바짝 쫓았다


*


이제 제법 신입사원의 티를 조금은 벗었다. 좋게 말하면, 자질구레한 허드렛일이 줄었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렇다고 일이 줄어든 건 아니다. 오히려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성규씨. 이게 내일까지 마감이야, 부탁해.'
'김성규씨, 이거 급한 서류라서 내일까지는 싹 정리해놔야해요.'
'당장 내일까지 마무리져야할 서류인데 내가 워낙 밀린 일이 많아서…. 미안 성규씨. 부탁할게'

그렇게 부탁을 해올때마다 딱 부러지게 거절은 못하고 짬도 제일 낮은 직급이라 어쩔 수 없이 애써 웃으며 서류들을 받아들긴했지만 하루안에 끝낼 수 있는 분량이 아니었다.

"당장 내일 지구가 멸망이라도 하는거야? 왜 다들 내일까지 못해서 안달복달인거야, 아후."
"그냥 바쁘다고 하시지…."
"에이, 호 대리님은 짬이 조금이라도 있잖아요. 저는 하찮은 신입인데 어떻게 거절을 해요. 밉 받을 일 있어요?"
"그거 내일까지 마무리하려면 오늘 야근해야할걸요?"

뭐, 하게되면 해야죠. 성규의 눈썹이 축 쳐졌다. 제일식품회사에서도 야근은 끔찍히도 싫어서 그 날일은 무조건 눈에 불을 켜고 모조리 해치우는 타입이었는데 지금 책상에 놓인 분량은 전혀 가능성이 없어보인다.

"호 대리님이 좀 도와주실래요?"
"전 제 할일이…."
"치이…."

아까 일찍 일을 마치고 애니팡하는거 다 봤는데 일은 무슨. 와이셔츠 소매 단추를 풀고 두어번 소매를 접어올린 성규, 현란하게 손을 풀고 제공받은 일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

 
그래, 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성규씨 힘내요. 그나저나 입사하고 첫 야근이네요? 축하해요. 하하하하."
"호 대리님. 도와줄 거 아니면 그냥 얼른 가세요. 비 오니까 운전 조심하시구요."
"네. 내일 봐요!"

호원이 손을 흔들며 사무실을 나간다. 컴퓨터를 끈 뒤, 책상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종이 부스러기를 집어 쓰레기통에 탈탈 털어넣은 우현이 우산을 챙겨들고 성규에게 향했다.

"김성규씨. 퇴근 안 해요?"
"하고 싶은데, 못 해요."
"왜요?"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이요?"
"회사에서 회사일하지 집안일 하겠어요? 할 일이 태산이라 야근해야되요."
"올때 어떻게 오게요."
"12시가 막차니까 12시 버스타면 되겠죠, 뭐."
"우산 없잖아요."
"뛰면 덜 맞지않을까요?"
"김성규씨 잘 못 뛰잖아요."
"아, 바쁜데 자꾸 말 시키,"
"이거 쓰고 가요."

손에 들린 우산을 성규 책상에 내려놓는다.

"…그럼 팀장님은요."
"뛰면 덜 맞지않을까요?"

성규의 말을 따라한 우현이 쌩하니 사무실을 나가버린다.

"……."

우현의 친절에 기분이 묘해진다. 우산을 얼른 가방에 챙겨넣고 다시 일을 하려던 성규가 아차차,하며 가방에서 폰을 꺼내 '나 오늘 야근'이라는 짤막한 문자를 봉신 씨에게 보냈다.

"아, 배터리없다."

충전기도 챙겨오질않았는데 문자가 전송되자마자 오른쪽 상단 배터리바가 붉게 깜박깜박거리며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알림창이 떴다.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 가방에 넣고 가득 쌓여있는 서류들을 집어들었다.

"얼른 해치우고 집에 가자, 성규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꼼꼼히 정리를 시작했다.


*


"얘가 왜 안 오는 거야 12시가 지났는데 전화기도 꺼져있구…."
"하아암…. 야근이래잖아, 야근."
 
명수, 하품을 하며 졸린 눈으로 거실에 앉아 심드렁한 표정으로 배만 긁적인다. 밤 12시가 넘어갔는데 성규가 퇴근할 생각을 않는다. 야근을 한다고 문자가 왔었지만 밤 12시면 버스도 끊길 시간이다. 잠옷 원피스 차림으로 시계와 현관문을 번갈아보던 봉신 씨, 결국 명수의 엉덩이를 엄지발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일으켜세운다.

"아, 왜…."
"옆집에 한번 가봐."
"뭐? 옆집? 옆집엔 왜?"
"그 성규랑 같이 일하는 팀장, 알잖아 너두."
"가서 물어보라고? 이 야밤에? 엄마. 제대로 민폐야, 민폐."
"난 내 아들이 더 중요해. 얼른!"
"아이씨…."

베게를 내려놓고 일어선 명수는 투덜대며 슬리퍼를 신고 우산을 집어들었다. 밖은 여전히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물에 젖지않게 추리닝 바짓단을 두어번 접어올리고 우산을 바짝 땡겨쓰며 옆집으로 향했다. 집안의 불이 모두 꺼져있다가 명수가 초인종을 두어번 누르자 금세 거실의 불이 켜지고 인터폰에서 잠에 취한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저 성규형 동생이요."
[…아, 잠깐만.]

인터폰이 뚝 끊기더니 곧 현관문이 열린다. 우산을 쓴 채 느릿느릿 대문으로 다가온 우현이 잠에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밤에 무슨 일이야."
"아, 저 혹시 우리 형 아직도 회사에 있어요?"
"너네 형이라면 김성규씨?"
"네."
"김성규씨가 왜? 아직 안 들어왔어?"
"전화도 꺼져있고 12시 지나면 여기오는 버스도 없을 시간인데 도통 오질 않아서요. 회사에서 야근 중이라고 문자가 오긴 했는데 그것도 한참 전이고 또 우리 엄마가 계속 걱정을…."

명수의 말과 차가운 밤공기때문에 잠이 확 달아났다. 회사에 내가 가볼테니까 어머니한테 걱정마시라고 전해드려. 명수를 집으로 보낸 우현이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가 옷을 걸치고 차키와 지갑, 우산을 챙겨들었다.

"단순한건지 무식한건지."

한숨을 내쉰 우현, 차를 몰아 회사로 향한다. 차안의 시계는 새벽 12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회사로 가며 핸드폰으론 계속 성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말만 수십번 들려왔다. 시간이 늦으면 대충 마무리짓고 나올 일이지, 그걸 다 끝마칠때까지 붙들고 있다니. 일에 대한 열정이 풍부한건지 융통성이 없는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뻑뻑한 눈을 매만지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서둘러 몇몇 사무실에 불이 켜져있는 회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기획부실이 있는 층수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기획부실 쪽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우산을 털며 기획부실 문을 열었다.

"……참나."

책상에 엎드려 도로롱 도로롱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성규의 모습을 보자 기가 막혀 웃음이 절로 나오는 동시에, 급하게 회사로 달려왔던 자신이 한없이 우스워진다.

"…크으응…크으응."

칸막이에 팔을 걸치고 헛웃음을 지은 우현이 성규의 하얗고 토실토실한 볼에 살짝 꼬집는다.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지만 순간 부드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고 보들보들거리고…. 금방 쪄낸 찐빵같다. 책상에서 엎드려자면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아파 불편할만도 한데 그런 기색하나없이 너무 곤히 잠을 자고 있다. 성규가 마무리 짓고 있던 서류들을 정리해 자신의 책상으로 옮기고 잠자는 성규의 어깨를 흔들었다.

"김성규씨 일어나요. 그만자고."
"…음…아, 쪼옴…."
"여기 회사에요. 일어나요."

눈썹과 미간이 꿈틀꿈틀거리는가싶더니 성규의 눈이 번뜩 뜨여졌다.

"헉! 며,몇시지! 히익! 12시 50분?! 아, 어떡해! 일 다 못 끝냈는데!"

우현은 보이지도 않는 지, 혼자 호들갑을 떨며 난리가 났다.

"난 안 보여요?"

그제서야 평상복 차림의 우현을 본 성규가 어안이 벙벙해져선 묻는다.

"팀장님이 이 시간에 여긴 어쩐일이에요?"
"그러는 김성규씨는 이 시간까지 여기서 뭐하고 있는겁니까?"
"저야 물론 야근하고 있었죠."
"잠이나 자는게 야근이에요?"
"…어,얼마 안 잤어요."
"핸드폰은 왜 꺼놨어요?"
"배터리가 없어서 꺼놨어요. 어라. 서류 어디갔지."

뒤늦게 서류가 없어진 걸 알아챈 성규가 사색이 되어선 여기저기 뒤져댄다.

"내 자리로 옮겨놨어요, 서류."
"왜요?"
"그건 알 필요 없고, 얼른 집에 갈 준비나해요."

자기 말만 하고 사무실을 나가버린다. 급히 가방과 옷을 챙겨입고 서둘러 우현을 쫓았다.

"나 때문에 이 야심한 시간에 회사 온거에요?"
"그 쪽 동생이 집에 찾아왔어요, 이 야심한 시간에."
"…죄송해요."
"만약 내가 안 왔으면, 아침까지 쭉 잤을 거 아녜요."
"자긴 뭘 잤다그래요. 잠깐 눈만 붙힌거에요, 눈만."
"코까지 골던데."
"……"
"다음부터 본인 능력에 맞게 일 처리하세요. 아무거나 다 받아주지말고."
"제일 짬이 적은데 어떻게 그래요."
"그럼 나한테 하는 것처럼만 해요."
"내가 팀장님한테 어떻게 하는데요."

딱따구리처럼 쪼아대고 해파리처럼 쏘아대잖아요. 안전벨트를 매던 성규, 우현의 말에 '뭐요?'하고 역정을 낸다.

"내가 언제 그랬어요."
"방금이요."
"방금 언제요!"
"지금 방금이요. 머리나 치워봐요. 사이드 미러가 하나도 안 보이네."

성규의 이마를 뒤로 휙 밀어서 치운다. 그때 성규의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꼬로로록.

"배고파요?"
"…조금요."
"저녁 안 먹었어요?"
"먹을 시간이 없었어요."
"자는 바람에?"
"그렇게 오래 안 잤다니깐요."
"뭐라도 먹을래요?"
"이 시간에 문 연 식당이 있을까요."
"네. 아는 데가 있어요."
"그럼 팀장님이 사주는거죠?"
"늦게까지 일한 직원한테 약간의 자비를 베풀죠, 뭐. 잠만 잔 것 같긴하지만."
"거 참 사실 확인 안 된 거 가지고….

우현의 차가 집으로 가는 반대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별 5개 특1급의 으리으리한 호텔이었다. 주위를 살핀 성규가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포게 자신의 몸을 감쌌다.

"호,호텔엔 왜요! 이 변태!"
"……."

우현,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성규를 쳐다본다.

"호텔안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는 건데요?"
"……."
"음란하긴."

우현이 쯧쯧 혀를 차며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편다.

"머릿속에 그런 거 밖에 안 들었어요?"
"아니거든요! 근데 여기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호텔안으로 들어가는 우현에게 직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인사를 한다. 그 모습에 괜히 움츠러든 성규는 계속 우현에게 들러붙었다.

"아, 왜 자꾸 밀어요."
"직원들이 다 우리 쪽만 쳐다보잖아요!"
"그러려니해요, 그냥."
"나는 그러려니 못 하겠어요."

호텔 꼭대기 층인 24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은 새벽 비행기를 타고 오는 외국인들이나 비즈니스가 끝나고 늦은 시간 저녁을 해결해야할 사람들을 위해 은은한 향을 풍기며 새벽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업중이었다.

"이 호텔도 서동 그룹꺼네요?"
"몰랐어요?"
"이런 특1급 호텔에 와봤어야 알죠."

그제서야 왜 직원들이 우현에게 인사를 했는지 알 것 같다. 순간 위화감이 들어온다. 웨이터가 서울 야경이 한 눈에 보이는 가장 좋은 자리로 우현과 성규를 안내했다. 그저 그런 얼굴로 소파에 앉는 우현과 달리, 성규는 눈이 휘둥그레해져선 야경이 보이는 유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성규의 입김이 뽀얗게 서렸다. 가죽으로 된 메뉴판을 건네받은 우현이 테이블 밑으로 성규의 발을 툭툭 건드리며 '뭐 먹을래요'하고 묻자 여전히 야경에 빠진 성규가 '그냥 배부를 만한거시켜요'하고 건성건성대답했다. 우현, 자신이 마실 커피 한 잔과 성규가 먹을 음식을 주문하고 소파에 몸을 기댄다.

"좋겠네요."
"뭐가요."
"팀장님은 내키면 이런 데 올 수 있으니깐요."
"김성규씨가 못 올 곳은 아니잖아요."
"미쳤다고 이런데에서 밥을 먹어요? 일 년에 한번, 아니 어쩌면 평생에 한번 올까말까할 곳인데."
"나 덕분에 왔으니깐 고마워해요."
"고맙긴 무슨, 부담스러워 죽겠구만.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옷 좀 차려입을걸."

너무 평범한 회사원 차림으로 입고 온 게 계속 신경쓰인다.

"차려입으면 뭐가 달라져요?"
"자꾸 무시할래요?"
"무시 아닌데."
"무시 당하는 말은 바보천치도 알아들어요."
"어휘력이 원래 그렇게 상스러워요?"
"원래 안 이런데, 그 쪽이랑 대화하다보면 자꾸 저절로 튀어나오네요. 어쩜 좋을까."

우현이 피식 웃었다. 성규가 질색하는 우현 특유의 비릿한 웃음!

"자꾸 그렇게 웃으며 입을 확 그냥,"
"주문하신 B코스 에피타이저 나왔습니다."

웨이터가 슈림프 칵테일과 훈제 연어를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와인리스트를 우현에게 공손히 건넸다.

"와인, 먹어요?"

와인이라 하면 포도주스에 소주 넣은게 와인이렸다! 항상 편의점에 파는 저렴한 와인말고는 제대로 된 와인 경험이 별로 없는 성규가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마비바 와인으로 주세요. 잔은 한 잔이면 되요."
"팀장님은 안 먹게요?"
"운전하잖아요."
"아,맞다…."

어디서 본 건 있는 성규가 냅킨을 펼쳐 허벅지에 깔고 포크를 들어 훈제 연어를 가장 먼저 맛보았다. 세상에나.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는다. 다음으로 슈림프 칵테일(새우를 칵테일 소스에 찍어먹는 음식)을 맛본 성규가 쩝쩝 소리를 내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맛있어요?"
"네. 녹아요, 입에서."
"적당히 먹어요. 메인 나오기전에 배부르겠네."

에피타이저가 이렇게 맛있으면 메인 디쉬는 얼마나 맛있을까.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있는 성규가 하품을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메인을 기다렸다. 잠시 후, 커피와 함께 눈부시게 하얀 접시위에 맛깔나보이는 자태를 뿜어내는 스테이크가 서빙되어 나왔다.

"우와…고기 진짜 두툼하다."

입맛을 다신 성규가 얼른 나이프로 고기를 썰었다. 핏기가 살짝 서려있는 모습에 칼질을 잠시 멈췄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성규가 상체를 기울여 우현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기요. 이거 덜 익었어요. 봐봐요."
"…미디움 레어 몰라요? 원래 그렇게 먹는 거에요."
"덜 익혀먹으면 기생충 생길텐데…."

찜찜한 표정으로 한 입 크기로 썬 고기를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육즙과 깊은 풍미의 소스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꿀맛이다, 꿀맛. 스테이크가 위장으로 들어오며 '이렇게 유니크한건 처음먹어보지?'하고 자신을 능멸하는 것 같다. 맛있어하며 잘 먹는 성규 모습에 뭔가 뿌듯한 마음이 든다. 웨이터가 성규의 앞에 잔을 내려놓고 고급스러운 손짓으로 와인을 따랐다. 꾸벅 인사를 한 웨이터가 사라지자 와인잔을 집어들고 킁킁, 향을 맡았다. 달콤한 초콜렛냄새와 알싸한 담배향, 바닐라향도 나면서 자두 향도 얼핏 난다.

"향이 되게 강하네요."
"칠레에서 가장 으뜸가는 와인이에요. 보르도 5대 와인 중에 하나인 샤토무통 로칠드를 만드는 팀이 칠레의 와이너리인 콘 차 이토로와 만든 와인이죠."
"……."
"그냥 유명하고 맛 좋은 와인이라구요."
"얼만데요?"
"한 입 먹고 나면 말해줄게요."

킁킁, 냄새를 한번 더 맡은 성규가 조심스럽게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향기가 강한 만큼 맛도 진하고 약간 묵직하고 끈적한 질감이 들었다. 약간 민트 향이 입안에 맴돌면서 화한 맛도 나고…또 그 뒤에 달달한 맛도 뒤따라 느껴진다.

"비싼 맛나는데… 이거 비싼거죠?"
"한 잔에 5만원 정도?"
"히익!"
"년도에 따라 다르지만 거의 한 병에 30만원 정도 하니깐 대충 그 정도하겠네요."
"……."

아껴먹어야겠다. 고기와 기분좋게 어우러지는 와인을 홀짝홀짝 마시다보니 조금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이거 도수되게 높네요. 한 잔 마셨는데 알딸딸해지네…."

잔을 비운 성규, 우현에게 잔을 내민다. 다 마신 커피잕을 내려놓은 우현이 케이스에 담겨있던 와인을 들어 성규의 잔에 조금 따라주었다.

"비싸서 이만큼만 주는게 아니라, 취해서 또 끔찍한 모습 보일까봐 이만큼만 주는거에요."
"한 입도 안 되겠네."

성규, 원샷으로 시원하게 잔을 비운다.

"이제 슬슬 집에 가죠. 시간도 늦었는데."
"으으…."

나른한 몸을 일으킨 성규가 가방을 둘러맸다. 계산하지않고 인사만 하며 지나가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는 깜짝 놀라 물었다.

"왜 계산 안 해요?"
"난 무료에요."
"……."

하긴. 서동그룹 큰 아들에게 이 레스토랑은 집에 있는 부엌같은 곳일테니깐. 차에 탄 성규가 꼼지락거리더니 조수석 의자를 뒤로 홱 넘겼다.

"나 좀 잘테니깐 도착하면 깨워요."

자신이 성규 전용 기사가 된 기분이다.


*


넥타이가 답답했던지 잠결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성규는 다이나믹한 자세로 골아떨어졌다. 집에 도착해 그 모양새를 본 우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 모습을 찰칵찰칵 찍었다. 가관이 따로없다.

"다 왔어요. 일어나요."

꿈을 꾼 건지, 흠칫하며 잠에서 깬 성규가 고개를 살짝 들어 주변을 살핀다.

"벌써 다 왔어요?"
"벌써라뇨. 새벽 3신데."

아…머리아파. 두 손을 주먹쥐고 관자놀이를 감싸며 인상을 찌푸린다.

"빨리 들어가서 자요. 이걸로 지각 핑계 댈 생각은 말고."
"팀장님도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아, 그리고 여기 우산이요."

우현에게 우산을 건넨 성규가 머리 위에 가방을 얹어 내리는 비를 막으며 후다닥 대문을 두드려 문을 열고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차키를 뽑으며 뻐근한 목과 뻑뻑한 눈을 비벼댄 우현이 하품을 하며 느릿느릿 집안으로 들어갔다.


*


다음 날, 서류를 품안에 잔뜩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우현이 사무실을 돌며 서류들을 원래 담당들한테 나눠주기 시작했다.

"임연영씨."
"네, 팀장님."
"이 결재서류, 임연영씨 담당이었죠?"
"네,네…."
"이 서류는 그 옆에 있는 김영환씨 담당이고요."
"네, 맞긴 한데 그게…."

성규한테 자신의 마감 서류들을 맡겼던 직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류를 받아들었다. 우현, 턱으로 성규를 보란듯이 가리켰다. 성규는 사무실 전화를 어깨로 받쳐들으며 한 손으로는 메모를, 남은 한 손으로는 바삐 서류들을 넘기고 있었다.

"이 회사에 안 바쁜 사람은 없습니다. 다들 똑같이 바빠요."
"……."
"그럼 일하세요. 남의 일 말고 회사일이요. 마감 서류들은 퇴근 전까지 제출하시구요."

직원들이 사색이 되선 급히 서류들을 넘기기 시작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우와, 쇠고기 미역국이네."

씻고 나와 식탁에 앉자, 봉신 씨가 김이 모락모락나는 뽀얀 쇠고기 미역국을 식탁에 내려놓는다. 취직하기전엔 그냥 일반 맹맹한 미역국이었는데 취직하고나니, 야들야들 윤기가 나는 쇠고기가 미역국에 한가득 들어있다. 뒤늦게 식탁에 앉은 명수가 자기 국그릇에 담긴 고기의 양과 성규의 국그릇에 담긴 고기양을 비교해 보더니 인상을 팍 구긴다.

"와…너무 편파적이다. 형 그릇엔 고기가 듬뿍인데 난 미역만 듬뿍이잖아!"

명수의 투정을 듣던 성규가 숟가락을 들어 고기의 절반을 명수의 그릇에 툭 덜어준다.

"됐냐, 떼쟁아?"
"사랑해, 형. 스물여덟번째 생일 축하해. 아, 참. 선물."

방으로 들어간 명수가 작은 종이가방을 들고 나왔다.

"어쭈. 너가 웬일이냐."

정말 기대하지않았던 명수의 선물에 성규의 입이 귀에 걸렸다. 종이 가방안에서 나온건 유명 브랜드의 영양크림이었다.

"영양크림이네?"
"그게 주름 제거에 좋대. 이제 내년이면 스물아홉살이잖아. 미리미리 관리해야지."
"죽을래? 아직 탱탱한데 주름은 무슨…."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기분은 좋은지 실실 웃으며 영양크림을 종이가방안에 다시 잘 넣는다. 그나저나 내일 아부지 기일인데 날씨가 추워져서 큰일이네. 성규의 말에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성규 생일 바로 다음 날이 기일이라 크게 생일파티를 하지않았다. 든든하게 아침밥을 먹고 나온 성규가 집 앞에 멈춰서있는 우현의 차에 올라탔다.

"날씨 한번 더럽게 축축하네."
"생일 축하해요."
"그러게요, 생일이 점점 축축…예? 뭐라구요?"

방금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생일 축하한다구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감이랄까?"

입에서 미역국 냄새가 나나? 아닌데. 양치 깨끗하게 하고 나왔는데….

"진짜 어떻게 알았어요? 내 생일인거."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궁금하니깐 그렇죠."
"그냥 어쩌다알게됐어요."

이력서에 생년월일이 쓰여있긴 하지만 그걸 외울 인간도 아니고 갑자기 이력서를 확인할 일도 없는데 참 미스테리할 나름이다. 띠리리링, 성규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어, 짱동."
[해피벌쎄이 투유 해피벌쎄이 트유~]
"야. 미안한데 해피벌쎄이는 무슨 뜻이냐?"
[어,그게……몰라몰라. 암튼 사랑하는 우리 성규 생일 축하해! 유후!]

아침부터 동우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고 우렁찼다. 기분좋은 웃음을 지으며 전화를 마친 성규에게 '갖고 싶은 거 있어요?'하고 우현이 물었다.

"딱히요."
"생일선물로 쌍꺼풀 수술비 달라면 줄 수도 있, 윽!"

성규, 우현의 허벅지를 찰싹! 내려쳤다.

"아침부터 짜증나게 진짜…. 쌍꺼풀 수술은 울 엄마가 해주기로 했으니깐 신경끄셔요!"
"정말 갖고 싶은게 없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있었어요."
"뭐였는데요? 사줄 거 아니니깐 너무 기대하지말고 말해봐요."
"큼…일자리요. 작년까지만해도 생일 선물로 일자리 갖고 싶었어요."
"그럼 내가 준거나 마찬가지네요."
"어련하시겠어요. 암튼 이번 생일엔 딱히 받고 싶은 게 없어요. 나이 들어서 그런가."
"나이가 들긴 했죠."
"자꾸 시비걸꺼에요?"

우현, 어깨를 으쓱.

"상종을 말아야지."
"암튼 생각나면 말해요."
"아,참. 내가 저번에 준 갓파 인형, 안 버렸죠?"
"버려도 다시 찾아오던데 집으로."
"…진짜 버렸었어요?"
"농담이에요. 방구석에 잘 있으니까 걱정말아요."
"착하죠?"
"인형 말하는거에요?"
"먼저 시비 안 걸고, 귀찮게 말도 안 걸고 묵묵히 들어주잖아요. 그 정도면 꽤 착한 친구 아닌가. 왜요? 잘때 귀찮게 말이라도 걸어요?"
"발상이 참 애같네요."
"뇌가 동안이라서."

회사에 도착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4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꽃가루가 날린다. 우현과 성규는 물론 같이 타있던 직원들이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하하하하. 성규씨! 생일 축하해요."
"호,호 대리님…정말…,"
"감동이죠?! 그쵸!?"
"감동은 무슨! 깜짝 놀랬잖아요! 아, 간 떨어질 뻔 했네."
"……뭐하는 짓이냐, 이게."

바닥에 널부러진 꽃가루를 발로 휘휘 저은 우현이 호원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먼저 사무실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복도를 쓸고 닦던 청소부 아줌마가 다가오더니 호원에게 잔소리를 한다.

"아니 새벽부터 청소해놨는데 이렇게 어지르면 어떻게 총각! 아휴, 이게 다 뭐야!"

바닥에 쪼그려앉아 코를 훌쩍이며 꽃가루를 줍는 호원을 도운 성규가 물었다. 

"암튼 고마워요. 이런 서프라이즈 해줘서…. 근데 제 생일인거 팀장님이 말해줬어요?"
"아뇨. 어제 동우형한테 문자가 왔더라구요. 오늘 성규씨 생일이라고요."
"동우형이요?"
"아, 말 놓기로 했거든요."
"동우랑 많이 친해졌나봐요?"
"하하하하. 어쩌다보니까 그렇게 됐네요. 얼른 가요."

자신을 떠밀듯 사무실로 들여보내는 호원의 행동이 수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어야했다.

"이게 다…."

성규 의자엔 헬륨 풍선들이 매달려 둥둥 떠있었고, 파티 용품점에서 사온 듯한 현수막이 책상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또 뿌려져있는 꽃가루와 평소에 안 보이던 보라색 방석까지.

"하하하하. 이거 하려고 새벽부터 출근했다니깐요."
"정말,"

뻘짓하셨네요.

"감사해요, 호 대리님…."

아, 이거 다 언제 치워….

"그 보라돌이 방석은 에어가 들어있어서 푹신푹신할거에요."

유치원 점심시간에 애기들이나 깔고 앉을 법한 방석에 앉자 '삐요오오오'하는 요상한 소리가 났다. 흠칫 놀라며 의자에서 일어난 성규가 방석을 집어들고 보라돌이 얼굴을 살짝 누르자 또 한번 '삐요오오오'하는 소리가 난다. 혹시나 싶어 방석을 흔들자 안에서 딸랑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난다. 대체 어느 가게에서 이런 걸 파는 걸까.

"맘에 들어요?"
"…예에."

진심 에어 터치고 싶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16.

 

한가한 레디락의 점심 피크 전 쉬는 시간. 오더 마감 팻말을 내걸고 들어가려던 명수의 눈에 얼굴을 감싼 채 울고 있는 금발의 꼬마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슬렁어슬렁 꼬마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건넨다.

"꼬마야. 왜 울어?"
"끅……"

헉! 고개를 든 꼬마아이의 페이스는 흔히 볼 수 있는 한국인의 페이스가 아니었다. 하얀 얼굴에 파란색의 눈! 금발일때부터 외국인이라는 걸 알아차렸어야했는데! 초등학교 영어 수준에서 멈춰있는 명수가 당황하며 일단 아이의 머리를 부들부들떨리는 손으로 쓰다듬었다.

"큼……엄…유 한국말 오케이?"
"한,쿡,멀?"
"예스예스. 한국말 스피크 오케이?"
"아, 한쿡말. 예스. 초큼…."
"할 줄 아나보네, 다행이다. 여기서 왜 울고 있어?"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는 표정에 명수는 자신의 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음……울다가 뭐지…. 아! 크라이! 유 와이 크라이?"
"아 로스트 마이 웨이…흐윽."
"로스트? 로스트가 뭐지…마이 웨이는 내 길? 아! 옥희옥희! 유 로스트 웨이?"
"얍…."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영어 단어들을 싹싹 긁어모아 짜내기 시작했다.

"유 패밀리 왓?"
"……."

못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일단 통성명을 해야할 것 같아 대한민국 국민의 89%가 안다는 영어 문장을 내뱉었다.

"왓 츄어 네임."
"톰 린슨."
"오케이, 톰. 마이 네임 이즈 명수. 김명수."
"킴…밍…쑨?"
"노노. 김명수."
"킴…명쑤?"
"예얍. 마이 네임 이즈 김명수. 음… 웨얼 유얼 마덜?"
"아이 돈 노…."
"오, 새드…. 돈 크라이. 기다리다가 뭐였지."

순간 옛날 개그콘서트에서 정형돈이 웨이럿미닛! 하면서 등장하던게 떠올랐다. 그때 성규가 웨이러미닛이 잠깐만 기다려!라는 뜻이라고 멍청한 자신에게 가르쳐줬었다.

"웨이럿미닛!"
"와,왓?"
"아 발음이 너무 후진가… 웨이러어~미닛!"
"…와이…."
"왜냐고? 웨이러미닛… 유얼 마덜 파인드 유! 오케이?"
"아이 돈노 왓 유 세이."
"아이 돈노? 모르겠다고? 짜샤, 담부턴 한국올때 기본적으로 한국말 배워서 와라…. 큼. 유얼 마덜! 웨이러미닛하면은 곧 유 파인드해서 컴 히얼!"

그래도 못 알아듣겠다는듯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에 명수가 볼을 긁적거렸다. 그때 명수의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What's the matter? why are you crying?"

쪼그려앉아있던 명수가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태양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곧 명수 옆에 쪼그려앉아 울고 있는 꼬마아이의 손을 잡았다. 성열이었다.

"Where's your mom?"
"I don't khow…. lost my mammy. will you help me?"
"Sure. Don't sweat it. Mom will come soon. well, how old are you?"
"I'm only 7.…I've lost my mammy……."
"Yeah i khow. I'll help you."

알 수 없는 대화에 성열과 꼬마아이만 번갈아 쳐다봤다.

"Don't cry. when did you arrive here?"
"a week ago….want to call my mom."
"Okay."

성열, 가방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꼬마에게 건넨다. 번호를 누르고 엄마에게 전화를 건듯한 꼬마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이 어딘지 설명하다가 성열에게 받아보란 식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유창한 영어로 꼬마의 엄마와 통화를 마친 성열, 가방안에 핸드폰을 넣으며 꼬마를 안심시킨다. 잠시후, 멀리서 꼬마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허겁지겁 다가와 아이를 끌어안았다.

"Oh honey. Do you know how you found? Thank you, Thank you so much."
"Don’t mention it."

성열에게 꼬마가 손을 휙휙 흔들자 성열도 손을 흔들어준다. 꼬마와 엄마가 사라지고 그제서야 명수가 감탄을 하며 성열에게 엄지를 치켜세워준다.

"영어 진짜 잘한다, 너. 미국에서 살다왔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호주로 유학갔었어."
"와…."

성열이 쑥쓰러운듯이 뒷머리를 만지작만지작거렸다.

"레디락 온거지?"
"응…근데 오더 마감이네."
"아냐, 괜찮아. 들어와."

명수, 성열의 손을 잡아끌고 레디락 안으로 들어간다. 쉬는 시간이라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던 웨이트리스들이 우월한 성열과 명수의 비주얼에 잠시 넋을 잃었다.

"어차피 곧 쉬는 시간 끝나면 다시 손님맞이할꺼니깐 여기 앉아있어도돼."
"…고마워."
"근데 맨날 가방매고 어딜 가는거야?"

성열의 앞자리에 명수가 앉으며 물었다.

"그냥…도,도서관."
"아아, 도서관."

악보 지금 줄까? 아냐, 지금은 타이밍이 애매해. 어떡하면 좋지. 성열이 초조하게 가방지퍼를 만지작거렸다. 결심한듯 입술을 앙 다문 성열이 지퍼를 열고 악보를 꺼내려할때 선웅이 사장실에서 나오며 명수를 불렀다.

"네, 형! 지금 가요! 미안. 잠깐 기다려."
"으응…."

성열이 손이 지퍼를 다시 잠궜다.


*


퇴근시간이 되기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한 우현이 의자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우현의 생일날 고민하던 성규와 똑같은 모습이다. 순재와 성열의 생일에만 선물을 사봤던 우현은 딱히 무엇을 사야할지 떠오르지않았다. 쌍꺼풀 테이프를 사줄까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걸 건넸다간 바로 명치에 니킥을 맞을 것 같았다.

"여기 마감서류요."
"……."
"팀장님?"
"……."
"팀장님!"

성규의 부름에 우현이 뒤늦게 서류를 받아든다.

"집에 숨겨놓은 꿀떡 생각하고 있었어요? 왜 멍을 때려요."
"아녜요, 아무것도."

퇴근 시간이네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우현, 성규가 작성한 서류를 건성건성 넘겨본다.

"그거 제가 얼마나 열심히 작성한건데!"
"잘 했겠죠. 김성규씨 일 막 하는 사람아니니깐."
"…제가 그렇긴 하죠."
"다들 수고했어요."

우현이 일어나 말하자 직원들이 일제히 퇴근 준비를 한다. 기껏 공들여서 작성한 서류인데 우현이 대충 넘겨본 게 불만인 듯한 성규는 툴툴거리며 자리로 돌아가 서류가방과 옷을 챙겨들었다.

"전 오늘 들릴 곳이 있어요."
"가는 길이면 태워다줄게요."
"아니에요. 그냥 오늘은 버스타고 갈게요. 심심해도 오늘은 혼자 가세요. 호 대리님. 다음주에 뵈요."
"생일축하해요 성규씨!"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성규, 우현과 호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회사 입구에서 택시를 잡아탄다. 성규가 없는 조수석에 가방을 놓고 시동을 건 우현이 집 뱡향이 아닌 시내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뭘 사야되지."

제일 먼저 라프레즈에 들려 딸기가 듬뿍 올려진 딸기 케이크를 사들고 나왔다. 유치한 걸 좋아할 것 같아 고깔모자도 사고 싼 가격의 무알콜 샴페인도 샀다. 남은 건 선물인데…….

"……."

차에 올라타려던 우현, 라프레즈 옆 편의점 앞에 놓인 인형뽑기를 발견하곤 씨익 웃으며 인형뽑기로 다가간다. 엽기토끼인형이 있어야할텐데….

"아, 없다…."

인형없이 로봇 장난감과 라이터, Mp3만 가득하다. 예전에 성규가 일식집 앞 인형뽑기에서 갓파인형을 뽑아줬을때, 그 안에 엽기토끼인형이 있었긴했지만 그 사이에 누가 뽑아가버렸을수도 있었다. 서둘러 차에 올라타 일식집으로 향했다.


*


"다녀왔습니다. 와, 이게 다 뭐야?"
"응. 형이 좋아하는 잡채랑 부침개 조금 부쳤어."

케이크와 치킨, 맥주를 사들고 집으로 귀가한 명수가 들어오자마자 풍기는 고소한 기름냄새에 군침을 삼키며 식탁으로 다가왔다.


"형은 아직 안 왔어?"
"아직. 근데 뭘 이렇게 많이 사왔대."
"아버지 기일이라고 맨날 형 생일 제대로 챙겨 준 적이 없었잖아. 그래서 내가 돈 좀 썼지. 그나저나 형 많이 늦어?"
"아니. 전화 안 해봤어. 곧 오겠지."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고 치킨을 식탁에 올려놓은 봉신 씨가 노릇노릇하게 익은 부침개를 뒤집었다.


*


"아씨…."

벌써 2만원째다. 집게가 엽기토끼 근처에서만 맴돌고 정확히 몸통이나 머리통을 잡아주질 않았다. 누가 다른곳에서 집게를 조종하는 것만 같다.

"이거 완전 사기꾼 새끼들아냐!"

참다참다 폭발한 우현이 결국 인형뽑기를 발로 퍽 걷어찼다. 그러면서도 만원짜리 한 장을 인형뽑기에 또 넣는다. 그 돈으로 근처 팬시점에서 파는 엽기토끼를 사는게 더 쉽고 간편했지만 알 수 없는 오기가 뻗친 우현은 땀이 고인 손으로 빨간 버튼에 손을 얹었다.

"제발…."

새삼 한번에 척척 뽑았던 성규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


사람들로 북적이는 포장마차 안. 가운데 테이블을 자리잡고 앉은 성규가 첫 소주병을 따 잔을 가득 채운다.

"크으, 쓰다. 켁켁."

소주잔을 단숨에 비운 성규가 몸을 부르르 떨며 얼른 홍합탕 국물을 후루룩 떠마신다. 생일이란 성규의 말에 포장마차 이모님이 계란말이와 닭발을 서비스로 내온다.

"오늘은 혼자네? 저번엔 잘생긴 총각이랑 같이 오더니만."
"잘생긴 총각? 아, 회사 팀장이요?"

남우현이 잘 생긴 편이었던가? 성규가 오이를 오독오독 씹어먹으며 곰곰히 생각했다. 그래, 잘 생긴 편이다. 잘 먹고 잘 자라서그런지 피부도 뽀얗고 전체적으로 귀티도 줄줄 흐르고 또 코도 오똑하니 높으니깐 잘생긴게 맞는 것 같다. 빈 잔을 채우려 소주병을 들었을때 가방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액정에 나타난 봉신 씨의 이름에 입안에 남아있던 오이 잔류들을 서둘러 씹어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왜?"
[어디야? 퇴근 시간 다 됐는데 안 들어오길래.]
"저 그게…일이 좀 많아져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밖이야? 자동차 소리랑 바람소리 들리네?]
"어? 어어, 회사에 남아있는 직원들이랑 잠깐 뭐 좀 먹으러 나왔어."
[아휴, 그럼 많이 늦겠네?]
"잘 모르겠다…. 왜?"
[너 좋아하는 잡채랑 부침개 해놨거든. 명수가 오는길에 통닭이랑 케이크도 사왔구.]
"명수가?"

그 놈이 웬일이래. 이제 철들었구만.

"최대한 일찍 끝내고 들어가볼게."
[알았어. 얼른 와.]
"응, 끊어."

전화를 끊은 성규가 한숨을 쉬며 테이블에 머리를 콩콩 박았다.


*


집으로 향하는 우현의 표정은 경쾌함을 지나 상쾌해보였다. 조수석에 엽기토끼를 앉히고 안전벨트까지 해준 우현이 엽기토끼의 머리를 헤집듯이 쓰다듬어준다. 보면 볼수록 성규와 쏙 빼닮았다. 저기다가 가발을 씌우고 정장만 입히면 될 것 같다. 성규의 집 앞에 도착해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고 엽기토끼와 바닥에 놓여있던 딸기 케이크 상자를 집어들고 성규네 대문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형이야?]
"아니 저기…나 옆집 형이야."
[아, 잠시만요]

안에서 쿵쾅쿵쾅소리가 들리고 곧 명수가 튀어나온다.

"저기 집에 형 있어?"
"네? 우리 형이요? 우리 형 오늘 일때문에 회사에 있다고 했는데…. 같은 사무실 아니었어요?"
"같은 사무실인건 맞는데 오늘 김성규씨 일 밀린 거 하나도 없었는데…."
"진짜요? 뭐지…아, 김성규. 또 그 짓 하는 거야?"
"그 짓이라니?"
"아, 아무것도 아녜요. 근데…그게… 형 선물…이에요?"

엽기토끼와 딸기 케이크. 헛기침을 하며 손에 들린 선물을 뒤로 슥 감췄다.

"그래서 형 지금 집에 없다고?"
"네. 아마 거기 갔을 것 같은데.
"거기가 어딘데?"
"맨날 형 갈 곳 없으면 자주 가는 포장마차가 있거든요."
"포장마차? 아!"
"어딘지 아세요?"
"응. 들어가봐."

명수를 들여보낸 우현이 다시 차 시동을 걸었다.


*


[어디냐.]

이번엔 명수에게 걸려온 전화다.

"짜샤. 어디긴 어디야. 회사지, 회사. 로비에 잠깐 바람쐬러 나왔,"
[웃기고 있네. 방금 옆집 팀장 형님 다녀왔다갔거든?]
"…그 인간이 왜."
[형 포장마차지.]
"……."
[쯧쯧. 뻔히 들킬 거짓말을 왜 하냐.]
"들킬 줄 알고 했겠니…. 금방 들어갈꺼야. 엄마한텐 말하지마."
[알았어. 빨리 들어와.]

아, 그 인간은 왜 우리 집엘 찾아오고 난리야…. 전화를 끊으며 궁시렁거린 성규가 아직 반 정도 남은 소주를 잔에 부었다.

"여긴 회사 이름이 뭐에요?"

어? 성규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자 언제부터 와있었는지 모를 우현이 서있었다.

"포장마차 상사인가."

한 손엔 엽기토끼를 한 손엔 케이크 상자를 든 채로 다가와 의자를 빼내어 앉는다.

"궁상도 정도껏 맞아야지, 생일에 혼자 뭐해요."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왔어요?"
"그 쪽 동생이 꽤 협조적인 사람이더라구요."
"아, 김명수…."

입 더럽게 싸네. 눈치껏 그냥 모른다고 할 것이지.

"…그건 뭐에요?"
"아, 선물."

케이크 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성규에게 인형을 건넸다.

"에! 뭐야! 엽기토끼잖아! 내가 엽기토끼인형 혐오하고 증오한다고 말 안 했어요?"
"아, 기억나네요. 그래도 가져요. 삼만원짜리 인형이니깐."
"이 조그마한게 무슨 삼만원씩이나해요?"
"인형뽑기로 뽑은거에요."
"허, 그럼 그 기계덩어리에 삼만원이나 넣었단 말이에요?"
"김성규씨도 돈 넣고 인형뽑았잖아요."
"난 겨우 오천원 넣은거구요. 돈 아깝게시리."
"돈 아까우면 가져요. 버리지말고. 누가 그러는데 인형은 침실에 놔야 마음을 안정시켜준대요. 일종의 심리적 친구라나 뭐라나. 힘든 일있거나 고민 같은 건 그 토끼새끼한테 얘기하세요."

자신이 했던 말이다. 성규가 마지못해 인형을 받아 품에 안았다. 털이 보들보들거린다.

"그 총각도 왔네? 아깐 안 올 것처럼 말하더니!"

포장마차 이모님이 우현을 알아보자 성규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찾아왔네요'하며 홍합을 건져 살만 쏙 건져먹었다.

"혼자 한 병 다 마셔놓고 오늘은 꽤 멀쩡하네요?"
"취할만하면 찬 바람 불어서 술이 깨요."
"왜 집에 안 들어가고 혼자 술마시고 있어요?"
"……."
"보니까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진짜 독심술같은 거 배웠어요?"
"생일날에 혼자 궁상맞고 처량하게 술마시고 있는 사람한테 사연은 필수 옵션이죠."
"…말하자면 길~고요 말하기도 싫어요. 비밀이에요, 비밀!"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자기 자신한테 큰 짐이란 말이 있어요."
"이런 말도 있어요. 진짜 비밀은 차라리 개한테 털어놓아라."
"오늘만 개 하죠, 뭐. 그럼 그 쪽은 돼지?"
"소주병으로 맞아봤어요? 큼, 암튼 내가 말하면, 그 쪽은 뭐 말 할 건데요."
"…나도 사연 하나 꺼낼게요."
"내 사연이 더 셀 텐데."
"아닐텐데."

입맛을 쩝쩝 다시던 성규가 '에이씨'하며 소주가 가득 차있는 잔을 단숨에 원샷했다.

"…내일, 아버지 기일이라면서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 뭔지 알려나? 성규가 소주잔을 든 채로 딱딱한 돌하르방처럼 굳어버렸다. 수저 통에서 수저를 꺼낸 우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뭘 그리 놀란 표정이에요. 이력서에 가족관계 다 써서 냈으면서."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내일 기일인 거 어떻게…."
"우연찮게 알게 됐어요."
"우연찮게 알 일이 아닌데 어떻게 우연찮게 알아요."
"사연이라는게 아버지랑 관련된 일이에요?"

눈썹과 어깨가 함께 추욱 늘어진다.

"이왕 들킨 거 그냥 속시원하게 얘기하지그래요. 내가 소문내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그럼 나도 말할테니깐, 팀장님도 하나 말해요."
"좋아요."
"큼…."

내가 고등학교 3학년때 일이에요.


*


"뭐어! 갑자기 왜!"

교복을 입고 가방을 맨 고등학생 성규가 평상에 드러누워 발을 동동 구른다.

"내일 내 생일이잖아 아부지!"
"글쎄 갑자기 일이 잡힌 걸 어쩌냐?"
"어디로 가는데?"
"저어기 해남."
"뭐어? 해남?! 땅끝마을 해남?! 가지마! 내일 가족사진도 찍기로 했으면서!"
"그건 나중에 찍어도 되잖아."
"내 생일날 찍어야 기념이지! 아야!"

머나먼 해남까지 화물차로 짐들을 운송할 아버지를 위해 얼린 물과 수건, 간단한 먹을거리를 싸주던 봉신 씨가 파리채로 성규의 등짝을 내려쳤다.

"철 좀 들어 인간아, 철 좀! 아빠 마음은 편하겠어?"
"왜 애를 때리고 그래. 아무튼 빨리 마무리하고 내일 12시 지나기전에! 꼭 와서 같이 촛불 불자."

마당 한 쪽에서 공을 차며 놀던 명수가 공을 집어들어 성규에게 툭 던진다. 포물선을 그리며 던져진 축구공은 정확히 성규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아! 죽을래!?"
"야, 김성규. 철 좀 들어라. 내년이면 스무살이면서 그러고 싶냐."

떨어진 축구공을 명수에게 다시 던졌지만 명수는 혀를 쏙 내밀며 축구공을 한 손으로 척 받아냈다.

"아버지 이제 가셔야하니까 빨리 인사해."

봉신 씨의 말에 평상위에서 서로 치고받고 레슬링을 하던 명수와 성규가 나란히 일어나 대문을 나서는 아버지를 배웅했다. '안전운전하세요'하고 꾸벅 인사를 하는 명수와는 달리, 입술이 댓발 나온 성규는 계속 툴툴거리며 불만을 뱉었다.

"그냥 가지말지…. 내일 12시전엔 꼭 오는 거다 아부지?"
"알았다, 알았어. 걱정마. 12시전엔 꼭 올테니깐."
"알았어. 안전운전해 아부지."

아버지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자 성규도 손을 휙휙 흔들어준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건.

"해남에서 돌아오는 길에 덤프 차량이랑 부딪혀서 사고가 났대요. 덤프 운전사는 팔만 부러졌는데…,"

성규가 코를 훌쩍이며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꾹꾹 가라앉혔다.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으면 그냥 천천히 다녀오세요, 가족사진은 나중에 찍어도 괜찮아요,하는건데…."

우현이 묵묵히 들어주다가 눈가를 벅벅 비벼대는 성규의 모습에 정장 마이 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넨다.

"…에이씨, 손수건도 브랜드 있는거네, 재수없게…."

그 와중에 상표는 어떻게 확인했는지 모르겠다. 순식간에 슬펐던 분위기를 뒤집는 성규때문에 우현이 너털웃음 지었다.

"그래서 생일 날마다 처량하게 술마시는거에요? 죄책감에?"
"모르겠어요, 이게 죄책감인지 뭔지. 그냥 술마시면 덜 기억나니깐요. "
"술을 많이 마시면 뇌의 회로가 재배선되면서 불안과 관련된 충격에서 회복되기가 점점 어려워져요. 잊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외상적 기억이 때문에 자꾸 잊으려고 술을 마시면 그만큼 본인을 그 기억에 더 밀어넣게 되는거에요. 앞으론 술 좀 줄여요."
"누가 보면 내가 알코올 중독자인 줄 알겠네. 됐고, 이제 그 쪽이 말해요."

이제 내 차롄가. 우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성규씨가 물어봤었죠. 순재랑 내 관계. 더불어 성열이까지."
"팀장님이 그랬잖아요, 사람과 사람 사이라고."
"아직도 궁금해요?"
"궁금하다하면 말해주게요?"
"내 인생에 사연이라곤 그것말곤 없어요. 그거 빼면 모두 학교다닐때 얘기들뿐이니깐. 수위가 쎄서 마음 단단히 먹어야할텐데요."
"야한 얘기에요?"
"…내가 김성규씨 앉혀놓고 야한 얘기하겠어요?"
"큼…아무튼 마음 단단히 먹었어요. 먹는 거 잘하거든요."
"그런 것 같네요. 쨌든, 난 김성규씨보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에요. 5년 전 쯤 일이니깐."
"최근이네요."
"최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옛날 옛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무튼간에 얼른 말해요. 자꾸 뜸들이지말고."
"내가 죽였어요."
"뭐,뭐라구요?"
"순재 부모님이랑 순재 미래랑 성열이 미래까지. 다 나 때문에 죽었어요."
"아,알기 쉽게 설명해요. 무서워지려고 하니깐."

5년 전 쯤이에요.

*

화창한 날씨. 조수석엔 순재가 타있고 뒷좌석엔 순재의 부모님과 성열이 타있다. 서울을 벗어나 시원한 숲길로 들어선 차는 바람을 가르며 시원하게 달렸다. 순재와 교제를 하면서 순재 부모님은 처음 보는 자리였기때문에 우현은 바싹 긴장해있었고 그런 우현을 눈치챈 순재는 긴장하지말라는 듯이 우현의 어깨를 토닥토닥거려주었다. 순재 부모님은 애교많고 싹싹한 우현을 굉장히 흡족히 여겼다. 순재에겐 좋은 남편이, 성열에겐 좋은 형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빠르지않나?"
"왜 멀미나?"
"아니. 그건 아닌데 좀 빠른 것 같아서."
"응."

클러치에서 조금 발을 떼려던 순간, 반대쪽 커브에서 하얀 승용차가 무서운 속도로 중앙선을 침범하며 달려왔다. '우현아, 앞에!'하는 순간 우현이 급하게 핸들을 홱 꺾었다. 승용차와 정면으로 부딪히며 핸들에서 에어백이 펑,하고 터져나왔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차가 마치 장난감 자동차처럼 뱅글뱅글 돌아 가드레일에 부딪혔다. 머리에서부터 뜨끈하고 끈적한 피가 흘러내리는걸 느끼며 쓰라린 눈을 치켜떴다. 순재가 아침부터 준비한 도시락이 유리 조각들에 섞여 굴러다녔다.

"…으…."
"……."
"…순재…야…."
"……."
"성…열아."

차안은 무서우리만큼 고요했고, 고개를 뒷좌석으로 돌리는 순간, 우현은 바로 정신을 잃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17.


"순재는 손가락이 으스러져서 세 번이나 재수술을 했어요."
"세 번씩이나요?"
"네. 다행히도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재빠르게 손을 놀려야하는 피아노 연주는 그만 둬야했죠. 성열인 사고 이후 마음을 닫았고."
"성열씨가요?"
"네. 눈도 안 마주치려고하고 방에서 잘 나오지도 않고 그랬었는데 이사오고 난 후부턴 많이 좋아졌네요, 신기할 정도로."
"성열씨가 그냥 낯만 좀 심하게 가리는 편인 줄 알았어요."
"어쨌든 나 때문에 평범했던 모든게 다 사라져버렸어요."
"……."
"순재부모님 장례식 치르고, 호주로 건너가서 순재 손가락 수술하고 재활치료까지 마친 다음에 다시 한국오고…. 할머니한테 얼빠진놈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몰라요."
"…그럼 팀장님은…순재씨 아직도 좋아해요?"

아뇨. 우현이 딱 잘라대답한다.

"나 때문에 많은 걸 잃은 사람인데 어떻게 감히 좋아할 수가 있겠어요."
"자꾸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그러는데 왜 그게 팀장님때문이에요. 팀장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게 아닐텐데."
"……."
"롱펠로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미래를 신뢰하지 마라, 죽은 과거는 묻어버려라, 그리고 살아있는 현재에 행동하라….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현재가 가장 중요한 거에요. 현재를 보고 사세요. 과거를 보고 살지말고."

웃으면서 맞는 말이라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무튼 내 사연이 더 센 것 같죠?"
"따지자면요."
"……근데 내가 이 사연을 왜 김성규씨한테 말했을까요."

우현이 턱을 괴고 성규를 지그시 쳐다봤다.술도 마시지않고 꽤 시원한 밤바람에 정신도 말짱한데, 아무한테나 안 꺼내는 이 이야기를 왜 성규에게 했을까?

"인생 살면서 사연이 그것 말고는 없다면서요."
"그래도 남한텐 쉽게 안 털어놓거든요. 술에 잔뜩 취하거나 머리를 얻어맞지않은이상."
"…그래서요."
"김성규씨는 참 묘한 사람이에요."
"……."
"뭔가…사람을 되게 편안하게 만드는 것같아요."

뭐야,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래. 또 장난치나 싶어서 우현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꽤 진지한 눈빛이다.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에요. 김성규씨랑 있으면 마치 오래 알았던 사이처럼 편안하고 유쾌하고 꽤 즐거워요."

케이크 상자를 열려던 성규가 낯간지러운 우현의 말에 잠시 침을 꿀꺽 삼켰다. 이상하게 우현의 저 진지한 눈빛을 도저히 못 견뎌내겠다.

"그,그거야 물론 팀장님이 하도 날 못 살게 괴롭히고 유치하게 시비걸고 놀리니깐 그렇죠!"
"김성규씨가 정말 미워서 그런건 아니니깐 오해말아요."
"…그럼 왜 그런건데요."
"나도 몰라요."
"병이에요? 남한테 시비걸고 괴롭히는 병?"
"남들한텐 안 그래요. 유독 김성규씨만 보면 자꾸 시비걸고 괴롭히고 싶어지네요."
"…참나. 아주 나한테 푹 빠지셨구만."
"……."
"…큼."

별다른 의미없이 한 말인데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괜한 헛기침을 한 성규는 나무젓가락을 내려놓고 케이크 상자를 마저 열었다.

"딸기 케이크네요? 나 딸기 좋아하는건 어떻게 알았대."

싱싱한 딸기가 한가득 올려진 케이크를 꺼낸 성규가 초를 꺼내 갯수를 세어보더니 인상을 확 찌푸렸다. 우현, 딱 봐도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이다.

"이게 뭐에요."
"뭐가요."
"왜 딸랑 긴 초만 세 개냐구요. 내가 서른이에요?"
"아니였던가?"
"…이걸 그냥 콧구멍에 확."

성규의 손에 들린 초를 빼앗은 우현, 묵묵히 그 긴 초를 케이크에 쿡 쿡 쿡 찔러넣는다.

"이봐요. 나 서른 아니라구요. 나이 앞에 이 붙는 거랑 삼 붙는 게 얼마나 큰 차이인 줄 알아요?"
"……."

못 들은 척하며 초에 불을 붙혔다. 성규, 언제 투정부렸냐는듯이 케이크 위의 촛불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고있다.

"아, 맞다."
"왜요?"
"잠깐 초 불지 말고 기다려봐요."

그러더니 갓길에 세워진 벤츠 뒷좌석 문을 열고 반짝이가 달린 고깔모자와 무알콜 샴페인을 들고 나온다.

"그 유치원 재롱잔치할때나 쓸법한 모자는 뭐에요?"
"이거 써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요. 생일인 거 광고해요?"
"김성규씨 광고홍보학 나왔잖아요. 얼른 써요, 기껏 사왔는데 잔말말고."
"누가 사오랬나…."

궁시렁거리면서도 고깔모자를 받아쓴다. 여전히 뭐가 불만인지 아랫입술이 댓발 나와있다. 에이씨. 성규가 초 하나를 잡아 다른 초보다 더 깊게 쑤욱 밀어넣는다. 서른살에서 순식간에 스물한살이 된 성규.

"와아~ 고마워요. 나의 스물한번째 생일을 축하해줘서."
"재밌어요?"
"냅둬요. 젊어진 것 같고 기분 좋구만."

우현이 결국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노래 안 불러줘요? 서서히 녹는 초를 보며 성규가 생일축하노래를 요청했다.

"창피하게 뭘 불러요."
"창피? 팀장님 생일날 내가 불러준 거, 기억 안 나요?"
"…나 노래 못,"
"한다는 핑계는 말아요. 야유회 때 다 들었으니깐."
"…아, 진짜 창피하게."
"이 반짝이 고깔모자 쓰고 있는 나도 창피하니깐 얼른 하고 끝냅시다. 그럼 시작."
"후우……생일축하…."
"박수 안 쳐요?"
"박수도 쳐야해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현이 마지못해 뻣뻣하게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축하합니다."
"웃으면서 불러요. 마지막 생일인 줄 알겠네."
"…생일축하합니다. 생일 축하, 아니 진짜 케이크에 샴페인까지 사왔는데 꼭 노래를 들어야겠어요?"
"네. 꼭 들어야겠네요."
"……."
"시간 없어요. 이거 하고 얼른 집들어가게 빨리 불러요."

생일축하합니다. 생일축하합니다. 사람같은 김성규씨. 생일축하합니다. 빠른 속도로 우현이 노래를 끝마치자 포장마차 손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박수를 쳐준다. 성규가 눈을 꼭 감고 무어라 중얼중얼거린뒤 후,하고 촛불을 껐다.

"며칠전에 공원에서 잔뜩 빌어놓고 소원이 또 있습니까?"
"방금 팀장님 얘기듣고 하나 생겼거든요."
"내 얘기요? 뭔데요?"
"소원 에티켓 중 하나! 남의 소원은 함부로 여쭙지않는다. 그나저나 청중 평가단이 팀장님 노래 꽤 맘에 들었나봐요? 박수까지 쳐주고."
"암튼 그 인형 버리지 마세요. 선물이니까."
"이런 선물은 한 트럭 갖다줘도 싫은데."
"정확한 선물을 말하던가요."
"나중에라도 말하면 사줘요, 그럼."
"신체 장기말고는 뭐든지."
"진짜죠? 약속해요."
"내가 그런 거 가지고 거짓말하겠어요?"
"…충분히 하게 생겼는데."

우현, 귀찮은 표정으로 성규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자기 새끼손가락을 건다.

"이제 일어나요. 시간도 늦었는데."
"그러려고 했어요."

성규는 케이크 상자와 샴페인을 양 손에 들고 옆구리에 인형까지 낀 채, 뒤뚱뒤뚱 우현의 차로 향했다. 고깔 모자를 쓴 채로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그 모습을 빤히 보고만 있는 우현에게 빨리 타라며 되려 큰 소리다.


*


현관문이 열리고 약간 취한 성규가 우현에게 받은 선물을 양손에 가득 들고 들어선다.

"왜 이렇게 늦게 와! 그 머리위에 고깔은 뭐고."
"어? 고깔? 아, 맞다!"

그제서야 고깔모자를 머리위에서 잡아끌어내렸다. 깜박한 거 알았으면 좀 말해주지. 암튼 치사한 인간.

"우와. 다 내가 좋아하는 거 잖아!"
"늦게 와서 잡채 다 불었겠네!"
"불어도 맛있겠지. 근데 이 인형은 뭐니?"

봉신 씨가 엽기토끼인형의 귀를 잡아들며 물었다.

"선물받은거야."
"누가 스물여덟 남자한테 인형을 선물해?"
"어쩔 수 없어. 주거니 받거니 한거지, 뭐."

성규가 받은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고, 자신이 사온 케이크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은 명수가 치킨과 맥주, 그리고 스물여덟개의 초를 케이크에 꽂았다. 아깐 스물한살이었는데. 순식간에 스물여덟이 되어버렸네. 정장 마이와 넥타이만 푸르고 얼른 식탁에 앉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명수와 봉신 씨가 생일축하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성규의~ 생일축하합니다! 해맑게 웃은 성규가 두번째 소원을 빌며 촛불을 후,하고 불었다.

"형 기다리느라 나랑 엄만 밥도 못 먹었다."
"미안미안. 얼른 먹자."

포장마차에서 그렇게 많은 안주를 먹어놓곤 더 들어갈 배가 있는지, 젓가락을 든 성규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잡채를 폭풍흡입했다.

"내일 다들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거 알지?"

아버지가 있는 곳은 전라도 완도였다. 차로 6시간이 걸리는 거리인데다가 첫차인 아침 9시 버스를 놓치면 밤 10시 버스 밖에 없어서 7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무조건 첫차를 타야만 했다.

"형 핸드폰 후지고 낡았으니깐 내가 알람 맞춰놓을게."

방으로 들어가 충전하고 있던 스마트폰을 집어든 명수, 알람 메뉴로 들어가 알람 추가 버튼을 눌렀다.

"…가만…. AM PM? …아침이…PM이었으니깐…. PM… 7시. 됐다!"

명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식탁으로 가 앉았다.


*


"나 왔어."

우현이 피곤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직 자지않고있는 성열이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아직 안 잤네?"
"…잠이 안 와서…."
"걱정거리 있어?"
"아니…그냥…."

피식 웃으며 성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우현이 물었다. 순재는?

"방에서 자."
"벌써?"

11시. 좀 늦은 시간이긴 했다. 그래도 항상 문여는 소리를 듣고 우현을 맞아주던 순재였는데 오늘은 꽤 많이 피곤한가보다. TV 너무 늦게까지 보면 안돼,하고 말하며 소파에서 일어난 우현이 방으로 들어가 서류가방을 작은 협탁위에 내려놓고 정장을 벗은 뒤,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찬 물줄기가 탄탄한 근육이 잡힌 몸을 차갑게 적셨다. 성규의 모습이 문득 떠오르더니 자기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성규에게서 순재와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마음속에만 가지고 있던 사연을 말할 정도로. 오랜 친구인 호원과는 다른 의미의 편안함이었다. 뭐라고 딱히 말할 순 없는 의미. 미운 정이 더 무섭다던데 그게 들어서 그런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자꾸 떠오르는 성규가 밉진 않으니 말이다. 오히려 귀여웠다, 스물여덟의 성규는 스물여섯의 자신보다 더. 원래 우현은 무뚝뚝하고 냉정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사람이었다. 순재와 성열, 가족,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 호원처럼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부딪히며 만나온 사람이 아닌 이상, 쉽게 친해지려고 하지도 않았고 친해질 필요도 없었다.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비즈니스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성규는?

"……."

성규는 도대체 뭐지?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이 고졸 띨띨아! PM이랑 AM도 구별 못 해!?"
"헤,헷갈렸다고!"

성규네는 아침부터 난리가 났다. 엽기토끼를 끌어안고자던 성규가 오줌이 마려워 잠에서 깨 볼일을 보고 화장실에서 나오다 문득 쳐다본 시계는 아침 8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한 5초정도 멍하니 보고 있던 성규는 득음을 하듯이 소리를 꽥 지르며 온 집안의 불을 켜고 아버지에게 이쁘게 보여야한다며 팩을 한 채 자는 봉신 씨를 서둘러 흔들어 깨웠다. 허겁지겁 준비를 하는 봉신 씨에게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쉰 성규가 '지금 준비해도 늦었어. 우리 첫차 못 타'하고 말하자 봉신 씨가 발을 동동 구르며 명수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어쩜 좋아. 기일인데 가지도 못 하고!"
"……."

집 분위기는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봉신 씨는 울상을 지은채 거실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고 죄인 김명수는 말없이 구석에 짜져있었다.

"차도 없는데 어떡할꺼야."
"오후 10시 차 타면,"
"장난해? 오늘이 기일이지 내일이 기일이야?"
"…이럴때 형이 차만 있었으면,"
"이게 왜 내 핑계를 대고 난리야!"

성규가 발로 명수를 휙 밀었다. 그나저나 정말 큰일이다. 오후 10시를 타고 가면 다음날 새벽 5시에 도착을 할테고 다음날은 아버지 기일도 아니다. 한참 정적만 흐를때 성규가 '잠깐만 기다려봐'하더니 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들고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어라?"

우현의 이름이 전화번호부에서 없어졌다.

"아, 명함! 명함이 있었는데 어디다가 놨더라."
 
책상 여기저기를 뒤적거려 우현이 예전에 줬었던 명함을 찾아낸 성규가 키패드를 꾹꾹 눌러 우현의 번호를 찍었다.

"…멋진 남팀장님?"

눈썹이 확 찌푸려졌다. 이 말도 안 되는 이름은 뭐래? 이 귀신같은 인간이 언제 바꿔놓은거지.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였기때문에 일단 '멋진 남팀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범한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곧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히도 자다 일어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왜요.]
"멋진 남팀장님?"
[…….]
"언제 바꿔놨대…. 암튼 일찍 일어났네요?"
[늦잠자는 시간이 아까워서요. 그러는 김성규씨도 일찍 일어났네요.]
"아버지 기일이잖아요."
[아아…. 그나저나 왜요?]
"저…부탁하나만 하려구요."
[부탁?]
"네, 부탁."
[이상한 거만 아니면 되요.]
"어제 한 말 기억나요?"
[내가요 아님 김성규씨가요.]
"팀장님이 한 말이요."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마당에서 줄넘기를 하고 들어오던 우현이 잠시 멈춰서서 어제 기억을 떠올렸다.

[한 말 많아서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암튼 뭔데요.]
"생일 선물 생각나면 나중에라도 말하라면서요. 덧붙여 '신체 장기말고는 뭐든지'라고 했던 거 기억나세요?"
[그런 망언을 했다구요? 내가?]
"네. 했었죠."
[……생일 선물 생각나서 이 이른 아침부터 전화 한 거에요?]
"네네."
[…말해봐요.]
"좀 곤란한 걸 수도 있는데…."
[자꾸 질질 끄면 끊습니다.]
"저…오늘 하루만요…. 우리집 기사님 좀 되어주세요."
[기…사님이요?]
"네. 운전해주는 기사님이요. 사실 내 멍청한 동생이 알람 시간을 거지같이 맞춰놔서 첫 버스를 놓쳐버렸어요."
[다음 버스 타면 되잖아요.]
"다음 버스는 오후 10시에요. 아버지 계신 곳이 전라도 완도라서 6시간은 걸리는데 오후 10시차타게 되면 다음날 새벽에 도착한다구요…."
[그래서 생일 선물로 전라도 완도까지 데려다달라구요?]
"…네.'
[김성규씨 친구 있잖아요. 그 고깃집하는 친구분.]
"하루 종일 고깃집을 비울 수 없잖아요, 사장인데."
[…….]

전화기를 잡은 성규가 손톱을 잡아뜯으며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하아…선물 한 번 제대로 써먹네요. 알았어요. 준비 다 되면 전화해요.]
"정말요? 진짜죠!?"
[남아일언 중천금이라면서요. 신체 장기말고는 뭐든지라고 했으니깐. 그 말 지켜야죠.]
"와, 멋져멋져요. 금방 준비할게요!"

활짝 웃으며 폴더를 닫은 성규가 거실마루로 뛰쳐나가 소리쳤다.

"얼른 준비해."
"휴우, 지금 준비해도 9시 버스 못 타…."
"우리 버스 안 타고 가."
"그럼?"

봉신씨가 물었다. 씨익 웃은 성규가 대답했다.

"벤~츠."


*


밝은 아이보리색 옷을 입으려던 우현이 옷걸이를 든 채로 잠시 생각하다가 하얀 셔츠에 검은색 가디건을 입고 방을 나왔다. 주방에서 나오던 순재가 종이가방을 내민다.

"뭐야?"
"전라도 완도면 되게 멀잖아. 직접 구운 쿠키랑 주스 몇 병 담았어. 가는 길에 성규씨네랑 같이 먹으라구."
"응. 고마워."

순재와 성열이 집을 나서는 우현을 뒤따라 마중을 나왔다. 성규는 검은색 정장을 입었고 봉신 씨는 검은색 투피스, 명수는 깔끔한 검은셔츠에 검은바지를 입고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순재와 성열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성규씨."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순재와 그 옆에 서서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는 성열에게 성규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성규 옆에 서있던 명수는 성열에게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성열도 쑥쓰럽게 웃으며 살짝 손을 흔든다. 

"오랜만이네요 순재씨. 성열씨도요. 아,참. 저번에 그 쿠키는 정말 잘 먹었어요."
"에이, 뭘요. 우현이한테 들었는데 어제 생일이셨다면서요? 늦게나마 축하드려요."
"감사해요."
"그나저나 오늘 날씨가 좋아 다행이에요."
"그러게요. 근데…혹시 다이어트하셨어요?"

네? 성규의 물음에 순재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볼을 매만졌다. 예전보다 살이 좀 빠지신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우현이 순재를 돌아봤다. 항상 같이 지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깐 좀 살이 빠진 것도 같다.

"아닌가? 아무튼 순재씨는 다이어트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 워낙 키도 크시고 모델같으시니깐,"
"그만 떠들고 차나 타요."

우현이 성규를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아휴, 정말 괜찮으시려나 모르겠네…."

차 문을 열어주는 우현에게 봉신 씨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우현이 '괜찮습니다'하며 젠틀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리곤 명수가 들고 있던 박스를 건네받아 트렁크에 싣는다. 벤츠라는 차에 처음 타보는 봉신 씨는 넓직한 공간과 고급스러운 내부 모습에 감탄을 하며 가죽 재질 시트를 매만졌다. 세상에. 이게 차야, 집이야? 조수석에 탄 성규는 뒷좌석에 앉은 봉신 씨와 명수에게도 안전벨트를 매게 했다. 성열과 순재에게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한 우현이 운전석에 올라타 안전밸트를 매고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나 진짜 살 빠졌어, 성열아?"
"……."
"성열아?"

성열의 두 볼이 발그스레했다. 블랙 셔츠를 입고 있는 명수의 모습은 참 멋졌다. 특히 웃으면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어줄땐 꼭 백마탄 왕자님같아보였다. 혼자 얼굴이 붉어져선 살포시 웃는 성열을 순재가 잠시 진지한 얼굴로 바라봤다.


*


편안한 쿠션때문인지 봉신 씨와 명수는 차에 타자마자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잠에 빠졌다.

"많이 피곤하신가보네요."
"누구요? 우리 엄마랑 명수요?"
"네."
"엄마는 어젯밤부터 짐 싸느라 피곤할테고 명수는… 쟨 피곤하진 않은 앤데 원래 저래 잠이 많아요. 암튼 고마워요. …멋진 남팀장님."

그 말에 우현이 괜히 헛기침을 한다.

"유치하게 멋진 남팀장님이 뭐람."
"밴댕이 소갈딱지보다는 낫죠."
"큼…근데 진짜 언제 바꿔놨어요?"
"…내가 안 바꿨는데요."
"그럼 누가 바꿔요. 명수가요? 우리 엄마가요?"
"김성규씨가 술 취해서 바꿨나보죠."
"술 취해도 가릴 건 가려요."
"네비게이션에 위치나 찍어요."

성규가 하얀 손가락으로 네비게이션 화면을 콕콕 눌렀다. 길안내를 시작합니다,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리고 고속도로 상황과 함께 7시간 30분이라는 소요시간이 떴다.

"7시간 30분? 굉장히 머네요."
"그쵸? 전라도 완도가 아버지 고향이에요. 내가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 살다가 서울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던 곳이죠."
"그럼 매년 기일마다 이 먼거리를 버스타고 갔었어요?"
"네. 완도 근처까지 가는 직행이 있거든요. 내년에도 생일 선물로 부탁해요, 멋진 남팀장님."

성규의 말에 우현이 살짝 웃었다. 우현의 웃음에 성규도 살짝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


다락방을 청소하자는 순재의 말에 얼떨결에 앞치마를 멘 성열이 먼지털이로 다락방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성열아. 이리 와봐."

성열이 상자들을 정리하던 순재에게 다가갔다. 순재가 들고 있는 건 자신과 순재의 어릴 적 사진이었다. 피아노 콩쿠르 대회 현수막이 보이고 자랑스럽게 상장을 들고 서있는 자신과 순재, 그리고 부모님.

"이때 기억나?"
"으응."
"너 머리 완전 2대 8 가르마야."

무스로 잔뜩 빗어넘긴 2대 8 가르마를 가리킨 순재가 깔깔 웃자 성열도 씨익 웃고있는 순재의 치아에 반짝거리는 교정기를 가리켰다.

"야, 교정기는 어쩔 수 없이 한거고 이 가르마는 엄마가 해주려는거 너가 울며불며 싫다고 하다가 결국에 한 거였잖아."
"…치이."

성열이 쪼그려앉으며 나머지 사진들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순재는 여전히 그 사진을 든 채 미소를 지으며 먼지가 낀 유리를 앞치마 자락으로 슥 닦아냈다.

"성열아."
"응?"
"호주갈래?"
"……."
"호주가서 피아노랑 작곡 다시 배우는 게 낫겠지?"
"누나…."
"누나도 다시 피아노 시작하려구.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연습하면 되겠지, 뭐."
"……."

성열은 말이 없었다. 예전에 우현과 얘기하는 걸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싫어?"

성열이 고갤 돌려 순재를 똑바로 마주했다.

"누나."
"응, 말해."
"호주로 돌아가서… 피아노랑 작곡을 다시 배우는건…정말 설레는 일이야."
"응…."
"근데 난……난 여기가 좋아."

순재가 손을 들어 성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누나, 난 지금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해.  


*


"아, 쌀 것 같아."
"많이 급해?"
"네, 형. 으으."

발을 동동 구르며 몸을 베베 꼬는 명수의 모습에 우현이 속도를 조금 더 높혀 서둘러 몇 미터 앞에 있는 휴게소로 진입했다. 차가 주차장에 멈추기도전에 문을 연 명수는 순식간에 화장실로 사라졌다. 그다지 화장실이 급하지 않은 봉신 씨는 여유롭게 주변 경치를 보며 화장실로 향했고 아침부터 먼거리를 운전한 우현은 허리를 돌려 스트레칭을 하며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내리려던 성규가 뒷좌석에 놓여있던 종이 가방을 발견했다.

"이건 우리 짐 아닌데…. 이게 뭐에요?"
"아, 그걸 깜박했네. 순재가 직접 구운 쿠키에요. 들고 내려요. 주스도 들었으니까."

휴게소 벤치에 우현과 성규가 서로 마주보고 나란히 앉았다. 주스를 따 마시던 우현이 스낵 코너를 두리번거리며 성규에게 물었다.

"그거 맛있던데."
"네? 어떤거요?"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저번에 야유회 가다가 휴게소에서 먹었던 빵이요."
"아아, 델리만쥬요? 잠시만요."

벤치에서 일어난 성규가 어디론가 향하더니 금세 델리만쥬를 사왔다. 우현, 종이 봉투에서 델리만쥬를 하나 꺼내어 입안에 쏙 넣는다. 화장실을 다녀온 봉신 씨와 명수를 데리고 점심 해결을 위해 휴게소 안 식당으로 들어갔다.

"엄마 뭐 먹을래?"
"엄마는 우동이면 돼."
"그럼 명수는?"
"난 그냥 간단하게 스페셜 프리미엄 한정식 세트."
"스페셜 프,프리 뭐? 야, 그게 간단하냐. 암튼 넌 한정식 세트. 팀장님은요? 내가 사는 거니깐 비싼거 먹어도 되요."
"딱히 생각없는데…그냥 김성규씨랑 똑같은거로 시켜요."
"돈까스 괜찮죠?"
"네."
"주문하고 올게요."

성규가 메모지를 들고 주문하는 곳으로 향했다. 우현, 냅킨을 뽑아 봉신 씨와 명수의 앞에 놓고 그 위에 수저를 가지런하게 올려놓는다. 그 모습에 봉신 씨가 입으로 손을 가리며 호호호 웃었다.

"호호호. 친절하시기도해라. 그나저나 성규는 회사에서 잘 하나요? 하도 애가 덤벙거리고 말썽이라…."
"성격도 좋고 일처리도 빠르고 뭐든지 잘 해서 걱정 크게 안 하셔도 됩니다."
"우리형이 성격이 좋다구요? 소심하고 잘 삐쳐서 별로, 아얏! "

명수의 허벅지를 봉신 씨가 꼬집었다.

"호호호. 어머 얘는 참."
"무슨 얘길하길래 그렇게 호호호 거리면서 웃어?"

주문을 마치고 돌아온 성규가 우현의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얘기했어요?"
"아무 얘기도 안 했어요."

우현, 냅킨을 뽑아 성규의 앞에 놓고 수저를 놓아준다. 대기번호를 기다리는데 테이블이 달달달 흔들린다. 젓가락을 입에 문 명수가 다리를 떨고 있는 탓이다. 우현이 계속 신경쓰이는듯 명수의 다리를 힐끗힐끗 쳐다보자 그 시선을 따라 달달달 떨고있는 명수의 다리를 본 성규가 명수의 정강이를 툭 걷어찼다.

"아! 왜!"
"다리 떨지마. 테이블 흔들리잖아."

그제서야 명수의 다리가 멈추고 우현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


점심을 먹고 휴게소에서 나와 한참을 더 달렸다. 순재가 챙겨준 쿠키와 주스는 이미 휴게소에서 다 먹어치워버렸다. 봉신 씨와 명수는 또 잠이 들었고 성규도 눈이 뻐근했지만 자신마저 자면 우현이 심심할 것 같아 계속 우현과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휴게소 편의점에서 산 자일리톨을 꺼낸 성규, 두 알은 자기 입에, 그리고 두 알은 우현의 입에 넣어준다.

"기름값 장난아닐텐데…조금 있다가 드릴게요."
"내가 기름값도 없을까봐요? 걱정마요. 기름값 정도는 충분히 있으니깐. 그 돈 모아서 나중에 좋은 차 사세요."
"차 살 돈이 어딨어요. 갚아야 될 대출금이 얼만데."
"쌍꺼풀할 돈은 어딨어요. 갚아야 될 대출금 있으면서."
"쌍꺼풀 수술 값이 차 한 대 값이에요? 억지로 끼워맞추긴."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차는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서서히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고 완도로 가는 연륙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가 오후 3시였다. 성규가 조수석 창문을 열자 비릿한 바다내음이 한가득 들어왔다.

"완도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지내다가 서울로 이사왔을때 처음 전학 간 학교에서 얼마나 놀림을 당했는지 몰라요."
"왜요?"
"완도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는 바닷마을에서 자랐거든요. 난 사투리 안 쓴다고 생각했는데 뽀송뽀송한 서울 애들이 듣기엔 되게 촌시러웠나봐요. 근데 진짜 지금 생각해도 불공평한게 내가 사투리 쓰니깐 촌시럽다하던 서울 가시내들이 명수가 사투리 쓰니깐 매력적이라고 하더라구요. 나쁜 가시내들. 암튼 그때 유일하게 안 놀리고 나랑 놀아준 애가 동우에요. 그 고깃집하는애."

우현이 간간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성규의 얘기에 집중했다.

"마을이름이 해지개 마을이었어요."
"해지개요?"
"순우리말인데 해가 서쪽 수평선으로 넘어가는걸 뜻하는 말이래요."

우현의 차가 완도로 들어가는 연륙교인 완도대교 위를 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바다내음은 비릿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꽤 상쾌했다. 창틀에 턱을 괸 성규가 두 눈을 감고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18.


성규 말대로 해지개 마을은 정말 후미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때아닌 벤츠의 출연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와 구경을 했다.

"아이고! 봉신 누님! 징허게 반갑소잉."
"자기도 오랜만."
"성규랑 명수도 오랜만이구마."
"안녕하셨어요 아저씨."

밀짚 모자를 쓰고 넉살좋게 생기신 이 아저씨는 봉수 아저씨. 아버지와 가장 친한 마을 동생이자 성규네 가족이 서울로 떠나며 비어버린 집에서 살고 있는 아저씨였다. 더불어, 따로 부탁하지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아버지 묘지를 관리해주신다. 덕분에 아버지 산소는 일년중에 한번이라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일이 절대 없었다.

"아따 근디 즈 뒤에 뽀얀 얼라는 누교?"
"안녕하세요. 남우현이라고 합니다."

우현,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다.

"제가 다니는 회사 팀장님이세요."
"반갑소. 아따, 차 한번 깔쌈해부네."

광이 나는 벤츠의 위엄은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트렁크에서 박스를 꺼내든 명수가 먼저 앞장서 걸어갔다. 봉수아저씨는 봉신 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그 뒤를 따랐고 맨 뒤를 우현과 성규가 따라걸었다.

"경치가 참 좋네요."

멀리 바다가 보이고 알록달록한 집 지붕 색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길가의 돌담 사이로 들꽃이 피어있었고 귀여운 강아지는 목줄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끔 머리가 복잡할때면 혼자 오기도 했어요."
"여기까지 혼자요?"
"네. 여기 살때 마을 애들이라고는 나랑 명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다들 우리 성규왔냐~하면서 반겨주세요."

우현과 성규는 태생부터 자라온 환경까지 달랐다. 우현은 유치원을 다닐때부터 전용 기사가 데리러 올 정도로 남다르게 자랐다. 남들과는 다른 행보를 걸었었고 주위 사람들의 대우도 달랐다. 하지만 성규는 정말 자유롭게 자랐다. 여름에 더우면 명수와 손잡고 바다로 나가 팬티만 입은 채 물놀이를 하기도 했고 온 마을 집이 자신의 집인것처럼 심심하면 불쑥 들어가 어른들과 말장난을 하며 놀기도 했었다. 성규네가 머나먼 서울로 이사를 결정하고 짐을 옮기던 이삿날. 온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눈물을 콕콕 찍으며 직접 잡은 굴비, 직접 기른 채소, 나무를 깎아만든 장식품 등을 건네며 눈물의 배웅을 할 정도로 유별난 사이였다.

"다 왔다."

산이라기보단 바다와 마을이 훤히 보이는 언덕 가까운 곳에 아버지의 산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박스를 내려놓은 명수가 돗자리를 꺼내 봉수 아저씨와 함께 반듯하게 펼쳤다. 성규는 봉신 씨를 도와서 전 날 밤에 미리 랩으로 포장해놓은 음식 접시와 과일이 올려진 접시를 내려놓고 아버지가 살아생전 좋아하던 보리 막걸리를 꺼내어 올렸다. 제사 준비가 되자 우현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봉신 씨, 성규, 명수, 그리고 밀짚 모자를 벗어 내려놓은 봉수 아저씨. 잠시 자세를 고쳐잡고 곧 산소를 향해 두 번 절을 한다. 


*


"엄만 어떻게 올 때마다 울어?"

눈물을 훌쩍이는 봉신 씨의 모습에 명수가 깐족깐족거렸다. 아버지가 떠난지 10년이 지났고 기일은 물론, 매년 명절마다 산소에 찾아온터라 성규와 명수는 조금 익숙해졌지만 봉신 씨는 올때마다 이렇게 훌쩍훌쩍거렸다. 명수의 팔뚝을 찰싹 때리는 봉신 씨를 봉수 아저씨와 성규가 뒤에서 지켜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연례 행사에요."

성규의 말에 뒷짐지고 발에 채이는 꽃들을 툭툭 건드리며 걷던 우현이 '뭐가요?'하고 물었다.

"우리 엄마가 자존심은 진짜 세거든요. 우리 앞에선 눈물 잘 안 보이다가 아부지 보러 왔을때 저렇게 일년동안 울 거 다 빼놓고 가요."
"김성규씨는 안 웁니까?"
"처음엔 나랑 명수도 울었죠. 근데 이젠 안 울어요. 명수는 그렇다치고 나까지 울면 아부지가 걱정할 것 같아서요. 매일 저렇게 우는구나,하고."

우현, 고갤 돌려 무덤덤한 성규를 쳐다본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성규의 갈색톤 머리가 산들거렸다. 언덕같은 산에서 내려오니 벌써 오후 5시다. 지금 출발해도 밤 12시, 또는 새벽 1시에 서울에 도착하기때문에 서둘러야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성규네가 얼른 차에 올라탔다.

"어……왜 이러지."
"왜요? 뭐 문제있어요?"
"시동이 안 걸리네요."

부르르르릉 하다가 시동이 탁 걸려야하는데 부르르르르르르까지만 들리고 정작 시동은 걸리지가 않는다. 차 키를 뽑고 다시 꽂아 돌리자 이번엔 좀 더 힘있는 부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본네트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한다. 깜짝 놀란 우현과 성규네가 얼른 차에서 내려 본네트 앞으로 향했다.

"이,이거 왜 이래요?"

인상을 쓴 우현이 뜨거운 본네트를 잡아 올리자 뭉쳐있던 연기가 한움큼 뿜어져나왔다. 콜록콜록 기침을 한 우현이 입술을 깨물며 본네트 안을 두리번거렸다. 심상치않다.

"고장난갑소?"

봉수 아저씨가 슬쩍 본네트 안을 보며 말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우현이 핸드폰을 꺼내 서비스 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외제차인지라 일반 카센타에선 부품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안내원 목소리가 들리고 가장 가까운 서비스 센터를 물었다. 다행히 5시간 거리에 서비스 센터가 있긴 했다. 다만 마을이 하도 구석진 곳에 있어서 제대로 찾아올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지만. 일단 확실한 건, 오늘 서울로 돌아가긴 글렀단 점이다.

"서비스 센터에서 뭐래요?"
"적어도 오려면 5시간은 걸린데요. 와도 문제인게 부품이 외국꺼라서 고치는데 하루는 걸릴 것 같은데…."
"예? 그럼 우리 오늘 서울로 못 가는 거에요?"

명수의 말에 우현이 '응'하고 짧게 대답한 뒤 본네트 뚜껑을 닫았다. 하필 왜 이 머나먼 완도까지와서 말썽을 피우는 건지. 벤츠 앞 바퀴를 우현이 발로 툭 걷어찼다.

"어짜스까나….일단 해도 지고 허는디 집으로 갈란가?"

봉수 아저씨의 물음에 성규가 곤란한 표정으로 우현을 쳐다봤다. 어쩔 수 있나. 일단 하룻밤은 묵어야하는데.


*


성규네와 우현이 넓직한 마당이 있는 집으로 들어선다. 성규와 명수가 타고 놀았던 자전거, 아버지가 쓰던 농기구들을 비롯해 성규네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곳곳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어머, 이 의자를 아직도 쓰고 있네!"
"우와. 여기 나랑 형이 낙서한 것도 그대로야."

정말 모든게 그대로였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봉수 아저씨 아내인 복희 아줌마가 문을 열고 나와 반갑게 성규네를 맞이해준다. 전라도에서 자란 봉수 아저씨와는 달리 그래도 시내에서 자라 시집을 온 복희 아줌마는 표준어에 가까운 사투리를 썼다.

"봉신 언니! 오랜만이야! 성규랑 명수도 오랜만이네!"
"차가 고장나서 하루 신세 좀 져야겠다. 미안해서어째…."
"어휴, 미안하긴! 맨날 하루만에 가서 얼마나 섭섭했는데…. 근데 뒤에 저 총각은 누구래?"
"안녕하세요. 남우현이라고 합니다."
"저희 회사 팀장님이에요."

어머, 되게 잘 생겼다. 복희 아줌마가 성규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현관문을 열자, 집 안의 벽지며 장판이 모두 금방 도배한 것처럼 깔끔했다.

"도배장판 새로 했어?"
"작년 태풍때 오질나게 비 맞더니 곰팡이가 나더라구. 올해 봄에 새로 싹 했지. 가구도 바꾸고."
"잘 꾸며놨네."
"집 구조가 좋은 덕분이지. 며칠전에 방 두 개 비는거 정리한다고 깨끗하게 치워놨는데. 잘 됐다."

봉신 씨와 명수가 같은 방을 쓰고 성규와 우현이 같은 방을 쓰기로 결정했다. 우현과 같은 방을 쓴다는게 좀 걸리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우현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괜찮아요?"

방으로 들어온 성규가 넥타이를 풀어 옷걸이에 걸고 힐끗 우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뭐가요?"
"나 때문에 체류됐잖아요."
"차 때문이죠. 미리 점검을 해놨어야했는데."
"그래도 미안해요. 피곤하게되서."
"괜찮아요. 신경쓰지마요. 나도 이 정도 싸가진 있으니까."

우현의 말에 살풋 웃으며 정장 마이를 벗어 옷걸이에 마저 걸었다.


*


꽃들이 제법 활짝 핀 여리 꽃밭 앞에 쭈그려 앉아있던 성열이 성규네 초인종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옆집에 아무도 없는데…. 작게 중얼거리며 울타리 너머로 내다보았다. 그 여자가 서있었다. 전에 명수에게 찝적댔던 미희라는 여자. 초인종을 눌러도 안에서 기척이 없자 이번엔 문을 철컹철컹 두드려댄다. 손에 선물상자를 들고 있는 걸 보니, 명수에게 전해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정말 아무도 없나…. 명수야! 나야, 미희! 성규오빠!"

대문을 열고 나온 성열이 쉴새없이 초인종을 눌러대는 미희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명수 집에 없는데…."
"네? 왜요?"
"…몰라요."
"아씨, 이거 전해주려고 했는데…."
"……괜찮으시면 제가 대신 전해드릴게요."
"정말요? 아, 다행이다. 꼭 명수 전해주셔야해요?"
"네…."

미희가 신신당부를 한 뒤 아쉬운 표정으로 명수네 집을 한번 둘러보고는 오르막길 너머로 사라졌다. 미희가 사라진 걸 확인한 성열이 선물 상자를 손에 들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조심히 뚜껑을 열었다.

"……."

하트모양 편지와 남성브랜드 스카프가 들어있었다. 편지에는 '사랑하는 명수야. 스카프 선물의 의미는 영원히 사랑해요,라는 의미래. 우리도 지구가 멸망하기전까지, 아니 지구가 멸망해도 영원히 사랑해보자. 사랑해♡'라는 별 거지깽깽이같은 내용이 쓰여있었다. 성열이 크게 숨을 내뱉었다. 괜히 심술이 났다. 이걸 명수에게 주면, 명수는 이 스카프를 과연 하고 다닐까? 대문앞에 서서 생각에 잠긴 성열의 앞에 동네 강아지가 쫄랑쫄랑거리며 나타났다. 성열, 강아지와 손수건을 번갈아 보다가 곧 강아지를 향해 손짓을 한다. 사람을 무서워하지않는 강아지인지 몇 번 손짓을 했을뿐인데 금세 다가와 성열의 신발코에 콧잔등을 부비적거린다.

"…날씨 추워지니깐…감기 조심해 멍멍아."

강아지 목에 스카프를 앙증맞게 묶어준 성열이 강아지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었다.


*


오피스텔 근처 헬스장.
하얀 런닝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호원, 헬스기계위에 앉아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고 있다. 훅훅 숨소리를 내며 10세트를 완성한 호원이 잠시 헬스기계에서 내려와 물을 들이켰다. 우락부락하지않고 적당히 근육 잡힌 몸이 하얀 런닝에 찰싹 달라붙어 보는 여자들로 하여금 군침과 위산이 뿜어져나오게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호원씨."
"네. 안녕하세요."

가슴을 훤히 드러낸 여자가 헤어밴드를 치켜올리며 말을 걸어왔다.

"오늘 끝나고 시간있으세요?"
"네."
"아, 잘 됐다. 안 그래도 같이 영화 볼 사람이 없었는데 호원씨랑 보면 되겠네요."
"전 같이 영화 볼 사람 있습니다."
"네?"
"장동우라고 암튼 같이 영화 볼 사람있다구요. 그리고 자꾸 다가오시면 땀꾸렁내나요…."

진심어린 눈빛으로 얼굴을 뒤로 빼고 냄새가 난다는듯이 손부채질을 한 호원이 자신의 목에 걸린 하얀 타올로 땀을 닦아내며 샤워실로 향했다. 혼자 남은 그녀, 당황과 황당이 섞인 얼굴로 호원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자신의 옷 냄새를 킁킁 맡는다.


*


저녁은 마당에 장작불을 피우고 제철인 전어와 삼겹살, 그리고 호박고구마까지 정말 원없이 구워먹었다. 새 칫솔로 양치를 하고 세수까진 마친 성규가 수건으로 얼굴을 톡톡 닦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우현은 순재와 통화를 마치고 답답한 가디건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있었다. 봉수 아저씨가 나무 보일러에 장작을 너무 많이 넣은 탓에 방안은 땀이 날 정도로 후끈후끈했다.

"다 씻었어요?"
"네. 칫솔은 화장실 선반위에 새 거 많으니깐 하나 뜯어서 쓰면 되요. 여기 수건이요."

하얀 와이셔츠 단추를 세 개 정도 푼 우현, 수건을 받아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아이고, 어쩐댜. 봉신 누님이랑 명수주고 나니껜 까는 이불이랑 베게가 하나 밖에 안 남았는디…."
"아…. 괜찮아요. 방안 따뜻하니깐."
"새벽되면 쪼까 추울텐디…. 추우면 말하드라고."
"네. 그럼 주무세요, 아저씨."

봉수 아저씨에게 이불과 베게를 받아온 성규가 바닥에 이부자리를 폈다. 베게 대신 덮는 이불을 접어 자신이 누울자리에 놓고 후끈한 방안 공기에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와이셔츠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반팔 차림이었지만 뜨거운건 여전했다. 양치와 세안을 마치고 온 우현이 바닥에 깔려진 조그마한 이불을 보며 물었다.

"이불이 하나 뿐이에요?"
"명수랑 엄마가 두 개씩 가져간 모양이에요. 오늘만 이렇게 자요."
"덮는 이불은 없어요?"
"이렇게 뜨거운데 이불 덮고 싶어요?"
"하긴."

수건을 의자에 걸쳐놓은 우현이 성규의 옆자리에 벌러덩 누웠다. 내일 아침 10시에 서비스센터에서 직원이 온댔으니 적어도 8시에는 일어나야했다. 불을 끄자 밝은 달빛이 방안을 훤히 비췄다.

"…후우…."
"……."
"…아! 뜨거워죽겠네."

우현이 인상을 팍 쓰며 상체를 일으킨다. 더워서 잠이 안 올 지경이다. 와이셔츠 단추를 모두 푼 우현이 와이셔츠를 홱 벗어버리려다가 성규를 보곤 물었다.

"더워서 그러는데 벗어도 되죠?"
"…마,맘대로 하세요."

성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현이 와이셔츠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하얀 런닝과 함께 우현의 구릿빛 팔뚝이 드러났다. 성규, 왠지 민망하다. 좁은 이불탓에 어깨가 살짝살짝 닿았다.


*

 

 


뜨거운 방바닥때문에 자면서도 한참을 뒤척거린 성규, 부스스 눈을 떴다가 창밖에 떠있는 별을 보고는 떴던 눈을 도로 감았다. 근데 뭔가 좀 허전한 느낌이 든다.

"…?…."

옆자리가 휑하니 비어있었다. 옷걸이에 걸려있던 검정 가디건이 보이질않았다. 화장실에 갔나? 화장실가면서 가디건을 가지고 가진 않았을텐데. 까치가 집을 지은 머리를 매만지며 방문을 열고 나왔다. 집안에는 봉수 아저씨 코고는 소리만 우렁차게 들려왔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살짝 열자 마당에 피워진 장작불앞에 앉아있는 우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우현,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다.

"추워요. 나오려면 옷 입고 나와요."
"괜찮아요. 왜 나와있어요?"
"계속 자다간 군고구마가 될 것 같아서요. 김성규씨는 잘만 자는 것 같더니만 왜 나왔어요?"
"계속 자다간 군밤이 될 것 같아서죠."

우현의 옆자리에 앉은 성규,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장작불을 멍하니 쳐다본다. 뽀얀 성규의 얼굴이 장작불 열기에 불그스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우현, 그런 성규를 빤히 보는데 순간적으로 이쁘단 생각이 들어온다. 얼른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별이 참 밝네요."
"서울에선 못 볼 별들이에요."

그러게요…. 정말 이렇게 무수히 많은 별들이 떠있는 하늘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아무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장작불을 쐬고 있자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다. 그때 타닥! 소리와 함께 장작불이 튀겼다.

"앗 따거!"

성규가 깜짝 놀라며 불똥이 튄 뺨을 감싸쥐었다. 덩달아 놀란 우현, 성규의 얼굴을 부여잡고 가까이 끌고와 살핀다.

"손 치워봐요. 많이 데었나보게."
"아야…."

우현이 모기 물린 것처럼 빨개진 성규의 뺨에 호호 바람을 불었다. 정말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성규의 뺨을 살피는 우현도, 그리고 우현에게 얼굴이 붙잡힌 성규도 묘한 분위기를 느끼곤 잠시 멈칫했다.

"……."
"……."

정말 숨막히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우현의 눈은 깊고 또렷했다.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에 성규는 타들어가는 입술을 혀로 살짝 축였다. 가까이 다가온 우현을 밀쳐내야하는데 몸이 바싹 굳어선 꼼짝할 수가 없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쪽팔리게 왜 가슴이 뛰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여자도 아닌 이 남우현이라는 남정네한테! 분위기 탓인가? 지금 마주한 우현의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일 정도로 멋졌다. 짧디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소용돌이치며 복잡한 성규와는 달리, 우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릿속엔 그저 성규의 홍조 띈 뺨과 새초롬한 입술, 그리고 이리저리 뻗친 머리가 굉장히 사랑스러워보인다는 생각만 들었다. 촉촉한 성규의 입술이 눈에 들어오고 순간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우현은 성규의 입술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아주 천천히, 정말 느리게 다가가고 있었다. 스물스물 다가오는 우현의 입술, 성규는 심장이 폭발할 것만 같다. 그때, 우현의 정신이 확 돌아왔다.

"…괜찮네요. 별로 안 데었어요."
"……."

얼굴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은 우현, 장작불로 고개를 홱 돌린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성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먼저 들어갈게요."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우현은 마른 세수를 했다. 성규에게 가슴이 떨렸었다.

"…하아."

현관문을 닫고 문에 기대선 성규, 휘모리 장단으로 거세게 뛰고 있는 심장을 손으로 누른다.

"얘가 왜 이러지…."


*


새벽이 되고 장작 열기가 점차 식어가면서 방안이 조금 썰렁해졌다.

"…으…추워어…."

추위에 몸을 떤 성규가 따뜻한 우현의 팔을 베고 꼼지락거리며 우현의 품으로 파고든다. 런닝만 입고 자던 우현, 잠결에 따뜻하고 기분좋게 보들보들거리는 성규를 쿠션처럼 꼭 끌어안았다.


*


다음 날 아침.
우현과 성규, 서로 꼭 끌어안은채 세상 모르게 잠을 자고 있다. 치이이이익, 부엌에서 들려오는 밥솥 김 빠지는 소리에 성규가 먼저 눈을 떴다. 자신이 베고 있는 우현의 팔에 깜짝 놀라고 바로 코앞에 있는 우현의 도톰한 입술에 또 한번 깜짝 놀란 성규가 우현의 품에서 파다닥 몸을 일으켰다. 왠지 이불없이 따뜻해서 이상하다했더니만. 성규, 우현이 깰까싶어 조용히 와이셔츠를 걸치고 방을 나간다.

"…아…."

성규가 나가자마자 눈을 뜬 우현, 저릿저릿한 팔을 주무른다. 곤히 잠든 성규가 깰까봐 차마 떨쳐내지못하고 계속 팔을 빌려준 탓이다.


*


렉카차는 10시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해있었다. 든든한 아침밥을 챙겨준 봉수 아저씨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렉카차와 연결된 우현의 차에 올라탔다. 차가 좀 기우뚱하긴했지만 나름 편안했다. 봉신 씨가 우현에게 '아휴, 팀장님 고생하셔서 어떡하면 좋아'하고 걱정스런 말투로 말하자 괜찮다며 웃어준 우현이 운전석에 머리를 기대고 두 눈을 감았다.

"……."
"……."

우현과 성규. 서로가 신경쓰인다.


*


서울에 올라오마자마 우현은 벤츠를 서비스 센터에 바로 맡겼다. 내일 당장 출근인데 서비스 센터 직원 말로는 하루정도 시간이 걸린단다. 버스타는 건 질색인데…. 책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서재 안. 회사에서 가져온 서류들을 넘겨보며 꼼꼼히 살피는데 성규의 뽀얀 얼굴이 서류위에 천천히 오버랩되었다가 순식간에 슉 사라진다.

"…큼."

잠을 덜 잤나. 손에서 서류를 놓고 의자를 뱅그르르 돌린 우현이 두 눈을 살살 어루만졌다.

"피곤하면 좀 쉬었다하지."

순재가 과일 접시와 찻잔을 내려놓으며 걱정스런 말투로 말했다. 아냐, 괜찮아. 향긋한 홍차향기가 서재안을 은은하게 채웠다.

"성열이는 뭐해?"
"다락방에서 피아노 치고 있어."

자연스러운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던 우현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피,피아노?

"그래, 피아노. 제대로 들었으면서."
"……."

우현의 조금 슬픈 눈으로 자신의 손을 쳐다보는걸 느낀 순재가 조용히 미소지으며 손을 어루만졌다.

"나 괜찮아, 정말."
"…미안해."
"내가 제일 듣기싫어하는 말인 거 알지? 이번엔 쿠키말고 케이크를 만들어보려고."

성공해야할텐데.  쟁반을 들고 일어선 순재가 웃으면서 서재의 문을 닫고 주방으로 향했다.

"…우윽."

오븐을 열려던 순재가 갑자기 밀려오는 역겨운 느낌에 서둘러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먹은게 별로 없어 멀건 위산만 잔뜩 토해낸 순재가 변기 물을 내리고 맑은 물로 입을 헹궈냈다.

"……."

요즘 들어 잠도 부쩍 많아지고 구토 증세도 많아졌다. 그저 신경성 위염이 도진 것이라고 생각한 순재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화장실에서 나와 오븐을 활짝 열었다.
 

*


봉신 씨와 명수는 집에 오자마자 바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지만 성규는 자지않고 마당으로 나와 평상에 베게를 베고 드러누워 맑은 하늘만 멀뚱히 바라보고 있다.

"…왜 잠이 안 오지…."

그야 물론 어젯밤에 코 앞까지 가까이 다가왔던 남우현의 얼굴이 자꾸 생각나니깐. 왜 자꾸 가슴이 두근거리지. 휴우. 멍청아, 그건 바로 남우현이 자꾸 생각나기,

"…아아! 짜증나 짜증나!"

발꿈치로 평상을 마구 두드려댔다. 베게에 얼굴을 푹 묻었다. 짜증나죽겠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그냥 버스말고 택시타자니깐요."
"미쳤어요? 택시타면 돈이 얼만데."
"내가 낸다구요. 그러니까 그냥 잔말말고 택시 타자구요."
"도대체 왜 버스는 안 타는 건데요?"
"사고때문에 그래요."

우현의 말에 먼저 앞서가던 성규가 걷던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 우현을 쳐다봤다. 멈춰서있는 우현의 모습이 조금은 측은하게 느껴진 성규가 가방을 고쳐잡으며 다가와 말했다.

"그럼 그렇게 미리 말을 하던가…."

결국 버스가 아닌 택시를 타고 출근을 한 결과로 10만원이라는 거금의 택시비를 지출했다. 말도 안 되는 바가지를 씌운다며 택시기사와 한바탕해재끼려는 성규를 우현이 간신히 끌어내렸다.
"10만원이 말이 되요? 기름값도 10만원이 안 나올 거린데! 어어! 그냥 가잖아요! 에이씨!"

유유히 회사를 빠져나가는 택시를 보며 성규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만 좀 해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그냥 팁 준거라고 생각해요."
"팁? 허이구, 참나. 21세기 간디 납시셨네."
"성규씨!"
"안녕하세요 호 대리님."
"왜 둘 다 택시에서 내려요?"

주차장에 들어서며 두 사람이 택시에서 내리는 걸 본 호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차가 고장나서. 짧게 대답한 우현이 먼저 회사 안으로 들어간다.

"주말에 잘 다녀왔어요?"
"네? 어딜요?"
"전라도 완도 다녀왔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어요?"
"동우씨, 아니 동우형이랑 문자하다가 알았어요."
"아아. 아뇨. 잘 못 다녀왔어요."
"왜요?"
"팀장님 차가 고장나서 하루 묵었다가 왔거든요."
"아, 우현이 차 완도가서 고장난 거에요?"
"네. 근데 동우랑 많이 친해졌나봐요. 저랑도 자주 안 하는 문자를 하, 윽!"
"하하하하. 아녜요. 하하하하."

입에 귀에 걸린 호원이 호탕하게 웃으며 성규의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


출근한 지 한참이 지나도록 우현은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후우."

모두 성규때문이었다. 서류를 넘기다가 힐끗, 컴퓨터로 작업을 하다가 또 한번 힐끗. 자기도 모르게 자꾸 성규를 쳐다보게 된다. 깊은 선산에서 명상중인 스님 저리가라할 정도로 평소 뛰어난 집중력으로 일을 하던 우현이 오늘은 굉장히 더딘 속도로 일처리를 하고 있다. 메신저 창을 띄운 우현, 성규에게 [고개 좀 숙이고 일하세요 얼굴 안 보이게]하고 쪽지를 보낸다. 우현의 쪽지를 확인한 건지 성규가 자신의 쪽을 홱 쳐다보는데 왜 이리 그 시선이 반가운지 모르겠다.

[갑자기 왜 시비에요 - 김성규 -]
[그냥 숙이라면 숙여요 집중안되니까 - 남우현 -]
[집중안되는게 왜 나때문이에요? - 김성규 -]
[꼬치꼬치 묻지 좀 말아요 - 남우현 -]
[내가 언제 닭꼬치 떡꼬치 물어봤어요? 암튼 난 고개 안 숙일꺼니까 팀장님이나 숙여요 - 김성규 - ]

마지막 답장을 보낸 성규가 상태를 '바쁨'으로 바꿔놓았다. 자기도 모르게 즐겁게 웃던 우현, 얼른 주위를 둘러보곤 정색을 하며 메신저 창을 닫았다. 이 이상징후는 뭘까. 진짜 큰일이다.


*


월요일은 장동牛 고깃집의 휴무날이다. 동우는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가게 영업을 하며 쌓인 피로를 월요일에 몰아서 풀었다. 일요일 오후 11시에 잠들어 월요일 오후 9시에 일어난 적도 많았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일찍 일어난 편이다. 오후 6시에 일어났으니 말이다. 샤워를 하고 나와 노란 머리를 말리며 소파에 앉은 동우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온통 호원과 주고받은 카카오톡들뿐이다. 호원의 드립을 다시 올려 읽던 동우가 '우하하학'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참 착하고 재밌는 동생이다. 배터리 충전기에 스마트폰을 꽂아놓고 부엌으로 가 저녁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태양 빌라는 넓지도,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혼자 살기에 딱 알맞은 평수로, 싱글로 지내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빌라였다.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동우는 벽지며 가구들을 모두 알록달록하고 포근한 색깔로만 꾸며놓았다. 동우 집에 자주 놀러오는 성규는 올때마다 선반에 놓여진 많은 장난감과 피규어들을 보며 애기들다니는 유치원같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놀러올때마다 그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아 그리 싫지는 않는 듯해 보였다.


*

 
"꺄악!"
"조심해요."

회사 입구 계단을 내려가던 여직원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듯 허우적거리자 우현이 얼른 뒤에서 손목을 붙잡아당겨준다.

"가,감사합니다."
"힐이 너무 높은 것 같은데 좀 낮은 걸 신어요."

여직원과 우현을 번갈아 쳐다본 성규, 묘하게 질투가 나려하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곤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두드린다. 자해하는 성규의 손을 우현이 홱 붙들었다.

"왜 자해를 하고 그래요?"
"몰라도 되요."

입술이 댓발 나온 성규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우현아, 너 차 어딨어? 호원이 묻자 아마 집앞에,하고 대답한 우현이 자연스럽게 호원의 차로 향했다.

"오늘만 태워줘라."
"그래. 뭐 어려운 일도 아니니깐. 성규씨도 얼른 타요."
"네."

성규의 가방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잠시만요. 차에 타려던 성규가 액정에 뜬 동우의 이름을 확인하곤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어, 장동우. 왜?"

동우라는 말에 호원의 귀가 쫑긋 거렸다.

[흐어어엉… 어떡하면 좋아, 성규야아…]
"여보세요? 너 장동우 맞아? 너 왜 울어?"

동우가 운다는 말에 운전석에 타있던 호원이 벌컥 문을 열고 나와 전화 내용에 귀를 기울인다.

[흐윽, 성규야아…흐아앙!]
"울지만 말고 차근차근 얘기해봐, 동우야. 무슨 일인데?"
[내 고깃집…흐어어어엉!]
"니 고깃집이 왜?"
[흐윽…흐윽…난 망했어,이제….]
"무슨 소리야. 그만 울고 제대로 말 좀 해봐. 너가 왜 망했어? 도둑이라도 든거야?"
[가게에 불이 나서 흐윽, 모조리 불탔어… 흐어어엉!]
"뭐어?!"
[흐아아앙, 난 몰라…어떡해애…]

동우의 마지막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뭐해요! 빨리 안타고!"
"네,네?"
"가게 가봐야할 거 아녜요!"
"아, 네!"

행동은 호원이 빨랐다. 운전석에 앉아 재촉하는 호원때문에 더 다급해진 성규가 서둘러 조수석에 타 벨트를 맸고 얼떨떨한 우현도 얼른 뒷좌석에 올라탔다. 뒷좌석 문이 닫히자마자 호원이 무서운 속도로 동우의 고깃집을 향해 질주했다. 무슨 일

인지 도통 감이 안오는 우현이 불안한듯이 손톱을 뜯고 있는 성규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동우 가게에 불이 났나봐요. 말로는 모조리 탔다는데…아, 어쩌면 좋아…."
"…불 났으면 끄면 되잖아요."
"그 고깃집이 그냥 고깃집인 것 같죠? 동우가 뼈빠지게 모은 돈으로 차린 거에요, 그 고깃집. 동우가 가진 전부이자 지 자식처럼 아끼고 애지중지하는 가게라구요."
"성규씨, 여기서 좌회전이었죠?"
"네."

호원이 핸들을 왼쪽으로 거칠게 홱 꺾었다. 덕분에 뒷좌석 가운데에 앉아있던 우현이 오른쪽으로 데구르르 굴러 창문에 머리를 퍽, 박았다.

"아! 어떡해…."

성규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맺혔다. 저기 연기…. 성규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창문 너머의 검은 연기를 가리켰다. 호원의 인상도 순식간에 굳어졌다. 소방차 세 대가 불을 진압하고 있었다. 옆 건물로 번져가는 불길은 가까스로 꺼졌지만 동우

의 가게에선 여전히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불이 동우의 가게를 와그작와그작 씹어대는 것 같았다. 급히 차를 세우고 호원과 성규가 서둘러 동우를 찾아 두리번 거렸다.

"동우야!"

두 손을 물론, 얼굴에 온통 잿가루가 묻은 동우가 엉엉 울며 타들어가는 고깃집 바로 앞에 앉아있었다. 얼마나 급히 달려왔길래 이 쌀쌀한 날씨에 반팔 차림이다. 신발도 짝짝이고 짝짝이 신발의 한 짝마저 벗겨져선 엉뚱한 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성규를 끌어안은 동우가 더욱 서럽게 울어댔다.

"흐어엉…어떡해, 성규야아…."
"으…! 뒤로 좀 물러나요! 너무 가까이에 있어요!"

몇 초밖에 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느껴지는 열기에 끌어안고 있는 동우와 성규를 우현이 멀리 물러나게 했다. 신발을 줏어온 호원이 묵묵히 동우의 발에 신발을 신기고 정장 마이를 벗어 동우에게 덮어주었다. 괜찮아, 울

지마, 울지마. 동우의 등을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는 성규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아!"

사람들의 탄식 소리와 함께 고깃집 간판과 벽이 불속으로 떨어졌다. 그제서야 불길이 조금씩 사그라들기시작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19.


건물 벽과 간판이 떨어지자, 불은 금세 진압됐다. 아직까지 작은 불씨가 피어있는 가게안으로 뛰어들어가려는 동우를 간신히 붙들어 호원의 차에 태웠다. 얼떨결에 동우의 집에 오게된 호원과 우현. 우현은 아기자기한 집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했고 호원은 집 구경할 새도 없이 화장실을 찾아들어가더니 수건에 물을 적셔와 재가 묻은 동우의 얼굴을 조심히 닦았다. 성규는 흐느끼는 동우를 연신 토닥거리며 진정시켰다.

"그만 울어. 보험도 들어놨고 아무도 안 다쳤어. 가게 다시 고치면 돼. 그러니깐 울지마, 동우야."
"흐윽…."
"휴우. 일단 씻고 푹 자자."

동우를 일으켜세워 옷가지와 함께 욕실로 들여보낸 성규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목 마른데. 물 좀 줘요. 주스도 좋고. "

우현의 말에 성규가 '지금 이 상황에 그 말이 나와요?'하고 우현을 흘겼다. 마를 수도 있지…. 소파에 놓인 기린 쿠션을 끌어안으며 우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잠시후, 샤워를 마친 동우가 코와 눈가가 빨개진 채로 욕실에서 나왔다. 동우를 방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잘 덮어준 성규가 토닥거려주며 옆으로 줄줄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냈다.

"흐윽…가게 어떡해…."
"어떡하긴 어떡해. 너 가게차리면서 온갖 보험이란 보험은 죄다 들어놨잖아. 화재보험에서 알아서 다 처리해줄거야. 보험비로 가게 다시 세우면 되고. 그러니까 걱정하지마."
"흡…보험비 얼마 안 나온단 말야…흐앙, 난 몰라…."

베게에 얼굴을 묻은 동우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흐느꼈다. 그 가게에 동우에게 어떤 가게인지 잘 아는 성규는 그저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또 울어요?"
"네…휴우."

방문을 닫고 나온 성규, 부엌으로 가 컵을 꺼내 냉장고에 있던 주스를 따라 우현과 호원에게 건넨다.

"목 마르다면서요. 마셔요."

정말 목이 많이 말랐었는지 성규가 건네주는 주스를 꿀꺽꿀꺽 원샷으로 들이마신 우현이 입을 슥 닦으며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동우, 내일 눈뜨자마자 또 울텐데 혼자 두고 가기가 쉽지않다. 조용히 집을 나와 호원의 차에 올라타면서도 성규는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다.


*


"들어가세요 호 대리님. 오늘 태워주셔서 감사했어요."
"네. 내일 봐요."

우현과 성규를 집앞에서 내려준 호원이 유유히 동네를 벗어났다. 성규는 연신 소매로 눈가를 훔쳐내며 훌쩍훌쩍 울고 있다. 그런 성규가 신경쓰이는 우현이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깟 가게쯤이야 다시 세우면 되는데 왜,"

그러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성규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말이 딱 끊겨졌다. 성규, 도끼눈이 되어선 또박또박 힘주어 말한다.

"그깟 가게쯤이라고 했어요, 방금?"
"아니 그게 내 말은,"
"팀장님한텐 그깟 가게쯤이겠죠."

톡 떨어지려는 눈물을 얼른 소매로 훔친 성규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끼고 또 아껴가면서 지 돈으로 직접 차린 가게가 순식간에 모조리 불탔어요. 걔 전 재산이 날라간거나 마찬가지라구요."
"……."
"말하기전에 제발 한번 생각해보고 말해요. 들어갈게요."

마지막으로 눈물을 훔친 성규가 대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혼자 남은 우현, 자신이 참 한심스럽다.


*


집으로 돌아온 호원은 샤워를 하고 나와 TV를 켜고 시끄럽게 떠드는 예능 프로를 보고있으면서도 생각은 온통 동우에게 가있었다. 지금도 계속 울고 있을지, 아니면 울다지쳐 잠이 들었을지….


*

 

 

 

 

 

다음날 아침.
항상 우현과 성규의 티격태격으로 떠들썩하던 차안이 오늘은 라디오 소리만 들린다. 성규는 조수석에 앉아 말없이 핸드폰만 주물럭댔고 우현은 그런 성규의 눈치를 연신 살피고 있었다. 어제 자신이 한 말실수때문이 분명하다.

"어제, 그건 말실수였어요."

결국 한참 고민하던 우현이 먼저 사과를 했다. 괜찮아요. 성규가 핸드폰 폴더를 닫으며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기운 좀 차려요. 친구일은 안타깝게 됐지만 그렇다고 김성규씨까지 축 처지면 어떡해요."
"휴우…. 알겠어요."

그래도 영 기운이 나질 않는다. 뜨거운 물에 푹 삶은 시금치처럼 흐물흐물해서는 기운이 하나도 없는 성규의 모습에 우현은 속이 상했다. 성규는 청량한 탄산수처럼 톡톡 튀겨야 제 맛인데….


*


가게 여는 시간에 자동으로 번쩍 눈이 떠진 동우는 세수와 양치를 하고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어제 자신의 차는 가게앞에 세워두고 왔기때문에 택시를 잡아타야했다. 차키와 지갑을 들고 신발을 신으려는데 아침 일찍부터 띵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누구세요. 잠긴 목소리로 말하며 문을 열었다. 호원이다. 커다란 과일바구니를 끌어안고 회사 출근길인지 깔끔한 정장을 입은 채였다.

"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형 걱정되서요."
"나 괜찮아."

동우가 애써 밝게 웃어보였다. 정말 애써서 웃는 게 다 보일 정도로 측은한 웃음에 호원은 쓴 침을 삼키고 과일 바구니를 동우의 품에 안겼다.

"이거 받아요."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다 잘 될 거에요."
"고마워, 호원아…. 아, 잠깐 들어왔다갈래?"
"그러고싶은데 출근해야해서요.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꼭 말해요."
"응. 고마워…."

동우의 손을 꼭 붙든 호원이 잠시 머뭇거리다 동우를 한번 꽉 끌어안고는 쿠당탕탕소리를 내며 계단을 뛰어내려간다. 왜 저러지? 호원의 찐한 마음을 눈곱만치도 알리없는 동우는 그저 머리만 몇 번 긁적거리고 과일바구니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


"…하아…."

날이 밝은 상태에서의 가게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처참했다. 두 손을 늘어트린채 한참을 재가 된 가게앞에 서있던 동우가 훌입문도 없이 벽 전체가 허물어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새까맣게 그을린 수저가 간간히 보이고 뼈대만 남아있는 테이블이 곳곳에 쓰러져있었다. 어디하나 다시 쓸 수 있는게 하나도 없다. 눈앞이 깜깜하다.

"헉! 사,사장님! 가게 왜 이래요?!"

아침 시간에 출근하는 두 명의 알바생이 가게 모습을 보곤 기겁하며 다가와 묻는다.

"영민이랑 은정이. 일찍 출근했네."
"아니, 출근이 문제가 아니라! 이게 다 뭐에요?! 어떻게 된 거에요?"
"어젯밤에 불이 나서…."
"말도 안 돼…. 그럼 어떡해요?"

1년 넘게 꽤 오랜 기간동안 일했던 영민과 은정이 안타까워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다시…세워야지."

말은 그렇게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아직 보험회사에 전화도 안 한 터라 처리반이 오지도 않았고, 보험패키지에 처리반이 있었는지도 불확실했다. 영민과 은정을 돌려보낸 뒤에도 동우는 그저 멍하니 가게만 바라봤다. 정말 모든게 한순간에 재가 되어 버렸다.


*


"다음주 수요일에 희망의 집 봉사활동이 있습니다. 모금은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내세요."

거남 대리의 말이 끝나고 직원들이 하나둘씩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일단 분위기를 봐선 모금을 해야할 것 같아 성규도 얼른 지갑을 꺼내며 옆자리 호원에게 물었다.

"희망의 집 봉사활동이라뇨? 처음 듣는 얘긴데"
"두 세 달에 한번씩 희망의 집이라는 고아원으로 봉사활동을 가요. 회사이미지를 위해서."
"다 같이 가는거에요?"
"아뇨. 희망자만요. 근데 다들 눈치봐서 빼기 일쑤에요."

지갑을 열고 잠시 고민을 했다. 만원은 너무 적고, 이만원은 애매하고…. 고민하던 성규가 '얼마 내실거에요?'하고 호원에게 물었다.

"전 10만원이요."
"예에?"
"왜요?"
"아,아니에요."

만원짜리 두 장을 꺼내려던 성규가 얼른 다섯 장을 꺼내 모금을 했다.

"그나저나 동우는 뭐하고 있을까요. 지금 시간이면 영업 준비할 시간일텐데…."

한숨을 쉬는 성규를 따라 호원도 한숨을 내쉬었다.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 성규,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와 우현에게 서류를 내민다.

"여기…결재 서류요."

모니터에 향해있던 시선을 힐끗 성규에게 넘긴 우현이 고개를 내저으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물러터진 인상만 하고 있을거에요."
"제가 뭘요."
"거울봐요. 지금 김성규씨 인상이 어떤지."
"…이해 좀 해주면 안돼요?"
"네. 안돼요. 그러니까 활짝 웃고 다니세요. …그게 어울리니깐."

'그게 어울리니깐'부분은 작게 중얼거린 우현이 서류를 휙휙 넘기며 확인 했다.

"김성규씨."
"느에…."
"짧게 대답해요. 김성규씨."
"하아…. 네."
"앞에 한숨떼고 다시."
"네. …왜요."
"뒤에 왜요떼고 다시."
"아, 진짜 왜요!"

성규의 큰 목소리에 직원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미쳤어요? 여기 회사안이에요. 목소리 낮춰요. 여기 오타 안 보여요?"

우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지출'이 '찌출'로 쓰여있다. 이건 엄연한 자신의 잘못이다.

"…죄송해요. 고쳐서 다시 제출할게요."
"됐어요. 내가 하면 되니깐."
"…네."

인사를 꾸벅하고 느릿느릿하게 자리로 돌아가는 성규를 보며 우현이 잠시 고민을 하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오권이형? "
[어라. 애물단지. 무슨 일로 너가 먼저 전화를 다하냐.]
"애물단지라니. 암튼 내 부탁하나만 들어주라."
[부탁? 말이나 해봐. 들어나보게.]

어려운 건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중에….

*

 


"아무튼 다음날에 그 병기라는 놈이 선생님한테 그대로 일러바쳐서 그 날 하루종일 벌섰다니까."

한가한 레디락 점심 시간. 대걸레질을 하던 명수가 어느새 성열의 앞에 앉아 고등학교때 사고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성열은 간간히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한참 이야기를 하는 명수의 뒷통수를 누군가가 찰싹 내려쳤다.

"아씨! 누구, 아, 선웅이형."
"너 청소 안 하고 뭐하냐."
"손님이랑 말동무하는 것도 죄에요? 그리고 청소는 거의 다 했다구요."
"빈둥빈둥대지말고 제대로 좀 해라."
"어디가세요?"
"잠깐 볼일보러."
"다녀오세요."

유유히 레디락을 나가는 선웅의 뒤에 대고 명수가 중얼중얼 궁시렁거렸다. 선웅이 닫고 나갔던 문이 다시 열리더니, 아뿔싸. 미희가 걸어들어온다. 전에 미희가 명수에게 꼭 건네주라던 선물을 중간에서 횡령한 죄가 있는 성열이 식겁하며 고개를 숙이고 명수가 갖다준 레몬에이드 잔만 만지작거렸다. 대걸레질을 하던 명수, 뒤늦게 미희를 발견하고는 똥이라도 본 마냥 얼굴을 확 찌푸린다.

"니가 여긴 왜 왔냐."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나 너 보러 온 거 아니다? 브런치 즐기러 온거라구."
"집에서 남은 반찬에 밥 비벼먹게 생긴 애가 브런치는 무슨. 그리고 지금 오더 마감이야. 2시부터 오더 받으니깐 2시에 와."
"2시까지 기다리면 되겠네. 얼마 안 남았으니깐. 아,참! 그나저나 내가 준 스카프 어때? 예쁘지?"
"스카프?"

헉. 성열이 초조한 표정으로 가방끈을 꼭 쥐었다. 손에서 잔뜩 땀이 새어나온다.

"무슨 스카프?"
"뭐? 스카프 못 받았어? 너 집에 없길래 옆집…. 잠깐…."

미희가 성열을 보고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다가와 성열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그 때 옆집분 맞죠?"

으힉, 어떡해. 성열이 식은땀을 흘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뭐라 말하지?

"맞네, 그 때 그 분! 내가 그 때 선물 전해달라고 그랬는데…."
"무슨 소리야. 난 못 받았는데. 헛소리하지말고 얼른 브런치나 먹고 가."
"아냐! 진짜 전해줬다고. 그거 비싼거란 말이야…. 이봐요! 고개 좀 들어봐요."

미희, 이번엔 톡톡이 아닌 툭툭 성열의 어깨를 건드린다. 야, 그만해. 명수가 성열의 어깨를 툭툭 치는 미희의 손을 거둬냈다.

"아, 나 진짜 억울하네! 이봐요. 직접 입으로 말해봐요. 내가 선물 주면서 전해달라고 했잖아요."
"성열아. 진짜야?"

명수가 진짜냐는 표정으로 물었고 한참 고민하던 성열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나 그런거 받은 적 없는데…."
"뭐,뭐라고요?"

미희가 당황하며 손부채질을 했다.

"분명 그때 내가 전해줬잖아요! 어머어머, 그거 도둑질이에요, 도둑질! 아무리 스카프가 탐났어도!"
"…죄송한데 무슨 말하시는지 잘…."
"뭐요?! 진짜 황당하네!"
"야, 그냥 가라."

명수가 대걸레질로 미희의 구두를 밀어내며 레디락 밖으로 미희를 끌고 나갔다. 미희, 너무 분해서 발을 동동 구른다.

"진짜 억울해서 말도 안 나오네! 내가 얼마나 성심성의껏 준비한 선물이었는데 그걸 중간에서 가로채고, 게다가 오리발까지 내밀어? 명수야. 저 사람 뭐야?"
"성열이 그럴애 아냐. 헛소리는 니네 별나라갈때나 하고 브런치는 딴데가서 먹어라."
"명수야! 명수야!"

억울해하는 미희를 훠이훠이 쫓아낸 명수가 문을 쾅 닫았다.

"미안. 쟤가 좀 이상한 애라서."
"아냐, 괜찮아."

성열이 볼을 붉히며 살짝 웃어보였다. 한편 분하고 억울해 씩씩거리며 택시를 잡아타려는 미희 뒤로 예쁘장한 스카프를 매고 있는 강아지가 유유히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

니체가 말했다. 사랑으로 행해진 일은 언제나 선악을 초월한다고.

*


"후우…."

동우, 보험회사에서 걸어나오며 한숨을 쉰다. 제일 싼 보험을 들어놓은 탓에 보험비로 가게를 다시 짓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쥐꼬리만한 보험비를 타는 과정도 복잡했다. 보험회사가 손해사정회사에게 의뢰를 주고 의뢰를 받은 손해사정회사는 소방서와 경찰서에서 화재 경위와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받아 그 서류와 자체 조사한 서류를 대상으로 피해액을 산정해 보험사에게 다시 서류를 제출하는 식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이 대체적으로 한달에서 45일 정도 걸리는 경우가 많단다. 당장 영업에 문제가 있는데 45일이라니. 뭐 하나 제대로 되는게 없다. 다른 알바생들이 가게로 출근할 시간이라 서둘러 시동을 걸고 가게로 차를 몰았다. 조금 있으면 고기도 배달올 시간인데 그건 또 어떻게 해야할지. 현실이 무섭고 막막해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괜시리 시골에 계신 어무니,아부지도 보고 싶어진다. 후드티 소매로 눈을 벅벅 닦아냈다. 울어봤자 눈만 퀭해진다. 이 상황에서 눈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어?"

의아한 표정으로 서둘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회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화재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초록색 굴삭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진 건물 잔해를 트럭에 실었다. 보험사에서 온 처리반인가? 아닌데. 처리반은 접수 후 일주일 정도 뒤에 나온댔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춤거리는 동우에게 보호안경과 안전모를 쓴 남자가 다가왔다. 안전모와 조끼에 'SD건설'이라는 로고가 형광으로 밝게 쓰여있다.

"장동우씨 되시죠?"
"네. 제가 장동우인데요. 혹시 보험사에서 오셨어요?
"네? 보험사요?"
"아, 아닌가…."
"서동건설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에 사인 부탁드려요."
"사인이요? 아,네네."

정말 얼떨결에 사인을 마쳤다. 근데 서동건설이라면 서울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빌딩들을 짓고 있는 기업인데 왜 자신의 가게를 치워주고 있는 걸까?

"…저기, 근데 왜 제 가게를 치워주시는거에요?"
"글쎄요. 저희는 시키는 대로 하는 입장이라 잘 모르겠네요."
"아,네…. 저, 그럼 돈은 제가 내는 건가요?"
"아뇨.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내 가게인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이 사람아. 동우가 멀찍이 떨어져서 작업현장을 멍하니 지켜봤다. 정말 빠른 속도로 잔해물들이 거둬져나가고 물탱크를 실은 살수차가 오더니 탄 재와 거뭇거뭇한 자국들을 깨끗히 씻어내리기 시작했다. 속전속결. 한 시간도 안 되어 작업이 마무리 됐고 작업 차량과 굴삭기가 유유히 사라졌다. 말도 안 되게 깔끔해졌다. 물론 앞면이 모두 허물어져 언뜻 보면 공터같았지만 어쨌든.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안이 벙벙해진 동우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번엔 고급스러운 차 두 대가 가게앞에 멈춰서더니 시크한 검정 트렌치코트에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뒷좌석에서 내렸다.

"장동우씨?"
"네. 제가 장동운데…."
"어디 장씨세요?
"이,인동 장씨요."
"잘됐군요. 저도 인동 장씨입니다. 이름은 오권. 장오권이구요."
"네. 바,반가워요. 근데 뭐 하시는…."
"아,참. 여기요."

오권, 트렌치 코트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동우에게 건넨다.

"……디자이너?"
"정확히 말하면 인테리어 디자니어죠."
 
선글라스를 벗은 오권이 동우에게 찡긋 윙크를 날렸다.

"남우현 부탁 받고 왔는데 그 자식은 안 보이네요? 똥물에 튀겨죽일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남우현이요?"
"남우현 몰라요? 서동 왕자 남우현. 그 놈 부탁받고 왔는데. 아무튼 일단 작업 시작하죠. 렛츠고."

오권, 손을 두어번 짝짝치면 두 대의 차에서 여러 사람들이 내려 황무지가 된 가게를 꼼꼼히 살핀다.

 

*


볼네드 점심 시간.
성규와 호원 모두 깨작깨작 밥을 먹고 있다. 먹는다는 표현보단 밥알 수를 센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평소엔 씩씩하게 잘 먹더니만.

"…아, 진짜. 팍팍 좀 먹어요. 평상시엔 수저도 씹어먹을 기세였잖아요."
"……."
"김성규씨 고기 좋아하죠? 자, 여기 고기."

우현은 자신의 식판에 있는 고기를 성규의 수저위에 올려준다. 힐끗 우현을 본 성규가 뚱한 표정으로 수저를 입으로 가져간다. 전화벨이 울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성규가 액정에 뜬 동우 이름을 보고는 얼른 폴더를 열어 귀에 가져다댄다.

"어, 동우야!"

동우라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호원이 후다닥 성규의 옆자리에 앉아 전화기에 귀를 가져다댄다.

[성규야.]
"응응. 나 여기있어. 왜? 뭐 도와줄 거라도 있어? 말만 해. 내가 뭐든지,"
[남우현씨 거기 있어?]
"…응? 뭐라고?"
[남우현씨. 너네 회사 팀장님. 거기 있냐구.]
"응. 있지. 근데 왜?"
[잠깐 바꿔줘봐봐.]
"응. 알았어."

동우가 팀장님 바꿔달라네요. 성규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우현에게 건네자 성규 옆자리에 앉아있던 호원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우현의 옆자리로 향한다. 핸드폰을 건네받은 우현이 전화가 올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통화를 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럴 필요없어요. 네. 그 쪽에서 다 알아서 작업할꺼니깐 그냥 편히 있으면 되요. 네. 정말 괜찮습니다. 네."
"……."
"네. 바꿔드릴게요."

우현이 다시 성규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어, 동우야. 팀장님은 갑자기 왜?"
[남우현씨가 다 해결해줬어…. 흐어어엉.]
"무슨 소리야, 그게. 행간을 빼먹지말고 얘기해봐."

그러니까 아까 서동건설에서 사람들이 오더니 어쩌구저쩌구 이러쿵저러쿵 이랬다저랬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전화를 마친 성규가 잠시 멍하니 우현을 쳐다봤다. 대충 감을 잡은 호원은 우현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씨익 웃었다. 숟가락으로 밥을 푼 우현이 어쩔 줄 몰라하는 성규를 보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밥 좀 제대로 먹죠?"

그리고 살짝 웃어보이는데, 그 웃음이 너무나 근사하고 멋져보여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제대로 먹을게요."

얼굴이 발게진 성규가 우걱우걱 입에 밥을 쑤셔넣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꺄악, 오빠! 사진 한번만 같이 찍어요."
"사진은 무슨. 내가 연예인이냐."
"그럼 폰번이라도 주시면 안되요? 오빠, 진짜 내 이상형인데."
"으윽. 기지배들이 왜 이렇게 힘이 쎄!"
"꺄악! 기지배래, 기지배! 오빠, 나 설레여요!"

퇴근을 하고 나오는 명수에게 여고생들이 우루루 달라붙었다. 명수는 근방에 위치한 여고에 꽃미남 알바생으로 팬클럽이 생길 만큼 유명했다. 요새 들어 하나 둘씩 여고생들이 나타나더니 며칠 안 되어 그 인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명수 혼자선 이 여고생무리를 뚫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한참 여고생무리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 레디락 건너편 까페보네에서 명수가 퇴근하기까지 기다린 성열이 니트 소매를 올려부치며 나타났다.

"어? 성열아! 잠깐, 아오, 야! 좀 비켜봐! 퇴근 좀 하자!"

명수의 고함에 여고생들이 '우오오'하며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흐트러진 옷을 정리한 명수가 얼른 무리에서 빠져나와 성열의 손목을 잡고 냅다 정류장으로 뛰었다. 한 폭의 순정만화같은 모습에 여고생들이 넋을 잃고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자기네들끼리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야. 미친, 방금 봤어? 명수오빠가 저 하얀 오빠 손목 잡고 가는거?"
"봤음. 졸라 박력 터졌음. 나 지릴 뻔."
"외람된 말이지만 둘이 참 바람직하지않았냐? 나 대리만족했어."
"맞아. 내가 가질 수 없다면…차라리 네덜란드로 꺼져버려!"

여고생들이 둘의 사랑을 기원하며 각자 도서실, 혹은 집으로 흩어졌다.

"요즘 기지배들 장난아니네. 아, 따가."

손등에 길게 손톱자국이 났다. 여고생들과 실랑이를 하다가 난 상처였다. 명수의 상처에 미간을 찌푸린 성열이 가방을 뒤적거려 밴드를 꺼냈다.

"그런 것도 가지고 다녀?"
"…으응. 연고는 없네. 미안."
"미안은 무슨. 암튼 고맙다."

둘리가 그려진 밴드를 매만진 명수가 힐끗 성열의 가방안을 보며 물었다.

"그 악보는 뭐야?"
"…어어? 아, 아무것도 아냐."

명수에게서 풍기는 향기가 바람을 타고 살랑살랑 콧가를 간질거렸다. 향수 냄새라기보단 본래 가지고 있는 명수의 살내음이랄까. 암튼 은은하고 남자다운 향에 성열의 가슴이 저릿저릿 떨려왔다.

"작곡 악보인 것 같은데?"
"…으응."
"와아. 너 작곡도 해?"
"그냥. 연습삼아…."
"한번 구경해도 돼?"

드디어 명수에게 이 악보를 보여줄 날이 온건가? 성열이 심호흡을 하며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 두 눈을 질끈 감고 명수에게 악보를 내밀었다. 악보가 파르르 떨리는 걸 의아하게 여긴 명수가 성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성열, 흠칫하며 감았던 눈을 번쩍 뜬다. 꿈이 아니라 생시. 정말 자신의 손을 꼬옥 잡고 있는 건 명수의 손이 맞았다.

"너 손 시려? 왜 이렇게 떨어? 가을치곤 춥긴 하지만 아직 바들바들 떨 정도는 아닌데…. 흠…"

손을 뗀 명수가 악보를 찬찬히 훑었다.

"제목이 미...아마스...빈? 이렇게 읽는 거 맞아?"
"…으응."

성열이 꿀꺽 침을 삼켰다. 두근두근두근.

"근데 미 아마스 빈이 어느 나라 말이야? 불어?"
"아니. 에스페란도어야."
"으응? 에,에스페란도?"
"응. 세계가 공통으로 쓰는 인공어."
"아아 그렇구나. 그럼 미 아마스 빈, 이게 무슨 뜻이야?"
"...사랑해."
"...어?"

다소 진지한 말투에 명수는 고개를 들어 성열을 쳐다봤다. 시선이 닿자마자 성열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그 뜻이야. 사랑해라는 뜻"
"그렇구나...큼...사실 악보 볼 줄 몰라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

명수에게 음악으로 감동을 주기엔 너무 무리였었나. 명수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악보를 다시 성열에게 건넸다. 잠깐 어색해지자 명수가 분위기를 바꾸려 짓궃은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제목이 사랑에 관한 거 보니까 너 좋아하는 사람있구나?"
"...아,아냐."
"에이. 얼굴 빨게지는 거 보니까 맞는 것 같은데."

성열은 갑자기 달아오르는 자신의 얼굴이 한심했다.

"좋아하는 사람 아냐."
"그럼?"
"그냥..."
"그냥?"
"그냥...생각나는 사람이야."
"그럼 좋아하는거네. 좋아하면 생각나고. 자꾸 생각나면 좋아지게 되니까."
"…정말?"
"대다수가 그렇지않나."
"……."

그럼…내가 널 좋아하는걸까, 명수야.


*


어젯밤, 동우 걱정을 하며 제대로 못 잔 탓에 하품을 하며 퇴근준비를 한 성규가 기지개를 펴며 우현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퇴근시간이에염~"

말꼬리를 늘이는 성규는 분명 귀여웠다. 그러나 우현은 괜히 맘에도 없는 말을 했다.

"말꼬리는 왜 늘어트려요. 혀에 살쪘어요?"
"……"
"기,기획안건이 밀려서 마저하고 가야되요."
"그걸 아직 못 했어요? 팀장님 완벽주의자 아니였어요?"
"내가 완벽주의자가 되는 걸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일을 많이 줬나보죠. 미안하지만 오늘은 버스타고 가요." 
"기다릴까요?"
"언제 끝날 줄 알고요?"
"동우 일도 그렇고 그냥 인심쓰죠, 뭐. 도와줄 거 없어요?"

성규, 메고 있던 가방을 다시 내려놓는다.

"도와줄 건 없고. 심심하니깐 앉아서 말동무나 해줘요."
"에이. 막 부려먹어도 되요."
"됐어요. 내가 해야할 일이니까."

의자를 끌고 와 테이블 앞에 앉은 성규가 의자를 좌우로 흔들거리며 핸드폰으로 동우와 문자를 주고 받았다.

"장오권이 누구에요?"
"인테리어 디자이너에요. 꽤 유명해서 전시회도 몇 번 열었었는데."
"암튼 그 분이 와서는 가게를 요리재고 저리재서 갔다네요."
"왜 그랬을까요."
"모르죠."
"정말 몰라요?"
"네. 모르겠는데."

우현이 피식 웃으며 서랍에서 USB를 꺼내 컴퓨터에 꽂았다.

"왜 웃어요? 미심쩍게."
"아녜요. 그냥 두고보면 알 거에요."

그 후 우현은 정말 묵묵히 일만 했다. 말동무를 해달라면서 정작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일하는 모습에 성규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발가락과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서서히 졸음도 몰려온다.

"졸려요?"
"아뇨, 전혀."
"아까부터 계속 꾸벅꾸벅거리던데."
"아니에요. 흐아아암. 커피 먹을꺼죠? 타올게요."

졸린 눈을 비비며 휴게실로 들어가는 성규를 보며 우현이 기분좋게 웃었다. 사무실 안에 자신과 성규, 딱 둘만 있다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다.

"왜 안 오지."

커피 원두를 따러 자메이카로 갔나? 아님 원두를 직접 빻으러갔나…. 결국 일하던 서류를 잠시 미뤄두고 휴게실로 가 불투명한 유리문을 벌컥 열었다.

"…참나."

성규는 손에 커피 믹스를 꼭 쥐고 테이블에 얼굴을 댄 채 잠들어있었다. 커피포트에 담긴 물이 부글부글거린다. 커피포트 전원을 끄고 성규에게 다가간 우현이 무릎을 낮추어 성규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살짝 벌린 입술, 높은 콧대, 작지만 매력있는 눈, 흐트러진 갈색톤의 머리. 나중에 머리색깔가지고 시비 한 번 걸어야겠다.

"…피부 되게 뽀얗네."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살결 한 번 끝내준다. 약간 구릿빛 도는 자신의 피부톤과 달리 성규는 두부처럼 허여멀겋다. 새근새근 내뿜은 성규의 숨결이 우현의 이마에 와 닿았다.

"……"

우현, 살짝 손을 들어 성규의 뺨을 쓰다듬듯이 건드린다. 전에도 느꼈지만 참 푸딩같다. 스물여덟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탱탱하고 매끈거렸다. 그때 성규가 부스스 눈을 떴다.

"쓰읍. 흡. 아, 침 흘렸다."

침 때문에 촉촉히 젖은 입술을 성규가 손등으로 훔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뇌는 깼지만 몸은 아직 수면 중인지 다리에 힘이 서질 않아 성규가 으헉,하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우현이 재빨리 그 허리를 붙잡았다. 어색한 분위기에 성규가 빠져나오려고 몸을 살짝 뒤틀자 우현의 손에 힘이 바싹 들어간다. 마치 그대로 있으라는 것처럼. 레이저가 발사될 듯한 우현의 눈빛에 성규가 커피믹스를 꼭 쥔 채로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김성규씨."
"왜,왜요."
"원래…사람 자체가…반짝반짝거려요?"
"무슨 미친 소리에요?"

'일단 이것 좀 놔요'하고 말하려는데 여전히 잡고 있는 손은 끄떡도 하질 않았다. 참 이상한 건, 우현의 눈동자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는 점이다. 우현의 얼굴이 점점 성규 코앞으로 다가왔다. 저번과 똑같은 상황이다. 우현의 코와 성규의 코가 맞닿았다. 성규의 손에 들려있던 커피 믹스가 투둑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
"……"

으아! 어떡해. 키스하려나봐. 근데 남우현이 나한테? 키스를? 왜? 성규의 머리는 폭발 바로 전이었다. 우현의 눈동자가 흔들흔들거리는게 훤히 보이는 거리. 아마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키스를 할 지, 아니면 저번처럼 그냥 물러설지. 그리고 그때, 우현의 눈동자를 눈치 챈 성규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먼저 고개를 들이밀어 입을 맞추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앞에 두고 고민을 하는 우현의 모습에 묘하게 오기가 발동했던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는 그런 거지같은 오기.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게 느껴져 얼른 눈을 감았다. 내가 드디어 미친건가? 속으로 생각하며 좀 더 편안하게 뒷통수를 잡아오는 우현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키스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정말 수년만의 키스였다. 그리고 그 상대가 우현이라는 점이 썩 나쁘진 않았다. 우현이 키스를 잘해서였을까? 아니면…?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제서야 삼백리로 가출했던 정신이 스물스물 들어오기 시작하고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우현의 근육질 잡힌 팔뚝이 느껴지고 지금 입안을 헤집고 있는 우현이 느껴지고 상대가 무려 남!자!라는 것도 느껴지자 머릿속에서 위이이잉하는 사이렌이 울렸다. 비상, 비상! 얼른 입술 철수하고 도망가라, 오바. 성규의 뇌에 위치한 지휘관이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에 성규는 우현의 가슴팍을 거칠게 홱 밀치며 즉각 반응했다.

"…하아."

꽤 긴 시간의 키스에 둘 다 숨까지 거칠어져있었다. 성규는 혼란스러웠고 우현은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너,너무 느,늦었어요. 머,저 가볼게요."

입에 더듬이라도 달린 것 처럼 말이 더듬거려진다. 휴게실을 박차고 나온 성규가 가방을 냅다 집어들고 회사를 뛰쳐나왔다. 회사 입구에서 멈춰선 성규가 주먹 쥔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계단에 주저앉았다. 농후한 키스에 입술이 아렸다.

"…위험해."

우현에게 드는 감정이 너무 위험했다. 한편 휴게실에 혼자 남아있던 우현, 평소 안 하던 욕까지 나지막하게 내뱉으며 커피 포트 옆에 있던 커피 믹스통을 집어던졌다. 화가 난다. 그 순간의 감정을 제어못한 자신 때문에, 자꾸만 커지는 알 수 없는 감정 때문에.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20.


"하아…."

한숨을 쉬며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입술은 아직도 저릿저릿했고 다리는 계속 후들거린다. 왜 키스를 했을까. 나나, 남우현이나. 50%는 먼저 한 내 잘못, 나머지 50%는 먼저 분위기잡은 남우현 잘못. 결국 둘 다 잘못. 따지자면 먼저 한 내 잘못이 조금 더 많긴 했지만 어찌됐든 나랑 남우현은 키스를 했다. 그것도 찐하게. 고등학교 체력장할때도 이렇게 가슴이 쿵쾅쿵쾅뛰진 않았었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일단 제일 첫번째 문제는 당장 내일 마주할 남우현 얼굴이었고, 두번째 문제는 자신의 감정이었다.

"…너무 간만이라그래."

그래. 키스가 너무 간만이라서 '키스'라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이렇게 부끄럽고 설레는 걸꺼다.

"난 게이가 아니다. 게이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래. 아니야. 내가 너무 여자가 없었던 탓이야. 후우. 얼른 여자를 만나야겠어."

빨갛고 뜨뜻한 두 볼을 착착 두드렸다. 심장은 한참이나 요란했다. 버스가 멈추고 가방을 챙긴 성규, 터덜터덜 버스에서 걸어내린다. 입김이 날 것만 같은 밤이다. 살짝 오동통해진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집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부우웅- 하는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성규는 화들짝 놀라며 누군지 확인도 않고 얼른 의류 수거함 뒤로 몸을 감췄다. 역시나 우현의 벤츠다. 성규네 앞에서 잠시 멈칫하는 벤츠. 성규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우현의 벤츠는 한참이 지나서야 성규네 대문을 지나쳐 매일 주차하는 곳에 멈춰섰다. 운전석 문을 열고 나오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는 몸을 좀 더 움츠렸다. 차에서 내린 우현은 집으로 갈까하다가 잠시 고민하는 듯 발길을 멈추더니 성규네로 향했다. 헉. 설마 벨을 누르려는건 아니겠지? 성규의 조바심과는 달리 잠시 서있던 우현은 특별한 행동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씨, 어떡해!"

자신의 입술을 찰싹 때린 성규가 발을 동동 구르며 의류 수거함을 퍽 걷어찼다.  


*


"나 왔어."

구두를 벗는 우현에게 오늘도 성열만 다가와 반겼다.

"순재 자?"
"잠깐 누워있는 것 같았는데 자. 근데…형."
"응, 왜?"

방으로 들어가려던 우현을 성열이 불러세웠다. 입술…. 성열이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입술? 우현이 천천히 손을 올려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축축한 물기가 묻어나온다.

"아…."

피나네. 얼마나 격하게 했으면 피가 날까. 티슈를 뽑아 입술을 닦으며 생각했다. 성규도 피가 날까. 시덥지않은 생각을 하며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

물줄기가 뜨거운 머리는 식혀줬지만 달뜬 입술은 식히지 못했다. 말랑하고 촉촉하던 성규의 입술 감촉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더불어 성규를 안을 때의 느낌까지. 성규는 굉장히 부드럽고 보들거리고 품안에 쏙 감겼었다. 보기보다 좀 마르긴 했지만 닿는 감촉이 뭐랄까, 따뜻하고 푸근하다고 해야하나?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아래 쪽으로 뻐근하게 피가 몰리는 걸 느낀 우현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오늘 일은 실수였어, 실수. 생각해보면 먼저 키스를 한 건 성규였다. 물론 자신이 먼저 포즈를 잡긴 했지만. 수도꼭지를 잠근 우현이 거울에 서린 습기를 슥 닦아내고 생각에 잠겼다. 성규가 먼저 입술을 들이댔다. 왜 일까. 날 좋아하나? 그렇지 않고서야 왜 먼저 입술을 갖다댔을까. 그것도 자존심 센 성규가…. 대충 물기를 닦고 샤워 부스에서 나와 속옷을 꺼내는데 문득 침대 구석에 앉아있는 갓파인형이 눈에 들어온다.

"…뭘 봐."

손에 들려있던 수건을 던져 도톰히 반짝거리는 인형 눈을 가렸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핸드폰 알람을 확인하며 침대에 누웠다. 내일 아침, 성규는 우현을 피해 평소보다 일찍 출근을 할 게 분명했다. 차라리 그게 편하겠지. 자신도, 성규도. 몸을 뒤척이며 인형 쪽으로 몸을 돌린 우현이 손을 들어 수건을 잡아 끌어내렸다. 인형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맛을 다시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인형 얼굴을 툭 밀쳐 침대 밑으로 떨궈낸다. 눈을 떠도 성규 얼굴, 눈을 감아도 성규 얼굴만 둥둥 떠다닌다.


*


"하아…"
"……"
"…후우…"
"……"
"흐유우…"
"…큼."
"하아아."
"야, 쫌!"

결국 명수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 좀 자자, 잠 좀!"

성규의 한숨 소리에 솔솔 오던 잠이 모두 달아나버렸다. 엽기토끼인형을 품안에 꼭 끌어안고있는 성규는 명수가 던진 베게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별 반응이 없었다.

"형 혹시… 회사 잘렸어?"
"아니…. 차라리 잘린 거였으면 좋겠다."
"무슨 일인데."
"영화제목같은 일이야…."
"무슨 영화 제목?"
"…말 할 수 없는 비밀."

아흐. 머리를 박박 헤집은 성규가 엽기토끼 귀를 앙앙 깨물었다.

"그럼 나 잘꺼니깐 한숨 그만 뱉어. 청테이프로 입 막아버리기전에."
"…미안. 잘 자, 동생아."
"……."
"…하아아."
"진짜 하지마라캤다."
"아, 미안."
"……."
"……."
"……."
"…휴우."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명수가 방안의 불을 켜고 성규의 몸을 일으켜세웠다.

"말해."
"뭐를."
"자꾸 한숨쉬고 왜 그러냐고 진짜."
"……."
"말 안 할거면 한숨을 쉬지말던가, 아니면 속 시원하게 말을 해보던가. 나 내일 알바가거든? 이 상태로는 나도 못 자고 형도 못 잘 것 같으니깐 얼른 말 해. 무슨 일이야."
"연애박사 김명수야. 너 …키쮸 해봤냐."
"뭐라고? 장난해?"
"장난같니?"

성규의 얼굴로 봐선 장난이 아닌 것 같아 명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바꾸며 되물었다.

"갑자기 키쮸, 아니 키스는 왜?"
"글쎄 해봤냐고."
"형. 나 스물네살이야. 내가 24년동안 이 입술을 음식이나 먹는 식수단으로만 사용했을 것 같아? 당연히 해봤지."
"사랑하는 사람이랑?"
"야밤에 카멜레온 똥싸는 소리하고 앉았네.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지 뭐, 길가다가 생판 첨 보는 사람이랑 하나?"
"예외도 있지않을까?"
"예외는 성폭행범이지. 성폭행범은 생판 모르는 사람 잡아다가 하기도 하니깐. "
"……."
"무슨 일인데 그래."
"정말 예외는 성폭행범뿐이야?"
"그럼. 형이 생각하는 예외는 뭔데?"

내가 생각하는 예외? 입술을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 우현과 자신이 해당되는 예외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봐도 떠오르질 않는다.

"……몰라. 안 떠올라."
"두루뭉술하게 말하지말고 자세히 좀 말해봐. …형…누구랑 키스했어?"

성규, 명수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긴 했지…. 근데 남자랑. 그것도 남우현이랑. 뒷말은 삼키고 고개만 끄덕거리자 명수가 놀란 눈치로 묻는다.

"모태 솔로 김성규가 키스를?"
"모태 솔로는 아니거든? 고등학교때…몇 번 사겼었어!"
"고등학교때 한번한 거 가지고 유세떨긴. 그리고 그게 사랑이었냐? 형이 나한테 하도 놀림받아서 어거지로 사귄거였지. 근데 놀랍네. 연애숙맥 김성규가 키스를 다 하고. 다 컸쪄요, 울애기. 우쮸쮸쮸."

명수가 성규의 엉덩이를 토닥토닥거리며 아무튼 어떤 여잔데? 예뻐? 가슴 커?하고 물어왔다. 여잔 아니고 예쁜 건 더더욱 아니고 보너스로 가슴도 없어. 왜냐면 남자거든!

"그게 문제가 아냐. 내 말 들어봐. 글쎄 나랑 그 사람은 진짜 키스할 관계가 아니였거든?"
"근데 했네?"
"그게 문제야. 했다는 점."
"가볍게 한번 사겨봐."
"뭐어?! 야, 됐어! 말도 안 돼!"

성규,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난다. 사겨보면 알겠네. 명수가 심드렁하게 말하게 도로 침대에 누웠다.

"키스를 했다는 건 은연중에 서로에 대한 호감이 있기때문에 한 거 아냐?"
"……."
"어떤 여잔데 그래? 진짜 꼴보기도 싫을 만큼 혐오하는 여자야? 쌍커풀이 네 겹이야? 아니면 덩치가 산만해? 그것도 아니면 곁에 가면 시궁창같은 쾌쾌하고 꾸리꾸리한 냄새가 나?"
"그런 건 아닌데,"
"그런게 아니니까 사겨보라고, 가볍게. 애도 아니고 스물여덟살이나 된 남자가 감정에 그렇게 서툴러서 나중에 결혼은 어떻게 하려는지 원…. 암튼 얼른 불끄고 잠이나 자."
"……."
 
느릿느릿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누운 성규는 한참이나 뒤척거리다 잠에 들었다.


*


노란색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파에 앉아 음소거로 해놓은 TV를 멍하니 보고있던 동우가 초인종 소리에 이불을 뒤집어쓴채로 꾸물꾸물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나 호원이요]

호원의 목소리에 얼른 문을 열었다. 형 안녕. 호원이 어색하게 반말을 쓰며 손을 흔들었다. 추울텐데 어서 들어와. 동우가 이불로 감싼 몸을 꿈틀거리며 어두컴컴하던 집안의 불을 켰다.

"…왜 둘둘 말고 있어요?"

동우는 이불을 둘둘 말고 고개만 쏙 내밀고 있다.

"원래 혼자 있을땐 보일러 잘 안 켜거든. 이제 켜야겠다. 근데 그 봉지는 뭐야?"

아, 이거요? 그냥 형 좋아할만한 거 사와봤어요,하며 호원이 묵직한 봉지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과 프랑스바게트 쿠키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우와. 되게 많네… 너가 저번에 사온 과일도 다 못 먹었는데."
"아껴놨다가 천천히 먹으면 되죠. 아, 성규씨 놀러와도 주지말고 형만 먹어요, 꼭."
"응. 알았어. 저녁은 먹었어?"
"아뇨, 아직."
"그럼 저녁 먹고 가! 내가 만들어줄게."

이불을 홱 벗어 소파에 내려놓더니 소매를 걷어부치며 주방으로 향한다. 집 분위기과 지금 이 상황이 꼭 신혼 분위기같아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식탁 의자에 앉은 호원, 분주히 무언갈 준비하는 동우의 뒷모습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데 도마를 꺼내던 동우가 갑자기 휙 뒤돌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호원아."
"네, 형."
"근데 오늘 우리집에 왜 온 거야?"

동글동글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그대로 마주한 호원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혼자 잘 있나 걱정되기도 하고 그냥 자꾸 생각나서요.

"아아."

조금 낯간지러운 말에 동우가 얼른 도마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가게는 어떻게 됐어요?"
"아, 맞다. 가게 얘기를 깜박했네."

애호박과 양파를 꺼내 능숙하게 칼 질을 하며 쪼그마한 입으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장오권이라는 분이 이상한 남자들이랑 여기저기 재보더니 내일 보자면서 말도 없이 사라졌댄다.

"근데 아까 포털사이트에 쳐봤는데 장오권이라는 사람 되게 유명하더라구. 남우현씨가 디자이너분을 소개시켜준 건 고마운데 돈 많이 나오면 어떡하지."
"…무슨 소리에요?"

사실 내가 돈이 많지않거든. 보험비가 나오긴 하지만 유명디자이너 지어주는 가게면 돈이 무지 들테고 또 수고비도 드리려면…. 동우의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호원이 설마하는 마음에 '그 돈을 형이 내려던 생각이었어요?'하고 묻자 뚝배기에 물을 담던 동우가 '그럼 누가 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순수하면 눈치가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나보다.

"형. 그 돈 형이 안 내도 되는 거에요."
"왜? 내 가게인데…."
"내가 말 안 해줬으면 큰일날뻔했네. 형은 그냥 맘편히 집에서 쉬고 있으면 되요. 그 사람들이 알아서 다 해줄거에요, 공짜로."
"공짜로? 나를? 왜?"

정말 모르는 눈치다.

"형, 남우현 몰라요?"
"당연히 알지. 성규랑 너가 다니는 회사 팀장 겸 부장. 아니야?"
"맞긴 한데… 형 서동그룹 알죠?"
"한국사람치고 서동그룹 모르면 간첩아닌가?"

그러는 형도 남우현을 모르는 거 보니깐 간첩이네요. 남우현이 누구냐면요.


*

새벽에 가까워지는 시간. 지금 잠들어도 피곤할 시간인데 성규는 잠이 오질 않았다. 가끔씩 동네 개 짖는 소리와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를 고스란히 들으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 한채 좌우로 뒹굴거리고 있는데 띠링 하고 핸드폰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

[남우현이라는 사람. 멋진 사람. 좋은 사람..ㅠ^ㅠ - 동우 - ]

"…뭐래, 미친놈. 이 자식 단단히 돌았네."

안 그래도 심란해죽겠는데! 미간을 찌푸리며 동우의 문자를 과감히 삭제한 뒤, 핸드폰을 홱 집어던지듯이 내팽겨쳤다. 침대밑으로 핸드폰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고물폰.

"에이씨, 장동우 이 개쉬키."

당장 내일 마주할 우현의 얼굴이 막막하면서도 명수의 코고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성규도 점점 잠에 빠져들었다.


*


"뭐하러 밖까지 따라나와요, 추운데."

호원은 배웅을 하겠다며 가디건을 뒤집어쓰고 따라나오는 동우에게 애정섞인 타박을 했다. 실은 좋아죽겠으면서. 갈께요. 운전석에 올라탄 호원이 자신에게 손을 휙휙 흔드는 동우에게 똑같이 손을 들어주고 차를 출발시켰다. 동우표 된장찌개가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음식이 소화된다는게, 이렇게 아쉬울 정도로 동우가 좋다.

"내일 또 가야지."

기분좋게 웃은 호원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로등이 주욱 늘어선 도로를 빠르게 내달렸다.


*


또 악몽인가? 안개가 자욱한 곳에 서있던 우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깨어나려 노력해봐도 깨어날 수 없다는 건 이미 예전에 깨달았다. 근데 오늘은 상황이 좀 다르다.

"……."

처음 보는 낯선 장소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안개가 참 축축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에 손으로 안개를 내저으며 천천히 한걸음씩 발을 내딛는데 순간 '참방'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강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강?"

강이라기보단 낚시를 하는 저수지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천천히 뒤로 물러난 우현이 주위를 둘러보기도 전에 옆에서 불쑥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안개가 자욱한 날엔 낚시하기에 참 좋은 날이지. 안 그런가?"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곳에 낚시 의자가 놓여져있었고 그 위에 앉아있는 나이많은 남자가 떡밥을 돌돌 뭉쳐 낚싯바늘에 걸고 금방 부러질 것 같은 낡은 낚싯대를 잡더니 낚싯바늘을 여유롭게 저수지로 내던졌다. 

"…꿈이죠?"
"당연한 질문을."

그래도 생각보다 편안한 기분에 우현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남자의 낚시질을 멍하니 구경했다.

"낚싯대가 많이 낡았네요. 그 낚싯대로도 낚시가 가능합니까?"
"잡히는 건 물고기 마음이지, 내 낚싯대 마음이 아니니깐."
"…맞는 말이네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나? 남자의 질문에 우현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나름 그럴싸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사랑아닌가요."
"사랑이라…. 흠, 그것도 맞는 답이긴 하네. 하지만 진짜 어려운 일은 내 자신을 아는 일이야.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지. 그 중에서도 자기 자신 속을 아는 건 제일 어려운 일. 나도 아직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완전히 모르니깐."
"……."
"…할 말 같은 거 없어?"
"…어쩌면요…제가 많이 변한 것 같아요."
"그건 아마도 요즘 들어서?"

우현,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많은 요소가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딱 한 사람 때문에요."
"그 사람이 뭘 어떻게 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걸. 뭘 어떻게 했길래 내가 이렇게 심란하고 변한 건지."

남자가 낚싯대를 접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그너라는 음악가를 아나? 그 사람이 한 말 중에 '방황과 변화를 느낀다는건 살아있다는 증거다!'라는 말이 있네. 지금 자네한테 딱 어울리는 말이구만."
"……."
"자기 자신을 아무리 모르겠어도 자기 감정에 헤메이는 짓은 정말 멍청한 짓이야. 감정은 말 그대로 자기가 느끼는 기분이나 마음을 뜻하는 말이거든. 자기 감정을 모르겠다는 말은 당연히 순 거짓말이고. 무슨 연유에서든지 자기 감정을 나타내기 껄끄럽고 숨기고 싶으니깐 그런 변명아닌 변명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거지."
"……."
"어렵고 껄끄러워도 자기 감정에 솔직해지는 게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해. 그 속에 헤메이는 건 제일 허튼 시간 낭비야."
"……."
"다시 사랑하기가 두려운거지?"
"…네."
"사랑을 두려워하는건 삶 자체를 두려워하는것과 마찬가지. 살아가면서 누구나 사랑을 했다가 헤어지기도 했다가 하니깐. 회자정리.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하물며 동물들도 사랑을 하는데 사람이 그걸 무서워하면 쓰나?"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군. 남자가 낚싯대와 의자를 짊어지고 안개 속으로 사라지려는 걸 우현이 불러세웠다.

"근데…누구세요?"
"일찍도 물어보네. 내가 누군지 알면? 깨고나서 찾을 셈인가?"
"…아뇨."

말없이 미소 지은 남자가 안개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미소가, 분명 익숙했다.


*

 

 

 


"성열아, 사실 나 너 좋아해."
"…뭐,뭐라고?"

널 좋아한다고 이 바보야. 그 말을 하는 명수의 얼굴이 복숭아처럼 붉었다.

"너도 나 좋아해?"
"……."

성열이 말없이 긍정의 표시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피식-  순정만화 남주인공처럼 눈부신 미소를 지은 명수가 맞잡은 성열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넌 어쩜… 손도 예쁘니."

꿀꺽. 두 눈을 감은 명수가 성열의 뒷통수에 손을 얹고 지그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허헙! 하는 소리와 함께 성열도 얼른 눈을 꾹 감았다. 촉촉하고 말랑한 입술이 닿는게 느껴지고 소름이 돋는 성열의 허리를 명수가 거칠게 휘어감는다.

"…하아…."

명수, 잠시 입술을 떼어내고 은가루를 뿌려놓은듯 반짝이는 성열의 눈을 한번 진득하게 쳐다본 후 다시 입술을 맞췄다. 부드러우면서도 급한 듯이 다가오는 키스에 성열이 몸을 움찔거리며 명수를 꼭 끌어안았다. 한참 잡아먹을듯이 입술을 물고 늘어지던 명수가 고개를 성열의 목덜미에 푹 묻었다. 윽 - ! 생소한 느낌에 성열이 눈을 번쩍 뜨며 신음을 뱉었다.

"……."

방금까지 갈증난 것처럼 자신의 입술을 물고 빨아대던 명수는 온데간데없이 어두컴컴하고 넓직한 방 천장만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어안이 벙벙한 채 눈만 꿈벅이던 성열, 미끌거리고 축축한 아래의 느낌에 이불을 홱 걷어낸다. 잔뜩 젖은 잠옷바지와 봉긋하게 솟아있는 그 곳을 확인한 성열의 두 눈이 한라봉만해졌다. 수치심과 당혹감에 코 끝이 빨개지더니 이내 닭똥같은 눈물이 투둑투둑 이불 위로 떨어졌다.

 


*

 

몽정이란 무엇인가. 몽정 [ night pollution ]. 성숙한 남성이 수면 중에 성적 흥분을 하는 꿈을 꾸고 사정하는 것을 뜻하며 야간유정이라고도 한다. 아,참. 그리고 여기서 사정이란 '다신 안 그럴께요 제발 이번 한번만 봐주세요'하고 사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생식기에서 정액을 반사적으로 내쏘는 일로 생식기에 가해지는 자극에 의하여 사정 중추가 흥분하면 일어나는 그 사정을 말한다.

참고로 자위는 유아기때부터 자신의 성기를 만지며 노는 행위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성열은 성인치고 자위 횟수가 많이 낮았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아예 없는 편이었다. 자연스런 자위는 아동의 정상적인 발달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전 생애를 통해 다양한 기능과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지만, 이건 자위도 아닌 몽정이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열에겐 더할 나위없이 큰 충격으로 느껴질 수 있는 몽정. 서둘러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간 성열이 깨끗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자신의 잠옷 바지와 미끄덩하게 젖어버린 팬티를 욕조에 넣고 물을 가득 채웠다. 자위를 안 하는 탓인지 바지와 팬티에 묻은 정액의 양은 상당했다.

"…히끅."

변기 커버를 닫고 그 위에 앉은 성열이 훌쩍거리며 눈가에 대롱대롱매달린 눈물을 닦아냈다. 수치심이 빠져나가기도 전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명수에게 드는 죄책감. 명수를 대상으로 불순한 상상을 한 것 같아 명수에게 너무 미안했다. 물론 성열의 의지는 아니였지만 말이다. 잠옷 바지와 팬티를 빡빡 문지르고 물을 쭉쭉 짠 뒤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할까. 따로 말리다간 순재나 우현에게 들킬 게 분명했고 방안에 숨기자니 그것도 며칠 안 갈 것 같아 결국 버리는 쪽을 택했다. 방 안을 뒤져 못 쓰는 종이가방을 꺼내 젖은 바지와 팬티를 넣고 조심히 방문을 열었다.

"……."

조용한 집안을 둘러본 성열이 살금살금 현관문을 열고 나와 오르막길에 있는 헌옷수거함에 종이가방을 쑥 집어넣었다. 오르막길을 도로 내려오며 성열은 자신이 정말 성숙한 남성이 된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날, 8시 10분. 끝내 성규는 나타나지 않았다. 집 앞 대문에서 기다리던 우현은 성규가 자신을 피해 일찍 출근한 거라는 결론을 짓고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씨! 늦었어! 어떡해!"

초고속으로 세수와 면도, 머리까지 감고 나온 성규가 파다다닥 뛰어다니며 출근 준비를 했다. 핸드폰 배터리가 분리되어 알람이 울리지않은 건, 100% 본인 과실이었지만 안 깨운 봉신씨와 명수는 뭐란 말인가. 왜 안 깨웠냐고 버럭 물으니까 자신이 너무 곤히 자고 있었댄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양말, 양말! 내 넥타이!"
"너 밥은? 안 먹게?"
"누구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지금 밥먹게 생겼어?"

한 손으로 스킨을 착착 때려바르며 다른 한 손으로는 넥타이를 가방에 챙겨넣었다.

"나 갔다올게!"
 
정류장까지 걸어선 10분인데 버스시간은 5분밖에 남질않았다. 성규, 구겨신은 구두를 고쳐신으면서도 힐끗 고개를 돌려 우현의 벤츠의 유무를 확인한다.

"…기다리다 먼저 갔나."

아니 기다리긴 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서둘러 정류장으로 미친듯이 뛰어갔다. 때마침 버스가 정류장에서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는지 부릉 소리를 내며 검은 매연을 뿜어냈다.

"어어! 아저씨! 아저씨 나! 나!"

버스 옆구리를 팡팡 두드리자 허겁지겁 달려오는 성규를 알아본 운전기사가 버스문을 열고 성규를 태웠다.

"허억…허억 감사합니다아."

버스카드를 찍고 갈라진 앞머리를 정리하며 뒷자리로 가 앉았다. 아침부터 달려서 그런지 진심 토할 것 같다. 속을 가라앉히며 넥타이를 꺼내 매고 차림새를 곱게 매만졌다.

"휴우… 그나저나 남우현 얼굴을 어떻게 보냐."

회사가는 길이 이렇게 지옥같는 길처럼 느껴질 줄이야. 게다가 차까지 밀린다. 신입 사원 티를 벗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지각을 하다니! 왕창 꾸지람을 들을 게 분명했다. 볼네드 본사 근처 정류장에서 내려 또 한번 죽을듯이 달렸다. 일년에 두세번 달릴까말까한 일을 오늘 하루 다 달린 기분이다.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가려던 성규가 불투명한 사무실 문으로 사무실 안 동태를 살폈다. 우현의 자리가 텅텅 비어있었다.

"어라라. 저럴 사람이 아닌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늦어서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하고 허리숙여 사죄를 한 뒤, 후다닥 자리로 달려가 앉았다.

"제가 많이 늦었죠. 죄송해요."
"에이, 늦을 수도 있죠. 근데 왠일이에요? 남우현이랑 같이 오지도 않고."
"그게…제가 핸드폰 알람이 안 울려서요. 그나저나 팀장님이 안 보이네요?"
"오늘 외근갔어요. 남우현이 말 안 했어요? 맨날 같이 다니면서."
"아아…. 몰랐어요."
"싸웠어요, 우현이랑? 아까 아침에 남우현도 사무실 오자마자 나한테 성규씨 어딨냐고 묻던데."
"남우, 아니아니 남팀장님이 호 대리님한테요?"
"네. 어, 딱 전화왔네요."

호원이 넓은 화면에 뜬 우현의 이름을 성규에게 보여주며 전화를 받았다.

"어. 성규씨 왔냐고? 내 옆에,"

성규가 기겁을 하며 손사래쳤다. 말하지마요! 또,똥싸러갔다고해요! 아님 없다고 하던지! 대충 눈치를 챈 호원이 '내 옆에 없어. 오늘 좀 늦나봐'하고 말을 이어갔다.

"응. 알았어. 오면 전화줄께."
"뭐래요, 팀장님이?"
"성규씨 전화 안 받는다고 회사오면 전화달라는데요? 핸드폰 안되요?"

가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핸드폰을 켜자 부재중 전화 3통과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 부재중 전화 3통도 우현에게서 온 전화고 문자 한 통도 우현이 보낸 문자다. [벌써부터지각이에요?전화왜꺼놨어요.할말있으니까이거보면전화해요] 천천히 문자를 읽어내린 성규가 한숨을 쉬기도 전에 바로 우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21.


"표정이 왜 그래요? 사채업자한테 전화라도 왔어요? 하하하하."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거에요? 인상을 확 찌푸리며 말하자 호원이 금세 기가 죽어 '아뇨…'하고 고개를 돌린다. 핸드폰은 빨리 전화를 받으라며 손안에서 징징거렸다.  받을까말까 고민을 하는 동안 전화는 끊겨버렸다. '부재중 전화 1통 멋진 남팀장님' 아, 받을 걸 그랬나. 또 걸려오겠거니했지만 전화는 다시 걸려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책상 한 곳에 잘 얹어놓았다. 또 언제 전화가 올 지 모르기에.


*


"…몸무게가 줄었네."

45kg. 운동도 안 했는데 몸무게가 줄었다. 체중계 위에서 내려와 전신 거울앞에 섰다. 살이 빠진 것 같다던 성규의 말이 겉치레는 아니었나보다. 약간 헐렁해진 바지를 매만지고 가벼운 화장을 한 뒤 방에서 나와 성열의 방문을 열었다.

"성열아, 준비 다 했어?"
"……."

부쩍 길어진 성열의 머리와 허리에 닿을 듯한 자신의 머리를 손질하러 미용실에 가기로 했건만, 성열은 멍하니 침대에 앉아 한숨만 폭폭 내쉬고 있다. 왜 그래? 다정한 순재의 말투에 성열은 잠시 입을 달싹거리다가 또 한 번 한숨만 내쉬었다.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일어난 성열이 먼저 방을 나섰다.

"왜? 무슨 걱정있어?"
"…없어."

그러더니 길쭉한 발로 휙휙 먼저 마당으로 걸어나갔다. 쟤가 또 왜 이러지. 집 대문을 나서는 성열과 순재 뒤로 꽃밭에 가득 만개했던 꽃들이 이제 슬슬 때를 지나 꽃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재는 가볍게 머리를 다듬고 까만 갈색톤으로 염색을 했고, 성열은 귀를 덮던 긴 머리를 짜르고 구불거리는 베이비펌을 했다. 미용실 직원들과 순재는 귀엽고 러블리하다며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했지만 여전히 성열의 표정은 시무룩했다. 미용실을 나오면서도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지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박을 뻔한 성열을 순재가 얼른 잡아챘다.

"야! 조심해!"
"어? 어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오토바이 지나가는 것도 못 알아채?"
"……."
"너 요즘 진짜 이상하다. 감정기복이 너무 심한 거 아냐?"
"……."
"…성열아."
"…응, 누나."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니? 성열이 대답없이 입술을 앙 다물었다. 성열의 코 끝이 빨개지기 시작하더니 곧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왜, 왜 울고 그래!"
"…흐윽…."
"야,야! 성열아!"
"흐으…."

순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성열이 애처럼 울기 시작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 힐끗 한번씩 쳐다보며 지나갔다.

"그만 울어. 사람들이 내가 너 울린 줄 알잖아."

간신히 울음을 그친 성열이 울음을 참으려는듯 꺼이꺼이 숨을 들이마쉬며 눈가를 소매로 벅벅 닦아냈다. 일단 어디 앉아서 얘기 좀 하자. 성열을 데리고 조용한 까페 구석으로 들어간 순재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성열에게 건넸다.

"왜 운 거야, 도대체?"
"……."
"다른 사람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그건 아주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일인거야, 성열아."
"…누나."
"응, 성열아. 말해봐."
"…보고싶어."

앞 뒤 잘라먹은 말이지만 순재는 용케 알아듣고 미소를 지었다.

"너 그 사람 진짜 좋아하는 구나?"
"…응. 진짜 너무 좋아, 누나. 근데…근데…."
"근데 왜?"
"근데…흐윽…흐어엉!"

순재한테 말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여자가 아닌 남자고 옆집사는 명수라고. 그리고 어제 그 명수를 대상으로 몽정을 했다고.


*


우현이 외근을 나가서 마음이 편안할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 자꾸 우현의 빈자리가 신경쓰이고 허전하고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어진다. 어제 키스에 대한….

"우현이 자리에 맛난 거라도 있어요?"
"예?"

계속 우현이 자리만 쳐다보길래요. 호원의 말에 얼른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우현에게 전화는 커녕 문자도 오지 않았다. 마음이 편안하긴 무슨, 오히려 뒤숭숭하고 심란해죽겠다. 결국 핸드폰을 집어든 성규는 메세지창을 켜고 우현에게 보낼 말들을 적기 시작했다. [바빠요?] 아, 이건 아니지. 당연히 바쁠테니까. [뭐해요?] 뭐하겠어. 일하겠지. 다시 삭제. [밥은 먹었어요?] 장난하냐? 지금 밥 안부 물을때야?

"아아…."

우현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음좋겠다하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전화가 울렸다. '멋진 남팀장님'. 서둘러 핸드폰을 들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후우후우 몇 번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
[…….]
"…여보세요?"
[아, 받았어요?]

우현의 목소리. 성규는 뭔가 반가운 기세로 말하려다가 곧 목소리를 죽이고 무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네. 받았어요."
[신입사원이 벌써부터 지각질이에요?]

엥? 뜻밖의 말에 성규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지각하고 싶어서 지각했어요? 늦게 자서 그래요, 어제."
[어제 왜 늦게 잤는데요.]
"……."

지금 장난하는건가? 근데 막상 대답할 말이 딱히 떠오르질 않는다. '심장이 요란해서요', '마음이 심란해서요'. '그냥요'. 세 대답 중에 고민하다가 제일 무난한 '그냥요'를 선택했다.

"그냥요."
[그냥 왜요.]
"장난해요?"
[김성규씨랑 여태 대화하면서 지금이 전 제일 진지한데요?]
"……."
[끝나고 회사앞에서 기다려요.]
"왜요."
[어제 일, 그냥 넘어가려던 생각이었습니까?]

자신은 이렇게 복잡하고, 심란하고 우현 생각에 잠도 설쳤는데 우현은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듯해보였다. 뭔가 서운하다.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닌데……
 
"…알았어요."
[끊습니다]

그러더니 정말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진짜…."

개싸가지…. 밉다.


*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시원한 음료수와 초코바를 나눠준 동우가 뚝딱뚝딱 다시 모습을 갖춰가는 가게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작업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전문가만 모여있는건지, 모든 작업이 오차 없이 딱딱 진행되고 있다. 오권의 말에 따르면 간판 디자인은 예전 그대로 하되, 외형과 내부 모습은 조금 바뀐다고 했다. 아무렴 어떤가.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 해준다는데. 그나저나 성규와 친하다는 이유로 모든 돈을 일체 지불하지않아도 되는건가싶다. 사례를 하긴 해야할 것 같은데……

"저…장오권 실장님."
"네?"
"정말 제가 아무런 사례를 안 해도 되는건가요?"
"남우현이 다 알아서 한댔으니깐 남우현이 알아서 하겠죠, 뭘."
"…대략 전체적인 비용이 얼마정도 나올까요?"
"궁금해요?"

진지한 오권의 말에 동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충 손가락으로 계산을 마친 오권이 동우의 귓가에 작게 금액을 속삭였다.

"히익! 그,그렇게나 많이 들어가요?"
"그것도 그나마 싸게 한건데."

평생 한번 만져볼까말까한 금액에 동우는 떨리는 손을 패딩 주머니에 쑥 끼워넣었다.


*


"…바빠서 안 온 건가."

서빙을 하던 명수가 항상 성열이 앉아있던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막상 앉아있는 날엔 바빠서 잘 신경쓰지 못 하는데 이렇게 오지않는 날이면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같이 홀서빙하는 직원들도 성열이 레디락에 들어오면 명수가 주문을 받겠거니하며 명수를 부르거나 '명수 지금 잠깐 심부름갔어요. 곧 올꺼에요'하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명수의 부재를 성열에게 말해주곤 했다.

"오늘은 안 왔네?"
"네?"
"그 맨날 오던 하얀 친구."

일하면서 친해진 차차가 쟁반으로 성열이 항상 앉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게요. 바쁜가보죠, 뭐.

"외람된 말이지만 둘이 되게 묘한 거 알아?"
"묘하다뇨?"
"둘이 너무 잘 어울려서."
"예에? 아이, 누나도 참."
"농담아냐. 둘 다 훤칠하고 잘 생겨서 같이 붙어있으면 그림 되게 좋다니깐."

어색하게 웃으며 항상 성열이 앉던 자리에 앉은 손님들에게 메뉴판을 들고 다가갔다.


*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성규는 초조해졌다. 핸드폰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거울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가 살짝 웃어도 본다. 머리를 잘 매만지고 입술이 좀 튼 것 같아 가방에서 립보호제를 꺼내 펴바르자 호원이 그 모습을 빤히 구경하다가 물었다.

"성규씨 소개팅나가요?"
"예? 저,저요?"
"아니, 아까부터 초조해하면서 자꾸 꽃단장하길래요."
"제가 꽃단장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하하...하하...하아..."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성규가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으로 다가가 닫혀있던 창문을 열고 빼꼼히 고갤 내밀어 아래 로비를 확인했다. 비상등이 켜진 채 로비 앞에 세워져있는 우현의 벤츠를 보자 심장이 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헉…진짜 기다리고있네."
"누가요?"

헉. 익숙한 이 목소리. 고개를 들자 창문을 통해 자신의 뒤에 서있는 우현이 비쳐져보인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란 성규가 파드득거리며 몸을 움츠렸다.

"어,언제 왔어요?"
"밑에서 기다리려다가 서류 챙길게있어서 올라왔어요."
"아아…."
"못 볼 거라도 본 표정이네요?"

우현이 손가락으로 성규의 얼굴을 쿡 찔렀다. 왜,왜 찌르고 그래요! 볼에 박힌 손가락을 쳐낸 성규는 우현을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동우한테 뭘 사갈까 고민을 하며 사무실을 나가려던 호원이 다시 성규에게 다가와 물었다.

"성규씨. 동우형 뭐 좋아해요?"
"장동우요?"
"네. 뭐, 과일이라던가. 음식이라던가."
"걔 잡식성이라 다 잘 먹는데…."
"그래도 좋아하는게 있다면요?"
"음…. 아, 바나나. 바나나 되게 잘 먹어요. 고릴라같이 생겼잖아요."
"고마워요."

찡긋 손인사를 한 호원이 마트에 있는 바나나를 다 털어버릴 기세로 사무실을 나갔다. 우리도 가죠. 서류를 챙긴 우현이 다가와 가방을 잡은 채, 엉거주춤하게 앉아있는 성규의 등을 툭 쳤다.

"자,자꾸 툭툭 칠래요? 근데 어딜 가자는 거에요. 할 말 있으면 …그냥 여기서 해요."
"점심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배고파서 쓰러지기 직전이니까 그냥 가자는대로 따라와요."
"…점심은 왜 안 먹어요."

성규는 자신도 모르게 걱정스러운 어조가 튀어나와버렸다. 근데 전 날 키스한 사람들치고는, 평상시의 모습과 너무 다를게 없었다. 우현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바빠서 먹을 시간이 없었어요."
"바빠도 밥은 먹어야죠."
"그러니까 지금 밥먹으러가자구요. 할 얘기도 많으니까."
"……."

저렇게 할 얘기가 있다는 거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나 그거 먹고 싶은데."

우현의 말에 조수석에 앉아 손장난만 치던 성규가 우현의 옆모습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떤거요?"
"김성규씨가 사줬던 잡탕이요."

잡탕? 내가 언제 남우현한테 잡탕을 사줬었나?

"그 있잖아요. 시장가서 먹은거."
"떡볶이 전골 말하는 거에요?"
"아, 떡볶이 전골."
"엄연한 전골한테 잡탕이라뇨. 암튼 지금 이 시간이면 좀 아슬아슬하겠네요. 얼른 가야겠어요."

우현의 벤츠가 부드럽게 회사 로비를 빠져나와 빽빽한 도로에 접어들고 차가 느릿느릿해지면서 잠깐 대화할 틈이 생겼다. 하지만 우현도, 성규도 입을 꾹 다문 채 각자 다른 곳만 쳐다봤다. 결국 성규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할 얘기 있다면서요."
"……."
"그냥 내가 먼저 해도 되요?"

우현, 빨간 신호등에 브레이크를 잡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태연한 척 하지만 괜히 초조해지면서 핸들 잡은 손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성규의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지 긴장된다.

"어제 일은 없었던 걸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팀장님한테나 나한테나."

우현이 먼저 이런 말을 할까 싶어서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고 그 말을 듣는 우현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먼저 했으니깐, 사과도 내가 먼저 할게요. 어젠 내가 잠시 미쳤었나봐요. 미안합니다."
"난 사과할 생각 전혀 없었는데."

창 밖만 보던 성규가 그 말에 고개를 홱 돌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 남자가?

"무슨 소리에요?"
"말 그대로 난 사과할 생각 없었다구요. "
"뭐에요. 그럼 어제 키스는 당연히 내 잘못이었단 소리에요?"
"아뇨."
"그럼요."
"어제 누가 먼저 입술 붙혔는지 기억하죠?"

단도직입적인 우현의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그,그건…내가…."
"왜 먼저 했어요?"

투둥! 두 번의 콤보공격을 받은 성규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부,분위기 잡은 건 팀장님 먼저 아니었어요?"
"김성규씨 시절탱이에요? 분위기만 잡으면 남녀 안 가리고 먼저 입술 갖다댈 정도로?"
"전혀요! 그러는 팀장님은 왜 먼저 분위기 잡았어요?"
"아직 내 질문에 김성규씨 대답 안 했어요."
"아까 문자로 팀장님이 먼저 할 말 있다고 했잖아요. 먼저 대답해요. 왜 분위기 잡았는지."
"그 순간엔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실수…였어요?"
"아뇨."

아, 다행이다. 순간 들어오는 안도감에 성규 자신도 깜짝 놀라버렸다. 실수가 아니란 말에 안도감이 왜 느껴지는지 알 순 없었지만 뭔가…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실수 아니었어요, 난."
"……."
"김성규씨는 실수였나보네요?"
"……"
"…진짜 실수였어요?"

우현이 힐끗 성규를 한번 쳐다보고 굳은 말투로 물었다.

"그럼 실수가 아니면 뭐였어야해요?"
"……."
"묻잖아요. 실수가 아니면 뭐냐구요."

용기인지, 오기인지 모르겠다. 대답을 듣고 싶어 우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한참 고민하던 우현이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자꾸 내가 안 하던 짓을 해요."
"…?"
"…그냥 내 옆에 계속 두고 싶어."

성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단 표정이다. 뭘 옆에 두고 싶단거지…? 설마…나?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
"……."
"근데 확실한 건, 싫진 않다는 거야. 자꾸 생각나고 보고 싶어."

우현의 반말에 성규의 가슴이 두 배로 뛰기시작하면서 설레임이 폭풍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남자한테 이런 설레임을 느껴도 되나 싶다.

"너…."
"……."
"누가 반말하래?"
"아!!"

성규의 손이 우현의 뒷통수를 가격했다. 우현이 황당하단 얼굴로 성규를 쳐다보며 얼른 차를 갓길에 세웠다.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해?"
"어! 이게 이렇게 중요해! 반말하면 죽는다."

우현은 알고 있었다. 성규가 부끄러워한다는 걸.


*

 

 

 

 

"들어가서 쉬어요."

떡볶이 전골로 가득찬 배를 어루만지며 조수석에서 내린 성규가 차에 기대 자신을 보고 있는 우현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왜 반말해요?"
"이제부터 하려고."
"그럼 나도 이제 반,"
"안 돼, 넌. 하지마. 나만 할래. 암튼 결론이 뭐냐고."

성규의 억지에 우현이 피식 웃으며 '무슨 결론을 말하는 건데요?'하고 되물었다.

"아까 너가 한 말. 큼…자,자꾸 내가 생각나고 보고 싶다며."
"말했잖아요. 싫지않다는 것 말고는 무슨 감정인지 확실히 모르겠다고."
"싫지않다는 게 뭐야. 난 그런 복잡하고 애매모호하고 소신, 지조, 줏대없는 거 질색이야. 확실히 말해."
"그러는 김성규씨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
"거봐. 못 말하면서."

확실히 말해줘요? 우현의 말에 성규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김성규씨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요. "
"……."
"좋은거겠죠, 아마. 김성규가 남자인데도 이러는 거 보면. 그것도 많이. "

아아, 얼마만에 느껴보는 설레임인가.

"사실 어제까지만해도 몰랐어요. 내가 김성규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감정으로 대하고 있는 건지."
"…그럼 어떻게 알 게 된건데?"
"꿈에서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구요. 자기 감정에 솔직해지라고. 그래서 그러기로 했죠. 김성규씨도 나 때문에 성적취향 바뀌지않았나?"
"…난 아직이거든? 김칫국,김치찌개,김치동치미 마시지마."

쑥쓰러워 괜히 한 허튼 말에 우현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맘은 그게 아닌데.

"김성규씨는 나 어떻게 생각해요."
"……."
"좋다 싫다가 아니여도 되요. 두루뭉술하게 말해도 상관없고."
"……."
"창피해서 말 못 하는 거에요?"

끄덕끄덕.

"여태까지 이런 저런 말 하면서 난 안 창피했을 것 같아요? 나 원래 다른 사람한테 내 맘 잘 안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그런데도 다 내보였잖아요.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말해봐요."
"…좋진않아."
"……."
"근데 뭐…싫지도 않아."

 대답을 마친 성규가 조금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향해 달려갔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22.


우현은 대문을 닫고 들어가는 성규를 빤히 쳐다보며 기분좋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차에 기대 걸쭉한 한숨을 내뱉는다. 아직 이럴때가 아닌데. 아직도 가슴 한 켠에 순재가 남아있으면서 이래선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다시 행복해해도 되는 걸까? 우현, 아직 불이 켜져있는 자신의 집을 한번, 그리고 성규네 집을 한번 번갈아 쳐다본다. 스스로 자책하며 마른 세수를 했다. 어쩌자고 이런 짓을 한 걸까. 저지르고 난 뒤에 느끼는 후회는 쓰디 썼다. 성규와 옛 연인 순재 사이에서 갈등하다니. 자신은 정말 염치없는 놈이었다. 


*


대문을 닫고 들어온 성규가 마당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난리 부르스를 춘다. 꽃밭 앞에서 히죽히죽 웃으며 몸을 베베 꼬다가 평상위에 드러누워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나쁘지않은 떨림과 기분좋은 설레임이 건장한 성규의 몸을 붕 뜨게 만들었다. 내가 게이는 절대 아니었는데. 경우의 수는 딱 두 개다. 내가 뒤늦게 내 취향을 발견한 케이스거나, 혹은 남우현이 남녀불문하고 통하는 매력의 소유자거나. 전자의 경우인 것도 같았고 후자의 경우인 것도 같았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한참 오두방정을 떨던 성규가 갑자기 동동 구르던 발을 뚝 멈춘다. 그럼 순재씨랑은 어떻게 되는거지? 옛 연인이긴했지만 저번에 말하던 늬앙스로 봐선, 분명 아직 마음이 남아있던 늬앙스였는데. 설마 즉흥적인 마음은 아니겠지?

"…아닐꺼야."

우현은 절대 즉흥적인 사람이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그럼 순재를 깨끗하게 정리한건가…. 내일 한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평상에 드러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구수한 청국장 냄새가 폴폴 풍긴다. 가방을 벗어 방침대에 던져두고 정장 마이만 벗은 뒤 소매를 두어번 걷으며 식탁에 앉았다.

"김명수는?"
"올 시간 다 됐는데도 안 오네."
"내가 전화해볼게."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연결음이 얼마 안 가 명수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형! 전화 잘 했다.]
"지금 밥상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어. 왜 안 와?"
[시끄럽고 지금 집앞으로 좀 나와봐.]
"지금? 나 방금 들어왔는데?"
[잔말말고 나와봐, 좀.]

그러더니 전화가 뚝 끊겼다. 싸가지없는 놈. 궁시렁거리며 명수의 뉴발 슬리퍼를 주섬주섬 신고 밖으로 나왔다. 대문을 열기도 전에 명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야, 이제 우리 형 나오니까 얼른 가줄래?"
"성규오빠? 그럼 인사드리고 가야겠다! 고등학교때 처음 봤었는데."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서둘러 대문을 열고 나왔다. 명수에게 찰싹 달라붙어있는 미희가 성규를 보고는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어머, 성규오빠! 오랜만이에요!"
"어어. 아,안녕. 명수 여자친구?"

무슨 개소리야. 명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옆에 달라붙어있는 미희를 조금 거칠게 떼어냈다. 그러던말던 미희는 밝게 웃으며 성규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저 기억 안 나세요? 고등학교 다닐때 제가 맨날 선물 갖다드렸는데…. 저 미희에요, 장미희!"
"아, 미희! 그래, 기억난다."

가물가물한 기억이 점점 또렷해졌다. 고등학교 때 매일 자신을 찾아와 명수에게 선물을 전해달라며 기분나쁜 선물셔틀을 시켜댔던 나쁜 기집애잖아.

"그나저나 무슨 일인데?"
"아니 오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솔로끼리 그냥 좋게 한번 만나보자고 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이에요?"

미희는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말투로 말했다. 짧은 단발에, 짙고 길게 늘어트린 눈꼬리, 요염한 옷차림.

"저기 미희야. 잘못은 아닌데 딱 봐도 넌 내 동생 스타일로는 영 아니다."
"예? 제가 왜요!"
"거 봐. 우리 형도 똑같은 말 할꺼라고 그랬지? 얼른 가라. 형, 들어가자."
"잠깐만요! 성규오빠! 명수야!"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미희를 뒤로하고 대문을 쾅 닫았다. 대문을 닫은 뒤에도 미희는 자리를 떠나지않고 계속 떠들다가 곧 제 풀에 지쳤는지 격한 구둣소리를 내며 집으로 돌아갔다.

"성격좋네. 화끈하고."
"장난해? 아, 옷에 향수냄새 배었어."

옷에 배인 향수냄새를 팡팡 턴 명수, 진저리를 치며 먼저 집안으로 쏙 들어간다. 쟨 얼굴도 잘생긴게 왜 연애를 안 하는 지 모르겠네. 끌끌 혀를 차며 뒤따라 들어가려던 성규의 눈에 하나둘씩 꽃잎을 떨구고 있는 꽃들이 들어왔다.

"조만간 다 떨어지겠네."

흙에 쌓인 꽃잎들이 눅눅해져있었다. 아마 비가 한바탕 오는 날이면 꽃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만 남겠지. 우현의 고백아닌 고백을 들은 탓인지 괜히 센티멘탈해지는 밤이다.


*


"이번 주말에 고기 구워먹자."
"고기? 당연히 좋지."
"나도."

저녁밥을 먹던 중, 봉신 씨의 제안에 명수와 성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럼 성규는 내일 가서 회사 팀장한테 주말에 시간 비워두시라고 해."
"뭐? 남우현은 왜?"
"넌 회사 팀장이 니 친구니?"
"아니. 나보다 두 살어려. 동생이야."
"회사에선 너보다 어른이야."
"치이. 남우현이니까 남우현이라고 하지."
"시끄러. 아무튼 고기 구워먹으면서 냄새 폴폴 풍기느니 그냥 식사 초대해서 같이 먹는게 나을 것 같아서. 저번에 아버지 기일날 그 먼거리를 얻어탔는데 사례도 못 했잖아. 그리고 누가 그러던데 요즘엔 실력보다 인맥이라고 하더라. 세상에, 그 팀장이 서동그룹 아들내미라면서?"

찌개를 떠먹는 성규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명수도 처음 듣는 얘긴지 깜짝 놀라며 성규에게 재차 물었다.

"진짜야? 저기 김치냉장고 만든 회사?"

명수의 숟가락이 부엌 한 구석에 있는 김치냉장고를 가르켰다. 김치냉장고 모서리에 써있는 서동의 이니셜. 김치냉장고뿐만 아니라 거실에 놓인 TV, 명수의 스마트폰, 그리고 성규가 다니는 직장까지. 모두 서동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응."
"넌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 미리 말도 안 해주니? 암튼 성규 너, 무조건 잘해."

줄을 잘 서야 활짝 피는거야, 인생이. 알았지? 봉신 씨의 말을 꾸역꾸역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옆집 팀장형이랑 친해지면 나 핸드폰 저거 공짜로 바꿀 수 있는거야? 그 핸드폰도 서동전자에서 만든건, 읍."

옆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는 명수의 입에 삶은 양배추를 한가득 쑤셔넣었다.


*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풍기는 따끈한 음식냄새에 우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요 며칠간 매일 잠들어있던 순재가 머리를 질끈 묶고 분주히 움직이며 저녁준비를 하고 있었다. 찌개에 두부를 썰어넣다가 우현의 인기척을 느낀건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린다.

"깜짝이야! 왔으면 얘기를 하지 왜 멍하니 서있어?"
"저녁 준비하는거 하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머리 염색했네? 좀 짧아진 것도 같고."
"머리가 너무 긴 것 같길래 아까 낮에 성열이랑 미용실 다녀왔어. 성열이 머리도 다듬어주고."
"잘 어울린다."
"다행이네. 얼른 옷 갈아입고 와. 찌개 거의 다 됐어."
"응, 알았어."

성규와 떡볶이 전골을 먹긴 했지만 순재가 정성스레 준비한 저녁을 마다할 순 없다. 정장 마이를 벗으며 방으로 들어가 무거운 손목시계와 넥타이를 풀렀다. 그제야 몸이 좀 가벼워진 기분이다. 왁스칠한 머리를 긁적거리며 성열의 방으로 향했다. 두어번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침대에 누워있는 성열이 보인다. 성열아, 저녁 먹자. 우현의 목소리에 드러누워있던 성열이 먹구름이 가득 낀 얼굴로 주섬주섬 일어났다. 머리 이쁘게 했네. 몽글몽글해진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하는데도 여전히 우울한 얼굴이다. 무슨 일 있었나?


*


저녁을 먹고 순재와 마주보고 식탁에 앉아 차를 마셨다. 우현은 씁쓸한 블랙, 순재는 상큼한 홍차.

"근데 성열이 무슨 일있어? 표정이 어둡던데."
"아,참. 성열이 얘기를 깜박했네. 좋아하는 사람 생겼대, 성열이."
"진짜? 누군데?"
"그건 말 않더라구. 근데 짝사랑인가봐. 첫사랑이 짝사랑이라니. 너무 로맨틱하지않니."

순재가 찻잔을 어루만지며 기분좋은 웃음을 지었다.

"로맨틱은 무슨. 짝사랑이 얼마나 괴로운 건데."
"그래도 외사랑보단 로맨틱하잖아."
"아무튼 성열이 이제 다 컸네. 사랑도 하고."

그러게. 정말 다 컸네. 순재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정말 모든 걸 잃었을땐 다시 이렇게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순재야."

그러던 중에 우현이 갑자기 진지하고 나긋한 말투로 순재의 이름을 불렀다.

"어. 왜?"
"……."

망설이는 우현. 하기 힘든 말인지 계속 머뭇거린다. 순재가 '나한테 뭐 할 말 있어?'하고 물어도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응. 할 말 있어."
"할 말 있으면 하면 되지. 왜? 무슨 일인데?"

말하진 않고 순재만 빤히 바라본다. 순재도 이상한 느낌을 받은건지 말없이 찻잔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순재야."
"응. 말해."
"…나 사실 말야."
"……"
"……."
"……."
"좀 졸려."
"…응?"

우현, 눈가를 비비며 피식 웃는다.

"졸려서 먼저 들어갈게. 뒷정리 도와주려고 했는데 미안."
"겨우 그 얘기 하려고 뜸들인거야?"
"졸린 걸 어떡해."
"난 또 심각한 얘긴 줄 알고 깜짝 놀랬잖아! 어휴, 진짜…. 도와달라고 안 할꺼니까 얼른 들어가서 자."
"미안미안. 먼저 잘게."

우현이 방으로 들어가고 홀로 주방에 남은 순재가 우현이 마신 커피잔을 싱크대에 옮기려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복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렸다. 며칠전부터 명치 아래쪽이 지끈지끈 쑤셔오더니 방금 복통은 다리힘이 풀릴 정도로 극심했다.

"…아아…."

복통이 금세 사라지긴했지만 기분이 영 찜찜했다. 방으로 들어온 우현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사실 할 말은 많았다.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 것 같은데 마음 한 켠에 여전히 너가 놓여져있어서 고민이라고. 하지만 막상 순재앞에선 입도 뻥끗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더한 건, 이제 순재 얼굴만 보아도 성규 얼굴이 떠오른다는 점이었다.

"…어떡할까."

우현이 손을 뻗어, 어느새 침대 맡으로 자리가 옮겨져있는 갓파 인형을 잡아들고 물었다. 어떻게해야 누구도 상처받지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갓파 인형은 말이 없었다.

"정말 고민을 들어주기만 하는구나."

성규도 자신이 준 엽기토끼에게 고민을 이야기할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인형을 침대 옆에 뉘여놓고 잠들 준비를 하는데 '띠링'하고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충전기에 꽂혀져있는 핸드폰을 집어들자 성규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잘자요]. 분명 한참을 고민하다가 보낸 신중한 세글자일게 분명했다. 스물여덟살 먹은 남자가 이렇게 귀엽게 느껴질 수도 있다니. 귀엽다를 연신 중얼거리며 답장을 적어내려갔다. [아깐 반말하더니]. 답장을 보낸지 몇 분 되지도 않아 바로 답장이 온다. [내맘이야.] 글자만 읽는데도 성규의 말투가 들렸고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그 정도로 우현은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성규에게 푹 빠져있었다.


*


인근 마트에서 바나나와 바나나주스를 가득 산 호원은 제법 추운 날씨에 몸을 부들부들떨며 서둘러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동우네 초인종을 누르면 항상 안에서 '누구세요?'하는 달달한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오늘은 초인종을 두어번 반복해서 눌러도 잠잠하다. 혹시 자나? 아닌데. 들어올때 보니까 분명 불 켜져 있었는데. 마트 봉지를 고쳐잡고 조심스럽게 문을 콩콩 두드렸다.

"동우형. 나에요. 호원이."
[……]
"동우형!"
[……]
"…이상하네."

혹시나하는 마음에 문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너무 쉽게 문이 열린다. 현관문앞에 놓인 신발로 봐서는 집에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열린 문틈사이로 집안을 슥 둘러보며 다시 한번 동우를 불렀다.

"동우형!"

현관문을 꼭 닫고, 동우의 앙증맞은 운동화 옆에 가지런하게 구두를 벗었다. 식탁에 마트 봉지를 내려놓고 다시 한번 동우를 부르려고 할 때, 욕실 문이 벌컥 열리고 문 뒤에 숨은 동우가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다.

"아, 미안! 샤워하느라 못 들었네. 편하게 앉아있어."
"네,네. 혀,형."

호원은 떠듬떠듬거리며 소파로 가 앉았다. 살짝 보였던 동우의 하얗고 뽀얀 가슴팍과 야시시한 쇄골. 호원은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손에 고인 땀을 무릎팍에 슥슥 닦아냈다. 잠시후, 물소리가 멈추고 회색 츄리닝바지에 달라붙은 하얀 나시를 입은 동우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거실로 나왔다. 순간,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래 기다렸지?'라는 동우의 말이 슬로우 모션처럼 '오으래애 기이다으려우웃지?'처럼 들려온다. 넋이 빠진 호원의 모습에 동우가 호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호원아?"
"아, 네. 형."
"방금 너 표정 되게 웃겼다."
"…형."
"응?"

갑자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호원이 동우의 둥글고 부드러운 어깨를 덥석 잡았다.

"하,한번만 안아봐도되죠!"
"뭐?"
"잠깐, 한번만요! 미안해요, 형!"

그러더니 별안간 동우를 덥석, 그것도 아주 꼬옥 끌어안은 호원이 몇 초 동안 동우를 놓지않았다. 맞춤 제작한 것처럼 한품에 쏙 안기는 동우에게선 달큰한 살 내음이 났다.

"…호원아?"
"……."
"너…안 좋은 일 있었구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 괜찮아."

동우가 부드러운 손길로 호원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게 아닌데. 졸지에 우환있는 애가 되버렸다.

"아, 형. 저 그만 가볼께요! 미안해요 진짜!"
"응? 호원아!"

동우를 확 떼어낸 호원이 후다닥 집을 뛰쳐나왔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8시 10분. 대문이 열고 나오던 성규는 집앞에 세워진 우현의 차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얼른 차에 올라탔다. 

"잘 잤어요?"

우현의 물음에 성규가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거렸다.

"왜 아무 말이 없어요?"
"그냥…요."
"반말 존댓말 섞어쓰기로 한 거에요?"
"말했잖아요. 내 맘이라고. 내가 쓰고 싶을땐 쓸테니까 걱정말아요."
"걱정 안 해요."

우현이 피식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성규, 운전하는 우현의 모습을 쳐다본다. 항상 멋드러지게 왁스로 매만진 머리, 깔끔한 정장, 손목에서 반짝거리는 시계, 그리고 반반한 얼굴까지. 도대체 이 남자가 안 가진 게 뭘까. 성규는 이제 아예 대놓고 우현을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부담스럽게."
"그냥 팀장님이 안 가지고 있는 게 뭘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봤어요."
"내가 안 가진거요? 없는데."

참나. 기가 찼지만 또 막상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남우현씨."

남우현씨? 갑작스런 호칭에 우현이 고개를 돌려 성규를 쳐다봤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내가 묻는 질문에."
"……."
"순재씨랑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 거에요?"

신호등이 빨갛게 변하고 차가 멈춰섰다. 뜻밖의 질문에 우현이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묻잖아요. 순재씨랑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냐고.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이 성규가 재차 물어왔다.

"난 남우현씨가 순재씨와 어떤 사이던간에 신경 안 써요. 다만, 순재씨 좋아하고 있으면서 나한테 어제 그런 말 한 거면 나 못 참아요."
"……."
"양다리 걸치지 말란 얘기에요. 순재씨 좋아하면 확실히 순재씨한테 가고 아니면 나한테만 확실히 해요. 난 연애라는 종목에선 관대함같은 거 절대 없어요. 순재씨 생각하면서 나 만나는 거면, 나 절대 그 쪽 안 받아줄거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알겠어요."

그럼 됐어요. 짤막한 성규의 대답과 함께 신호등이 빨간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23.


"이번주 주말에 시간 되요?"
"데이트 신청이에요?"
"그거겠어요?"

금세 능글맞아진 우현의 말에 성규가 고개를 내저으며 '엄마가 식사 대접하고 싶으시대요. 저번에 아버지 기일날 우리 도와준 것도 있고 해서요'하고 대답했다.

"순재씨랑 성열씨도 같이 와요."
"그냥 빈손으로 가도 되는 거에요?"
"걱정마요. 아무튼 주말에 시간 되죠?"
"없더라도 만들어야죠. 아, 참. 그리고 나 오늘도 외근이에요."

오늘도요? 성규가 차에서 내리며 못내 아쉬운 말투로 말했다.

"네. 아쉽나봐요?"
"전혀요. 팀장님 없으니깐 농땡이 좀 까야겠네요."
"농땡이까는 직원한텐 월급 안 줘요. 아무튼 끝나면 데리러 올게요."
"피곤할텐데…."
"괜찮아요. 얼른 올라가요. 또 지각하지말고."

로비로 향하는 성규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던 우현이 성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연애라는 종목에선 관대함같은 거 절대 없어요. 순재씨 생각하면서 나 만나는 거면, 나 절대 그 쪽 안 받아줄거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성규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며 자신을 다그치는 것 같았다. 순재와 성규사이에서 고민하는 자신을 어떻게 안 건지… 정곡을 송곳으로 쿡쿡 쑤시는 기분이다.


*


"안녕하세요 호 대리님."
"성규씨 좋은 아침… 전 나쁜 아침."

호원은 책상에 볼을 대고 누워 손만 살짝 들어보였다. 어디 아프세요? 성규가 물어도 대답없이 한숨만 포옥포옥 내쉰다.

"네…. 마음이 아픕니다, 마음이."
"예? 마…음이요?"
"휴우…. 우현이는 오늘도 외근이래요?"
"네. 많이 바쁜가봐요."
"바쁠때죠. 점점 연말이 다가오니까."

우현이 없는 사무실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


"정말 그렇게 우울한 표정 지을꺼야?"
"……."

앞 마당에 이젤을 세우고 성열을 벤치에 앉힌 뒤, 한참 스케치를 하던 순재가 우울한 성열의 표정을 보곤 캔버스에서 손을 뗐다. 좀 웃어봐, 활짝. 한숨을 내쉰 성열이 자세를 고쳐잡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뭐야 그게. 입만 웃고 있고 눈은 아직도 우울하잖아."
"…그냥 누나가 상상해서 그리면 안 돼?"
"표정지어주는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상상까지 부탁을 해? 잔말말고 얼른 웃어. 씨익."
"…휴우."

결국 성열이 눈을 접어가며 환히 웃자 그제서야 만족한 순재가 스케치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성열아. 완전 어색하다."
"……."
"흠…. 성열아."
"으응."
"너 그 좋아한다던 사람 어떤 사람이야?"

성열이 잠시 눈을 도르륵 굴리며 명수를 생각했다. 명수는 어떤 사람인가. 일단 피아노를 칠 때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멋졌다. 그리고 자상한 말투와 따뜻한 미소….

"…어머, 이성열 너 되게 웃긴다."
"응?"
"그 사람 생각하니깐 아주 헤벌레해져선 볼까지 빨개졌네? 그 표정 그대로 있어봐."
"……."

순재의 손이 재빠르게 성열의 모습을 캔버스로 옮겨 그렸다. 몽글몽글한 머리를 슥슥 매만진 성열이 힐끗 캔버스를 살피며 물었다.

"…잘 되가고 있는거야?"
"응. 완벽해. 누가 보면 사진인 줄 알겠다. 어! 가만있어. 자세 바꾸지말고."
"…나 배고파."
"기다려. 이것만 그리고 맛있는 거 해줄게."

사각사각. 서걱서걱. 캔버스에 연필닿는 소리와 간간히 자동차, 혹은 오토바이지나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참 평화로운 동네다.

"성열아."
"응."
"짝사랑이 힘들다는 거 잘 알고 있지?"
"……."
"다 됐다."

순재는 손에서 연필을 놓으며 기지개를 켰다. 캔버스엔 성열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있었다.

"고백해버리는 건 어때?"
"…못 해."
"왜 못 해?"
"……못 해."
"못 하는게 아니라 안 하는 거겠지."

성열이 또 한번 한숨을 내쉰다. 누나가 몰라서 그래….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너가 모자른 게 뭐야? 얼굴 잘 생겼지, 키도 크지, 성격도 좋지."
"…그게 아니라,"
"쫄지말고 확 고백해버려, 남자답게."

남자한테 남자답게 고백한다고 통하려나? 어깨를 추욱 늘어트린 성열, 벤치에 옆으로 홱 누워버린다. 복잡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있는 성열의 얼굴을 보며 순재가 기분좋은 미소를 지었다.

"사랑때문에 고민도 하고, 진짜 기특하네."
"……."
"오늘의 명언! 어느 순간이 오면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행동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실도 없다. 자, 이제 들어가자."

성열의 손을 잡아 일으킨 순재는 이젤과 캔버스를 챙겨 집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가려던 성열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오, 아파죽겠네."

이건 분명, 명수의 목소리렷다! 근데 지금 시간이 오후 12시 50분. 명수는 레디락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쪼르르 울타리로 다가간 성열이 고개를 살짝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손목을 매만지며 내리막길을 걸어내려오는 명수가 보였다. 반가움에 '명수야!'하고 부를 뻔한 성열이 얼른 몸을 숨겼다. 꿈속에서 자신에게 키스했던 명수의 모습이 아른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가서 아는 척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는데,

"거기 성열이야?"

명수가 먼저 자신을 불러주었다. 으응, 안녕. 성열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움츠려있던 몸을 일으켰다.

"성열아. 안 바쁘면 나 좀 도와주라."
"어어. 아,안 바빠. 근데 알바할 시간아냐?"
"대걸레빨다가 넘어졌는데 손목을 접질러서 조퇴 받았어. 손목 느낌이 영 안 좋네."

오른쪽 손목뿐만 아니라 정말 오지게 넘어졌는지 왼쪽 볼에도 진한 생채기가 나있었다. 어느새 대문을 열고 나온 성열이 인상을 찌푸리며 광대에 난 상처를 살폈다.

"…아프겠다."
"조금. 집에 붕대 감아줄 사람이 없어서 난감했는데 잘 됐다. 나 붕대 좀 감아줘."
"병원 안 가봐도 돼?"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살짝 삐끗해서그래. 들어와."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명수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가자 가운데에 평상이 놓여있는 아담하고 예쁜 마당이 보인다. 한 쪽엔 꽃밭이 있었고 다른 한쪽엔 싱그런 야채밭이 있었다. 대문으로 살짝살짝씩 볼땐 몰랐는데 막상 들어와보니 꽤 넓직하다. 집안으로 들어갔던 명수가 구급상자를 들고 평상에 철퍽 앉았다. 주춤거리며 다가간 성열이 압박붕대를 집어들고 조심스럽게 명수의 오른손을 잡아들었다. 심장이 또 쿵덕쿵덕거린다. 명수가 아프지않게 최대한으로 집중하면서 꼼꼼히 붕대를 감고 반창고로 튼튼하게 고정시킨뒤, 스프레이 파스를 고루고루 뿌렸다. 다음으로 볼에 난 상처 차례. 구급상자안에서 마데카솔을 꺼내 새끼 손가락에 살짝 짠 성열이 조심스럽게 명수의 볼에 새끼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아으…."
"아, 미, 미안. 많이 아파? 미안해…."
"아냐아냐. 괜찮아."
"…호오."

성열이 상처를 호호 불며 조심스럽게 연고를 발랐다. 살짝씩 불어오는 숨결이 볼을 간질간질거리게 만든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명수와 성열은.

"머리, 귀엽다. 대따 잘 어울려."
"…어어…."

성열의 손이 파르르 떨리기시작했다. 구급상자에서 밴드를 꺼내 껍질을 까면서 몇 번이나 밴드를 손에서 놓쳤는지 모른다. 밴드 껍질을 벗겼을때 명수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아, 선웅이형. 왜요?"
[왜긴 왜야. 자빠지고 집 잘 갔나 걱정되서 전화했다. 병원 안 가봐도 돼? 차차 말로는 완전 종잇장 구겨지듯이 넘어졌다던데.]
"그때 제가 낙법을 딱 써가지고 손목만 접지른 거에요. 다른 사람이었어봐. 성한데없이 온 몸 죄다 부러졌지."
[북극곰 달나라가는 소리하지말고. 손목 관리 잘 해라. 찜질 꼭 하고. 너 없으면 가게 매상 떨어진다. 알지?]
"예예. 알았어요. 걱정말아요."

성열이 '다 됐어'하며 주섬주섬 밴드 껍질을 모아, 마당에 있는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와…. 완전 병원에서 한 것 같네. 이제 다치면 병원 안 가고 너한테 가면 되겠다."

농담조의 말이었지만 성열은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라버렸다.

"누나가 나 찾겠다. 가,가볼게."

그리고 다치지마. 제일 중요한 마지막 말을 아주 작게 중얼거린 성열이 빠른 걸음으로 성규네 마당을 나왔다. 그러던말던, 명수는 연신 감탄하며 성열이 감아준 붕대만 만지막만지작거렸다. 역시 짝사랑은 어렵다.
 

*


항상 거지에 빙의하며 복스럽게 먹는 성규가 한숨만 내쉬고 밥은 영 줄지않는 호원을 보며 끌끌 혀를 찼다.

"호 대리님. 밥 앞에 두고 한숨 쉬면 밥맛 떨어져요. 얼른 안 먹고 뭐해요? 반찬이 맘에 안 들어요?"
"저 반찬투정할 나이아니거등요…."
"그럼 집에 우환있어요?"
"아뇨오…. 먹을께요…."

그러더니 밥 두세알을 집어 입안에 넣고 무언갈 골똘히 생각하기만 한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성규, 호원의 숟가락을 덥석 집어들고 식판에 쌓인 밥을 푹푹 떠 호원의 입가에 들이댄다.

"아~ 하세요, 아~"
"휴우… 아…."
"반찬 많은데 꼭 한숨이랑 같이 밥을 먹어야겠어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성규가 먹여준 밥을 우물우물 씹어삼킨 호원이 젓가락으로 멸치볶음을 집적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제 친구 녀석 하나가 고민에 빠진 것 같아서요."
"호 대리님 친구면 남우현…팀장님이요?"
"아뇨. 성규씨는 내가 걔 말곤 친구가 없을 것 같아요?"
"…큼. 암튼 계속 말해봐요. 그래서요?"
"암튼 A라는 친구 놈이 사랑에 빠졌는데요, 그게…상대가 남자에요. 동성연애,"
"푸흡!"
"으악! 더럽게 뭐에요!"

동성연애라는 말이 괜히 제 발이 저렸던 성규가 깜짝 놀라며 밥알을 호원의 얼굴에 잔뜩 튀겼다.

"미,미안해요 호 대리님. 너무 놀래서…."
"에이씨…."

테이블위에 놓은 냅킨을 북북 뜯어 호원에게 건넸다. 밥알들을 후둑후둑 떨어트린 호원이 정말 더럽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갔다.
 
"아무튼 그 A라는 친구가 B라는 남자만 보면 끌어안고싶고 자꾸 예뻐해주고싶고 그런데… 그 B는 A가 자기를 좋아하는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냥 좋은 동생으로만 생각해요."
"…네네. 계속 얘기해봐요."
"이게 끝인데 뭘 더 얘기해요."
"아아…그렇구나."
"어떡하면 좋을까요."
"뭘요?"
"지금 친구 상황을요."
"그 A라는 친구분이 B라는 남자분을 정말로 사랑하고, B분이 A분을 정말 좋은 동생으로 생각한다면, A분이 고백을 한다해도 B분이 모질게 내치진 않겠죠? 당황은 하겠지만요."
"……."
"무지 친한 친구인가봐요. 이런 고민은 쉽게 얘기하기힘들텐데. 친구분한테 전해요. 솔직하고 담백하게 얘기해보라고. 에잉, 국 다 식었네. 어서 먹어요. 고민은 친구한테 맡기고."

성규는 식어버린 아욱국을 숟가락으로 휘이휘이 저어 후루룩 들이마셨다.

"솔직하고 담백하게…솔직담백…."

호원이 성규가 했던 말을 연신 중얼거렸다.


*


"와… 진짜 빠르다."

가게는 정말 빠른 속도로 모습을 갖추어갔다. 몇 주 전에 큰 불이 났던 가게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벌써 인테리어에 들어가고 있었다. 전기 배선은 이미 예전에 끝냈고 동우는 관계자와 함께 어디에 주방을 둘 것 인지, 테이블은 대충 몇 개를 놓을 것인지 조금 더 넓어진 가게안을 살피며 상의를 했다. 새 자재의 냄새와 페인트 냄새로 머리가 지끈지끈거리긴 했지만 자신의 전재산이었던 가게가 다시 모습을 갖추어간다는 설레임과 즐거움에 자꾸 헤실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위이이잉 - 드릴 소리와 지이이잉 - 하는 전기톱 소리에 묻힐 뻔한 문자 알림음을 간신히 듣고 얼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호원에게서 온 문자였다.

[점심먹었어요? -호원이-]

아,참. 어제 바나나 고맙다고 먼저 전화한다는게 깜박했네.

[아니~아직^o^근데내가바나나좋아하는건어떻게알았어?]

액정이 꺼지기도 전에 바로 칼답장이 온다.

[그냥…느낌이랄까요. 오늘저녁에시간있어요? 나 할말있는데. -호원이-]
[무슨 할말?? 급한거면 지금 해도 되는데!]
[급하진않은거에요.끝나고 데리러갈게요 -호원이-]
[웅.이따봐]
[네형. 보고싶네요. -호원이-]

마지막 '보고싶네요'라는 다섯글자에 잠시 움찔한 동우가 이내 해맑게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응~나도 보고싶네!]

이 문자가 호원이 동우에게 고백하게 된 시발점의 하나였다.


*


퇴근을 하고 회사 로비로 내려가자 우현이 조수석 문에 기대어 성규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수석 문에 기댔을 뿐인데도 온갖 폼은 다 난다. 저렇게 멋드러지는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화보찍어요?"
"아뇨. 김성규씨 에스코트하는데요?"

그러더니 씨익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어준다. 다른 직원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잖아요. 투덜거리며 차에 올라탄 성규가 얼른 차문을 닫았다.

"이제 맨날 외근인거에요?"
"맨날은 아니고 듬성듬성?"
"밥은 먹었어요?"
"아뇨. 집가서 먹으려구요. 순재,"
"……."
"…가 저녁밥 해놨거든요."
"아아…네."

순재 얘기에 차 안이 금세 썰렁해졌다.

"그러지마요."
"…뭘요?"
"순재씨 얘기, 꼭 하면 안되는 얘기인 것처럼 말하잖아요. 나 그렇게 속좁은 사람 아니에요. 그냥 편하게 해요. 그 쪽이 불편해하면서 말하면 나도 불편하니까."
"내 생각이 짧았어요. 미안해요."
"미안까지야."

이럴때보면 생각하는 깊이나 배려심 면에선 성규가 두 살 더 많다는게 확연히 느껴졌다.

"난 너가 신중한 결정을 할거라고 믿어."
"…또 반말이네요."
"말했잖아."

내 마음대로라고.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계단에서 굴렀다고? 븅삼이 따로 없어요, 븅삼이."
"앗, 차거!"

차가운 얼음팩을 거실에 드러누워 손목을 주물주물거리고 있는 명수에게 던져준 성규가 혀를 쯧쯧 찼다.

"그래도 혼자 병원은 찾아가서 붕대감고 왔네? 병원에서 뭐라디?"
"병원 안 갔어. 성열이가 감아줬어."
"옆집 성열씨가?"
"응."

완전 의사 솜씨네.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성규가 힐끗 안방에서 마스크팩을 하고 있는 봉신 씨를 보며 물었다.

"엄마. 나 쌍수 시켜준다한 거 안 까먹었지?"
"당연하지."
"…근데 그거 그냥 돈으로 주면 안 돼?"
"왜?"
"회사땜에 바빠서 언제 할 지도 모르는데…확실히 엄마한테 돈은 받아놔야할 것 같아서…."
"내가 한입갖고 두 말 할까봐 그러니?"
"아니 그냥…."
"너 혹시."

어디 빌린 돈 있어서 그래? 봉신 씨의 진지한 물음에 성규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내가 함부로 돈 꾸는 거 봤어? 그냥 내가 갖고있어야 편할 것 같아서 그렇지.

"얼마정도야, 수술비가."
"대충 100만원 전후겠지?"
"뭐어? 그렇게 비싸?"
"그렇게라니. 싸진거야."

드러누워있던 명수가 몸을 일으키며 '형은 눈 작으니까 돈이 덜 들지않을까?'하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곧바로 성규에게 아이스크림 스푼으로 허벅지를 찔리긴 했지만.

"알았어. 내일 시간나면 통장으로 넣어줄게."
"응. 꼭 넣어줘, 꼭!"
"근데 쌍꺼풀 수술하면 속눈썹 연장같은건 공짜로 안 해주겠지?"
"왜? 엄마 속눈썹 연장하게?"
"속눈썹이 짧아서 마스카라해도 멋이 안 나잖니. 너 하는김에 나도 할까."

봉신 씨가 진지한 눈으로 속눈썹을 어루만지며 거울을 빤히 쳐다봤다.

"그 나이에 속눈썹 연장해서 누구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엄마, 설마 애인 생겼어?"

명수의 말에 남은 아이스크림을 싹싹 긁어먹던 성규가 스푼을 입에 문 채, 봉신 씨에게 시선을 꽂았다.

"애인은 무슨!"
"하긴, 엄마 성격을 견뎌낼 사람이 아빠말고 또 있겠어."
"맞아."

고개를 끄덕거리는 명수와 성규에게 효자손과 파리채가 나란히 날라갔다.


*


오늘도 순재가 차려준 저녁밥상으로 배를 채운 우현이 거실에 앉아 잠시 신문을 뒤적이다가 옆에 앉아 낮에 성열을 그린 스케치를 다듬고 있는 순재를 불렀다.

"순재야."
"응, 왜."
"나 말야…."
"어어, 말해."

새로운 사람이 생겼어. 지우개로 성열의 코 부분을 다듬던 순재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다시 지우개질을 하며 순재가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진짜? 잘 됐네."
"정말이야?"
"어?"
"…사실, 내 마음에 너가 남아있어. 그래서 지금 너무 어렵고 헷갈려."
"……."
"너가 다시 나 받아준다면…나…."

순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우현의 눈이 조금 서먹하게 흔들흔들거렸다.

"…우현아."
"지금 대답 안 하면, 난 다시 너한테 못 갈 수도 있어."
"……."
"나 이게 진짜 마지막이라 그래."

순재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꼭,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우현은 결국 순재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남자의 첫사랑은 그림자와도 같다던 말이 사실이었다. 자신이 정말 순재가 아닌 다른 사람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도 되는 건가? 우현은, 순재의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약해졌다. 성규에게 올곧게 나아갈 것만 같았던 마음이 순재의 깊고 사연많은 눈을 마주하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흔들린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죄책감일까? 아님 연민일까? 그것도 아니면 옛 추억의 잔여물이 아직 가슴에 가득 쌓여있는 걸까. 첫사랑과 옛 연인이라는 타이틀은 모든 감정선을 무너트렸다. 그러면서도 순재의 모습과 성규의 모습이 동시에 머릿속을 맴돌았다. 물론 성규를 향한 마음은 정말 진심이었다. 절대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성규에게 그런 말들을 했던게 아니었는데, 지금 자신은, 성규가 미리 경고하던 '양다리'라는 걸 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건 엄연한 '양다리'였다.

"우현아. 너 지금 이러는 거, 그 사람한테 큰 실수하는 거야."
"……."
"내가 너 받아주면 그 사람한테 가서 뭐라 말 할 건데? 다시 옛사랑을 찾아서 갈 테니 이해해달라고? 그 사람이 이해해준다고 쳐. 그럼 내가 너 안 받아주면? 그 사람한테 나랑 정리했다고 말할 거니?"
"……."

잠시 목소리를 높인 순재가 힐끗 성열이 자는 방을 쳐다보곤 다시 점잖게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정리가 아니야, 우현아. 방식도 틀렸고…. 그리고…우린 이미 예전에 정리됐어. 너도 잘 알잖아. 니 마음속에 그 사람만 있어야 맞는거야. 난 오래된 가구처럼 니 마음속에 놓여있기싫어. 그 사람한테 모든 걸 쏟아부어. 나랑 그 사람 사이에서 방황하지말고. 잔인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넌 나한테 다시 돌아올 수 없어, 우현아."

순재는 마지막 말을 하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고 우현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순재의 말을 들으며 알 수 없는 안정감을 찾았다. 복잡하던 감정이 순식간에 평온히 가라앉았다. 순재와 우현의 두 눈이 촉촉히 반짝거렸다. 두 사람 머릿속에 한때 '연인'이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모두 과거. 지난 일. 다신 돌아갈 수 없는 날들. 정말 순재 말대로, 자신과 순재는 이미 예전에 끝나있었다. 그걸 우현만 몰랐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24.


퇴근하자마자 후다닥 집으로 달려온 호원은 입고 있던 평범한 정장을 벗고 옷장을 열어재낀 뒤, 가장 멋있는 옷을 초이스하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딱딱하고, 이건 너무 평범해! 음, 이 옷은 좀 촌스럽구 이건 너무 웨이터같잖아. 심플한 거로 입어야겠다."

결국, 모두 올블랙으로 맞춘 호원이 넥타이를 매려다가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시 훑어보더니 검은 셔츠의 윗단추를 두어개 풀렀다. 매려던 넥타이는 침대위로 휙 집어던지고 검지와 엄지로 다시 왁스칠한 머리를 세심하게 매만졌다. 

"오케이. 완벽해. 다 잘될 거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니면 죽도 밥도 안 되든, 일단 동우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동우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시간이 갈수록 진해지면 진해지고 깊어지면 깊어졌지, 사그라들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서면서 동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우형. 나 지금 가요. 아직 저녁 안 먹었죠?"
[응응. 너가 아까 저녁 먹지말고 기다리래서 안 먹고 기다리고 있었어.]
"미안해요, 배고프죠? 금방 갈게요!"

전화를 끊고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오늘따라 유난히 신호등에 많이 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이런데 오는거였으면 미리 말하지…. 나만 이상하게 입었잖아."

방울이 달린 털모자에 체크남방을 입은 동우가 레스토랑 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가게가 아직 수리중이라서 옷에서 고기냄새는 안 났지만 주위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장의 차림이었다.

"괜찮아요, 형. 하나도 안 이상해요. 귀여워요."
"엉?"

동우가 조금 멍청한 소리를 내며 되물었다.

"귀엽다구요, 형."

못 알아들은 듯한 동우에게 확실히 말해줬다, 귀엽다고. 볼이 붉어진 동우가 나이프와 포크만 챙챙 부딪히며 '고,고마워'하고 얼버무렸다.

"아,참. 오늘은 내가 살게."

그 말에 환하게 웃고있던 호원이 진지한 얼굴로 변했다. 말했잖아요. 난 형이 돈쓰는거 싫다고. 꽤 딱딱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래도 동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냐아냐. 나 화재보험비 나왔거든. 남우현씨가 가게 고쳐주는 덕분에 이 돈, 꽤 많이 남을 것 같아."
"아껴놨다가 그냥 형 써요."
"싫어. 오늘은 내가 낼꺼야!"

동우가 입을 앙 다물면서까지 굳센 의지를 표현해보였다. 오늘은 내가 꼭 계산을 하리라는 표정의 동우를 보고 있자니 화를 낼수도 없고 그렇다고 고백하는날 얻어먹기도 그렇고….

"그래요, 그럼. 밥은 내가 살테니까 커피는 형이 사요. 그럼 되죠?"
"에이, 커피는 싸잖아!"
"아무튼간요."
"치이. 알았어, 그럼. 대신에 다음번엔 내가 꼭 살꺼야. 약속이다, 알았지?"

알았어요. 마지못해 대답한 호원이 피식 웃으며 동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더욱 자상하고 부드러워진 호원의 모습에 동우는 자꾸 목언저리가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꼈다.

"근데 할말이 뭐야?"

에피타이저로 나온 빵을 냐금냐금 먹던 동우가 물었다.

"밥 먹기전에 들을래요, 아님 밥 다 먹고나서 들을래요?"
"음…. 나쁜 얘기면 밥 먹고 들을거고 좋은 얘기면 지금 들을래."
"헷갈리네요. 이게 좋은 얘긴지 나쁜 얘긴지…. 나쁜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지금 해도 괜찮구. 뭔데?"

동우의 눈이 반짝반짝거렸다. 투명한 글라스에 담긴 물을 한모금 마셔 목을 적신 호원이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


*


"흠…. 답장이 안 오네."

우현이 선물로 준 엽기토끼인형을 다리사이에 끼고 누운 성규는 한참전에 보낸 '자요?'라는 문자에 답이 오지 않는 우현을 열심히 속으로 씹어대는 중이었다. 보고도 씹은 건가, 아니면 자는 건가. 결국 한참을 기다리다 슬슬 잠이 몰려와 핸드폰을 내려놓고 이불을 덮었을때, 문자알림음이 아닌 벨소리가 울렸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하던 명수가 힐끗 핸드폰을 보며 '안 받아?'하고 물었다.

"으응."

핸드폰을 감싸며 밖으로 나가는 성규를 명수가 가만히 쳐다봤다. 왜 나가서 받지,하는 눈치. 마당으로 나와 평상에 앉은 성규는 얼른 우현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일찍도 답이 오네요?"
[미안해요. 문자 지금 봤어요.]

우현의 목소리가 좋지않다.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아닌게 아닌 것 같은 말투잖아요."
[…나 김성규씨한테 죄졌어요.]
"무슨 죄요. 내 지갑에서 돈이라도 빼갔어요?"

성규의 담담한 농담에 우현이 푸스스 웃으며 '바람소리들리네. 밖이에요?'하고 물었다. 네. 마당이에요. 잠깐 불어오는 바람에 반팔티를 입고 나온 걸 후회하며 손으로 팔뚝을 쓱쓱 문질렀다.

[잠깐 기다려봐요.]

그러더니 곧 2층 다락방 창문이 벌컥 열리고 귀에 핸드폰을 대고 있는 우현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죄졌다면서요. 손 흔드는 건 나중에 하고 일단 죄명부터 말해요."
[음…. 내일 얘기 할게요.]
"나 궁금해서 잠 못 잔다구요. 큰 죄에요?"
[김성규씨가 하지말라는 거 했으니까 큰 죄겠죠.]
"우리집 마당에요. 돌이 참 많아요."
[던지게요?]
"나 어렸을때 아빠랑 명수랑 캐치볼 되게 자주 했거든요? 팀장님 있는 2층 다락방까지 던지는 건 껌이에요, 껌."
[던지지마요, 아프니까.]

멀리서도 우현이 웃고 있는게 보였다. 옛날엔 기분 나빠했던 웃음인데 지금은 꽤 많이 설레인다. 같이 웃음이 나올만큼.

"…말해봐요. 지은 죄가 뭔지."
[김성규씨.]
"네. 남우현씨."
[…아니에요. 그냥, 내일 다 말할게요.]
"진짜 큰 죄인가봐요?"
[네. 정말 큰 죄에요. 그래서 김성규씨한테 미안하고 또 미안해요.]
"…흐음."

성규가 팔짱을 껴며 평상에 앉아 멀리 다락방 난간에 옆으로 살짝 걸터앉아있는 우현을 쳐다봤다.

"그럼 내일 얘기해요, 얼굴보면서. 그리고 그렇게 앉아서 위험한 묘기부리는 거 지켜볼 만큼 강심장 아니니깐, 얼른 내려와요."
[알았어요.]
"내일 봐요."
[잘 자요. 쌀쌀하니까 얼른 들어가요.]

전화를 끊고 우현쪽으로 한번 손을 흔든 성규가 후다닥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베시시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가자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던 명수가 힐끗 성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금세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사귀기로 한거야?"
"어?"
"키스했다던 여자랑."
"아아, 아냐. 동우! 동우랑 잠깐 통화한거야."
"근데 왜 나가서 받아."
"그,그건 비밀얘기하느라…."
"…냄새가 나."
"내,냄새는 무슨. 니 콧구멍 냄새겠지!"
"괜히 버럭하는 것도 수상해."
"별 게 다 수상하다, 너는?"
"에휴. 나는 뼈빠지게 알바만 하는데, 누구는 일하면서 연애하는 여유라니. 부럽다, 부러워."
"아씨, 아니래도!"

나 잘꺼야! 침대에 풀쩍 누운 성규는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썼다.


*


"많이…놀랬죠?"
"어? 어어. 조,조금."

호원의 진솔한 고백에 동우는 괜히 테이블 냅킨만 만지작거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미안해요. 더럽고...보기싫고 그래요?"
"아,아냐아냐!"
"그냥 숨기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왜냐면…."
"……."
"형이 너무 좋아서요."
"풉! 켁켁! 콜록콜록!"

물을 마시던 동우가 사래에 들려 켁켁거렸다. 괜찮아요? 금세 동우의 옆자리로 몸을 옮긴 호원이 동우의 등을 살짝 두드리며 어루만졌다.

"으응. …괜찮아."
"당장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내 마음을 말해주고 싶었어요."
"……."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으응."

호원이 '싫다해도 괜찮아요. 각오하고 말한거니까요'하며 서먹하게 웃어보였다. 고개를 푹 숙인채 끄덕거리는 동우의 손을 호원이 조심스럽게 꼬옥 잡았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다음날 아침. 알람을 듣고 일어난 봉신 씨가 서둘러 가스렌지 위에 있는 북어국에 불을 켜고 하품을 하며 반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아침뉴스를 내보내는 TV소리에도 꿈쩍하지않는 두 아들을 위해 직접 방으로 들어간 봉신 씨가 매운 손으로 성규의 엉덩이와 명수의 등짝을 찰싹 내려쳤다.

"다들 얼른 일어나! 언제까지 엄마가 깨워줘야 일어날래!"
"아아, 쪼옴…."
"으으…5분만…."
"얼른 일어나, 얼른! 어휴, 이 먼지봐, 먼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자 아침 햇살이 뽀얗게 내려와 방안의 먼지를 가득 비춘다. 그제서야 어슬렁어슬렁 일어난 성규가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명수의 엉덩이를 툭툭 건드려깨운다.

"야, 김명수우… 엄마가 일어나래…."
"으흐…."

제일 먼저 화장실로 향한 성규, 뜨끈한 물로 머리와 세수를 하고 나와 졸린 눈으로 스킨과 로션을 찾아바르고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든다.

"이제 여름 다 갔나봐. 새벽에 조금 쌀쌀해…."
"그래도 아직 보일러틀때는 아니야. 옷 껴입어."
"느에느에…."

입을 삐죽이며 따뜻한 국으로 목을 데우고 금세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성규는 빨랫대에 걸린 새하얀 와이셔츠를 껴입고 옷장에 걸려있는 넥타이를 골라맸다. 명수가 내리지않고 나간 변기의 물을 내리고 굵은 빗으로 머리를 정리한 뒤 양치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정장 마이를 입고 가방을 어깨에 걸쳐맸다.

"다녀오겠습니다."

구두를 고쳐신으며 대문을 열자 익숙한 우현의 차가 멈춰서있다.

"좋은 아침."

이젠 꽤 익숙해진 아침 풍경이다.


*


"어서 그 죄 좀 말해보지그래요?"

성규가 라디오 채널을 돌리며 물었다. 핸들만 잡고 묵묵히 운전하던 우현이 성규의 눈치를 본다. 마치 사고치고 엄마 눈치를 보는 아이처럼 말이다.

"자꾸 눈치만 보면서 쭈뼛거리지말고."
"…딱 한번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이해해줄 자신있어요?"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는 거지? 성규는 살짝 긴장되기 시작했다.

"노력은… 해볼게요."
"……나 어쩌면, 김성규씨가 경고했던 양다리를 은연중에 걸쳤는지도 몰라요.."
"……."
"마음 한 구석에 순재가 아직 머물러있는 걸 뻔히 알면서 김성규씨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어요. 근데 정말 진심이었어요, 좋아한다고 말한 건."
"……."
"김성규씨가 확실하라고 그랬죠?"
"그랬었죠."
"그래서 어제, 순재한테 솔직하게 말했어요."
"뭘요?"
"…그러니까…."

우현이 말을 잇지 못하고 엄한 엄지손가락만 잘근잘근 씹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성규가 담담한 말투로 먼저 말을 꺼냈다.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했나보죠?"
"……."
"맞나보네."
"……."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치인 것 같은데, 사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요. 팀장님 마음에 나말고 순재씨가 더 크게 자리잡고 있는거."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알고 있었다고요. 순재씨가 아직까진 나보다 더 자리잡고 있는 비중이 크다는 거. 내가 그걸 몰랐을 것 같아요?"
"그럼 왜…."
"난 남우현씨가 되게 똑똑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되게 멍청하네.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연애라는 종목에 관대함이 없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마음을 다른 사람이랑 사이좋게 나눠쓰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고해서 순재씨를 남우현씨 마음 바깥으로 내몰 생각은 애초에도 없었구요. 난 남우현씨 결정을 존중해주려고 했어요. 그 쪽이 순재씨랑 나를 두고 이리저리 헤매는 꼴이 보기 싫었거든요. 나면 나고, 순재씨면 순재씨고. 확실히 해둬야할 것 같아서 마음속에 순재씨 남아있으면서 나한테 그런 말 한거면 못 참는다고 미리 으름장 놓은 거였어요."
"…화…나죠?"
"장난해요? 화 안 나겠어요? 완전 내연녀, 아니지. 내연남이 된 기분이라구요. 당연히 화나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나보단 순재씨가 훨씬 먼저였는데."
"……."
"……."
"…순재를 보면 안정감이 느껴져요."

한참 말이 없던 우현이 먹먹한 말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슬픔이 뚝뚝 묻어나는 그런 말투로.

"오랫동안 머물고 나서 얻은 안정감같은거요."
"…그럼, 그럼 나를 보면요? 나를 보면 뭐가 느껴지는데요?"
"…행복함이요."

안정감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막연한 행복이 느낄 수 있어요.

"내가 왜 안정감이 떨어져요? 내가 얼마나 안정적인 사람인데."
"어디로 튈지 모르잖아요."
"참나. 그리고 다신 그런 표정 짓지마요.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람같잖아요. 화낼수도 없게…."
"…미안해요, 진심으로."
"미안한 짓 했으니까 미안해야죠."
"……."
"나 좋다고 했던 말이 진심은 확실하죠."
"네. 확실해요."
"그럼 그거 봐서 참을게요. 이건 연애에선 관대함이 없다는 내 말이 뻥이여서가 아니라, 연애를 떠나서 사람으로써 관대함을 베푼거에요. 그리고 담에 또 이런 짓 했다간 봐요."
"그땐 어떡하게요?"
"다신 안 볼꺼야, 너."
"또 반말."
"내 맘이라니까.

성규는 조금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잠시 쳐다본 우현의 얼굴이 너무나 애틋하고 슬퍼보여서. 그리고 괜한 오기도 생겼다. 내가 저 사람 마음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오기.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26.


"아, 참. 내일 주말에 김성규씨가 저녁식사초대했어."
"정말? 내일 주말에?"
"응. 왜? 약속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우리도 뭔가 준비해야하잖아. 미리 좀 말해주지. 빈손으로 가면 예의가 아니잖아. 와인이라도 사가자."
"그럼 내가 퇴근하고 오는 길에 사올게."
"와인잔도 사오는 거 잊지 말고."
"알았어. 나 갈게."
"다녀와."

우현이 출근을 하고 식탁에 앉아 순재가 갈아준 생과일 주스를 마시던 성열이 명수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순재 몰래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


[굿모닝~ 굿모닝~ 빰빰빰 빰빰 빰빰빰…]
 
요란한 알람이 더 울리기 전에 손을 더듬거려 베게 밑에 깔려있던 핸드폰의 알람을 껐다. 가게가 불타기전의 기상시간은 오전 8시였다. 하지만 가게가 불타고 난 뒤의 기상시간은 오전 10시. 고작 2시간 차이지만 예전보단 훨씬 개운한 아침을 맞았다.

"…으으."

따뜻한 침대에서 겨우겨우 일어난 동우의 노란 머리가 이리저리 뻗쳐있다. 침대에 걸터앉아 눈을 비벼대며 충전이 다 되어 녹색불이 들어온 핸드폰을 집어들고 간밤에 온 문자와 전화를 확인했다.

"…아."

[형. 놀랐다면 정말 미안해요. 잘자요. -호원이-]
호원과 저녁식사 후, 집에 오자마자 잠이 들어버려서 확인하지못한 문자였다. 내가 일부러 씹었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절망적으로 머리를 감싼 동우는 일단 호원에게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제집오자마자 잠들어서 확인못했네. 미안.]

"하아…."

'미안'까지 쓰던 동우가 여태까지 적은 문자를 모두 삭제했다. 호원에게 답장이 온다면 어떻게 답해야할지 난감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울상을 지으며 침대에 드러누워 어제 호원이 했던 고백의 순간을 떠올렸다.

'사실은요…. 나한테 형이 조금 많이 특별해진 것 같아요.'

달콤했던 호원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리는 것 같았다. 베게에 얼굴을 묻고 발을 팡팡 두드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해야하지. 분명 호원이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한데….

"휴, 일단 씻어야지."

동우가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자마자 침대위에 놓인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


"안 받네…."

몇 번을 걸어도 안 받는 동우때문에 호원은 얼굴 가득 걱정을 드리운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안 받지…."

문자를 보내볼까하며 메시지 창을 켰다가 동우가 불편해할 것 같아서 그냥 먼저 전화나 문자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어제 고백을 하기 전에 그 자신만만하던 태도는 어디가고 하루만에 의기소침해진 호원은 후회중이었다. 그냥 마음속으로 간직할 걸 그랬나하는 후회.

"안녕하세요 호 대리님."
"……."

성규가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도 호원은 그저 핸드폰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연락 올 거 있으신가봐요?"
"아, 네?"
"핸드폰만 뚫어져라 보고 계시길래요."
"아아…. 아녜요, 암것도."
"아,참. 내일 안 바쁘시면 저희 집에 오실래요? 팀장님이랑 저녁 같이 하기로 했는데 호 대리님도,"
"바빠요…."

호원이 작게 중얼거리며 책상에 엎드리더니 발을 마구 구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댔다.

"얘 왜 저래요?"

커피잔에 커피를 채우러가던 우현이 호원의 뒷통수를 꾹꾹 누르며 묻자 성규가 그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


"아아…."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청소기를 밀던 순재가 명치를 감싸며 잠시 청소기 전원을 내렸다. 명치가 콕콕 쑤시듯이 아픈 증상이 몇 주 전부터 간간히 보이더니 요즘 들어선 그 강도가 조금 더 세졌다.

"…약도 다 먹었네."

약국에서 사다놓은 위염약도 하도 먹은 탓에 벌써 다 떨어져있었다. 아픈 명치를 감싸며 서랍 문을 닫은 순재가 방안에 있는 성열을 크게 불렀다. 방문이 열리고 손에 연필을 들고 있는 성열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성열아. 오늘은 밖에 나갈 일 없어?"
"…왜?"
"위염약이 다 떨어졌네. 혹시 나갈 일 있으면 부탁하려고."
"속 아파?"
"모르겠어. 조금 쓰린 것도 같고."

명치를 쓰다듬으며 순재가 인상을 찌푸리자 연필을 책상에 내려놓은 성열이 옷을 챙겨입고 거실로 나왔다.

"병원은 안 가봐도 돼?"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위염약 먹으면 좀 가라앉긴했거든."
"알았어. 금방 사다줄게."
"고마워."

캔버스 신발을 신고 집을 나온 성열이 마당을 지나치려다가 꽃들이 모두 시들어버린 꽃밭을 보곤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꽃이야 시드는건 당연한 일이지만 왠지 가슴이 쓰린 성열이 주머니에 손을 푹 넣고 꽃밭앞에 쭈그려앉았다. 시들어버린 꽃과는 달리 치자나무와 조팝나무는 아직 푸른 잎들을 매달고 있었다. 물론 이 나무들도 내년이 되야 꽃이 피겠지. 사랑을 하면 감정이 격해진다더니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대문을 열고 나와 서둘러 근처 약국으로 걸음을 옮겼다.

 
*


"당근 좀 그만 골라내요."

우현의 식판 모서리에 놓인 당근을 보며 성규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러던 말던 우현은 계속 당근을 골라냈다.

"애도 아니고 도대체 당근을 왜 못 먹어요?"
"말했잖아요. 먹긴하는데 그냥 입맛에 안 맞는다고."
"먹어버릇해야죠."
"먹여주던가요, 그럼."

우현의 말에 성규가 힐끗 호원의 눈치를 보며 테이블 밑으로 우현의 정강이를 푹 걷어찼다. 윽! 우현이 짧게 신음을 뱉었다. 우현과 성규가 티격태격할 동안에도 호원은 생각에 잠겨 국그릇속에 담긴 숟가락 연신 휘저어댔다.

"호 대리님."
"네?"
"그렇게 휘저어대다가 국그릇 뚫리겠어요."
"……."
"너 무슨 근심있냐?"

보다못한 우현이 숟가락을 놓고 호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없다, 근심…."
"없다네요. 밥이나 먹죠."

금세 밥으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숟가락을 드는 우현을 째려본 성규가 호원에게 다시 말을 건네려던때에 호원의 주머니에서 핸드폰 벨이 울렸다.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들고 발신자를 확인한 호원이 손을 덜덜 떨며 핸드폰을 쥔 채 잠시 전화를 받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사내식당을 나와 유리창 앞 벤치로 향한 호원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네, 형!"
[으응. …바빠?]
"아뇨아뇨. 점심시간이에요. 형은 점심 먹었어요?"
[응. 방금.]

동우의 목소리와 함께 전기톱 소리와 작업 인부들의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가게인가봐요?"
[응. 거의 마무리되고 있거든.]
"아아…."
[…….]
"……."
[…저….]
"저…."

동시에 말을 꺼낸 호원과 동우. 먼저 말해요,하며 호원이 양보를 했다.

[…호원아.]
"네, 형. 듣고있어요."
[…나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네?"
[어,얼마전에 개봉한건데 재밌다고 하더라구.]
"…형, 지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호원을 답답해하며 잠시 머리를 헤집은 동우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영화…같이 보러갈래?]


*


"…속 쓰릴때 먹는 약 좀 주세요."
"네?"
"속 쓰릴 때 먹는 약이요."
"저, 죄송하지만 뭐라구요?"

성열의 작은 목소리가 들리지않는 건지 약사가 몇 번이나 재차 물어오자 살짝 한숨을 내쉰 성열이 조금 큰 목소리로 '속 쓰릴 때! 먹는 약이요!'하고 소리치자 그제서야 약사가 알아듣고 약을 꺼내다줬다. 계산을 마치고 약국을 나오려던 성열이 좌판에 놓인 손목보호대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것도 계산해주세요."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퇴근 시간.우현이 손목시계를 보며 오늘 못 마친 서류들을 가방에 넣어 정리하고 있는 성규에게 다가섰다.

"끝나고 어디 좀 갑시다."
"어디를요?"
"와인점이요."
"와인점은 왜요?"
"내일 빈손으로 가기 뭐해서요."
"괜찮다니깐요."
"우리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근데 이호원은 어디갔어요?"

아까 퇴근 5분전에 몰래 빠져나가던데요? 성규의 말에 우현이 눈썹을 찌푸렸다. 저녁 8시면 다른 회사에 비해 늦은 퇴근시간도 아닌데 감히 토껴?

"너무 뭐라하진마요. 급한 일 있던 것 같던데. 이제 갑시다."

우현의 어깨를 두어번 팡팡 두드린 성규는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밤 치고는 꽤 따뜻한 날씨에 성규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차장으로 걸어가는걸 우현이 뒤에서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조수석에 타려던 성규를 누군가가 크게 불렀다.

"성규씨!"

다른 부서 여직원이 다가오더니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누구지? 처음보는 얼굴이지만 인사를 해오는 통에 성규도 얼떨결에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저…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예?"

여직원의 말에 성규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사실 저 성규씨 예전부터 맘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아아."
"혹시 내일 시간있으시면 같이 영화나 볼까해서요."

여직원은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조금 멀찍이에서 팔짱을 낀채 자신을 쳐다보는 우현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있었다. 그 시선을 느끼며 성규가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죄송한데요, 제가 애인이 있어서요."


*


"그 애인이 누구에요?"

우현, 다 알면서 괜스레 대답이 듣고 싶어진다. 하지만 쉽게 대답해줄리없는 성규가 괜히 말을 빙빙 돌려내뱉었다.

"내가 애인이 어딨어요. 아직까지 솔로인데."
"김성규씨가 왜 솔로에요? 나 있잖아요."
"어어? 이 사람 큰일날 사람이네? 우리 아직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거든요? 김칫국 좋아하시나 계속 마시네?"
"뭐요? 아직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면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요."
"나 아직 남우현씨 좋다고 말한 적 없어요. 싫진않다고만 했지."

그 말에 우현이 허,하고 어이없다는 식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거나 그거나 마찬가지아니에요?"
"네. 아쉽게도 그거랑 그거랑 마찬가지아니네요."
"그럼 말이나 들어봅시다. 그래서 내가 얼만큼 좋아졌는데요?"
"남우현씨가 멋진 프러포즈를 한다면 한달정도 생각을 해보고 받아줄 수 있을 만큼?"
"한달은 뭐고 프러포즈는 또 뭐에요?"
"큼. 내가 여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난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는 건 질색이걸랑요. 어이없으면 정식으로 …프러포즈하던가."

성규가 휘파람을 불며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밤바람을 맞았다. 정말 알 수 없는 성규의 속에 혀를 내두른 우현이 프로포즈란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잠시 차안에 정적이 흘렀다. 매쾌한 매연이 들어오자 창문을 닫은 성규가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대며 물었다.

"순재씨한텐 어떻게 프러포즈했어요?"
"……."

고개를 돌려 우현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대답을 바라는 시선에 우현이 잠시 목을 가다듬고 천천히 프로포즈했던 기억을 끄집어올렸다.

"…프러포즈 같은 거 안 했어요."
"프러포즈도 안 했다구요?"
"그냥 자연스럽게 만났거든요. 정말 자연스럽게."
"그럼 나한테도 안 할 생각이었어요?"
"난 김성규씨가 그런 구시대적인걸 원하는지 몰랐죠."
"프러포즈가 왜 구시대적이에요? 사랑을 고백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데. 다만 난 그게 좀 더 근사했으면 하는 바램이라구요. 평생 기억에 남을 고백이니까."
"그럼 어떤 프러포즈를 원하는지 말해봐요. 참고할 테니까."
"말하면 의미가 없죠! 진짜 무드없긴."
"뭐, 커다란 레스토랑을 빌리고 커다란 꽃다발에 굵은 금반지를 받는 프러포즈를 원하는 거에요?"
"그런 끔찍하고 사치스러운 프러포즈 나한테 하기만 해봐요. 뻥뻥 걷어차버릴테니까. 화려한거랑 멋진 건 별개에요. 화려하지않고도 찡한 감동을 주는 게 정말 멋진 거라구요."
"김성규씨랑 연애하기 참 복잡하네요."

그럼, 연애가 쉽고 단순한 거라고 생각해요?

"……"
"암튼 소소하면서도 나한테 찡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걸 생각해봐요."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고 차가 멈춰섰다. 운전대에 턱을 대고 곰곰히 생각하던 우현, 갑자기 성규 몸을 확 끌어당겨 격렬하게 입을 맞춘다. 흡! 깜짝 놀란 성규는 우현의 어깨를 마구 내리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성규의 손이 살며시 우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정말 난생 처음 당해보는 격렬한 키스였다.  신호등이 빨간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고 입술을 뗀 우현이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성규는 반쯤 정신을 잃은 표정으로 우현을 멍하니 쳐다봤다.

"주,죽을래?"
"왜? 싫어요? 소소하지만 찡한 감동 느꼈잖아요, 방금."
"……."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번들번들한 입가를 닦은 성규는 그저 창문을 열고 벌게진 얼굴을 식히기 급급했다.


*


작업 인부들이 모두 퇴근한 어두컴컴한 가게앞에 서있는 동우의 표정이 기쁨과 설레임으로 가득 차있다. 가게는 이제 간판다는 일만 남았다. 전문 디자이너가 참여한 작업이라서 그런지 공간이 훨씬 더 넓어졌다. 아직 테이블과 식기가 오진 않았지만 다시 장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우는 자꾸만 웃음이 베실베실 새어나왔다. 그러다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의 왼손을 살며시 잡아왔다. 따뜻한 온기에 깜짝 놀란 동우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제 거의 다 마무리되고 있네요."

호원의 모습에 동우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불났을때만 해도 모든 게 끝난 것만 같았었는데…. 근데 호원아."
"네?"
"너 …손에서 땀나."
"아아. 기,긴장해서."

민망해진 호원이 얼른 손을 놓으며 바지춤에 손을 벅벅 닦았다. 그 모습에 푸하하 웃은 동우가 이번엔 먼저 호원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호원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동우의 옆모슾을 쳐다봤고, 동우는 여전히 간판이 달릴 자리만 보며 기분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호원아."
"네."
"나 사실 영화보고 싶다는 거 뻥이였어."

영화보단 너가 보고 싶었거든.


*


드넓은 와인점에 처음 와본 성규는 그저 우현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어머니 술 잘 하세요? 아, 장모님이라 해야하나."
"장모님? 우리 엄마 들으면 까무러칠 소리에요."
"아무튼 술 잘 하시냐구요."
"잘 하는 건 아닌데 즐겨해요. 근데 여기 되게 넓네요? 나 안 잃어버리게 조심해요."

모든 벽에 와인이 한가득 꽂혀있었고 천장엔 여러 종류의 와인잔들이 샹들리에처럼 빼곡히 매달려있었다. 조금 어두운 듯한 실내는 갈색 조명이 운치있게 빛났고 곳곳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싱싱한 포도들이 디피되어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없이 혼자 차근차근 와인을 고르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의 가슴이 잠시 두근거렸다.

"이 와인이랑, 이 와인이 좋겠네요."

우현이 집어든 검붉은 와인 두 병을 한번 살펴본 성규가 힐끗 벽장에 붙어있는 가격을 보고는 기겁했다.

"히익! 36만원, 20만원? 미쳤어요? 핸드폰 할부금보다 비싼 와인을 마시자구요?"
"맘에 드나보네. 이제 와인잔 고르러 갑시다."
"자,잠깐만요. 너무 비싸다구요!"
"목소리 줄여요. 여기 밖이 아니라 안이에요."

성규의 어깨를 감싸고 와인잔을 파는 코너로 향했다. 아직까지도 나무 바구니 안에 들어있는 두 개의 와인병이 영 찜찜한 성규가 좀 더 싼 가격의 와인을 사자고 설득해봤지만 우현은 묵묵히 와인잔만 골랐다.

"그만 찡찡대고 제대로 좀 골라봐요. 이건 김성규씨한테 선물로 주는거니까."
"여기 있는 거 죄다 한 개에 10만원은 넘는 거잖아요."
"아닌데? 이건 2만원짜리에요."
"……."
"거봐요, 제대로 안 봤으면서."
"아, 몰라. 니 마음대로 하세요."

성규가 심통스런 표정으로 입술을 댓발 내밀자 검지로 입술을 살짝 툭 친 우현이 어쩔 수 없이 가장 싼 와인잔 3개를 골라 나무 바구니에 넣었다.

"김성규씨는 꼭 수 틀리면 반말쓰네요?"
"안 틀리게 하면 되잖아."
"나도 반말쓰면 안되나?"
"당연히 안 되지."
"왜요?"
"왜냐면 그건 내 맘이니까. 얼른 가요, 나 배고프니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됐어요. 집가서 집밥 먹을거에요. 계산하고 와요. 먼저 차에 가있을게요."

쫄랑거리는 걸음으로 먼저 와인점을 나서는 성규의 뒷모습에 우현이 기분좋게 웃으며 계산대로 향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27.


"거의 다 됐어."

도마위에서 가지런히 썬 대파를 보글보글끓는 김치찌개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예쁘게 밥까지 담아내자 근사한 저녁상이 완성됐다. 손을 씻고 온 호원이 동우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쳐다봤다.

"안 앉고 뭐해? 배고프지? 얼른 앉아."
"아, 네!"

와이셔츠 소매를 두어번 걷어올리며 호원이 의자를 빼내어 자리에 앉았다. 완성된 김치찌개를 식탁 가운데에 놓고 뚜껑을 열자 달큰한 향이 후욱 풍겨져올라온다. 와, 맛있겠다! 숟가락으로 김치찌개 한 술을 떠먹은 호원이 환히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우자 주방장갑을 벗어 식탁 한 쪽에 잘 얹어놓은 동우가 쑥쓰러워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때? 정말 괜찮아? 내 입맛엔 맞는데 호원이한테는 맞을 지 모르겠네."
"진짜 최고에요. 다음번엔 우리집에 와요. 그땐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형도 얼른 먹어요."
"응!"

똑같은 밥그릇, 똑같은 수저, 그리고 둘 다 신고 있는 똑같은 모양의 슬리퍼(예전에 성규가 발 시렵다며 사다놓았다)까지. 동우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번갈아 보던 호원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우리 꼭 신혼같아요."

그 말에 동우가 당황하며 밥만 푹푹 떠먹었고 호원은 연신 '맛있다'하며 밥 두 그릇을 금세 비워냈다.


*


"일어나요, 다 왔어요."
"으으으."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집앞이다. 성규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고 서류가방을 집어들었다. 차시동을 끄고 와인 케이스를 챙겨 차에서 내린 우현이 잠에 취해 비틀거리는 성규를 얼른 붙잡아챙겼다.

"아무리 졸려도 눈은 뜨고 걸어요."
"눈 뜬건데 자꾸 놀릴래요?"
"감은 건 줄 알았죠."
"내가 진짜 이번달안에 쌍커풀 수술 꼭 한다. 우이씨."
"하지마요, 쌍커풀 수술."
"내 눈인데 왜요."
"지금도 충분히 예쁘다고 말 안 했었나? 한 것 같은데."
"또 또 반말! 어어!"

차분한 갈색머리를 쓰담쓰담한 우현이 성규의 엉덩이를 두어번 툭툭 치며 성규네 대문쪽으로 살짝 밀었다. 지,지금 내 엉덩이 만진거에요?! 성규의 표정은 당황과 놀람에 가득 차있었지만 우현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뭐 어때서요."
"…싸이코 기질은 혼자 다 갖추고 있네. 욕심쟁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은 성규가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곧 현관문 열리는 소리와 뒤이어 닫히는 소리가 나고 그제서야 우현이 자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순재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사랑에 이런 행복함이 다시 찾아올 줄이야. 바라기는 커녕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는데…. 성규와 자신은 제법 연애중이었다.


*


현관문을 열자마자 부드러운 버터냄새와 고소한 밀가루 냄새가 풍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방으로 가보니 순재가 커다란 스뎅에 열심히 반죽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 앉은 성열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치대지는 반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반죽이야?"
"어, 왔어? 내일 성규씨네 가져갈 케잌인데 반죽만 미리 해놓으려고. 와인은?"
"사왔어."

코르크 마개를 바닥으로 눕혀 주방 받침대에 얹어놓은 우현이 방으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편한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거실로 나왔을땐 순재가 다 치대진 반죽을 차게 식은 오븐에 넣어두고 있었다.

"휴우, 다 했다. 홍차 마실건데 너도 마실래?"
"응. 성열이는 자러들어갔어?"
"아니. 뭐 할 거 있다고 쿠키들고 방으로 들어갔어."

주방 찬장에서 홍차 티백을 꺼내 티팟에 넣고 끓는 물을 붓자  티백에서 붉은 색이 짙게 우러난다. 찻잔에 우유를 조금 따르고 잘 우러난 홍차물을 적당히 붓는 순재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우현이 말했다.

"순재야."
"어?"
"다이어트해?"
"다이어트? 갑자기 웬 다이어트?"
"지금 보니까 살이 좀 빠졌네."

정말? 순재가 자신의 허리를 여러번 매만졌다. 왜 살이 빠지지. 요즘 쿠키나 초콜릿 만든다고 더 먹었으면 먹었지, 덜 먹는 일은 없는데….

"요즘 청소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가? 여기 홍차. 아,참. 우현아. 나 궁금한 거 있어."
"뭔데?"
"그 새로 생겼다던 사람있잖아. 어떤 사람이야? 이뻐? 나이는? 직업은 뭐고?"

찻잔을 든 우현이 잠시 성규에 대해 생각했다. 성규는….

"일단… 되게 엽기적이야."
"어?"

뜻밖의 대답에 순재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나이는 스물여덟살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다가 말도 안 되는 억지도 가끔 부려. 그리고 연애에 환상이 많은 사람이야. 이쁘냐고? 음… 내 눈엔 이쁜데 본인은 못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아아…."

순재가 조금 놀란 눈치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현이 저런 타입의 여자를 좋아했었나? 순재의 표정을 눈치챈 우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이 뭐가 좋냐는 눈치인데?"
"…조금 놀래서."
"나이에 안 맞게 귀여운 구석도 있고 사랑스럽고 그래. 그냥 같이 있으면 즐거워. 절로 웃음이 나와. 행복해."

행복해. 마지막 우현의 말에 순재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 너한테 딱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아서.

"소개시켜줄까?"
"어?"
"궁금하잖아."
"그렇긴한데…."
"…너랑 성열이가 잘 아는 사람이야."
"어머, 정말?"

우현이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벌써부터 성규가 자신의 목을 조르며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하며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 듯 했다.

"응. 다음주에 소개시켜줄게."

성규와의 관계를 순재와 성열에게까지 비밀로 하고 싶지않았다. 그리고 둘 다 잘 이해해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난 봉신 씨는 두 아들들을 깨워 장에 다녀왔다. 삼겹살 거리와 싱싱한 나물과 해산물까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없다고 성규가 말려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다시 침대로 향하는 두 아들의 뒷덜미를 질질 잡아챈 봉신 씨는 성규에겐 나물 손질을, 그리고 명수에겐 마당 청소를 시켰다. 주방 찬장을 열고 안 쓰던 새 그릇까지 꺼내는 봉신 씨의 모습에 거실에 앉아 졸린 눈으로 연신 숙주나물을 다듬던 성규가 오버한다며 혀를 찼다. 한참 나물을 다듬는데 문득 우현이 보고 싶어졌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뭘 쪼개."

빗자루를 들고 마루에 서있던 명수가 창문을 통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나물을 다듬다 혼자 실실 웃는 성규를 보며 말했다.

"신경끄셔. 마당 다 쓸었냐?"
"다 쓸었다."
"그럼 평상도 닦아놔."
"평상은 왜."
"고기 구워먹으려면 평상 닦아놔야할거아냐. "
"아, 너가 해."

힐끗 명수를 올려다본 성규가 칼 끝을 명수쪽으로 휙 디밀며 '정말 내가 해?'하고 묻자 명수가 얼른 걸레를 집어들고 마당 수돗가로 향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해물탕 준비는 다 끝냈고. 잡채랑 전도 좀 부쳐야하는데 어머, 벌써 2시네? 어쩜 좋아."

저녁 초대는 6시에 해놓은 상태라 아직 4시간이나 남았는데도 봉신 씨는 호들갑을 떨며 전을 부칠 준비를 했다. 성규는 손질을 다 마친 나물 바구니를 식탁에 턱 얹어놓고 명수가 있는 마당으로 나왔다.

"캬아, 날씨 죽이네."

9월 중순. 가을치고는 꽤 더운 날씨에 긴 소매를 접어올린 성규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평상을 박박 닦고 있는 명수에게 향했다.

"옳지 내 동생. 잘 하네."
"할 일 없으면 그릴 좀 닦아놔."
"오키오키."

성규, 마당 구석에 놓인 커다란 바베큐 그릴을 두 손으로 간신히 들어올려 수돗가로 옮긴다. 기름때와 숯때를 씻어내자 금세 새 그릴처럼 반짝반짝해졌다. 평상을 다 닦은 명수가 손가락을 접어 인원수를 셌다. 나,형,엄마,팀장형님,성열이,성열이네누나. 흠, 여섯명이면 충분하겠네. 조금 삐뚤어져있는 평상을 곧게 맞춰놓고 걸레를 수돗가로 홱 집어던진 명수는 집안으로 쏙 들어갔고 뒤이어 손에 묻은 숯때를 닦은 성규도 얼른 집안으로 들어갔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조금 더 옆으로요! 네, 거기!"

드디어 '장동牛 고깃집'의 간판이 달렸다. 연락하지않았는데도 알바생인 영민이와 은정이가 일찍부터 나와 가게 정리를 도왔다. 두 대의 탑차로 배달되어온 새 냉장고와 주방 시설의 시트지를 벗겨내고 가게 로고가 새겨진 테이블과 메뉴판, 앞치마를 정리하는 등, 세 명이서 하기엔 조금 빠듯한 인들이 나름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그럼 언제부터 출근이에요?"
"음. 아마 다음주 화요일부터 다시 장사시작할꺼야. 그나저나 걱정이다. 사람들이 다시 찾아와야할텐데."
"에이, 원래 불난 가게에서 장사 더 잘 된대요. 아마 더 대박날거에요."

은정이 화사하게 웃으며 테이블을 닦고 그 위에 수저통과 냅킨통을 얹어놓았다. 그래. 더 대박나야지. 밝게 웃은 동우가 커다란 선반을 끙끙거리며 들고 옮기려할때, 누군가가 그 선반을 휙 빼앗아들었다.

"나한테 미리 전화하지. 그럼 와서 도와줬을 거 아니에요."
"어? 호원아!"
"이거 어디다가 놓으면 돼요?"
"저기 문 옆에…"

호원이 커다란 선반을 번쩍 들어 옮겼다. 호원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은정과 영민도 얼른 꾸벅 인사를 한다.

"다들 배고프죠?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면 얘기하세요. 뭐든지."

그 말에 영민과 은정이 '정말요?'하며 치킨을 운운했다. 치킨이라는 말과 함께 핸드폰을 꺼내든 호원이 곧바로 치킨 2마리를 주문하자 동우가 먼저 '계산은 내가 할게!'하고 말했다.

"내가 할게요, 형. 형은 좀 쉬세요."
"아냐아냐. 내 알바생들이니까 내가 낼게. 너한테 맨날 내가 얻어먹기만 했잖아."
"어제 난 형한테 저녁밥 얻어먹었잖아요. 살꺼면 다음에 사요, 다음에."
"아이, 그래도…."
"쉿쉿. 얼른 정리합시다."

동우의 노란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는 호원의 손길에 은정과 영민이 그 둘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둘끼리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야, 영민아. 원래 남자들끼리 머리 쓰다듬으면서 웃고 그러냐?"
"몰라, 이상해."


*

 

오븐을 열고 알맞게 구워진 반죽을 꺼냈다. 첫번째 시트에 얇게 썬 딸기를 얹고 붓으로 시럽을 촉촉히 바른 뒤 다시 시트를 얹어 분홍 생크림을 전체적으로 곱게 펴바른다. 그리고 장식으로 딸기를 얹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40분. 직접 만든 상자에 케이크를 넣은 순재가 앞치마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며 성열의 방으로 향했다.

"옷 다 입었어?"
"으응."
"귀엽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하늘색 체크남방을 입은 성열이 어색하게 웃으며 거실로 나가려는걸 순재가 '잠깐만'하며 성열을 불러세웠다.

"너 주머니가 왜 그렇게 불룩해?"
"어,어?"

성열은 흠칫 놀라며 뒷주머니가 안 보이게 손으로 가렸다. 뭐야, 뭔데 그래? 순재가 힐끗 뒷주머니를 확인하려고하자 재빠르게 몸을 피한 성열이 '아,아무것도 아냐!'하며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뭔데 저러지?

"준비 다 했어?"

우현의 방문이 열리고 흰 바지에 검은 셔츠를 루즈하게 입은 깔끔한 차림의 우현이 와인 케이스를 들고 나왔다.

"옷만 갈아입으면 돼. 성열이 마당에 나갔으니까 가봐."
"응. 얼른 갈아입고 나와."

와인케이스와 와인잔 케이스를 든 우현이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나왔다. 성규네에서 톡 쏘는 숯불향이 넘실넘실 이 쪽 마당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


이미 열려있는 대문을 들어오며 우현과 성열, 순재가 인사를 하자 마당에 있는 평상으로 음식을 나르던 봉신 씨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석쇠위에 고기를 굽던 명수도 그 옆에서 소금을 뿌리던 성규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순재 뒤에 있던 성열이 목장갑을 끼고 고기를 굽는 명수를 보며 꼭 명수 앞자리에 앉겠노라며 다짐을 했다.

"여기 집에서 만든 케잌인데요, 설탕을 조금 덜 넣어서 맛있을지 모르겠네요."
"어머, 뭘 이런 걸 다. 일단 어서들 앉아요."

봉신 씨가 케이크 상자를 받아들며 우현과 순재,그리고 성열을 평상으로 안내했다. 성열이 제일 먼저 평상 위로 올라가 명수의 앞자리에 얼른 엉덩이를 붙히고 앉았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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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대화는 어색하지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갔고 우현이 사온 와인덕분에 다들 기분이 나른해져있었다. 한참 명수가 구워내놓는 고기를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우는데 문득 순재와 우현을 한눈에 담아보던 봉신 씨가 와인을 한모금 마신 뒤 물었다.

"그나저나 둘은 무슨 사이에요? 잘 어울리는데 부부? 아님 연인? 호호호."

와인이 조금 과다하게 들어간 봉신 씨가 주책을 떨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성규가 슬쩍 봉신 씨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찔렀다.

"엄마~ 많이 취한 것 같네?"
"내가? 엄머, 얘는 나를 뭘로 보고. 나 아직 멀쩡하다?"
"아냐. 내가 보기엔,"

승등히 취흔긋 그튼데? 어금니를 꽉 물며 봉신 씨에게 말하자 봉신 씨가 콧방귀를 뀌며 잔에 반쯤 차있던 와인을 모조리 원샷해버렸다. 그 모습에 살풋히 웃은 순재가 대답했다.

"그냥 오랜 친구사이에요. 허물없는 친구사이."
"아아, 난 또 하도 잘 어울려서 연인인가보다 했지. 호호호호."

호호호호? 평소 경박하게 웃던 봉신 씨의 웃음소리는 어디갔나? 명수와 성규가 동시에 '취했구만'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평상시엔 술이 쎈 봉신 씨였는데 처음 맛보는 고급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셔댄 탓인지 금방 가버렸다. 미안해요, 엄마가 좀 취하셔서. 성규가 양해를 구하자 순재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재밌고 좋은데요, 뭘. 성규씨네 가족은 되게 활기찬 것 같아요"

하하, 그런가요? 성규가 어색하게 웃으며 젓가락으로 자신이 직접 만든 샐러드를 집어 한가득 입에 넣었다. 성열은 자신의 옆에 있는 그릴앞에 서서 고기와 버섯을 뒤집는 명수의 얼굴을 몰래 몰래 쳐다봤다. 뜨거운 열기에 살짝 찌푸린 미간, 목장갑을 낀 손에 솟은 힘줄, 콧잔등에 송글송글맺힌 땀. 문득 성열은 지금 자기의 얼굴이 화끈거리는게 가까이에 있는 그릴때문인지, 아니면 명수때문인지 헷갈렸다. 그때 그릴안에 숯이 퐁! 소리를 내며 튀겼다.  

"아!"

바로 옆에 앉아있던 성열이 볼을 감싸며 인상을 찌푸렸고 모두들 놀라 성열에게 다가왔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명수가 목장갑을 벗으며 제일 먼저 성열의 볼을 살폈다.

"괜찮아? 안 데었어? 손 치워봐봐."
"어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코앞까지 다가와선 자기를 살피는 명수의 행동에 성열이 우물쭈물거리며 살짝 따끔거리는 볼에서 손을 치웠다.

"아유, 어쩜 좋아. 괜찮아요 성열총각?"
"네… 괜찮아요."

봉신 씨가 와인잔을 든채로 물어왔다. 명수가 한참이나 성열의 볼을 만지작거리다가 엄지로 숯검댕이를 지워주며 말했다.

"살짝 빨개진 거 말고는 괜찮네. 다행이다."
"야, 너 고기 제대로 안 구워? 하마터면  하얀 성열씨 얼굴에 스크래치날뻔했잖아. 괜찮아요, 성열씨?"
"네. 괜찮아요."
"나 고기 제대로 구웠거든? 제일 많이 먹은 사람이 말도 제일 많네. 그렇게 정 못 미더우면 직접 구우시든가."

성규와 명수가 투닥거리는 사이, 순재가 명수를 힐끗 보며 볼을 만지작거리는 성열을 잠시 예리한 눈으로 쳐다봤다. 차가운 물을 한모금 마시던 우현이 그런 순재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눈에서 레이저나오겠다."
"어? 아아. 아무것도 아냐."
"이거 먹어봐, 맛있어."

우현이 성규가 만든 샐러드를 집어 순재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젓가락을 들고 샐러드를 먹으려던 순재가 갑자기 명치 부분을 움켜쥐며 인상을 찌푸렸다.

"순재야. 왜 그래?"
"순재씨, 어디 불편해요?"
"…하아,아뇨. 그냥 속이 조금, 욱!"

입을 틀어막으며 헛구역질을 하는 순재의 모습에 당황한 성규가 순재를 집안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갔고 뒤따라 우현과 성열도 걱정가득한 표정으로 뒤따라들어갔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봉신 씨가 잠시 무언갈 생각하더니 명수의 등짝을 툭툭 치며 귀한 사실이라도 알아낸 것처럼 조그맣게 속삭였다.

"얘,얘! 그거 맞지?"
"그거라니? 그거가 뭔데?"
"얘는 눈치가 이렇게 없어서… 입덧이잖아, 입덧!"

내가 왠지 그냥 친구사이는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더니만…. 봉신 씨, 꼭 특종을 취재한 기자처럼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


"내가 만든 샐러드가 이상했나봐요, 어쩌지."

성규의 팔자 눈썹이 추욱 처졌다. 화장실로 들어간 순재는 계속 '욱욱'거리는 소리를 내며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김성규씨 탓 아니니깐 걱정마요."

걱정에 가득 찬 성규의 어깨를 우현이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대답없이 헛구역질만 하는 누나가 걱정된 성열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누나 괜찮아?"

안에서 미약하게 '응'하고 대답하는 소리와 함께 물소리가 들리더니 곧 순재가 문을 열고 나왔다. 얼굴이 새하얗게 창백했다.

"괜찮아?"
"괜찮아요, 순재씨?"
"네. 급하게 먹어서 안에서 얹혔나봐요."
"무슨 소리야, 너 별로 먹지도 않았잖아."

아냐. 급하게 먹었어. 순재가 미소지으며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하얗고 기다란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시 마당으로 나간 순재가 식사하시는데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자 봉신 씨가 손사래를 쳤다.

"아휴, 아니에요. 순재씨 얼굴 창백하니 어지러운 것 같은데 얼른 가서 푹 쉬어요."
"죄송해요. 나중에 저희집에도 꼭 한번 오세요."

순재가 연신 죄송해하며 성열과 함께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진짜 괜찮은건가…."

찝찝한 표정으로 마당으로 들어오는 성규에게 봉신 씨가 와인잔을 여전히 든채로 바짝 붙었다.

"얘, 맞지? 맞지?"
"뭐가?"
"순재씨 말야."
"행간을 좀 붙혀서 말해. 순재씨가 뭐?"
"입덧하잖니!"

뭐어?! 성규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봉신 씨는 이미 임신 사실을 기정사실화 시킨 모양이었다.

"그럼 저게 입덧이 아니면 뭔데? 내가 너 가졌을때도 저랬어."
"아냐! 순재씨랑 남우, 아니 팀장님 그런 사이 아냐."
"니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아냐, 임신!"

그리고 적당히 좀 마셔. 봉신 씨의 손에 들린 와인잔을 휙 뺏어 평상에 올려놓았다. 아니면 아닌거지 왜 성질이야. 봉신 씨가 중얼거리며 다 떨어진 상추를 가져오겠다며 소쿠리를 챙겨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 팔 아파."

계속 고기만 굽던 명수가 그제야 평상에 엉덩이를 붙히고 앉았다. 삐끗한 손목이 아직도 욱신욱신거린다. 손목을 매만지며 빙글빙글 돌리는데 대문을 톡톡 두드리며 성열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성규가 다가가자 성열이 머뭇머뭇거리며 명수를 쳐다봤다.

"아, 명수한테 볼 일 있어요?"
"…네."

성열이 굽슬거리는 머리를 만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안에 가득하던 고기를 씹어넘긴 명수가 대문을 나와 성열과 마주했다.

"나 왜?"
"…어, 이거…."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꼭잡은 손목보호대를 명수의 가슴께로 쿡 내밀었다. 명수 앞에 서있단 자체만으로도 손이 바들바들떨렸다. 어? 손목 보호대네? 받아든 손목 보호대의 비닐 포장을 뜯으며 명수가 환히 웃었다.

"잘 됐다! 안 그래도 지금 계속 욱신거렸는데."
"…저,정말?"
"응. 진짜 고마워."

어느새 손목 보호대는 명수의 손목을 빳빳하게 감싸고 있었다.

"들어와서 더 먹고 갈래? 너 별로 못 먹는 것 같은데…."
"아,아냐. 괜찮아. 이만 가볼게."

휙 뒤돌아선 성열이 종종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손목 보호대를 하니 손목이 훨씬 더 편안했다.

"으으, 오줌마려."

다리를 베베 꼬며 평상을 지나친 명수가 후다닥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아씨, 깜짝이야!"

소쿠리를 쥔 봉신 씨가 거실에 대자로 뻗어 코를 골며 잠들어있었다. 봉신 씨를 질질 끌어다가 안방으로 옮긴 명수가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소변을 보고 손을 씻으려던 명수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세면대 구석을 뚫어져라쳐다봤다.

"…피?"

붉은 핏물이 고여있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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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어서 버스에 탑승해주세요!"


사복차림의 직원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오늘은 회사 봉사활동가는 날. 아침엔 조금 추웠지만 해가 뜨기시작하면서 춥지도 덥지도 않은 황금같은 날씨가 됐다. 버스에 타려던 성규가 아차차하며 얼른 우현의 차로 발길을 돌렸다. 뒷좌석에 미리 타있던 호원이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가서 축구도 같이 해주고 그래야겠지…."
"왜? 피곤하냐?"
"조금…."

밤늦게까지 동우네에서 논 탓에 호원의 두 눈은 팅팅 부어있었다.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맨 성규가 먼저 출발하는 버스를 보며 물었다.

"봉사활동가는 곳 이름이 뭐였죠? 소망의 집?"
"아뇨. 희망의 집이요."
"아, 희망의 집. 여기서 멀어요?"
"한 시간 정도만 가면 돼요."
"눈 좀 붙히려고했는데 안 되겠네요."

가방에서 입술 보호제를 꺼내 입술에 잘 펴바르고 음빠음빠 잘 문질렀다. 아이들을 싫어하진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성규는 그저 고등학교 봉사시간을 채우려고 갔었던 고아원을 떠올렸었다. 낡고 허름하고 아이들의 표정은 시무룩하고. 제발 그런 곳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버스와 함께 피자를 만들어줄 탑차와 아이들에게 나눠줄 선물이 가득 한 탑차도 버스의 양 옆을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앞으로 바싹 몸을 들이민 호원이 시도때도없이 뱉는 개드립을 듣다보니 어느새 희망의 집에 가까워져있었다.

"되게 넓네요. 운동장도 있고 놀이터도 크고…."

넓직한 운동장에 버스와 탑차 두 대, 그리고 우현의 차와 다른 직원의 차가 들어오자 희망의 집 담당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우루루 쏟아져나왔다. 생각보다 인원이 많다. 차에서 내리자 담당선생님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어휴, 애들이 언제오냐고 얼마나 닦달을 하던지…."

아이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직원들이 익숙하게 다가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번쩍 끌어안았고 처음 와보는 성규는 그저 쭈뼛거리며 우현의 옆에만 바짝 붙어섰다.

"? 긴장돼요?"
"긴장 안 되겠어요? 난 이 아이들이랑 첫만남이잖아죠. 아이들 눈빛봐요. 날 무슨 동물원 원숭이 보듯이 보네요."
"표정을 그렇게 뚱하니 짓고 있으니 애들이 그렇게 쳐다보죠."
"선생님!"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환히 웃으며 달려오더니 우현의 폼에 폭 안겼다. 우리 한빛이 잘 지냈어? 우현이 흐뭇하게 웃으며 한빛이의 하얀 볼을 살짝 꼬집었다. 이 남자가 아이를 좋아했었나? 이것도 새로운 모습이네. 성규는 속으로 감탄하며 우현과 우현의 품에 안긴 하얀 꼬마 아이를 멍하니 쳐다봤다.

"뭘 그렇게 멍하니 쳐다봐요?"
"암것도 아녜요."

대충 얼버무리고 희망의 집 안으로 이동하는 직원들 틈에 꼈다.


*


아이들 장난감 정리, 이불시트 빨래, 아이들 옷 빨래, 청소기 밀기, 걸레질 하기, 못 박아주기. 아직 아이들과 놀지도 못 했는데 청소만으로도 힘이 쭉 빠질 지경이다. 헉헉거리며 가득 쌓인 이불을 한 품에 안아들고 바깥 수돗가로 향했다. 커다란 플라스틱 대야에 시트를 던져놓고 물을 콸콸 튼 뒤, 잠시 쭈그려앉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는데 뒤따라 시트를 들고 오던 우현이 그런 성규를 보고는 혀를 끌끌 찬다.

"설마 벌써 힘들어요?"
"네. 설마가 벌써 힘들어요."
"옮기기만 했으면서 뭐가 힘들어요."
"내가 힘들면 그 쪽이 날벼락이라도 맞아요? 말하는 뽄새하고는…. 그나저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발 걷어올리고 밟아야하는건 아니겠죠?"

맞췄네요. 우현의 말에 성규가 절망하며 바짓단을 접어올렸다. 다른 직원들은 이미 익숙한 듯 바짓단을 접어올리고 뿌직뿌직 소리를 내며 물에 젖은 이불을 밟고 있었다. 드러난 성규의 하얀 종아리에 우현이 피식 웃음을 흘리자 성규도 얼른 우현을 째려보며 새침하게 말했다.

"왜 웃어요, 왜."
"다리가 꼭 동치미에 담긴 무 조각 같아서."
"뭐요? 동치미에 담긴 무 조각? 그러는 팀장님은 살 다 발라먹은 간장치킨처럼 생겼네요."

성규가 궁시렁거리며 세제 뚜껑을 따고 물과 시트가 담긴 대야에 적당히 쪼르르 부었다. 여자 직원들은 아이들에게 줄 피자를 만들고 있었고 힘 쓰는 건 당연히 남자몫이었다. 물론 성규의 힘의 여자와 비슷하긴했지만. 한참 장난감 정리를 하고 나온 호원이 수돗가에서 티격태격하고 있는 우현과 성규를 보곤 낄낄거리며 다가왔다.

"나 이 장면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데!"
"뭐요?"
"꺼져라."
"구경만 할께, 구경만."

호원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멀찍이 떨어져앉았다. 양말을 벗어 한쪽에 잘 말아둔 성규, 조심히 대야에 발을 넣는다.

"으으익, 차가워."
"……."

반면에 우현은 차갑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다가가 발을 푹 담더니 익숙하게 이불을 밟아대기 시작했다. '으으, 발시려'를 반복하며 성규도 슬슬 우현과 발을 맞춰갔다.

"이거 하고 또 뭐해야해요?"
"아이들이랑 놀아줘야죠."
"나 아이들 다룰 줄 모르는데…. 앗, 차거. 튀기잖아요. 살살 밟아요."
"김성규씨는 이불 긁어주러왔어요? 아니면 안마하러 왔나? 팍팍 좀 밟아봐요."
"밟고 있잖아요. 쯧. 호 대리님! 구경하지말고 와서 좀 도와요!"

성규가 버럭 화를 내자 호원이 얼른 다가와 신발과 양말을 벗고 성규의 대야에 한 쪽 발만 슥 담갔다.

"으익. 너무 차가운데."
"얼른 두 발 다 넣어요. 이 물 다 들이붓기전에."
"알았어요…. 으으으."

호원까지 합세해 이불을 밟아대자 땟물이 줄줄 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다른 부서 여직원이 커다란 봉지를 들고와 이불빨래를 하고 있는 남직원들한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돌렸다. 쭈쭈바를 입에 물자 그제야 머리가 좀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빨래를 다 마치고 깨끗한 물로 몇 번 더 헹군 뒤 물에 젖어 몇 배로 더 무거워진 이불을 우현과 나란히 들고 빙빙 돌려 물을 짰다.

"아, 힘들어…."
"힘이 세게 줘봐요. 물이 안 짜지잖아요."
"그 놈의 잔소리…."

입을 삐죽인 성규가 손에 힘을 꽉 주며 이불을 우현의 반대방향으로 홱 잡아당겼다. 그 반동에 우현의 몸이 앞으로 휙 튕겨져나왔다. 오, 미안해요. 생글생글 웃으며 사과를 건네자 이번엔 우현이 휙 이불을 잡아당겼다.자기가 잡아당겼던 것보다 훨씬 더 쎈 힘에 거의 넘어질뻔한 성규가 이를 악 물고 두 손으로 이불을 잡아당기려고 할때, 우현이 손에서 이불을 놓았다.

"으아악!"

 

*

 

샤워를 하고 나온 성열이 뽀얀 얼굴에 크림을 바르며 거실로 나왔다. 집이 좀 조용하다싶어서 누나를 불러보지만 그래도 여전히 집은 조용했다. 그세 어딜갔지? 거실 전화기를 집어들고 순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성열아.]
"누나 어디갔어?"
[나 잠깐 볼일이 있어서. 샤워 다 했어?]
"응. 나가려고."
[미안한데 성열아, 누나 전화 끊어야할 것 같아.]
"어어."

전화기를 내려놓은 성열이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보송보송한 샤워가운을 벗자 성열의 하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예쁘게 차려입고 드라이기로 굽슬거리는 머리까지 앙증맞게 말린 성열이 가방을 챙겨들고 외출준비를 했다. 물론 외출이래봤자 레디락에 명수를 보러가는 거였지만.

 

*

 

"정말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온거야?"
"그렇다니까."

순재가 침대에 누워 배를 걷었다. 단희가 젤을 순재의 배에 쭈욱 펴바르고 초음파 케이블을 연결시킨뒤 조심스럽게 순재의 배를 초음파 기계로 문질렀다.

"증상이 어떤데?"
"그냥… 미식거리고 명치가 좀 아프기도 해서."

어제 많은 양은 아니지만 소량의 피를 토해낸 순재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피를 토했단 증상만 쏙 빼놓고 대답했다.

"부디 임신은 아니기를."
"재미없다…."
"성열이는?"
"집에."
"왜 같이 안 나왔어?"
"나 진찰받는건데 성열이가 와봤자 뭐하겠어."
"잘 지내?"
"응. 잘 지내지. 이제 슬슬 대학도 다시 다녀야할텐데 어디로 보내지."

단희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초음파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단희의 모습에 순재가 물었다.

"…무슨 문제있어?"
"…흐음. 아냐, 문제는 무슨. 계속 얘기해봐, 성열이."
"으응. 내 생각엔 호주로 다시 가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머나먼 이국땅으로 또 다시 튀시겠다?"
"나한텐 고향이기도 하거든?"
"잘난척은."

초음파 기계를 내려놓은 단희가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다른 과도 잠깐 들렸다가라."
"왜?"
"그냥 검사 과정이야. 정기 검진하듯이."

옆에 있던 간호사가 순재의 배에 있던 젤을 닦아냈고 옷을 추스린 순재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밖에 대기하고 있으면 금방 안내해줄거야."
"응. …저기… 단희야."
"어, 왜?'

초음파실을 나가려던 순재가 단희를 등진 채 말했다.

"나 많이 건강하지?"

순재, 살풋 웃으며 초음파실 문을 열고 나간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28.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선생님 먼저 드세요 !
아이들이 우렁차게 소리치듯 말하며 각자 앞에 놓인 피자에 손을 뻗었다. 잘 먹네. 우현과 호원, 그리고 파란 트레이닝바지로 갈아입은 성규가 대강당에 차려진 피자 파티현장을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다. 이불을 널어놓은 빨랫대 옆에 성규의 젖은 바지가 바람에 폴랑폴랑 흔들린다.

"아오으, 피곤해."

성규, 찌뿌둥한 몸을 비틀며 벽 쪽에 붙어있는 넓은 피아노 의자에 앉자 연이어 우현도 따라앉는다. 호원은 벌써 저만치 떨어진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피곤함을 감출 수 없는 성규, 입을 쩌억 벌리며 하품을 하자 우현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성규의 입속에 새끼손가락을 슥 넣는다. 성규,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 손을 앙 문다.

"아아!"

기겁하며 인상을 찌푸리자 성규가 그제서야 손을 놓아준다. 새끼손가락에 깊게 남은 이빨자국. 우현, 여전히 오만상을 쓴 채 성규를 쳐다보자 콧방귀를 흥 하고 뀐 성규가 피아노쪽으로 돌아앉아 건반 뚜껑을 연다. 최근에 들여놓은 피아노인지 흠집 하나없이 말끔하고 피아노 덮개도 빳빳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때문인지 반짝반짝 빛나는 건반들을 손으로 가볍게 쭈욱 훑어보더니 가장자리에 있는 높은 음의 건반을 살짝 눌러본다. 띵! 소리에 피자를 먹던 아이들과 직원들이 일제히 성규와 우현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다. 큼큼.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며 뚜껑을 닫으려던 성규의 손을 우현이 슥 잡는다.

"이왕 연 거. 한 곡 치지 그래요?"

성규,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우현이 먼저 슬쩍 뒤로 물러나며 박수를 짝짝짝 치자 곧이어 회사직원들도 성규의 피아노실력은 몰랐다는듯이 웅성되며 박수를 치기 시작하고 꾸벅꾸벅 졸던 호원도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친다. 강당 전체에 있는 인원이 박수를 치자 어쩔 수 없이 몸을 고쳐앉은 성규가 피아노 건반위에 가볍게 손을 얹고  몇 번 손을 쥐락펴락한다.

"…큼큼."

몇 번 헛기침을 하고 시작된 연주.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노래지만 제목은 알 수 없는 노래가 부드럽게 강당 안에 울린다. 벽에 기대어 그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우현. 성규를 만난 건, 인연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성규는 옛날의 순재 모습을 잊게 만들기도 했고, 또 떠오르게 만들기도 했지만 이젠 순재의 모습이 점점 잊혀지고 있다. 온전한 성규의 모습만이 보인다. 연주를 하며 느껴지는 시선에 힐끗 우현을 쳐다본 성규가 살짝 미소지으며 다시 건반으로 시선을 옮겼다.


*


보통날처럼 레디락 앞 정류장에서 내린 성열이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말끔히 정돈한다. 그리고 몸을 돌려 레디락으로 향하려던 걸음은 금새 멈춰졌다.

"징글징글하다, 진짜."
"아무튼! 너 내일 토요일이라 아르바이트 안 하잖아. 토요일 오후 5시야? 알겠지? 아니다. 그냥 내가 너네집 앞으로 갈께!"

미희가 되도않는 애교를 부리자 출입문에 서있던 명수는 귀찮은듯이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고 레디락안으로 휙 들어가버린다. 무언가 승낙을 받아낸듯한 상황인 것 같았다. 미희는 신나서 힐을 신은 채로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펄쩍펄쩍 뛰다가 조금 뒤에 서있는 성열을 보고는 얼른 몸을 멈추고 목을 가다듬었다. 가만 보니. 저번에 그 스카프 사건 연루자잖아? 성열이 미희를 못 본 척 지나가려고 하자 미희가 얼른 성열을 붙잡아세운다.

"이봐요."
"…저요?"
"네. 그 쪽이요."

성열을 잡아세우고 거만한 포즈로 팔짱을 낀 미희가 성열을 추궁하듯이 째려보며 물었다.

"스카프."
"……"
 기억나죠?"
"……"

성열, 대답은 않고 그저 미희의 째림을 묵묵히 바라보고있다. 그 모습에 기가 찬지 미희가 '허! 참나!'하며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본격적으로 따질 준비에 들어갔다.

"대충 눈빛보니까 다 기억나는 거 같은데 어쨌어요? 내가 명수한테 전해주라던 스카프!"
"……"
"이 사람 이거 시치미 떼는 것 좀 봐? 그 쪽이 분명 전해준다면서요. 혹시…질투?"

질투라는 말에 뜨끔한 성열.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약간 움찔한 성열의 표정을 캐치한 미희가 고개를 설레설레저으며 말했다.

"하아...이걸 어쩌면 좋아. 저 정말 이렇게 엮어서 죄송한데요. 저는 온리 김명수. 명수 하나만 바라보는 명수바라기거든요. 제가 좀 예쁘게 생기고 귀엽고 앙증맞고 눈에 들어오고 그런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스카프를 중간에서 …"

응? 이 여자가 지금 뭐라고 주절대는거야. 성열이 오만상을 쓰며 미희를 마치 미친여자 보듯이 쳐다보자 한참 혼자 소설을 쓰던 미희가 그제서야 성열의 표정을 읽고 헛다리 짚은 걸 알아챘다.

"이,이게 아닌가…. 아, 어찌됐던간에 아무튼 왜 그랬어요?! 이유나 들어봅시다. 도대체 그 스카프랑 내가 밤새 퇴고를 거치며 쓴 편지가 어디로 증발했는지."

한참 뜸을 들이던 성열이 무언가 결심했는지 미희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조용히 말했다.

"그 스카프… 명수랑 하나도 안 어울려요."
"…예에?"
"그리고 그 쪽도 우리 명수랑 하나도 안 어울리구요."
"지,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아니 명수랑 내가 어울리건 말건 그 쪽이 상관할 바는 아닌 것 같은데요!?"

미희가 소매를 걷어부치며 성열에게 더 말을 쏴붙이려다가 방금 성열이 한 말을 생각해봤다. 우리…명수? 갑자기 무언가가 탁 머릿속에 떠오른다.

"설마… 그 쪽 혹시…"
"……"
"저기요! 이봐요!"

미희가 무어라하는데도 성열은 레디락을 지나쳐 어디론가 미련없이 휘적휘적 걸어간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미희의 목소리가 들렸음에도 성열은 결코 뒤돌아보지않았다. 대충 눈치를 챈 것 같은 미희의 모습에 성열의 심장이 쿵덕쿵덕거렸다.

"……"

에휴, 모르겠다. 다시 집에나 가야지.


*


봉사활동이 생각보다 늦게 끝나고 차도 어지간히 막혀서 오후 10시가 되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아, 피곤하다."

집앞에 주차한 우현의 벤츠. 성규는 기지개를 켜며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시동을 완전히 끄고 내린 우현도 피곤한 듯 성규 옆에서 기지개를 켠다. 날씨가 꽤 쌀쌀하다.

"진짜 가을인게 확 느껴지네요. 오슬오슬 소름도 돋고."

성규는 팔에 오도도 솓아난 소름을 매만지며 조금 촉촉한 바지를 펄럭거렸다. 왜 이불빨래할때 장난은 쳐가지고. 바지를 펄럭이며 우현을 째리자 우현은 그저 실실 웃는다. 성규가 한 마디 톡 쏴주려는데 순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봉사활동끝나고 이제 오시나봐요?"
"안녕하세요 순재씨."
"어디갔다와?"
"잠깐 볼일이 있어서."

우현의 물음에 중요한 알맹이를 빼놓고 말한 순재가 성규의 퀭한 눈을 살폈다.

"성규씨 많이 피곤하신가봐요."
"애들이랑 놀아주고 청소하고 그러느라 조금이요. 눈도 빡빡하구… 아,참. 그나저나 순재씨 몸은 괜찮으세요? 저번에 몸 안 좋으신 것 같던데."

성규의 걱정가득한 물음에 순재가 사람좋은 미소를 보였다.

"네. 그때 잠깐 뭐가 얹혔었나봐요. 죄송해요. 초대받은 자리인데 제가 분위기를 망쳐버린 것 같아서..."

어휴,아니에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는 말을 하려는데 뱃속에서 먼저 꼬루룩 소리가 나와버렸다. 왜 하필 이 빌어먹을 뱃속 내장들은 지금 이 타이밍에 청아한 꼬루룩 소리를 내는 걸까. 그 소리는 순재는 물론이거니와 우현도 들은 모양이다. 둘 다 웃음을 참고 있다.

"아하하. 저,저녁을 안 먹었더니..."
"배 많이 고프시면 저희 집에서 저녁드시고 가세요. 저녁이라하긴 너무 늦었지만 보니까 지금 다 주무시는 것 같은데..."

순재는 불이 다 꺼져있는 성규네 주택을 보며 말했다. 이제보니 집안 불이 다 꺼져있고 대문 앞 불만 훤히 켜져있다. 아니 이 사람들은 집안 가장이 안 왔는데 불꺼놓고 잠을 잔단 말이야? 늦는다고 기다리지말고 자라는 얘기를 하긴 했지만 진짜 불 다 꺼놓고 자다니. 너무 하는 구만.

"그래요. 나도 배고픈데 먹고 가요."
"그,그래도 될까요?"

당연하죠. 쌀쌀한데 어서 들어가요. 순재가 먼저 성규를 이끌었다. 대문을 열고 잔디밭을 지나 현관문까지 가는 내내, 대문앞에 선 우현은 그 둘을 빤히 지켜봤다. 현관문 바로 앞에 가서야 우현이 아직 대문 쪽에 서있는 걸 발견한 순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안 오고 거기서 뭐해?'하며 어서 오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성규도 어서 오라는 듯이 손짓을 했고 그 둘을 잠시 보던 우현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


우현과 순재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오는 성규를 보며 성열이 꾸벅 인사를 했다. 성열씨 안녕. 작게 손을 들어 인사한 성규가 어색한 표정으로 우현의 뒤에 섰다.

"금방 차려드릴게요. 성열아. 넌 저녁 먹었어?"
"응. 아까 먹었어."
"그럼 와서 누나 좀 도와줘."
"으응."

성열과 순재가 부엌으로 향하고 성규는 어색하게 넓은 거실 소파에, 우현은 옷을 갈아입겠다며 방으로 향했다. 혼자 거실에 남게 되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벽에 걸린 커다란 TV도 마땅히 보고 싶지 않았고 그저 빨리 고픈 배를 채우고 자고 싶은 심정 뿐이었다. 몇 분 지나고 우현이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심심하면 TV봐도 되요."
"괜찮아요. 이 시간에 뭐 볼 게 있다고."

소파에 몸을 좀 더 편하게 기대고 멀리 떨어진 주방쪽을 보니 순재와 성열이 무언갈 얘기하며 늦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방 자체가 넓고 화이트 계열이 많아서그런지 순재와 성열이 화샤시~하게 보인다.

"그럼 내 방이라도 구경 할래요?"

우현의 말에 성규가 솔깃한 표정을 지으며 '그래도 되요?'하고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사실 저번에 왔을때 실례인 거 같아서 못 구경했는데…."
"방 구경가지고 실례까지야."

우현, 먼저 일어나 방으로 향한다. 이거 왠지 설레이는데? 우현을 따라 몸을 일으킨 성규는 슬리퍼를 고쳐신고 조심스럽게 우현이 열어주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오와..."

방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거실보다 약간 작았다. 침대는 우현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이 가지런하고 빳빳하게 펴져있고 선반의 물건들은 착!착!착! 모두 줄을 맞춰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바닥엔 부스러기하나없다. 길게 놓인 책장엔 보기만 해도 머리아픈 이름의 책들이 꽂혀져있고 테이블 위에는 가지런히 꽂힌 필기구와 우현이 작업중이던 서류들이 놓여있었다.

"보고 있어요. 마실 것 좀 가져올게요."

우현이 방을 나가고 혼자가 된 성규는 좀 더 자세히 방안을 훑었다. 우현의 은은한 향이 방안에 꽉 차있었다. 왠지 마음이 편해지며 졸음이 몰려온다.

"이 남자는 방도 완벽하네."

딱 우현의 방 같았다. 차곡차곡. 질서정연. 그리고 편안함. 침대에 살포시 걸터앉은 성규, 그제서야 스탠드옆에 놓인 갓파인형을 발견한다. 너 이 짜식. 아직 안 쫓겨났구나? 

"벌써 이것도 옛날이네."

푸스스 웃으며 갓파인형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 두 팔로 기지개를 켜며 뒤로 몸을 눕히려는데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린다. '으헉!'소리를 내며 얼른 몸을 벌떡 일으켰다.

"까,깜짝이야."
"왜 놀라고 그래요. 내 방인데 노크라도 하고 들어왔어야했나?"

우현, 들고있던 석류주스를 성규에게 건넨다.

"침대가 왜 이렇게 커요? 잠버릇이 고약한가..."
"잠은 편하게 자야죠."
"딱 이거 절반이 내 침대사이즈인데. 팀장님은 침대에서 자다가 굴러떨어질 염려는 없겠네요. 굴러도 굴러도 침대니까."

부러운 눈으로 석류주스를 홀짝이던 성규는 벽에 걸린 적당한 사이즈의 액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가족사진이에요? 성규의 눈을 따라 액자로 눈을 옮긴 우현이 고개를 몇 번 끄덕거렸다. 우현의 부모님과 할머니, 그리고 우현. 넷 모두 환히 웃고 있다.

"전체적으로 약간 아버님 닮았네요?"
"네. 그리고 아버진 할머니를 닮으셨구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우현인데도 저 사진 속 우현은 뭔가 낯설었다. 둘이 말없이 사진만 보고 있으려니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밥 먹으러 나가요. 다 된 것 같은데. 우현이 먼저 말을 꺼냈고 성규는 마지막 남은 석류주스 한 모금을 깔끔히 마신뒤 침대에서 일어나 구겨진 시트를 정리했다.


*

 


"정말 대충 차려주셔도 괜찮은데…"
"아니에요. 마침 재료가 있어서 해본 거에요."

하얀 대리석으로 된 식탁위에는 보글보글 김치찌개가 맛있는 자태를 뽐내며 군침을 돌게 만들었고 그 주위를 둘러 정갈한 반찬들이 놓여있었다. 평범하지만 반짝거리는 식기때문인지 뭐든지 다 고급스러워 보인다.

"어서 드세요 성규씨."
"그럼 잘 먹겠습니다~!"

맛있어야할텐데…. 수저를 드는 성규의 모습에 순재가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하얗고 찰진 밥과 찌개를 한 숟갈 떠먹은 성규가 과장섞인 감탄을 하며 엄지를 치켜세우자 그제서야 우현과 순재도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성열은 피곤하다며 먼저 방에 들어갔고 한참 식사자리가 이어지며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갔다. 어색할 줄 알았던 분위기는 웃음으로 넘쳐났고 식탁을 치운 후 순재가 커피와 간단한 쿠키를 내오며 우현에게 물었다.

"아,참. 너 그 사람은 언제 보여줄거야?"
"누구?"
"니가 말했던 새로 생긴 사람. 소개시켜준다며."

우현은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한 표정을 보였고 향긋한 커피와 달콤한 쿠키에 빠져 연신 먹던 성규는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새로 생긴 사람? 그게 누구지? 성규는 궁금한 표정으로 우현을 쳐다봤고 우현은 잠시 아무말없이 성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커피를 한모금 들이켰다. 왜 남의 얼굴을 보고 웃고 난리야. 쿠키 부스러기가 묻었나. 성규, 얼른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진다. 딱히 묻은 건 없는데. 이상한 우현의 모습에 성규가 '새로 생긴 사람이 무슨 뜻이에요?'하고 순재에게 물었다.

"우현이가 요새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 사람 소개시켜준다고 했는데 소식이 없네요. 성규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고개가 삐그덕하며 우현 쪽으로 돌아갔고 우현의 표정은 늘상 보던 것처럼 여유로웠다. 설마 이 미친 인간.

"진짜 궁금해?"
"팀장님."
"왜 불러요?"

흐흐. 애써 웃는 표정의 성규가 슬리퍼신은 발로 우현의 종아리를 순재 몰래 툭! 걷어찼다. 성규의 표정이 말한다. 아니지? 그치? 설마? 지금 여기서? 니가? 니 입으로? 순재씨한테? 지금 이 자리에서? 너 돌았냐? 미쳤냐? 미친 놈! 순재는 성규의 찌릿찌릿한 눈빛을 보며 의심쩍은 말투로 물었다.

"어라… 성규씨는 뭔갈 알고 있는 표정이신데"
"제,제가 뭘 알겠어요. 하하하. 어이쿠! 시간이 어느덧 많이 늦었네요! 저는 이만 집에 가봐야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규를 우현이 다시 덥석 잡아앉힌다. 동그란 눈으로 잡힌 손목과 우현, 그리고 순재를 번갈아본 성규는 망했단 표정으로 어금니를 꾹 물었다. 우현이 성규의 손목을 덥석 붙잡은 이 느닷없는 상황에 순재도 적잖이 놀랐는지 그저 손에 든 커피잔만 어정쩡하게 들고 있다.

"너라면 이해해줄거라고 생각해."
"응? 뭐를?"

순재, 전혀 이해가 안 가는 표정이다. 우현의 말 뿐더러 이 상황자체가!

"소개시켜준다고 했던 사람, 사실은 김성규씨."

우현이 성규의 손목을 붙잡은 채로 들어보였다. 발표를 하려는 학생같이 손을 들게 된 성규가 나머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정확히 10초동안 정적이 흐르고 입안에 있던 커피 한 모금을 간신히 넘긴 순재는 설마하는 마음에 성규를 불렀다.

"성규씨, 지금 우현이가 하는 말…"
"수, 순재씨. 그러니깐요 그,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그러니까 그게…그…"

옘병. 딱히 변명할 껀덕지가 없다. 어찌됐던간에 우현과 자신은 현재 연애중인게 분명했고 이는 변하지않는 사실이었으니까. 결국 성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였고 그 뒤를 바로 이어 '쨍그랑!'하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언제 나왔는지 모를 성열이 손에서 물컵을 놓친 탓이다. 주방, 말그대로 폭풍전야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여전히 커피잔만 들고 있는 순재와 떨어진 물컵때문에 슬리퍼가 젖는데도 마치 들으면 안 되는 얘길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성열까지!

"저,저는 이만 가볼게요! 순재씨,성열씨! 다,다음에 봐요! 정말로 잘 먹었습니다!"

당장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성규가 벌떡 일어나 재빨리 현관문으로 향했다.

"아이씨! 이게 왜, 안, 열려!"

급하면 될 일도 안 된다더니 간단한 현관문 잠금장치도 열리질 않는다. 현관에서 혼자 끙끙거리며 씨름을 하고 있는 성규에게 우현이 다가왔다. 우현의 도움으로 스르륵 문이 열리자 우현을 쳐다보지도 않은 성규가 후다닥 신발을 구겨신고 뛰어나왔다.

"김성규씨! 잠깐, 잠깐 서봐요!"
"아, 이거 놔요!"

막 대문을 나서던 성규를 우현이 붙잡아세웠다.

"왜 도망가요?"
"도망 아니에요. 간다는 인사했으니까."
"그럼 화난 거에요?"
"아오! 화 안 나게 생겼어 지금?"

성규, 우현의 손을 홱 뿌리친다. 반말쓰는거 보니 진짜 화났나보다.  

"아니, 순재한테까지 숨길 필요가 없,"
"넌 내가 지금 순재씨한테 말했다고 화내는 걸로 보여?"
"……"
"왜 니 마음대로야? 적어도 순재씨한테 말할 생각이었으면 나한테 미리 얘기를 했어야할 거 아냐. 너만 괜찮으면 다 괜찮은걸로 생각해? 순재씨랑 성열씨 놀란 건 안 보이고? 어떻게 나한테 아무런 언질없다가 갑자기, 게다가 편하게 저녁먹는 자리에서 덜컥."
"내 뜻은 그게 아니라,"
"그럼 내 뜻은?"

더 말하려던 우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씩씩거리며 화난 성규에겐 제대로 들리지않을게 분명했다.

"나 지금 되게 당황스러워. 앞으로 순재씨랑 성열씨 얼굴 똑바로 못 볼 것 같은 기분이라고. 나도 순재씨한테 계속 숨길 생각아니었어. 언젠간 말해야겠지, 언젠간 순재씨도 알아채겠지, 그럼 마음넓은 순재씨가 다 이해해주겠지. 단, 내가, 내 마음이 준비되면 그때. "
"……"
"다이빙하려고 준비자세하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휙 밀어버린 기분이야. 갑자기 차갑고 깊은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기분이라고."

미안해요. 진심어린 우현의 눈빛과 말에 성규는 여태 뜨겁게 트여있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 화내봤자 무슨 소용이야. 성규는 제 머리를 이리저리 헤집었다.

"일단 집에 가. 가서 순재씨랑 성열씨랑 더 얘기해. 많이 놀란 것 같으니까. 지금 안 놀라면 간 달린 사람이 아니지."
"……"
"후우. 난 할 말 다했으니까 간다."

성규, 우현에게서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집에 들어간다. 우현의 등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또르륵 떨어졌다.


*


"……"

거실 소파엔 우현과 순재, 그리고 잠이 다 달아난 성열이 앉아있다. 셋 다 아무 말이 없는 상태다. 순재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고 성열은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한참의 정적끝에 우현이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20분. 잘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다. 분위기가 이렇게나 가라앉을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쌍수들고 반겨줄 얘깃거리가 아닌 건 애초에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줄이야. 졸립다. 다들 안 피곤해? 우현이 먼저 정적을 깨고 말했다.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뱉은 영양가없는 말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자신은 봉사활동을 다녀온 이후였고 눈은 메말라버린 것처럼 뻑뻑했다.

"넌 지금 잠이 오니?"
"…오는데"
"너 성규씨랑, 진심이야?"
"순재야."

우현이 자세를 고쳐잡고 진지하게 순재를 불렀다.

"예상밖의 일이라 많이 놀란 거 알아. 성열이도 그렇고…. 너가 생각하기에 김성규씨 어떤 것 같아?"
"어? 성규씨? 성규씨야 좋은 사람이지…착하고 밝고 싹싹하시고…근데 난 너가 그런, 그러니까…남자를, 그것도 바로 옆집에 사는 성규씨랑 이럴 줄은 정말 몰랐어. 왜 난 눈치를 못 챘을까…"

순재는 마른 세수를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규랑 우현이 같이 다닌지 꽤 됐는데도 한번도 낌새를 못 느낀 자신이 둔하게 느껴진다.

"잘 봐줬으면 좋겠어. 내가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게 아니라 '김성규'라는 사람이 좋아지게 된거니까."

한참 생각하던 순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 괜찮겠어? 뭐가? 그냥…이것저것 전부 다. 아마 주변시선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거 안 괜찮았으면 말 안 했겠지."
"애매해죽겠네. 축하해라고 하기도 조금 그렇고, 안돼! 이 연애 반댈세!하면서 두 팔 걷고 나설 이유도 없고..."
"…"
"에이! 모르겠다! 니가 좋다면 좋은거지. 남우현. 잘 해봐라, 성규씨랑."

소파에 풀썩 편하게 몸을 눕힌 순재는 박수를 치기시작했다. 짝짝짝짝. 생뚱맞은 순재의 박수소리가 거실에 퍼지고 우현의 입가에도 편한 웃음이 그려졌다. 하지만 성열만 여전히 복잡한 표정이다. 그제서야 잠이 몰려오는 순재가 먼저 일어나 자야겠다며 방으로 향했다. 느릿느릿 일어난 성열도 방으로 들어가고 혼자 거실에 남은 우현이 그제서야 화가 나 집으로 돌아간 성규가 떠올랐다. 내일은 토요일이라 얼굴 볼 일도 없을텐데…어떻게 화를 풀어준담. 한편 방으로 들어온 순재는 침대에 누워 곰곰히 생각했다. 우현과 성규. 성규와 우현. 머릿속으로 떠올리니 둘이 뭔가 어울리는 것도 같다. 아니, 어울린다. 어쩌다 둘이 이런 인연을 갖게 됐는지 아무래도 성규를 한번 따로 만나서 얘기를 들어봐야겠다. 마찬가지로 방으로 들어온 성열은 멘붕에 빠졌다. 우현과 성규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이래도 되는거야…?"

혼잣말로 중얼거린 성열이 머리를 벅벅 헤집으며 베게에 얼굴을 묻었다. 안 그래도 명수와 미희때문에 복잡했는데 우현과 성규의 관계까지 듣고나니 머리가 정말이지 펑!하고 폭발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한숨을 쉬며 집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막 화장실에 나오던 봉신 씨와 마주쳤다.

"어휴, 몇 시야… 왜 이렇게 늦었어. 얼른 씻고 자…"

졸린 눈을 비비며 안방으로 들어가는 봉신 씨에게 입을 삐죽였다. 아들이 안 들어왔는데 마루 불이라도 하나 켜놓지. 옷을 갈아입고 대충 씻고 나온 뒤 침대에 누웠다.

"…하아."

자기 감정에만 치우쳐 우현에게 너무 화를 내버렸다. 괜히 그런 것 같다. 자신을 가족과 다름없는 순재와 성열에게 당당히 얘기했던건 그만큼 자신이 우현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인데. 내일은 토요일이라 아침에 만날 일도 없을텐데…어떻게 사과를 한담.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29.

 

토요일 아침. 명수는 TV를 보고 있고 봉신 씨는 세탁기에서 갓 짜낸 빨래들을 꺼내 널고 있다. 성규는 방안에 틀혀박혀 핸드폰 폴더만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고 있다. 우현에게서 아무 연락이 오지않는다. 먼저 연락할 생각은 안 하고 기다리기만하는 자신이 조금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고민하던 성규가 몸을 일으키며 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같으면 얼마 안 되어 전화를 받는 우현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통화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미간이 점점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어쭈. 감히 내 전화를 안 받는다이거지."
[받았는데요.]

썅. 왜 하필 그 타이밍에!

"어어, 음. 그, 뭐,뭐하고 있어요?"
[롱 기획안 준비하고 있었어요.]
"어…그럼 순재씨랑 성열씨는요?"

막상 전화를 걸어놓고 할 얘깃거리가 없으니 괜히 순재와 성열을 대화에 끌어들였다.

[뭐…각자 할 일 하고 있겠죠?]
"아아… 그렇겠구나."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어색함에 엄지 손톱만 딱딱 물고 있을때 우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내 생각해봤는데요. 내가 어젠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요. 미안해요.]
"…"
[김성규씨 입장도 생각했어야했는데.]

성규는 어제 우현에게 버럭버럭 화를 낸 게 몹시 밉고 후회스러웠다. 잘 생각해보면 그리 우악스럽게 화낼 일도 아니었건만. 그리고 그 후회는 곧 미안함으로 번져갔다.

"아녜요. 내가 더 미안하죠. 어제 너무 싸납게 쏘아대서…. 순재씨랑 성열씨 반응은 좀 어때요?"
[성열이는 별 말 없고 순재는 잘 해보라고 하던데요.]
"예? 정말요? 그거 말고 별 말 없어요?"
[별 말이 왜 필요해요. 내가 좋다는데.]
"……"
[지금 조금 감동받았죠]
"감동은 무슨."

우현의 능글거림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기분이다.

"이상하네요 기분이."
[왜요?]
"그냥 순재씨가 좋게, 뭐 좋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잘 해보라고 했다는 말에 마음이 놓여요. 나도 모르게 신경쓰고 있었나."

순재는 꽤 담담해보였다. 오히려 둘의 창창한 앞날을 지지하는 쪽에 가까웠다.

"…언젠간 우리 엄마도 알게 되겠죠?"
[…]
"우리 엄만 아마 날 호적에서 파버릴게 분명해요."

우현이 푸흐흐하고 웃었다.

"웃겨요? 에휴. 하긴 아직 닥치지않은 일이라 웃는거겠지. 나중에 호적파이면 그 쪽이 책임져요. 나 호적파이고 갈 데 없으니까."
[책임이야 거뜬히 질 수 있죠]
"말이라도 땡쓰하네요."

성규는 잠시 훗날을 상상했다. 봉신 씨가 자신과 우현의 관계를 알게 되는 훗날을 말이다. 그때 봉신 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바로 뒷목잡고 쓰러질게 분명했다.


*


한가한 장동牛 고깃집. 아르바이트생들은 손님들이 몰려올 저녁타임을 대비해 테이블을 닦고 미리 음료와 주류를 냉장고에 채워넣고 있다. 카운터 옆 테이블엔 동우가 노트북을 붙잡고 정육 유통센터를 조회하고 있었고 쉬는 날인 호원은 그 앞에 턱을 괴고 열심히 노트북만 보고 있는 동우를 흐뭇하게 보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
    
"형. 우리 같이 살까요?"
"응? 뭐 사자고?"

말의 요지를 제대로 못 알아차린건지 동우는 여전히 노트북만 보고 있다. 꽤 진지하게 화면을 보고 있는 동우인지라 호원은 턱을 괸채 조심스럽게 노트북 겉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뭘 구입하자는게 아니라 같이 살자구요."
"어?"

동우는 그제서야 말 뜻을 알아차린건지 화면에서 눈을 떼고 호원을 쳐다봤다. 같이…살자고?

"싫어요?"
"싫은 건 아닌데…생각해본적이 없어서…"
"난 매일 아침 눈 떴을때 차가운 공기랑 쓸쓸한 집안을 보면 혼자라는게 너무 외롭던데…형은 안 그래요?"

동우는 원래 밝은 성격이고 낙천적이라 딱히 외롭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호원이 저런 얘기를 하니 뭔가 마음이 쓰인다. 동우가 고민하기시작하자 호원은 이때다싶어 말을 이어나갔다.

"요즘 집세도 그렇고 여기 오피스텔 일대가 다 가격도 오르고 형이랑 나 둘 다 혼자 살잖아요. 아무래도 혼자보단 둘이 사는게 더 사람사는 맛도 나고 좋을 것 같은데."
"…그런가."
"그럼요, 당연하죠. 경제적으로도 좋고 둘 다 외롭지도 않고. 난 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으음. 그래,그럼. 일단 좀 더 생각해보자. 근데 둘이 살게 되면 누가 집을 팔아야하지…."

이미 집 내놓는 문제까지 생각하는 동우는 이미 반 넘게는 넘어온 것 같았다.


*


"성열아, 너 무슨 일 있어?"

단희의 호출로 나갈 준비를 하던 순재는 거실 소파에 앉아 시계를 보며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성열에게 물었다. 아냐. 아무 일도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열의 행동은 '나 지금 갱~장히 초조해요'하고 말해주고 있었다. 어제 미희의 말이 심하게 거슬리는 성열이었다. 오후 5시 약속이랬으니 아마 명수는 지금쯤 나갈 채비를 다 했을거다. 조금 있으면 미희가 집앞으로 찾아오겠지. 성열의 입에 물려져있는 엄지 손톱을 순재가 툭 쳐냈다.

"손톱 물어뜯지마. 이도 상하고 손톱도 미워진다. 누나 잠깐 나갔다올께. 우현이랑 저녁 먹고 있어."

머리를 가볍게 올려 묶은 순재가 집을 나서고 잠시 고민을 하던 성열은 얼른 순재를 부르며 따라나갔다.

"누나!"
"어? 왜 따라나와?"
"…대문까지 배웅하려고."

누가 보면 어디 멀리 가는 줄 알겠다. 배웅은 무슨. 어이없는 웃음을 날리며 성열과 함께 대문을 나섰다. 나오기전에 미리 부른 택시가 금방 대문앞에 도착해 순재를 태우고 떠났다. 멍하니 택시 꽁무니만 바라보던 성열, 성규네 마당에서 사람 인기척이 들리자 얼른 대문안으로 들어가 몸을 낮춘다.

"어후, 뭐야. 김성규 이 구라쟁이. 날씨 은근 춥구만."

명수 목소리다. 명수가 눈치 못 채게 빼꼼히 눈만 내놓은채 명수의 모습을 살폈다. 대충 입은 것 같으면서도 얼굴이 잘 생겨서그런지 옷빨이 장난아니다. 잠시후 언덕 끝자락에서 빨간 승용차 한대가 내려오더니 명수 앞에서 자연스럽게 멈춘다. 운전석에 앉아있는건 미희였다.

"야~ 타!"
"어쭈. 너 차도 있었냐?"
"원래 잘 안 끌고 다니는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몰고 나와봤어. 어때? 운전하는 여자. 멋지지? 그치? 나 좀 달라보이지?"

명수는 피식 웃으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미희와 명수가 탄 빨간 승용차가 매끄럽게 동네를 떠나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 성열은 뭔가 잘 되어가는듯한 미희와 명수의 사이에 한숨을 내쉬었다.


*
  

"위 쪽부터 다른 장기들도 벌써 조직이 보여. 진행중이고 이미 많이 진행도 됐어. 담도암이 딱히 특징적인 증상이 안 나타나서 조기 진단이 어렵다곤하지만, 조금이라도 몸이 안하던 행동하면 재깍재깍 병원을 찾아야할거아냐. 명색이 친구가 의사인데."
 
단희는 CT촬영결과와 여러 진료결과를 짚어주며 미간을 찌푸렸다. 덤덤하게 듣던 순재가 단희의 말을 끊고 물었다.

"치료는?"
"항암치료는 초기에나 먹히는거고. 조직이 보이는 장기들을 근치적으로 조금씩 절제하는 방법이 있긴한데… 정확한 조직 침습 범위를 판단하기도 어렵고 일단 절제 수술을 시도하게 되면 수술이 조금 복잡해. 적은 확률이지만 못 버티는 환자들도 있고."

순재는 너무하리만큼 무덤덤하다. 그 모습에 단희가 한숨을 쉬며 '이거 다른 환자 차트아니야. 지금 니 몸 상태 설명해주고 있는거라고 이 기집애야'하며 정색을 했다.

"일단 정밀 한번 더 하고 얘기하자. 입원 수속 해놓을게."
"…아냐."
"뭐?"
"일단은 아냐."
"무슨 소리야. '일단은'이라니?"

자리에서 일어난 순재를 따라 단희도 일어났다.

"너 일단이고 나발이고 지금 입원해야한다니까. 가능성 충분하니까."
"정리 좀 하고 와야지."
"……"
"아무얘기없이 덜컥 입원부터해?"
"그래. 얘기하고 다시 와야돼! 꼭!"

순재, 진료실 문을 닫고 나와 천천히 진료 수납처로 향해 진료상담비를 지불했다. 무슨 상담비가 10만원씩이나해. 더럽게 비싸네. 계산을 마친 순재가 피식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겨울이 올 모양이다. 택시 정류장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다.

"…그냥 걸어야겠다."

옷깃을 좀 더 여민 순재는 가로수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조용히 걷던 순재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팍부터 배까지 천천히 쓸어내렸다. 내 안에 그런 조직들이 살아있다는 생각에 오슬오슬 소름이 돋아난다. 그냥 그 조직들 다 떼어내면 안되나? 쉬울 것 같은데. 의료기술 많이 발전했다면서 그런 조직은 못 떼어내는건가. 아니면 특수 항생제로 조직들은 박멸...

"무슨 생각하는거야…"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어이없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끝에 떠오른 건 우현과 성열이었다. 어떻게 말한담. 나 암이래. 조직검사 더 해봐야되서 입원해야돼. 항생치료는 늦은감이 없지않아있고 수술은 할 수 있긴 한데 꽤 복잡한 수술이라서 수술하다가 꼴까닥할수도 있대. 어쩜좋니?하고 말해야하나.…  우현은 그래도 듬직한 면이 있어서 걱정하지말라며 자신을 안심시키려할게 분명하다. 속으론 자기가 더 불안하고 걱정되면서. 그리고 성열은…

"하아…"

성열이만 생각하면 절로 한숨부터 나온다. 겁부터 먹겠지. 걷다보니 지하철역은 이미 멀리 지나쳐있었고 날은 점점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엔 맘이 너무 울적하다.  하지만 갈 곳은 없고 날씨는 춥다. 어쩔 수 없이 걷던 발걸음을 다시 지하철역쪽으로 돌렸다.

*

"얘 성규야! 성규야!"

봉신 씨의 부름에 여전히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성규는 밍기적밍기적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밑칸을 뒤적거리던 봉신 씨가 울상을 짓는다.

"마스크팩. 동났어."
"벌써? 저번에 사다준 건? 벌써 다 썼어?"
"아이고~ 그때 뭐 얼마나 사왔다구. 돈줄게 팩 좀 사와. 아, 식용유도 다 떨어졌더라. 있으면 그것도 사오고."
"귀찮게시리"

두툼한 니트 가디건을 챙겨입으며 거실로 나오자 봉신 씨가 만원짜리 한 장을 내민다. 됐다고 만원을 밀어낸 뒤 자신의 지갑을 챙겨들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10분정도 걸었을까. 편의점이 보이고 그 앞 간이 테이블에 앉아있는 순재의 모습에 우뚝 멈춰섰다. 한 손에는 캔맥주가 들려있었고 테이블위엔 아무것도 놓여있질않았다. 멍한 표정으로 도로만 보고 있는 순재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저기…순재씨."
"……"

생각에 잠긴 순재는 손에 들린 맥주캔만 살살 돌려댈 뿐 성규가 가까이 와있는것도 못 알아차린 모양이다. 다시 한번 크게 부르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성규를 쳐다본다.

"어, 성규씨!"
"혼자 마시는 거에요? 안주없이 맥주 먹으면 속 부글부글끓던데."

성규는 얼른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안주 몇 가지와 오뎅국물, 그리고 자신이 마실 맥주와 봉신 씨의 심부름거리를 사들고 나왔다. 안주없이 먹으면 속 다 버린다며 이것저것 봉지를 뜯고 세팅을 하는 성규를 보며 순재가 소리내어 웃었다. 

"왜 웃어요?"
"신기해서요. 우현이랑 성규씨랑 사귄다는게."
"아아…… 큼… 제가 어제 갑자기 그렇게 가버려서 당황하셨죠. 죄송해요. 팀장님이 사전협의없이 갑자기 한 말이라…저도 당황해서리…"

성규는 머쓱하게 웃으며 소매로 맥주캔 주둥이를 깨끗이 문지른 후 땄다. 취이이 - 하는 소리와 함께 올라오는 하얀 거품을 얼른 입에 가져다댔다.

"성규씨."

의자위로 다리를 끌어올려 무릎을 끌어안은 순재가 진지한 어조로 성규를 불렀다. 괜시리 긴장이 된다.

"네,네?"
"우현이 어디가 좋아요?"
"……예에?"
"너무 단도직입적이었나… 으음."

순재는 '우현이가 없어서 하는 말인데 솔직히 성격이 그렇게 막 좋은 건 아니잖아요?'하며 몰래 비밀얘기를 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본적은 없는데…그냥…붙어다니다보니까…자연스레…하하…"

성규, 쑥쓰러운 표정으로 빨갛게 변한 귀를 만지작거린다. 두 사람 진짜 연애하는구나. 순재가 푸스스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생각해보니까 우현이한텐 성규씨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현이옆에 성규씨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에요. 우현이 인생은 재미가 없었거든요. 그냥 흘러가는데로 자기가 할 일만 딱딱하면서 살았어요."
"…"
"남한테 자기 속내 잘 안 비추기도 하고 잘 아는 사람 아니면 살갑게 대하지도 않고."

다 맞는 말이다. 순간 성규는 아직 우현과 함께한 시간으로는 순재를 따라잡을 수 없겠구나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성규씨만 믿을게요."
"저,저를요?"
"우현이랑 오래오래! 짠!"

순재는 자세를 고쳐잡으며 성규가 들고있는 맥주캔에 자기 맥주를 부딪혔다. 맥주를 들이키는 순재의 표정을 조심히 보던 성규가 물었다.

"근데 무슨일 있어요? 혼자 여기서 마시고 있던 것도 그렇구 표정도 안 좋아보여요."
"그래요?"
"조금이요."
"분위기있는척 좀 해봤어요. 이러고 앉아있으면 남자 한 두 명쯤은 와서 말 걸까 했는데 아무도 말 안 걸더라구요."
"그래도 제가 말 걸어드렸잖아요."
"저 애인있는 사람 안 건들여요."

순재와 성규의 크게 웃었다. 맥주 한 캔을 거의 다 비워갈때쯤 성규가 부탁을 해왔다.

"순재씨."
"네?"
"팀장님이랑 제 사이… 아직 아무도 몰라요."
"…아아."

봉신 씨와 명수에겐 말하지말라달란 무언의 눈빛에 순재가 걱정말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완결 아닙니다.

원래 완결스토리가 너무 조잡하고 허접하단 생각이 들어서 다시 들어엎고 시작중입니다.

일본다녀오고 집도 옮기고 하면서 파일도 많이 없어졌고 소스도 많이 없어졌습니다.

기사 원고 관련 아르바이트하다가 N드라이브에 짧게 남아있던 파일 보고 다시 조금씩 쓰는중입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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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헐.. 작가님 ㅠㅠㅠㅠㅠㅠㅠㅠ 암호닉이 있었는데 뭔지도 가물가물 하네요..
9년 전
독자3
ㅠㅠㅠㅠㅠㅠ 아니 이게 몇 년 만이야.. 그동안 정주행 엄청 많이 했었는제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2
헐 작가님ㅠㅠㅠ
9년 전
독자4
헐꿈인가 테라규에요 헐작가님 ㅠㅠㅠㅠ작가님몇ㄴㄴㄴ만이에요ㅜㅠㅠ
9년 전
독자5
헐헐 신알신 보고 달려왔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렇게 ㅠㅠㅠㅠㅠㅠㅠ 인그꼭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딱!!!! 아 정말... 저는 스파게티입니다.. 궁금했던 뒷이야기들을 이제 다시 만나볼 수 있게 된거죠? ㅠㅠㅠㅠㅠ기뻐요ㅠㅠㅠ
9년 전
독자6
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많이 보고싶었어요ㅠㅠ 그동안 정주행도 많이 했는데 일어나서 들어왔더니 신알신 으엉ㅠㅜㅜㅠ 어서오세요ㅠㅠㅠ
9년 전
독자7
신알신보고달려왔는데..이게몇년만인거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감사해요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8
헐 대박 진짜 몇 년 만이에요ㅠㅠㅠ 어쩌지 암호닉이 생각이 안나여ㅠㅠㅠ 반가워요 작가님ㅠㅠㅠ
9년 전
독자9
헐 헐 헐
9년 전
독자10
안녕하세여ㅠㅠㅠ너무 오랜만이에요ㅠㅠㅠㅠ반갑습니당ㅠㅠㅠㅠㅠ암호닉이 생각안나는데....ㅠㅠㅠㅠㅠ그래도 아주 좋아해요ㅍ퓨ㅠㅠㅠㅠ
9년 전
독자11
헐 ㅠㅜㅜ고1때 보던건데 진짜좋아했는뎇!!!!! 신기하게 어제 문득 인그꼭이 생각낫는데 이렇게 신작이나왔다니 ㅜㅠㅠㅠㅠㅠㅠㅠ감사합니다 ㅜㅜㅜㅜ
9년 전
독자12
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작가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완전오랜만이예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13
헐 대박ㅠㅠㅠㅠㅠ 몇년만이에요ㅠㅠㅠㅠㅜㅠ 신알신와서 진짜깜짝놀랐어요ㅠㅠㅠㅠㅠㅠㅜㅠ
9년 전
독자14
헐헐 신알신오ㅏ서 달려왔습니다! 오랜만이에요ㅠㅠㅠ
9년 전
독자15
헐 신알신보고 달려왔어요ㅠㅠㅠㅠㅠㅠㅠ세상에ㅠㅠㅠㅠㅠㅠㅠ암호닉이 뭐였는지도 가물가물하네요... ㅠㅠㅠㅠ작가님ㅠㅠㅠㅠ진짜오랜만입니다
9년 전
독자16
허루 이게 뭐야ㄷㄷㄷ 대박
9년 전
독자17
신알신보고 달려왔어요ㅠㅠㅠ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오실거라 믿었어요ㅠㅠㅠ 늦어도 좋으니 돌아만 오세요ㅠㅠㅠ 기다리고있겠습니다 화이팅!!
9년 전
독자18
헐 말도 안돼ㅠㅠㅠㅠㅠㅠㅠ그래도 다시 찾아와주셔서 너무 고마워요ㅠㅠㅠㅠ정밀 많이 기다렸거든요ㅠㅠㅠㅠ내 인생픽 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19
와 진짜오랜만이에요 ㅠㅠㅠ 이게얼ㄹ마만의신알인지 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20
남우이앤님ㅠㅜㅜㅠㅠ언젠간돌아오실거라고 기다리고있었는데 진짜 다행이에요ㅠㅠㅜㅠㅠ저도 너무오래돼서 암호닉이가물가물하네요ㅠㅠㅠㅜㅠㅠ인그꼭은최고의픽이에요ㅠㅠㅠ완결도 언ㅈㅔ까지나 기다리고있겠슴다ㅠㅜㅜㅠ사랑해여ㅠㅜㅜㅠ
9년 전
독자21
헐 작가님!!!!!!!!!!!!!!!!!! 헐신알신 헐!!!!!!!!!!!!!!!!!!!!!!!!!!!!!!!!!!!!!!! 저 암호닉 있었는데 헐..... 작가니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완전사랑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22
작가님!!!!@@!!!!!!오랜만이에요ㅠㅠㅠㅠㅠ암호닉있었는데 생각이 안나네요ㅠㅠㅠ흐엉엉ㅇ유ㅠㅠㅠㅠㅠ오랜만에 재탕해야겠네요ㅠㅛ ㅠ
9년 전
독자23
세...세상에나 인그꼭이라뇨 이게 얼마만에 인그꼭인가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작가님 어시길 기다렸어요ㅠㅠㅠㅠ인그꼭이 완결날 그날을 기다립니다ㅠㅠㅠ
9년 전
독자24
작가님ㅠㅠㅠㅠㅠㅠ세상에진짜ㅠㅠㅠㅠㅠㅠㅠ전암호닉은없지만ㅠㅠㅠㅠㅠ작가님이없었던시간에열심히정주행달렸습니다ㅠㅠ와진짜이렇기오실줄몰랏어여...사랑해여ㅠㅠㅠㅠㅠㅠ이격한감동을어떻게표현해야하지;ㅇ작가님사랑해요;♥신알신해놓고얌전히완결까지기다리겠습니듀ㅠㅠㅠ으엉재탕해야지
9년 전
독자25
뭐지뭐지@@@
9년 전
독자26
안녕하세요 작가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다시 연재된다니 반가워요!!
9년 전
독자27
헐ㅠㅠㅠㅠㅠ작가니뮤ㅠㅠㅠㅠㅠㅠㅠㅠ보고싶었어요ㅠㅠㅠ
9년 전
독자28
헐 작가님ㅠㅜㅠ 아진짜 신알신알림떠서 얼마나 놀랬는지 몰라요ㅜㅜ 다시만나 반가워요ㅜㅜㅜㅠ감사합니당ㅜㅡㅜ
9년 전
독자29
아니 이게 얼마만이에요 작가니뮤ㅠㅠㅠㅠㅠㅠㅠ와 인그꼭도 오랜만이네ㅠㅠㅠㅠ신알신쪽지와서 깜짝 놀랐어요! 다시 연재된다니ㅠㅠㅠㅠㅠ짱좋ㅠㅠㅠㅠㅠㅠㅠㅠㅠ와 정말 다시 돌아와줘서 고마워요 작가님! 하트하트 뿅!
9년 전
독자30
작가님????남우이앤 작가님????헐 대박 헐 신알신보고 이제서야 놀라 달려왓어요ㅠㅠㅠ 암호닉도 가물가물하구먼유ㅠㅠㅠㅠ세상에ㅠㅠㅠㅠㅠ사랑해요 작가님ㅠㅠㅠㅠㅠㅠㅠ다시 만나 정말 완전 엄청 반가워요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31
헐.........이게 무슨일이야......작가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32
쩐다..대박ㅜㅜ안오시는줄 알았어요ㅜㅜ드디어ㅜㅜ
9년 전
독자33
헉 작가님 이게 얼마만이에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대박ㅠㅠㅠㅠㅠㅠ보고싶었어요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34
작가님.. 사랑해요 보고싶었어여ㅠㅜ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35
으아아아아아ㅏ아아아앙아 작가니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기다리고 있었어요 오실 줄 알았어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36
헐... 작가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ㅜㅠ 아 정말 오랜만이네요! 사랑합니다, 정말. : )♥
9년 전
독자38
헐....저 이거 고등학생때 보던걸ㅡㅜㅜㅜㅜㅜㅠ지금 21살인데ㅠㅠㅠㅠㅠㅠ진짜반가워요 작가님ㅜㅜㅜㅜ얼른 완결까지조고시ㅣㅍ습니다!!!!
9년 전
독자39
헐 오랜만이에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40
헐 세상에 작가님 와 진짜 보고싶었어요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41
헐 세상에....헐.ㄹ.ㅇ........ 헐.. 아니 헐ㅠㅠㅠㅠㅠㅠㅠ이게 뭐야ㅠㅠㅠ무슨ㅇ리리야ㅏ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다시 연재해주시는 것망으로도 너무 감사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후에여ㅠㅠ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42
세상에......... 기다리고있었어요ㅠㅠㅠㅠㅠㅠ엉엉엉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43
세상에 작가니무ㅜㅜㅜㅜ기다렸어요♥♥♥ 완결도 기다릴게요~~
9년 전
독자44
허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허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김밥입니다ㅠㅠㅠㅠㅠㅠㅠ기억나세요?ㅜㅠㅠㅠㅠㅠㅠㅠ허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제가 지금 보고 있는게 인그꼭 맞아요?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헐 대박 진짜 완전 대박사건..저번에 안좋은 일 있으셨길래 못보는 줄 알았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세상에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잘 지내시죠?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45
세상에 작가니무ㅜㅜㅜㅜ기다렸어요♥♥♥ 완결도 기다릴게요~~
9년 전
독자46
헐 세상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인그꼭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사이에 전 강탈을 당하고왔습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새로시작하는기분으로 새로운암호닉 신청해도될까요ㅠㅠㅠㅠㅠㅠㅠㅠ? 된다면 멜팅으로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47
세상에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인그꼭이 맞나요......? 남우이앤 작가님이 맞나요...? 이게 얼마만이에요 ㅜㅜㅠㅠㅠㅠㅜㅠㅠㅠㅜㅜㅜ 진짜 보고 싶었어요... 꽈배기 기억하세요??? ㅠㅡㅠ 다시 뵙게 되어서 진짜 다행이에요... 날 추운데 아프신 곳은 없으시죠?? ㅠ.ㅜ 감기 조심하시고 또 새 글 올리시는 그 날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작가님 파이팅!!!!!!!!!!
9년 전
독자48
헐...헐...작가님...헐...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작가님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저 이거 고딩때읽었는데 지금 수능도 작년에보고 대학교들어와서 술마시는 성인됐어요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작가니무ㅜㅜㅜㅜㅜㅜㅜㅜㅜ보고싶었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49
ㅓ헗ㅎ헐허류류ㅠㅠ자까니뮤ㅠㅠㅠㅠㅠㅠㅠ진짜궁금한게있는데여ㅠㅠㅠㅠㅠ혹시에그몽외전구할수있을까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작가님완전마니기다렷어여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50
헐.. 세상에나 작가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 비버에요 ㅠㅠㅠㅠ 진짜 너무 반가워요 ㅠㅠㅠㅠㅠㅠ 와ㅠㅠㅠ 보고싶었어요ㅠㅠ 이게 얼마만이야 진짜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51
세상에 작가니무ㅜㅜㅜㅜ기다렸어요♥♥♥ 완결도 기다릴게요~~
9년 전
독자52
세상ㅇ에 이게뭔일ㅇ야 헐 자까님 ㅠㅠㅠㅠㅠ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저규꼬린데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ㅜㅜㅜㅜ기억절대못하시겟쬬ㅠㅠㅠㅠㅠㅠㅠㅜㅜㅜㅜㅠㅠㅠㅠㅜ작가니무ㅠㅠㅠㅠㅠㅠㅠㅠ사릉해여ㅠㅠㅠㅠㅠㅠ히유ㅠㅠㅠㅠ
9년 전
독자53
와...진짜 너무기다렸어요... 사랑함
9년 전
비회원178.100
헐 세상에만상에ㅠㅠㅠㅠㅠㅠㅠ작가님퓨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기다리고있었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54
남우이앤니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기다리고있었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다시 돌아와주셔서 너무너무너무너~~~~무 감사드려요!!! 떨리는 마음으로 저도 다시 작가님 글 읽고 있어요!!! 떨리고 설레고 반갑고 감사드려요ㅠㅠㅠ
9년 전
독자55
헐..남우이앤님ㅠㅠㅠㅠ작가님ㅠㅠㅠㅜㅜㅠㅜㅠㅠㅠㅠㅠㅠㅠ감사합니다사랑해요 기다리고있었어요♥
9년 전
독자56
세상에 작가니무ㅜㅜㅜㅜ기다렸어요♥♥♥ 완결도 기다릴게요~~
9년 전
독자57
어제부터 봤는데 진짜 작가님ㅠㅠㅠㅠㅠㅠㅠㅠㅠ진짜 글 대박인것 같아요ㅠㅠㅠㅠㅠㅠㅠ진짜 사랑합니다ㅠㅠㅠ제 사랑을 드세요♥♥♥♥♥♥♥ 호원이 캐릭터 뭔가 진짜 호원이 성격이나 유머같은거 같아서 웃기고ㅋㅋㅋ 성규 성격이나 말투도 웃겨여ㅋㅋㅋ 신알신 신청할게욥~~~~~~!!!^^
9년 전
독자58
헐헐 작가님.... 아 저 암호닉도 기억 안나요ㅠㅠㅠㅠㅠㅠㅠㅠ어떡ㄱ해요ㅜㅜㅜㅜㅜㅜ 완전 보고싶었어요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59
세상에 작가니무ㅜㅜㅜㅜ기다렸어요♥♥♥ 완결도 기다릴게요~~
9년 전
독자61
와... 세상에... 2015년 소원 하나 이뤘어요... ;ㅅ; ...... 세상에.... 반가워요 정마알
9년 전
독자62
헐....... 세상에................ 인그꼭................. 신알신ㅜㅜㅜㅜ 다시 정주행 했어요ㅜㅜㅜ 작가님 기다렸어요ㅜㅜ 사실 제 암호닉이 뭐였는지 저도 잊을 뻔 했거든요(라기 보다는 뭔지 헷갈려요ㅜㅜ)ㅜㅜㅜㅜ 돌아오셔서 기뻐요ㅜㅜㅜㅜㅜ 완결 기다리고 있을게요ㅜㅜㅜ 꼭 기다릴게요!!!
9년 전
독자63
와ㅠㅠㅠㅠㅠ작가님ㅠㅠㅠㅠㅠㅠㅠㅠ이게얼마만이에여ㅠㅠㅠㅠㅠ어어어어유ㅠㅠㅠㅠㅠㅠㅠㅠ신알신 와있어서 진짜 까암짯 놀랐습니다ㅠㅜㅜㅠ퓨ㅠ퓨ㅠㅜㅜㅜ사랑해여 사랑합니다ㅠㅠㅠㅜㅠㅠㅜㅜㅠㅠㅜㅠㅠㅜㅠㅠㅠㅜㅠㅠㅠㅠㅠ
9년 전
비회원25.10
ㅠㅠㅜㅠ헐대박 ㅠㅠ작가님 ㅠㅠㅠ 대박 안오시는줄알고저 진짜 텍파메일링만기다리고있었는데 ㅠㅠ 저 감성이에요 ㅠㅠ 대박 돌아와주셔서 감사해요 ㅠㅠ
9년 전
독자64
헐자까님제눈을의심했어요...와주셔서 겁나 기뻐요ㅠㅠㅠ완결까지 기다립니둥ㅠㅠ
9년 전
독자65
예전에 읽었던거 기억나네요 ㅠㅠㅠㅠㅠㅠㅠ완결기다렸는데 ㅜㅜㅜ 이렇게 오시다닝!!!기다릴께요
9년 전
독자66
우와...완전 오랜만이시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반가워요ㅠㅠ
9년 전
독자67
자기전에 생각나서 또 읽고가요♡
9년 전
독자68
작가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려고 누우려다가 문득 옛날 생각나서 글잡 검색했는데 제가 한참 바빴던 작년에 이렇세 찾아와주셨네요! 일본으로 건너가신건 언제 한번 또 글올리신거 보고 알았는데 다시 한국 들어오셨나 보네요!! 너무너무 반갑고 또 이렇게 기다릴 글이 생겨서 기쁘고 가슴이 콩닥콩닥거려요. 제가 인그꼭을 처음 읽은게 중1이었는데 어느덧 고2가 됐네요 ㅎㅎ 기다릴께요! 꼭 다시 써주세요!! 사랑합니다 작가님❤️❤️ (아 그리고 기사 작업???!?!? 제가 언론정보 신방 진학을 원하는데 좋아하는 작가님이 그 쪽 일을 하시는건가요..ㅍ 하핫)
7년 전
독자69
오랜만에 생각나서 정주행했어요ㅠㅠ 너무 그립고 보고싶습니다 인그꼭...ㅠㅠ
5년 전
남우이앤
우현이는 순재와 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성열인 한국에 남는 선택을 하고요. 성규는 우현을 기다리며 명수는 미희와 잘 이어지고 성열은 명수를 첫사랑으로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순재는 하늘로 떠나고 우현은 돌아오지않죠. 여기까지 진행되고 멈췄네요... 아직까지 정주행 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죄송하고 감사할따름입니다...
4년 전
독자70
오랜만에 다시 읽으러 왔는데 이런 이야기 진행이 있었군요 ㅠㅠㅠ 짧게나마 알 수 있게 되서 다행이에요
4년 전
독자71
안녕하세요 작가님 ㅠㅠ 날도 덥고 비도 많이 내리는데 문득 인그꼭 생각이 나서 다시 정주행하려고 찾아왔어요 지금에서야 달아주신 댓글을 읽어보게 되어서 죄송하면서도 뒷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어서 기쁘네요 ㅎㅎ ㅠㅠ! 이번 정주행은 달아주신 뒷 이야기까지 상상하며 즐길 수 있겠어요! 그럼 인그꼭 다시 시작하러 가보겠습니다 작가님도 무더운 여름 잘 이겨내시길 바랄게요! 더불어 꼭 건강하시고요 ㅎㅎ 🖤
3년 전
비회원87.212
오랜만에 생각나서 왔는데 뒷얘기를 댓글로나마 알게돼서 좋네요 새드엔딩인건가요? ㅠㅠ 슬프네요..
3년 전
독자72
크리스마스 이브에 문득 인그꼭이 생각이 나서 또 정주행하러 왔어요! 몇 번이고 읽었는데도 다시 시작하려 할 때마다 매번 설레는 감정을 느껴요 이번엔 또 얼마나 재밌을까 얼만큼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할까 하고요 크리스마스도 이제 5분밖에 남지 않았네요! 이번 크리스마스는 인그꼭으로 맞이해야겠어요 ㅎㅎ 작가님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인그꼭도 메리 크리스마스!
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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