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패였다. 몇 주가 되도록 총백을 끓이고 맥문동을 차로 우려 올렸지만 달라지는 게 없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왕의 용안이 나빠지고 있는 게 확연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름 재능이 있는 의원이라고 자신하고 있던 지난 날들이 윤형은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왕의 증상은 어디로 보나 일반 감기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감기에 좋은 약재는 왜인지 그의 몸 안에선 어떤 효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윤형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백세창의 경우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지만 비교적 짧은 발병 기간 때문에 그 확률은 이제 지극히 낮아졌다. 만일 왕의 병이 백세창이었더라면, 그는 이미 고열로 죽었을 것이다.
윤형은 내의원 내부에 작게 마련된 공간에 홀로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사교성보다는 주로 제 할 일을 열심히 해서 주변 사람들의 신임을 얻거나 호감을 사는 편이었다. 윤형은 한 달 가까이 내의원에서 일하며 정원 스물 남짓의 사람들 모두와 친분을 쌓았다. 물론 처음엔 갑자기 궁으로 와 직급을 올린 그를 못마땅히 보는 시선이 많았다. 하지만 윤형은 내의원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의술이 좋았고, 그랬기에 그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일은 차차 사라졌다.
모두가 왕의 병을 찾아내기 위해 애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하루에도 몇 장이나 써서 부치고 감기와 비슷한 증상의 다른 질병들을 짚어가며 종일을 고군분투했다. 윤형은 주로 그들이 새로 알아낸 약재들을 달이거나 병부를 기록하는 일을 맡아서 했다. 혜민서에 있을 때보다 훨씬 쉽고 간편한 업무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가끔씩 잠에 들기 직전, 그 곳을 떠올리며 이상한 향수에 빠지고는 했다. 이 곳에서 하는 일보다 어렵고 복잡하지만 그래도 편한 마음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었던 혜민서가 그는 간혹 그리워졌다.
그의 곁에는 늘 수 많은 죽음이 존재했다. 대대적으로 유행하는 전염병이나 각종 사고의 여파로 눈을 감게 되는, 그런 지극히 평범한 주위의 죽음들. 그것들을 윤형은 아주 어려서부터 지켜보며 자라왔다. 그 죽음을 살려내는 게 그의 임무였다. 그래서 늘 죽음에 익숙했었다. 그런데 그녀를 보며 느끼게 되는 이런 감정은 익숙하지 않았다. 생소하고 낯설고 서투르고 겁이 났다. 그는 세자빈이 하루도 빠짐 없이 약지에 끼우고 다니는 반지를 보게 되면 언뜻 심박이 멈추고 목 속이 뜨거워지는 죽음을 느꼈다. 그러다가 늘 저고리 밑에 지니고 다니는 주머니에 자신이 선물했던 연고가 들어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됐을 때는, 또 다시 숨이 붙고 심장이 제대로 작동해서 살아나는 걸 생생하게 감지했다. 그는 그녀 때문에 그렇게 하루에 몇 번이고 죽었고 다시 생명을 얻어 살아났다. 윤형은 자신의 이러한 생사를, 감히 사랑으로 불렀다.
생각이 많아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면 그는 잠시 내의원을 나서서 바깥 바람을 쐬었다. 왕의 병을 낫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세자빈을 기쁘게 해주어야 하는데 무능력한 자신은 별로 도움이 되질 못했다. 그는 이른 저녁이 찾아올 무렵에 유난히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 늘 일정한 시간에 바람을 쐬러 나오고는 했는데, 그보다 조금 이른 때에 세자빈이 산책을 나온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는 그 일정함을 조금 깨뜨려서 일부러 느리게 내의원을 나섰다. 윤형은 그런 식으로 거의 매일 세자빈과 마주쳤다. 그리고 어김 없이 죽고 살아나는 걸 반복했다.
윤형은 조심스럽게 제 앞에 다가서는 여인을 보고 가볍게 고갤 숙였다. 적당히 예쁜 얼굴을 가진 이 여인은 앳되어 보이지만 실은 내의원에 거의 육 년 가까이 몸을 담고 있었다. 말 솜씨가 좋고 친절해서 전체적으로도 호평이 있는 의녀였다. 윤형보다 연상인 그녀는 조금 얼굴을 붉히면서 그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의 부드러운 얼굴은 누구에게나 설레는 느낌을 줬다. 윤형은 그녀로부터 얻어낼 대답들이 많아서 먼저 목을 따뜻하게 하라는 뜻으로 그녀에게 갓 끓인 차 한 잔을 건넸다. 주변은 곧 잠잠해졌다.
“저를 부르신 이유가?”
“여쭐 것이 좀 있습니다.”
“한낱 의녀인 제게 궁금하신 것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누구에게나 상냥하시어 궁의 사람들 모두와 친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머, 누가 그런 과찬의 말씀을 하시더랍니까. 부끄럽습니다.”
그녀는 겸손하게 부인하며 잠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윤형은 차 한 모금을 들이킨 뒤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 이젠 가볍게 웃고 있는 저 얼굴이 조금 일그러질지도 모른다.
“혹, 내금위 소속들의 사람과도 말을 섞으신 적이 있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내금위라면……. 호위무관들을 일컫고 계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의녀입니다. 의술을 가졌더라도 그저 계집일 뿐입니다. 아주 가끔씩 그들과 대화를 한 적은 있지만 깊이가 있는 관계를 이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준회라는 이름을 가진 자에 대해서 들으신 게 있으십니까?”
“아아, 예.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 말에 화색하며 고갤 끄덕였다.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표정이 나빠지는 기색 없이 입을 열었다.
“세자빈을 호위하시는 무사가 아니십니까. 비록 천으로 입을 가렸지만 그 위로 뻗은 눈빛이 보통이 아니어서 몰래 흠모하고 있는 궁녀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제 벗과 약간의 연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이지만…….”
윤형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아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잠시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가 담긴 잔을 쥐는 손이 조금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윤형은 그녀를 채근하지 않고 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캄캄한 빛깔의 가리마가 그녀의 흰 피부를 돋보이게 해주어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저와는 그다지 친분이 있는 분이 아니셔서 무어라 정확히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굳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이유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흠, 의원께선 왜 이것을 알고 싶으신 겁니까?”
“…….”
그 질문은 좀 난감했다. 별 다른 변명을 찾지 못해 윤형은 그저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만 있었다. 그녀는 윤형이 무언가를 악용할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따로 만남을 해 엉뚱한 걸 묻고 있는 그가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그녀가 문득 손으로 소반을 짚고 천천히 윤형에게로 다가갔다. 윤형은 잠시 몸을 흠칫했으나 가만히 있었다. 눈으로 다가오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가 속삭였다.
“입을 맞춰주시면 친히 알려드리겠습니다.”
“…….”
“…농입니다! 그렇게 겁 먹은 얼굴을 하실 건 또 뭡니까. 어리시다더니, 정말로 어리십니다.”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다그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형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농 치고는 조금 살벌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다시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입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윤형은 다시 그녀에게로 집중했다.
“궁으로 오신지 얼마 되지 않으셨으니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몇 년 전에, 궁에서 큰 화재가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 불로 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어째서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궁 중건을 위해 한양의 적지 않은 백성들이 투입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궁에서 마련한 그리 좋지 못한 공간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날이 밝으면 무거운 짐을 옮기며 고달픈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아까, 벗이라고 칭하셨던…….”
“…그 애도 거기 있었습니다. 악착 같이 의술을 익혀 궁에 들어온 저와는 다르게 그 애한테는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집의 자식일 뿐이었지요. 부모와 같이 궁 중건을 위해 끌려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끔씩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서 얼굴을 붉히곤 했었습니다. 그 분이 바로 호위무사였습니다. 준회, 그 분이요…….”
“…….”
“그 애의 얘길 들어보면 그 분과는 일절 대화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정말 어찌나 좋아하던지 한동안 제가 다 설레고 가슴이 벅찼습니다.”
“…….”
“그러기를 몇 개월, 백성들이 지내던 곳에 불씨가 붙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중건이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새벽이었고, 백성들의 목숨을 귀중히 여기지 않았던 당시의 내신들 때문에 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무수히 많은 백성들이 거기서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에 한양에 남겨진 백성들이 분개해 궁 앞으로 별책을 요구하였고, 궁은 그저 화염 속에서 살아난 이들에게 신분을 높여주어 궁에 자리를 마련해주거나 약간의 곡식을 지급했을 뿐입니다. 이 곳의 의녀인 제가 입에 올리기는 모순되오나, 당시의 궁은 정말……. 올바르지 못했습니다. 짐승 같았습니다.”
윤형은 복잡해지는 머릿속 때문에 살짝 얼굴을 구겼다. 입 막음이 있었는지 여태 궁 근처에 살면서도 그런 얘기는 누구한테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화재가 있고 다음 날, 저는 소식을 듣고 내의원을 울면서 뛰쳐나갔습니다. 단순히 제 벗이 걱정되어 그런 게 아닙니다. 이전에 제가 알고 지내던 한양의 많은 사람들이 궁의 부름으로 억지로 끌려와 원하지 않는 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걱정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제 벗은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어딜 가야 그 분을 만날 수 있습니까?”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녀는 윤형의 잘생긴 얼굴 대신 찻잔의 바닥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형은 준회의 진상을 알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 탓에 여인에게 말 실수를 범한 것이 미안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그런 윤형을 알아채고 아까처럼 웃었다. 누구나 묵과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싶어 찾아온 사람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었다.
“준회, 그 자도 그 불길 안에서 살아났습니다. 아마 이건 아는 이가 별로 없을 겁니다. 아는 이가 있더라도 그 분이 고아라는 것만 전해듣고 있을 뿐, 그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단 하나도 모를 것입니다. 제 벗이 죽기 전 저한테만 얘기했던 것이니……. 그는 곡식 몇 되를 포기하고 궁이 보상으로 내민 내금위 자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낱 미천한 신분에서 궁의 소속이 되셨으니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 분도 제 벗처럼 부친과 모친을 모두 잃으셨습니다. 같은 날, 같은 공간에서.”
“…….”
“얼굴에 씻을 수 없는 화상을 얻으시고, 그 흉터를 두건으로 가리시는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그녀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이내 그녀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차리고 생각에 빠진 윤형에게 바짝 다가가 대뜸 손을 겹치고는, 아까보다 더욱 은밀하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자, 이제 제게 입술을 주실 때입니다.”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어머, 참 칼 같으십니다. 장난인 걸 아시면 좀 맞춰주시면 안 됩니까?”
그녀는 새침하게 대꾸하며 몸을 일으켰다. 새로 들여온 약재의 수량을 확인하러 간다고 했다. 그녀는 공간을 나서기 직전에 몸을 돌려 윤형에게 한 번 눈을 접었다.
윤형은 그 뒷모습을 보며 잠시 웃었다. 역시, 의녀였다.
그녀로부터 전해들은 것들을 종합해보면, 준회는 충분히 궁에 적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그와 아버지 사이에는 어떠한 겹침이 없다. 아버지가 궁을 피하는 것과, 그가 당한 일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다. 윤형은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이걸 세자빈에게 알려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의금부 댁에 있는 호위무사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했다. 무언가 연결 고리가 있을 것 같으면서도 뚜렷하게 그 잔상을 파악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
다 식어버린 찻잔을 알아차리고 윤형은 이만 내의원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깥에서 희미하게, 말을 주고 받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을 쓸 마음은 없었지만 거기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그는 일으키던 몸을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일하는 건 자기 아비를 쏙 빼닮았어, 어쩜 그렇게 동작이 빠르고 가진 지식이 많은지. 어쩌면 그보다도 크게 될 인물이야. 주상전하를 치료하는 게 정말로 그 애가 될지도 모르겠네.”
“인정하지만, 그래도 아주 마음에 들진 않어. 어떻게 혜민서에서 내의원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는 겐지. 그것도 그렇게나 어린 자가. 아무리 내전에서 내려온 명이라고는 하지만…….”
“어떤가. 실력 좋으면 그만이지. 안 그런가? 히야, 정말 신기하단 말이지. 그렇게 부친의 재능을 물려받기도 힘들 터인데.”
“……그 이의 약음도 물려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뭐?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자네.”
“어의 취급을 받던 그가 갑자기 내의원을 떠난 이유. 정말 모르는가?”
“어허! 자네 지금, 항간에 떠돌던 것을 꺼내 입에 올리는 것인가? 그러지 말게나. 그가 들으면 섭섭할 것이야. 그가 전하께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단순히 떠돌던 소문이 아니라네. 도적들에게 몫을 챙기고 부탁을 받아 세자저하께 독을 먹이려 들지 않았었나.”
“독이라니! 자네, 어디 가서 그런 소리하지 말게나. 특히나 그 애 앞에선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야.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누군가의 비밀을 알게 되는 건 치명적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믿고 있던 사람의 것이라면, 치명적임은 배가 되어 날카로워지고 결국엔 피를 토하게 한다.
그가 곧 그런 상황이었다. 윤형은 보이지 않는 피를 게워내면서 그 소리를 가슴 속에 똑똑히 새겼다. 아버지는 궁을 싫어한다. 궁을 피하고 궁을 마주치는 걸 꺼린다. 하지만 궁은 아버지를 원한다. 그의 재능을, 그의 실력을 믿고 있다. 이 장난 같은 관계 속에서 윤형은 어떤 것이 최선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해답은 나오질 않았다. 섣불리 믿을 수 없고 섣불리 믿기지 않는 현실이 독처럼 윤형에게 퍼지고 있었다.
17
언젠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한테서 약속 받은 일이 하나 있었다. 엄마는 당시에 마음 속에 쌓인 것이 많은 상태였다. 아빠는 연락이 두절되어 집을 들어오지 않았고 그래서 집에서 의지할 수 있는 존재라고는 걸핏하면 울고 말썽을 부리는 어린 내가 전부였다. 나는 늘 엄마의 화장품이 탐났고 그래서 몰래 뚜껑을 열어 거울에 몇 번 문질렀다. 어느 추운 결혼 기념일 날 남편으로부터 받았다는 새빨간 립스틱은 그렇게 힘 없이 절반이 뭉그러지게 됐다. 빨간색 립스틱 덩어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주워서 붙이면 될 것 같았지만, 이미 따뜻한 체온에서 고체성을 잃은 덩어리는 내 마음처럼 쉽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초조해졌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직장에서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나는 내 손바닥이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것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열심히 립스틱을 원상으로 복구시킬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엄마가 퇴근하고 그런 내 모습을 봤을 때 처음으로 꺼낸 말은 지금 뭘 하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새빨간 손바닥을 등 뒤로 숨겼다.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미 엄마의 눈은 주변을 빨갛게 만들어버린 립스틱의 흔적을 천천히 알아차리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가 화를 낼 것 같았다. 무서웠다. 화가 난 엄마는 늘 무서웠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집에 있는 건 나뿐이었는데 내 짓이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별 가치도 없는 어린 딸의 거짓말을 듣고 엄마는 이상하게 차분했었다.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고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지도 않았다. 엄마는 조용히 수건을 적셔와서 내 손을 닦고 빨갛게 되었던 방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엄마는 나한테 괜찮다고 했었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그런 욕심 쯤은 부려봐야 된다면서 내 머릴 쓰다듬었다. 대신, 새끼 손가락을 내밀면서 약속을 하자고 했다. 거짓말은 나쁜 거니까 다시는 해선 안 된다고. 젊은 날의 엄마는 나한테 그렇게 말했었다.
거짓말은 나쁘다. 사실이었다. 세상 모든 거짓말은 거짓이라서 나쁘고 악이었다. 그래서 한빈에게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나쁘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각자 사랑하는 사람을 숨기고 서로에게 거짓으로 얼룩진 사랑을 보여주자고 했다. 나는 그 제안이 거짓이라서 받아들일 수 없었고, 또 그런 나쁜 짓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부쩍 그의 거짓이 진심으로 순화되고 있었다. 구체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는 처음 나를 봤을 때보다 훨씬 표정이 부드러워졌고 어렴풋이 사랑스러워서 정신을 못 차리는 눈을 했다. 그런 그의 갑작스런 변화를 나는 따라잡을 수 없었고 그처럼 빠르게 거짓을 진심으로 바꾸게 할 수 없었다. 어려운 일이었고 그건 내 문제였다. 쉽게 마음을 좋게 바꾼 그에 비해 나는 능력껏 그렇게 하지 못해서 그에게 흠집을 내고 흉터를 만들고 있었다.
그의 눈을 보면서 살인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이 시대의 위대한 범법자가 된 것 같았다. 그는 꼭 나 때문에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공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얼굴이다. 연기 경력이 많은 배우들도 저렇게 검게 가라앉은 얼굴을 꾸며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내게서 실망한 것 같았다. 미동이 없던 표정은 크게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는 아프게 웃었다. 웃는 게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병약했다.
무언가 변명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입을 열려는 순간에 그가 넓은 보폭으로 바로 내 앞까지 다가왔다. 나를 바라보는 무표정이 막 얼음을 씹은 것처럼 차갑고 추웠다. 그는 정말로 심하게 상처 받은 얼굴이었다. 그에게 참을 수 없이 미안해지면서 동시에 의문스러워졌다. 윤에게 줄 사랑을 왜 내게로 전부 옮기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난 그에게 사랑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었다. 그는 나를 멋대로 사랑했고, 이렇게 실망한 건 순전히 그의 의지였다. 한빈의 무표정을 쳐다보며 머릿속으로는 줄곧 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기적이고 이기적이고 또 이기적인 생각. 난 정말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기적이었다.
"빈궁."
"…저하, 제게 변명의 기회를 주시면 오해를 풀……."
"언제까지 아프게 할 겁니까."
"……."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믿어달라고……."
그가 무거운 숨을 뱉으면서 마른 세수를 했다. 그는 왠지 모르게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울고 싶은 건지 말의 마지막이 끊겼다. 나는 도저히 그에게 미안하다거나 잘못했다는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너무 위태로웠다. 내 존재를 다시 한 번 의식하게 되면 정말로 그 아픔에 기침을 토할 것 같았다.
주위는 고요했다. 가벼운 바람에 풀이 몸을 충돌하는 소리만이 청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 세계가 모두 허구처럼 느껴졌다. 너무나, 너무나도 조용했다. 그가 숨을 쉬는 소리마저 소음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저하, 목숨을 걸고 세자빈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무엇 때문에 새벽 잠을 깨셨습니까."
심장이 덜컹 아래로 떨어졌다. 내 등 뒤로 입을 열어선 안 될 존재가 말을 하고 있었다. 저절로 질끈 눈이 감겼다. 세자인 그에게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하게 물을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한빈이 그 목소리에 잠시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는 내 등의 바깥을 쳐다보며 한 번 미간을 좁혔다. 준회를 쳐다보고 있을 그의 눈이 끝 없이 일렁였다. 그가 준회에게 당장 꺼지라고 할 것 같아서 마음이 저렸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준회에게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갑자기 내 손을 잡아서 반지를 뺐다. 혼인했던 날, 그가 나한테 직접 끼워주던 그 반지였다. 그는 그걸 빼고 손바닥 안으로 넣어서 주먹을 쥐었다. 이제 내 손엔 꽃 모양의 반지만이 외롭게 남았다. 죽은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선물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당분간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그대를 볼 수 있을 때 다시 반지를 드리겠습니다."
"……."
"…그대의 태양이 제가 아니어도 됩니다. 그저 옆에 있고 싶을 뿐입니다."
"……."
"그런데 그대께서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저하. 뉘우치고 있습니다."
"……."
"……날이 밝으면 후원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제 사과를 받아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빈궁."
"…예, 저하."
"당분간 마주치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려 자선당 안으로 들어갔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머리가 멍해져서 멀어지고 있는 그를 부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까와는 다른 고요가 찾아왔다. 내가 만들어낸 고요였다. 내 힘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차단하고 귀를 틀어막아버린 고요였다. 목이 탔다. 말을 잃은 것처럼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비로소 그에게 미안해졌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정말로 사랑 받아야 할 건 그였다. 준회가 아니다. 한낱 호위무사일 뿐인 그에게 사랑을 말했던 나를 돌이키고 싶었다. 변한 건 없었고, 변할 건 없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소득 없는 감정 싸움에 먼저 손을 들어버린 내가 바보 같았다.
"…죄송합니다."
"……."
준회가 사과했다. 그 사과가 들리던 순간에 걸음을 움직였다. 더 이상 준회를 바라볼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를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 또한, 잘 알게 됐다. 뒤를 돌지 않았다. 신을 벗고 자선당으로 들어가 내게 주어진 방으로 갔다. 어떤 것도 하지 않고 바로 자리에 누웠다.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감긴 눈 사이로 울음이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입술을 씹었다.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흐느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 밤을 영원히 비밀로 하고 싶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단 몇 시간 후면 아침이 밝을 것이었다. 그 때까지 몸을 뒤척이며 시간을 보냈다. 아주 잠깐 한빈의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도 나처럼 뜬 눈으로 새벽을 보내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예상처럼 아침은 금방 찾아왔다. 밖에서 궁녀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한 얼굴보다는 한 밤을 그의 생각으로 모두 보내 힘겨운 모습으로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울어서 눈가가 따가웠다.
원래라면 궁녀들의 손길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한빈과 함께 문안을 올리러 가야 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문 밖으로 궁녀들이 들어가도 되겠냐는 말을 묻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됐다고 말했다. 한빈의 말을 그대로 들어줄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눈치가 빠른 그녀들에게 부은 눈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나 혼자 준비해서 한빈을 기다릴 작정이었다.
반지는 빼지 않았고, 다시 주머니를 달았다. 머리를 빗고 새 버선을 신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궁녀가 가벼운 인사와 함께 고갤 숙였다. 나는 대충 그녀의 인사를 받고 내 방에서 왼쪽으로 뻗은 복도를 바라봤다. 한빈의 방과 이어진 복도였다. 그는 아직 이 곳을 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그 곳에서 간혹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나를 기다리는 건 늘 한빈이었다. 그는 항상 나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고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그는 간혹 밖에서 문을 두드리면서 아직 멀었느냐고 재촉하고는 했다. 기다림이란 건, 이런 느낌이구나. 나는 복도에 멍청히 서 있으면서 생각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건 혼자에서 혼자가 아님이 될 때를 바라고 있다는 것과 같았다. 나는 혼자에서 그와 함께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기다림은 길었다. 버선에 새겨진 자수의 수를 가늠하고 있을 때에야 그의 방 문이 열렸다.
"……."
"……."
그는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고 곧장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도적인 외면에 마음이 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오늘 곤룡포를 입지 않고 간편한 차림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금방 내 근처로 다가왔다. 그대로 나를 지나치려는 그의 팔을 잡고 물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팔을 잡힌 쪽을 느리게 쳐다봤다.
"저하!"
"……."
"왜, 왜 오늘은 곤룡포를 입지 않으셨습니까?"
"……."
"…저하께선, 그 옷이 가장 잘 어울리시는데……. 무, 물론 지금 입고 계신 옷도 멋지십니다."
의미 없는 내 말에 그는 말 없이 내 팔을 떼어냈다. 그는 정말로 나와 말을 섞지 않으려고 했다. 그로부터 무시 당한 나를 놀란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궁녀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상한 자존심보다 그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었다. 그는 묵묵히 자선당 마루로 걸음을 옮겨 신을 신고 있었다. 급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어수선하게 그 주위를 거닐자 그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위압적인 눈빛에 저절로 몸이 흠칫 떨렸다.
"오늘 문안은 드리지 않을 겁니다."
"……."
"지금부터 무사들과 같이 사냥에 나가 종일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저하, 어제 일은……."
"후원엔 가지 마세요."
그는 짧게 명령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를 쳐다보지 않으며 말한 명령이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궁녀들이 보이지 않을 모습으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나를 앞에 두고 소리 없이 말을 주고 받는 게 느껴졌다. 그에게서 무시를 당한 내가 재밌는지 미세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도 들렸다. 또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후원에 가지 말라고 했다. 내 약속을 잊지 않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나도 모르게 배시시 미소가 생겼다. 내가 평생 보지 않을 것처럼 미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내 사과를 받을 마음이 없단 뜻이기도 했다. 등을 돌리자 궁녀들이 움직이던 입을 다급히 멈추는 게 보였다. 신경 쓰지 않고 나는 내 방으로 갔다. 뒤에서 그들 중 한 명이 지금 아침을 올리겠노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도 됐다고 했다. 딱히 무언갈 먹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해서라도 그에게 나의 진심을 알리고 싶었다. 후원으로 가기 전 경대로 내 얼굴을 한 번 확인할 생각으로 천천히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앉은 지 일 분도 되지 않아 밖에서 궁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의원이 찾아오셨습니다."
의원? 설마 윤형인 건가? 하지만 그에겐 이런 이른 아침부터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문이 열렸다. 정말로 윤형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소반으로 가는 나를 보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이내 그도 소반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는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했다.
"이른 시간에, 죄송합니다. 조식은 하셨습니까?"
"아…. 아니요. 속이 좀 불편해서."
내 말에 그는 앞으론 식사를 거르지 말라고 충고했다. 식사를 거르는 것은 만병의 근원이라고 했다. 참 그다운 발언에 잠깐 웃음이 터졌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번에, 알게 되는 것이 있으면 세자빈께 가장 먼저 알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준회, 그 자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단 두 글자를 들은 것뿐인데 몸 속에서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나는 윤형의 말을 끊고 부탁했다.
"죄송하지만 앞으로 그 이름은 의원께서 참아주시면 안 됩니까?"
"…예? 하지만…."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은 이름입니다."
"……."
"…죄송합니다."
윤형은 내 말을 듣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가 난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능하면 빨리 무언가를 알리러 내게 찾아왔을 그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그 이름을 듣고 그에게 익숙해지면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 같아 무서웠다. 불현듯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상처로 뒤덮이던 얼굴과 마주치지 말자던 부탁. 윤형은 조금 나빠지는 내 안색을 보고 입을 열었다.
"혹시……. 좋지 못한 일이라도 겪으셨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예쁜 얼굴이 살짝 창백해지시기에 물었습니다."
변함 없는 다정함 때문에 불쑥 몸 속 어딘가가 쓰라렸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다정하고 따뜻할 것인지 궁금했다.
"…사랑니는, 괜찮으십니까."
"……."
"……괜한 걸 물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의원께선…. 의원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예?"
"아…. 그대께선 아직 사랑니가 돋지 않으셨습니까?"
생각 없이 되물은 것이었는데 윤형은 필요 이상으로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는 이윽고 내게로부터 눈을 떼고 아래로 시선을 박았다. 그는 대답하기를 한참 머뭇거렸다. 답지 않게 손가락을 떨기도 하고 애처럼 웃기도 했다.
"돋은 지 오래입니다."
"……그러십니까…."
"그런데 제 것은 자리를 잘못 잡고 대책 없이 돋아났습니다. 아무래도 침을 맞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영영 숨기거나, 아니면 깨뜨리거나……."
윤형은 대답함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서기 전 살며시 뒤를 돌아 웃는 그에게 나도 그와 같은 미소를 보여줬다. 윤형은 아까처럼 고개를 숙이고 이 곳을 나갔다. 그가 내게 전할 말이 무엇이었을지 잠시 궁금해졌지만 이내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가 나가고, 나는 본래의 목적인 경대 근처로 가 내 얼굴을 확인했다. 평소와 같다는 걸 깨닫고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해는 중천에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기다려야 했다. 설령, 정말로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해도 나는 그래야만 했다. 문을 닫고 복도를 나서는 내게 궁녀가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저하를 만나러 간다고 답했다. 그녀는 살짝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웃었다.
익숙하게 신을 신고 자선당을 벗어나 마당을 걸었다. 몇 번 걸음을 옮기자 내게로 다가오는 곤이 보였다.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준회가 없다는 것에 이상하게 복잡한 감정이 솟아났다. 안심이 되고, 동시에 조금 착잡했다.
곤은 나를 보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는 이내 내 눈치를 조금 살피며 물었다.
"세자빈, 어디를 가십니까?"
"저하와 약속했습니다. 후원에서 기다리기로."
"…저하께선 지금 무사들을 대동하시고 사냥을 즐기러 가셨습니다. 아마 준회도 그 곳에 있을 겁니다. 평소엔 그를 조금 못마땅히 여기셨는데…. 오늘은 저를 이 곳에 남기시고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
"새가 낮게 날고 있습니다. 곧 비가 올 것입니다. 들어가셔서, 저하를 기다리시는 게……."
"아닙니다. 저하께 약조 드렸습니다. 약조를 어길 수는 없습니다."
"…비를 맞으시면 열을 앓으실 겁니다."
"상관 없습니다."
"상관 있습니다.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곤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그대를 지켜드릴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오래 전부터 저하와 약조했습니다. 저도 제 약조를 어길 수 없습니다."
망설임 없는 그의 눈빛에 나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로 나를 보내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는 엄숙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를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물러설 수가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그를 바라봤다.
"한 번만…."
"……."
"딱 한 번만……. 눈 감아주시면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사랑 받고 싶습니다."
"……."
"저하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곤이 눈썹을 한 번 움직였다.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로부터 등을 돌리고 후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잡지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대신에, 곤은 그 말을 했다.
조선의 태양은 더할 나위 없는 찬란함을 자랑했다. 나는 그 아래를 걸으면서, 생각을 차분히 했다. 내가 후원으로 가 할 일은 간단했다. 그를 기다리는 것. 언제 올지 모르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그게 전부였다. 나는 후원으로 가는 길목에 접어들면서 틈틈이 뒤를 돌아보았다. 곤은 보이지 않았다. 열 번을 돌아보면 열 번 모두가 그랬다. 괜히 머쓱해져서 나는 이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여름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후원의 식물들은 더 싱싱해졌다. 꽃은 더 알록달록해졌고 나무의 줄기들은 전보다 튼튼해졌다. 때 늦게 나비가 주변을 날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가슴이 욱신했다. 나비로 불리던 그 때가 무심코 생각났다. 간지러운 평화를 안겨주던 그의 모습이 조각으로 흩어져 투명하게 넘실거렸다. 환상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잡히지 않았다. 나도 그를 잡지 않았다. 황상 속의 그는 점차 사라졌고, 나는 후원에 마련된 작은 의자에 앉았다. 긴 기다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희망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한적했다.
비가 올 것이라는 곤의 말은 거짓이 아닌지 하늘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직감으로 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 쯤이었다. 빠르게 일식이 찾아올 때와는 달랐다. 어둠은 미세하게 그 크기를 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이 하늘을 뒤덮었을 때, 나는 조용한 후원의 입구를 쳐다봤다. 그를 보고 싶었다. 나를 만나러 오는 그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후원은 여전히 적막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꼭 버려진 것 같았다. 모두에게.
빗방울이 내렸다. 비는 빠른 속도로 거세졌다. 나는 그걸 하염 없이 맞고 있었다. 옷이 젖었고, 뺨이 젖었고, 내 마음도 젖었다. 모든 게 다 축축했다. 옅은 분홍이었던 저고리가 비에 젖어 붉게 물들었다. 비는 차갑고 단단했다. 흐트러짐 없이 이 세상을 평등하게 적시고 있었다. 꽃들은 즐겁게 수분을 보충하고 있었다. 꽃이 웃음을 머금고 서로에게 물장구를 하는 이명마저 들려왔다. 정신은 조금씩 궤도를 이탈하고 있었다. 시선의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 대체 얼마를 이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
"쓰셔야 합니다."
"…어……."
"벌써 신시입니다. 꼬박 두 시간을 넘게 빗속에 계셨습니다."
갑자기 낯선 형체가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고, 가만히 하얀 빗속을 쳐다보니 얼마 가지 않아 그건 곤이라는 걸 알게 됐다. 곤은 나처럼 흠뻑 젖어있었다. 그는 내게 붉은 끈이 달린 전모를 내밀고 있었다. 내가 받지 않자 곤은 그걸 내 머리 위로 억지로 씌웠다. 덕분에 비를 맞는 차가움이 조금 줄어들었다. 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고 했다. 괜찮으니 이만 자리를 떠도 된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혓바닥 안에 불로 만든 구슬이 여럿 있는 것 같았다. 정신이 흐렸다.
그렇게 쓰러지면서, 아마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안개 위를 달리고 있었다.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 불안은 몸 밖 행동으로 나타나서 자꾸만 다리가 엇갈렸다.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숨이 벅차도 참고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문득 더는 숨을 쉴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울면 안 되었다. 울게 되면 그에게 제대로 된 작별을 건넬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참고 또 참으면서 그를 따라잡으려고 애를 썼다. 마침내 그 근처에 다다랐을 땐 호흡이 뒤죽박죽이어서 잠시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는 마지막 모습마저도 눈이 부셨다. 눈이 부셔서, 살짝 고개를 돌리는데 문득 끝이 없는 낭떠러지가 보였다. 내가 떨어질 곳이었다.
꿈은 지독하게 끝났다.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머리가 뜨겁고 땀으로 젖은 몸이 축축했다. 눈을 깜빡이면서 상황 파악을 하려는데, 문득 그의 얼굴이 보였다. 세자였다. 놀라서 숨이 멈췄다. 아직도 꿈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
"……."
그의 손이 내 이마를 짚었을 때에서야 지금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깨달았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한참이나 나를 내려다봤다. 조금 시선을 돌리자 이 곳이 어디도 아닌 내 방이라는 걸 알게 됐다. 방 안엔 그와 나, 둘이 전부였다. 그는 별안간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한 번 내 이마를 짚었다.
"후원에 가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걱정했습니다, 좀처럼 열이 내리질 않아서."
"……."
"호위무관에게 벌을 내릴 것입니다. 오늘 그대를 지킬 것을 그토록 강조했는데, 같이 감기에 들어버리다니…."
그는 잠깐 입술을 삐죽거렸다. 다행이다. 나를 용서할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생각에 내가 무심코 웃자 그는 미간을 좁혔다. 웃음이 나오느냐고 나를 다그쳤다. 나는 그가 내 옆에 내내 있어줬다는 게 좋아서, 단지 그뿐이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고갯짓에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한빈은 턱선 주위의 작은 상처를 달고 있었다. 사냥을 간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아마 거기서 얻어낸 상처인 것 같았다. 나는 무거운 팔을 뒤척여 저고리에 달려 있을 주머니를 찾았다. 이제 보니 내 옷은 새 것으로 갈아입혀져 있는 상태였다. 잃어버린 줄 알고 벌떡 몸을 일으키니, 다행스럽게도 경대 앞에 주머니가 있었다. 나는 안심하면서 힘겹게 그 앞으로 몸을 움직였다. 한빈은 그런 나를 멀뚱히 지켜보고 있었다.
"…귀한 얼굴에 상처가 생기셨습니다."
"……."
"이걸…. 발라드려도 됩니까?"
주머니 안에서 연고 통을 꺼내며 물었다. 목소리는 형편 없이 갈라졌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내 멋대로 손가락으로 연고를 떠서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열에 시달렸다는 몸은 무거우면서도 먼지 한 층처럼 사뿐했다. 한빈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 위로 손가락을 문지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내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또 갑자기 입을 맞췄다. 첫 입 맞춤에 다시 몸에 힘이 풀렸다. 그는 여전히 내 팔을 가볍게 쥐고 있었다.
한빈은 곧 입술을 뗐다. 그는 말 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의 두 눈 사이에서 뭔지 모를 격정적인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한빈의 손이 문득 내 옷 고름 앞에서 멈췄다.
"오늘 밤에 그대를 좀 안아야겠습니다."
사고가 정지했다. 그는 곧 아까와 같은 입 맞춤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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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백: 파의 뿌리로 달이면 감기에 효능이 있음.
*맥문동: 백합목 백합과 식물로 달이면 감기에 효능이 있음.
*백세창: 천연두의 다른 말. 초기 증상이 감기와 같은 전염병이며 발병하면 이 주 안에 죽는다.
*내의원 의녀: 의술을 배운 여자. 하지만 신분은 매우 천했다. 약방 기생이라는 뜻이 있으며 실제로 궁의 행사가 있을 때 남성들 사이에서 술을 따르거나 흥을 돋우게 했다는 기록이 있음.
*가리마: 의녀들이 쓰고 다니는 관모.
*중건: 궁을 고쳐 지음.
*전모: 조선시대 여성들이 외출할 때 사용하던 쓰개.
*신시: 오후 3시~ 5시.
안녕하세요 독자 님들!
조금 늦었죠...? ㅎ 제가 뭐 그렇죠 ㅎ
저번 편에 갑자기 댓글을 많이 달아주셔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놀랐습니다 ㅠㅠㅠ 엉엉
정말로 감사드려요! ㅠㅠㅠ
정주행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댓글 볼 때마다 귀여우셔서 쥬금 ㅇ〈-〈 ㅋㅋㅋㅋㅋ
오늘 너무 심각한 노잼이라 포인트를 걸기 너무 죄송스럽네요 (심각)
표지를 한 번 바꿔봤는데 돌멩이 손을 가진 저는... 어쩔 수 없군요... ㅎ (심각)
아 그리고! 저번 편에 댓글로 어떤 독자 분께서 어느 왕을 인물로 잡고 글을 쓰냐고 물으셨는데
이것은... 백 퍼센트 허구이기 때문에 실존하는 인물과는 전! 혀! 관련이 없답니다!
(BGM:비스트-픽션) 이건 픽션이에요 픽션!!
오해하시면 안 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항상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ㅜㅜ
비회원 독자 님들도 항상 감사드려요!
독자 분들 제가 정말 사랑하는데 이걸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ㅠㅠ
바나나킥 님
빈블리 님
김빱 님
일이세개 님
뜨뚜 님
뿌요뿌요 님
한빈아춤추자 님
또또 님
슬기 님
동동동 님
총총총 님
꾸준해 님
꾸주네 님
김한빈김지원 님
꾸욥 님
헤헷 님
페브리즈 님
햇님 님
떡볶이 님
파랑짹짹이 님
혜민서송씨 님
케빈 님
팬더 님
갠짠 님
천상여자 님
동동만두 님
눈물점 님
두둠칫 님
찌푸 님
지난지난 님
삐야기 님
친주 님
콘초 님
ㅈㅇㅈㅇ 님
엘사 님
맘비니 님
콩기름 님
뽀로로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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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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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프 님
옷쟝 님
밤비 님
쵸무룩 님
ㄱㅈㅎ 님
메추리밥 님
에린지움 님
흐림 님
구주네 님
됴종이 님
미개한 글...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찡긋)
다음 편에서 봐요!!
안녕!!!!
그리고 전 변태가 아닙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