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데가 없는데 해가 져버렸어.
윤기한테 찾아가기엔 걘 너무 스타고, 어디 사는지도 몰라.
나 친구도 없는데....
연극부 선배 언니한테라도 찾아가볼까.
지갑엔 2만원 있는데 아껴써야될텐데.
다행히 캐리어 하나 들고 와서 짐은 많지 않다.
근데 옷이 몇벌 안들어있어서 걱정되기도...
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앉아있던 벤치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몇걸음 걸어갔다가 다시 앉았다가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어.
한심하지...?
근데 정작 내 상황에 처하면....이렇게 돼. 마음 속이 아수라장이 되서 실마리가 안보여 ㅠㅠㅠ
일단 춥고 배고프니 사우나로 갔어.
어쨌든 씻고 잘 수 있는 곳이니까.. 거기서 좀 방법을 모색해봐야겠어.
[아 내가 거기서 살아도 되는거야?]
[그렇다는데?]
[너는 안 바빠?]
[나 바쁜데 졸지에 혼자 된 누나 챙겨줄 시간은 있어]
[민윤기..좀 감동이야. 그래도 못 본 지 꽤 돼서 안 챙겨줄 줄 알았는데.]
[의리가 있지. 우리가 어렸을 때 얼마나 친했는지 기억하니까.]
[그래 고마워. 사실 나 지금 사우나거든.]
[사우나??? 당장 집으로 가 지금 이 시간에 뭐하는거야]
뭐 이런 식으로 대화를 끝내고 나는 우리 집에서 그냥 살아도 된다는 말에 안도해서 친정?집으로 돌아갔지.
사실 재벌가 저택에서 살다가 아파트로 돌아오니 약간 답답한 기분을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집은 집. 밖에 비해 편했어.
"가스 밸브 잠그고 나가라고 잔소리했었으면서....설거지도 안해놓고..."
집에 있는 부모님의 흔적을 보고 또 눈물이 나고 집안 정리를 하면서 계속 눈물이 났어. 이러다가 눈 빠지는거 아닌지 몰라.
그렇게 다음 날이 왔고, 오늘은 전공 수업이 있는 날이었기에 빠질 수는 없어서 학교에 갔어.
수업을 듣고 집에 가려는데
"어이~"
"....아 선배 안녕하세요!"
"오늘 동선 맞추는 날인거 알고 있지? 무대에서 인터미션 전까지 합 짜니까 다 모여. 점심 먹고 2시까지"
"아...네!"
"오늘 이상한데...? 혹시 어디 아픈거야?"
"아니예요..이따 만나요 선배~"
애써 웃으면서 인사하고 선배랑 헤어진 뒤 한숨을 푹푹 내쉬었어. 아...빠지고 싶은데 빠지면 안되는 날이 오다니..
"어제 어디에 있었어"
"전....아니 난 이제 알아서 살거야. 이제 내 남편 아니고 그 집 사람 아니니까 반말 할게"
"듣던 중 다행이네. 반말을 쓸 명분이 생겼으니"
"나 지금 심신이 너무 고단하니까 관심은 그만 가져줘. 아 그리고...감사..고마워요. 김태형씨 아니었으면 진짜로 나는 불효녀가 됐을지도 몰라"
김태형씨는 아무 말도 없었어.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 만나서 많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우리가 연애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도 정들었으니까 이런 말을 해주는게 예의인 것 같아"
"...눈이 많이 부었어. 이젠 울지 마"
눈도 안 마주치고 한다는 소리가 내 눈이 부었다는 것과 울지 말라는 것.
또 울컥했지만, 꾹 참았어.
곧 내 차례가 돌아오거든. 비록 분량은 얼마 안되지만 그래도 동선은 복잡한 편이라고 꽤.
안무도 있어서 파트너랑도 맞춰봐야해.
근데 아직 그 파트너가 누군진 몰라.
어쨌든 그래서 김태형씨랑 진짜 마지막을 고하고, 대기실로 들어갔어.
눈이 붓고 따끔따끔거리고 충혈되서 도저히 눈쪽 메이크업은 못하겠더라구.
"메이크업 다 했어?"
"네."
"근데 왜 눈화장 안했어?"
"어제 슬픈영화보고 너무 많이 울어서 눈이 부었어요...오늘 연습있는거 알았으면 영화보지말걸..."
"으이구.. 어서 나와 곧 네 차례야. 그리고 파트너는 알지?"
"아니요...?"
"어차피 지금 커플댄스 맞춰볼 건 아니고 기존에 개인 안무만 맞으면 되니까. 근데 왜 안알려줬지? 작가애가 정국이라고 알려준다 했는데"
선배 말을 듣고 저절로 인상이 찌뿌려졌어.
또 전정국 전정국.
어쩌면 이 모든 불운의 시작은 내가 전정국을 좋아하면서부터 시작된 거 같단 말이야.
난 바로 작가 선배를 찾아갔지.
"어 왜?"
"저 파트너 좀 바꿔주시면 안될까요...?"
"정국이?"
"네.."
"왜? 다들 정국이랑 추고 싶어서 난리났던데"
"저 남자친구 있잖아요.."
지금은 없지만 그래도 있다고 해야 전정국이랑 붙는 일이 없겠지.
"근데 정국이가 너랑 하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들어준 부탁이라 이번에 무르기가 좀 그렇네... 이번만 남자친구한테 양해를 구해봐"
전정국이 부탁한거라니....후....
일단 알겠다고 하고 무대연습까지는 같이 했지.
다행히 아직 커플댄스는 시작도 안했으니 그 전에 바꿀 수 있겠지?
"선배 수고했어요"
음료수를 내밀길래,
"고마워"
하고 받았지, 그 다음 아무 말도 없었어.
"선배 힘내요. 태형이 형한테 얘기 들었어요"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도와줄게"
"그래. 고마워"
"선배 옛날이랑 태도가 다르니까 어색하다"
"그러니까 이제 가줬으면 좋겠어. 김태형씨한테 뭘 들었는지는 몰라도 암튼 나 힘들거든."
"미안해요."
"그래"
"나 선배 포기 못 할 것 같아요."
또 시작이야 저 새끼....
"포기를 하든 못하든 넌 나랑 안돼. 너 좋다는 예쁜 선배들 얼마나 많아...."
"선배가 제일 예뻐요"
"지금 니 눈이 좀 삐어서 그래 정국아."
"알아요 내 눈 삔 거. 나 눈장애니까 선배가 케어해줘요."
"싫어. 알아서 고쳐."
정국이 너무하다면서 중얼거리다가 선배들이 심부름 시켜서 그거 하러갔어.
머리가 지끈거려서 내 연습 끝난 김에 집에 가려고 나섰지.
우리 집까지 오는 길에 나는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는 김태형씨를 보고 깜짝 놀랐어.
"깜짝이야! 언제 따라온거야"
"그 쪽이 연습실 나올 때부터 쭉. 버스도 따라탔는데."
"왜 쓸데없는 짓을 해요"
"그쪽 사는 곳이 어딘지 알았으니 생산적인 활동을 한거지"
"알아서 뭐가 도움이 됐을진 모르겠지만, 성에 찼다면 가세요 이제."
"왜 반말하다가 존대하다가 왔다갔다해?"
"능청맞게 묻지 마요. 김태형씨 이러는 꼴 어머니...아니 사모님이 보시면 혼나요."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집에 들어가려고 도어락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여는데,
"연애해요 우리."
"....네??"
"약혼이 취소됐으니까 우리는 남남이고,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결론은 우리가 연애하면 다시 예전의 관계로.."
"지금 그거 되게 현실감 없는 소리인거 말하면서도 느끼고 있죠?"
"들켰나"
"익숙하던 사람이 없어져서 허전한 것 뿐이예요. 분명히 그걸 곧 느끼고 다시 종전처럼 익숙해질거예요. 우리는 21년의 인생 중 딱 두 해만 같이 보낸걸요. 그것도 반은 어색하게 반은 가까워지려다 전정국 때문에 망하게"
"....."
"차는 게 아니예요. 나도 김태형씨 좋아요. 하지만 우리가 과연 지난 날을 잊고 다른 연인들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김태형씨는 더 말을 하진 못했어. 틀린 말이 아니니까.
나는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대접할 게 없으니 그냥 가라고 말을 했고, 김태형씨는 별다른 말 없이 갔어.
집에서 이불 꽁꽁 싸매고 소파에 누워서 음악을 들으며 계속 되뇌었어.
'나는 잘한거다. 잘한거다. 잘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