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 대신 체육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강당으로 내려왔다. 저마다 강당 안에 흩어져있던 아이들은 내가 강당 문을 열고 들어오자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안녕. 내 목소리에 아이들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인사에 웃으며 아이들의 앞에 섰다.
" 미리 공지한대로 옷은 다들 갈아입고 왔네. 아마 내 수업이 여기서 듣는 모든 수업 중 가장 재미있을 거야. "
내 수업은 송윤형 수업처럼 고리타분한 이론 수업이 아니라 실전이거든. 내 말에 아이들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을 쭉 훑다가 익숙한 얼굴 하나로 시선이 멈췄다. 어, 아는 얼굴! 반가운 마음에 눈이 마주치고 살짝 웃자, 김지원도 내게 살짝 눈웃음을 지어왔다. 구준회네 반 아이들이었구나. 저 컨트롤러가 있는 걸 보니.
" 오늘 수업은 너희들 능력을 보는 걸로 시작할 거야. 능력 발현이 되는 아이들도 있을 테고, 안 되는 아이들도 있을테니까. 두 명씩 짝을 지어서 하도록 해. 한 명이 하면 한 명이 옆에서 봐주는 걸로. "
" ……. "
" 아, 무슨 능력이든 사람에게 하는 건 안 돼. "
안내문에 적혀있는 학교 규칙은 다들 읽어봤지? 내 물음에 아이들이 네, 하고 답했다. 대답은 좋네. 씩 웃으며 박수를 두 번 쳤다. 그럼 시작.
강당 안에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아이들은 저마다 두 명씩 짝을 지어서 능력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들을 앞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쪽 끝의 팀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도록 한 금발 머리의 남자아이는 살짝 인상을 쓰고 있었고, 그 하얀 손바닥 위로 작은 스파크가 일었다.
저런.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남자자이의 옆으로 걸음을 옮기자, 남자아이가 작은 전기를 만들어내던 것을 멈추곤 나를 바라보았다.
" 손 줘봐. "
내 말에 남자아이는 머뭇거리다가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런 남자아이의 손을 살짝 잡았다가 뗐다. 그리곤 내 손바닥이 천장을 향하도록 하여, 손바닥 위로 전기를 만들어보였다. 금방이라도 불꽃이 날 것처럼 둥근 모양으로 모여든 전기를 본 남자아이가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다.
" 보여? 이게 네 능력이야. "
" 정말요? "
" 그럼. 네 능력은 조금 전에 봤던 그런 조그만 스파크 따위가 아니야. 이만큼의 불꽃을 만들어 낼 수 있어. "
" 우와…. "
" 손바닥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 다른 생각은 말고. "
손바닥 위로 만들었던 전기를 거두곤 아이를 바라보자 남자아이의 표정은 여전히 멍했다. 그런 아이를 보다가 피실 피실 웃음을 흘리며 아이의 어깨를 툭 쳤다. 정신 차려. 얼른 연습해. 내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남자아이가 몸을 가볍게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옆에 있는 다른 조를 보기 위해 그 아이들에게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조금 전 그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해! 저 선배님 능력이 흡수라며? 진짜? 업테이커? 대박이다. 나도 저런 능력 가지고 싶어. 귓가에 들려오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웃으며 잡담은 그만, 하고 큰 목소리로 말하자 들려오던 말소리가 곧바로 사라졌다.
몇 조를 스쳐 지나, 얼마 가지 않아서 컨트롤러의 앞에 도착했다. 저와 비슷한 키의 남자아이와 짝을 이룬 김지원은 앞에 놓여진 작은 물통을 들어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능력을 발휘하는 거라 힘들 법도 한데 김지원은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평온하기도 했고,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컨트롤러, 하고 김지원을 부르자 김지원이 날 바라보았다.
" 그거 말고, 저기 저걸 움직여봐. "
강당 앞에 놓여진 의자 가리키자 김지원이 잠깐 의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김지원과 눈을 맞추고 어깨를 으쓱이자, 김지원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의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곧이어 의자가 흔들림도 없이 곧장 바닥에서 떨어져 공중으로 떠올랐다.
오호라, 얘 봐라?
재미있단 표정으로 김지원을 바라보자 김지원이 의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곤 나를 바라보았다. 들어 올릴 수 있을 줄은 몰랐던 건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날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웃는 김지원을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번엔 저거.
내 시선이 닿는 체육관 한쪽 구석으로 함께 시선을 옮긴 김지원이 이동식 농구 골대를 잠깐 바라보았다가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걸요? 하는 물음에 고개 끄덕이자 김지원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 못 해요. "
" 못 하는 게 어딨어? "
내 물음에 김지원이 다시 한 번 농구골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가, 망설이며 입을 뗐다.
" 하다가 떨어트릴 수도 있어요. "
" 그래서? "
" 혹시나 저게 부서지기라도 하면…. "
" 괜찮아. 어차피 안 쓰는 거니까. "
웃으며 바라보자 내 말에 한참을 머뭇거리던 김지원이 손을 움직였다. 김지원의 손이 골대를 향하고, 이내 농구 골대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조금씩 공중에 뜨기 시작했다. 무거운 만큼 힘이 더 드는 건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능력 때문에 농구 골대가 약간씩 휘청였다. 불안정하긴 하지만 꽤나 높은 곳까지 골대를 들어 올린 모습을 보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신입생이 저게 가능해? 이거 봐. 역시 제인의 뒤를 이을 놈이라니까.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하고 피실 피실 웃었다. 주위에서 연습을 하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김지원과 골대에게로 닿았다.
잠깐 그렇게 인상을 쓰고 골대를 들고 있던 김지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날 한 번 힐끔였다. 그리고 집중이 흐려진 탓인지 농구 골대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엄청난 소리가 체육관 안을 울리고, 귀를 때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썼다. 옆으로 쓰러진 농구 골대를 바라보다가 김지원을 바라보자, 김지원이 날 보곤 어깨를 으쓱였다.
" 못 할 거라고 했잖아요. "
그렇게 말하고도 미안한 듯 내 눈치를 살짝 보는 김지원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김지원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씩 웃었다.
" 아냐. 잘했어. "
" ……. "
" 너 생각보다 더 괜찮은 놈이구나? "
내 말에 어색하게 웃는 김지원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리곤 여전히 이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몸을 틀었다. 내 시선이 닿자 이쪽을 바라보던 아이들은 훔쳐보다 걸린 것처럼 몸을 작게 떨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씩 웃곤 다들 연습은 많이 했어? 하고 묻자, 아이들이 작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 허락 없이 능력 발휘하는 건 곤란해. 너희들은 아직 완전히 조절이 되는 상태가 아니니까. 만약 허가 없이 능력을 쓰다가 걸릴 경우 모두 벌점이야. 알고 있는 거겠지만 한 번 더 알려줄게. "
매년 꼭 벌점 받는 신입생이 한 두 명은 생기거든. 피식 웃으며 말을 잠깐 멈췄다가, 조금 전의 목소리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 "
이어서 차렷, 인사! 하고 소리치자 나를 바라보던 아이들이 몸을 굽혀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내게 인사를 했다. 강당의 문이 열리고 하나 둘씩 밖으로 나가는 아이들을 따라 김지원도 걸음을 옮겼다. 그런 김지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웃음을 걸었다. 귀여워라. 역시 학생회 감이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김지원을 빤히 바라보는데, 강당을 빠져나가는 아이들 사이로 제인과 윤형이 함께 들어왔다. 내게로 곧장 다가온 송윤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뭐야, 조금 전 그 소리는? 저 농구 골대는 왜 쓰러져 있고? "
그런 송윤형을 웃으며 바라보다가, 제인에게로 시선을 돌려 말했다. 저거 좀 일으켜세워줘. 내 말에 제인이 허-얼, 하는 소리와 함께 날 바라보았다.
" 대체 저 무거운 골대를 누가 저렇게 넘어트린 거야? "
그 말에 킥킥 웃으며 답했다. 신입 컨트롤러! 대단하지 않아? 내 말에 제인이 놀란 듯 날 바라보았다. 옆의 송윤형 또한 놀란 듯 한 표정이었다. 세 명의 시선이 닿고, 순간 셋 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해 한참을 킥킥대다가 송윤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이번 신입은 제인보다 더 괴물인 것 같지? "
내 물음에 윤형이 동의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턱을 괸 채로 앞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았다. 위에서부터 한 줄씩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오다가, 반도 읽지 않고 한 장을 넘겼다. 글 읽는 건 딱 질색이야. 입술을 삐죽이며 의미 없이 서류를 바라만 보다가 옆에 놓여진 펜을 들었다.
몰라. 대충 할래…. 비어있는 서명 란에 싸인을 하기 위해 펜을 가져다 대는데, 때 마침 옆에 놓아둔 휴대폰에서 딩동 하는 알람소리가 짧게 울렸다.
[서류 대충 읽으면 숯불구이 만들어 버릴 거야.] -잔소리쟁이
화면에 곧장 뜨는 문자를 확인하곤 인상을 팍 썼다. 아, 송윤형 얘는 대체 어떻게 알고 이렇게 보내는 거야! 씨이, 하는 소리를 뱉으며 서류에 가져다 댔던 펜을 떼자 검은색 작은 점이 하나 찍여있었다. 한숨을 짧게 내쉬곤 결국 대충 넘겼던 서류의 제일 첫 페이지를 다시 폈다. 여전히 턱을 괸 채로 의자 아래의 발을 까딱이며 첫줄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2015년 교내 체육대회 일정에 따른….
똑똑, 갑작스럽게 들려온 문 두드리는 소리에 서류를 바라보던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선배님, 하는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야? "
내 물음에 문을 살짝 연 김한빈이 고개만 안쪽으로 배꼼 내밀었다. 들어가도 돼요? 반가운 얼굴에 어, 힐러! 하는 부름과 함께 들어오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김한빈이 살짝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앉아있던 책상 쪽으로 다가온 김한빈이 서류 뭉치를 내게 내밀었다. 이거, 체육대회 참가 동의서요.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는 김한빈을 바라보다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다들 내용은 읽어보고 동의한 거 맞지? "
" 네. 그럴 거예요. "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살짝 웃자 김한빈이 날 바라보다가 눈을 피했다.
" 힐러. "
" …네? "
" 넌 내가 무서워? "
내 물음에 김한빈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고개와 손을 함께 도리도리 젓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킥킥 웃음이 새어나왔다.
" 그런데 왜 내 시선을 피해? "
내 물음에 김한빈이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그냥, 그게…. 뭐라고 대답도 못 하고 말끝을 흐리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왠지 놀리기 재밌는 애네. 아직 병아리라 그런가.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김한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너 진짜 귀엽다, 하고 웃자 김한빈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왔다.
" 그래. 수고했어. 가봐. "
내 말에 김한빈이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 인사를 잠깐 보다가 금방 시선을 돌려 펜을 잡았다. 몇 줄 읽다 말았던 서류를 다시 읽어 내리는데, 나도 모르게 짧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 이걸 어떻게 다 읽어…. "
서류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쌓여진 서류를 바라보았다. 아직 읽지 않은, 읽어야 할 서류들이 저만큼이나 남아 있었다. 다시 턱을 괴고 읽다 멈춘 지점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느껴지는 낯선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 안 나간 건지 김한빈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왜? 하고 묻자 김한빈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 도와드릴까요? "
그 말에 잠깐 물끄러미 김한빈을 바라보다가 씨익 웃었다. 그럴래?
거기 앉아. 내 말에 김한빈이 소파에 몸을 앉혔다. 몸을 일으켜 옆에 쌓여진 서류들을 품에 안은 뒤, 한빈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 서류들을 다 내려놓은 뒤 김한빈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제일 위에 놓여진 서류를 하나 펼쳐서 한빈의 앞에, 한빈의 방향으로 내려놓았다.
" 이걸 읽고 무슨 내용인지 요약만 해줘. "
" 네. "
" 적힌 수치들은…. "
한빈이를 잠깐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냐. 거기까진 어렵겠지. 그냥 내용이라도 대충 요약해줘. 내 말에 한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를 꼰 채로, 아까 읽던 서류를 들어서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송윤형의 부탁대로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어가긴 하는데,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어서 그런 건지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충 할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조금 전 보았던 송윤형의 문자가 눈앞을 아른거렸다.
구이가 되고 싶진 않은데…. 내 중얼거림에 한빈이가 네? 하고 되물었다. 앞에 앉은 한빈이를 바라보며 아냐, 신경 쓰지 마, 하고 웃으며 답하는데 한빈이가 저… 하고 나를 불렀다.
" 왜? "
" 다 읽었어요. "
" 뭐? "
" 방송부에서 보낸 건데, 교내 신문 제작에 대한 올해 예산이 작년에 비해서…. "
뭐라고 말을 이어가던 한빈이가 멍한 표정의 날 바라보다가 말을 멈췄다. 선배님? 하고 나를 다시 불러오는 한빈이의 목소리에 어, 하고 겨우 정신을 깨곤 한빈이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하고 묻는 목소리에 내 무릎 위의 서류를 탁 접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 이걸 그렇게 빨리 다 읽었단 말야? "
내 물음에 한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떻게? "
" 어, 속독을 배운 적이 있어서…. "
수줍게 웃으며 제 서류를 덮곤 답하는 한빈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맞은편 테이블 위에 놓여진 한빈이의 손을 딱 잡았다. 갑작스럽게 닿아오는 내 손길에 한빈이가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런 한빈이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 힐러! "
" 네…? "
" 이름이 한빈이랬지? "
" 네. "
" 한빈아, 너 볼수록 괜찮구나! "
내 말에 한빈이가 당황한 듯 떨리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았다. 잡고 있던 손을 풀어 김한빈의 앞에 놓여 있던 서류를 내 쪽으로 가져왔다. 서류를 펼쳐서 비어있는 서명 란에 싸인을 하곤 곧바로 덮었다. 한쪽 옆에 내려놓으며 한빈이를 바라보고 씩 웃자, 아직 굳어있던 한빈이가 나를 한 번 힐끔이곤 쭈뼛쭈뼛 테이블 위의 제 손을 거뒀다. 잠깐 제 손을 만지작거리던 한빈이가 쌓여진 서류들 중 다른 서류를 제 앞으로 펼쳤다.
" 어쩜, 이번 학생회는 이렇게 하나같이 다 마음에 들지? "
덮었던 내 서류를 다시 열곤 기분 좋게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에 한빈이가 서류를 읽다 말고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잠깐 날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숙인 김한빈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 * *
점심을 먹은 뒤 학생회 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방송부로 향했다. 노크 없이 방송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듣기 좋은 음악소리가 방송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검은색 회전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로 눈을 감고 노래에 빠져 있는 김진환을 힐끔 보곤, 그대로 방송실의 문을 닫았다. 김진환 뒤쪽의 책상으로 걸어가 살짝 깡총 뛰어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노래에 빠진 건지 고개를 살짝 흔들며 음악을 듣고 있던 김진환이 웃음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왔어, 회장?
" 또 이 노래야? "
" 난 이 노래가 좋거든. "
어련하시겠어. 어깨를 으쓱이곤 들고 왔던 얇은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너희 예산 통과됐어, 하는 내 말에 김진환이 의자를 돌린 뒤 감은 눈을 떠서 날 바라보았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곤 김진환이 손을 까딱이자 방송실 안을 가득 채우던 음악 소리가 바꼈다. 조금 더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김진환은 사운더였다. 사운더는 소리를, 따지고 보면 음파를 조종할 수 있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도 만들어 낼 수 있었고,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소리를 들려줄 수도 있었으며, 공간 안을 원하는 음파로 가득 채울 수도 있었다. 사운더는 다른 능력에 비하여 비교적 흔한 능력에 속했고, 때문에 방송부 대부분이 사운더였다. 사운더들 중에서는 특이하게 기계의 전자파까지 다룰 수 있는 사운더 또한 존재했다.
바뀐 음악이 좋아서 이번엔 나도 함께 고개를 까딱였다. 방송부 신입생은 뽑았어? 하고 묻자 김진환이 응, 하고 답했다. 내일 신입생 등록 다 끝내고 학생회 쪽으로 명단 보낼게.
" 아, 학생회에 이번에 힐러 있다며? "
" 응! 대박이지? "
" 어때? "
" 뭐가? "
" 능력 발현은 잘 해? "
힐러도 힐러 나름이잖아. 김진환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 똑똑해 보이긴 하는데.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이는 김진환의 손을 향해 내 손을 뻗었다. 잠깐 손이 닿고 금방 김진환의 능력을 흡수해서 손가락을 까딱이자 방송부 안을 채우고 있던 음악이 바꼈다. 발랄하고 빠른 비트의 음악에 김진환이 인상을 팍 쓰곤 날 바라보았다.
" 뭐야, 한창 좋았는데. "
" 나는 이런 상큼한 노래가 좋아. "
" 아, 음악 센스는 완전 꽝이야. 너. "
" 조용히 해. 준회 능력 흡수해서 방송부 확 엎어버리기 전에. "
내 말에 김진환이 혀를 내두르곤 박자에 맞춰 고개를 작게 까닥였다. 금세 발랄한 노래에도 적응을 한 듯 리듬을 타는 김진환을 바라보며 킥킥 웃었다.
힐러 뿐만 아니라 이번에 컨트롤러도 있어, 하고 말하자 김진환이 제인이랑 같은? 하고 되물었다. 응. 하는 내 대답에 김진환이 꽤나 놀란 듯 한 표정을 지었다.
" 이번 신입생들 굉장하네. "
" 방송부는 어때? "
" 우린 뭐 늘 똑같지. "
" 사운더들? "
" 응. 아, 이번엔 사운더 아닌 애도 한 명 있긴 해. "
" 사운더가 아니면 뭔데? "
" 좀 특별한 신입. "
그게 누구야? 내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때 마침 누군가 방송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김진환이 쟤가 걔야, 하고 말했다. 품에는 신문을 가득 안은 채로 이쪽으로 시선을 옮겨 날 바라본 아이가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안녕. 웃으며 손을 들어 흔들곤 그 아이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바라보았다. 김동혁.
" 동혁이는 무슨 라인? "
갑작스럽게 제 이름을 불러 묻는 내 물음에 놀란 건지 김동혁이 몸을 멈칫했다.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가리키자 제 가슴의 명찰을 잠깐 내려다본 김동혁이 다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D 라인이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자 김동혁이 머뭇거리다가 내게서 시선을 돌려 뒤쪽에 달린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안쪽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김동혁이 테이블 위로 안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 별로 안 특별한 것 같은데. 쟤 능력은 뭐야? "
김진환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묻는데, 또 방송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한 명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입구로 다시 닿는 내 눈이 순간 크게 떠졌다.
" 엥? 김동혁? "
내가 뭘 잘못 봤나?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는데도 여전히 내 눈 앞에 보이는 건 김동혁이 맞았다. 이번에는 신문이 아닌 씨디를 몇 장 손에 든 김동혁이 김진환을 향해 물었다. 이것도 저쪽에 같이 둘까요? 그 물음에 김진환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쪽으로 가져다 줘.
이쪽으로 다가온 김동혁이 김진환에게 씨디를 내밀었다. 그 모습을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조금 전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던 김동혁이 그 방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같이 생긴 두 명의 김동혁들은 같은 모습, 같은 표정, 같은 자세로 날 바라보았다. 뭐야, 설마….
" 클론? "
멍하게 터져 나온 내 말에 김진환이 킥킥 웃으며 김동혁을 바라보았다. 수고했어. 그 말에 김동혁이, 아니 김동혁들이 나와 김진환을 향해 고개를 꾸벅이곤 몸을 돌려 방송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숨을 참고 있었던 것처럼 허얼, 하는 소리가 절로 새어나왔다. 여전히 벙찐 표정으로 김진환을 바라보자 김진환이 웃으며 물었다.
" 표정이 왜 그래? "
" 나 클론은 처음 봐. "
내 말에 김진환이 내 말투를 따라하며 나도 업테이커는 처음 봐, 하고 말했다. 샐쭉하게 바라보며 따라하지 마, 하고 칭얼대는 내 말에 김진환이 웃었다. 그 틈에 내 노래를 바꿔 다른 노래를 튼 김진환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만족하는 건지 다시 천천히 리듬을 탔다. 머리를 까딱이며 눈을 살짝 감은 김진환이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클론 아니야. 메이커야.
" 허얼, 메이커? "
더 대박이네. 내 말에 김진환이 그치? 하고 물었다. 그 물음에 대답 대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클론은 말 그대로 인간 복제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명, 세 명, 그리고 그 이상도 가능한 클론의 인간 복제는 능력이 클수록 많은 수의 복제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클론의 능력을 정리하자면 자기 자신에 한해서 무한 복제가 가능한 것이었다.
그와 다르게 메이커는 따지고 보면 클론보다는 조금 더 뛰어난 능력에 속했다. 메이커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복제할 수 있었다. 생물, 비생물, 음식, 물건 등 무엇이든 무제한으로 복제해 낼 수 있는 능력이었다. 복제를 통해 만들어진 것들은 본래의 물건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상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고 실체가 시야 내에 있어야지만 복제를 할 수 있었다.
" 신입생 중에 메이커가 있는 줄은 몰랐어. "
" D라인 담당 송윤형 아냐? 걔가 얘기 안 해? "
" 안 했어. 그 자식, 요새 게임에 빠져서 그거 하기 바빠. "
입술을 삐죽이며 학생회 실로 돌아가면 꼭 송윤형에게 한 소리 하리라 생각했다. 이렇게 중요한 걸 안 말해줬단 말야? 어느새 눈을 떠 날 바라보던 김진환은 내 표정에서 생각을 읽은 건지 킥킥 웃으며 중얼거렸다. 송윤형 꼬투리 하나 잡혔네.
" 아쉽다. "
" 뭐가? "
" 저런 애는 학생회 감인데. "
조금 높은 책상에서 내려와 구겨진 치마를 털며 말하자, 김진환이 웃으며 갈 거야? 하고 물었다.
" 응. 놀지 말고 명단이나 빨리 작성해서 보내. "
내 말에 김진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부 문을 향해 걸음을 몇 걸음 옮기다가 아, 하고 몸을 돌려 김진환의 옆으로 다시 돌아갔다. 쌓여진 신문 중에서 가장 위에 놓인 신문 하나를 들고 다시 몸을 돌렸다.
" 오늘자 학생회 실 신문은 내가 미리 들고 갈게. "
내 말에 김진환이 하여튼 성격 급하긴, 하고 말했다. 고개를 돌려 그런 김진환을 향해 혀를 배꼼 내밀어보이곤 방송실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
안녕! uriel 입니다!
몸이 안 좋아져서 글을 쓸 수가 없어요 몸도 마음도 요새는 왜 이렇게 일이 많은 건지 엉엉.. 2화에 이어서 써뒀던 3화를 이렇게 늦게나마 올리고 갈게요 마이너와 함께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좋아요 오늘은 사담도 짧고 사진도 없지만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 댓글도 추천도 늘 감사해요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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