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어 놨더니 |
신(神)은 무료했다. 얼마나 무료했냐 함은, 자그마치 이천년동안 쌓아두었던 서류들을 약 오백년에 걸쳐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 평생 해본 적 없는 청소를 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기보다 배는 바쁜 비서를 옆에 끼고 인간계에서 유행한다는 쎄쎄쎄까지 해보았다. 그 결과 정리가 끝나기 무섭게 서류들은 다시 쌓여갔으나 더이상은 서류의 'ㅅ'자만 봐도 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라며 신(神)은 하루가 멀다하고 쌓여가는 그 서류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되었으며, 원래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번쩍번쩍했으나 경악스럽게도 더욱이 깔끔해진 집안에는 더이상 먼지조차 쌓이지 않았고, 그 잠깐의 시간동안 월급 ─신(神)의 비서는 일의 처리갯수에 따라 월급이 달라진다.─ 이 3분의 1이나 깎여나간 비서는 소리를 꿱꿱 지르더니 튀어나가버렸다.
“흐음…….”
신(神)은 뒷통수를 긁적였다. 500년간 꼼짝없이 서류정리만 하고 이제서야 겨우 자유가 생기나 싶었더니 이제는 그 자유를 활용할 수단이 없었다.…그러고보니, 500년 전까지만해도 무언가에 푹 빠져 이천년동안이나 서류정리를 안하게 되었던 것 같은데. 그때까지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신(神)은 고개를 갸웃했다. 음, 으음, 으으음, 몇번의 신음소리가 오간끝에 신은 겨우 고개를 들고 주먹을 쥘 수 있었다. 아, 맞아. 그러고보니.
“…인간들을 관찰하는게, 꽤 재미있었지.”
[훈홍]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어 놨더니
단편
신(神)은 한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세상이라 해도 작은 지구하나에 뭔 나라들이 그리 오밀조밀하게 잘도 들어앉아 있는지 자신이 만들었으면서도 참 신기하다 싶은 기분이라 신(神)은 저 작고 동그란 구체가 언제봐도 참 재미있었다. 그중에서도 신(神)은 한국(韓國)이라는 조그마한 반도를 특히 애정했는데, 그것은 한국의 인간들이 자신과 매우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신(神)이 지구를 빗을 때 가장 먼저 만든게 한국이라는 나라 ─비록 나라의 주인이 바뀌며 이름또한 여러번 바뀌고 기록은 모두 사라졌지만 반만년간 끊임없이 돌고 돈 끝에 한국이라는 제이름을 되찾은 듯 보였다.─ 였고, 그랬기에 신(神)은 한국의 인간들에게 특히나 신경을 많이썼다. 아름다운 사람이 많기로 소문난 동양인들 중에서도 한국사람이라 하면 모두 엄지를 치켜 들 정도로 한국의 인간들이 미(美)에 특출난 것 또한 그런 이유였다. 한국사람들의 성(姓)과 이름또한 신(神) 자신의 것과 같은형식의 것 ─신(神)본인의 이름은 최이훈이다.─ 일만큼, 신(神)은 한국을 사랑했다.
「이번에 옆집 김씨네가 죽었다며? 보증금이 올라 쫓겨나서 투신자살을 했다네.」 「쯧쯧, 아무튼간에 돈없으면 죽어야 된다니까. 이러다가 또 집값 떨어지는거 아니야?」
신(神)은 인상을 찌푸렸다. 약 오백년만에 한국을 바라보기 시작한지 이제 겨우 하루가 되었건만, 그 짧은 사이에도 저런 대화는 심심할만큼 자주 오가고 있었다. 신(神)을 제외하고도 꽤 많은 수의 천계인들과 그의 비서들은 한국을 사랑했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신(神)과 닮은 생김새를 가진 이종족에 대한 알 수 없는 동질감에도 있었지만 신(神)이 빗어준 겉모습이 아니더라도 한국의 인간들은 충분히 사랑스러웠다. 하나같이 정에 약하고, 좋은것이 있으면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한다. 함께 죽어가는 처지에도 동냥받을 돈을 나누던 그 모습을 보고 천계인들은 감탄사를 남길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겉모습은 자신들의 신(神)과 흡사하여 동질감을 주지만, 그들의 속내는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천계인들의 특성을 그대로 빼다박아 다른의미의 동질감을 심어주었다. 그렇기때문에 무엇이든 쉽게 질리기로 유명한 신(神)또한 반만년이 가까운 세월동안 한국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있는것이었다. 신(神)은 한국인들이 사랑스러웠고, 영원히 제 모습을 유지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특별히 더 아꼈으며, 많은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잠시 눈을 돌린 사이 한국은 꽤 많이 변해있었다. 부유할때 남을 돕는일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아직도 여타의 다른 나라들에 비한다면 한국은 충분히 정(情)으로 넘쳐나는 나라였지만, 그 정(情)이란것이 예전만 못함에 신은 안타까웠다. 다른이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지는 못할망정 당장 자신들에게 올 피해부터 걱정하는 저 모습은 확실히 500년 전과 비교해 낯설은 것이었다.
「…김씨아저씨 돌아가셨어요?」
맑고 영롱한 아이의 목소리였다. 대화를 나누던 아낙네의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신(神)의 시선이 아래쪽을 향했다. 아름다운 아이였다. 이제 겨우 열댓살이나 되었을법한 작은 체구의 아이는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한 채 자신보다 조금 더 큰 키를 한 아낙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새카만 눈동자가 마치 오백여년 전 이 반도땅에 조선(朝鮮)이란 이름으로 불리우던 그시절의 그 정많던 사람들을 보고있는 듯 해 신(神)은 조금 흥미로워졌다. 잠시 위아래로 소년을 훑어보던 아낙네의 성의없는 고갯짓에 푹 수그려진 소년의 작은 뒷통수를 타고 흘러내리는 새카만 머리칼이 그 투명한 눈동자마냥 반짝이고 있었다.
「아저씨가…자영이랑 먹으라고 과자도 주시고, 할머니 드리라고 양갱도 주셨었는데…….」
얼핏 물기에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참을 가만히 서있던 소년이 기어이 훌쩍이기 시작했음에도 아낙네들은 별 반응이 없어보였다. 소년이 울먹이는 사이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쉰 아낙들이 척보기에도 거짓일게 뻔한 미소로 소년을 바라봄에 신(神)은 인상을 찌푸리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오백여년 전까지만 해도 화를내고 눈물을 흘릴지언정 저리 악독하게 웃는이는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거늘.
「울지마렴 시후야. 벌써 돌아가신걸 어쩌겠니…….」 「그래. 어이구, 할머니가 찾으시겠다. 어여 가보렴.」
엉덩이를 두드리는 아낙의 손길에 소년은 힘든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기어이 ‘김씨 아저씨’에 대해 미련이 남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낙들은 사라지는 소년을 흘끔거리며 수군덕대기 바빴다.
「저 애가 걔지? 그, 왜…이 위에 달동네에 할머니랑 여동생이랑 둘이 산다는…….」 「그려 그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전에 지 부모가 뺑소니로 죽었는데 그때부터 할미 할애비손에서 자랐다더라고.」 「쯧쯧…….」 「근데 할애비 죽고나서는 할미도 노망들어서 자꾸 헛소리나 하고앉았대. 저 애 팔에 멍 봤지? 그게 지 할미한테 맞아서 생긴거라고. 근데도 할미고 여동생이고 끔찍이해서 지금도 학교다니면서 일한다더만……이제 겨우 열다섯인데.」
기껏해야 초등학교 5학년이나 되었을법한 소년이 벌써 중학교 2학년이라는 점에 신(神)은 약간 놀라워했다. 곧이어 아낙네들의 대화주제는 다시 시시껄렁한 것으로 넘어갔음에도 신(神)은 방금전에 보았던 소년이 신경쓰였다. 신경을 쓰지못한 오백년사이 이 나라가 많이 변했구나 싶어 씁쓸하고 실망스러웠던것이 방금전의 소년으로 싹 가셨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저런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한것은 조금만 관리를 하면 이 나라가 다시 예전의 그 모습을 되찾을 용의가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했다. 의자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던 신(神)이 재빨리 포커스의 초점을 소년에게 맞추었다. 아낙들이 신나게 떠들어대던 슈퍼앞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을 종종걸음으로 걷는 소년의 표정은 못내 우울해보였다.
「할머니…다녀왔어요.」
조심스럽게 발을 들인 소년의 집안은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신(神)은 그저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여동생일듯한 아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소년의 물음에 소년의 조모로 보이는 늙은 여자는 갑자기 물건을 집어던지며 성을냈다. 정신나간 사람처럼 ─아니, 실제로 정신이 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물건을 집어던지다 기어이는 옆에 놓인 낡은 우산을 들고 휘두르는 조모를 뻔히 바라보면서도 소년은 제대로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채 그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아낙네가 말했던 팔의 멍 위에 우산이 닿자 그제서야 소년은 작은 신음을 한번 흘렸을 뿐이었지만 그 만 으로도 소년의 조모는 잔뜩 성을 내며 휘두르던 우산을 지팡이삼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대문을 나섰다.
「할머니…몸도 안좋으신데 어디가세요…….」 「늙은이라고 나다니는거 창피해서 그르냐! 쯧쯧! 어디가서 니 할미라고 얘기 안할테니 걱정말어!!」
기어이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된 조모가 사라진 길을 멍하니 바라보며 소년은 방금 전 맞았던 팔뚝부분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안쓰러울정도로 희고 마른 팔 위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는것은 확실히 보기 좋은광경이 아니었다. 피곤한 안색으로 소년은 자신과 꼭 닮은 여동생의 자는얼굴을 한번 쓰다듬어주고 다시 집 밖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아낙네들이 말한 '일'이란것을 하러가는 모양이었다. 나이도 어린데다 그 어린 나이로조차 볼 수 없을정도로 자라지 못한 몸을 하고 무슨 험한일 ─사실 신(神)의 눈에는 공사장판에 나가 그 여린 몸으로 남들 하는만큼 짐을 옮기고 낑낑거리는 그 모습이 이미 비춰지고 있었다.─ 을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신(神)은 매우 무료하였으며, 그런 신(神)은 저 소년이 흥미로웠다. 그렇기때문에, 신(神)은.
“…….”
……저 유난히도 희고 여린 소년을 한번 키워보기로, 그렇게 마음먹었다.
***
소년은 더이상 소년이 아니게되었다. 소년을 처음 본 신(神)은 소년 또래의 모든 아이들이 저런 심성을 가진 줄 알고있었으나 소년을 ‘키우기로’결심한 뒤 곧이어 그것은 자신의 너무나도 큰 오산이었음을 깨닫게되었다. 오백여년 전 까지만 해도 그 나이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만한 욕설과 불순한 언어를 입에 담고 음주와 흡연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더군다나 웃어른에게까지 그 불손한 언행을 서슴치않는 중학생들은 더이상 신(神)이 알고있던 동방예의지국의 예의바른 청소년들이 아니었다.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어있는 한반도에게, 그럼에도 신(神)이 관심을 끊지 않았던것은 어디까지나 소년때문이었다. 주변의 환경이 어떠하고 친구들이 어떠하든 소년은 그 곧은 심성 그대로 바르게 자라 청년이 되고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있었다.
「아,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아니여. 젊은이 앉아서 가~.」 「전 금방 내려서 괜찮아요. 얼른 앉으세요.」 「아이구…젊은이가 예의도 바르구만.」
싹싹하게 웃는 소년의 얼굴또한 여전히 희고 아름다웠다. 사실 ‘키운다’고 해봤자 별 것 없었다. 신(神)의 권능으로 소년을 항시 바라보고, 소년에게 무슨일이 생길라치면 그 일이 생기지 않도록. 소년의 곧고 바른 심성에 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키가 부쩍 자라며 어린티를 벗은 소년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또한 묘하게 사내같은 느낌을 품어 그런 소년을 흠모하는 여성들또한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년이 여지껏 그 흔한 여자친구 하나 사귀어보지 못한 채 순수한채로 남아있는 것 또한 신(神)의 권능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놔둘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여자에게 물들어 소년의 심성이 혹여 악(惡)하게 변할것이 두려웠던 ─이것은 기가막힌 변명이기도 했다. 이훈은 그저 소년이 여자와 놀아나는것이 보기 싫었을 뿐이다.─ 신(神)은 결국 소년에게 여자가 들러붙을 때마다 기가막힌 술수를 부려 떼어내는것을 즐기게까지 되었다.
「자영아, 자영이 있어?」 「응- 오빠왔어?」
소년을 따라 소년의 여동생또한 곱게 자라났다. 소년을 꼭 빼다박은 아름다운 얼굴에 소년을 꼭 빼다박은 곧고 바른 심성을 가졌지만 어째서인지 소녀를 바라볼때는 소년을 바라볼때처럼 흥미롭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키우고’있는 소년은 저 소녀를 굉장히 아끼고 있는 것 같으니, 신(神)은 소년만큼은 아니더라도 소녀에게 꽤 관심을 쏟고 있는 편이었다. 소녀와 소년은 손을 마주잡고 예쁘게 웃으며 근처에 있는 강가로 걸음을 옮겼다. 5년전, 소년이 막 열일곱이 되었을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조모를 뿌린 곳이었다.
「할머니 돌아가신지도 오늘로 꼭 5년째네…….」 「응. 그러게…」 「…오빠, 사실 나…할머니가 오빠 때릴때마다 할머니 참 밉고 야속했었다.」 「…….」 「……근데, 이렇게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까…또 많이 보고싶더라….」
소녀도 소년도, 더이상 말이 없었다. 소년의 조모가 죽을것을, 신(神)은 당연히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신(神)인 자신이 아닌 명계(命界)의 사신(死神)들의 관할인지라 신(神)인 자신으로써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 말하자면 관할 밖의 것이었다.……라고. 신(神)은 여지껏 변명하고 있었다. 명계(命界),천계(天界),인간계(人間界)를 비롯한 이 세계의 모든것은 자신이 창조하고 자신이 관리한다. 명계(命界)의 사신(死神)이든, 천계(天界)의 천인(天人)이든 그들이 어떤 막중한 임무를 띄고있으며 그곳에서 얼마나 위대한 존재이건간에 어차피 모두 자신이 창조하고 만들어낸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신(神)이 그깟 늙은이의 수명 조금 늘려둔다해서 그것에 대해 토를 달거나 불만을 표시할 사신(死神)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神)이 소년의 조모를 살려두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나 소년의 희고 여린 피부에 상처를 남기고, 모진말로 소년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는 그 늙은이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때 마침 조모의 수명이 다하지 않았다면 신(神)본인이 직접 나서 조모의 수명을 단축시켰을지도 모를정도로, 신(神)은 조모가 싫었다. 조모의 조촐한 ─정말, 장례식이라고는 부를 수 없을정도로 조촐하다못해 초라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이미 가루가 되어버린 조모를 품에 안고 서럽게 눈물을 흘리던 소년을 보며 죄책감이 아주 들지 않은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죽어버린 인간을 살릴수도 없거니와, 설령 살릴 수 있다해도 전혀 그럴 마음이 없던 신(神)은 어쨌거나 후련했다.
「자영아. 오빠 이제 군대가야 되는거…알지?」 「…….」 「…2년 금방이야. 오빠도 힘내서 열심히 버틸테니까…자영이 너도, 열심히 공부하고. 착하게 오빠 기다리고 있어야 된다?」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소년의 눈동자는 울음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전 입영통지서를 받고 당장 혼자남을 여동생 걱정에 혼자 눈물을 흘리던 소년을, 신(神)은 기억했다. 아차 싶었다. 미리 손써두지 못한것이 실수였다. 아무리 신(神)의 권능이라한들, 미래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는 무슨짓을해도 바꿀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이토록 안타까웠던적은 없었기에 신(神)은 난감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소년은 금새 군에 입대했고, 그곳에서의 시간을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반복되는 하루에도 신(神)이 질리지 않았던것은 시시각각 변하는 소년의 표정때문이었을것이다. 소년을 흙바닥에 굴려대는 상병을 때려죽이고 싶은적도 종종 있었지만 그때마다 신(神)은 가까스로 참아낼 수 있었고, 그런 무료한 시간이 약 일주일정도 반복되고있을 즈음이었다.
“신이시여!”
쾅. 울리는 소리에 신(神)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곳을 바라보니 약 십여년 전 자신과 쎄쎄쎄를 하다 월급의 3분의 1이 감봉되어 버렸다며 소리를 꿱꿱 지르던 자신의 수석 비서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신(神)의 불쾌한 얼굴에도 주눅들지 않은 채 비서는 무덤덤히, 그러나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방금 전의 그 외침은 모두 자신이 들은 환청이라도 된다는 냥 금새 표정을 바꾸는 비서가 그다지 마음에 드는것은 아니었지만, 원래 그런것을 알고있었으니 신(神)은 그저 조용히 앉아있었다.
“벌써 8년째 서류가 밀려있습니다.” “그래서?” “또 지난번같은 꼴이 나지 않으시려면 서둘러 서류를 정리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쫌만 이따.” “지난번에도 그런말로 미루고 미루다 결국 꼬박 오백년동안 사무실에 갇혀계시지 않으셨습니까.” “…….” “거기다가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긴급한 서류들까지 밀려들었습니다. 신의 서류처리는 언제나 순차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만든것은 본인이지 않습니까. 얼른 밀린 서류들을 정리하고 이 서류에 도장을 찍으셔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신(神)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뙤악볕에서 기합을 받고있는 소년의 얼굴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어차피 언젠가 서류를 정리해야 한다면 차라리 지금이 나았다. 군대에 있으니 어차피 똑같은 하루하루가 반복될 것이고, 그동한 소년의 웃는얼굴을 보지 못한다는것은 분명 아쉬운 사실이었지만 지금 이 서류를 미루고 미뤄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소년을 놓치게 된다면 그것이 더욱 억울할 터였다. 군대라 여자도 꼬이지 않으니 다른 계집과 정분이 날 일도 없을테고, 그래. 그렇게 하자. 생각보다 순순히 사무실로 들어서는 신(神)을 조금 의아하게 바라보던 비서가 걸음을 따라옮겼다.
“……흐음.” “여기, 도장입니다.” “그래 그래.”
책상위를 가득 채운 서류들을 질린표정으로 바라보며 신(神)이 바쁘게 손을 놀렸다. 이정도 양이라면 빨라봐야 일년이다. 아무리 그래도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정리를 마쳤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며, 신(神)은 그 지독한 서류더미 속에 더욱더 깊이 고개를 파묻었다.
싱글벙글 웃고있는 신(神)을, 비서는 조금 지독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정도 양이라면 잘해봐야 일년 반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일년만에 그 어마어마한 서류들를 뚝딱 정리해 버리다니. 확실히 십여년 전 쯔음부터 한반도의 한 소년에게 유난히 관심을 가진다 싶더니 그 유난스러운 관심히 이정도의 능력까지 끌어내 줄 줄이야. 팬을 놓고 기지개를 한번 켠 신(神)이 비서에게 아디오스를 전하며 유유히 자신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비서는 고민했다. 자, 이제 이 어마어마한 서류더미들의 운반을 누구에게 맡긴다.
“……음?”
분명히, 소년의 모습을 비추던 영사체는 끄지 않고 갔었는데. 방에만 들어오면 바로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 불만스럽게 혀를 찬 신(神)이 새까맣게 물들어 제 임무를 다하지 못한 채 죽어있는 영사체를 툭툭 건드렸다. 몇 번 주먹으로 두드리다 조금 힘을 줘 흔드니 곧 치직거리며 제대로된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영사체를 앞에 두고 만족스럽게 웃으며 신(神)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으극……윽….」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한 녹색의 군복바지만 화면을 가득 채운 채 들려오는 억눌린 신음성과 같은 그것은 묘하게 소년의 목소리를 닮아있어, 신(神)은 문득 초조해졌다. 곧이어 화면이 바뀌고 이내 정체모를 창고와 같은곳이 신(神)의 시야에 들어왔다.
「…군대생활 편하게 하고싶으면 앞으로 입 조심해라.」
히죽이 웃은 사내는 소년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탁. 창고와도 같은 그곳의 문이 닫혀지자 흔한 창문조차 하나 없이 폐쇄적인 그곳은 금새 어둠으로 물들었다. 어둠에 물든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신(神)은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한번에 힘이 풀린 몸이 금새 소파 등받이에 파묻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하게 보인 소년의 모습에 신(神)은 자신이 존재한 후 처음으로 놀라움에 숨이 멎는 기현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아…하아……흐…흐으…….」
간혈적인 숨소리와 함께 들려오던 신음소리는 어느새 가녀린 흐느낌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어둠속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외면하기에 너무나도 소년의 것과 닮아있어서, 신(神)은 그제서야 자신이 방금 전 본것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소년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깨달음과 이해하는것은, 실로 너무나도 다른것이어서. 그제서야 이런 사실을 알아챈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눈물이란 것이리라. 분명히, 볼을 타고 흐르는 이 액체는. 유약한 인간들이나 흘린다고 말하던, 그, 따뜻한……
「……미안해, 자영아….」
소년은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신(神)은 소리없이 오열하며 깊게 허리를 숙였다. 문을 닫고 나가던 상병, 차가운 바닥에 널부러진 채 초점없던 소년의 눈동자. 아무렇게나 벗겨진 군복바지 아래로 보이던 희고 가는 허벅지, 그 허벅지를 타고 흐르던……희고붉은, 액체. 고통에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괴로움에 숨조차 똑바로 쉴 수 없어, 신(神)은 절망했다. 처음으로 사랑했던 소년이, 볼품없는 남자에게 볼품없이 희롱당한 채 희망을 잃은 모습을 바라보는것은 가히 쉬운일이 아니었다. 죽여버릴것이라 생각했다. 죽이는 것으로는 모자라다. 무슨짓을 해서라도, 세상에 있는 모든 고통이란 고통은 전부 느끼게 해주리라. 신(神)이 분노로 다짐함과 동시에.
탕─!
……그토록 예쁜 얼굴로 웃었던 소년이, 자신의 손으로 생을 마감했다.
***
“신이시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자신의 신(神)은 참으로 별난 사람이라고, 비서는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일년 전이야 워낙 급한 안건이었기에 절차를 무시하고 냅다 소리부터 지르며 쳐들어갔다지만, 보통은 이런식으로 양해를 구하는게 먼저였다. 원래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일수록 자신을 대하는 다른이의 태도에 민감해 조금이라도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달가워하지 않기 마련이다. 그것은 수많은 차원을 떠돌며 수없이 위대한 자들을 모셔왔던 비서로서도 한번의 예외조차 본 적 없을정도로 당위성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신(神)은 달랐다. 이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주제에 정작 자신을 대하는 아랫것들의 태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심지어는 자신조차 그 아랫것들에게 위엄을 차릴 생각을 하지 않고있었다. 약 십여년 전 심심하다고 일이 밀린 자신을 붙들어놓고 쎄쎄쎄인지 뭔지를 시킬때부터, 알아 봤어야 했다.
“…….”
침묵은 곧 긍정이다. 끼익, 문을 열고 방안에 몸을 들인 비서는 동시에 느껴지는 서늘함에 몸을 떨었다. 여전히, 신(神)은 앉아있었다. 일년 전 자신이 무작정 쳐들어왔을때와 마찬가지로, 아마도 그 소년을 비추고 있을 영사체를 정면에 둔 채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다만 그 한달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하면, 지독하게 무심해진 표정과, 절로 냉기가 서릴만큼의 지독한 분노. 비서는 조심스레 자신의 신(神)을 향해 다가섰다. 얼마 전 정리를 끝낸 서류의 보고를 하기 위해 가져온 서류철을 신(神)이 앉아있는 소파 바로 옆 테이블에 올려놓고, 신(神)이 한치의 흔들림조차 없이 시선을 고정시킨 영사체를 바라보았다.
「우리 오빠가, 우리 오빠가 죽었다구요!!!」
울부짓는 소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안쓰러울만큼 말라있었다. 틀림없이 소년을 비추고 있어야 할 영사체가 뜬금없는것을 비추고 있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하던 비서는 곧 소녀의 품에 안긴 영정사진이 신(神)이 그토록 애정하던 소년의 것이라는것을 알고 놀라움에 눈을 부릅뜰 수 밖에 없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는 비서에게는 여전히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신(神)은 테이블에 놓인 막대사탕을 들어올렸다. 언젠가 소년이 먹는모습이 너무 맛있어 보인다며 인간계에 드나드는 비서에게 사오라 시킨 뒤 정작 까맣게 잊고있던 그것이었다.
「더러운 군인새끼들한테 몹쓸짓 당하고, 우리 오빠가 죽었다니까요!!!」
소녀는 곧 쓰러질 듯 울부짓었으나, 그 누구도 소녀의 외침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한번, 잠깐의 눈길을 주고 무심히 지나쳐갈 뿐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 비서또한 한반도를 애정하고, 사랑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던 한반도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심지어 장사에 방해가 된다며 울고있는 소녀를 서슴없이 끌어내고 발로 차는 가게 주인도 있었다. 바로 옆에있는 가게에서 어느새 신고를 한것인지 출동한 파출소의 순경들에게 끌려가면서도 소녀는 울었다. 돈. 빌어먹을 돈이없어 평생을 곧고 바르게만 살아온 오라비의 장례식조차 치뤄줄 수 없었고, 억울하게 당하고 쓸쓸하게 죽어간 오라비의 심경조차 전해줄 수 없었다. 그것이 너무 서럽고 괴로워서. 소녀는 울었다.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한들. 화내주는 사람하나, 슬퍼해주는 사람 하나 없다한들, 소녀는 울었다. 아프게 살다 아프게 죽어간 하나뿐인 혈육을 위해, 소녀는 유약한 몸을 한 채 홀로 울고, 울고. 울다지쳐 기절할때까지, 소녀는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 “…….”
영사체를 끄고 방을 나설때까지 신(神)은 말이 없었다. 그토록 체면차릴 줄 모르고 뭐가 그리 좋은지 항상 웃으며 장난치기를 일삼던 신(神) 이 이토록 침묵한것도, 이토록 분노한것도 처음이었기에. 비서는 어찌할 줄 모르면서도 그저 움직이는 신(神)의 뒤를 따랐다. 어느새 막대사탕을 입에 문 신(神)의 입안에서 딱딱한 사탕알갱이가 굴러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걷고 걸어 신(神)은 경계에 도착했다. 굳이 영사체를 보지 않아도 이곳에서는 지구 자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신(神)이 자신을 데리고 ─사실은 자신이 멋대로 따라온 것 뿐이었지만.─ 이곳에 온 의중을 파악할 수 없어 비서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는 언제나와같이 아름다운모습 그대로였는데, 그곳에 사는 인간들은 이미 너무도 많이 변해있었다.
“…올라간 보증금을 낼 수 없어 쫓겨난 옆집의 김씨아저씨가 죽었는데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어.” “…….” “집값이 떨어질테니 그냥 입을 다물기로, 반상회에서는 그렇게 결정했지.”
따닥, 치아와 사탕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같은반 옆자리에 앉은 예쁘장한 여자아이의 오빠가 군대에서 억울하게 죽어가도 아무도 몰랐어.” “…….” “얘 오빠가 자살했구나. 그러고 보니 오늘 얘가 안왔었네, 어쩐지 옆이 허전하더라. 친구들과 낄낄대며 입을 놀렸을 뿐이지.”
까드득. 사탕이 부서지는 소리가, 그 무엇보다 가깝게 와닿았다.
“있잖아.” “…….” “…지구말이야, 꼭 있어야되냐.”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의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한 질문치고는 그 내용이 비교적 파격적인것이라.
“……굳이,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비서는 저도모르게 그리 대답하고 말았다. 스스로가 한 대답에 스스로가 놀라기는 했지만 틀린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마 지금 지구의 모습을 본다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랑스러운 소년의 모습을 본다면. 그 소녀를, 그 소녀를 외면하기 전 관심조차 가지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면. 옆집살다 쫓겨난 김씨가 어찌 죽어갔는지보다 집값이 떨어지는것이 더 걱정스러운 형편없는 아낙네들을 본다면, 그 누구라도 이렇게 대답했을것이다. 비서의 대답에 신(神)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입속에서 두동강난 사탕의 반쪽은 위태롭게 막대에 매달린 채였다. 지구에서 등을 돌린 신(神)은 그 두동강난 사탕을 막대와 함께 미련없이 등 뒤로 던져버리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어 놨더니…”
……지구가, 멸망해 버렸네.
***
UMC-사람들을 착하게 만들어 놨더니 中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어 놨더니,
옆집 베트남출신 새댁이 한국남편에게
강제로 퇴거당한 1층 수퍼의 김씨가
그 무엇도 우리의 행복을 막을수 없을 것 같았는데
Fin_ |
으미 우울 터지는거;;
비엘이라고 써놓긴 했는데 뭔가 비엘아닌거같다..
ㅋㅋㅋㅋㅋㅋ아오 주인공이랑 주인수랑 한번도 안만나고 끝나는 소설은
내생에도 처음ㅋㅋㅋ으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번외 쓰다만거 있는데.
어차피 안쓸거니까 내용 좀 말하자면
주인공이 지구 멸망시키고 뒤늦게 헐 걔 영혼 불러오면 되지않음?
이러니까 비서가 ㅇㅇ근데 님이 지구 멸ㅋ망ㅋ 시켯자나여 승천 안했으면 그거 못찾음ㅋ
이래서 주인공 좌절하다 명계 천계 마계 뺑뺑이돌다가 어디 구석에 쪼그라져있는
주인수 찾고 완전 해피해피하게 삼.
참고로 멸망시키기 전에 주인수 여동생은 미리 빼돌렸음. 그래서 주인공이
여동생을 미끼로 주인수 꼬여내는데 성공해서 함께 삶을 살아가는거임ㅋ
하 여러분도 착하게 사세염 이훈이가 언제 빡쳐서 지구를 멸망시킬지 몰라여;;
내가썻지만 참 억지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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