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03 (모든 것이 이상한 오늘)
그날 김종인과 여차저차 화해를 하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후 수업을 듣고 야자까지 했다. 그냥 발목이 좀 아프고 오른쪽 손가락 두어 개가 아플 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을 하긴 무척이나 힘들었다. 필기도 하기 힘들어 짝꿍에게 대신 부탁해야 했고, 그럴 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째림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짝꿍에겐 딱 하루만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앞자리 여학생에게 양해를 구해 무사히 필기를 채워놓을 수 있었다.
김종인은 꽤나 듬직했다. 손이 불편한 나를 위해 매일같이 급식을 대신 받아주었고, 가끔 운동화 끈이 풀릴 때엔 운동화 끈도 매주었다. 그럴 때마다 혼자 중얼거리듯 잔소리를 해대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해줄 건 다 해줬다. 발목이 아파 걸음이 느린 내게 맞춰서 걸어주기도 했고,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거닐며 괜히 우리반을 스윽 훑고 가기도 했다. 그런 녀석의 덕분인진 모르겠지만, 발목과 손가락의 통증은 거의 없어져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상태는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이제 체육 시간에 스탠드에 앉아 아이들이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만 있지 않아도 됐다. 그건 좀 아쉬웠지만, 발목 때문에 고생하던 지난 며칠에 비하면 차라리 나았다. 그러나 허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망할 허들. 과연 언제쯤 허들 마지막 수업이 다가오려나.
붕대를 풀어 한층 자유로워진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이젠 혼자서 운동화 끈도 묶을 수 있을 테고, 밥도 편히 먹을 수 있을 테지. 게다가 오늘은 일요일 아침. 내일이 오려면 아직 14시간이나 남았다. 고3에게 주말이란 그저 집이나 독서실에 처박혀 공부만 하는 따분한 것이라고 누군가는 생각하겠지만, 뭐… 난 다음주 주말부터 그럴 예정이다. 오늘은 그냥 실컷 놀래. 하루종일 침대를 뒹굴거리기만 해도 재밌을 테지.
"○○아."
"응?"
"지금 바빠? 안 바쁘면, 엄마 심부름 좀 해."
침대에 편히 누워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내게 엄마가 물었다. 그저 빼꼼 열린 방문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무슨 심부름? 엄마는 자신의 손에 들린 꽤나 묵직해 보이는 봉투를 들어보였고, 곧이어 입술을 뗐다.
"네 고모가 귤 두 박스를 보내줬지 뭐니. 근데 우리 가족이 저걸 다 먹진 못할 것 같고, 종인이네 좀 갖다 줘."
"… 아, 귀찮게. 내일 야자 끝ㄴ…"
참, 내일은 야자를 안 하는 날이다. 내일부턴 과외를 하게 될 것이고, 당연하듯 야자는 불참.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야자를 할 수 없게 될 텐데, 그럼 서기가 해야 할 야자 출석 체크는 어떻게 하나요. 라고 담임 선생님께 물어봤던 적이 있다. 그런 날엔 임시 반장에게 맡기던가, 다른 애들한테 부탁하렴. 선생님의 답변은 매우 간단명료했다.
과외를 하게 된다면 장소는 우리집으로 해도 되냐는 물음에 김종인은 너그러웠다. 그냥 관심이 없는 건지,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는 건지. 녀석은 그저 시큰둥하기만 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너 마음대로 해라.
귤이 담긴 봉투를 침대 아래에 내려놓은 엄마가 슬쩍 방문을 닫고 나갔다. 방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바람도 좀 쐬면 얼마나 좋니. 어차피 집에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면서. 라는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와 귤봉투를 집어들었다. 주황 빛깔을 뽐내듯 오목조목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그란 귤들을 보자 괜히 군침이 돌았다. 천천히 기지개를 켜곤 옷장을 열어 갈아입을 옷가지를 꺼냈다. 설마 아직까지 자고 있진 않겠지.
김종인은 잠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참 신기한 게, 녀석은 지각이라는 걸 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있어 봤자 한두 번?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도 안될 만큼 녀석은 지각하는 횟수가 굉장히 적었다. 늦잠을 자도 지각은 안 해. 게임 하느라 밤을 꼴딱 새서 피곤하다 할지라도 지각은 안 해. 참 신기할 노릇이지.
*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곤 현관문을 닫았다. 귤이 도대체 몇 개나 담긴 거야…. 은근 무겁네.
밖으로 나서자마자 차디찬 봄바람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듯했다. 봉투를 손목에 걸고 주머니에 손을 넣기엔 손목이 너무 아플 듯해 어쩔 수 없이 한쪽 손만 주머니 속에 꼬옥 집어넣었다. 이게 정녕 완연한 봄 날씨가 맞는 건가…. 언제쯤 따뜻한 햇살이 비추고 벚꽃잎이 흩날리는 그런 샤랄라한 봄이 다가올지, 참으로 모를 것이었다.
- 김종인
- 자?
- 아저씨
- 김종인 아저씨
- 주무세요 아직?
- 종이야
- 자냐
- 이런 망할...
아무런 연락도 없이 다짜고짜 찾아가는 건 분명 실례일 것이었으므로 녀석에게 간단한 연락을 하고자 카톡을 보냈다. 그러나 녀석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는 건지, 답장이 없었다. 그래, 네가 지각을 좀처럼 하지 않는 이유를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어. 평일엔 수면을 많이 취하지 못하니 주말에 최대한 잠을 많이 자는 거지. 되게 영리하네….
우리집과 그리 먼 거리에 위치해있지 않는 녀석의 집은 얼마 가지 않아 곧 모습을 드러냈다. 귤봉투 손잡이를 너무 세게 쥐었던 건지, 손바닥엔 손잡이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빨개진 손을 다른쪽 손으로 몇 번 주무르곤 손가락을 길게 뻗어 초인종을 꾸욱 눌렀다. 경쾌한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얼마 안 있어 현관문이 철컥- 하고 열렸다.
"안녕하…"
인사를 하려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바로 앞에 보이는 건 김종인의 어머니가 아닌, 웃통을 훌러덩 벗은 김종인이었다. 방금 씻고 나온 것인지 녀석의 목엔 하얀 수건이 걸쳐져 있었고, 몇 가닥으로 뭉친 앞머리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도 애매했다. 원래 이러지 않았는데…. 녀석이 상의를 탈의하고 있든, 하의를 탈의하고 있든 그저 한심하다는 생각이 앞섰던 지난 날과는 확실히 남다른 감정이 들었다.
"뭔데, 아침부터."
"… 아, 엄마가 이것 좀 가져다 주라고 해서."
김종인에게 귤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녀석이 안의 내용물을 힐끔 들여다보더니 피식 웃음짓곤, 반쯤 열려있던 현관문을 더 활짝 열어젖혔다.
"들어와."
"어? 나 어차피 갈 건데."
"엄마랑 아빠 없어."
"왜?"
"여행 가셨다."
그래? 그럼 조금만 놀다 가지 뭐.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가 운동화를 벗었다. 녀석의 집은 어렸을 적 많이 들락날락 했었다. 게임기나 보드게임 외엔 별다른 놀 거리가 없던 녀석의 집에 온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역시나 녀석의 집은 어린 시절 자주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조심스레 인사를 하곤 녀석의 꽁무니를 졸졸 쫓았다. 식탁에 귤봉투를 내려놓은 김종인이 느릿느릿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런 녀석을 따라 나도 방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고맙다. 안그래도 엄마가 귤 사야겠다 하던데."
"아, 진짜? 타이밍 기막히네. 그치."
김종인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곤 제 목에 걸쳐져있던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탈탈 털기 시작했다. 그러자 차가운 물방울들이 내쪽으로 살짝 튀어왔고, 녀석을 피해 침대에 살포시 걸터 앉았다. 옷이나 좀 입고 뭘 하든가 하지….
김종인은 몸에 열이 많다 했다. 그래서 잘 땐 항상 옷을 훌러덩 벗고 자는 거라며, 그러면서도 여름과 겨울의 파자마 패션이 모두 다르다며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그래봤자 바지를 입고, 안 입고의 차이겠지만….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검정색 반팔 셔츠를 녀석에게 건넸다. 그러자 녀석은 아무 말 없이 셔츠를 받아들곤 팔을 끼워넣으며 입기 시작한다. 어쩜 저 모습은 한결 같았다.
"나 머리 좀 말리고 올게."
"엉, 얼른 말리고 와라."
"왜?"
"응?"
"얼른 말리고 오라며. 왜 얼른 와야 하는데?"
"그야, 나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
김종인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굳게 닫혀있던 방문을 열어 천천히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난 네 방 구경이나 해야겠다."
"어차피 볼 것도 없을 텐데. 예전에 많이 봤잖아."
"예전이랑 지금이랑 같냐."
그럼, 저기 맨 밑 서랍은 열어 보지 마. 손가락으로 맨 마지막 서랍을 가리키며 김종인이 말했다.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얄밉게 웃어보이며 물었다.
"왜? 야한 사진집이라도 숨겨놨나 보지?"
"아니. 내가 그런 걸 왜 숨겨놔. 그런 건 아예 대놓고 책꽂이에 꽂아두거든요."
"…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어쨌든 열지마."
"왜? 뭐 들어있는데? 열어 보지 말라니까 확 열어 보고 싶네."
"아, 네 마음대로 해. 열어 보든지 말든지."
"진짜? 진심이야?"
"어. 김종인 속옷 서랍인데, 구경하고 싶음 해라. 어차피 봐도 상관 없으니까."
"… 미친놈."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자 녀석이 피식 웃으며 거실로 발을 내딛었다. 또 당했다. 난 왜 매번 녀석에게 당하기만 할 뿐, 내가 선방을 날리지는 못하는 것일까. 분하다, 분해. 진짜 분해. 열받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녀석이 방에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에서 헤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한 번 방문이 닫혔는지 확인하곤 천천히 녀석의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속옷 같은 건 애초에 구경할 생각도 없었으며 보고 싶지도 않았으니, 녀석의 부탁대로 마지막 서랍은 절대 열어 보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며 가장 위쪽 서랍을 열었다.
"도대체 중국집 쿠폰 스티커를 왜 여기에다 넣어두는 거야…."
서랍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빨갛고 동그란 모양의 중국집 쿠폰 스티커였다. 그리고 가운데에 떡하니 놓여있는 사각으로 된 커다란 상자. 이건 너무 사생활 침해인가…. 이건 그냥 보지 말까? 생각하면서도 손은 뭐에 홀린 듯이 상자를 꺼내들고 있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님 몰래 나쁜 짓을 할 때의 심정이 된 것만 같았다. 자꾸만 뒤를 돌아 방문이 잘 닫혀있는지를 확인하게 됐다. 다행히 방문은 달 닫혀있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엔 여러 장의 사진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고, 한쪽 칸엔 각종 휴대폰 고리며 열쇠 고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
귀여운 강아지 모양 열쇠고리와 훌라춤을 추고 있는 짱구 모양의 휴대폰 고리. 노란 털이 복슬복슬하게 나있는 병아리 모양 열쇠 고리와 무당벌레가 날개를 펼친 모양의 휴대폰 고리…. 모두 녀석의 생일 선물로 내가 줬던 것이었다. 무장벌레 휴대폰 고리는 아직도 빤딱빤딱 윤기가 났다. 아무리 어린 시절이었어도 그렇지… 난 왜 항상 열쇠 고리나 휴대폰 고리를 선물로 줬던 걸까. 선물 고르는 센스 하고는. 그걸 또 김종인은 상자에 넣어 간직하고 있었나…. 내가 이런 선물을 언제 줬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좀 감동이긴 했다. 안 그런 척 하면서 내가 줬던 물건들을, 녀석은 전부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상자 속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사진들에 시선을 옮겼다. 조그마한 사진들은 분명 증명사진일 테지. 역시 소녀감성 김종인. 친구들 증명사진도 이렇게 반듯하게 정리해놓고…. 이정도의 소녀감성이라면, 어딘가 미미인형이나 주주인형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것이었다. 천천히 증명사진들을 하나씩 넘기며 구경했다. 그 중엔 내 증명사진도 몇 개 있었고, 나머지는 다 저를 포함한 제 친구들 것이었다. 오세훈 이때는 머리가 좀 길었네. 풋풋하다.
아예 대놓고 상자를 침대에 내려놓고 편히 앉았다. 이래도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냥 이럴래. 조심스레 사진 뭉텅이를 꺼냈다. 그리곤 천천히 한 장 한 장 사진을 넘기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김종인 어렸을 땐 되게 귀여웠는데….
"… 헐."
헐, 이게 뭐야. 이 사진… 뭐야? 피식 웃으며 아무런 문제 없이 사진을 넘기던 내 손이 갑작스레 멈추었다. 살짝 올라가있는 입꼬리엔 조금씩 경련이 오는 것도 같았다. 그니까 지금 이 사진… 이거 도대체 뭐지? 도대체 무슨 상황이었길래 내가 녀석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는 거지?
사진 속 소녀는 분명 내가 아닐 거라며 애써 부정하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달린 연노랑 블라우스와 검정색 레이스 치마… 내가 좋아라 했다며 엄마가 자주 입혀주곤 했다는 옷이었다. 사진 구석에 적힌 날짜를 보았다. 7살 때 찍힌 사진이었다. 도대체 이 사진을 누가 찍은 거람. 분명 우리엄마, 아니면 김종인의 어머니겠지. 녀석이 이런 사진을 간직하고 있을 줄은… 아니, 애초에 이런 사진이 찍혔을 둘은 꿈에도 몰랐다. 괜히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차곡차곡 정리해 다시 상자 속에 집어넣었다.
… 아무 일도 없었다 생각하고 싶다. 얼른 그 사진이 머릿속에서 잊혀졌으면 좋겠다.
잠시라도 딴 생각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너무 우리집 마냥 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상관 없었다. 김종인도 이런 것에 관해선 별로 터치하지 않을 뿐더러, 녀석도 우리집에 오면 똑같이 행동하니까. 아무렴 괜찮았다.
곧 모니터 화면이 밝아지며 녀석이 설정해놓은 바탕화면이 떴다. 바탕화면 바꾸는 것도 귀찮았던 건지, 기본 바탕화면 중 하나인 광활한 초원 사진이었다. 역시 김종인 다웠다.
막상 인터넷 창을 열어놓으니 할 게 없었다. 몇 초 정도 멍을 때리다 초록색 검색창에 마우스 커서를 가져다 놓았다. 그리곤 다시 한 번 더 멍을 때리며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아'만 입력하고 띄어쓰기를 한 번 했을 뿐인데, 바로 아래엔 '아 뭐 치려고 했지' 라는 검색어가 떠있었다.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역시 사람들은 다 똑같다니까.
"뭐하지…."
점점 지루해졌다. 하품을 작게 하며 턱을 괸 채 마우스 휠을 굴렸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에 이끌려 마우스 커서를 그 게시글로 옮겼다. 첫 키스의 환상이라는 토픽을 다룬 글이었다. 첫 키스,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단어였다. 내 얘기도 아닌 생판 남의 첫 키스 일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리설렘을 느끼곤 했었지…. '처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말은 모두 설레는 것만 같다. 첫 연애, 첫 애인, 첫 뽀뽀, 첫 키스, 첫…
"특히 봄이 오면 더 사랑을 하고 싶어지는데요."
"……."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첫 키스."
"……."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곤 하죠."
"……."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
"혹시 있으시다면, 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에서 달달한 키스 한 번 나눠 보시는 게 어떨까 싶네요."
순간, 인터넷이 너무나도 발달해 글까지 대신 읽어주는 줄 알았다. 다만 소름 끼치는 점이 있다면, 그게 김종인 목소리였다는 것이다. 마음 속 저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두려움과 창피함에, 최대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다음 문장을 읽으려던 김종인이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나와 눈을 마주쳤다.
"키스,"
"……."
"하고 싶냐."
왜인진 모르겠지만, 그 순간 녀석의 눈이 나른하게 풀려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내 착각일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저런 말에 내가 괜히 이상한 착각을 하는 것임에 틀림 없었다. 녀석과 마주하고 있는 얼굴 사이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던 탓에,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도 같았다. 그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더듬거리듯 해명 아닌 해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야! 이거 내가 검색해서 들어온 게 아니고… 여기, 여기에 뜬 거야! 그냥 궁금해서 들어가 본 거고…"
"……."
"… 아, 화장실이 가고 싶다…."
어색하게 웃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겨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화장실 안으로 쏘옥 들어가 문을 닫아 잠갔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영락없는 홍당무였다. 아, 나 왜이래. 왜이러지…. 잔뜩 빨개진 얼굴을 차가운 손으로 식히다 세수를 했다. 괜찮다. 어차피 지금 느끼는 이 감정도, 내일이 되면 싹 사그라들 것임이 분명하니까.
작게 심호흡을 하곤 천천히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거실로 발을 내딛었다.
"뭐해?"
"점심 먹으려고."
"라면 끓여?"
어. 밥 하기 귀찮다. 녀석이 대답했다. 부엌 찬장에서 라면 두 개를 꺼내던 녀석이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곤 제법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건네오기 시작했다. 분명 웃고는 있는데, 목소리는 심각하게 진지했다.
"야, 괜찮아. 언젠간 사랑하는 사람이랑 첫 키스 하게 되겠지. 너무 조급해 할 필요 없어."
"… 아, 진짜.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아까 순간적으로 이상한 착각을 해버린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봐, 쟤는 저런 애라니까. 기회를 져버리지 않고 바로 놀리려 달려드는 것 좀 봐. 짜증나 죽겠다.
"아니면 말고."
"… 열받아, 진짜."
씩씩거리며 식탁 의자를 빼 털썩 앉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녀석에게 설렜던 감정이 도대체 왜 들었던 걸까. 정말이지, 이해가 안됐다. 그냥 내가 바보였던 거지 뭐. 이제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만 찾아 봐야겠다. 대리설렘은 이제 그만 해야겠어. 괜히 나 혼자 착각하고, 나 혼자 설레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현실로 돌아올 때의 그 감정은 얼마나 침울하고 허무한지. 심지어 지금 눈 앞에 있는 김종인은 그저 짜증나기만 하다. 그래, 이게 현실이지.
"빨리 빨리 안 끓이냐."
"물 방금 올려놨거든요. 왜이리 재촉하는데."
투덜대듯 답하던 녀석이 내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휴대폰 게임을 실행시키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게임의 귀여운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모두의 마블 모두 해~ 모두의 마블 되게 좋아하네.
"너 언제 갈 거냐."
"나? 음…, 글쎄. 라면만 먹고 갈까?"
"아! 왜 무인도냐고."
"… 뭐라냐."
"마음대로 해."
"뭐?"
"라면만 먹고 가든, 저녁 밥도 먹고 가든 네 마음대로 하라고."
"음…, 일단 생각 좀 해보고."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자리에서 일어나, 끓는 물에 라면 스프와 면을 퐁당 넣었다. 휴대폰 화면 뚫어지겠다. 기어코 멀티태스킹을 하겠다고 저런다니까. 저 모습을 김종인 어머니가 보셔야 하는데…. 쯧쯧.
*
라면을 먹긴 했지만, 세 젓가락? 네 젓가락? 정도밖에 먹지 않은 것 같다. 아침 밥을 굶었다 말하던 녀석은 거의 한 봉지 반을 혼자 먹어치웠고, 그다지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았던 난 얼마 손도 대지 않은 채 녀석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더랬다. 꽤나 빠른 시간 안에 라면을 해치우고도 배가 차지 않은 건지, 녀석은 내가 가져온 귤봉투에서 귤 하나를 꺼내들고 쇼파 쪽으로 걸음을 옮겨왔다. 그리곤 쇼파가 아닌 바닥에 털썩 앉더니 리모콘으로 TV 전원을 켰다. 귤을 요물조물 주무르다 껍질을 까낸 녀석이 반으로 가르더니 뒤로 손을 뻗어 쇼파에 앉아있는 내게 반 쪽을 건넸다. 고맙다는 말을 하며 녀석이 건넨 귤을 집어들었고, 한 조각을 떼 입 속에 쏘옥 집어넣었다. 달달하면서도 상큼한 맛이 좋았다. 이래서 귤이 좋다니까.
"어, 영화 한다."
"… 저거 19금 아니야?"
"그래? 아…, 그러네."
"……."
"아싸.
낮게 나이스를 외치는 녀석을 뒤에서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역시 남자들이란…. 뭐, 나도 싫지만은 않다. 그렇다 해서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고….
김종인은 귤을 오물오물 씹으며 테이블 위로 늘어지듯 엎드렸다. 그리곤 고개만 빼꼼 들어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개봉한 지 꽤나 된, 유명한 성인 영화였다. 이 영화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던지라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게 될 만큼 야한 장면이나 잔인한 장면이 나온다던가, 심각한 멘붕 상태를 불러일으킬 만큼 상스러운 욕설이 나온다던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아, 슬슬 잠 온다."
김종인이 작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잔뜩 가라앉은 채 지루해진 목소리가 노곤하게 들려왔다. 인간은 역시 배가 부르면 잠이 오는 동물이지.
"김종인."
"……."
"김종인?"
"……."
"종이야, 자냐?"
"……."
"김종인."
"……."
"김종인 바보."
"……."
"김종인은 우주 최강으로 못생긴 똥멍청이."
"안 잔다."
안 자면서 내 말은 왜 자꾸 씹는 건데? 어차피 영양가 없는 말만 해댈 거 아니까. 녀석의 대답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녀석이 기지개를 켜듯 엎드려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곤 고개를 살짝 돌려 손으로 제 머리를 받친 채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뭘 봐."
"네가 먼저 불렀잖아."
"불렀는데 네가 무시했잖아."
"알았어, 미안. 왜 불렀는데."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
"넌 여자친구 안 사겨?"
"갑자기 그건 왜."
"그냥. 인기도 많은데 왜 여친을 안 사귈까… 궁금해서."
"별게 다 궁금하다, 넌."
"갑자기 궁금해질 수도 있잖아."
"솔직히 고3한테 연애는 사치 아니냐."
"… 그런가."
"때 되면 하겠지. 음, 근데 네가 웬 일로 내 연애 문제에 관심을 갖냐."
"문득 궁금해졌어."
"… 이상하네. 너 봄 타냐. 아까도 인터넷에 막 이상한 거나 검색하고 있더니, 요즘 감성 터지나 보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또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장난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녀석을 바라보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녀석이 피식 웃으며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연애하고 싶냐."
"아,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내 친구라도 소개시켜줘?"
"오세훈밖에 없잖아."
"오세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넌 헛소리 하는 게 취미야?"
어째 대화를 이어나가면 이어나갈수록 짜증이 머리 끝까지 치솟는 기분이다. 김종인은 해를 거듭할수록 내 화를 돋우는 데엔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짜증나. 진심으로 때려주고 싶다. 그랬다간 배로 당할 게 뻔하지만.
아예 상종하지를 말자, 아예 먼저 말을 걸지를 말자, 라고 생각하며 오로지 영화에만 집중을 했다. 영화는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중간중간 선정적인 장면이 나오긴 했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저게 19금? 내가 아무렇지 않은 건가, 영화 수위가 약한 건가. 김종인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걸 보니, 아마 영화 수위가 생각보다 약하다는 거겠지.
아니, 아니었다.
옆에 놓여있던 쿠션을 들어 무릎 위로 올려두려던 찰나, TV에선 꽤나 야릇한 소리가 들려왔다. 느낌이 좀 이상했다. 드디어 성인 영화의 위력을 보여줄 타이밍이라도 된 양, 앞 장면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김종인이 내게 등을 보인 채 바닥에 앉아있다는 사실이 지금은 너무나도 고맙게 느껴졌다. 옆에 앉아있었다면 분명 또 놀려댈 게 당연했으니 말이다.
"… 우, 우리 내일부터 과외 시작이네. 아, 떨린다."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일부러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내뱉어진 한 문장이 순식간에 공중에서 흩어져 사라져버렸고,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영화에 얼마나 집중을 했으면 내 목소리를 못 듣는 건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천히 다가가 녀석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새근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녀석은 귤 껍질을 손에 쥔 채 잠에 빠져있었다. 졸리다더니 진짜 자네. 나 혼자 안절부절 못하며 뭘 했던 건지. … 쪽팔려.
한숨을 내쉬며 리모콘을 들어 TV 전원을 껐다. 형광등도 켜고 있지 않았던 탓에, 밝았던 TV 화면이 꺼져버리자 거실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TV가 꺼지고 김종인이 잠들었을 뿐인데 이렇게 어두워지고 조용해지다니. 정말이지 놀랍다. 이제 슬슬 집에 가볼까….
"……."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녀석의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연속으로 한두 번 울리는 진동이 시끄러워 황급히 녀석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으니 어째 배로 시끄러운 것 같다.
어차피 잠겨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확인 버튼을 눌러 보았다. 그러자 내 생각과는 달리 쉽사리 카카오톡 대화방이 화면 가득 떴다. 카카오톡에 비밀번호도 안 걸어 놨구나. 또 귀찮아서 안 걸어 놨겠지. 그놈의 귀차니즘. 카톡을 보내온 상대는 예상대로 오세훈이었다. 그래도 이건 김종인과 오세훈의 사생활인데 내가 이걸 몰래 읽어봐도 되는 걸까… 그러면서 읽고 있지만.
원래 오세훈과 약속이 있었던 건가? 근데 왜 얘는 읽씹만 하고 자고 있는 건데? 김종인 지금 뭐해? 오세훈 만나러 안 나가? 두시 반에 만나기로 했다며. 지금은 거의 네 시가 되어가는데? 왜 자고만 있는 거야? 안 일어나?
끝없이 생겨나는 궁금증이 머릿속을 점령해버릴 지경이었다. 당장 묻고 싶어도 녀석은 지금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으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종인은 쿨쿨 잠만 자고 있었다. 하여간 잠만보.
"… 귤 껍질은 왜이리 꼬옥 쥐고 자는 거야?"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양 귤 껍질을 꼬옥 잡은 채 잠에 빠져있는 녀석의 모습이 이젠 웃길 지경이었다. 이런 모습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찍어야해. 나중에 페북에 올릴 거야. 당황할 준비 해라, 귤종인아.
녀석이 깨지 않게 살며시 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최대한 조심스럽게 카메라 어플을 꾸욱 눌렀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러 가는 생쥐의 심정이 지금 내 심정과 동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조심스럽고 섬세한 터치감은 처음이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한 번 터치해 초점을 잡았다. 거실이 어둡다는 게 하자였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하나, 둘, 셋…!
찰칵-
"……."
"… 어어…."
"… 뭐하냐, 지금."
너무 긴장한 탓에 그만, 찍을 때 소리가 나지 않는 카메라 어플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렸다. 기본 카메라 어플로 사진을 찍어, 안그래도 조용했던 거실 안은 찰칵- 하는 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퍼졌다. 그로 인해 잠자던 사자가 번뜩 눈을 뜰 수밖에 없었고, 녀석의 바로 앞에 휴대폰을 들이밀고 있던 내 손이 거짓말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들키긴 했지만 그래도 사진은 완벽히 찍었다. 그나마 다행이야. 다행… 인가?
"뭐하는 거냐고."
"아, 사진 좀 찍었다. 왜."
"죽을래? 빨리 지워."
"왜? 나름 귀엽게 잘 나왔어."
"지우라고."
"귀엽게 나왔다니까?"
"얼른 지워. 안 지워? 내놔."
녀석이 잔뜩 정색한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방금 찍은 따끈따끈한 사진은 지키고 싶어 재빨리 휴대폰 홀드를 닫곤 최대한 팔을 멀리 뻗었다. 그러자 녀석이 나보다 긴 팔을 뻗어 휴대폰을 빼앗으려 다가왔고, 그런 녀석을 피하고자 몸을 뒤로 뺐다. 그러다 몸이 균형을 잃은 건지 의도치 않게 뒤로 넘어가버리게 되었고, 그저 내 휴대폰을 향해 몸을 뻗던 녀석 또한 내 위로 엎어져버리고 말았다. 바닥엔 어떠한 것도 깔려있지 않은 맨 바닥이었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면 꽤나 아프겠구나, 생각하며 뒤로 넘어가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뒷통수에선 어떠한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부드러우면서도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내 위로 엎어지는 와중에도 혹여나 내 머리가 바닥에 부딪힐세라 황급히 제 손으로 내 뒷통수를 감싸 막아준 김종인의 손이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코앞에 와있는 녀석의 얼굴에 흠칫 놀라 재빨리 시선을 옆으로 옮겼고, 녀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손에 쥐어진 휴대폰을 쏘옥 빼앗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니 뭔가 뻘쭘해 쭈뼛대듯 몸을 일으켜 앉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마냥… 멘탈이 피로했다.
"비밀번호."
"… 내 생일 거꾸로."
역시 자비 따위 없는 김종인. 제법 비장한 모습으로 사진을 딱딱 지워낸다. 망할….
"… 아, 맞다. 너 오세훈한테 카톡 왔던데."
"아, 그래?"
"… 일단 사과부터 할게. 몰래 볼 생각은 없었는데, 봐버렸어."
"봐도 상관 없는데."
"근데 너 걔랑 약속 있었어? 왜 약속은 안 나가고 잠만 잤어?"
"잠만 자지 않았어. 자봤자 20분? 20분밖에 안 잤는데 무슨 내가 잠만 자."
"아, 어쨌든. 왜 오세훈 만나러 안 가?"
"내 마음이지."
그러시군요. 어차피 더 물어 봤자 저 대답만을 고수할 녀석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질문은 이만 멈추기로 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왔던 겉옷을 챙겨 입었다. 원래 저녁까지 먹고 갈 생각이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가게?"
"응, 가야지."
"그럼, 나도 어차피 나갈 건데 같이 가자."
"넌 어디 가는데?"
"오세훈 만나러. 걔 아직 PC방에 있을 걸."
"… 근데 너네 되게… 자주 만난다. 둘이 사겨?"
"끔찍한 소리 하지마."
장난 한 번 더 쳤다간 정말로 때릴 기세였다. 하여간 김종인은 화를 낼 땐 너무나도 무서웠다. 지금껏 그리 크게 화를 냈던 적은 없지만, 사실 아까도 무서웠다. 사진 하나 몰래 찍은 게 그렇게 잘못한 일인가…. 미안하지만 내 드라이브엔 몰래 찍은 네 사진이 많이 저장돼 있단다. 방심은 금물이야.
*
"아, 추워."
김종인이 제 겉옷을 여미며 말했다. 오세훈이 기다리고 있을 PC방은 우리집 방향으로 쭈욱 직진하면 나온다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혼자 가긴 심심했으니 말이다. 근처 휴대폰 가게에선 철 지난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노랜 아마…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휴대폰 벨소리로 했던 노래 같은데….
스냅백을 고쳐쓴 녀석이 주머니 속에서 귤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귤 되게 좋아하네. 김종인은 머지않아 귤 홍보대사가 될 것만 같았다.
"오세훈이랑 PC방에서 무슨 게임 하냐? 롤?"
"몰라서 묻냐."
"아, 테일즈 런너?"
"그건 중딩 때 하던 거고."
푸스스 웃으며 녀석이 건네준 귤의 껍질을 깠다. 그리곤 한 조각을 떼어내 입 안에 쏘옥 집어넣었다. 그러자 녀석이 잔뜩 짜증이 섞인 어투로 내게 말한다.
"왜 먹어."
"네가 줬잖아."
"너 먹으라고 준 게 아니라 껍질 까달라고 준 거였어."
"뭐? 그건 무슨 심보냐…. 그리고 네가 껍질 까달라는 말 안 했잖아."
"타이밍을 놓쳤어."
뭔 말도 안되는 변명이냐며 따지려 했지만 난 마음이 넓으니 군말 없이 그러려니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귤의 반 쪽을 떼어내 녀석의 입에 쑤셔넣듯 물려주었다. 그러자 그새 또 좋다고 배싯 웃음을 짓는다. 하여간 단순한 놈이다.
녀석과 티격태격대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되게 빨리 도착한 듯 싶었다. 녀석이 들어가라며 내 등을 슬쩍 토닥였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아까 깠던 귤의 껍질이 주머니 속에 그대로 들어있다는 사실이 생각나, 걸음을 떼려던 녀석을 황급히 붙잡았다.
"김종인, 손 좀 줘봐."
"왜."
"아, 얼른."
재촉하듯 말하는 내가 살짝 미심쩍은 건지 고개를 갸웃해 보이던 녀석이 조심스레 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씨익 웃으며 귤 껍질을 꺼내 녀석의 손에 쥐어주었다.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나를 바라보던 녀석에게 꽤나 얄밉게 인사를 하곤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오늘 수없이 나를 놀린 것에 대한, 복수라는 축에도 끼지 못할 아주 소심한 복수였다.
지금쯤 씩씩거리며 오세훈을 만나러 가겠지. 아, 신난다. 내 장난에 속아넘어가 씩씩거리는 김종인이라니. 신난다, 신나. 집으로 들어서기 전에 슬쩍 숨어 멀지 않은 곳에서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주변을 살피며 쓰레기통을 찾는 듯 보였다. 그러다 쓰레기통을 발견하지 못한 건지, 하는 수 없이 제 주머니 속에 귤 껍질을 넣는 모습에 그만 웃음이 터질 뻔했다. 왜이리 웃기냐. 이런 맛에 장난을 치는구나.
"어, 나 이제 간다. 전화 하자마자 욕 하는 건 뭔데. 아, 간다고."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오세훈인 듯 보였다. 약속 시간을 엄청나게 어겼으니 오세훈의 날이 선 듯한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인은 도리어 제가 틱틱대듯 말하는 것이었다. 꽤나 흥미진진한 대화가 될 것만 같아 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김종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집 방향으로 쭈욱 직진하기만 하면 된다던 그 방향이 아니었다. 걸어온 길을 다시금 되돌아가기 시작하는 녀석이 그저 의아했다. 왜 다시 돌아가는 거지. 분명 PC방은 우리집 가는 방향이라며. 왜 반대편으로 가는 거지? 왜?
오늘은 하여튼 이상한 날이었다. 나도 이상하고, 김종인도 이상했다. 아니, 김종인은 평소와 같았다. 말투도 평소와 같았고, 행동도 평소와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녀석을 대하는 내 행동이나 감정도 조금은 달랐다. 왜 이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키스 하고 싶냐 물어보던 녀석의 표정, 내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지 않게 황급히 감싸 막아주던 녀석의 손, 오세훈과의 약속이 있었음에고 불구하고 계속 나와 같이 있어주던 김종인, 제가 가야 할 방향과는 아예 반대 방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집까지 같이 걸어와주던 김종인. 그냥 뭔가 어색하면서도 이상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장난과 진심. 왜? 뭐 때문에 내가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데?
김종인, 나 왜이래?
"아, 깜빡 잠 들었지. 뭔 일 있는 건 아니고. 어, 내가 네 돈까지 내주면 되잖아. 아, 알았다고."
그냥 모든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오늘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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