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05 (제 3자=방해꾼)
알람으로 설정해놓은 시끄러운 노래가 거의 막바지로 향할 때쯤 천천히 눈이 뜨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항상 싫었지만, 오늘은 왠지 더더욱 일어나기가 싫었다. 아마 어제 과외 숙제를 하느라 새벽 두 시에 잠을 청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으리라. 늦게 잤으니 다음날 일어나기가 힘들다. 이런 완벽한 인과관계라니. 정말 정말 놀랍군….
"… 뭐라는 거지."
헛된 생각을 집어치우곤 밍기적거리듯 침대에서 내려왔다. 문틈 사이로 고소한 냄새가 스멀스멀 풍겨오는 걸 보니, 아마 엄마가 아침 메뉴로 스크램블 에그를 준비해놓은 듯했다. 스크램블 에그… 그거 김종인도 좋아하는 반찬인데. 이따 만나면 자랑이라도 좀 해야겠다.
*
교복 넥타이를 도대체 어디에다 뒀던 건지, 방 안을 한참 동안 뒤지고 뒤진 끝에 간신히 찾았다. 하마터면 선도부에게 걸려 벌점을 받을 뻔했다. 정말 너무한 게, 우리 학교는 넥타이 하나만 안 해도 벌점을 부과했다. 그게 너무나도 짜증이 나서, 학교 규칙이 이렇게 빡세도 되나요? 넥타이를 안 한다 해서 공부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솔직히 넥타이 너무 불편해요. 근데 넥타이를 안 한다고 벌점을 1점씩이나 부과하는 건 정말 너무해요. 벌점 1점 지우려면 교내 봉사시간을 다섯 시간이나 채워야 하는데… 그건 좀 잔인한 것 같습니다. 제발 학교의 중심인 학생들을 위해 학교 규정을 조금이라도 개정해주셨음 합니다. … 라는 장문의 글을 적은 쪽지를 건의함에 넣어볼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성격 한 번 고약한 학생 주임 선생님이 기필코 너를 찾아내고야 말 거라며 겁을 주는 김종인 탓에 3분만에 마음을 접곤 했었다. 망할 넥타이….
어렵사리 찾은 넥타이를 손에 든 채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잘 다녀오라는 엄마의 말에 싱긋 웃어보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망할 꽃샘추위는 여전히 봄을 지키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대체 언제쯤 날이 따뜻해질런지….
"너 너무 느려."
"넥타이 좀 찾느라. 그리고 고작 3분밖에 안 늦었거든요?"
"3분을 추위 속에 떨면서 기다렸어."
"… 미안."
말로 이겨먹을 수 없는 김종인은 역시나 강적이었다. 재빨리 사과를 하곤 손에 들려있던 넥타이를 목에 맸다. 역시 불편하다.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종인은 제 겉옷 주머니 속에서 귤 하나를 꺼내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내가 가져다줬던 귤이었다. 역시 귤종인. 머지않아 귤 홍보대사가 될 것이라는 내 예상이 딱 적중한 것 같았다. 김종인의 머릿속은 마치 모두의마블, 귤, 성공적.
3월의 중순을 향해 달려가는 오늘은 13일이었다. 이제 곧 3월도 중반부로 접어들 거고, 어느새 4월이 올 것이다. 4월이라니…. 1차 지필평가가 있는 달이네. … 싫다.
내일은 화이트데이였다. 달력을 두어 번 훑기만 해도 내일이 화이트데이라는 건 누구나 알 터였음에도 불구하고, 편의점이나 작고 예쁜 가게들에선 마치 화이트데이를 잊은 사람들에게 내일이 화이트데이라는 것을 억지로 자각이라도 시켜주려는듯 보였다. 여러 종류의 사탕들과 초콜릿들을 가게 밖으로 내놓곤 가격표도 눈에 띄기 쉽게 큼지막한 글씨로 써 붙여놓았으니 말이다. 굳이 저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지. 내일이 화이트데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데 말이야. 나도 알고, 우리 부모님도 알고, 온갖 기념일에 무관심하기로 유명한 우리 막내외삼촌도 안다고….
애인 없는 여성들에게 화이트데이란 그저 빨리 지나갔음 하는 기념일이었다.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친구들끼리 사탕을 주고받곤 했지만,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나니 그런 것들은 모두 부질없게 되었다. 화이트데이도 화이트데이 같지가 않았다. 그저 보통 날과 다를 바 없는 3월 14일에, 어느 누군가는 제 애인에게서 사탕 한보따리를 받은 채 낑낑거리며 집으로 향하겠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아니었다. 고등학생이 되고부터 점점 잊혀져가는 기념일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3월 14일' 하면 '화이트데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런 점은 좀 짜증이 났다.
그런 것엔 아예 관심조차 없고 제가 먹을 사탕이 아니면 사지도 않을 것 같던 김종인은 은근 내 예상과 빗나가는 행동을 하곤 했다. 녀석은 매년 찾아오는 화이트데이 때마다 츄파춥스 사탕을 하나씩 사줬었다. 처음엔 한 개, 그 다음엔 두 개, 또 그 다음엔 세 개… 해가 바뀌고 나이를 한 살씩 먹는 것과 같이, 녀석은 사탕의 개수를 하나씩 늘려나갔다. 그러면서도 되게 섬세하게 각각 다른 맛으로 줬었다. 딸기, 딸기크림, 오렌지, 파인애플, 망고, 레몬… 그러니 이번 화이트데이 땐… 7개. 7개를 받을 차례였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나 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지만, 갑작스레 말을 걸어오는 김종인 탓에 그러한 생각을 금세 떨쳐낼 수 있었다.
"너 숙제 다 했냐."
"나? 응, 다 했지. 어제 그거 하느라 늦게 잤어."
"어차피 내일까지잖아. 늦게 자지 말고 오늘로 나눠서 하지."
"그냥 빨리 끝내놓고 싶어서. 사실 과외 다음날에 다 끝내놓으려 했는데 자꾸 미루고 미루다가…."
"난 하나도 안 했는데."
"… 그게 자랑이야? 너 얼른 해. 그거 양 은근 많더라."
"오늘 야자 시간에 할 거야. 하다 안 되면 네 거라도 베끼지 뭐."
"누가 보여준대? 내가 싫어. 완전 거절."
"치사."
치사… 라니. 설마 또 삐진 건가. 아니지, 어쩌면 삐지는 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음료수를 사오는 내기에서 제가 지기만 해도 입술을 불퉁 내민 채 잔뜩 삐져버리는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하여간 잘 삐지는 놈이다. 별명이 삐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녀석은 쉽게 삐지고 또 쉽게 풀리는 타입이었다. 단순하긴.
"박열찬은 뭔 첫 날부터 숙제를 내주고 난리야."
"… 박열찬이 아니라 박찬열."
"아, 박찬열."
"김종인 어떡해. 이름 석 자도 못 외우고…."
"그만큼 관심이 없어서 그래."
"진짜? 아, 근데 너 선생님한테 박찬열이 뭐야."
"박찬열을 박찬열이라 부르지, 그럼 뭐라 불러."
"선생님이잖아. 박찬열은 반말이고."
"앞에서만 안 하면 되잖아."
"그거 되게 나쁜 버릇인데."
"그럼 앞에서도 할게."
"그건 또 무슨 심보야?"
저도 웃겼는지 소리내 웃는 김종인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말이 안 통한다. 이럴 땐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리라.
*
1교시부터 지루한 영어 독해 시간이었다. 잠을 충분히 청하고 등교를 했어도 졸까 말깐데… 잠도 충분히 못 잔 상태에서 1교시 수업-그것도 조는 학생이 대략 60%인 영어 독해 수업-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고문과 흡사한 것이었다. 선생님껜 정말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졸긴 싫지만 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필 내 자리는 창가쪽 맨 뒷자리였다. 정말 졸기 좋은 명당이지. 선생님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그리고 역시 졸았다. 선생님이 지문을 해석하시는지, 지문이 선생님이 해석하는지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꾸벅꾸벅 졸았다. 몇 년 동안의 학교 생활을 겪어와 본 결과 신기하게도, 수업이 거의 끝나갈 즈음이 되면 졸음이 확 달아나있다. 그래서 쉬는시간엔 아무리 잠을 청하려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정말 모순적인 상황이지. 오히려 정신이 번뜩 깨어 있어야 할 수업시간엔 꾸벅꾸벅 졸고만 있고, 쉬는시간엔 눈이 말똥말똥 뜨여 있으니 말이야.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이 쳤다. 종이 울림과 동시에 잠이 홀딱 깼고, 졸음과 싸우며 억지로 끄적여낸 필기를 내려다 보았다.
"… 가관이구만."
동그라미가 쳐져 있어야 할 주어 부분엔 지저분하면서도 알아보기 힘들 법한 영어 단어가 써져 있었다. 흡사 지렁이를 닮은 듯한 구불구불한 글씨체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답 체크를 광활한 여백에다 자신있게 해둔 것 하며, 쓸모 없는 부분에다 형광펜으로 밑줄을 쭈욱 그어놓은 것 하며….
"내 필기 보여줄까?"
엉망진창인 필기를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내 앞에 갑작스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새 학기를 맞이한 이래로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 없던 여학생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가 찰랑거렸다. 얼굴도 꽤 예쁘장하게 생긴데다가 몸매도 여리여리했다. 전형적인 청순가련형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아이가 갑자기 왜….
"어? 아…, 나 필기 못한 거 어떻게 알았어?"
"너 졸고 있는 거 봤거든."
"아, 진짜? 내가 그렇게 티나게 졸았단 말이야?"
"아니, 티나게 졸진 않았어. 나도 시계 보다가 우연히 본 거야."
생긋 웃으며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아 제 문제집을 내미는 여학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긴 머리카락에 가려진 명찰이 그녀의 이름을 은밀하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민희… 송민희.
"고마워. 얼른 베끼고 줄게."
"천천히 돌려줘도 돼. 아, 내 이름은…"
"민희. 명찰 봤어."
"그래? 으음, 근데 있잖아. 나 너랑 점심 같이 먹어도 돼?"
"점심? 안될 거야 없지. 근데 나 다른 반 애랑 같이 먹는데… 상관 없어? 셋이 먹을래?"
"응, 상관 없어!"
입가에 번진 웃음이 예뻤다. 그동안 도대체 누구랑 급식을 먹었던 것이길래 다짜고짜 나한테 급식을 같이 먹자 하는 건지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김종인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아직 미지수였지만, 그런 거에 신경조차 안 쓸 녀석이었기에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
시간은 줄기차게 흘러 어느새 4교시 수업이 끝나기까지도 10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1교시에 열심히 꾸벅꾸벅 졸았던 탓일까, 나머지 오전수업들은 나름 곧잘 들었다. 집중도 은근 잘 됐던 것 같고….
4교시는 한국지리였다. 담임선생님 과목이라 그런지 왠지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집중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다른 과목들에 비해 우세했으며, 괜한 긴장감도 들었다. 그렇다 해서 한국지리를 수능 때 볼 과목으로 선택할지 안 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4교시 내내 민희라는 아이와 도대체 눈이 몇 번을 마주쳤는지 모르겠다. 내가 일부러 그쪽을 바라봤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선이 꽤나 자주 마주쳤다. 그 아이가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도 들었다. 마치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수업시간에 몰래 훔쳐보는 어느 남학생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해가 안 됐다. 그게 내 착각이라면 미안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착각이 아닌 것 같다. 딱히 기분 좋게 느껴지는 시선은 아니었던 것도 같은데 말이지.
*
4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바로 옆 반으로 향했다. 종이 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수업을 마무리짓지 않으시는 문학선생님을, 창문을 통해 흘끗 바라보았다. 그리곤 시선을 옮겨 김종인을 바라보았다. 웬일로 졸지도 않고 깨어있나 했더니 깨어있는 게 아닌 듯했다. 허리는 곧게 펴져있었지만 눈은 반쯤 감겨있었다. 마치 며칠 밥을 굶어 배가 몹시 고픈 듯한 강아지의 모습처럼 보였다. 4교시 문학시간은 최악이다. 그날 해야 할 진도의 양을 시간 안에 끝내지 못한다면, 종이 울리든 말든 마이웨이를 걸으시는 문학선생님 탓이었다. 학교에 밥을 먹으러 오는 학생도 있을 정도로 학생들에게 있어 점심시간이란 활력소와 같았다. 그런 점심시간을 조금이라도 까먹는다는 건 정말이지 잔인한 것이었다. 다행히 우리반은 문학이 4교시에 들은 날은 없으니까…
"어? 끝났다."
옆에 나란히 서 김종인의 반을 흘끗 바라보던 민희가 말했다. 그와 동시에 교실 뒷문이 드르륵 열리며 아이들이 우수수 빠져나왔다. 오늘 점심 메뉴가 뭐였더라. 맛있는 게 나오던가? 왜들 저렇게 뛰어가는 건지…. 저렇게 뛰지 않아도 급식은 다들 먹을 수 있는데 말이야. 급식실을 향해 열심히 뛰기 시작하는 몇몇 학생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곧이어 느릿느릿 김종인이 걸어나왔다. 녀석은 역시나 지루하다는듯 하품을 크게 해보였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젓곤, 갑작스레 내게 팔짱을 껴오는 민희를 흘끗 바라보다 아차하며 김종인에게 입을 열었다.
"아, 내 친군데… 오늘 급식 같이 먹자길래…."
"같이?"
녀석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녀석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급식실로 내려가버린다. 그런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급식실이 가까워질수록 음식 냄새가 진하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오늘 메뉴는 아마 크림 스프일 테지.
급식실은 웬일로 널널했다. 빈 자리가 꽤나 많이 있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고도 앉을 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먼저 자리를 잡고 털썩 앉은 김종인 쪽으로 다가가 녀석의 맞은편 자리에 급식판을 내려놓으려던 찰나, 나보다 한 박자 빠른 누군가로 인해 그 행동이 가로막아지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게 녀석의 맞은편 자리에 제 식판을 내려놓고 앉는 민희를 슬쩍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그녀의 옆자리에 내 식판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김종인이랑은 초면 아닌가? 마주보면서 먹기 어색할텐데… 꽤나 당당하네.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꼭 김종인이 내 맞은편에 있어야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음, 얼른 먹자. 배고플텐데."
아무 말도 없는 두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민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종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제 급식판만 내려다보다 젓가락을 집어드는가 싶더니, 망설임 없이 자리를 옮겨 내 맞은편에 털썩 앉는 것이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숟가락으로 밥을 크게 떠 제 입에 쏘옥 집어넣는다.
"밥이 왜이렇게 꼬들꼬들한 건데, 짜증나게."
*
그렇게 점심시간은 어영부영 흘러가버렸다. 반 아이들과 축구를 하기로 했다며 급식을 먹자마자 운동장으로 뛰쳐나가던 김종인에게 대충 인사를 해주곤 민희와 교실로 향했다. 교실로 향하는 와중에도 아무런 말이 없던 민희가 갑작스레 입술을 뗀 건, 내가 문제집을 가지러 사물함 쪽으로 향했을 때였다.
"있잖아. 나 너한테 부탁할 게 있는데…."
"응? 나한테?"
멋쩍게 웃으며 제 교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는 민희를 바라보며 덩달아 웃어보였다. 자꾸만 머뭇거리고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걸로 보아, 왠지 들어주기 쉬운 부탁은 아닐 듯했다.
"종인이 번호, 알고 싶어."
"… 김종인? 번호?"
친절히 제 휴대폰까지 내밀며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다 어색하게 웃었다. 김종인 번호를 알려달라…. 그래, 알려달라면 알려줄 수야 있지. 근데 김종인 번호는 왜? 김종인을 좋아하나?
그저 기분좋게 웃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민희에게 어설프게 녀석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기분이 그리 썩 좋진 않았다. 김종인의 연락처를 알아내기 위해 처음부터 내게 접근했던 거라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애써 아닐 거라 생각하기에도 애매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진 모르겠지만, 그녀는 김종인을 좋아하는듯 보였다. 그래서 김종인과 매일이다시피 붙어다니는 내게 접근해 녀석의 연락처를 알아내려는…
제발 내 착각이라면 좋으련만.
*
"종인이는 무슨 음식을 좋아해? 아아, 사탕은 좋아해? 초콜릿을 더 좋아할까?"
"… 글쎄."
"글쎄라니? 너 종인이랑 베프라며! 맨날 둘이 붙어다니면서 그런 것도 모르는 거야?"
심지어 슬슬 짜증도 났다. 쉬는시간마다 내 자리에 찾아와 하는 소리라곤 죄다 김종인과 관련된 것이었다. 김종인 얘기가 듣기 싫다는 건 아니었다. 왜 김종인에 대한 사소한 것들을 내가 그녀한테 알려줘야 하는 건지가 의문이었다. 애매모호하게 답을 하면 짜증이 잔뜩 섞인 실소를 내뱉었다. 도대체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건지.
"김종인은 사탕이랑 초콜릿도 좋아하고, 과자도 좋아해."
"진짜? 오오, 그렇구나!"
짜증나.
*
오후수업 내내 기분이 영 다운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감정들이 뒤섞여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수업을 귀로 들었는지, 코로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기능론? 갈등론? 뭐가 어쩌고 어쨌다고?
석식은 다행히 김종인와 둘이 먹을 수 있었다. 같이 먹는 친구들이 단체로 야간 자율학습을 째기로 했다며 혼자 남은 오세훈도 같이 먹어야 했지만, 상관 없었다. 김종인에게 송민희에 대해선 일부러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별다른 신경도 쓰고 있지 않은 녀석에게 말을 해봤자지.
야자시간엔 마음 편히 잠을 잤다. 야자시간에 풀 거라며 당당히 펴놓은 미통기 문제집을 세 시간만에 다시 덮어야 했다. 문제는 두어 개 정도가 풀려 있었다. 오늘 야자시간에 한 거라곤 수학 두세 문제를 푼 게 전부였다. 야자시간을 꿀잠으로 보냈으니 집에 가서 오늘 못 한 공부를 마저 하는 수밖에…. 또 늦게 잠들겠네. 잠을 세 시간이나 잤으니 쉽게 잠이 올 리도 없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겠다.
*
집으로 향하는 내내 게임에만 정신이 팔려 먼저 말을 걸기는 커녕 내가 하는 말에도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던 김종인에게 대충 인사를 하곤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야자가 끝나고 집에 도착했을 시각은 한창 드라마가 할 시각이었다. 드라마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다녀왔다는 내 인사를 건성으로 받아주는 엄마에게 입술을 삐죽이곤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의자에 책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폭신폭신한 느낌에 급격히 다운돼 있던 기분이 싸악 풀리는 것만 같았다. 교복을 갈아입기도 귀찮아 멍하니 벽지를 바라보았다. 아기자기한 꽃들이 프린팅 되어있는 벽지가 새삼 예쁘게 보였다. 오늘 수업시간엔 집중도 제대로 못했고 야자시간엔 잠만 잤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피곤했다. 사실 피곤한 건 둘째 치고, 기분이 상당히 별로였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점심시간 이후부터 괜히 짜증이 났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씻기도 귀찮았다. 공부하고 자려 했는데, 그냥 잘래. 정말 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는 건 아니고, 도저히 공부할 기분이 아니야.
갈아입을 옷을 챙겨 거실로 나가려던 찰나,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연달아 몇 번 울렸다. 아마 카톡 메시지가 온 듯했다. 휴대폰을 집어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 ○○아, 쌤인데
- ○○이는 딸기맛이 좋아, 오렌지맛이 좋아?
- 아아, 과제 하다 모르는 문제는 없었어?
- 생각해보니까 과제를 너무 많이 내준 건 아닌가 싶더라고..
카톡 메시지를 보내온 건 다름아닌 과외선생님이었다. 김종인이나 송민희를 예상했는데… 아쉽게도 내 예상은 시원하게 빗나가버렸다. 아 참, 그러고보니 송민희는 내 번호를 모른다. 생각하니 짜증나네. 내 번호는 물어보지도 않고 김종인 번호만 물어봐? 네 목적은 진짜 김종인이었던 거야?
- 전 아무거나 다 좋아해요
- 과제는 다 했어요
- 모르는 건 빼구요
제 셀카로 설정되어있는 그의 프로필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잘생기긴 정말 잘생겼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고 공부도 잘 해…. 전형적인 엄친아다.
- 그래?
- 그럼 모르는 문제는 내일 같이 풀자
- 야자 끝났지? 그럼 지금 집이겠네?
선생님과 카톡을 주고받는 적은 처음이라 그런지 꽤나 어색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보단 오빠라는 호칭이 더욱 잘 어울리는 그였기에 어색함은 두 배로 느껴지는 듯했다. '과외선생님'이라 딱딱하게 저장되어있는 그의 번호를 멍하니 바라보다 슬쩍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글자를 지워 조금은 친근하고도 부드러운 호칭으로 자판을 입력해나가기 시작했다.
네, 집이에요. 쌤은요? 쌤도 집이에요? 라는 문장을 입력하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갑작스레 휴대폰 진동이 길게 울리기 시작했다. 길게 울리는 진동과 함께 화면 가득 '김종인새끼'라는 단어가 떴다. 김종인이 이 시간에 웬 전화람. 급한 일 아니면 문자나 카톡을 보내오는 녀석인데 웬 전화? 불안하게시리….
"여보세요?"
불안감과 두려움이 물밀듯이 몰려왔지만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보나마나 또 쓰잘데기 없는 이유로 전화를 걸어온 거겠지. 예를 들어, 오늘 야자시간에 숙제를 다 끝내지 못했으니 내일 학교에서 좀 보여달라던가? 아니지, 그건 아까 집 오는 길에 말해줬는데.
- 야.
"왜?"
- 송민희가 누구야?
"송민희? 왜?"
- 누구냐니까.
"… 내 친구. 아까 점심 같이 먹었던…"
- 너 걔한테 내 번호 알려줬어?
"응. 왜?"
- 왜 알려줬어?
"… 걔가 알려달라길래 그냥 알려줬지. 왜? 그럼 안되는 거야?"
- 왜 네가 멋대로 내 번호를 알려주고 다녀? 적어도 내 허락은 받았어야지.
"뭐라는 거야. 내가 왜 네 허락을 받았어야 해? 네가 무슨 연예인이라도 돼? 유명인사야?"
- 게임하는데 자꾸 카톡 오잖아. 잘 알지도 못하는 애한테 내 번호를 왜 알려주냐고.
"카톡 좀 그만 보내라 말은 해 봤어?"
- 어. 말로 해서 될 것 같으면 내가 너한테 전화ㄹ…
"그럼 차단을 하던가. 그깟 버튼 몇 번 누르는 게 귀찮아? 너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왜 나한ㅌ…"
- 그럼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거야? 멋대로 내 번호 뿌린 게 누군데.
"말 진짜 예쁘게 한다. 네 번호 알려달라는 애한테 알려준 게 그렇게 잘못한 거야?"
- 그럼 아니야? 내가 네 번호 멋대로 알려주고 그랬으면 넌 어땠을 것 같아? 너도 기분 나빠했을 거잖아.
"다 너한테 일반화 하지마. 자꾸 카톡 오는 게 싫으면 네가 차단을 하면 되는 거야. 자꾸 나한테만 뭐라 하지 말라고."
- 중점은 그게 아니잖아. 애초에 이런 일 생기게 만든 게 누구라 생각해?
"……."
- 너야.
"……."
- 네가 말 안 해도 차단은 할 생각이었어. 내가 지금 화나는 건, 네가 왜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내 번호를 알려준 거냐 이거야.
"……."
- 또 대답 안 하지.
"……."
- 끊어라, 그럼.
잔뜩 깔린 목소리로 차갑게 말하며 통화를 끊는 김종인이 너무나도 미웠다. 솔직히 녀석이 왜이리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다. 연락처를 알려달라길래 그냥 알려줬던 것 뿐인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쁠 일인가?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왜이리 예민하게 구는 건데? 응? 김종인 이 나쁜새끼야. 내가 너한테 뭘 그리 잘못했는데? 넌 그냥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다 짜증나고 싫은 거야? 진짜 그래?
너무하네 진짜.
- 자나 보네.. 쌤이 너무 귀찮게 했지?
- 미안. 잘 자고, 내일 보자
- 종인이도 답이 없네. 종인이도 자나?
- 너희 되게 일찍 잔다..
- 음.. 그럼 나도 이제 자야지.
- ○○아, 좋은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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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곧 설이네요! 시간 진짜 빠른 것 같아요.. 아직 멀었다 생각한 설도 바로 코앞이고..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