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06 (화이트데이)
[먼저 갈게.]
오늘은 일부러 일찍 일어났다. 잠을 그리 깊이 잔 건 아니었지만 몸은 개운했다. 도저히 같이 등교를 할 기분 아니었던 탓에 녀석에게 먼저 가겠다는 문자를 보내곤 서둘러 집에서 나왔다. 아침밥을 먹고 가라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젓곤 냉장고 안에 있던 사과 반쪽을 꺼내 입에 문 채 말이다.
녀석에게선 답장이 없었다. 등교를 혼자 하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옆에서 신경을 긁는 사람도 없으니 괜히 짜증이 치밀 일도 없었다. 김종인 없이 나 혼자 걷는 등굣길이란… 정말 기분 좋군.
오늘은 화이트데이였다. 아침 일찍 만나 사탕을 주고받는 학생들이 몇몇 보였다. 잊혀진 기념일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내 착각이었나 보다. 제 남친에게 받은듯 보이는 커다란 사탕꾸러미를 들고 하하호호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을 떼는 여학생, 제 몸집보다 약간 작은 상자를 끙끙대며 들고 가는 여학생…. 사탕이나 왕창 먹고 이가 다 썩어버려라. 유치한 저주를 내리곤 무거워진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기 시작했다. 화이트데이고 뭐고.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다. 내일만 생각하며 오늘 하루를 버텨내야겠다.
*
1교시는 이동수업이었다. 교과서와 출석부를 챙기고 혼자 교실을 나서려다 김종인과 마주쳤다. 1교시부터 체육인 건지, 녀석은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문단속 담당이라던 김종인은 문을 잠그고 있었고, 그 옆에서 제 옷 매무새를 정돈하고 있던 오세훈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안녕."
안녕, 이라 말하는 오세훈을 애써 무시하며 등을 돌렸다. 오세훈한텐 미안하지만, 김종인과 마주치는 게 조금은 꺼림칙했기에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뭐지…. 나 씹힌 건가? 근데 너네 싸웠어? 왜 서로 아무런 말도 안 해? 오세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일부러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사실 김종인과 화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녀석은 제가 잘못했다는 생각 따위 죽어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사실 나도 그랬다. 어젯밤 김종인과의 전화통화 이후로 계속 생각해 보았다. 내가 잘못한 게 도대체 무엇인지. 녀석의 말대로 진짜 내게 모든 잘못이 있는 것인가. 나 때문에 녀석이 화를 내는 거고, 나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인가.
"○○아! 같이 가!"
김종인 만큼이나 짜증이 나는 건 송민희였다. 아무렇지 않게 내게 와 팔짱을 끼곤 왜 먼저 가는 거냐며 따지듯 말하는 송민희. 이젠 저렇게 웃는 모습마저 모두 가식처럼 보인다. 가식덩어리.
*
그토록 오지 않길 바랐던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등교를 혼자 하는 건 상관 없었지만 급식을 혼자 먹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냉전 중인 상태에서 김종인을 찾아가? 자존심 상하게 어떻게 그래.
'… 왜 혼자 먹냐.'
'교실 가보니까 네가 없길래 무슨 일인가 했지.'
'왜 먼저 왔냐. 혼자 먹는 건 죽도록 싫어하면서 혼자 먹고 있고.'
학기 첫 날 혼자 밥을 먹고있던 내게 녀석이 했던 말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그땐 녀석에게 한없이 고마웠는데… 지금은 한없이 미웠다. 내가 안 찾아간다고 자기도 안 오는 것 봐. 역시 김종인은 그런 애였다. 먼저 굽히고 들어오는 꼴을 못 봐, 내가. 망할 자존심 때문에 내가 혼자 밥을 먹게 생겼다.
하필 이럴 땐 송민희도 없다. 밥이라도 같이 먹자 하려 했는데 그새 어딜 간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애다. 정말 한결같이 짜증나게 하네.
"아씨! 거기서 그렇게 하면 안되지, 병신아!"
"미친… 존나 실수다. 나 한 판만 다시 할래. 형, 제발요."
휴대폰 게임에 빠져 급식도 먹으러 가지 않는 남학생 둘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나저나 시간이 꽤나 흘렀나 보다. 게임돌이 두 명과 나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급식실로 향한 건지, 교실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교실만 나섰을 뿐인데도 급식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오늘 급식은 카레인가….
본능적으로 옆반을 흘끗 바라보았다. 활짝 열려있는 뒷문 사이로 익숙한 인영들이 보였다. 그게 누구인진 멀리서 봐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김종인과 송민희. 교실은 형광등이 모두 꺼져있어 어두웠다. 책상 위에 앉아있는 김종인과, 작은 봉투를 손에 든 채 그 앞에 서있는 송민희…. 대부분의 학생들이 급식을 먹으러 간 탓에 복도는 조용했다.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김종인과 송민희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왠지 궁금했다. 너무 사생활 침해인가….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건데?"
"오늘 화이트데이잖아!"
"근데."
"원래 남자들이 여자들한테 주는 날이긴 한데…, 난 좀 특별하게…"
"그니까 네가 왜 이걸 나한테 주는 거냐고."
"… 그야! 내가 널 좋아하니까…."
듣지 말 걸 그랬나. 듣지 말 걸 그랬다. 내가 왜 들었지. 내가 왜 들었을까….
*
사실 예상했던 것이었다. 송민희가 김종인을 좋아하고 있을 거라는 건 예측 가능했던 사실이다. 그러나 확인사살이라도 시켜주는 듯한 송민희의 고백-이라 해도 될런진 모르겠지만-이 꽤나 기분 나쁘게 들렸다. 송민희가 김종인을 좋아하든 사랑하든,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내가 녀석의 여자친구인 것도 아니고, 한낱 친구일 뿐인데… 왜이리 기분이 나쁜 건지 모르겠다.
점심을 먹을 기분도 아니었다. 그저 발길이 닿는대로 향했다. 운동장엔 축구를 하는 남학생들이 많았다. 혹여나 날아오는 공에 맞을세라, 조심조심 학교 뒷편에 있는 작은 벤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한적하기만 한 벤치에 앉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늘진 곳이라 그런지 조금은 쌀쌀했다.
"……."
날이 쌀쌀해도, 배가 고파도, 아무렴 괜찮았다. 김종인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송민희 선물을 받아줬을까? 고백은? 고백도 받아줬나? 둘이 사귀는 건 아니겠지? 지금쯤 밥을 같이 먹고 있으려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와 동시에 울적해지는 마음에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눈물도 왈칵 터져나올 것 같았다. 도대체 이 감정은 무슨 감정이람. 항상 솔로였던 김종인이 이제 커플이 된다 생각하니 조금은 어색해서? 씁쓸해서? 아니지, 김종인이 여자친구를 사귀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인데. 김종인이 솔로든 커플이든 내가 알 바야?
닭똥 같은 눈물이 찔끔 차올랐다. 김종인과 송민희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다는 건 아무 상관 없었다. 그저 그 이후가 걱정이었다. 더이상 김종인이 나를 챙겨주지 않을 것만 같았고, 더이상 김종인이 나를 신경 써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니야. 사실… 아무 상관 없는 게 아니야. 김종인이랑 송민희가 사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둘이 사귀는 거 싫어. 진짜 싫어.
솔직히 송민희는 나보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았다. 그런 점에서 괜한 자괴감도 들었다. 진짜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보단 송민희가 김종인에게 더 잘 어울리… 내가 왜 김종인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거지? 생각을 깊게 하면 할수록 점점 산으로 가는 것만 같았다. 울적한 나와는 달리 운동장을 뛰노는 아이들은 걱정거리 하나 없다는듯 싱글벙글 웃고 떠들기 바빠 보였다. 어차피 밥은 안 먹을 거고, 할 것도 없는데 교실에나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이어 휴대폰 진동이 길게 울리기 시작했다. 김종인이었다. 녀석의 목소리도 듣기 싫었을 뿐더러, 이런 기분으로 전화통화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멍하니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았다. 나름 길게 이어지던 진동이 어느 순간 끊겼고, 얼마 안 있어 문자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어디야? 밥 먹었어?]
일부러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김종인을 화나게 할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난 그랬다.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씹는 것. 김종인이 싫어하는 행동들 중 하나였다.
[밥 먹었냐니까? 너 어딘데? 왜 교실에 없어?]
다시 벤치에 앉았다. 지금 교실로 올라갔다간 분명 김종인과 마주칠 게 뻔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난 녀석을 피하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럴 이유는 전혀 없는데 말이지.
모르겠다, 나도.
*
결국 수업 예비종이 울린 뒤에야 교실로 향했다. 교실 안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영어 듣기를 하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 제가 초중딩인 것 마냥 교실을 운동장 삼아 뛰어다니는 학생들도 있었다. 조용히 자리로 와 앉았다. 5교시는 미통기였다. 묵묵히 책상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냈다. 잘못 넣어뒀던 건지 표지가 살짝 접혀있었다. 접힌 부분을 다시 곧게 펴 손바닥으로 꾸욱 눌렀다. 그리고 곧이어 송민희가 교실로 들어왔다. 성큼성큼 제 자리로 향하는듯 싶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며 걸음을 멈춰선다. 그녀의 손엔 아까 김종인에게 전해주던 사탕봉투가 들려있었다. 저걸 왜 아직 쟤가 가지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송민희는 왠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리곤 다시 걸음을 옮겨 들고있던 사탕봉투를 쓰레기통 속으로 거세게 집어넣는 행동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아까까지만 해도 헤실헤실 웃고있던 애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순간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급히 고개를 돌려 애꿎은 교과서를 펼쳐 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
다행히 쉬는시간 복도를 거니는 동안엔 김종인과 마주치지 않았다. 대신 오세훈과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아주 형식적인 인사만 주고받았을 뿐, 별다른 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석식 시간이었다. 어차피 오늘은 과외가 있으니 야간 자율학습은 빠져도 되는 날이었다. 석식은 그냥 안 먹을래. 집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빵이라도 사 먹지 뭐.
가방을 챙긴 뒤 교실을 나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녀석의 반을 흘끗 바라보았다. 정말 나도 모르게 나와버린 행동이었다. 녀석의 교실은 아무도 없이 텅텅 비어있었다. 김종인 자리엔 책가방도 없었다. 아마 먼저 집에 가버린 듯했다. 석식도 안 먹고….
오랜만에 혼자 하굣길을 걷는다. 날은 역시나 쌀쌀하니 추웠고, 바람도 꽤나 많이 불었다. 길바닥엔 사탕 껍질들이 곳곳에 버려져있었다. 맞다. 오늘 화이트데이였지…. 오늘은 마치 역대 최악의 화이트데이가 될 것만 같았다. 뜻밖의 상황을 목격해버리질 않나, 사소한 문제로 누구랑 크게 다퉈 등하교도 혼자 해버리질 않나…. 내일이 주말이라는 생각 하나로 오늘을 버텨보려 했건만, 왠지 그게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내일은 주말이지만 기분은 우울했다. 그리고 곧 더더욱 우울해질 테지. 김종인와 과외를 같이 하게 될 테니 말이다.
아직 과외가 시작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점심을 안 먹어서 그런지 배가 상당히 고팠다. 일부러 시간도 때우고 배도 채울 겸 편의점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제 할 일을 하고있던 알바생이 간단한 멘트를 내뱉었다. 어서오세요. 요즘 제일 맛있는 빵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눈알을 요리조리 굴렸다. 평소 그리 좋아하진 않았던 초코롤빵이 왠지 맛있게 보였다.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인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흰 우유와 초코롤빵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고, 돈을 지불했다. 이제 주머니엔 몇 백원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계산을 하곤 망설임 없이 빵의 껍질을 뜯었다. 껍질을 뜯자마자 달콤한 초코 향이 코끝을 간질이는 듯했다. 어차피 시간도 많으니 편의점 안에서 느긋하게 먹고 느긋하게 집으로 향해도 충분할 거란 생각을 하며 우유에 빨대를 꽂았다. 역시 초코빵엔 흰 우유가 제격인 것 같다.
*
배부르게 먹고 여유롭게 편의점을 나섰다. 밖은 은근 어두워져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내가 편의점에 너무 오랫동안 있었나…. 어느새 과외 시간까진 10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왠지 마음이 다급해져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마 선생님은 이미 도착하셨겠지. 먼저 도착하셔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리고 김종인은… 모르겠다.
빠른 걸음으로 집까지 뛰다시피 걸었다. 방금 먹은 초코롤빵과 우유가 다시 올라올 것만 같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곤 힘겹게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서둘러 신발을 벗었다. 낯선 신발 하나와 꽤 익숙한 운동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을 보아, 역시 두 사람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살짝 열려있는 방문 사이로 김종인의 모습이 보였다. 저번 그 자리에 앉아 지루한듯 책상에 엎드려있는 녀석의 옆엔 팔짱을 낀 채 곧게 앉아있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 안녕하세요."
조심스러운 내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아주 순식간이었지만 김종인과 제대로 눈이 마주쳐버렸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마자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녀석이었고, 괜히 머쓱해진 난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좀 늦었네. 땀난 거 봐. 뛰어 왔어?"
"아, 밥 먹다가… 늦었어요."
"오늘 석식 맛있는 거 나왔나 보네. 종인이도 맛있게 먹었어?"
김종인을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그러나 녀석은 마치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있는 사춘기 남학생이라도 된 양 뚱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대답을 않고 있었다. 보는 내가 민망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곤 책가방 속에서 문제집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 것 같던 김종인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저 숙제 덜 했어요."
"아, 그래? 내가 숙제를 너무 많이 내주긴 했지?"
김종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괜찮다는듯 푸스스 웃어보이던 그가 녀석의 문제집을 펼쳤다. 숙제를 덜 했다는 말보단 안 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법한 녀석의 문제집은 도화지처럼 깨끗하기만 했다. 미소를 짓고있던 그의 입매가 차갑게 굳어져 가는 것 같았다.
"솔직히 숙제 너무 많아요. 학교 수행평가 하기도 벅찬데."
"음…, 일단 내가 잘못한 건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종인이 넌 숙제를 하나도 안 한 거네, 그럼?"
"세 문제는 풀었어요. 아니다, 네 문제."
둘 사이엔 왠지 모를 신경전이 느껴졌다. 과제를 제대로 해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기색이 역력한 김종인과, 그런 녀석을 마냥 혼내기에도 애매한듯 보이는 박찬열. 앞으로의 과외 생활이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
다행히 김종인은 수업 내내 조용했다. 수업도 곧잘 들었고, 오늘 해오지 않은 과제는 다음 수업 때까지 마무리를 지어놓으라는 그의 말에 토를 달지도 않았다. 한편으로 그런 점에선 다행이었다. 괜한 신경전을 벌이는 둘 사이에 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이 피곤해지는 건 싫었기 때문이다.
짧고도 길게 느껴졌던 수업이 끝나자마자 녀석은 제 문제집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간단한 인사조차 없이 황급히 걸음을 옮겨 방을 나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가 한숨을 작게 내쉬며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혹시 종인이랑 싸웠어? 둘이 말도 안 하고…"
"……."
"종인이가 오늘 컨디션이 별로인가? 수업 내내 표정도 별로고, 기분도 완전 별로던데."
"… 글쎄요. 걔 원래 그래요."
"그래?"
내 말에 아무런 의심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바라보며 머쓱히 웃어보였다. 골똘히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배싯 웃으며 제 백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예쁜 분홍색 상자였다. 뚜껑엔 상자보다 진한 색상의 분홍 리본도 달려있었다. 그게 뭐냐며 물을 새도 없이 그가 내게 상자를 건넸다. 꽤나 큼지막한 그의 손에 상자가 들려있으니 상자가 더욱 작게 보였다.
"화이트데이 선물."
"… 선물이요?"
"그래, 선물. 사실 아까 주려 했는데 분위기가 영 아니더라고."
"……."
"종인이한테도 줬어. 너만 주는 거 아니야."
"… 감사합니다."
"사심 들어간 건 전혀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씨익 웃어보이는 그에게 덩달아 기분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늘 처음 받는 사탕 선물이었다. 우울했던 기분이 금세 회복이 된 듯했다. 제법 귀엽게 생긴 분홍색 상자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그런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가 푸스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에 많이 먹으면 이 상하니까 조금씩 먹어. 쌤 갈게."
손을 흔들어보이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쌤 배웅하러 나갈래요. 제법 당돌하게 말하는 나를 바라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밖에 추운데."
"괜찮아요."
*
침대에 대충 올려두었던 후드집업을 걸치곤 그와 함께 집을 나섰다. 제법 깜깜해진 밤하늘의 군데군데엔 작은 별들이 박혀있었다. 추운데 어서 들어가보라며 마지막까지 나를 걱정해주던 그가 조심스레 내 겉옷을 여며주었다. 그 손길이 조금은 어색해 살짝 움찔하자, 그가 작게 소리내 웃었다. 그리곤 내 어깨를 두어번 토닥여주더니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다음 수업 때 보자. 배웅 안 나와줘도 되는데, 고마워."
그의 낮은 목소리가 하얀 입김과 함께 허공에 울려퍼졌다. 네, 조심히 가세요.
*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집에 들러 가방을 내려놓고 문제집만 챙겨왔던 탓에 들고갈 짐이 문제집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집만 달랑달랑 들고있는 한쪽 손이 조금은 시려웠다. 망할 꽃샘추위. 언제쯤 사라질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 방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 문제집을 내려놓곤 힘없이 침대에 털썩 앉았다. 책상 위가 꽤나 지저분했다. 아침에 벗어놓은 티셔츠가 그대로 있었고, 학교에서 나눠준 갖가지의 안내장들이 꼬깃하게 접힌 상태로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내일이면 여행을 가신 부모님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실 테지. 집안 꼴이 이렇게 지저분하다는 걸 엄마가 알게 된다면… 난 아마 잔소리를 신명나게 듣게 될 것이었다.
책상 구석엔 조그마한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학교에 가져갔다 다시 집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대충 손을 뻗어 하얀 상자를 집어들었다. 상자 속엔 츄파춥스 사탕 7개와 여러 개의 초콜릿들이 들어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콜라맛 츄파춥스를 찾으러 편의점 여섯 군데를 뛰어다니곤 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너 주려고 산 사탕인데 왜 선뜻 주지를 못하겠지…. 넌 나한테 화가 많이 난 건지, 전화나 문자 모두 씹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미안해서 어쩌지. 먼저 사과를 해야 하나.
점심시간에 갑자기 찾아와 내게 사탕을 건네던 여학생에게, 난 사탕을 싫어한다 말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송민희였나 송희민이었나…. 아마 송희민이었던 것 같다. 사실 사탕은 좋아하지만 그 아이가 주는 건 왠지 받고 싶지가 않았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건데?'
'오늘 화이트데이잖아!'
'근데.'
'원래 남자들이 여자들한테 주는 날이긴 한데…, 난 좀 특별하게…'
'그니까 네가 왜 이걸 나한테 주는 거냐고.'
'… 그야! 내가 널 좋아하니까….'
날 좋아한다 했다. 사실 별로 놀랍지도 않았고, 별로 달갑지도 않았다. 그래, 그렇구나. 그런가 보다. 나를 왜 좋아하는지에 관해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없었다기보단 귀찮았다. 그냥 달라붙지 말아줬으면, 하는 생각 외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내게 송희민이란 그런 존재였다.
"… 송민희인가."
송민희인지 송희민인지 이름조차 헷갈렸다. 내가 알 게 뭐야. 과외선생 이름이 박찬열인지 박열찬인지도 헷갈려 죽겠는데 내가 그 이름까지 외울 필요가 있나.
급한대로 책상 위에 놓여있던 상자를 집어들곤 서둘러 집을 나섰다. 겉옷 따위 입을 여유도 없었다. 어젯밤에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서 화를 낸 건 분명 내 잘못이니 일단 사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겉옷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몇 분 정도 빠르게 뛰니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듯했다. 상자만 좀 예쁠 뿐이지, 내용물은 보잘 것 없었다. 막대사탕 7개와 초콜릿 몇 개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전해주고 싶었다. 내가 다 미안하다며, 내 잘못이라며 사과를 하고 싶었다. 화해를 하고 싶었다.
최대한 빠르게 뛰어 도착한 너희 집.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 옮길수록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듯했다.
"다음 수업 때 보자. 배웅 안 나와줘도 되는데, 고마워."
"네, 조심히 가세요."
박찬열? 박찬열이네.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어. 어두워서 잘 안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박찬열과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네 모습까지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손엔 분홍색 상자도 들려있었다. 예상컨대, 아마 과외가 준 거겠지. 나도 모르게 네 손에 들린 상자와 내 손에 들린 상자를 비교해 보고 있었다. 멀리서 가늠해 보아도 과외가 준 선물이 내가 준비한 선물보다 훨씬 커보였다.
박찬열은 내게 막대사탕 다섯 개가 담긴 작은 봉투를 건넸었다. 그러나 네 손에 들린 사탕상자는 내가 받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근사한 것이었다. 이런 유치한 차별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건 전혀 아니었다. 단지, 내가 준비한 선물보다 과외가 준비한 선물이 더 값지고 화려하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빴다. 왠지 모르게 자존심도 상했다. 박찬열?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놈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들었다.
"……."
들고있던 상자의 뚜껑을 열어 막대사탕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곤 껍질을 까 입에 쏘옥 집어넣었다. 콜라맛 사탕… 내가 얼마나 힘들게 구한 건데. 나 먹으려고 산 거 아니야. 너 주려고 산 거라고. 콜라맛 사탕은 레어템이라면서 아껴먹던 네가 생각나서 온 동네방네 뛰어다녀 어렵게 구한 건데. 존나 짜증나. 이걸 왜 내가 먹고있는 건지…. 근데 콜라맛 더럽게 맛없다. 왜이리 쓰냐. 망할 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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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인이 시점이 처음 나왔네요! 앞으로도 여주와 종인이 시점을 번갈아 쓸 예정이에요. 아무래도 여주 시점만 쓰는 것보단 훨씬 낫겠죠..?
아직 9시 반밖에 안 됐네요.. 그럼 오늘 하루도 기분 좋은 하루 되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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