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08 (관계의 시작)
어느덧 1차 지필평가도 일주일 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일주일에 두 번이 아닌 세 번으로 과외수업이 늘게 되었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던 김종인의 불평불만을 한참이나 들었어야 했다.
오늘 과외수업은 조금 특별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매번 집에서만 하긴 답답하기도 하고, 꽃샘추위가 물러나 이제 완연한 봄날씨가 찾아왔으니 야외수업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박찬열쌤의 제안이었다. 야외수업이라 해봤자 장소는 카페였지만, 하여간 야외는 야외였다. 카페에서 하는 과외수업이라니… 정말이지 새로웠다.
제가 다 계산하겠다며 마시고 싶은 음료를 골라보라던 그의 말에 괜히 고민이 되었다. 사실 내가 카페에 오면 항상 주문하는 메뉴는 바닐라라떼였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다른 음료를 먹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메뉴판엔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이름의 음료들이 빼곡히 적혀있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어느 누군가의 명언이 생각났다. 새로운 도전을 하면 무조건 실패를 하게 된다던…. 사실 그 말은 거짓이 아닌 진실이었다. 호기심에 불닭볶음면을 처음 구입했던 적이 있었다. 다들 맛있다며 추천해주었고, 인터넷 평가도 나름 괜찮았던 제품이었다. 그래서 무턱대고 사서 첫 도전을 해본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너무 매웠던 탓인지 물을 세 컵이나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로 불닭볶음면을 절대 사먹지 않게 되었고, 당분간 다른 라면조차도 멀리하게 되는 효과를 맛보았다. 역시 새로운 도전은 실패를 부른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린티 프라푸치노나 코코아 카푸치노를 주문해서는 안됐다.
"전… 바닐라라떼로 할게요."
"아메리카노랑 바닐라라떼요. 아, 둘 다 차갑게요. 종인아, 너는? 너도 바닐라라떼?"
카운터에 기대선 채 모두의마블을 하고있던 김종인에게 그가 말을 건넸다. 너도 바닐라라떼로 할래? 라고 그가 다시 한 번 더 묻고나서야 녀석이 그를 바라보았고, 제법 틱틱거리듯 대답을 뱉었다.
"핫초코거든요."
열아홉 살이나 먹었지만 입맛은 아직 초등학생 같았다. 김종인의 핫초코까지 주문을 마친 그가 녀석과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마치 어깨동무를 한 듯한 자세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게 조금은 어색해 머쓱히 웃었고, 곧이어 그가 어느 자리로 우리를 이끌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김종인이 먼저 창가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알림이 뜨고 나서야 녀석이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녀석의 옆자리에 앉곤 책가방 속에서 문제집을 꺼냈다.
"이건 뭐야. 웬 사탕?"
불룩 튀어나온 문제집의 한쪽 면을 가리키며 김종인이 말했다. 가방 속에 들어있던 사탕 하나가 문제집 사이에 끼어들어간 듯했다. 사탕을 꺼내 김종인에게 내밀었다. 하트 모양으로 된 딸기맛 사탕이었다. 먹을래?
"어? 그거 내가 준 거네. 그치."
"네? 아,"
제가 준 거라며 웃음기 섞인 어투로 말하는 맞은편의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이 사탕은 김종인이 준 것이었다. 그러나 제가 준 사탕상자에 들어있던 것과 종류가 같은 사탕이었던 것인지, 그가 그만 착각을 해버린 것이었다. 아뇨, 이거 김종인이 준 거예요. 선생님이 주신 건 집에 있어요. 라고 정정해 말하기도 유치하고 째째할 것 같아 그냥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어차피 김종인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하긴, 사탕 하나로 티격태격할 정도로 애 같은 놈은 아니었으니…. 어차피 녀석은 제가 준 사탕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을지 모른다.
김종인이 준 상자 속 사탕은 너무나도 많았다. 하루에 한 개씩만 먹는다 가정했을 때, 대략 몇 달 정도는 거뜬히 먹을 수 있을법한 양이었다. 등교할 때마다 녀석이 줬던 사탕상자에서 사탕 몇 개를 챙겨 집을 나서곤 했다. 수업이 너무 지루해 잠이 쏟아질 때마다 몰래 까먹을 용도의 사탕이었다. 물론 그 효과는 직빵이었고, 덕분에 수업엔 완벽히 집중을 할 수 있었다.
"하필 문학 시험이 첫 날이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작은 캘린더를 꺼내 날짜를 체크하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게요. 하필 문학 시험이 첫 날 첫 교시네요….
"그니까요. 문학 시험 완전 부담되는데…."
"긴장만 하지마."
"아무래도 첫 시험이라 긴장이 배로 되는 것 같아요."
"그런가? 하긴, 나도 그랬던 것 같아. 시험 전에 계속 심호흡 하고…."
"… 벌써부터 떨려요."
"시험만 잘 보고 와. 쌤이 맛있는 거 사줄게."
"진짜요? 뭐 사줄 건데요?"
"음…,"
살짝 미간을 좁힌 채 골똘히 고민하기 시작하는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소한 문제에도 저렇게 심혈을 기울여 고민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신중을 가하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조명에 비친 그의 머리칼이 유난히 밝게 보였다. 짙은 갈색이 마치 밝은 갈색으로…
"우리, 벚꽃 보러 갈래?"
"벚꽃이요?"
"응. 중간고사 끝날 때쯤이면 벚꽃이 만개할 시기잖아. 고3이긴 해도 즐길 건 즐겨야지."
살면서 벚꽃 구경을 해봤던 적은 다섯 손가락에 다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꽃을 좋아하긴 했지만 직접 구경을 하고 관찰을 했던 경험은 별로 없었다. 벚꽃 구경…. 사실 그건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중 가장 첫 번째에 있던 것이었다. 비록 남자친구와 함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벚꽃'이라는 두 글자에도 마냥 마음이 설렜다. 아직 중간고사는 시작도 안 했을 뿐더러, 그날이 오기까진 어림잡아 2주씩이나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싫어요."
"응?"
"차라리 PC방을 가요. 웬 벚꽃…."
"으음…, PC방은 아무 때나 갈 수 있지만 벚꽃은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단칼에 싫다 말하는 김종인에 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것만 같았다. 하긴, 김종인과 벚꽃의 조합이란 역시 꽝이었다. 벚꽃잎이 흩날리는 거리를 걷는 김종인이라… 정말이지 안 어울렸다. 마치 갖춰입은 정장에 하얀 운동화를 신은 것처럼 무언가 안 맞고 이상했다. 벚나무 밑을 거닐며 모두의마블이나 안 하면 다행이련만…
"수업이나 해요."
분위기가 이상해짐을 느낀 건지, 녀석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주문한 음료가 차례로 나왔고, 먼저 제 핫초코를 집어든 녀석이 작게 외치듯 말했다. 아, 뜨거워.
*
그렇게 어영부영 과외수업이 끝났다. 수업 내내 핫초코의 빨대를 입에 문 채, 이해가 됐냐는 그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던 김종인은 다행히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제법 집중도 잘하는 것 같았다. 그런 김종인의 눈치를 보랴, 그의 표정을 확인하랴, 피곤해 죽는 줄 알았다. 둘 사이에 낀 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시방석에 앉은 것마냥 불안하기만 했다. 등줄기와 손바닥엔 약간의 땀도 흐르는 것 같았다. 그저 조용히 수업에 임해준 김종인에겐 한없이 고마울 뿐이었다.
친구로부터 영화 티켓을 세 장이나 얻었는데 같이 보러가지 않겠냐며 그가 물어왔다. 영화를 안 본 지 오래 되기도 했고 평소 영화를 좋아하는 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가차없이 싫다 대답할 것 같았던 김종인도 웬일인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녀석도 역시 영화에 목이 말라있던 것 같았다. 그니까 그놈의 PC방 좀 그만 가고 문화생활이나 하라니까…. 하여간 말은 신명나게 안 듣는 놈이다.
먼저 카페를 나선 김종인을 따라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완연한 봄날씨가 찾아온 건 맞았지만, 역시 밤이라 그런지 쌀쌀했다. 살짝 몸을 떨곤 김종인에게 다가가 녀석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종이야, 나 추워."
"나도."
사실 대단한 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저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누군가 춥다 말하면 옷을 벗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로맨스가, 김종인에겐 없었다. 사실 김종인 자체가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김종인은 결코 로맨틱하지가 않았다. 김종인의 손에 들린 교복 마이를 빼앗아 녀석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춥다면서 왜 마이는 안 입어? 하여간 똥멋만 들어가지고 옷도 제대로 안 입고…. 저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감기에 걸리고 나서 뒤늦게야 후회할 놈이다.
곧이어 그가 카페에서 나왔다. 마치 모델과도 같은 비주얼에 흘끗 시선을 던지고 지나가는 여학생들이 은근 있었다. 그러나 그건 항상 있는 일이라도 되는 양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가 해사하게 웃으며 나와 김종인 쪽으로 걸음을 옮겨왔다.
*
영화관 안은 제법 한산했다. 보이는 사람들이라곤 죄다 커플들 같았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것처럼 나도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관이라는 장소가 언제주터 저들만의 애정행각 장소로 변질되어버린 건진 모르겠다. 보는 눈이 떡하니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진한 키스를 나누는 커플도 있었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꼴불견이었다. 공적인 자리에서도 저 정도인데, 도대체 단 둘만 있는 사적인 자리에선 과연 어느 정도일지… 감히 예상조차 해보고 싶지가 않았다.
"팝콘 먹지? 무슨 팝콘 좋아해?"
"아, 팝콘은 제가 살래요."
멀리 있는 팝콘 코너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아까 카페에서도 자기 카드로 모두 계산을 하고 영화도 공짜로 보여주는 건데 팝콘 만큼은 내가 사고 싶었다. 사실 며칠 전에 용돈도 받아 지갑 안엔 돈이 충분히 담겨있었다. 괜찮다며 앉아있으라 말하는 그에게 고개를 내젓곤 교복 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곤 가만히 휘파람을 불고있는 김종인과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있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얼른 갔다올게요.
영화관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팝콘 냄새가, 코너로 갈수록 더욱 짙어지는 듯했다. 분명 석식도 배부르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달콤하고 고소한 팝콘 냄새에 다시금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
팝콘을 사러 가는 뒷모슺을 바라보며 가만히 자리에 앉아 요즘 유행하는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었다. 덩달아 옆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던 박찬열이 피식 웃으며 그건 무슨 노래냐고 물었지만,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TV도 안 보세요? 벚꽃 개화시기나 알아볼 시간에 인기가요나 보세요. 라고 말할 정도로 싸가지 없는 학생이 되고 싶진 않아서였다.
박찬열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제법 큼지막한 손에 들린 아이폰이 꽤나 작아보였다. 도대체 어떤 대단한 걸 하고 있길래 휴대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인지 궁금해, 슬쩍 곁눈질로 과외의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 아, 아깝다."
저건 내가 예전에 하다 도저히 안 깨져서 포기했던 2048 게임이었다. 게임이라곤 아예 안 하고 살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그건 그렇고, 팝콘을 사러 간 사람은 팝콘을 사러 간 게 아니라 팝콘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옥수수를 생산하러 간 건지 너무나도 느렸다. 박찬열이랑 단 둘이 있기 싫은데 좀 빨리 오지. 그냥 내가 사러 간다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무료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짝 늦어진 시간과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
"아쉽겠어요."
"응?"
"원래 목표는 둘이 오는 거였는데, 아무래도 둘이 오긴 좀 그렇고…, 귀찮디 귀찮은 나까지 같이 오게 됐으니까요."
"무슨 소리야?"
왠지 모르게 박찬열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사실 직접적으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직접적으로 말해버릴 정도로 확실한 것도 아니었으며, 단지 내 추측이었을 뿐이니 말이다. 그러나 눈치 없는 내가 그렇다 느낄 정도면 이건 어느정도… 맞는 말이겠지.
친구가 영화 티켓을 줬다는 건 거짓말일 것이었다. 둘이 오고 싶었지만 둘만 오긴 애매해, 어쩔 수 없이 내 몫까지 세 장을 예매하고 마지못해 같이 가자 한 것이겠지. 눈치 없는 내가 봐도 박찬열의 행동은 티가 나도 너무 났다.
"고등학생을 상대로 작업 거는 것 같아요."
"작업?"
"네, 작업."
"음, 종인아. 나 지금 네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
"왜이리 삐딱하게 생각하지? 첫 날부터 느꼈던 건데, 종인이는 나를 너무 싫어하는 것 같아."
"자꾸 종인이, 종인이 하지 마세요. 저 유치원생 아니거든요."
박찬열이 싫은 이유들 중 하나는 바로 저 말투였다. 쌤이 맛있는 거 사줄게. 종인이는 내가 싫구나? ○○이는 무슨 영활 좋아해? 굳이 주어를 넣어 말하는 저 말투가 너무나도 싫었다. 물론 문장성분 중 주어는 중요한 것이므로 빼먹어선 안된다고 배우긴 했지만, 굳이 저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역시 언어 전공이라 그런진 모르겠지만, 박찬열은 우리말에 대한 철칙과 규정을 끔찍이 지키고 있는 듯했다.
"종인아,"
"네."
"○○이 좋아해?"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예민한 질문을 던져놓고도 박찬열은 웃고 있었다. 분명 기분이 상할법한 미소는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내가 웃겨? 우스워? … 어쨌든, 저런 건 왜 묻는 건지 모르겠다.
좋아하는 건…
"아니요."
"그럼 아예 관심을 끄면 되잖아."
"저 원래 쟤한텐 오지랖 넓어요."
가만히 내 대답을 듣고만 있던 박찬열이 작게 소리내 웃었다. 그리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금 입술을 떼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하하, 오지랖?"
"……."
"안 좋아한다면서 왜 오지랖은 넓은 건데? 너 지금 말의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
내가 국어에 취약하다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역시 언어 전공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말의 앞뒤가 다르면 뭐. 앞뒤가 잘 맞게 고쳐주던가.
과외선생과 제자로서의 사이가 맞는 것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고작 네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선생과 제자 사이보단 동네 형과 동생 사이가 더 적합해 보였다. 그러나 선생과 제자 사이든, 형과 동생 사이든 그게 그거였다. 어느 하나 더할 것 없이 똑같이 싫었다. 그냥 박찬열이라는 사람과 엮이는 것이 싫었다. 처음부터 그냥 마음에 안 들었던 박찬열은, 날이 지나고 지나도 쭈욱 한결 같았다. 고작 네 살 많다는 이유로 나를 애 취급 하는 것도 기분이 나빴다. 아, 그냥 다 싫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진짜 개미 똥만큼도 찾아낼 수 없는 놈이다. 그냥 다 싫어, 씨발.
*
혹여나 하나라도 흘릴세라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팝콘 가장 큰 사이즈 하나와 콜라 두 개. 콜라 하나엔 빨대를 두 개 꽂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김종인이라도 데려와서 같이 짐을 드는 건데…. 손이 모자르긴 했지만, 간신히 그들이 기다리고있는 장소에 닿을 수 있었다.
"고생했네. 나 부르지 그랬어."
"네? 아니에요. 나름 들고 올 만했어요."
멋쩍게 웃으며 빨대가 하나 꽂혀있는 콜라를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 곧이어, 빨대가 두 개 꽂힌 콜라를 멍하니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리던 김종인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왜 나는 콜라가 따로 없어?"
"돈이 부족해서 하나는 못 샀어. 왜? 너 부족해? 그럼 너 다 마셔. 난 별로 안 마실 것 같아."
그저 얼떨떨하단 표정을 지은 채 대답을 아끼던 김종인이 제 휴대폰의 홀드를 열었다. 그러나 버튼을 몇 번이나 눌러보아도 반응이 없는 휴대폰에, 그제서야 배터리가 나갔다는 사실을 인지한 건지 녀석이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쏘옥 집어넣었다.
"슬슬 가볼까?"
팝콘과 콜라를 양손에 든 채 그가 말했다. 이 시간대에 보는 영화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
상영관이 가까워져 올수록 알게 모르게 걸음이 빨라지는 것 같던 김종인이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분명 녀석의 자리는 가장 오른쪽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녀석은 맨 오른쪽 자리가 아닌 바로 그 옆자리에 털썩 앉는 것이었다.
"내가 가운데 앉으려 했는데…."
"나처럼 행동이 빨라야지."
하는 수 없이 녀석의 오른편에 앉았고, 자연스레 김종인의 왼편엔 그가 앉게 되었다.
하필 콜라의 빨대를 두 개 다 같은 색깔로 가져와 어떤 빨대가 내 것이고, 또 어떤 빨대가 김종인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을 듯했다. 아직 입도 대지 않은 빨대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하나를 잡아 윗부분을 이로 살짝 깨물었다.
"뭐해?"
"빨대 잘 구분할 수 있게 하려고."
"구분?"
"씹어놓은 게 내꺼야. 멀쩡한 게 네꺼고."
"좀 섞이면 어떻다고 그걸 그렇게 씹어놔. 대충 먹지."
녀석이 툴툴거리듯 말하곤 콜라를 한모금 마셨다. 곧이어 상영관 안이 어두워졌고, 약간 소란스럽던 주변도 금세 조용해졌다.
*
영화는 대충 그러한 내용이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도 좋지 않아, 그러한 과거를 모두 잊은 채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개척해나가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슬프고 아련한 영화였다. 액션 영화도, 공포 영화도 아닌 잔잔한 분위기의 영화라 김종인이 졸면서 보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예상 외로 녀석의 눈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뜨여있었다. 그게 조금은 기특해 영화 중간에 녀석을 툭툭 치곤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그러자 녀석은 방해하지 말라며 은근히 타박 아닌 타박을 줬었다.
집 방향이 아예 다르다던 그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뗐다. 조심해서 가라며 계속해서 당부를 하던 그의 모습이 저 멀리 사라졌고, 이제 김종인과 나, 단 둘만 남게 되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작게 하품을 했다. 영화를 보고나니 시간이 꽤나 많이 흐른 듯했다. 집에 가자마자 씻고 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영화의 여운이 남아 쉽게 잠들진 못할 것 같지만….
"영화 재밌었지?"
"나름."
"나름이 뭐야, 나름이. 재밌었다면 그냥 재밌었다 해."
"재밌었어."
"명대사는 뭐였다고 생각해?"
"…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기억해."
… 하긴. 나도 기억 못해. 어설픈 내 대답에 김종인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다 문득 녀석을 비롯한 나에게 궁금한 점이 하나 떠올랐다. 실제로 일어날 리 없는 가상의, 정말 만약의 일이었지만….
"종이야."
"응?"
"… 아,"
"……."
"……."
"왜. 불렀으면 말을 해."
내가 부르면 항상 무뚝뚝하게 답하던 녀석의 대답이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녀석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별명으로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김종인은 평소와는 다른 말투로 대답을 해주었다. 정말 별거 아닌 사소한 것이었지만, 그게 다른 사람이 아닌 김종인이었기에 특별하게만 느껴졌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넌 행복했던 때로 돌아갈래, 아님 불행했던 때로 돌아갈래?"
뜬금없는 내 질문에 녀석이 살짝 고민을 해보였다. 대부분 전자를 택하듯이 김종인도 전자를 택할 것 같았지만, 워낙 속마음을 예상할 수 없는 녀석이었기에 그 답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불행했던 때로 돌아갈래."
"왜?"
"불행했던 때로 돌아가서, 내 노력으로 뭐든 바꿔놓고 싶어."
"… 아,"
"그럼 미래가 행복해지지 않을까."
"… 그렇겠지."
"사람은 언제까지고 행복한 현실에만 안주하며 살 수 없어."
저런 생각을 했을 줄은 전혀 몰랐는데…. 김종인은 알고 보면 속이 참 깊고 생각이 많은 녀석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인 것 같았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조차 귀찮아서 일차원적으로만 생각을 하고 말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럼… 너 만약에, 과거의 기억이 모두 리셋 되어버리면 어떡할 거야?"
"왜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해."
"아, 그냥 궁금해서. 어떻게 할 거야? 가장 먼저 뭘 할래?"
녀석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욱 찡그려졌다. 이번엔 꽤나 오래 고민을 하는 듯했다. 물론 내가 그런 질문을 받았더라도 녀석과 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이 모두 사라져버리면 가장 먼저 뭘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힐 거야….
"놀이터나 갈래."
"웬 놀이터?"
"그냥. 놀이터 가서 너 만날래."
"… 뭐라고?"
"왜."
"… 내가 놀이터에 있는지 어떻게 알고?"
"어렸을 때 너 맨날 놀이터 출석체크 했잖아. 왠지 과거가 리셋 돼도 넌 거기 있을 것 같아."
"……."
"아, 근데 왜 자꾸 이런 걸 물어? 너 어디 멀리 떠나냐."
꽤나 진지하게 묻는 녀석에 살짝 고개를 젓곤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런 이상한 질문 좀 그만 하라며 녀석이 온갖 짜증을 냈다.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귀여워 계속 웃기만 하다 문득 떠오른 의문에 급히 웃음을 지우곤 녀석을 바라보았다.
"근데, 놀이터에서 나 만나면 뭐하게?"
"그건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아…, 그게 아니라. 음…, 왜 놀이터에서 날 만날 거라 했어?"
"일단, 너 놀려먹는 게 내 취미고 특기고 자랑거리고…"
"… 난 그냥 놀잇감이라는 거야?"
"따지고 보면 그래."
순식간에 김이 팍 새는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약간의 짜증도 치밀어 녀석의 등을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아프다며 그만 때리라고 소리치는 김종인이 정말 미웠다. 대단한 대답을 바랐던 건 아니지만서도 괜히 서운했다. 놀잇감이라니…. 내가 김종인의 놀잇감이라니…. 난 김종인의 놀잇감….
"너한테 이런 걸 물은 내가 잘못이지."
괜히 서운해 더욱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실 집까진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기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어째 맨날 당하는 것만 같았다.
*
씻고 나와 잠들기 전 휴대폰을 확인했다. '김종인새끼'라는 이름으로 문자 메시지 네 통이 도착해있었다. 왠지 확인하긴 싫었지만 나도 모르게 손가락은 메시지를 꾸욱 누르고 있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삐순이네 삐순이]
[미안. 농담인 거 알잖아]
[ㅋㅋㅋㅋㅋㅋ 어쨌든 잘 자. 삐순아 ♡]
[아 미안. 하트 잘못 보냄]
역시 확인하지 말 걸 그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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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실 이른 저녁 쯤에 글을 올리려 했는데... 반 정도 넘게 써뒀던 글이 증발을 해버렸지 뭐예요..^^* 와.. 정말 그때의 그 감정은.. 아.. 정말 힘들더라구요.. 썼던 글을 다시 똑같이 쓴다는 건 정말... 마침 오늘 글잡 구독료도 무료라 빨리빨리 오고 싶었는데... 이런 말을 하는 시간도 아까우니 이만 줄여야겠네요!
+) 아주 잠깐이었지만 초록글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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