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눈 사진만 올리는 건 2007년~2010년, 중학교 때 까지 입니다. 아무래도 중학생 때는 지금 엑소 애들 사진이랑 차이가 많을테니까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더니, 서로 알기 전까지는 한 번도 마주칠 일이 없던 도경수와 동아리 시간을 제외하고도 꽤 자주 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과 말 뿐이던 시간을, 너도 그리워 할까.
그 어린, 미숙한 시간을 지나
교복 자락에 늘 종이 냄새가 나던 도경수와 다시 만나게 된 건 2015년, 같은 대학의 도서관이었다.
도서관도경수
[ 2007년 4월 ]
도경수와는 매주 월요일 동아리 시간에 만나는 게 다였다. 그나마도 책 정리나 독서 활동을 해서 말할 기회가 없었다.
그 쯤에 김민석이 소개 시켜준 3학년 선배와 친해졌다. 김준면, 운 좋게도 도서부장과 친해진 나는 수월하게 도서부에 적응할 수 있었다.
5교시는 반납 도서들을 정리하고, 6교시는 독서활동을 했다.
30명 남짓되는 학생들이 도서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으니 들리는 건 책장 넘어가는 소리 뿐이었다.
월요일의 봄햇살은 지독히도 따듯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몇몇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사서선생님 눈치를 보며 소근소근 수다를 떠는 아이들도 있었다.
멍해지는 정신에, 넘어가지지 않는 문장에 애를 먹고 있는데 손바람이 불었다. 대각선 앞에 앉은 준면선배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ㅇㅇ아, 이번 주 도서실 담당하는거 니 맞제?"
"예?"
"순서 짜놓은 거 제대로 안보나? 니 이번주 화,수,목에 도서실 점심 담당이다."
"아, 감사합니다."
김준면은 왠만한 서울 도련님 못지 않게 생겨서는,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 말투라는 말투는 다 쓰고 있었다.
저 얼굴로 나긋나긋하게 서울말을 했으면 왠만한 여자애들 다 죽었다 싶었다. 어쨌든 내 걱정은 무색할 정도로 김준면은 잘생긴 얼굴로 학교에 소문이 자자했다.
가끔 복도나 운동장에서 단정한 교복을 입은 김준면을 마주하면 설렘과는 다른 동경의 감정이 일었다.
내일부터 점심시간 때 같이 활동해야 할 도경수에게 말이나 걸어볼까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니니 나와 거의 끝자리에 앉아 미동도 없이 책만 읽고 있는 도경수가 보였다.
애초에 눈짓, 손짓으로 부를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동아리 시간이 끝나고 말을 걸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몇 분 후, 나는 결국 졸기 시작했다. 흔들어 깨우는 준면선배 덕분에 깼을 땐 도경수는 이미 교실로 돌아가고 없었다.
동아리 활동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오니 옆자리에 앉은 김민석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솔직히 준면이형 잘생겼제?"
"어."
"그게 다가? 와. 내가 소개시켜 준건데? 고마워 안하나?"
"어."
"나쁜 기집애."
"어ㅋㅋㅋㅋㅋ"
"닌 어 밖에 못하나?ㅋㅋㅋ 근데 준면이형 니보다 천배 이쁜 여자친구 있으니까 딴 맘 가지지는 말고."
"헐 대박. 내가 여친 있을 줄 알았다."
"니 설마 진짜 반한거가, 형한테."
"아니. 내 그래 생긴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가시나..까다로운 척 하지마라."
"ㅋㅋㅋ진짜라고."
"어..니 카면 어에 생긴게 좋은데?"
애초에 어설픈 질문이었다. 김민석은 종종 내게 저런 질문을 했다.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아이들은 유난히 이성에게 가벼웠다. 그래서 오히려 날카로울 때도 있었다.
나 역시 남자애들과 장난치고 노는 것 보다, 은지와 반 남자아이 중에 누가 괜찮은지 이야기 하는게 더 흥미로운 과도기를 지나고 있었다.
쉽게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도경수.
순간 떠오르는 건 도경수였다.
"나는..어..니 같이만 안생기면 다 좋다 ㅋㅋㅋ"
솔직할 수 없어 돌려말한 내 장난에 왠일인지 김민석이 웃질 않았다.
하도 멍하니 내 눈만 바라보기에 민망해서 장난이라고 어깨를 툭툭 쳐줬더니 그제서야 내 말을 맞받아치며 웃었다.
"나도 니 같이 무뚝뚝한 기집애 딱 싫다. 아오ㅋㅋㅋㅋㅋ"
김민석의 말에 아무렇지 않았다. 내일 점심 때 도경수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축구부라 두 시간 가까이 운동장을 뛰고 왔을 김민석에게 땀냄새가 나지 않았다. 여러모로 참 묘한 순간이었다.
다음 날, 은지에게 이번 주만 김민석, 김종대와 급식을 먹으라고 부탁했다. 김민석이 울상인 은지를 끌고가며 다 먹고 도서실에 놀러온다고 말했다.
평소에 책 한자 안 읽는 놈이 어지간히 오겠다 싶었다. 급식우선권으로 밥을 먼저 받아 먹었다. 도경수는 어떻게 된건지 급식실에 보이지 않았다.
밥을 안 먹고 올 생각인지, 아니면 오늘부터 자신이 점심에 도서실을 지켜야 하는 걸 모르는건지 걱정이 됐다.
다들 한참 배식을 받고 있을 시간이라 도서실은 조용했다. 도서실 점심 개방시간이 10분채 남지 않았는데 복도는 조용했다.
혼자 컴퓨터를 켜고 오전에 정리하지 않은 듯한 반납도서를 정리했다. 책 분류번호가 헷갈려서 책장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갱~ 어딨냐?"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휘적휘적 도서실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책장 사이로 보니 가끔 도경수와 복도에서 마주칠 때 옆에 서 있던 남자애였다.
'아, 도갱이 도경수구나.'
어색하게 걸어나가자 나를 본 남자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도경수 아직 안왔는데ㅎ.."
눈매가 무서웠다. 눈 큰 도경수는 친구들도 눈이 다 큰건가.
"아, 이 새끼 바로 도서실 간다 했는데."
나한테 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혼잣말을 내뱉더니 그대로 멀뚱히 서있었다. 끼리끼리 논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다지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멀리서 점심을 먹고 도서실로 오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애를 지나쳐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학생들이 조금씩 들어왔다. 신축한 별관의 도서실은 꽤 아늑하고 편해서 인기가 많은 듯 했다.
모두가 책을 빌리러 온건 아닌지 책장으로 향하는 몇을 빼고는 대부분 편한 의자에 앉아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할 일이 없었다.
애꿎은 컴퓨터 자판기만 톡톡 두드리며 도경수가 오지 않는 이유가 뭘까 궁금해했다.
누군가 앞에 서서 고개를 들었더니 도경수 친구였다.
"저기.."
"?"
"도갱..아 아니 도경수 이새끼 아 아니 그러니까"
"?????"
"늦는거 같은데, 나라도 도와줄까?"
"아."
'어쩌지..할 일이 없는데..'
애써 말을 건 것 같은데 괜찮다고 하기도 뭐한 분위기였다.
"지금은 할 일이 없는데.."
내 말에 남자애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민망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을 걸었다. 주제는 당연히, 도경수였다.
"저번에 도경수가, 너랑 변백?이라는 애한테 사투리 옮았다고 그러던데. 친해?"
남자애는 내 말에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어. 도경수랑 친하다. 근데 니 내 이름 아나? 그게 나란거 어에 알았는데."
"니 명찰 보니까. 저번에 도경수가 박찬이랑 변백이라 그랬거든."
"기억력 좋나보네."
박찬열이 순간 내 명찰을 보는 게 느껴졌다.
"김ㅇㅇ? 아. 니 10반이가?"
"헐. 내 아나?"
"아니. 나 김종대랑 아는데 니 이름 들어봤다."
" 아 김종대 ㅋㅋㅋ"
"니 기억력 좋으니까 내 이름 한 번에 외우겠네."
뜬금없는 질문에, 나도 잔잔하게 답했다.
"응, 박찬열."
동시에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박찬열과 함께 눈을 돌린 곳에 도경수가 서 있었다.
박찬열이 도경수에게 다가가 헤드락을 걸었다. 대충 대사는 '야 이새끼야 어디갔었는데 미친놈아.' 이런 식의 비속어였다.
도경수가 박찬열의 손을 풀어내더니 멍하니 보고 있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늦어서 미안."
그게 다였다.
잠시 뒤 은지와 종대를 끌고 김민석이 도서실로 들어왔다. 의외로 다들 조용히 있었다. 도서실이라서 그런가 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김민석이 아니었다.
김민석은 나란히 앉은 나와 도경수를 관찰하듯이 쳐다보다가 눈짓으로 내게 장난을 쳤다. 평소대로 무시하니 가까이 다가와 내 볼을 잡아 당겼다.
꼬집힌 볼이 아파 눈물이 났다. 은지와 종대는 뭐가 재밌는지 계속 웃었고, 박찬열도 은근히 그 사이에 끼여 있었다.
빠져있는 건 도경수 뿐이었다.
김민석과 손장난을 치는데 책 대출을 받기 위해 학생들이 다가왔다.
그제야 여기가 도서실임을 인지한 김민석이 은지와 종대를 끌고 도서실 구석 책상으로 갔다. 친하다는 게 맞는지 김종대가 박찬열을 함께 데려갔다.
나와 도경수는 말 없이 책 대출만 했다. 그마저도 학생들이 없으니 둘만 앉아 있는 자리는 정적이었다.
"왜 늦은건데?"
먼저 물었다. 박찬열처럼 대답이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담임이 갑자기 불러서.."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그게 다였다.
"박찬열이 너보고 도갱이라던데."
"아 그거 별명.."
짜증이 났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그래서 도경수 같은 부류가 싫어할 것 같은, 가까운 척을 했다.
"나도 그렇게 불러도 되나?"
"?"
"니랑 빨리 친해지고 싶어서."
"아. 응."
의외로 괜찮다고 하는 도경수였다. 그 다음 말이 내 오해를 풀었다.
"네 별명은 뭔데?"
"뭐?"
"니가 나 도갱이라 부르니까 나도 네 이름말고 별명불러야 되는거 아니야?.."
도경수는 일기를 쓸 때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종일 무엇을 했는지 시간 단위로 적어내려가는 사람처럼 딱딱했다.
도대체 박찬열 같은 애랑 어떻게 친해졌나 싶을만큼. 무슨 행동을 하면, 구체적인 의미부여가 필요한 듯 했다.
처음부터 살짝 꼬여있었던 건 내 생각이 아니라 도경수의 성격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아.."
"됐고 이제 나보면 먼저 인사하고, 먼저 말 걸어라? 약속해라. 어?"
지금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할 대사를 나는 도경수에게 잘 뱉어냈다.
상대방 보다 먼저, 상대방의 성격을 파악했다는 일말의 자신감은 그렇게 우리를 친하게, 또 멀어지게 만들었다.
+)
헐 실수로 덜썼는데 올렸다가 다시 지웠다가 난리였네요..
매일 1~2편 씩 올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