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독방에 썼던 조각글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요. 둘 다 제가 쓴 거니까 오해하면 안되여 헿)
(배경음악 꼭 같이 들어주세요 하트)
문예창작학과에 온 건 순전히, 도경수가 나에게 읽어 준 시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글만 썼다. 전공도 글을 쓰는 과로 갔다. 이유는, 네가 그 곳에 있을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너는 나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렇게 전해 들었다. 박찬열에게. 우리의 관계는 이미 끝나버린 문장이었다.
너와 나의 문장이 다시 시작된 건, 스무살. 네가 내 손에 쥐어준 시집이 꽂혀 있던 책장 앞이었다.
도서관도경수
중학교 3학년 때, 기억이 나는 건 도경수의 뒷모습 뿐이었다. 같은 반도 아니고 도서부마저 그만두니, 가뜩이나 잘 돌아다니지 않는 도경수와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2009년의 나는 도경수에게 전화번호를 물어서 연락을 한다던가, 주말에 같이 놀자고 할 만큼의 관계조차 되지 못했다. 친구도 아니었다.
어린 내가 가지고 있던 건, 박찬열이 내게 가지는 감정과 내가 도경수에게 가지는 감정이 같다는 확신 뿐이었다.
직접 마음을 고하긴 커녕, 박찬열처럼 손을 잡거나 빤히 쳐다본 행동조차 한 적이 없는데, 도경수는 나를 피했다.
내가 박찬열의 마음을 모른 척 하는 것처럼, 도경수도 나를 밀어내는 것인지 궁금했다. 미치도록.
피하는 도경수에게 먼저 말을 걸던 것도, 어느 순간 시작된 사춘기와 함께 그만두었다.
혼자 좋아하기 시작하고, 혼자 자존심에 끝내버린 짧고 멍청한 짝사랑이라고 생각했다.
*
비가 오는 날이었다. 중학교 3학년의 막바지, 배정받을 고등학교도 동네의 몇 군데로 확정이 나있던 터라 수업에 별 흥미가 없었다.
날씨 때문에 밖이 어두웠고, 하필 졸리기로 유명한 국사 선생의 목소리가 젖은 교실 벽면을 낮게 치고 있었다.
"야 깨라. 쌤이 니 본다. 쫌."
한참 조는데 김민석 목소리가 들렸다.
"ㅎ..국사쌤. 김ㅇㅇ 못 일어나는데요?"
"김ㅇㅇ이, 안 깨나?"
그리고 잠결에 들린 국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중립외교와 갑신정변 대신,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서 깨어나니 모두가 졸린 수업의 흐름을 깨준 내게 집중하며 웃고 있었다.
"김ㅇㅇ이, 내 수업 때마다 그렇게 잠이 오나?"
"죄송합니다..쌤..ㅠㅠㅠ"
"됐다. 니는 벌 함 받아야 잠이 깨제. 오늘 수업 다 끝나고 교무실로 온나."
"아..쌤..사랑해요."
"늦었다. 자 다들 집중해라. 아까 어디까지 했나?"
"잠탱이ㅋ"
'아, 저 개새.."
얄미운 김민석을 향해 손가락욕을 날리다 문득, 늘 잠탱이, 꼬맹이라고 불러대던 박찬열이 떠올랐다.
박찬열은 이렇게 순간순간 떠오르곤 했다.
3학년이 되고 운 좋게도 1학년 때처럼 김민석, 김종대 그리고 은지와 같은 반이 됐다. 가장 안도했던 건 박찬열과 다른 반이라는 것이었다.
박찬열의 반은 다른 층에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복도나 급식실에서 자주 마주쳤다. 아, 신기한게 아니라 박찬열이 나를 좋아했기 때문임을, 나도 알고 있었다.
마주치면 언제나처럼 잘 지냈다. 그렇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장난도 치고 여전히 기억에 남지 않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박찬열은 내 번호를 알아가서, 종종 '뭐해?' 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주고 받은 문자 역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뭘 웃어."
"그러게 왜 그 쌤 수업 때 졸고 난리 ㅋㅋㅋㅋ"
"..하.."
"그래서 수업 끝나고 도서실가서 책정리 한다고? ㅋㅋㅋㅋㅋ"
"심지어 역사 책정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좀 도와줄래 민석아?ㅎ"
"나 집 간다. 내일보자. 김ㅇㅇ"
김민석은 정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집에 가버렸다. 은지와 종대도 마찬가지였다.
자는 걸 절대 봐주지 않는 역사쌤의 수업시간에 졸아버린 내 탓이었다.
교무실에 가서 정리해야 할 책 목록과 도서실 열쇠를 받았다. 도서실이 있는 별관으로 가는 길에 나는 비 냄새가 좋았다.
도서부 때문에 처음 이 길을 걷던 날 피어있던 벚꽃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렇게 비가 왔던 작년, 도경수와 도서실을 가던 기억이 났다.
여름이었고, 장마철이었다. 양말이 물에 젖지 않도록 보폭을 좁게 걸으면서도 나는 도경수가 관심을 가질 대화 주제를 찾기 위해 열심히 떠들었다.
도경수는 내 목소리보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더 신경을 쓰는 것처럼, 대답이 짧았다.
간간히 떠오르는 민망한 짝사랑의 기억은, 그다지 좋은 추억이 아니었다.
도서실에 들어가기 위해 교복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드는데 반쯤 열린 문이 보였다.
'..?"
사서 선생님이 문을 안 잠그고 나가신건지, 실내의 불은 다 꺼져 있었다. 오후의 비라 그런지 창가 쪽이 밝아 무섭지는 않았다.
도서실에서 혼자 빗소리를 듣는 것도 꽤 낭만적인 일이라고 위로하며 책을 찾기 위해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책장 쪽에서 인기척이 들린 순간,
그게 도경수라는걸 깨달았다. 소름끼치는 직감이었다.
내 발걸음 소리에 도경수가 책장 밖으로 걸어 나오는 걸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
둘 다 말이 없었다. 늘 먼저 말을 걸었던 나는 더더욱,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도경수를 정면으로 바라본 것 부터가 너무 오랜만이었다. 심장이 정말 놀랐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못 본 사이에 도경수는 키가 컸고, 더 이상 품이 넓은 교복을 입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놀랐던 건, 먼저 말을 건 도경수의 목소리가 내가 알던 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늘 내 질문에 수줍게 대답하던 얇은 소년의 톤이 사라지고, 낯선 저음의 목소리가 귀에 울리니 놀랄 수 밖에.
"..김ㅇㅇ?"
"..."
"이 시간에 도서실은 왜 온거야?"
"..."
도경수와 내가 처음 마주 했을 때와 같은 장소에서, 끊임없이 질문하던 나와 고개만 끄덕이던 도경수의 역할이 바뀐 게 웃겼다.
그러나 웃을 수 도 없었다. 이미 굳어버린 나 때문에 한참 정적인터라, 말을 꺼내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도경수는 아무렇지않게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손에 들려있는 종이를 가져 갔다.
"역사 책 정리하러 왔어? 너.. 역사시간에 졸았지?.."
'헐..'
하필, 그렇게 시작되었을까. 일 년 가까이 끊겼던 대화가.
"김ㅇㅇ. 놀랐어?"
"...어."
"놀랄 건 뭐야. 난 도서부고. 넌 아닌데. 오히려 내가 놀라야 하지 않나?"
"아..어.."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뀐 저음의 목소리가 조금 익숙해지려하니, 적극적으로 변한 도경수의 행동이 낯설게 다가왔다.
도경수가 멍하니 서 있는 내게, 자신을 따라 오라고 했다. 따라가면서 본 도경수의 뒷모습은, 늘 봐왔던 것 임에도 무언가 달랐다.
동글동글하다고만 생각했던 뒷통수도, 자신의 별명을 부를 때마다 수줍게 쓸어내리던 뒷목도, 처음 보는 것 처럼 생경했다.
"역사책은 여기 다 있어."
"..나도 알아.."
"아, 맞다."
도경수는 짧게 웃으며, '너도 도서부였지'라고 중얼거렸다.
순간 느껴지는 건, 나만 바보가 된 것 같은. 씁쓸함이었다.
도경수는 나를 피했던 지난 몇 개월을 잊은 듯,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잘도 말을 내뱉었다.
"알아서 할게. 넌 니 할일 해."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도경수는, 예상대로
"아. 그래."
라고 했다. 도경수는 다시 원래 있던 책장으로 돌아갔다. 눈으로 쫒으니 시집이 꽂혀잇는 곳이었다.
*
책 정리는 쉬웠다. 도서부에서 활동했던 경력도 있었지만 애초에 어려운 일을 시키지 않은 것 같았다.
도서실은 조용했다. 방금 도경수와 대화를 나눈 게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인기척이 없었다.
간간히, 느리게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지금 도경수와 함께 있구나 싶었다.
김민석과 장난을 치다 사물함에 뒤통수를 박았을 때처럼, 온몸이 찌릿하고 정신이 먹먹했다. 정말, 도경수한테 한 대 쎄개 맞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새롭게 다시 한 번 밀려난 느낌이었다. 차라리 얼마 전처럼 피해다니는 것이 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금의 도경수는 낯설었다.
말 없이 나갈까하다가, 그러기엔 무언가 억울해 도경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시집 한 권을 들고 책장과 마주보고 서 있는 도경수였다.
빗소리를 제외하고는 아주 조용했던 터라 내 발걸음 소리가 안 들렸을리가 없는데도, 녀석은 미동도 없었다.
"도경수"
고개를 드는 속도가 꽤 느렸다.
"다했어?"
"어."
"왜?"
왜라니? 도경수는 정말 나와 할 대화가 없어보였다. 지금 밖으로 나가면, 영원히 말을 걸지 않을 사람처럼.
그래서 오기로라도 말을 붙였다. 자존심을 생각할 때를 지난 것 같았다.
"집 안가고 도서실에서 뭐하는데?"
"선생님한테 허락받고 매일 이 시간에 도서실 와. 꽤 됐어. 몇 달 정도."
"왜?"
라고 하자 도경수가 시집을 흔들었다.
"이거. 집에 있는건 다 읽어서."
"너 시집 좋아해?"
도경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녀석은 늘 저렇게 대답했는데, 지금은 저 끄덕임이 귀찮다는 의미인지 고민하게 생겼다.
"무슨 시 읽어?"
"같이 볼래?"
녀석은, 정말 달라졌다. 같이 볼래? 하고 고갯짓을 하는 모습에 해탈할 지경이었다.
'매일 밤 나는 눈을 감으면서 세상이 감기는 걸 느끼지 / 이렇게 간단히 세상이 바뀌는 걸 뭐
나는 오래간만에 눈을 뜨니까 매일 어리둥절해 / 그리고 눈꼽처럼 떼어놓아야 할 게 있다고 느끼지'
"이런 시가 이해가 돼?"
"그냥, 뭐 여러번 읽다보면?"
"읽으면 무슨 생각이 드는데."
"말해주기 싫은데."
'와. 내가 알던 도경수 맞아?'
"야. 박찬열이 너보고 성격 바꼈다고 안그래?"
박찬열의 이름이 나오자 도경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를 보는 눈이 매서웠다.
"아니..그게,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 아닌데.."
"기분 나쁜거 아니야."
"그러니까.. 너 예전에 나 보면 막..말도 잘 못하고.. 부끄러워하고.."
"야 김ㅇㅇ."
도경수의 낮은 목소리가 유난히 떨렸다.
"어?"
"나 지금도 충분히 부끄러운데."
"..."
"아닌 척 하는거야."
+)
하루에 1~2편 쓰겠다고 약속해놓고 자정 땡하고 올리네요 ㅠㅠ
댓글 너무 고마워요 ㅠㅠ 내 하트 받아요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