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날은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이른 아침이기도 해서 그런지 날이 쌀쌀해서 겉에 입은 코트를 더욱 여미며 준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가방을 툭 치는 손길에 세훈이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얼굴이 웃고 있었다. 원래 준면이가 나보다 작았던가? 문득 자신이 준면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세훈은 멍하니 준면의 웃는 얼굴을 보고만 있었다.
“안 갈 거야?”
“아, 아니. 가야지.”
“어우 야, 근데 넌 춥지도 않아? 감기도 잘 걸리는 애가 목 훤히 드러내놓고.”
“겉옷 입었잖아.”
“겉옷만 잘 챙겨 입으면 뭐 해, 가만히 서 봐. 목도리 둘러줄게.”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준면이 세훈을 멈춰 세우더니, 제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서는 까치발을 들고서 세훈의 목에 꼼꼼히 둘러주었다. 세훈은 제 목에 둘러지는 목도리에 가득 묻은 준면의 체향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목도리를 둘러준 준면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멀어졌음에도 세훈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제 가자.” 제 팔을 툭툭 치는 준면으로 인해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심장이 유난히 빨리 뛰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준면의 목덜미에 세훈은 또 다시 눈앞이 아찔했다. 괜히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세훈은 오늘따라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 더 잘 들어오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2.
세훈은 하루 종일 눈앞에 준면의 하얀 살결이 그려져 정말 죽을 맛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봐오던 사이였는데, 불과 어제만 해도 의식하지 못 했는데 오늘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세훈은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엎드렸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눈을 떠도 보이는 환영과 함께 동반하는 심장의 떨림에 세훈은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도통 수업시간에도 집중이 되지를 않아 세훈의 주변에선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냐며 묻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차마 친구의 하얀 피부를 보고난 뒤에 자꾸 생각나서 그런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어서 세훈은 그저 어색한 미소로 일관하며 괜찮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도무지 수업에 집중이 되지도 않고, 어차피 한 학년을 마무리 하는 시기라서 별다른 수업을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세훈은 건조한 표정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2층에 자리하고 있는 교실 탓에 운동장이 꽤 가깝게 보였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열정이 가득한 체육 선생은 기어이 운동장으로 학생들을 나오라고 한 것 같았다. 여자애들은 계단에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남자애들은 축구를 하려는 모양인지 편을 가르고 있었다. 곧 시작될 것 같은 모양새에 경기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세훈은 교단 앞에 앉아 있는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고는 아예 몸을 틀어 창문 쪽으로 붙어 앉았다.
“어.”
무리 중에 유난히 피부가 하얀 사람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줄곧 자신을 괴롭히던 주인공 준면이었다. 준면 역시 세훈을 발견했는지 양 손을 붕붕 흔들며 인사를 했다. 세훈은 멍하니 보고만 있다가 겨우 손을 들어 인사를 해주었다. 세훈의 눈에는 이미 주변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준면이 혼자만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3.
세훈은 점점 커지기만 하는 제 마음을 부정하려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보았지만 그래도 끝내 눈에 들어오는 건 준면이었다. 한시도 제 눈에서 벗어나면 불안하기만 해서 세훈의 눈은 준면에게로 고정 된지도 오래였다. 준면이 모르게 세훈은 준면을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면 진지하게 들어주는 척만 하고 가차 없이 안 될 것이라는 말로 막아내곤 했었다. 준면에게 가진 마음을 억누르면서도 준면을 좋아한다는 여자애들이 나타나면 무조건 막고 보는 제 자신의 이중성에 괴롭기도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준면 역시 자신을 좋아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훈의 눈에 준면은 뭘 하든 다 사랑스럽게만 보였고, 가끔 밤새 준면의 얼굴을 그리다 제 멋대로 엇나간 생각으로 인해 민망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준면의 곁에 자신만 있게 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것도 힘들어 질 것을 생각하면 그저 한숨만 나왔다. 가끔은 이 마음을 고백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혹시나 잘 못 돼서 틀어질 관계가 더 두려웠다. 그때는 한 없이 바라보지도 못 할 것이라는 생각에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사랑 고백은 밤하늘 하나의 공기로 흩어졌다.
4.
제 고백에 뒷걸음질 치더니 끝내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요한 골목길에 외로이 서있는 가로등 밑 제 자신이 처량했다. 지난 시간 동안 말하지 못 했던 진심을 말할 수 있어 후련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조금은 틀어지는 계기가 될 것만 같아 씁쓸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 어쩌면 더한 감정싸움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밤공기에 흩어지는 한숨과 함께 세훈은 앞으로 고생할 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기로 했다.
전처럼 행동하겠다는 말을 지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습관처럼 준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려 하면 지레 겁을 먹고 먼저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준면이 자신을 부담스럽게 여기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컸다. 그냥, 제 마음을 고백한 이후부터 세훈은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저 준면이 조금이라도 부담스럽다는 느낌을 받으면 모든 게 다 어긋나버릴 까봐, 단지 그 뿐이었다.
울지 마, 제발. 나도 울고 싶은데 네가 먼저 울어버리면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서 미치겠어.
5.
나는 너와 처음부터 친구가 아니었는데 어떻게 친구가 되자고 할 수가 있어. 김준면 너도 정말 이기적이야. 왜 한 번 쯤 돌아볼 생각해보지도 않는 건데, 한 번만 지난 우리의 시간을 돌아 봐. 내가 얼마나 널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 얼마나 네 곁에서 이 마음을 아주 조금씩이라도 보여주려 노력했는지, 한 번만 돌아보면서 생각해달란 말이야. 그렇게 생각한 뒤에도 친구가 되고 싶다면, 그래.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널 위해 기꺼이 친구가 될게. 그렇지만 그게 아니니까, 난 너랑 친구할 수 없어 준면아. 충분히 생각하고 생각해서 내뱉은 고백이야, 그러니 너도 충분히 생각하고 생각해.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다 하지 않아도 똑똑한 준면이니까, 충분히 알아 줄 것이라 생각했다. 모든 것을 다 돌아보고 충분히 생각해고 생각한 준면이 머지않아 무엇이 되었든 결과물을 들고 올 것이라고, 세훈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세훈아, 우리 이제… 친구 같은 거 그만 하고, 연인 하자.”
그래, 얼마 안 가 이런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또 믿었다.
드!디!어! 정말 커쓰의 완결입니다...! 이제 커쓰를 끝으로 이 필명을 쓸 일은 가족의 비밀과 커쓰 텍파를 올릴 때를 제외하고는 없을 것 같군요! 새로운 글의 제목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로, 현빈과 임수정 주연의 영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를 모티브로 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세준인데 서브커플로 열준이나 카준이 들어가는..! 삼각관계..! 새로운 필명은 아마 광대 일 것 같은데 겹치는 필명이 있다면 ... (먼 산) 여하튼 번외까지 봐주신 독자님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하트.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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