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적당한 해석 01
w.규닝
01. 시작은 오기
오늘도 정확히 남우현의 출근시간을 피했다고 생각했다. 학원에 도착하자마자 벽면에 걸린 시계를 흘끔 올려다보니 한 시였다. 아직 검정고시 반 학생들이 도착하기도 전 시간. 남우현과 마주하지 않는 출근길은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성규씨, 왔어? 먼저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원장 선생님의 인기척에 고개를 까딱하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오늘도 일찍 나오셨네요. 형식적이기 그지없는 인사를 건네며 사무실 한 구석에 메고 온 백팩을 내려두었다. 나이는 먹을수록 건강이 최고라며, 요즘은 이온음료도 마다하고 생과일 주스만을 고집하고 있는 원장의 손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오렌지 주스 한 잔이 들려 있었다. 그럼, 준비할 것도 많은데 이제는 일찍 출근해야지.
"성규씨도 커피 한 잔 해. 거기 탁자 위에 있는 거."
"아…감사한데 제가 원래 커피를 잘 안 마셔서."
"아, 진짜?"
내려 둔 가방을 뒤적이며 파일철을 꺼내려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몰랐네요. 커피 안 좋아하는 거."
분명 아직 출근도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남우현의 목소리가 등 뒤쪽에서 들려왔다. 남우현의 목소리라면, 자동적으로 써지는 인상에 표정도 채 풀지 못하고 허리를 폈다. 그렇게ㅡ 아니꼬운 표정 그대로 남우현과 얼굴을 마주했다. 녀석은 역시나, 버릇처럼 파티션 위에 팔을 올려놓고 그 위에 제 턱을 얹고 있었다.
"성규씨 책상 위에 캔커피 많길래 좋아하는 줄 알았죠. 그래서 일부러 카페 들러서 사 온건데."
"그러게 왜 굳이 그러셨어요. 남의 취향은 잘 알아보지도 않고."
"캔커피가 많길래 당연히 좋아하는 줄 알았다니까."
"먹지는 않아요. 학생들이 주니까 받아는 놓는거지."
아직 수업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새벽까지 밤샘 레포트다, 조별과제다 하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거기다가 남우현까지 얹힌 그낌. 수업 자료를 뒤적이던 손길이 괜히 거칠어졌다. 출근시간을 엇비슷하게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적중이라니. 그런 생각에 짜증이 나 자료들을 탁탁 정리하고 있는데 성규씨,하는 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이렇게 우현씨가 잘해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 가만 보면 성규씨는 항상 퉁명스럽단 말이야. 우현씨한테 뭐 화난 거 있어요?"
그렇게 또 다시 휑해진 마음 속으로 찬바람이 들어차려던 순간이면 남우현은 거들었다.
"아녜요. 저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성규씨 성격이 원래 좀 시크한 거라서. 그냥 제가 다음부터 성규씨 취향, 알아놓으면 되죠."
그런가? 하긴, 성규씨가 좀 시크하긴 해? 남우현의 말에 금세 나를 향해 겨누고 있던 시위를 내린 원장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는 수업 자료를 정리하던 손길이 나도 모르게 느려진 것을 깨달았다. 아, 성규씨. 잠깐. 파티션 너머에 얼굴만 내놓고 서 있던 남우현이 어느새 내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 발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자 눈 바로 앞에 이온 음료가 있었다.
"그럼 이거 먹어요. 커피가 싫으면."
남우현이 페트병을 눈 앞에 흔들어댔다. 짜증나게. 더 보고 있어봐야 기분만 상할 걸 알기에 짧은 눈인사와 함께 그것을 낚아챘다. 오늘도 수업 잘 해요! 끝까지 넉살 좋은 녀석의 목소리가 등 뒤로 멀어지고 나서야 강의실의 문을 닫았다. 코너를 돌고 돌아 멀리 있는 사무실에서 깔깔거리는 원장의 목소리와 남우현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꼭 누군가가 등에 업혀 어깨를 누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괜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오늘도 수업 전부터 과다 스트레스를 선물 받은 것 같다.
*
"미미쌤!"
이거 드세요. 평소처럼 사무실 책장 앞을 서성거리고 있자 학생 한 명이 내게 캔커피를 내밀었다. 오는 길에 편의점 들려서 제꺼 사는 김에 선생님이 생각나서. 그렇게 말하며 여자아이가 헤헤 웃었다. 어쩐지 가슴이 싸해지는 느낌이었다. 성의껏 받은 선물이 내겐 아무런 필요가 없을 때 느껴지는 미안하고도 씁쓸한 공허함. 대충 고마워,하고 받아들려고 하던 찰나 옆에 있던 다른 아이가 그 어깨를 쳤다. 야, 몰랐어? 미미쌤은 커피 안 드시잖아. 저희들끼리 티격태격하며 알았네 몰랐네로 사무실 한 켠이 시끄러워지려는 찰나였다.
"미미쌤이 성규씨야?"
언제나처럼 귀신같이 나타난 남우현이 내 앞에 선 여자아이 둘의 어깨에 팔을 걸며 물어왔다. 아, 쌤! 남우현의 인기척에 금세 얼굴에 화색이 돈 여학생이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를 불쑥 내밀었다.
"이건 남쌤꺼요!"
"아 내꺼도 있어? 돈이 어디서 나서 이런걸 사다 주는데?"
"커피 살 정도 용돈은 받거든요."
괜한 남우현의 오지랖에 까르르 웃는 여학생들의 웃음소리에 귓가가 간지러웠다. 손에 들린 미지근한 캔커피를 두어번 쥐었다 편 내가 책장을 마저 뒤적거렸다. 찾으려는 참고서나 빨리 찾고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에 등 뒤에서 자잘한 수다를 떨고 있는 무리에게서 신경을 끄기로 했다. 참고서를 찾아 바빠졌던 내 손길이 느려진 것은 또 한 순간이었다.
"그건 그렇고, 성규씨가 왜 미미쌤이야?"
"궁금해요?"
"응. 알려줘."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는 주제로 대홧거리가 비켜갔다. 나는 책장을 향해 있던 고개를 돌려 녀석을 흘겼다. 곧이어 귀를 대 보라는 여학생의 시늉에 두어번 끄덕이던 고개를 흥미롭다는 듯이 가까이 가져간 남우현이 재밌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설명이 끝난 후, 헤픈 눈웃음과 함께 제 어깨를 찰싹 때리며 웃는 여학생에게서 고개를 뗀 남우현이 헤실거리며 웃었다.
"아. 미미가 그 뜻이야?"
"네. 완전 대박 웃기죠! 누가 처음에 지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진짜 짱이라니까요."
다른 건 몰라도, 이번 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심기가 거슬렸기 때문에 책장을 살피려던 몸을 돌려 그 쪽을 향하게 했다. 뭔데? 날이 선 내 목소리에 셋의 고개가 내게로 돌아왔다.
"나도 그 뜻이 뭔지나 좀 들어보자. 미미가 뭔데?"
"에이, 선생님은 몰라도 되는 거예요!"
"맞아. 성규씨는 몰라도 돼요."
앞선 여학생의 말을 따라한 남우현이 장난스럽게도 웃어보였다. 나는 그 웃는 낯짝에 꾸역꾸역 치미는 짜증을 눌러 담았다. 옛말은 틀린 게 없다지만 하나쯤은 틀린 말도 있다고 생각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하지만 그것은 고지식한 옛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사람이 어디있어. 더군다나 저렇게 가면이나 뒤집어 쓴 채 웃고있는 얼굴에. 덕분에 불편한 기색을 만면에 드러낸 내가 고개를 까딱이며 사무실을 벗어났다. 사실은 이 전까지 내가 어떤 별명으로 불리든지 상관은 없었다. 미미라고 불리워지는 것도 이미 알고 있던 터였고ㅡ 그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 뜻이라는 것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학창 시절, 싫어했던 선생님을 싸이코나 문어대가리 정도로 불렀던 것과 같은 이치라며 그것은 학생 문화의 일종일 거라고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가 이제 와서야 미미라는 별명에 이토록이나 짜증이 치솟는 것은,
"미미쌤. 직원 회의 늦지 않게 와요."
무슨 말을 해도 싫은 남우현의 입에서 버젓이 나의 별명이 불리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싫은 기색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경고했는데도 얄미운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아마 그 짧은 새에 말버릇이 되어버린 듯 했다. 채점 용지 좀 배부해달라는 말을 할 때에도, 심화반 자습시간 좀 잠깐 봐 달라고 할 때에도 미미씨, 미미씨 하는 호칭은 끊이질 않았으니까. 비록 아직까지 그 뜻은 알아내지 못했다. 문어대가리, 문어대가리 하며 놀리고 있던 학생주임 '문대'가 어느 날은 학생 중 하나에게 그 뜻이 뭐냐며 물어오면 당연히 알려주지 않는 것처럼ㅡ 나에게서 미미의 뜻은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정작 나는 그들에게 '미미'였으면서. 하지만 남우현에게 있어서 조금 달랐던 것은, 묘하게도 기분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녀석이 내게 미미씨,하며 불러오는 순간에는.
* * * * *
남우현과 나는 24살 동갑으로, 다른 대학교에 재학중이지만 방학 시즌을 맞아 학원 아르바이트생으로 만난 사이였다.
사실은 처음 남우현과 대면했을 때 첫인상이 단정한 게 가까이 해도 좋을 사람 정도로 녀석을 인식했었다. 딱히 뭐, 모나 보이지도 않고 괜찮네. 첫 대면임에도 불구하고 싹싹하게 인사를 건네는 남우현의 모습을ㅡ 그러면 안 되는 것은 알지만 위아래로 스캔했다. 나름 신고식이라고 머리에 신경 쓴 티도 팍팍 나는 데에다가 갖춰 입은 셔츠 깃이 손목 선에 딱 맞게 떨어지는 거 하며, 전체적인 차림새가 정상적이었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표정으로 남우현과 악수를 했다. 반가워요. 저는 김성규. 심심한 자기소개와 함께 인사를 마친 내가 가까스로 경계를 풀려고 했을 때, 딱 그 타이밍에 남우현이 그딴 소리나 하지 않았으면.
"혹시 남자한테 인기 많아요?"
"네?"
"아니예요?"
"…남자한테 인기가 많냐구요?"
순간적으로 치켜올라간 내 목소리에 남우현은 두 눈만 멀뚱히 뜨고있다 배시시 웃었었다.
"내가 잘못 짚었어요?"
"……."
"아니, 신경쓰지 마세요. 성규씨랑 닮은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걔가 남자한테 꽤 대시 좀 받더라구요. 닮아서 해 본 말이니까 그냥 흘려 들으세요. 딱히 나쁜 뜻으로 한 말도 아니고."
"……."
"…에이, 표정 풀어요. 그냥 해 본 말이라니까. 그나저나 아까 스물 네살이라 했어요? 저돈데. 아 그럼 우리 그냥 말 놓으면 되겠다. 스물 넷에 학원 알바면 당연히 군대는 갔다 왔을…"
"확신같은 거 없으면 그런 얘기, 다시는 꺼내지 마세요."
아마 그 때부터 그 웃음엔 질려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첫 대면임에도 불구하고.
"말 한 마디가 천금이라고,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 망하는 사람 여럿이거든요."
"…네?"
"남우현씨는 방금 인간관계 하나가 망했어요."
한 번 싫은 사람은 곧 죽어도 싫다.
안타깝게도 남우현은 첫만남에서부터 탈락이었다. 비록 이 낯선이와 함께 1년 남짓한 아르바이트 생활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게 앞길이 깜깜하고도 남았지만. 이미 한 번 마음속에서부터 어긋난 이와 잘해볼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웃는 것도 예쁘게 잘 웃는다 싶었던 남우현의 얼굴이 3분만에 질려버린 탓이었을까, 그 이후로는 쩔쩔매며 내게 실수였다고 말해오는 변명은 이미 귓등으로도 듣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철저하게 녀석에게 벽을 쳤다. 섣불리 말했던 건 미안하다며 음료수다 뭐다 사다 바치는 남우현에게 매번 같은 답을 돌려주었다. 별로 먹고 싶지 않아서. 남우현씨 많이 드세요. 물론 그 이후ㅡ 그 전까지는 내가 저를 어떻게 대하건 동갑이라는 생각에 반토막인 말들을 툭툭 뱉어내던 남우현이 안되겠다 싶었는지 다시 존댓말을 쓰게 되었다. 내가 귀찮게 한 건가. 미안해요 김성규씨.
"그러고보니 두 사람 동갑이면서 아직 존댓말 쓰네요."
한 번은 매주 월요일마다 갖는 직원회의가 끝나고, 같이 점심을 할 때에 원장 선생님이 물은 바 있다. 열심히 숟가락질을 하던 남우현의 손이 뚝 멈추었다. 나는 성의없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쩌다보니. 그러자 내 대답처럼 심심한 답이 돌아왔다. 이상하네요. 두 사람은.
"보통 요즘 젊은 사람들은 동갑이면 하루만에 막 말 놓고 그러지 않나? 남우현씨도 그렇고, 둘 다 그렇게 사교성이 안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던데. 뭐 아직 말 안 놓는 이유라도 있어요?"
"……."
"따로 만나면 반말 하는데, 내 앞이라 둘이 존댓말 쓰는 건가?"
"아뇨. 따로 만난 적도 없지만 원장 선생님 안 보시는 곳에서도 존댓말 씁니다."
남우현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찌개를 떠올리던 숟가락을 금방 입에 물었다. 따로 만난 적도 없고, 만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인데 말을 놓으라니. 칼같이 돌아간 내 대답에 조금은 무안한 듯 뵈는 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그래요? 하며 영양가 없이 질문을 번복했다.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뜨는 손짓에 속도를 더했고, 남우현이 입을 열었다. 네. 저희 아직 말 안 놨어요. 남우현이 어찌 대답하거나 말거나 내 관심은 오로지 점심 식사였다. 남우현은 원장의 무안함을 풀어주려 목소리를 한 톤 띄웠다.
"저도 생각 외로 낯을 좀 가려서요. 아직 성규씨랑 많이 얘기 해보지도 못했고. 언젠가는 놓겠죠."
"정말? 남우현씨가 낯을 가린다구요?"
"보기와는 다르게 좀 그래요."
"성규씨가 공과 사가 좀 뚜렷해서 우현씨를 어려워하는 건 줄 알았는데."
"저는 공과 사 완전 흐린 편인데."
잠시 말을 멈춘 남우현이 내 쪽을 보는 느낌이 선연했다. 나는 최대한 대꾸를 하지 않으려 찌개와 밥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일부러 크게 입을 벌려 밥을 퍼 먹기도 했고.
"공과 사 하나는 또 엄청 흐리니까, 제가 열심히 건드려봐야죠 뭐."
그 날 새롭게 다짐한 것은, 앞으로 남우현과는 밥도 함께 먹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밥상머리에서 녀석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ㅡ 언젠가는 결국 체하는 날이 오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녀석의 은근한 대사에 빠른 속도로 밥 한 공기를 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
비록 야간 자율 학습에 빠져 사느라 12시까지 독서실에 틀어박혀 있었던 고등학생 시절처럼ㅡ 자정 넘도록 남우현과 단 둘이 학원을 지키게 되는 날이 찾아왔을 때에도 다짐했다. 저녁을 굶는 한이 있더라도 녀석과 함께 밥을 먹지는 않겠다. 나는 일부러 문제집에 더욱 코를 박고 남우현의 시선을 차단했다.
고등학생들의 시험기간에 접어드는 주였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다가올 때 즈음이면 학원 체제의 생활 패턴은 변하게 되었다. 평소 9시 정도면 퇴근을 마치던 것이, 12시 반 정도나 되어서야 문을 닫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맡고 있는 검정고시 반의 학생들도, 남우현이 맡고 있는 고2 특별반과 심화반의 학생들도 다를 것은 없었다. 비록 인원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어 자정으로 넘어가는 시각, 학원을 지키고 있는 학생들의 수가 많지 않아 비교적 한산하다는 점은 좋았지만 그 부가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도 선생님들이 수고 좀 해줘요."
원장 선생님이 퇴근을 마치면서 단단히 일러 두었다. 얼마 전의 출산으로 한동안은 집에 일찍 들어가봐야 될 것 같다며 퇴근을 서두르는 원장 선생님을 굳이 붙잡아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껏 해봐야 네 명 남짓한 선생님들의 수에ㅡ 이 반 저 반 돌아다니며 감독을 해야 한다는 게 피곤하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대충 허리를 숙여보였다. 일찍 들어가세요, 선생님. 미련 없이 떠난 원장은 우리에게 한적한 학원을 남겨두었다.
그러면 다들 수고하세요. 박 선생님이 고개를 까딱하고 제 강의실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며 섰다가, 어쩌다보니 사무실에 남우현과 단 둘이 남아버린 상황이 싫어 발걸음을 떼려고 했을 때였다.
"성규씨."
방금 전까지도 생글생글 웃고 있었으면서 어딘가 조금 답답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남우현이 말했다. 내 팔을 단단히 잡아 챈 남우현이 걸음을 옮기려던 내 발을 묶어놓고는 말했다. 잠깐만요. 그에 내가 잡혀있는 팔과 녀석의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귀찮은 기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왜요?"
"……."
"강의실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은데. 할 말 있는 거라면 빨리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냥,"
남우현은 조금 입술을 물었다.
그냥, 까지 뱉어놓은 후면서 딱히 말을 이어갈 재간은 없어보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내 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고는 싶은데 망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 뒷일까지는 내 알바가 아니었길래 힘이 들어가있던 그 손을 털어내듯 뿌리쳤다. 시간 아깝게 뭐하는 짓이에요. 우리 놀으라고 있는 자습 시간 아닙니다. 대충 고개를 꾸벅이고 먼저 강의실 안으로 향하려 했을 때였다. 나보다 빠르게 내 옆을 지나쳐 간 남우현이 한숨 섞인 말을 뱉어냈던 게.
그렇게까지 싫은 티 낼 필요는 없잖아요.
잠깐동안 내 옆에 멈춰 섰던 남우현이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답답한 목소리를 내었다. 물론 그 표정을 확인하려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이미 강의실 안 쪽으로 녀석이 자취를 감춘 후였다.
내가 녀석을 싫어하는 것은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섭리 같은 것이었는데ㅡ남우현은 언제부터인가 내 태도를 신경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자정 전까지 고요한 학원에 남아, 녹차 스틱을 꺼내 오려 슬리퍼를 질질 끌고 사무실 입구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에서야 알았으니까.
"어, 아니 뭐. 그냥 그래. 힘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안 힘든 것도 아니고."
친구와 통화를 하는 중이었는지 목소리를 한 꺼풀 죽인 남우현이 사무실 안 쪽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안 쪽으로 들이려던 발걸음을 멈추어 입구 쪽에 붙어 섰다. 그냥 들어가서 녹차 팩만 가지고 나와 돌아가면 될 일을, 켕기는 것도 없으면서 염탐하듯 멈추어 섰던 내가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서도.
"괜찮아. 애들은 착해.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고. 어. 보수도 괜찮지. 너 휴가 나오면 내가 술 산다, 무조건."
남우현의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작아졌던 대목은 따로 있었다.
"동료?"
간간히 테이블을 툭툭 건드리는 것 같았던 소리가 멈추었다.
"…그냥 그래. 같이 알바하는 동갑내기 한 명 있긴 한데."
그와 동시에 아무렇지 않게 침을 삼키려던 내가 조용히 입을 틀어막았다.
"되게 튕겨. 나랑 별로 친해지기 싫은가봐. 그러게. 신기하지. 살다보니 세상에 나 싫어하는 사람도 있더라. 내가 이래봬도 사교성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았는데."
이거 괜히, 오기 생기게 만들고. 동료 얘기가 나오자 잠시 가라앉았던 목소리가 다시금 웃고 있었다.
"아냐.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조금, 오기가 생기고 있다고. 야, 내기할래?"
친구와의 관계에서 '내기'라는 말을 꺼낼 때 즈음이면 으레 그렇듯이ㅡ남우현의 목소리가 절반 정도는 신이 나 있었다. 나는 내 얘기임이 분명한 대화에서 어떤 타이밍에 침을 삼켜야 할지 몰라 고심하다가 귀를 기울였다. 남우현이 다시 테이블을 툭툭 건드리는 소리까지 선명했다.
"내가 걔랑 결국엔 친해지는지 못친해지는지. 뭐? 야, 엄마를 어떻게 걸어 새꺄."
남우현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못 걸겠지만 내 통장 전부 걸고 말한다."
남우현의 통화는 그 뒤로도 꽤 길어졌을 거다. 아마도.
거기까지 듣고 내 발걸음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기에 뒷 일은 모른다. 그 뒤로 또 어떤 조건을 내걸었는지도. 물론 뒷말까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미 내 기분은 상할대로 상해버렸으니까. 내기? 그저 굳은 표정으로 강의실에 돌아와 자리를 지키고 앉은 후에는 머릿속을 빙글빙글 떠다니는 '내기'라는 말을 소리내어 되짚어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랑 친해지게 되는지 아닌지로 남우현이 내기를 걸었다고 했다. 어쩌다 나는 네게 '내깃거리'같은 걸로 내몰리게 되었을까. 어찌 되었건 중요한 것은 절대 우리에게 그렇게 될 일은 없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바득 갈며 문제집을 뒤적였다. 그 덕분에 열심히 자습에 집중 중이던 학생들 중 몇몇의 시선이 내게 잠깐동안 머물렀다. 나는 강의실 바깥쪽을 힐끔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깃거리가 됐든 뭐가 됐든, 어떤 식으로든지 남우현과 엮이는 일은 불편했다.
"남우현씨는 애들 감독 안 해요?"
한 번은 남우현이 내 앞을 막아서자 울컥 짜증이 일어 내키는대로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다.
그 일이 있고나서 후의 일이였다. 하루는 감독은 나몰라라하고 하루 웬종일 내 뒤만 쫓아다니며 이전까지는 묻지도 않던 번호를 알려달라고 묻던 남우현이 급기야는 내 앞을 막아서자 화가 났다. 내기라는 말로도 충분히 심기가 뒤틀렸건만 번호라니, 번호를 알려고 하는 의도조차 달갑지 않아 거절하고 거절했었다. 존재 자체로도 싫은 사람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다라. 확실히 반가운 일은 아니었기에 더욱 짜증이 솟구쳤다. 남우현은 그런 내 앞에서 나를 따라 표정을 굳혔다.
시종일관 생글거리는 웃음으로 번호가 뭐예요, 좀 알려주면 덧나나 하며 내 뒤를 따라다니던 녀석이 표정을 굳히자 아주 잠깐 당황해버린 사이ㅡ 조금 화난 듯 보이는 남우현은 먼젓번보다 훨씬 더 답답한 기색을 섞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규씨처럼 번호 얻기 어려운 사람은 처음이에요. 알아요?"
"……."
"내가 왜 성규씨한테 직접 번호를 물어보는데. 그것도 하루종일."
남우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굳이 이런식으로 알려고 하지 않아도 사무실 조금만 뒤져보면 널려 있는 게 성규씨 번호거든요. 내가 지금 성규씨 번호 하나 몰라서 이렇게 물어보는 거 아니예요. 이렇게 대놓고 물어본다는 건,"
"……."
"김성규씨랑 좀 친해져보겠다는 거잖아."
이번에는 먼저 남우현이 내게서 등을 돌렸다. 사람 마음 그렇게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한숨 섞인 목소리와 함께. 나는 그런 남우현을 주시하다가 마저 등을 돌렸다. 물론, 남우현이 사라진 강의실과는 반대편 복도 쪽으로.
무시인 줄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게 줄기차게 내치기만 했으니 저를 싫어한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는 게 당연한 건가. 나는 괜히 빨라진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돌아와 아까 전에 프린트 해 두었던 유인물들을 서툰 손짓으로 소리나게 정리했다. 그렇게 잠깐동안은 일부러 일 할 거리를 찾았던 것 같다. 켜져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괜히 마우스를 딸깍여본다던가, 갑자기 생각난 수학 공식을 외워 두려 참고서를 꺼내어 들다가 멈춘다던가. 왜냐하면 나는 단지, 내가 들었던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내고 싶었다. 사람 마음 그렇게ㅡ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마음에도 없는 답답한 소리로 괜히 내 양심을 흔들어보는 것 같아서. 어쨌거나 모든 것이 연기인 사람이 애써 상처 받은 척 내게 연기 해 오는 것이라는 걸 알아서.
괜히 가슴 한 구석이 따끔거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괜히. 그냥…괜히.
쀼 |
안농 이거.. 중편 정도 될거같아요~.~ 8~9개 정도? 1/8, 2/8…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확신이 안 서서 ..하핫! p.s ㅇ..아.ㅡ우ㅏ유ㅡ우ㅠㅠㅠ번외를..어제 통째로 날려버려서 다시 쓰느라ㅠㅠㅠㅠㅠㅠㅠㅠ메일링ㅇ이ㅜㅡ늦어지고 있어요 미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