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적당한 해석 03
w.규닝
03. 달이 지고 빚을 진다
"남쌤 안 오셨어요?"
학생들이 도착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아 부러 일찍 나와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쏙 튀어나온 머리통이 내게 대뜸 남우현의 행방을 물었다. 큰 결심 끝에 던졌던 물음인지, 동그랗게 뜬 눈이 나에게 대답을 서두르고 있었다. 응. 아직. 그러자 재빠르게 고개를 까딱이며 사라진 여학생이 튀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제 강의실로 멀어져 갔다.
계속해서 힐끔거리던 시계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평소대로라면 남우현의 출근 시간은 정확히 1시간 반 후였다.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는데. 다시금 찾아드는 막심한 후회에 빨간 펜을 돌리던 손을 멈추고 이마를 짚었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이래서 남에게 빚지는 것을 질색하는 거다. 제 딴에는 도와준답시고 벌인 일은 상대방을 훨씬 더 신경 쓰이게 만들고 있으니까. 어젯밤의 쓸데없는 호의도 그렇고,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 학부형을 만나고 온다는 남우현을 더 이상 말릴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까지 조용한 사무실 전화기를 툭툭 건드려보다가 반응 없는 휴대폰 액정을 다시 켰다.
「먼저 출근해요. 그 분 만나뵙고 바로 갈게요.」아침에 받았던, 대책없이 답답한 문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런 남우현에게 대충 모의고사 성적표 위조에 대한 문제라고만 말했었지, 자세한 내막은 알려준 일이 없다. 나는 다시 키보드 앞 탁자에 한가한 두 팔을 올려놓았다. 아무래도 영 불편한 마음에 당장이라도 문자로 내가 만나겠다고 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담았다. 그렇게 되면 남우현의 말마따라 정말이지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주는 꼴이 될 것 같아서. 쉼 없이 돌리던 펜을 입에 물었다. 사실은 언제까지고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기다리는 수 밖에는 없었다.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서는. 괜히 정수기 주변의 다 쓴 물컵을 정리해 보기도 하고, 어질어진 테이블 위의 프린트물을 두세번씩 정리해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정고시 반 학생들은 속속들이 도착했다. 대부분은 내게 고개를 까딱이며 지나갔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내게 남우현의 안부를 묻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미미쌤이다. 남쌤은요? 동글동글한 머리들이 파티션 위로 두더지처럼 올라왔다. 나는 별 감흥없이 고개를 저었고, 학생들은 저들끼리 깔깔거리며 남우현에 대한 수다를 떨다가 강의실로 들어갔다.
"성규씨 일찍 왔네. 우현씨는요?"
뒤이어 출근한 박 선생님마저도 내게 남우현의 출근 여부를 물었다. 마치 학원 속의 모든 사람들이 심란한 내 마음을 전부 꿰뚫고 있어 일부러 내게 남우현의 행방을 물어오는 것이라는 착각이 들 만큼.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잘 모르겠네요. 아직 안 오신 걸 보니 조금 늦으시는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래요? 매일 성규씨랑 같이 출근할거라고 큰소리 뻥뻥 치더니. 이거 마셔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지 않자 면전에 대고 쑥 내밀어진 아이스티를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매일 이런 거, 안 사다주셔도 되는데. 어줍잖은 인사치레와 함께 아이스티를 받은 내가 빨대는 휘휘 저었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저 쪽에 가방을 풀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박 선생님이 작게 웃었다.
"그런데 우현씨가 박 선생님한테 그랬어요?"
"뭘요?"
"아까, 같이 출근할거라고…매일…."
"네. 그러던데. 무슨 선포하듯이 말하던데요. 그냥 그러시겠거니 하고 넘어가긴 했지만."
"……."
"무슨 일 있어요?"
"그냥요. 아무 일 없어요."
"난 또 둘 사이가 더 악화됐나 했지."
박 선생님이 소리내어 웃었다.
"요즘따라 우현씨가 시덥잖은 걸 묻더라구요. 박 선생님은 성규씨한테 첫인상이 좋았느냐, 어떻게 친해졌느냐 별 걸 다 물어오기도 하고."
"……."
"성규씨는 웃는 상 싫어해요?"
"웃는 상이요?"
"웃는 얼굴이요."
"웃는 얼굴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면 남우현씨 좀 좋아해줘요. 남우현씨처럼 그렇게 인상 좋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잘은 모르겠지만 그 쪽에서도 꽤 노력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성규씨 좀 어떻게 해볼려고 하는 게 옆에 사람 눈에도 빤히 보이는데 안쓰럽잖아요."
분명 회유하려 드는 것은 아니었을것이다. 물 흐르듯이 남우현에 관한 얘기를 흘린 박 선생님이 내 옆모습을 힐끔 살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그냥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성규씨. 내 어깨를 두어번 토닥이고 사무실을 벗어난 박 선생님의 슬리퍼 끄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들려왔다. 나는 저만치 내팽개쳐두었던 빨간펜을 무기력하게 끌어왔다. 무더운 정오 즈음이면 박 선생님이 사다 주는 아이스티와 빨간 펜을 번갈아보다가 참았던 숨을 뱉었다. 마침 근처에 놓여있던 이면지를 끌어와 정처없이 펜을 놀렸다.
웃는 얼굴은, 안 싫어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웃는 얼굴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녀석은 지나치다싶을정도로 예쁘게 웃을 줄 알았고, 앞서 말했듯이 웃는 얼굴을 보고 싫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웃는 얼굴을 보고 마음이 불편한 사람은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생각없이 펜을 놀리면서 펜 끝을 입에 물었다. 싫은 사람이 싫은 짓만 골라 하는데 당연히 싫지,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그렇게 파티션 너머로 지나가는 학생들의 인사에 대충 맞추어 눈인사만 돌려주길 몇 분 째였다. 옆자리에 놓여있던 빈 의자에 가방이 결리는 소리가 났다.
"펜 끝 입에 물지 마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내가 물고 있는 펜의 반대쪽 끝을 잡는 손이 보였다. 입에서 펜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고개들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펜 끝도 상하고, 이도 상하고."
남우현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으며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몸에도 안 좋잖아요. 내 입에서 빼낸 펜을 다시 테이블 위로 던져 두며. 내 눈썹은 자동적으로 찡그려졌다. 이 상황에서는 무슨 상관인데,하는 말보다 더 먼저인 말이 있었다. 남우현씨 오늘도 지각이에요 하는 타박보다 먼저 해야 할 말.
"만나고 왔어요? 그 분."
"응. 방금요."
"뭐라셨는데? 또 남우현씨는 뭐라고 했는데요? 끝은 어떻게 끝났구요."
"오자마자 나한테 할 말은 그거 뿐인가봐. 하나씩 좀 물어요."
의자에 걸어 놓은 겉옷을 탁탁 털어 정리하려던 남우현이 의아한 눈을 내게 고정했다. 그러더니 입을 딱 다문 내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좀 이상하네.
"미미씨가 나한테 안달난 모습 보니까 기분이 이상해."
남우현은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자연스레 인상이 굳었다. 대답은 커녕,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로 말장난을 시작한 모양이다. 덥다는 말과 함께 손부채질을 하려 하는 남우현을 향해 일부러 더욱 눈을 마주치며 노려보았다. 뭐냐는 듯 웃는 남우현에게 집요하게 시선을 마주치자 녀석이 눈을 바로 떴다. 어쩔 수 없이 녀석의 비위를 맞춰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럼 하나씩 물을게요. 그 쪽에서 뭐라셨는지 말해줘요. 어젯밤 전화에서 뭐라고 했길래 이 더운날에 우현씨가 그런 정장까지 갖춰 입고 그 분을 만났는지도."
"하나씩 묻는다면서요. 벌써 두 개 물었는데."
"자꾸 그렇게 뺀질거리면, 더운 날이라 불쾌지수 상승합니다."
조금은 이를 악물고 말한 것이 맞다. 짜증스러운 내 목소리에 제 가방을 뒤적거리려던 남우현의 손길이 뚝 멈추었다. 그리고는 이내 어깨를 으쓱한다. 별 거 아니었어요. 그냥, 삼자대면이 답이라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학생을 부른 것 밖에는. 남우현은 심심한 말투로 상황 설명을 덧붙였다.
"학부모들 입소문이 얼마나 빠른데, 이런 일은 곧바로 마무리 짓지 않으면 소문만 커지니까 빨리 처리하려고 성규씨 대신 나선거예요. 실제로 성규씨가 대처했으면 거기 나가서도 입바른 소리만 했을 거 아냐. 아무리 억울한 입장이라 해도 때로는 숙이고 들어갈 줄 알아야 상황도 나아지는 법이에요. 여러모로 그 쪽보다는 내가 나서야 정리가 빠를 것 같아서 그랬어요. 어쨌든 그럭저럭 잘 풀렸으니까 더 이상 신경은 쓰지 말고."
"……."
"오해샀던 건 적당히 풀었어요. 그러니까 성규씨 앞으로 그 학생한테 눈치볼 거 없다고. 왜요, 또…"
"……."
"마음에 안들어요?"
내 반응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설명만 늘어놓고 있는 중인 줄 알았더니, 은근히 내 표정을 스캔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무언가를 경청할 때면 으레 그렇듯이, 시선에 넋을 빼고 있던 내가 눈에 힘을 주었다.
"누가 마음에 안 든댔어요?"
"표정이 별로 안좋아보여서."
"박수치면서 좋아할 일은 아니어서요."
내 말에 남우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듯이 무의미하게 웃었다. 괜히 고개를 홱 돌렸다가 눈 앞에 보이는 아이스티 빨대를 급히 물었다. 그렇게 녀석이 가방을 정리하느라 뒤적거리는 소리만이 사무실을 채웠다. 한참을. 그러다가 먼저 어쩔수 없이 입을 연 것은 내 쪽이었다. 남우현씨. 평소보다 더없이 딱딱한 호칭에 남우현도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녀석의 고개가 내 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남우현과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틀고 있었다.
"덥죠."
"밖에?"
"네. 밖에."
"덥죠. 이제 여름인데."
"그래 보여요."
남우현씨 땀 나. 빨대를 씹느라 엉겨진 발음으로 덧붙였다.
"…뭐 좀 마실래요."
"뭘요?"
"아이스티같은거요. 아이스커피라던지. 내가 밖에 나가서…그 정도는 사올 수 있을 것 같은데."
"됐어요. 그냥 물 마시면 되지."
"내가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나 빚지는 거 싫어해요."
"……."
"빚을 지고 나면 남는 그 찝찝한 기분, 더러워서 싫어요. 뭐 먹고 싶은지 딱 말해요. 지금 사러 나갈 테니까."
아직 절반도 채 먹지 않은 아이스티에서 입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우현은 나를 향해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그대로 올려 내 동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남우현의 눈빛은 그 때까지도 의아했다. 그러다가 녀석은 다른 쪽에 두었던 가방을 열고 지갑을 꺼내 드려는 내 팔을 붙들었다.
"밖에 더우니까 그냥 있어요. 물 마시면 된다니까 굳이."
"두 번 말하는 것도 싫어하는데."
"그럼 그냥 정수기에서 물이나 떠다 주시던가. 밖에는 나가지 마요."
"그건 조금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 안해요?"
남우현은 내 말에 조금 웃었다.
"자존심 따지시는 분이 카페까지는 어떻게 가시려고 그래. 그게 더 힘쓰는 일 아닌가? 그러지말고 그냥 앉아있어요."
"……."
"빚지는 거 싫어한다고 했죠. 나도 뭐 하나 일러주자면요."
"……."
"뭘 바라고 한 일도 아닌데, 이자까지 받는 거 완전 싫어해요. 됐죠."
남우현이 내 팔을 붙든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제 말을 무시하고 사무실을 벗어나려던 내 움직임을 먼저 감지한 모양이었다. 조금 더 단단하게 팔을 고정하는 힘에, 억지로 그 손을 뿌리치려 했다가는 모양새가 빠질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녀석이 팔을 잡고있는대로 가만히 선 내게 시선을 둔 남우현은 저릿거리는 눈으로 다시 한 번 대답을 요구했다. 나는 지갑을 든 손이 잡혀 있어 지갑과, 남우현의 손만 번갈아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남우현이 손을 거둬가자 잠시 멈춰 있던 팔을 뻗어 가방 안으로 다시 지갑을 집어 넣었다.
"쓸데없는데서,"
"……."
"호의 거절하는 거 아니에요."
내 말에 남우현이 실없이 웃었다.
"호의가 아니라 이자였잖아요."
"……."
"호의로 줄 거면, 다른 날 다른 이유로, 다른 방법으로 줘요."
조금 어려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대충 눈인사로 사무실을 빠져나간 남우현이 나보다 먼저 강의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나는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사무실 바닥에 그대로 서 있어야 했다. 보기보다 이해력이 좋지 못한 탓에, 남우현의 마지막 말은 나에게 내려진 숙제같은 것이었다. 녀석은 이자라고 했지만 나는 빚지는 일이 싫어 뭐라도 해 줘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지 이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게 그 말이 맞나 싶기도 하고. 제자리를 빙빙 도는 것도 아닌데 머릿속은 제멋대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내 강의실에 학생들이 조금씩 차고, 수업시간이 가까워질 때 즈음에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나는 내 불편한 감정을 씻어버려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나 주는 거예요?"
수업 시작 10분 전이었다. 조금은 급한 발걸음으로 녀석의 강의실에 도착한 나는 사무실 냉장고에 모아두었던 차가운 캔커피를 한아름 안아 들고 있었다. 남우현이 설마하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 안았던 캔커피 열한개를 차례대로 소리나게 내려두었다.
"사 온거 아니고, 학생들한테 받았던 건데 나 커피 안 먹어서 모아 둔 거. 남우현씨 드시라고."
"……."
"이자 아니에요. 더워보여서 그냥 내가 주고 싶은 거니까 이자니 뭐니, 그런 소리 하기만 해요."
사실은 책상에 앉아 강의실 안에 빽빽히 들어찬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해 있다는 게 민망해 신경질적으로 늘어놓은 말이었다. 남우현은 웃을 듯 말듯 미묘한 입꼬리로 나와 캔커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와르르 쏟아내듯 책상 위로 커피를 진열해놓고서는 허리를 폈다. 그럼 수고해요. 내 마지막 인사와 함께 가장자리에 두었던 캔커피가 책상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 * * * *
하루종일 남우현의 얼굴은 마주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낮에 있었던 상황은 되짚어볼수록 민망하기만 해서. 단 둘이 있는 상황이라고 쳐도 충분히 어색했을 상황이었겠지만 서른 명 남짓한 학생들 앞에서 녀석에게 커피를 쏟아내 주었던 것은 지극히 오버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수업 내내 강의실 바깥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가끔씩 불투명한 유리 가운데 훤히 비치는 유리창으로 나를 보는 시선은 느껴졌지만 모조리 무시했다. 남은 시간동안, 적어도 오늘만큼은 녀석과 인사치레의 말 조차도 섞기 싫었다. 한 타임 끝나고 다음 수업으로 넘어가는 쉬는시간에조차 강의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남우현을 피하기 다섯시간 남짓. 정상수업을 모두 마치고 야간 자습 체제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30분 정도, 저녁을 해결하러 바깥으로 나간 학생들 덕에 학원은 비교적 한산해졌다.
똑똑,하고 유리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 고개를 들자 기꺼이 나를 찾아온 남우현이 보였다. 남우현이 내게 갈색 봉투를 흔들었다.
"뭐예요?"
"또 저녁 먹으러 안 나오시길래. 어차피 같이 먹자 해도 안 먹을 거였잖아요. 그래서 이거라도 드시라고."
남우현이 뒷짐으로 숨기고 있던 생과일 주스를 마저 내밀었다. 녀석을 빤히 보고만 있자 종이가 어질어진 테이블 위로 봉투와 주스를 내려놓은 남우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 싫어도 그건 먹어요. 점심도 안 먹은 사람이 저녁을 거른다는 게 말이 되냐."
"……."
"고맙단 말도 안할거면서 그렇게 할 듯 말듯한 얼굴로 쳐다보지 마요. 그리고 이거, 아까 커피 고마워서 주는 거 아니고 미미씨처럼 나도 주고싶어서 주는 거니까 이자 아닙니다."
"알았어요. 잘 먹을테니까 그만,"
꺼져요. 당장이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접어두기로 했다.
"가요. 나 마저 해야 할 게 있어서."
사실은 이미 채점이 끝난 시험 용지를 탁탁 소리나게 정리했다. 무언가 일거리가 쌓여있는 사람처럼 괜스레 이 종이 저 종이를 뒤적이기 시작하자 남우현도 몸을 돌렸다. 퇴근 때 봐요. 남우현이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녀석이 사라진 문 쪽에 눈길을 돌렸다.
샌드위치는,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걸로 사 왔으니 고마웠다. 힐끔 열어 본 봉투 안에는 남우현이 종종 사 들고 출근을 하던 샌드위치가 담겨 있었다. 그래도 받은 즉시 먹어치운다는 것이 머쓱해 한 쪽으로 그 둘을 밀어두었다.
어쩐지 오후부터 쌀쌀한 기운이 없지 않아 느껴진다고 했다. 힐끔 올려다 본 창문 너머에는 침침한 구름이 고여있었다. 어째 느낌이 좋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묘한 예감에, 창문과 샌드위치를 번갈아보다가 주시한 학생들의 책상에는 저마다 접이식 우산이 올려져 있었다.
*
"쌤, 내가 그 동안 미미쌤 드렸던 커피! 아까 남쌤한테 전부 드렸다면서요?"
야간 자율시간이 모두 끝나고 각자 짐을 챙기느라 어수선해진 시간에 익숙한 얼굴이 다가와 대뜸 물었다. 결국에는 폭우급의 비가 쏟아지던 통에 무기력하게 가방을 챙기려던 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항상 내게 커피를 가져다 주던 여학생 하나가 불퉁한 얼굴로 밉지 않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그 동안 미미쌤 생각해서 사 드린건데!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너무해."
"아, 미안. 나 커피를 안 마셔서 냉장고에 모아뒀던건데. 마침 남 선생님이 좋아하시니까…."
"됐어요. 완전 배신감! 커피 안 좋아한다고 말씀해주셨으면 다른 거 사다 드렸을텐데."
"…미안해. 미리 말할걸. 근데 남 선생님한테 드린 거 어떻게 알았어?"
날씨 쪽에서 그랬듯이, 이 쪽도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물은 것이었다.
"남쌤이 완전 놀렸단 말이예요! 제가 그동안 챙겨드렸던거 미미쌤이 전부 자기 줬다고!"
물론 내 예감은 늘 적중에 가까운 편이었다. 어지간히 분했던 모양인지, 결국에는 나를 밉지 않게 질책하는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완전 메롱메롱하면서 계속 놀렸어요. 두 분 다 얄미워 죽겠다니까. 여학생은 앞으로 내게 음료수는 주지 않겠다는 선언과 함께 먼저 책가방을 들쳐메고 강의실에서 나갔다. 그에 마지못해 잘가라는 내 인사는 이미 여학생의 성난 등 뒤로 꽂히고야 말았다. 제 성의를 무시당해 화가 난 모양이었으나, 그게 아닌데. 나는 괜스레 무안해져 앞머리를 매만지다가 마저 가방을 챙겨 들었다.
열두시가 되자마자 썰물처럼 우르르 빠져나간 학생들로, 우리의 퇴근은 언제나 후발대인 셈이었다. 오늘도 무거운 백팩을 등에 메고 나온 학원의 공기는 아까와는 달리 가라앉아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귀가 아프도록 들려오는데 그만큼 습기가 밀려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숨을 들이키자 장마철 특유의 묵직한 비 냄새가 선연했다. 집에는 또 어떻게 가지.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사무실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 진짜라니까요. 과대 형이 박 선생님 안부를 얼마나 물었었는데. 나 진짜 거짓말 안 해요."
"그럼 남 선생님이 내 후배의 후배 아냐. 입장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 안 해?"
"어 박 선생님, 지금 은근히 말."
놨…. 사무실 한 켠에서 박 선생님에게 헤드락을 당하고 있던 남우현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응수하려고 했던 타이밍인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나의 출연으로 그 말꼬리는 댕강 잘려나갔지만. 나는 처음보는 낯선 상황에 두 눈을 깜빡이며 사무실 입구에 섰다.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꼬박꼬박 예의를 차려가며 대화하던 두 사람은 마치 몇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막역한 대화를 잇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하던 행동을 어색하게 굳힌 두 사람이 느리게 팔을 떼었다. 아, 성규씨. 박 선생님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아홉 시 즈음부터 밖에 비 오더라구요. 알죠."
"네. 알아요."
"아 그리고, 남 선생님이랑 제가 알고보니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더라구요. 어쩐지 이름이 좀 낯익다 했었는데. 서울도 은근 좁다니까. 그래서 이참에 야자틀까 생각중이에요."
박 선생님이 묻지도 않은 사건의 내막을 줄줄이 읊었다. ㅡ아, 네. 상황을 보자마자 대충 짐작은 했던 터라 그다지 놀랍지는 않은 사실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신기하네요. 별다른 감정 없이 적당한 추임새를 곁들이자 박 선생님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남우현에게서 떨어졌다. 남우현의 시선은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줄곧 내게 향해 있었다. 또다시 그런 눈길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남은 자료들을 가방에 꾸역꾸역 구겨 넣었다. 미미씨! 아니나 다를까, 거칠 것 없이 밝은 목소리가 내게 말했다. 밖에 비 오잖아요.
"우산 없죠."
"네."
"그럴 줄 알았어. 기다려봐요. 택시 잡는 곳 까지 같이 가게."
거기서 딱! 기다려요! 남우현은 싱글거리면서 웃다가 빠른 동작으로 사무실을 벗어났다. 아까도 그랬듯이 지금 느껴지는 촉이 이번에도 정확하다면, 남우현은 강의실에 두고 온 제 우산을 가지러 간 모양이었다. 내 인상은 자연스레 구겨졌다. 택시도 잘 안 잡히는 지역인데, 내가 왜 빗속에서 남우현이랑 단 둘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성보다 먼저 앞선 것은 본능이었다. 박 선생님! 저 구석에 앉아 괜히 손장난을 하고 있던 박 선생님을 다급하게 불렀다. 네? 그의 고개가 퍼뜩 올려졌다.
"나 우산이 없어서요. 박 선생님이 저 택시 잡는 곳 앞까지 데려다주시면 안 될까 해서."
"예? 어려운…일은 아니지만, 방금 우현씨가 성규씨한테…."
"그냥요. 부탁해요."
습관적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본의아니게 간절한 목소리가 튀어나와버린 탓인지 멀뚱히 나를 보고 있던 박 선생님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뭐, 어차피 나도 택시 잡아야 하니까요. 결국에는 웃으며 수긍한 박 선생님의 말에 내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아까보다 한결 더 가벼운 소리의 발걸음이 저쪽에서부터 다가왔다. 우산 여기. 남우현이 강의실에서 가져 온 접이식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다 제 머리 위에 얹었다. 파티션 위로 팔을 얹은 남우현이 그 위에 제 턱을 올려놓고는 씩 웃었다.
"이래서 항상 우산은 갖고 다녀야 한다니까요. 가요, 미미씨. 이 앞까지…"
"혼자 가세요. 저 박 선생님이랑 가기로 해서요."
뒷일이 싫어 일부러라도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대꾸했다. 언제나처럼 평범한 얼굴로 녀석의 제안을 거절했다가는 자꾸만 귀찮게 따라붙을 녀석이라서 일부러 미안한 내색을 여과없이 드러낸 내가 박 선생님에게 힐끔, 눈치를 주었다. 박 선생님은 어중간하게 나를 보고있다가 따라 웃었다.
남우현의 얼굴에서 시종일관 생글거리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네? 맥이 빠진 목소리로 멍청하게 되물은 남우현이 그대로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나를 눈으로 좇았다. 괜히 뒷통수가 따가운 것 같아 뒷머리를 매만지면서 신발을 꺼내 들었다.
저, 그냥, 박 선생님이랑 간다고요. 결국에는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을 해야 들어먹는 모양이었다. 꾸역꾸역 신발을 구겨신고 올려다 본 남우현의 표정은 붕붕 떠 있던 아까의 기분과는 상반되어 보였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표정으로 나와 박 선생님을 번갈아 보던 남우현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우현씨, 그럼 우리 먼저."
"저희 먼저 갈게요. 열쇠 부탁해요."
녀석 쪽에는 시선을 오래 두고 싶지 않아 인사를 서둘렀다. 마지막으로 본 남우현의 표정은 그래도, 몇 분 전처럼 웃고는 있었다. 묘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남우현은 내 작별 인사에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응. 내일 봐요."
남우현의 손목에 걸려 접이식 우산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한참을 신발 쪽으로만 두고 있던 시선을 올려, 아까처럼 밝게 뜬 목소리가 내게 인사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다가 등을 돌렸다. 새벽 내내 계속될 모양인지, 깜깜한 바깥은 아직도 끔찍한 폭우를 쏟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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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맛 ㅋ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