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IOUS In mysterious 14
WRITTEN BY. 키드
*
"요즘…여러모로 카이킴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많아. 응?"
"그건 또 무슨소리야."
"흠- 글쎄, 일단 보고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붉은 커프스를 탁자위에 올려둔 첸이 제 품안의 봉투를 꺼내들었다. 모서리가 구겨진 그것을 몇 번 눈으로 확인하는 듯 하더니, 곧 카이에게 건낸다. 테잎으로 두어번 꽁꽁 붙여진 봉투를 카이가 칼끝으로 한번에 밀어내리자 그 안의 내용물이 탁자위로 쏟아졌다. '뭐야.' 난잡하게 얽혀든 사진 한장을 손끝으로 들어올린 카이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사진에 대해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설명이랄것도 없잖아. 보는대로야."
손끝에서 위태롭게 달랑거리는 그것은. 사진이었다. 자신이 너무도 잘 아는 누군가의. 앵글이 엇나가 얼굴을 그대로 담진 못했지만, 카이의 눈에 익히 익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진속의 장면은, 상투적이지만 '배신'이라, 카이의 턱이 굳었다.
"감상이 어때? 솔직히 말하자면, 뒷통수 맞은 기분이 어떤지 알고싶어."
느긋한 목소리로 약올리듯 말을 꺼낸첸의 눈썹이 휘었다. 노란 조명에 반짝거리는 커프스는, 어느새 제 손안에서 노니는 중이었다. 올라간 입꼬리사이로 말소리가 흐른다.
"충격이 꽤 클거야. 믿어 의심치않던 사람한테 뒤통수를 맞았으니."
"…뭘 기대하는거야. 시시하긴."
"니 그 잘난 포커페이스를 무너뜨리고 싶었다. 왜."
'재미없기는, 하여간 박찬열만한 인물이 없다니까. 걘 얼마나 반응이 다이나믹한데.' 여전히 무심한 얼굴을 한 카이에게 첸은 여러모로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게다가 곧 어지럽게 널려있던 사진을 한 손으로 치워버린 카이의 행동에 첸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저 무심한 인간같으니. 강철심장도 저런 돌덩이가 없을거라며 첸이 담배를 입에무는동안 사진 한 장을 집어든 카이가 그것을 제 수트포켓안에 넣었다. 치직- 피어난 불길너머 시선이 카이를 향한다. 잠깐의 침묵사이를 탁한 공기가 물들였다.
"날 엿먹이려면 이정도 가지곤 어림도없어. 첸."
"동감해. 다음엔 좀 더 센걸 들고올게."
"글쎄. 기대하기에도 바쁜 몸이라."
유유히 다리한쪽을 꼰 카이가 탁자 중앙의 재떨이를 앞으로 밀었다. '같잖은 호의는 사절이야.' 비아냥을 곁들인 담배연기가 제 쪽을 향해 넘어오자, 카이가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 모습을 첸은 클클거리며 바라보다 곧 크리스탈 재떨이위로 꾹- 불길을 눌러가며 담뱃대를 구겼다. 마지막으로 담배를 쥐었던 두 손가락을 비벼 털어내고는 곧 입을 열었다. 문득 시선을 옮긴 창너머로 우중충한 구름떼가 몰려있어, 인상을 살짝찌푸린채.
"말장난은 그만하고- 용건이 뭐야? 잘나신 카이킴이 직접. 날 찾아온 이유가 있을텐데."
약속도 제 마음대로, 장소도 제 마음대로, 뭐든 제 멋대로 해야 적성이 풀리는 성격은 꼭 제 아버지를 빼닮았는데 말이지. 머릿속에서 걸고넘어지는 생각들을 뒤로하고, 주저없이 입을 여는 카이를 향해 첸이 시선을 모았다. 앞으로 살짝 숙여진 그의 이마위로 갈색머리칼이 내려앉았다.
"간단해. 이 쪽과 손 좀 잡아야겠어."
"…하-"
"어느정도 짐작은 했을거아냐. 그 반응은 의외인데."
"황당해라. 반응이 의외야? 네 말이 의외다."
'어쩜 인간들 말뽄새 하고는.' 마치 당연한것을 요구하는 뻔뻔함도 그렇고, 꼭 도와달라는 것보다 손좀 잡자는 저 건방진 태도도 그렇고 말야. 찻잔에 남아있던 마지막 모금을 마시며 카이가 말을 잇는다. '박찬열도 널 찾았나보군.' 비릿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웃음을 내보이기도 전에 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 대답했다. '아니. 옛 생각이 떠올라서.' 그 말에 오늘같은 일이 언제 있었냐며 되묻는 카이에게 첸이 알거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꼭 네가 알 필요는 없지. 숙여진 고개가 제 자리를 찾아간지는 이미 오래였다. 제 제안의 답을 기다리는 카이를 향해 첸이 입을 열었다. 잠깐의 고민도 없이 내어놓는 대답이지만, 그것은 이미 맞춰진 모습대로 끼워지는 퍼즐판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카이를 상대로 딜을 이끌어가는 것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남자라면 모름지기의리도 필요한 법. 무엇보다 자신은 박찬열을 상대로 뒷통수칠 자신은 없으므로. 그것도 이유라면 충분한 이유였다.
"미안하지만, 난 너희 둘 싸움에 끼어들 생각 전혀 없어."
나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웃음기를 띄며 말했다. 제 목소리를 따라 카이의 눈동자가 타원속으로 수축되는것을, 첸은 빠짐없이 훓었다. 그리고, 곧 말을 이었다.
"두 사람 일은 둘이서 해결봐. 난 조만간 중국으로 돌아갈 생각이니까. 혹시라도 날 끌어들일랑 생각은, 추호도 하지않는게 좋을거야."
"…지나치게 몸을 사릴 필요는 없을텐데."
아무것도 담지 않은 표정을 한 카이는 첸에게 그저 그렇게 말했다. 장미문양의 화려한 찻잔을 든 첸이 움직이는 물결을 보다, 카이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 검은 수트에, 검은 구두에, 검은 코트에, 검은 셔츠에. 온통 흑색으로 가득한 제 앞의 인물이 제게 어떤 말을 하는가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오래살아서 나쁠거 없잖아?' 장난기 가득한 대답을 내밀며 찻잔을 기울인 첸의 눈동자는 여전히 카이를 향한채였다. 굳은 것도 아닌, 그렇다해서 풀어진 것도 아닌 인상의 그를 첸의 휘어진 눈꼬리가 응시하다, 닫혀진 입이 열리는 모습에 천천히 눈매를 풀었다.
"네 말. 지키는게 좋을거다. 첸."
"뭘?"
제 답에도 무심했던 인상이, 일그러진다. 아니, 일그러지는것이 아닌 냉기를 띈 조소를 그려낸다.
그 모습에 첸이 표정을 굳히곤 소파위로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방금전만해도 적당한 긴장감을 그려냈던 테이블위는 두 사람이 내뿜는 날선 기류에 잠식당한다. 순식간에 틀어진 공기에 첸이 미간을 찌푸리는동안, 카이가 뒷말을 이었다. 조용하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로.
"박찬열을 도와주는 순간 너도 죽는거야."
"…무슨 근거로?"
"알아서 해석해봐. 네 잘난머리로."
카이가 내뿜는 기운과, 첸이 조용히, 그러나 소리없이 강하게 내뿜는 그것이 소리없이 부딪힌다.
자신을 향해 서늘한 경고를 읊조린 카이에게, 첸은 다문 입술을 몇 번 혀로 축이다, 곧 옅은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설마, 내가 네 손에 죽기야 하겠어.'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답변을 내놓으며 첸이 제 몫의 찻물을 넘겼고 곧 몸을 일으키는 카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검은 코트깃을 세우는 손짓를 뒤로하고 첸이 아쉬운듯 입을 열었다. '벌써 가는거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카이에게 그가 다시금 말을 꺼냈다.
"샤오위는 만나봤어? 네 할아버지가 널 찾지않던?"
옷깃을 메만지던 무심한 손끝이, 순간 멈췄다.
"알면 아는대로 입 다물던가, 모르면 뒤에서 캐보지 그래."
"그 말은 곧 내 손에 죽어봐라- 뭐 이런거지? 미치지 않고서야 널 캐고다녀 내가."
"잘 아네."
제 보고서에 따르면 분명 내일중으로 카이는 샤오위를 만나게 되 있었다. 탁자뒷편의 데스크위에 놓여있을 서류뭉치를 떠올린 첸이 흐음- 알듯말듯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느새 문 앞에 다다른 카이가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 손을 뻗음과 동시에, 뒤에서 넘어오는 목소리에 행동을 멈춘다. 문을 열려다 말고 고개를 돌린 카이가 말 대신 한 쪽 눈썹을 올렸다.
"뭐, 궁금한 건 아닌데- 요즘 재밌는 소문이 들려와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첸이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 박찬열이 뭐라고 했는데. 언제고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며 그가 조금 생각하는듯 하더니, 아- 하는 감탄과 함께 말을 꺼냈다.
"카이렌궁에 안주인이 납셨다는데. 진짜야?"
보고서 끄트머리에 적혀있던 이름이…작은 사진과 함께 영문으로 표기되어있던 코드네임을 떠올리는동안, 카이가 입을 열었다.
"소문이 빠르네. 생각했던것 이상으로."
"…정말이야?"
목이 보이지않을 정도로 세운 코트깃 사이로 카이가 웃었다. 목울대 저 깊숙한 언저리를 울리는 그 소리는 진심을 담고있는것이라, 첸이 의아한 표정을 짓곤 시선을 올렸다. 카이가 진심을 내비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와 함께, 문득 궁금해졌다. 카이의 표정을 저렇게 무장해제시키는 그 사람이. 그런 첸의 표정을 읽은 카이가 입을 열었다. '관심은 끄는게 좋아.' 금새 저렇게 굳은 얼굴을 하고 그렇게 말하면, 더 궁금해진다는 걸 카이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첸이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카이는 곧 열려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걸쇠가 걸리는 소리와 함께 카이의 그림자까지 사라질동안 첸은 그 자리에서 미동없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투둑- 투둑- 불규칙한 두드림의 소리를 내며 창문을 건드는 빗물에 그의 시선이 멈췄다.
이내 곧. 하늘을 뒤덮은 그것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세찬 비를 몰고 왔다.
*
카이렌궁의 서재는 이제까지 그가 봐왔던 일반 서재와는 차원이 다른 류의 것이라, 종종 경수의 발걸음이 그리로 향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때때로. 무언가에 홀린듯 서재로 향하는 시선은 오로지 순수한 학구열을 담고 있는것이기에 보통같으면 서재 출입을 막았을 경호원들도 그 눈빛에 이기지 못하는듯 문을 열곤했다. 인문학, 미학, 종교학, 이공계열까지 이르는- 장르와 분류를 망라한 장서의 향연을 목전에서 넘겨가며 경수는 나름대로 카이렌궁에서의 지루함을 달랠수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독서는 시간이 흐름에따라 제 나름의 지식기반을 좀 더 확고히 세우는 중요한 하루 일과가 되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루한, 아직도 어색한감은 있지만 처음과는 달리 꽤 편해진 타오와도 함께 종종 서재를 찾곤했다.
저마다 라캉의 철학, 현대사회의 요리집을 집어든 두 사람 사이로 타오가 최근 무술동향을 막 집었을 때였다.
"스파링도 모자라서, 책도 꼭 그런걸 집어야겠어?"
넘겨진 책장안에는 웬 동자승이 대련자세를 취해보이는 삽화가 그려져있었다.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 타오가 의자에 걸터앉아 계속해서 책장을 넘겼다. 읽는건지 훑는건지 정독에서 한참벗어난 태도를 짐짓 나무라며 루한이 맞은편 소파위로 몸을 뉘었다. 소파걸이를 넘어간 다리가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그리고, 저마다 책에 빠진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깨트린것은 경수였다.
"두 사람 모두 요즘 한가해요? 루한이야 원래 그랬다쳐도 타오는 요즘들어 날 너무 자주 본다고 생각되는데."
두꺼운 철학서위로 햇빛에 투과된 먼지들이 피어오르는것을 루한이 인상을 찡그리며 바라봤고, 타오는 개의치않고 대답했다. '카이의 명령이라고 생각하나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인 경수에게 타오가 덧붙였다.
"최근들어 카이가 경수씨를 만날 일이 없던건 사실이잖아. 앞으로도 종종 그럴테고, 카이렌이 워낙 바빠서 말이지.
그탓에 나보고 자기대신 경수씨를 지켜달래. 명령이라기 보다는 부탁으로."
"난 괜찮아요. 명령이던 부탁이던 잠들기전까지 날 쫓아다니는 경호원은 사절합니다."
"나도 거절은 거절인데."
클클거리며 장난기섞인 어조로 제 말에 답해오는 타오를 밉지않게 흘긴 경수가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덮었던 책을 펼쳤다. 재빠르게 목차를 읽어내림과 동시에 생각한다. 몇 일 사이 자신을 알게모르게 따라다니는 카이의 가드. 그러니까 황즈타오를. 카이와 같은 검은 머리칼을 눈썹까지 내린 저 남자에 대해서 경수가 아는것은 전무했다. 그저 남들이 아는, 카이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의 최측근이라는 것과 카이가 인정한 최고의 실력가.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론 샤오위가 몰래 붙여놓은 감시자라는 얼토당토않는 소리까지- 제 귀에 들려온 것들까지 합해서 정의내리자면, 타오는 상상이상의 실력을 상회하는 인물이라는 것. 단숨에 목차 1을 넘어간 책장을 신기하다는듯 쳐다보는 루한을 향해, 경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요?'
"경수씨, 확실히 천재 맞긴 하구나- 벌써 그만큼 읽은거야?"
아아- 그제야 시선의 의미를 알게된 경수가 대답대신 웃었다. 옅은 웃음뒤로 어쩔 수 없다는듯 눈매를 접은 그에게 또 다른 시선이 따라붙었다.
"이쪽 계통에서는 경수씨 모르면 간첩이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데- 전 세계, 내노라하는 해커들도 저 손에 무너졌다는거 아니야.
그러고보면 생긴거랑 반대로 노네, 딱 샌님 스타일인데."
장난스럽게 웃으며 제 속을 박박 긁어놓는 소리에 경수가 입술을 구겼다. 재밌게 굴러가는 상황에, 루한이 발을 얹었다.
"그럼- 나 깜짝 놀랬잖아. 경수씨가 세상에, 썬포그의 오필리아라니. 그 유명한 천재해커를 이렇게 만나뵐줄이야!
이래서 사람은 오래 살고봐야하는거지."
"하나도 재미없거든요 두사람?"
"뭐가? 우리끼리 얘기했는데? 안그래 타오?"
"요즘 카이를 못봐서 경수씨가 예민한가보지 뭐."
부득불 입술을 깨문 경수가 더 이상 두 사람을 상대할 생각조차 없는지 펼친 책장사이로 다시 시선을 옮기자, 타오와 루한의 말소리도 그에따라 멎었다. 진중한 눈길로 책을 빠르게 읽어나가는 경수의 모습을 타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카이가 말한대로 서재구경을 시켜준일이 잘한 일이었다. 최근들어 뭔가에 홀린듯 제 방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보인다는 경수를 카이는 진심으로 염려했다. 혹시나 답답한 카이렌궁안에서 제 어머니처럼 경수가 말라가는것은 절대로 두고볼수 없는 일이라고, 고심끝에 그 대안으로 경수의 시선을 돌릴곳으로 서재를 지목한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경수는 한 곳에 정신이 팔리면 오로지 그 하나만을 쫓아가는 타입이었다. 지금 읽고있는 라캉의 철학만해도 최근 이틀사이에 서재를 들리면 꼭 찾는 책이었고, 저번에는 뜬금없이 빌게이츠 자서전을 집더니 그것만 삼일내내 독파하지 않았나. 그에비해 요령없이 이것저것 찔러나보는 자신과는 달리 책을 고를적마다 진지하게 빛나는 그 눈동자는 어느때보다 즐거워보였다. 독서가 좋은건가, 아니면 순수한 배움의 즐거움인가.
그리고, 경수를 쫓는 타오의 시선을 일찌감치 알고있던 남은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타오는 여기서 지낸지 꽤 되니까 알거고…경수는 뉴욕의 겨울을 아직 모르겠네?"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고개를 들어 루한에게 고개를 저어보인 경수가 물었다. '그건 왜요?' 제게 물어오는 경수의 얼굴을 바라보던 루한이 으흠- 하는 알듯말듯한 소리를 내었고, 그와 동시에 그가 몇 일전 나눴던 대화를 되짚었다. 알면 알수록 다른면모를 보이는 저 도경수라는 사람이, 꽤 흥미롭다는 눈을 하고서.
'들었어요. 다쳤다고.'
'알면서도 왜 모른척하는거야? 카이가 섭섭하겠는데.'
'설마 카이가 쉽게 죽을 사람도 아니고- 상처도 심하지 않다면서요.'
'심하고, 안심하고의 문제가 아냐. 당신이 카이를 걱정조차 안하는게, 의외지.'
경수는 모든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히 카이가 최근들어 바빠졌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카이의 피습소식까지 모두 알고 있을 정도라면- 그의 상처가 꽤 심각하다는 것도 충분히 알 법한 얘기였다. 생명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라고 들었지만, 몇 일간은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었다고- 그 정도면 꽤 심한거 아닌가 싶어 경수에게 이 같은 사실을 전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무심한 목소리라 루한은 그때 꽤 당황했다. 그리고. 알면서도 모른척, 모르는척 모든것을 알고있는 도경수란 남자가-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물론, 지금도. 그리고 더불어서.
"단단히 준비해둬. 꽤 살벌하니까."
당신과 카이사이의 일이던, 썬포그와 카이렌의 싸움이던. 둘 중 하나로인해 무언가 큰 일이 터짐을, 짐작했으니까.
*
'박찬열이 널 죽이려 들게다.'
'조만간 네 수족을 잘라내겠지. 그럼 넌 벼랑끝까지 밀리는거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채로.'
'최근들어 썬포그의 블랙머니가 어마어마하게 늘었다는건 알겠지. 그 반면에 로렌스 맨하탄은 어떠하냐.
네게 충성을 맹세하던 주주들은 서서히 등을 돌리고 투자자들은 저마다 눈치보며 발빼기에 급급하다.
이젠 쇠락만이 남은게야.'
모처럼 만난 손자에게 늙은 호랑이는 악담을 퍼부었다. 단순히 마약거래때문에 미국땅을 밟은모양은 아니었는지 로렌스 맨하탄을 걸고 넘어졌다. 제 얼굴을 보자마자 찻잔을 집어던지려는 손길을 타오가 제지하자 영감은 찻잔대신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제 귓가를 아슬하게 스치고 벽에 부딪혀 나뒹구는 그것을, 카이는 비웃으며 이죽거렸다. '눈앞에 두고도 못 맞추는걸 보면, 세월이 저주스럽게도 흘렀군.' 타오의 거센 악력에 덜덜거리던 손을 뒤로하고 카이는 샤오위를향해 한껏 조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대화는 얼마 안가 끝났다. 당장 중국암시장에서 손을 떼라는 샤오위의 말을 카이는 가뿐히 무시했고, 샤오위는 노기가 올라 카이의 뺨을 내리치려했다. 재빨리 손을 잡아챈 타오가 아니라면 아마 제 얼굴위로 굵은 손자국이 올라왔을거라며, 그가 생각한다. 온기하나 없이 차갑게 물든 침대위로 카이가 침대헤드위로 제 고개를 뉘였다. 딱딱한 그것 위로 그의 머리칼이 내려앉았다. 그는 다시금 생각을 이었다.
'박찬열과 네 다른점을 알려주랴?'
흥미없는 대화에 자신이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무거운 천장아래 카이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사람을 제 편으로 이끄는 반면에, 넌 다룰줄만 알아. 그 사소한 차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넌 모를게야.'
'도구와 조력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찬열은 이제 시작이야.
넌 끝을 달리고 있겠지만서도. 카이, 내 손주야. 네 목을 조심하거라.'
마지막, 아마도 제 걱정은 더 이상 없을거라는 얼굴의 샤오위가, 자신의 목숨을 염려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늙은 호랑이의 당부를 뒤로하고 자신은 미련없이 문을 열어 자리를 나섰다. 그 뒤로 샤오위가 당장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는 소리는 들었다. 자신을 만나기 전에 박찬열을 만났다는것도 일찍이 알고 있었다. 흑사회의 검은 호랑이가 제 걱정을 하다니, 침묵만이 가라앉은 방 안으로, 카이의 나즈막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웃음이라기엔 뭣한, 비웃음에 가까운.
첸은 제 제안을 거절했고, 박찬열은 샤오위를 비밀리에 만났으며 샤오위는 제게 박찬열이 자신을 죽일거라 으름장을 놓았다. 기가막힌 전개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 사람을, 카이가 생각했다. 최근들어 독서에 여념이 없다는 그를, 카이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제게 무감할 정도로 신경쓰지 않는점이 마음에 들지않았지만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을 계획하지않는것만 해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었다. 지금쯤 한창 잠에 빠져있을 경수를 떠올리며, 카이는 제 과거의 시간을 꺼냈다.
'이 꽃- '
'아. 이 꽃? 이번 시즌에 새로 출시된 품목인데, 보통 장미와는 좀 다르죠?'
'…색이 다르네요.'
'흑장미에요. 블랙로즈.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 이라는 꽃말을 담고있어요. 꽤 낭만적인…'
과거의 경수는 자신을 알고있다. 그런데 기억하지 못한다. 왜 도경수는 자신을 잊어버린걸까. 그는 왜.
'종인. 김종인.'
'아-'
'다음번에는, 종인이라고 불러줘요.'
똑똑한 경수가 고작 7년전의 인물하나를 기억하지 못할리가. 그렇다해서 단순히 자신을 모른척하는것, 어줍잖은 거짓말을 늘어놓는것도 아니었다. 제게 대답을 요구할 때마다 올곧이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은 진심이었다. 마치, 제 과거속에 나란 존재는 있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그럴때마다 불쾌한 감정을 억눌러야만 했던 카이는, 이제 어떤 방식이던 경수의 기억을 되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혹여나 제가 감당할 수 없어 잊어버린 기억이라면 그의 손으로 다시 상기시킬 생각이었다.
'꽃을 좋아하나 봐요. 종인씨는.'
'…꽃, 안 좋은데…관리도 어렵고, 먼지만 쌓여서.'
'음…싫은데 매일 꽃보러 오는 사람도 있나?'
'꽃 보러 오는거 아니에요.'
'응? 꽃 좋아하는거, 진짜 아니였어요?'
'그쪽이요. 꽃 보다 당신보러 오는건데.'
거추장스레 묶인 리본을 풀어내린, 흐드러진 꽃뭉치를 건내던 자신과 그것을 받아들던 경수. 아직 두 사람 사이의 과거는 수도없이 남아있는데 잊었다니…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어낸 카이가 사방을 가로막은 어둠속에서 눈을 감았다. 경수를 떠올리다, 과거를 떠올리며 그는 이번엔 또 다른 과거의 시간을 끄집어낸다. 몰아치는 과거의 잔상속에서 카이는. 제게 손을 내저으며 목숨을 구걸하던 아버지와, 장미정원에서 말라가던 어머니를, 제 발치에서 죽어가던 여자들을 마주했다. 복잡한 소용돌이었다. 그것은.
'종인아. 엄마는 멀리 갈거야…아주 먼 곳으로…그곳으로 갈거야-'
어머니는 그 말을 남기고 죽어버렸다. 장롱위에 제 목을 매달아.
'죽어버려!! 죽어라! 너 따위 아들놈은 필요없어, 더러운 창년의 새끼같으니!!'
말할것도 없이. 과거, 그의 아버지는 제 손에 죽었고.
'…고…마워요.'
단 하나. 나머지 것들을 무색케하는 가장 빛나는 단 한사람. 그는 이제 제 곁에 돌아왔다.
하지만, 충분히 기뻐야 하는 일임에도. 카이는 무섭게 얼굴을 굳힌채 고개를 숙였다. 감았던 눈이 떠올랐다. 그 위로 담고있는 감정은, 고통이었다. 갑자기 찢어질듯 제 머리깨를 치고 드는 두통에 카이가 아윽-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시트를 쥔 손가락 사이로 주름이 성켜들었다. 생각을 잠식한 것은 경수인데, 현실에서 옭아메는것은 갑작스런 두통이다.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과거의 자신을 따라붙는 고통에-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그의 미간이 찌푸러지다, 곧 고르게 내뱉는 숨소리에 천천히 풀렸다.
"하아…하으…하…"
어느새 이마위로 베어든 땀방울을 손등으로 훓으며 카이가 창밖너머를 바라봤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뒤덮은 초저녁. 붉은 기운을 담은 눈동자가 미약한 고통을 담은채 형형하게 떠올랐다. 아직 벌어놓은 시간은 충분하다, 고 생각하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자잘한 상처와 흉터로 얼룩진 몸이 카펫위를 걸었다. 제 과거의 발목을 잡는 잔상은 이제 빛과 어둠을 가리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가운을 몸에 걸치며 그는 침실을 나선다. 문 밖으로 내딛기전, 카이가 고개를 돌렸다. 제 어머니가 죽어버린 곳에서 잠을 청하는 자신을, 경수는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통속에서 잠드는 자신을 그가 감싸줄 수 있을까. 창너머로 들이치는 노을에, 카이의 시선이 물들었다.
hello … ^^ | ||
여러분. 주말 잘 보내고 있나요?
저는 지금, 몸 상태가 엉망입니다 ^^;;;
평소같으면 무조건 달아드렸을 답댓도 달아드리지 못한 분이많아요. 다름아니라 손가락에 무리가 왔는지 자꾸만 통증이 느껴져서 오늘내일 내로 병원을 찾아갈것 같습니다.
진료받는대로 약이던 뭐던 처방받아서 다시 답댓 달아드릴게요;; 혹여나 못달아드린 분들은, 너무 괘의치 마세요^^ㅜㅜ;; 조만간 다 달아드려요^^*...
이번화는 제 마음에 썩 드는 화는 아닌데;; 독자님들 보시기엔 어땠는지 모르겠네요;; 여러모로 부족한 글 읽으시느라 수고가 많으세요ㅜㅜ 암튼, 오늘은 첸과 카이의 대화를 내세우면서 루한과 경수, 타오를 엮어봤습니다. 원래 루한경수 조합이었는데, 타오 비중이....하..또르르.. 이 세사람을 엮었어요^^ 그냥 이들이 이렇게 사는구나- 하고 읽으시면 됩니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부분에 나온 카이의 독백신. 경수와 카이의 과거를 쬐끔- 드러내봤는데...어째..괜찮은가요ㅜㅜ;; 고통을 호소하며 머리를 감싼 종인군, 너 괜찮니.. 여러모로 다사다난한 14화였습니다. (흑장미...카이와 잘 어울릴것 같아서 골랐는데!! 꽃말이 짱이에요..!! 깜짝놀랐다는...)
다음화 스포는
1. 백현백현. 덤으로 닥터김 2. 오비서와 그분. 3. 보스와 부하직원의 위험한관계.
수요일 뵐게요~ ㅜㅜ 쾌유여부에 따라 목요일 올수도 있습니다.ㅜㅜ 다시한번 체력이 국력입니다 여러분...몸 애끼세요ㅜㅜ!!!!
(비젬은 Beyonce - Diva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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