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는 끙끙대며 장바구니에 담긴 먹을것들을 옮기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루한도 방 밖에서 티비를 보고 있을테니 오늘 저녁은 나가서 사먹고, 내일은 다시 엑소를 찍는 본연의 업에 충실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기분 나쁘다. 어디 붙여놓을 놈이 없어서 민석이랑 루한을 붙여놔? 경수는 씩씩대며 장바구니를 조수석에 던져 놓은 후 안전벨트를 맸다. 얼마 되지 않아 주머니에서 '사랑합니다~'하고 울리는 목소리에 경수의 표정이 사르르 녹더니 주머니 안에서 울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휴대폰 안에는 경수와 자주 연락하던 사생의 번호가 담겨있었다. 김종인, 김민석 곧 아웃 할 것 같아. 오늘은 일찍 들어가려나봐.
내용을 확인한 경수는 말없이 휴대폰 화면을 껐다. 어떻게 하지? 경수의 얼굴에 한참동안 고뇌스러운 표정이 돌았다. 이내 손가락을 움직일까 말까 움찔하던 경수가 조심스레 타자를 내려쳤다.
루한이랑 갈게.
Mr. Black!
경수와 루한은 종종 종인과 민석의 인과 아웃을 보곤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피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아마 엑소와 다른 멤버들. 그리고 종인과 민석은 경수와 루한이 가끔 자신들의 인과 아웃을 보러 온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경수는 차를 끌고가 차 안에서만 둘을 응시했고, 그것은 경수의 방침을 따라 루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중국에서 한국으로 온 루한이 엑소를 만나게 해달라는 간곡한 청을 들었을 때 그 사슴같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것을 얼마나 떨쳐버리기 힘들었는지도 그랬지만. 한국에 왔으면 한국법을 따라야 한다는 경수의 단호한 거절에 루한은 왜? 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하나하나 설명해 주느라고 힘들었지만, 결국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납득하는 루한의 얼굴에 내색은 안 했지만 진땀을 뺐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종인이와 민석이의 아웃을 보는 것은. 김종인이 공항에서 넘어지던 날 이후로 경수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곰곰히 생각을 해 보니 자신도 종인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경수는 차를 빨리 몰았다. 세게 밟아 도착한 집 안 이상하리만치 감도는 고요한 정적에 경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루한이 자나? 설마, 그럴리가 없다. 새벽에도 시끄러워 자라고 소리지르면 루한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제 할일을 마쳐놓곤 아침엔 자신보다 더 멀쩡한 표정으로 일어나곤 했으니까.
경수가 장 본 것들을 탁자위에 올려놓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우유 생선류, 육류는 모두 냉장고 안에 넣어놓았고, 씨리얼같은 것들은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조심스레 루한의 방문을 두드린 경수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히, 루한의 방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루한이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였다. 경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일 쳤구나. 경수는 재빠르게 집 주위를 훑었다. 부엌, 자신의 방. 그리고 거실. 이내 부엌에 마우스 잔해가 흩어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경수의 콧구멍에서 김이 쏟아져 나왔다.
"이 개새끼야!!"
한시간 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수를 기다리며 루한은 방 밖으로 나가볼까도 생각했지만 언제 쳐들어 올지도 모르는 저 야생마같은 경수를 기다리느라 루한은 다리에 힘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마우스를 부순것을 확인한 경수가 날뛴지도 삼십분 정도가 지났다. 아직까지도 괴물같은 포효가 방 밖에서 들리고 있었다. 경수는 자신이 알아듣지도 못할 욕을 씨부리며 한사코 루한이 방 밖으로 나오길 종용하고 있었다. 루한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멘. 하느님 살려주세요. 이제껏 한국어 욕이 다양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다양한줄은 몰랐다. 경수는 알고 있던 단어에 알고 있던 단어를 소리지르기도 했고, 모르던 단어에 알던 단어를 조합해 쓰기도 했다. 루한은 제 귀를 틀어막고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십오분 정도가 더 지나고 나서야 경수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방 밖에서 루한을 불렀다. 물론, 이렇게 당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에 루한은 추호도 밖으로 나가볼 생각은 없었다. 절대로. 방밖의 경수는 자신이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는 루한을 생각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긴 하루이틀도 아니니 이렇게 쉽게 나올거란 생각은 추호도 안했다. 대신 경수는 조금 난폭하게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경수의 난폭이야 하루이틀도 아니었으니 여기서 더 난폭해져봤자 무얼 하겠다구. 경수와 루한은 서로 같이 살면서 암묵적인 룰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가수의 사진이나, 남이 찍은 사진을 시기하여 지우거나 인화한 사진을 지우지 말자는 것이었다. 경수가 먼저 그 암묵적인 룰을 깨기로 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지만. 거실에 걸려있던 민석이 사진을 찍어 루한의 번호로 전송했다. 이내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루한이 성큼성큼 방 밖으로 기어나왔다. 원망스러운 눈빛의 루한이 액자를 들고 자신을 거만하게 쳐다보는 경수에게 다가가 경수의 팔을 확 채잡고는 민석의 사진을 빼앗아들었다. 그 행동이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사진을 잡고 협박하는 악인이 된 것 마냥해 경수는 당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루한을 응시했다. "우리 서로 사진은 건들지 않기로 했잖아." "너, 마우스는 왜 부셨는데?" "도경수." "사진 집어던질 생각도 없었어. 그냥 사진만 찍어서 보낸거였지." 짜증스러운 경수의 말투에 루한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제법 세게 잡았던 모양인지 경수의 손목에 붉은 자욱이 남아 있었다. 경수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루한을 쳐다보곤 말없이 집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섰다. 루한은 말없이 경수 뒷모습을 응시하다 액자를 조심히 책장에 올려놓았다. 종인의 사진 밑에 작게 종인이랑 만난날. 하고 적혀있는 글자를 보자니 한숨만 터져나왔다.
경수는 조심스레 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엑소네 숙소였다. 원래 사옥으로 가 볼 생각이었으나 이미 아웃하고 없다는 사생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짜증나는 마음을 무엇으로 가라앉힐까 하다가 종인을 보는게 제일 낫다고 생각했다. 숙소야 차타고 가면 멀어도 오분이 채 걸리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경수는 숙소 가까운 곳에 차를 대어놓고 숙소 앞에서 죽치고 있는 사생들을 응시했다. 보통은 썬팅된 차 안에서 엑소가 숙소로, 혹은 사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곤 했으나 이번엔 달랐다. 루한과 싸워 짜증게이지가 백퍼센트까지 차오른 지금 조금 더 실물다운 실물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수는 제법 대담하게 차에서 내려 멀리서 오는 벤을 응시했다. 뒤따라 사생택시도 몇대 들어오고 있었다. "어?" 음료수를 사들고 오던 사생이 의아한 소리를 냈다. 어디서 자주 보던 얼굴이었다. 제 눈을 가늘게 뜬 사생이 이내 아, 하고 알았다는듯한 소리를 냈다. 경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뭘 꼬라봐. 경수의 말꼬라지를 들은 사생이 미스터블랙 홈마? 하고 되물어왔다. 경수는 대답대신 세번째 손가락을 올려보였다. 이내 엑소가 탄 벤이 숙소 앞에 멈춰섰다. 처음으로 찬열이, 백현이, 종인이, 크리스, 민석이.. 옆에서 달라붙는 사생들을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응시한 엑소가 좀 비켜주세요. 하고 이야기해도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그냥 존나 쌔려버리지." 경수의 혼잣말에 옆에 멍하게 서 있던 사생이 에? 하고 되물어왔다. 뭐. 경수가 작게 대답하곤 차 안에 올라탔다. 띠꺼운 경수의 말투에 당황한 사생이 경수가 난폭하게 차를 빼자 뭐야! 하고 소리지르며 차유리를 두드렸다. 경수는 차유리를 중간정도 내리곤 세번째 손가락을 차창밖으로 빼보였다. "좆까." 경수다운 유유자적함이었다. 아니, 당사자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지 말라고 손을 치던가. 약간의 소심한 반항은 할 수 있는거 아닌가? 곱씹고 곱씹어봐도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연예인이 무슨 벼슬이라고! 경수가 작게 토해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집 안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걱정이 됐는지 루한에게 여러통의 전화와 문자가 왔지만 경수는 아예 휴대폰 배터리를 뺐다. 차 안에서 자던가, 알아서 할 생각이었으니 신경은 꺼 주셨으면. 경수가 시동을 끄고 눈을 껌벅거렸다. 루한이 꽉잡아 생긴 손자국은 없어졌지만 배신감이 왈칵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연예인은 연예인이고 우리는 우리인데. 세상엔 정말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십년지기 친구였다가도 연예인이 뭐라고 싸우고 물어뜯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더 잘알고 있기 때문에 경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꼈다. 루한을 좋아했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명백한건, 종인이에게 느끼는 좋아한다는 감정과 루한에게 느끼는 좋아한다는 감정은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점이었다.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 없으니 답답한거겠지만. 경수는 몸을 일으켜 차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 한 후 다시 의자 위로 몸을 뉘였다. 피곤했으니 잠을 좀 자두어야 했다.
"아, 종인아." "어?" "아까 미스터 블랙 홈마 왔던 모양이던데?" 백현의 의아한 목소리에 종인이 어? 하고 제법 밝은 목소리를 냈다. 사생을 좋아하는건 아니였지만 이제껏 경수가 사생을 뛰어오는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다 이 주변을 지나간거라고만 생각했다. 게다가, 경수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제가 웃어주거나 신나는 일이 있어 몸을 들썩이면 귀여운 하트입술을 함박 벌리며 여기를 봐달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게 말하는 투는 거칠었지만 속은 여림이 틀림 없었다.
"형이 어떻게 알아?" "아까 사생 몇명이 이야기하는거 들었거든. 저거 미스터블랙 홈마 아니야? 왜 왔대? 하는거. 남자찍홈이야 얼마 없으니까. 남자사생은 듣도보도 못했고."
백현의 말에 종인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왔으면 얼굴이라도 보고가지. 김빠지는 종인의 목소리에 백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야, 아서라. 어차피 왔어도 얼굴도 못 봤을거 아냐. 사생들 떼어낸다고 얼마나 힘든데. 그리고 거기에 남자까지 들러붙으면…. 무슨상상을 하는지 백현은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긴, 오늘도 배려없는 연습 강행이라 남자까지 붙었으면 떼어내는데 애 좀 먹었을지 모른다. 종인은 고개를 젖혔다. 그런다고…, 들러붙었을까? 그런 마음은 전혀 없어보이는데. 종인은 물먹은 솜마냥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갔다. 피곤하지도 않은지 멤버들이 모여 티비를 시청하고 있었다. 하긴, 몸을 쓰는것의 대부분은 종인이었으니까 다른 멤버들은 적당히만 하면 되었지만 센터인 종인에게는 남들보다 더 잘나보여야 할 의무가 있었다. 종인은 물끄러미 거실에 걸린 제 사진액자를 응시했다. 미스터블랙 홈마가 보내준 사진을 걸어놓았다. 다른 멤버들도 적당한 크기의 사진 액자들을 걸어놓았다. 역시 민석은 민스마스터. 곰곰히 걸린 액자들을 응시하던 종인이 티비를 보던 민석과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였다.
"먼저 씻을게요." "그러든지."
멤버들은 씻을 생각이 없는지 티비에만 눈을 붙이고 있었고 종인에게 대답한건 준면 하나뿐이었다. '아아~!' 작게 탄성이 터져나왔다. 보나마나 축구 골이 먹히지 못했을 테지. 종인은 속옷과 잠옷을 챙겨든 후 욕조 안에 몸을 담궜다.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연기자욱 사이로 둥둥 뜨는 것은 여지없는 미스터블랙 홈마. 동글동글한 눈을 부라리며 옆에 있는 여성들을 밀치고 종인에게 웃어달라며 애걸복걸 하는 얼굴이 생각났다. 종인은 픽 웃음지었다. 그나저나,
"다음주는 스케줄 나오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