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민루] 나는 펫 04 W. 냉동만두 병실 밖으로 나온 민석이 몇 발짝 걷고 있을 때 뒤에서 시원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석씨이-!" 멀리서부터 휠체어를 빠르게 밀며 다가오는 시원을 보고 민석은 역시 말은 말이구나 싶었다. 어떻게 저렇게 빠를 수가 있는지 병원을 누비고 다니는 그는 마음만 먹으면 병원 전체를 저러고 돌아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천천히 움직여요. 그러다 넘어지면 또 다쳐요." "우리 같이 초밥 먹어요!" "아.. 제가 초밥을 못먹어서.." "고양이는 초밥 싫어하나?" "사실 고추냉이를 못먹어요. 매워서." 민석이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한 대책은 결국 고추냉이였다. 물론 순 거짓말이었다. 민석에게 초밥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민석에게 초밥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병실 안의 희철과 마주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우리 고양이씨는 입맛도 애기네. 에이, 아쉽다." "저는 우리 오너들 오면 먹으려구요." "어쩔 수 없죠 뭐. 저 먼저 들어갈게요" 시원이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민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너들이 오면 같이 밥을 먹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단지 그들이 언제 올 지 모른다는 것과 병실 안의 시원과 희철 때문에 갈 곳이 없어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할 말 있어." 병실을 나온 희철이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던 민석에게 말했다. "여기서 해요." "조용한 곳에서 얘기하고 싶다."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병원 휴게실이었다. 때마침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희철은 음료수 두 개를 뽑아 하나는 민석에게 건네주고 하나는 자신이 원샷한 후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었다. 구겨진 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저도요." "맨 처음에, 네가 없어졌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희철은 민석과 암묵적으로 입밖으로 금기시하던 일을 수면 위로 떠올리고 있었다. "항상 집에 오면 네가 있었지. 내가 무슨 짓을 하건 넌 절대 떠나지 않았어. 그래서 믿고 있었나봐. 너는 언제나 내 옆에 있을 거라고." "저도요." 기계적으로 같은 말을 내뱉는 민석이었지만 그것은 진심이었다. 민석 또한 그렇게 생각했었다. 조금 거리를 두고 선 그들은 위태롭게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네가 미웠다. 아무리 찾아도 넌 안보였지. 사방팔방 돌아다니면서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너를 찾을 수가 없어서 화가 났어." "....." "네가 아니라, 나한테 화가 났다. 네가 나에 대해 잘 알듯 나도 너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근데 아니더라. 난 너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이름이 김민석이라는 것, 고양이라는 것밖에 없더라." "그만..." "민석아. 나는, 나는 너무 늦게 알아버린거야...." 희철이 민석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민석이 아는 희철은 결코 남 앞에서 무릎을 꿇을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인지부터 모르게 희철은 울고 있었다. 줄줄이 이어지는 생소한 일들 때문에 민석은 눈앞의 사람이 제가 아는 희철인지 의심할 정도였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돌아가자 민석아. 잘해줄게..." "....."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 "나랑 같이 우리집으로 가자..." 민석이 조용히 희철의 앞에 쭈그려 앉아 희철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아, 가엾은 사람. 그의 표현은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서툴었다. 그 감정들을, 그는 잘 표현할 줄 몰랐다. "나 오너 두 명인거 알죠?" "..어." "나한테 엄청 잘해줘요. 과분하다고 느낄만큼 걱정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주고." "다행이네." "근데 그럴수록, 당신한테는 그런 걸 받아본 기억이 없었어요." "이제부터라도 잘할게. 그러니ㄲ.." "아니요. 필요 없어요. 나 지금 내 생활에 충분히 만족해요. 당신한테 받지 못했던 사랑들 지금 훨씬 더 많이 받고 있으니까." "....." "나 이제 당신한테 갈 생각 요만큼도 없어요. 그러니까 나 잡을 생각 하지 말고 시원씨한테 잘해요. 그쪽 많이 좋아하던데, 물론 그쪽도." 민석은 희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치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민석은 스스로가 선을 긋고 있었다. 민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희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쪽 연기 많이 늘었네요. 무릎 꿇을 줄도 알고. 이제는 눈물 연기도 배웠나봐요." 희철이 주먹을 꽉 쥐는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민석은 아랑곳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진짜 웃겨서, 하, 뭐요? 화가 나요? 자기한테? 저기요,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랬어요. 당신 말대로 나 당신에 대한 거라면 다 알아요. 처음 나를 입양한 날부터!!!!!! 방금 같이 돌아가자는 그 모든 말이!!!!" "......" "당신 지금 연기하는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눈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쓰는 민석을, 희철은 천천히 올려다보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많이 컸어. 꼬맹이." 방금까지도 눈물을 보이며 애처롭게 빌던 희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민석의 앞에 남은 건 한쪽 입꼬리만을 올린 채 웃는 희철이 남아있었다. 희철이 민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아쉽다. 속을 줄 알았는데 용케 알아챘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요." "전만큼 멍청하진 않나봐. 오너가 둘이면 배로 똑똑해지는건가. 아- 오너들이 부자라 그런가? 그 사람들이 네 교육까지 시켜주디? 이야, 김민석 제대로 팔자펴고 산다, 너." "닥치고...나가." "워워- 진정해. 원래 그렇게 입이 거칠었나?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양이 발톱이 꽤 아프더라고. 나 먼저 간다." 희철이 떠난 휴게실에서 민석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잔인하고, 잔혹했다. "흐윽.. 흑..." 그제서야 간신히 참아오던 눈물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앙 다문 잇새로 억눌린 울음소리가 튀어나왔다. 희철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석 또한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민석에게 있어 희철은 제게 첫사랑이었다. 그래서 희철이 손에 쥐어준 캔을 마시지도, 그렇다고 버릴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짧은 찰나에 전해진 온기를 잃기 싫어 캔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한동안 캔을 잡고 울던 민석이 간신히 진정하고는 휴게실을 나서려 했다. "크리스... 루한..." 휴게실 문 앞에는 민석만큼이나 착잡하게 굳어있는 두 오너가 말없이 민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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