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나는 친구와 싸워본 적이 없다.
그래서 만일 나의 발 앞에 그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면, 나는 그에 대한 대처방법을 몰라 내 앞에 펼쳐진 땅 위로 한 발자국을 내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지 않은 길은 얼마나 깨끗한가.
그랬다. 내딛지 않고, 돌아가는 것을 택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지 않은 깨끗한 길은 누군가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질 수 있겠지.
-
[부재중 전화 2통]
-변씨가문며느리-
변백현의 핸드폰에 저장된 변씨 가문 며느리는 나를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누가 봐도 티가 날 듯 적어 놓은 그 말은 곧 얘는 나를 짝사랑 하는구나. 라는 생각과 직결됐다.
나는 두 사람에게 무어라 말을 했더라?
“안 나오냐?”
문턱에 걸쳐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세훈이 칼바람과 같이 말했다.
얇고 날카로워 그것을 쉽게 알아챌 수도, 건들 수도 없었다.
변백현이 저장해 둔 ‘변씨가문며느리’의 뜻은 무엇이며,
세훈이는 왜 문 밖에서 나를 저렇게 아무 사람도 아니라는 듯이 부르고 있는 건지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딛는 발에 닿은 바닥이 딱딱하고, 차가웠다.
조심스레 세훈이의 눈을 바라보면서 걸음을 옮겼다.
반 발자국씩 움직이는 내가 여간 답답했는지 세훈이는 ‘안 오냐고.’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방의 모든 물건들이 빙하로 보였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댔다.
머릿속에선 변씨 가문 며느리가 누군지. 내가 변백현에게 전화를 건 횟수는 2번 이었고,
변백현은 내가 발신한 전화를 모두 받지 않았다. 고로, 부재중 전화 2통.
변백현의 핸드폰에서 본 부재중 전화는 변씨 가문 며느리에게서 온 전화였고,
그것은 곧 나를 뜻하는 것이며,
세훈이는 변백현의 핸드폰을 봤고,
변백현이 짝사랑하는 그 여자는 나였다.
또한 세훈이와 변백현은 이미 오랜 시간을 냉전으로 보내는 중이었고,
그 말은 세훈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변백현에겐 너의 편을 들어주겠다고 말을 하고,
세훈이에겐 변백현과 화해하라고 말을 했다.
걸어가는 등이 참 말랐다.
사골국이 사라진 손이 허공에 나풀나풀 거리는 손을 일부러 옆자리에 서서 꼭 잡아갔다.
나보다 한 두 마디는 더 큰 것 같은 세훈이의 손은 거칠었다.
내가 손을 잡고 걸어도 그 아이는 맞잡은 손을 단 한 번도 내려다보지 않았다.
태양은 사라질 준비를 한다.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날은 점점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세훈아 마트 들렸다가 가자.”
“왜?”
“스파게티 좋아해? 만들어 줄게.”
세훈이는 굳이 나의 뒷말에 꼬리를 달지 않았다.
맞잡은 두 손을 손가락 하나하나에 깍지를 껴 다잡고, 집 근처의 마트 쪽으로 걸음을 옮겨갔을 뿐이었다.
“크림 스파게티 해줄게. 나 이거 엄청 잘 해. 너 백번 반할 준비 해둬.”
“백번은 성에 안 차.”
“그럼 몇 번 반할래?”
“몰라. 그게 뭐가 중요해.”
“왜 안중요해?”
“니가 나한데 반해야지.”
“난 맨날 반하는데? 아까 사골 들 때도 반했어.”
“...다행이다. 그럼... 변백현보다..”
‘아니야.’로 끝마친 세훈이의 뒷말이 궁금했다.
그 집에서의 일도 그렇고 변백현의 일에는 날카롭고 예민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세훈이는 마트 안에서 정말 카트의 손잡이만 잡고 끌고 다니며 그 안을 나와 함께 누볐다.
여전히 기분이 저조한 세훈이에 쉽게 말을 붙일 수 없었고,
차라리 마구 화를 내면 내가 풀어줄 수라도 있을 텐데,
이러면 화가 난 것인지 나지 않은 것인지 영 모르겠다.
결국 집의 주방 안까지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걸었다.
세훈이가 장을 봐온 재료들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나를 한 번 돌아보고는 이내 거실의 쇼파가 아닌 바닥에 주저앉았다.
“식탁에 앉아 있어도 되는데, 거기에 있을 거야?”
“응.”
이곳으로 와 내가 요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봐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 수가 없어지고 말이 짧아지니 저건 삐진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화를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고 안에서 불같은 소용돌이를 치고 있구나 싶었던 이유는,
세훈이가 바닥을 네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듯이 치고 있었다.
까만 텔레비전 앞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티비 앞에서,
-
면을 삶고 소스를 만들어 가다 보니 뒤편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아 슬쩍 돌아보았는데,
세훈이는 이내 거실이 아닌 식탁에 두 손으로 꽃받침을 하고 앉아 다리를 동동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 같은 그 모습에 미소를 짓고, 이내 면발을 젓가락으로 한 가닥 집어 들어 올려 내 입 속으로 가져다 대었다.
젓가락이 입 속에 물리자 세훈이가 식탁에서 일어나 말을 했다.
“야.”
“?”
“멈춰봐.”
뒤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나는 입 밖으로 길게 끈을 만들어 내놓은 채로 뒤를 돌아봤다.
멈춰보라는 소리에 들고 있던 젓가락이 혹여나 흔들리지 않게끔 힘을 줘가며 가만히 멈춰 있자 세훈이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손은 내 두 팔뚝에 위치했고, 머리가 가슴 밑쪽으로 내려가더니 면발의 끝을 잡아 올려 이내 호로록 빨아들였다.
온전히 두 팔에 갇혀 버렸다.
면발은 분명 맹 맛이 아닌가요?
“변백현 보다 내가 더 좋지?”
숨 막히는 시간이 끝난 후에
이곳은 우리 집이라는 생각과 그에 동반된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세훈이는 내 등에 감싸진 두 손 중에 한 손을 들어 올렸고,
그와 동시에 나의 얼굴도 함께 내 눈높이보다 조금 더 위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유리알을 품은 듯 보였다.
눈동자가 정처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나의 눈과 귀, 얼굴의 곳곳을 바라보며 담고 있었다.
눈물을 삼킨 듯한 눈 이었다.
“날 더 사랑하잖아.”
“만나지 마.”
“걔보다 내가 널 더 사랑해.”
변백현한테 네가 우주라면, 나는 우주 밖까지 가질 수 있어.
<암호닉>
캘리포니아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안양워터랜드 아르바이트생 사지 마비 사고… "평소 안전관리자 거의 못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