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착각이야 12
모래알이 반짝이는 여름이 시작되었다.
우산을 손에 드는 사람이 적잖이 많아졌고,
땅에선 열기가 올라와 세상을 이글이글거리게 만들었다.
보강은 지루하다.
심리학이라는 게 질긴 이론수업이라 그런지. 말만 잔뜩 써진 책을 보고,
책을 읽으시는 교수님을 보고. 다시 책을 보니 책에 쓰여 진 문장과 단어들이 뿌옇게 보였다.
나는 시력이 좋았지만, 문장은 뿌옇게 보였다.
어차피 기말고사는 지났고 성적은 이미 나오지 않았을까?
교수님께서 열강중이시라 쉬이 교탁의 정 가운데에서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그저 먼 허공을 바라보면서 눈뜨고 자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내 능력이 부족해 하지 못했다.
“경쟁자의 실제적 혹은 가정된 이득에 대한 부러움의 감정이야. 특히 대상의 사랑을 차지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
질투는 종종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의심을 수반하는데,
그것의 목적은 욕구 충족이나 관심만이 아니라 사랑을 얻는 거야.
여기에는 또한 경쟁자를 제거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소망도 포함할 수 있고....”
솔직히 강의실 안에 질투 하나 모르는 애들 있을까.
그게 다만 이야기로 설명을 잘 못하는 것이지 질투는 감정이라 말로 표현을 잘 못하는 것이 당연한 건데 왜 우리는 이런 걸 외워야 하나.
문장이 뿌옇게 보였다.
아. 책상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졸려?”
“응.”
눈은 반 토막이 났다. 세훈이의 팔을 꼭 잡고 야 나 좀 때려봐 하면서 뒤통수에 손을 가져다 주었다.
‘때려봐. 나 잠 깨게.’
“진짜 때려?”
“응. 톡 때려봐.”
괜히 부탁했나 싶었다.
남자애한데 얘 힘 조절 못해서 나 막 때리는 거 아니지? 그래도 애인인데 나한데 막 그러는 거 아니지?
했던 잠깐의 겁은 잠시 후에 말끔히 사라졌다.
뒤통수에 위치했던 세훈이의 손은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더니 이내 꾹 누른다.
“졸리면 자. 깨워줄게.”
“강의는.”
“내가 알려줄게. 자라.”
꿀 같은 낮잠이 시작됐다.
옆에서 교수님한데 뭐라 뭐라 말 하는 세훈이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해는 더웠지만 강의실 안의 에어컨은 시원하고, 참 잠자기 좋은 강의다.
낮잠에서 깼을 때엔 강의실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세훈마저 나를 버리고 간 것인가. 이건 아니잖아 나를 두고 먼저 가?
캠퍼스 곳곳을 찾아 헤맸다.
나를 깨우지 않고 혼자 홀랑 어딘가로 사라진 세훈이도 그게 뭐라고 전화를 받지도 않고,
문자도 다 씹어 잡수시는 오세훈을 찾아 헤맸다. 여기 반짝 저기 반짝 홍길동처럼.
-
캠퍼스 건물을 몇 개 지나쳤을 때에 저기 밖에서 오세훈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 세훈이 에요.’ 라는 아우라를 폴폴 풍기는 세훈이.
세훈이에게 천천히 다가가서 이름을 불러댔다.
‘오세훈.’ ‘너 혼자 나갔겠다.’ ‘강의 끝나고 깨워 준다고 그랬으면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한 마디에 몇 걸음씩 옮겨가면서 세훈이에게 거의 도착했을 때에 나의 눈에 띄는 것은 오세훈의 얼굴이 아니라 왼쪽 가슴팍이었다.
내 눈높이가 거기까지 돼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이건 뭐야?
“뭐야? 너 왜 여기에 이런 걸 붙이고 다녀?”
그건 포스트잇이었는데,
붙은 종이를 떼어서 세훈의 눈앞에 팔랑팔랑 거렸다.
' 이게 뭐야? 왜 이런 걸 붙이고 다녀? '
“왜 떼. 그냥 붙여 놔. 맞는 말이잖아.”
세훈이는 내 손에 있는 포스트잇을 다시 가져다 제 왼쪽 가슴에 붙였다.
그게 꼭 이름표 같기도 하고 마치 오세훈이 내가 된 기분이라 참 묘했다. 별게 아닌 일인데.
내 이름을 써 넣은 포스트잇이 그의 가슴에 안착했다.
나의 것이라고 내 이름을 써 넣은 이름표는 꿉꿉한 날에도 이슬비가 내려도 떨어질 줄 몰랐다.
-
강의를 마치고 세훈이와 저녁을 먹고 나서야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변백현은 정말 우리 집에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왠지 매일같이 드나들던 아이었기에, 매일 키우던 강아지가 이제 집이 싫다며 떠나버린 것 같아 서운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나는 다시 밖을 나갔다. 목적지는 변백현의 집이었다.
-
초인종을 눌러도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마 안에서 나를 이미 봤지 싶은데 지금 시간이면 집에 변백현도 있을 테고,
하면서 변백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와 가까운 곳에서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벨소리는 내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 가까운 곳은 아마 현관 앞 내가 서있는 문의 뒤가 아닐까. 그런데 얘는 왜 문을 안열어?
“야 문 열어. 나야.”
문을 열라는 말을 서너 번 했을 때야 변백현은 자신의 집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선 태평하게 ‘야 웬일이냐? 니가.’ 라고 말했더랬다.
문 앞에 있었으면 진작 열던가.
“왜 문을 안 열어?”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지.”
“나라고 말 했잖아. 목소리가 나 아니야?”
“그러니까.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이게 진짜. 나는 변백현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야. 집에 뭐 먹을 거 없냐?' 나의 물음에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야. 집에 뭐 먹을 거 없냐고. 니가 우리 집 식량 다 거덜내가서 내가 먹을 게 없어.”
“야 너 꼴이 그게 뭐냐?”
“꼴? 나? 왜?”
내가 보기엔 내 꼴은 참 보기 좋았다.
“이거 뭔데 붙이고 다녀?”
변백현은 내 등에서 종이 하나를 떼어 냈다.
“뭐야 그거? 나 지금까지 그거 붙이고 다닌 거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언제 저게 붙은 거지?
아니 나 오늘 간 곳이 어디지?
학교랑 세훈이랑 길거리 돌아다니다가 파스타집을 들어갔다가 집까지 와서 다시 여기까지 오는 거리 내내 저걸 붙이고 다닌 건가.
오세훈은 왜 말 안 해줘?
아까도 혼자 나가더니.
“야 뭐라고 써 있냐? 뭔데. 욕이야?”
변백현의 표정이 세상을 다 잃어 분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정도의 욕인가?
손에 있던 종이를 채냈다.
종이에 욕이 써 있던 뭐가 있던 과내에서 여자 선배들 사이에서 나는 이미 까지고 발라지고 별 거 다 했을 거다.
그런데 오세훈이 이걸 보고도 밥을 먹고 길을 걸어 다니고 했다는 게 여간 마음에 조그마한 배신정도가 아니었다.
나 조울증인가.
종이를 바라보자 조그맣던 배신감도 모조리 사라졌다.
종이에 쓰여 진 글씨는 단연 봐도 세훈이의 것이었다.
얼굴이 아까 보았던 노을과 같이 물들여 갔다.
‘오세훈꺼’
사랑만 남아 있었다.
아마 세훈이는 이걸 심장과 가장 가까운 왼쪽 가슴에 붙이길 원했겠지.
-
나는 헤실헤실 웃었다.
'야 이것 봐 세훈이꺼래 나 길가다가 사람들이 어 오세훈꺼네? 이러면 어떻게 해?'
변백현 앞에서 별 호들갑을 다 떨어댔다.
솔로들이 커플을 보는 눈빛이 어떤 눈빛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야 밥 없어? 배고픈데.”
“니가 해 먹어.”
“원래 이런 거 이 집에 사는 너가 해야 하는 거야. 라면이라도 없냐?”
“없어 니가 해 먹어.”
“쪼잔한 놈.”
나는 정말 변백현 집의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이리저리 음식을 바라보았다. 김치볶음밥이나 할까.
딱히 내가 요리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눈에 보인 게 김치라서 하는 말이다.
김치볶음밥은 맛도 좋고, 간단하고. 배고픈 나에게 딱 인 레시피였다.
“야 나 진짜 해먹는다?”
“그러든가.”
변백현은 주방 쪽에 관심도 없었다.
그저 핸드폰만 바라보면서 무슨 문자를 보내는 것 같은데 썸녀가 또 생겼나. 이번엔 잘 되길 빌어줘야지.
김치를 볶고, 참기름도 좀 넣고, 고추장도 좀 넣고, 김칫국물을 좀 넣고,
정말 내 맛대로 만들어지는 김치볶음밥이었다.
케찹을 넣으면 맛있으려나. 새로운 시도도 빠지지 않았지만,
막상 케찹을 넣으니 내 요리는 강제로 막이 내려질 것 같은 비주얼을 뽐냈다.' 아 이럼 안 돼. '
-
“야. 김치볶음밥 레시피좀 쳐봐.”
내 핸드폰은 가방과 함께 우리 집에 있었다.
어쩐지 주머니를 아무리 훑어도 나오지 않아서 식겁했더니, 생각해보니 범인은 집 이었다.
그래 요리 초보한데는 레시피 대로 하는 것이 딱 이다.
내가 절대 김치 볶음밥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케찹 때문이었다.
케찹이 문제였다.
맛을 보고 나는 입 안에서 탄 흙같은 맛을 느꼈다.
이건 회생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 하에 레시피를 보려고 그랬던 거다.
“야 레시피좀 쳐보라니까?”
뒤에선 아무 말도 들리지가 않았다.
‘아 내가 꼭 가야 해?’ 주걱을 들고 거실 쪽으로 나와 쇼파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져 진 변백현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저러다 액정 깨지면 울려고 그러지. '
“야 핸드폰 좀 쓴다.”
난 허락 받았다.
나중에 아무 말 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는데, 핸드폰의 홀드를 켜고 잠금을 바라보았다.
화면의 자물쇠에 손을 가져다 대고 드레그 하니 잠금이 참 쉽게 풀렸다.
'이걸 잠금이라고 해놓은 건가?'
그래도 잠금이 쉽게 풀리니 사소한 것에 기분이 좋았다.
이제 레시피대로 밥을 만들어서 나는 신나게 먹고 쟤는 불쌍히 굶고.
나는 돼지인가.
아까 먹은 파스타는 어디로 갔나.
검색창에 터치를 한 번 했다.
‘김치볶음밥 만들기 황금 레시피’ 라고 칠 것을 주방에서 나올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검색어는 쳐보기도 전에 변백현이 검색했던 검색어들은 내 두 눈동자가 향할 눈길을 만들어냈다.
[어떻게 해요?]
[변씨집안며느리는 너무 예뻐요.]
[친구의 여자친구를 사랑했네.]
[성공하는 고백 법.]
[시발]
[질투 안 하는 법]
[질투]
얘 짝사랑 중이니?
-
“너 그거 들고 뭐 하냐.”
“레시피 검색 중.”
변백현이 우다다다 뛰어 왔다.
검새 내 손에서 핸드폰이 사라지더니, 변백현이 소리를 조금 높여 나에게 말했다.
“왜 맘대로 봐? 내가 언제 니 핸드폰 막 본 적 있냐?”
“뭐 별거 없더만 검색 좀 하려 했지. 요리는 레시피가 중요해.”
변백현이 핸드폰을 자신의 손에 꼭 쥐었다.
누가 훔쳐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좀 본건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쁜가. 괜히 나까지 기분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궁금한 게 있으니까.
“야 근데, 너 뭐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근데 그게 친구 여자친구야?”
“아니? 누가 그래?”
“야 뭐 아까 니가 검색한 검색어 봤어.” 야 그 친구는 모르지? 그래 모를 때 얼른 포기해. 이거 진짜 나쁜 거야.”
“...”
“누나가 친히 알려주는데, 이거 뭐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럼 안 된다? 게다가 친구라며?”
“알아.”
“뭘?”
“걔 알아 내가 지 여자친구 좋아하는 거.”
“알아? 그 남자가 뭐래 그래서?”
“지꺼라고 그러던데.”
“당연한 말 했네. 힘든 건 하는 거 아니야.”
짝사랑은 하는 거 아니야. 내가 해봐서 알아.
듣는 변백현의 표정이 점점 나를 보면서 울 것 같았다.
왜 저런 표정이지? 많이 좋아 했나? 사내자식이 이런 거 가지고.
-
자는 시간엔 항상 세훈이와 전화 통화를 했다.
오늘도 다른 날과 다른 게 없었는데,
그래도 굳이 찾아보자면 통화의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세훈이의 목소리가 조금 다급했다는 것.
“오세훈 꺼 너가 붙인거지?”
“어 봤어?”
“응. 집에서 봤어.”
“우리 내일은 같은 곳에다가 붙이고 다니자.”
“그게 뭐라고 그렇게 좋아해 목소리가 들떴네.”
“좋아서. 모르는 사람들까지 알잖아.”
“진짜 난 아까 변백현이 떼어줘서 내 욕 써놓은 줄 알았어.”
“뭐?”
“욕 써놓은 줄 알았다고. 진짜 식겁했어.”
“변백현 만났어?”
세훈이가 조금 경직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응.세훈아 변백현 좋아하는 여자 생겼나봐 들었어?”
“...”
“너도 몰랐어?”
“아..응. 그래?”
“응. 근데 친구 여자친구래. 걔 어떻게 해?”
“포기하라 해. 어떡하긴.”
“그렇지? 내가 그래서 친구 여자친구는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막 뭐라고 그랬어. 그런데 울려고 하더라? 많이 좋아하나봐.”
“...좋아하는 애가 누구래?”
“그건 모르는데, 다음에 만나면 물어볼까?”
“아니. 싫어. 묻지 마. 걔 좀 덜 만나면 안 되냐? 오늘은 왜 만난거야?”
세훈이의 목소리가 잘 다듬어지지 않은 칼날과 같았다.
이 목소리를 옛날에도 한 번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변백현을 자주 만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세훈이는 걜 덜 만나라고 말 한다.
“아까. 집에 갔었어.”
“거긴 왜 가?”
“그냥 놀러 갔었어. 오랜만에 이모랑 아저씨도 보고.”
내 입에서 없던 일이 사실처럼 나왔다. 이모랑 아저씨는 실제로 오늘 만나진 않았지만,
꼭 이렇게 해야 세훈이와 내가 오늘만 같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건 선의의 거짓말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조심스러웠고 세훈인 거침없었다.
“걔 그만 만나. 나 신경 쓰여.”
내가 아무리 선의의 거짓말로 마구 포장을 하려 해도 세훈이는 이미 변백현의 이름만이 귓속에 머릿속에 들어가고 인식된 듯 보였다.
“왜? 친군데?”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너와 나의 친구인 것을, 나와 변백현의 관계를 그나마 잘 알고 있다고 생각 했는데,
너는 나에게 그 애와 만나지 말라는 말을 건넸다.
변백현과 내 관계를 깨려고 굵은 무기를 들어 보이는 듯 했다.
“남자야.”
“친구야.”
“남자야.”
“친구라니까?”
“남자라고. 만나지 마.”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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