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착각이야 14
지나가는 바람은 우리의 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존재감은 다른 무엇보다 월등했다.
방학을 맞은 후 나의 계획은 여러 가지 번호로 나뉘어 있었다.
그 중 실천 못 할 것들이 몇몇 개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세훈이와 함께 하려던 외국인들과의 프로그램이었다.
시간이 흘러가고 몇 번의 태양을 보고 몇 번의 달을 보았을 때에
변백현은 변백현대로 세훈이는 세훈이대로 조금씩 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치 그건 낮과 밤이 바뀌는 것과 같았다.
변백현의 행동거지가 조금씩 변했던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건 그만큼 조금 조금씩 하루가 다다르게 변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에 졸면서 들었던 ‘질투의 감정’에 대한 강의를 떠올렸다.
나름 심리학과라고 자부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건 변백현은 짝사랑하는 여자가 남자친구와 좀처럼 멀어지지 않자 불안했던 거고,
그 사이를 매번 질투했던 거다.
그것은 제일 편하고 오래 봐왔던 나에게 푸는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변백현은 항상 나에게 무얼 하든 틱틱 대면서 다정했다.
나날이 보지 않고 다른 학교에 각자 입학을 하고 다시 보았을 때.
그 모습 때와 비교를 해본다면 그때는 마냥 짓궂고,
지금은 틱틱 대면서 다정하다.
결론은 다정하다는 거다. 그래 다정한 게 이상했다.
변백현은 어느 순간부터 사소한 하나까지 나에게 맞춰가려 했다.
시간이나 음식이나 가끔 내가 외출을 할 때면 그 후에 마중을 나와 기다리기도 했다.
그게 내가 보기엔 기다린 건데,
자기는 꼭 나왔는데 니가 있더라. 라고 말을 했다.
누가 봐도 날 기다린 건데.
“오 변백현 나 기다린 거야?”
“뭘. 그냥 나왔는데 너 있어서 와 본거지.”
“아닌데? 기다린 건데?”
“아냐.”
“진짜 아니야?”
“아니야.”
누가 봐도 날 기다린 건데
-
초승달이 밤하늘에 콕 박혀 있었다.
엄지손가락을 대어 보니 꼭 그것이 손톱모양 같았다.
손톱 달. 그것이 꼭 내가 밤하늘에 상처를 낸 것 같았다.
그 사이로 빛이 세어 들어오는 듯 한 기분에 나는 저 달을 뚫고 우주 밖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에 얼굴을 들이밀어 밖에서 보면 아마 얼굴이 찌그러져 있을 것 같았다.
변백현이 말을 시작했다.
“야 내가 생각해봤는데.”
“뭘?”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
“응.”
“남자친구가 있거든.”
“알아. 봤다니까? 그거 얼른 포기해. 안 돼.”
“뺏을 거야.”
“미쳤냐.”
“뺏을 거야.”
“...”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고집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여러 이름으로 부르겠지만, 지금 변백현이 하고 있는 고집은 정말 쓸데없는 고집 같았다.
그래 네가 좋다면 뺏어야지.
생각은 고쳐지고 있었다.
“뺏을 거야.”
“그래. 뭐 니가 그렇게 좋으면 어쩔 수 없는데,”
“알고 있으라고.”
“...응. 알겠어.”
그걸 내가 왜 알고 있어야 하는 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 여자의 남자친구는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너는 내 친구니까. 너의 편에 서는 게 맞는 것이라 생각했다.
-
며칠을 지내다 보니 변백현은 세훈이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을 알았다.
그저 싸워서 그런 것일 줄 알았는데, 병원에서 보면 화해를 한 것 같았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나는 이 둘의 문제에 굳이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한 번 해본 것을 다시 한다는 건 너무 무모하다.
변백현은 세훈이를 경계했다.
얼마 전,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 가 된 것은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유독 세훈이의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고, 뭘 하던 세훈이를 찾던 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변백현은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손끝의 곡선 하나하나까지도 뜯어보고 있었다.
‘오세훈 얘기 좀 그만 하면 안 되냐?’ ‘넌 어떻게 기승전결이 오세훈이냐’
그 때가 되니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변백현이 짝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안했었고,
또한 그 여자아이랑 연락하는 모습을 좀처럼 본 적이 없었다.
내 머리 안에서 몇 백번의 그림을 그린 듯 아주 자연스럽게 연필과 붓이 쥐어진 손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림을 그렸다.
저 아이가 하는 행동은 이전의 나의 행동과 똑 닮아있었다.
누구를 향해서?
그래. 나는 그걸 의심하기 시작한 거다.
나를 향해서.
나를 향한 게 아닐까 싶은 착각이었다.
“니넨 안 싸우고 잘 사귄다?”
“남자 쪽이 사랑이 크면 오래 간대.”
“좀 그래도 싸워봐야 이면 저면 다 아는 거지. 걔가 너 화낼 때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래도 걘 나 좋아할걸? 세훈이가 너냐?”
“야 왜 우리 막 싸워도 내가 너 좋아해주잖아. 오세훈은 안 그래. 내가 알아.”
꼭 싸우길 바라는 것처럼 굴어댔다.
사람은 질투를 한다.
그 것은 세훈이와 나의 모습을 보는 변백현에게서 그대로 묻어났다.
누군가 보면 참 좋은 예시라고 그럴 것이 분명한 변백현의 행동은 나를 조금 헷갈리게 했고, 나를 통째로 흔들어 놓았다.
착각이겠지.
바람이 지나가는 곳으로 갈대는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친구를 빼앗겼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질투이길 빌었다.
-
그와 반해 나는 세훈이를 대하는 것이 조금은 불편해졌다.
변백현을 다시 돌아보면서 느낀 것,
그리고 그 것에서 더 넓게 바라봐 숲 안의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닌 숲에서 빠져나와 전경을 바라보니 한 눈에 모든 것이 정리되는 듯 보였다.
밖에서 본 둘의 모습은 참 대조적이었으며,
쌍둥이처럼 똑 닮아있었다.
그 중심에 내가 있다는 것은 곧 나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란 걸 의미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잘 모르지만, 세훈이와 변백현이 싸운 이유는 내가 잘 모르지만.
그 중 하나가 나일 것이라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나는 언젠가 두 사람이 나에게 바랄 선택의 결과를 무서워했다.
두 사람은 나에게 어떤 지문을 내릴까. 그 지문은 무엇이고,
나는 어떤 결과를 내릴까.
-
세훈이는 날이 갈수록 변백현을 배척했고, 나를 제 품안에 꼭 끌어당겨 안았다.
내가 둘의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을 때엔 그 행동이 나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바라보면 꼭 세훈이는 변백현에게서 등을 보이며 나를 감싸 안았다.
변백현이 내 쪽에 눈을 들여오지 않게끔. 그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지금 내가 변백현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그 짝사랑하는 여자가 나라면.
그것이 나라면 세훈이의 행동은 매우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연락이 잦아지고,
서로의 관심과 사랑이라는 것은 관심이 아닌 감시가 되어버린 듯 했다.
내가 옆에 없는 세훈이는 내가 변백현과 있을까를 항상 궁금해 했다.
“어디야? 밥은?”
얼굴을 보건 전화를 하건 대화의 시작은 항상 그랬다.
밥은? 뭐 먹었어? 맛났어? 누구랑 먹었어? 변백현은 아니지? 나를 부르지 그랬어.
대체 변백현이 뭐기에.
우리는 서로 많은 부분을 자리잡으며 알고 지냈던 게 아니었다.
나는 세훈이에 대해 아는 것이라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고,
사람, 그것도 내 애인에 관해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후에 우리의 관계가 조금씩 바뀔 수도 있다는 경우의 수가 알지 못하는 부분에 비례해 무수히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아는 세훈이가 세훈이의 모든 부분이었으면 했고,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오세훈의 모든 것이라 자부했고,
다른 부분은 우리의 관계를 해칠 수 있을 수도 있기에 등을 지고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세훈이를 알지만, 오세훈을 모른다.
세훈이의 앞에서 변백현의 이야기를 자제했다.
변백현과 만나고, 이야기하고 하는 것은 전과 같았지만, 그 것은 세훈이 싫어하는 행동이었으며,
나는 변백현을 완전히 놓지 못하기에 중간에서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매번 시도했다.
그게 우리 셋 모두에게 편한 일이라 생각했다.
-
“이리 와봐.”
언젠가 세훈이가 뛰고 놀았다던 초등학교의 운동장을 간 적이 있었다
. 무지개색의 뺑뺑이를 친구들과 돌리면서 놀고,
그네를 어떤 학생들과 밀어주면서 놀고, 운동장에서 조그마한 놀이를 했을 어린 시절의 오세훈을 모른다는 것은 아쉽기도 했고,
십년도 더 된 추억에 함께 휩싸여 기분이 마치 운동장 한 가운데 위치한 수돗가의 덜 잠겨 진 수도꼭지와 같았다.
너를 알고 싶었다.
“너 좋은 학교 다녔네.”
“좋아 보여?”
“응 깨끗하잖아.”
그 시절의 초등학교 치고는 지금까지 어느 학교와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을 시설을 갖춘 듯 보였다.
이런 학교에서. 저런 공부를 하고. 그런 놀이를 하고.
‘이런’은 이제 알아갔으니. ‘저런’과 ‘그런’만 알면 되는 것이다.
“나 옛날에 운동 되게 잘 했어. 달리기 같은 거. 니가 봤으면 두 번 반할 텐데.”
이미 수십 번을 반했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자신에게 한번 두 번 더 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뛰어봐. 세훈아. 만 번 더 반해줄게.”
“안 뛰면 안 반해 줄 거야?”
‘뛰어보고 말해. 이리 와봐. 뛰어서.‘
좀처럼 누군가에게, 어느 곳으로 온 힘을 다해 달려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게 너의 하루하루가 여유롭기 때문일까 아니면,
-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세훈이가 나에게 말했던 것이 있었다.
심한 일교차로 인한 감기몸살이 일었던 다음 날이었다.
걱정에 세훈이에게 건넬 말들을 접어두고 변백현이 쒀준 죽을 먹으면서 조용히 집 안에만 있었는데,
“나는 네가 변백현이랑 연락하는 게 싫어.”
나는 너에게 변백현과 연락한다는 것을 말한 적이 없고,
티를 낸 적이 없는데, 너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았다는 듯이 나에게 와서 말을 했다.
‘변백현이랑 연락하는 거 싫어. 안 하면 안 돼? ’
전의 강압적인 말과는 대조되게 나에게 물었다.
너는 부탁을 하고 있었다.
“안 해. 연락.”
“하잖아. 나 다 알아.”
“변백현이 어제 니가 아팠던 걸 어떻게 알아?”
“나도 몰랐던 걸.”
“걔가 알아.”
“내가 뭐가 돼.”
“너 아픈 걸 왜 걔 한데서 들어야 해.”
“너는 왜 나한데 말을 안 하고 걔 한데 말을 해?”
“니가 그러면 나는 좀 많이...”
“아파.”
“변백현이랑 연락 안 하면 안 돼?”
“나 아파.”
“친군데. 어떻게 그래.”
“그러면, 나 안 아플 때까지만.”
‘나 안 아플 때까지만.’
너는 언제 나으려고. 그게 무슨 병인 줄 알고. 나에게 그런 말을 하나.
너는 대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나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내가 계속 이러면 너는 나를 미워할 거야?”
너를 미워할 수는 없으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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