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
네 목소리가, 내 떨림이, 이 온도가.
-
눈 내리지 않는 겨울은 낭만이 없다. 그저 지긋한 추위만 가득할 뿐. 목도리로 얼굴을 꽁꽁 싸맨 뒤 학교 갈 준비를 마쳤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조금은 과장스런 주먹 다짐을 펴내며 차가운 은색의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인영의 뚜렷한 뒷모습. 내뱉지 못한 인사를 대신해 흩어지는 하얀 입김. 춥기만한 겨울이 위안이 되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렇게라도, 너에게 닿기를.
"....."
이쪽을 보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래, 너."
"......"
"인사,"
"......"
"할 때 되지 않았냐."
-
같은 학교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나이는 동갑. 마주치는 일이 없어, 다른 학년일 것이라 막연히 추측에 넘겼던 것이 전부였는데. 이렇게 녀석과의 짧은 등교길동안 쉽게 풀리는 것인줄 알았다면 진작에 인사라도 한 번 건네볼 걸, 뒤늦은 후회도 해본다. 그러던 중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녀석은 생각보다 말이 많고 사교적이라는 것이다. 말수가 적은 내게 보채는 일 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배려인가, 불편함을 느끼려던 찰나였다. 다행히도 고개를 돌려 마주한 녀석의 얼굴에는 꾸밈이 없었다. 이렇게 한결 편해진 마음은 간과했던 것을 다시 일깨워 준다. 지금 내가, 너의 옆에. 하지만 섣부른 기대는 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그토록 기다려온 꿈만 같은 순간이, 너에게는 몇번째인지 모를 새로운 인연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일 보자."
"응."
"응?"
"...왜?"
"..아니, 인사도 너 다워서. 간다!"
쓸데없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별 생각없이 던진 말일 수도 있는데.
"도경도경도경도경-"
"...저리 가."
"어휴, 얼굴에 안개낀 것 좀 봐. 훠이-"
"너 조만간 맞지 싶은데."
떠드는 녀석들을 뒤로 하고 자리에 앉아 시간표를 확인한다. 수학, 국어, 영어....두둥실 떠오르는 익숙한 얼굴. 손으로 휙휙 저어보지만 이내 다시 선명해진다. 그래, 너 잘생긴거 아는데. 몰래 훔쳐보던 때가 나았다고, 잠시 생각했다. 전보다 더 선명해진 얼굴이 여간 당황스러운게 아니었다.
"쟤 왜 저래?"
"몰라. 파리 잡나보지."
"하여튼, 지같은 생각만.."
"내가 뭐."
"누가 똥백 아니랄까봐 똥파리 얘기냐."
"자꾸 똥똥거릴래?!"
야, 박찬열 거기 안서!! 우당탕- 거리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쟤들은 맨날 싸우면서 왜 그렇게 붙어다니는지 몰라. 고개를 저으며 돌아본 자리는 아까의 상념이 무색하게 휑한 것이, 어째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내 마음의 변덕이 더 모를 일이구나. 휴.
"땅 꺼지겠네."
"...하던거나 계속해."
"말리지는 못 할 망정 부채질이야?"
"아, 몰라."
"쪼끄만게 아침부터 인상은 있는대로 구기고."
"....."
"따라와."
어디로 끌고 가나 했더니 화장실이다. 뭐야, 가려면 혼자 갈 것이지, 기집애도 아니고. 투덜거리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손을 씻다 말고 피식- 거린다. 그래도 아까 자리에 앉아 있을 때보단 훨씬 마음이 나아졌다. 그래서였을까. 다가오는 큰 손을 알아차리지 못 했던 것은.
"아, 뭐야!"
"왜 시원하고 좋구만."
"물기라도 닦고 들이대던가..."
마구잡이로 문질러대는 바람에 온 얼굴이 물에 적셔진 상태였다. 아, 진짜 찝찝해.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대충 손을 휘저어 찬열이 놈의 교복을 잡아챘다. 너도 한 번 찝찝해봐라. 그렇게 개구진 웃음을 한 껏 지은 채로 올려다 본 교복의 주인은,
"또 보네?"
김종인이라니.
-
"존나 웃기지?"
"그래서 저렇게 이 세상 불행은 다 짋어진 마냥 쳐져있는 거야? 자식이- 남자답지 못 하긴!"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남자다움이 뭔지 보여줘?"
찬열이 목을 잡고 짤짤 흔드는 백현이를 보며 같이 움찔대는 손을 진정시키느라 혼났다. 너 왜 날 데려간거야, 왜- 모든게 원망스럽다.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그자리에. 꼭 그 녀석이 서 있어야 했냐는 말이다. 이젠 얼굴도 못 봐. 오늘 아침 인사해줘서 너무 기뻤는데. 내일은 내가 먼저 인사해야지, 용기도 내보려고 했는데.
"아오, 좀!"
"너 지금 내가 아니더라도 노리는 사람이 많아. 뒤통수가 따갑지 않든?"
"경수가 넌 줄 아냐? 개새끼같은게 입만 살아서는."
"...그래, 내가 개다!!"
언제 한 번 일낼 것 같더라니.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찬열에게 달려들어 귀를 무는 백현이었다. 야, 씨발!!!!! 그러게 왜 깝쳐!!!! 아, 정신없어. 싱숭생숭한 마음에 불만 지르는 것들을 친구라고 둔 나도 참.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어, 왠일로 옥상문이 열려있다.
"뭐야?"
"어? 아냐, 아무것도."
분명,
"무슨 생각해- 나 영화 보고 싶다니까?"
"아, 그래. 보자, 영화."
김종인이 맞는데.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아까의 창피함은 금세 잊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 너라면. 당연하잖아. 이렇게 놀라는 것도 웃긴 일이다.
"나 잠깐만."
"왜?"
"그, 교과서 빌린다는 걸 깜빡했네."
"내꺼 빌리면 되지-"
"아, 그게..안 돼."
"어?"
"..나 책 험하게 쓰는 거 알잖아."
"싱겁긴. 그래, 알겠어- 이따 문자해!"
황급히 몸을 돌려 옥상을 빠져 나갔다. 지금 마주치는 것은 좀 곤란하다.
"도경수!"
못 들은 거야. 지금 네 얼굴보면 표정관리 안 될 거 뻔히 아는데. 멀뚱히 서 있었던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바로 나왔어야 하는 건데!
"잡았다."
"......."
"대답도 없고."
"...미안, 못 들었어."
"그래, 그렇다 치고,"
"치는게 아니라.."
"옥상엔 왠 일이야? 자주 와?"
"..그냥, 가끔. 답답할 때."
"답답할 때."
"..바람도 쐴 겸."
"가자, 그럼."
"...어딜,"
무작정 끌려간 곳은 운동장 조회대 아래. 특별할 것도 없는 좁은 공간이었다. 조금 있으면 수업 시작할텐데. 보이는 것이라곤 드문 드문 교실로 들어가는 아이들과 오늘따라 더욱 휑해보이는 운동장뿐.
"표정 관리 너무 안 되는데."
"어?"
"근사한 아지트라도 바란 거야?"
"그건 아닌데.."
"아닌데."
"......"
"왜 왔냐고. 여기를?"
"응."
"답답하다며. 옥상에 가길 왜 가. 숨만 더 막히지."
"......"
"세상 내려다봐서 뭐해. 뛰어내리기밖에 더 하나."
"말이 좀,"
"심하다고 생각해?"
"극단적인 거잖아. 난 좋아. 바람도 쐬고, 햇빛도 맞고.."
"좋지- 바람도 쐬고, 햇빛도 맞고."
"근데 왜,"
"혼자."
"....."
"그러다보면.."
"너 자꾸,"
"그러니까 땅에서 놀자고- 공도 차고 사람들이랑도 부대끼고."
"혼자가, 나쁜 건 아니잖아."
"나랑 있으면,"
"...어?"
"좋은가."
모든 질문의 무게가 같았으면.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질문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질문이라는 거, 불공평하다.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을 가졌음에도 가볍게 던져야 말은 나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싫지는 않아."
"그래, 하나보다 둘이 좋고 둘보다 셋이 좋은 거야. 즐겁게 살아야지, 안 그래?"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도. 네가 없으면, 의미가 없는데. 내 인생은.
"여기는 햇빛도 있고 바람도 있고 사람도 있어."
"....."
"그래서 좋다. 뛰어내릴 필요가 없거든."
"....."
"한 걸음만 나가면 돼."
-
어느새 함께하는 등교길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까워지는 사이만큼이나 커지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내 마음을 눈치챌까.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원래 그런가."
"응?"
"할 얘기가 없는 거야, 하기가 싫은 거야."
"....그게"
"미안하다고 하지 말고."
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시간은 잘만 흘러간다고 하면 이해해줄까.
"너 때문에,"
"어?"
"밤마다 잠을 못 잔다고, 내가."
"....?"
"어어, 그런 얼굴 위험해. 나 이상한 놈 절대 아니야, 절대."
"...왜 못 자?"
"아니, 얘깃거리 생각한다고..."
"아.."
나 지금, 좋아해도 되는 건가. 그러니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너도 내 생각을 한다는 뜻이잖아. 으아- 입이 안 다물어 진다.
"나 진짜 무서워."
"뭐가?"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뭐라는 거야-"
"너 요즘 진짜 이상한 거 알아? 좋았다, 나빴다. 갈 때가 다 된건가, 우리 경수."
"죽어."
콩- 하고 딱밤을 때리니 울상을 짓는게 꼭 강아지같다. 그나저나 찬열이는 왜 안 보이지. 등교는 항상 제일 빨랐던 것 같은데. 쾅! 요란한 문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박찬열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늦었네?"
"이 개새끼가, 아오!"
"어?"
"아니, 씨발. 이 한 겨울에, 맨발에 슬리퍼가 말이 되냐?"
"오늘 늦게 일어났다니까..."
"왜, 그냥 벌거벗고 오지. 시간도 없는데."
"아, 진짜! 실수할 수도 있지!"
"그래서 네가, 병신이라는 거야."
"보태준 거 있어?!"
"이거나 신어, 병신아. 하여튼 존나 사람 피곤하게,"
"그래서 늦었구나."
"어?"
"그거 사온다고. 그렇지?"
"..사오긴 뭘 사와. 주운거야."
"딱봐도 새거구만."
"도경수,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본데. 이것도 다 비지니스야. 이렇게 밥 한 끼 굳는 거라고."
"그래, 네 놈이 순수하게 사다 바칠리가 없지-"
"..이제 알았냐."
"그럼 나 안 신어!"
"..뭐?"
어, 찬열이 표정이 좀. 살벌하다. 그렇게 얻어 먹고 싶었나.
"신어. 좋은 말로 할 때."
"아, 싫다고! 나 돈 없어!"
"동상 걸려서 드는 병원비보다 비싸겠냐고, 병신아."
"도..동상은 무슨!"
"요즘 뉴스 안 봐? 내 친구 민수 알지. 걔 지금 발 절단한다고,"
"내놔!"
"뭐."
"아, 달라고!"
"개새끼가...진작 그럴 것이지."
...이렇게 극단적인 얘기를 믿는 거야? 변백현 겁 많은 거야 전교생이 다 아는 사실이라지만...새삼 걱정이 되는 거다. 믿는 놈이나 속이는 놈이나.
-
하나를 얻으면 둘을 바라게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했나. 쓸쓸한 하교길이 오늘따라 처량맞게 느껴지는 건 왜인지. 이 추운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비는 추적추적 그칠 듯 계속 내리고 있었다. 평소 잔잔한 뉴에이지를 좋아하는 덕에 음악 목록은 죄다 그러한 것들로 가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신나는 음악 하나라도 받아둘 걸. 괜한 감상에 젖게 되는 것도 다 그 탓이다. 그래. 계절이 춥고, 비는 내리고, 음악이 슬퍼서. 그래서, 그런 거야. 앞을 보는 것인지 땅을 보는 것인지도 모른 채 터덜터덜 발걸음을 옯겼다. 어, 뭐야. 왠 인영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 턱에 들어올린 우산 사이로,
"너..."
미소을 지은 채 날 내려다 보는 네가 있었다. 꿈일까.
"...뭐?"
이어폰을 낀 탓에 말이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어어..야,"
내 우산! 갑작스레 휑해진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뭐하는 거ㅇ,
"눈 온다고!"
선명한 너의 목소리 사이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 눈.."
"그래, 첫 눈!"
흩날리는 눈꽃들이 아름다웠다. 너는 이제껏 본 적 없던 가장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진짜, 겨울이네."
아니, 사실은. 네가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무단이탈' 조두순, 이제 어디 사는지 모른다…5년 신상공개 종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