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잃은 그날 밤, 나는 너를 볼 수 없었고 텅빈 집으로 혼자 돌아와야만했다. 밖에서는 계속해서 비가 내렸고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네가 나와 함께 밥을 먹었던 식탁,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소파, 서재에서 일하는 내 모습이 좋다면서 옆에 앉아있던 네 의자, 그리고 네가 나와 함께 잠들었던 침대까지도 네 향이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너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아침까지만해도 사랑을 속삭이며 이야기를 했던 둘인데 너는 내게서 사라져버렸다. 이 모든게 다 내탓이다. 마른세수를 하며 너에게 주었던 목걸이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협탁에 내려놓았다. 너는 줄곧 이 목걸이의 팬던트를 만지작 거리곤 했다. 새것을 사준다는 내 말은 듣질 않았었다.
'..다른 것도 많은데, 다른거 사줄께.' '아니예요.. 저는 이거면 되요. 처음으로 사주신거니까..'
습관처럼 목걸이를 만지던 너였는데, 지금 그 선물은 내 손으로 돌아와버렸다. 이대로는 잠을 잘 수 없어서 결국 술에 손을 댔다. 양주를 마시며 몽롱해지는 머릿속에서는 네가 계속 나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눈물맺힌 네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이불속에 웅크리고 너를 그리고, 그리고, 그렸다.
.
.
.
"다시 말씀 드려요?" "..." "약혼도, 결혼도 안할 생각입니다." "..너!" "뭔가 착각하는 것같아서 말씀드리는데." "..." "당신이 언제부터 내 아버지였는지 난 잘 모르겠어." "..." "버린 자식을 필요에 의해 데려온게 누군데, 이제와서 이용해먹겠다-." "..." "그런 더러운 개수작에 내가 넘어갈 것같아?" "너 이자식.." "당신도 잘 알다시피. 회사 주식은 거의.. 다 넘어왔고." "..." "당신 끌어내리는 건 시간문젠데." "..." "그래도 진행할 의사가 있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럼."
회상은 부들부들 떨며 나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를 향해 웃어주다가 이내 표정을 굳히고 방을 빠져나왔다. 회사의 횡령문제를 들먹이며 내 주식을 이용하면 쉽게 그남자를 끌어내릴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하긴." "..." "천천히 지켜봐야지. 추락하는 꼴을."
약혼은 모두 무효가 되었다. 기뻐해야하는데, 정작 같이 기뻐해줄 사람은 없었다. 멍하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순간 전화가 울렸다. 휴대폰은 '박찬열'이라는 이름이 떠올랐고 재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김준면입니다." -본부장님, 찾았습니다. "..." -..어떻게 할까요? "주소 바로 넘겨. 내가 갈께."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전화 끊고 바로 보내줘." -알겠습니다
***
여전히 떨려오는 내 다리로 인해 오세훈이란 남자는 나를 부축해 걸어다녔고 또 그런 나를 귀찮아했다. 비가 여전히 내렸고 나는 종인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종인이 대기시켰던 차엔 종인은 없었고 대신 세훈이 같이 타고 이곳으로 왔다.
"의사, 부를까." "..괜찮아요."
내 다리사이로 핏물이 떨어지는 걸 본 세훈은 걱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했다.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그게 더 이 답답한 공간을 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욕실로 들어가 피를 닦아내고 침실에 누웠다. 세훈의 말로는 여기는 종인의 명의이지만 종인은 지금 다른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그 말에 안심하게 되었고 이불 속에 웅크렸다.
"..간다." "..."
나를 등지고 돌아서는 세훈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친 천둥 번개에 놀라 눈을 꼭 감고 귀를 틀어막고는 살짝 신음을 흘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가지가지 하는군..'하며 중얼거리고는 눈물고인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짜 알 수 없는 존재야." "..." "사랑했던 사람을 그렇게 한순간 뒤돌아버리면서." "..." "그 앞에서 했던 행동을 하잖아. 너는."
그 말에 놀라 그를 올려다보니 '뭘봐.'하고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의 말이 맞았다. 천둥이 친 순간 준면의 옷깃을 잡듯 세훈의 옷을 잡을 뻔 했으니.. 할말 다 한거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의 편이예요?" "말했잖아." "..." "난 그냥 재밌으려고 하는거라니까." "..." "누구 편도 아니야." "..." "단지.. 지금은 이쪽이 더 재미있어서 김종인 옆에서 부탁을 들어주는 것뿐이지." "..." "그래서 널 걔한테 데려다준거고. 그뿐." "..정말, 삶이 재미 없나보다." "..." "..아."
순간 터져나온 내 말에 놀라서 입을 꾹 다물자 나를 바라보던 그가 큭큭거리면서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른채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는 웃음을 멈추고 '맞아'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 웃음이 정말 기분나쁘게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또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낯선 환경으로 인해, 그리고 빗소리와 천둥소리 덕에 잠을 설쳤다. 내가 이렇게 잠을 설칠때면 그는 항상 나를 안아주고 했었는데 그 품이 아닌 차가운 이불 속이여서 그런지 익숙하지 않았다.
"..또 생각했어."
잊으려고 해도 자꾸 익숙해져있는 그의 품을 생각하는 걸 보면 나도 단단히 미친듯했다. 그는 생각보다 내 삶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 삶은 한마디로 그로 인해 굴러가고 있었다. 멍하게 시계만 보다가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일어나서 나갈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종인은 사람을 보내 내가 입을 여벌의 옷을 보내왔고 그것을 골라 입었지만 하나같이 몸매를 드러내는 옷들뿐이였다. 한숨을 쉬며 보다가 어쩔 수 없이 입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세우려 노력하며 벽에 손을 짚어 천천히 내려왔다. 저절로 신음이 터져나왔고 입술을 꾹 깨물고 조금씩 조금씩 발을 내딛었다. 겨우 오피스텔의 입구를 빠져나와 숨을 고르다가 벽을 짚고 걸어가려는데 익숙한 차 한대가 보였다. 멍하게 그 차를 바라보다가 외면한 채 걸어가려는데 뒤에서 내 손목을 잡아챘다.
"...잠깐만." "..." "이야기, 이야기좀 해." "..아직도 할 얘기가 남아있어요?" "..." "난 할말 없으니까. 그만 가주세요." "..다, 오해야." "오해겠죠." "..." "ㅇㅇ아, 오해야." "..." "이 말을 ..왜 당신한테도 들어야해?"
내 눈에서 눈물이 조금씩 떨어졌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적어도, 적어도.." "..." "당신은.. 다를줄알았는데. 나를 사랑하는줄 알았는데." "..다 맞아, 나 정말 너.." "그만 하라니까요!!!" "..." "얼마나 날 더 비참하게 만들꺼야, 얼마나 나를 더... 더..." "..ㅇㅇ아." "그만하라잖아. 형." "..." "..김종인."
내 허리를 감싸 안아 지탱하며 안아오는 종인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내 손목을 놓고 종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 손목을 잡았던 손을 꼭 쥐었고 부들부들 떨었다.
"옷 예쁘네. 어디가려고 했어." "..." "..병원이요." "아아... 병원." "..."
가만히 내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소름이 돋았지만 꾹 참았다. 종인은 나를 끌고 제 차가 있는 쪽으로 향해 걸어갔고 준면은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날 지켜보았다. 종인은 비릿하게 웃으며 내 허리를 제쪽으로 당겨 안았고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나한테 집중해." "..." "지금 네가 봐야할 사람은 김준면이 아니라, 나야." "..."
종인은 대답이 없는 나를 흘겨보다가 그가 보라는 듯 내게 입맞췄고 이내 입술을 떼어내고는 '가자.'하고는 나를 차에 태우고 병원에 데려다준 뒤 진료가 끝나면 연락하라는 말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
.
.
집으로 돌아가려 종인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이내 휴대폰을 꺼버리고는 택시를 타려하는데 다른 남자와 행복하다는 듯 웃으며 병원을 빠져나오는 그여자가 보였다. 그와 약혼을 해야할 그녀인데 다른 남자와 나오는 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게 바라보다가 나를 발견한 여자는 놀라서 나에게 다가와 '..ㅇㅇ씨?'하고 물었다. 그 상태로 얼어있는데 여자는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남자를 먼저 보내고 나를 근처 카페로 데려가 앉혔다.
"..나는 카페모카. ㅇㅇ씨는요?" "..딸기주스요."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여자는 주문을 했고 내 앞에 앉아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마 무슨 말을 꺼내야할까 고민 중인듯 보였다. 음료가 나오고 가만히 음료만 바라보고 있자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선." "..."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요." "..오해요?" "아까 ㅇㅇ씨가 본 그 남자가 제가 결혼할 남자예요." "..." "준면씨랑은 약혼도 결혼도, 안해요." "..." "애초에 둘 다 할 생각도 없었고, 어른들 말이였어요. 어떻게든 두 회사를 이어보려는." "..." "..그리고." "..." "그날 준면씨가 파티 내내 초조해했어요." "..." "..ㅇㅇ씨가 기다리니까, 어서 집에 가고싶다고. 계속 말했었어."
그 여자의 말을 듣다가 머리가 새 하얗게 변해버렸다.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그녀는 내손을 잡고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상황이 이해 되지 않는거 나도 알아요." "..." "일찍이 준면씨가 거절하자고 했는데, 내가 계속 기다리자고 했어요. 이번 일은 모두 내 책임이야. 그러니까..." "..." "..ㅇㅇ씨?"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 사람의 목소리가 묻어나왔다. 눈물이 방울져 뚝뚝 떨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건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 나 어떻게 해요." "..ㅇㅇ씨." "나, 상처줬어요. 그사람한테... 상처줬어." "..." "어떻게 해요.."
목이 메여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내 손을 잡은 여자의 손을 꼭 쥐고 끅끅 거리면서 울었다. 돌아가고싶어도 이미 더러워져서 돌아갈 수 없었다. 내 몸에는 지울 수 없는 낙인 같은 종인의 흔적들이 남아있었고 몸도 성치 않았다. 이렇게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그를 믿지 않았던 내 죄악이였다. 미쳐버릴 것같았다. 나는 지금 무얼 한건가. 그렇게 하염없이 하염없이 울었다.
.
.
.
"...아아, 또 졌네. 김종인. 재미없게."
차를 몰고 가는 도중에 그여자를 보았다. 아마 상황을 모두 알아버리고 우는 듯했다.
"..아, 엄청 시끄러울텐데."
가만히 여자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나보고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며 '재미없게 산다'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풋하고 웃어버렸다. 남의 기쁨과 슬픔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내꼴이 다시금 떠올랐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길을 빠져나갔다. 왜 다들 저 여자를 원하는지, 뭔가 알 것도 같았다.
.
.
.
그렇게 한참을 울고 저녁이 되서야 집에 도착한 나는 조심스럽게 걸으며 오피스텔로 향했다.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지금 내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꾹 접고 걸어가려는데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 "..."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 놀라 가만히 서있는데 애써 멈췄던 눈물이 다시 비집고 나왔다.
"..미안해." "..." "그냥,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어." "..." "..마지막 일 수 도 있으니까." "..." "나 한번만 살린다 생각하고 숨쉬게 해줘. 미아...ㄴ.... 어."
눈물을 뚝뚝흘리며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품에 안겨서 그의 어께를 쳐댔다.
"..흐으, 김준면 바보." "..." "..이렇게 다시 오면 어떻게 해요." "..." "내가..내가.." "..." "당신한테 어떻게 했는데."
멍하게 서있던 그는 나를 꼭 안고 '미안해..미안해.'하는 말만 반복했다.
"..나." "..." "당신 없는동안 더러워졌어요." "..." "여기저기 성한데가 없어요." "..." "그래서.. 나..." "..."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자 나를 토닥이던 그가 살짝 밀어내고 볼을 쓰다듬으며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눈물 맺힌 내 눈을 바라보던 그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와 만났던 그날을 떠올리듯 말했다.
"...너." "..." "갈곳 없으면 우리집 갈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