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민석백현종인찬열준면] < 상실의 시대 > 2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507260/54ce767f3097f1b66bc50b8820dd9c71.jpg)
너희들의 공주님
w.MAYO
2화 「암묵적인 약속」
막 눈을 뜨니 한 뼘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이제 막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막 내리기 시작한 비는 진한 흙냄새를 품고 있어서, 이곳이 정말 도로변에 있는 집이 아닌 이름 모를 산 중턱 어딘가에 지어진 곳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창문에 달라붙어 마당을 살피니, 주인님의 차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미 집을 나가고 없는 것 같았다. 주인님. 주인님. 아무리 혼자 있을 때 중얼거려보아도 입에 붙지 않는 말이었다. 요즘 세상에 주인님이 뭐야 주인님이. 사장님이나 도련님 이런 것도 아니고… 나이도 나랑 별로 차이 안나 보이는데. 그렇지만 난 그의 이름도 몰랐고, 나이도 몰랐으며, 심지어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모르니 주인님 외에 그에게 특별한 호칭을 붙일 수 없었다. 한동안 어색해서 "저기요."하고 그를 불렀다가 홍 여사에게 한 소리를 들어 그다음부턴 웬만하면 그를 부르지 않았고, 홍여사가 없는 곳에서는 "저기요."하고 홍여사가 보고 있는 곳에서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주인님." 하고 불렀다. 그는 내가 자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완전히 나를 제 물건처럼, 제 하인처럼 막 대하면서도 내가 저를 "저기요."하고 부르는 건 이해해주고, 별로 쳐다도 안 보는 것 같고 관심 없는 것 같으면서도 내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이상하게 길이길이 날뛰니. 오늘도 역시나 예상대로 내가 어제 심장을 부여잡으며 열심히 닦았던 아주 비싸 보이는 도자기가 올려져 있던 작은 장식대 하나가 사라졌다. 분명 나를 보내고 사람을 시켜 거실에서 상처가 날 수 있는 곳이 있는 가구를 다 골라내 없애버린 것이 분명했다. 늘, 늘 그랬으니까. 왜, 꼭 그렇게까지. 유난스럽게 굴까. 먼지를 들이킨 듯 목구멍이 텁텁해져 오는 느낌에 나는 거실 액자를 닦다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 가니 주방에서 자주 뵈었던 아줌마 한 분이 식탁 의자에 앉아 어딘가에 베인 듯한 손에 대일밴드를 바르고 계셨다. 나는 그녀가 내 말에 대답을 해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물을 따르며 그녀를 슬그머니 불렀다.
"다치셨어요?"
"………"
벗긴 밴드 껍질을 주섬주섬 줍던 그녀는 내 부름에 움찔 어깨를 떨더니 곧 다시 후다닥 껍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부엌에 들어오는 것을 본 뒤부터 급격하게 행동이 빨라진 것 또한 눈치챌 수 있었는데, 대체 왜, 나만 보면 다들 왜 이래. 식탁 위에 어지럽게 뿌려진 대일밴드의 껍데기를 보며, 나는 그녀가 꽤 작은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물을 마시다 말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역시나 칼을 쓰다 베이기라도 한 듯 밴드 세 개를 둘둘 감아놓아야만 겨우 상처가 가려질 정도로 커다란 상처였다. 밴드와 밴드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곤 나도 모르게 뜨억하는 소리를 뱉곤 얼른 그녀의 다친 손을 잡아끌었다.
"이게 대일밴드로 돼요? 이 박사님한테 꿰매달라고 해야죠!"
나의 행동에 그녀가 마치 경기를 일으키듯 부르르 떨며 힘을 주어, 내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선 입술을 꼭 다문 채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어딘가 절박해 보이는 눈, 굵은 주름마다 피가 고인… 얼굴에 비해 세월을 많이 잡아먹은 손, 그런 그녀의 손에 잔뜩 들린 밴드 껍질에,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나는 다시 한 번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호의에 고개를 마구 가로 흔들며 마치 내가 자신을 어떻게 하기라도 하는 줄 아는 듯 겁에 질린 얼굴로 부엌 바깥쪽과 나를 미친 듯이 번갈아 보았다. 대체 뭐가 이렇게 무서운 거야?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그녀의 상태를 가만 놔두고 볼 수 없는 오지랖에, 나 또한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 박사님한테 가면 금방 꿰매주실 거에요."하는 말을 하며 그녀가 안절부절못하고 바라보던 부엌 밖을 쳐다보았다. 근데 이 박사님 방은 어디지? 집이 워낙 넓어야…
"악!"
사실 아픔에 소리를 질렀지만, 손에 느껴지는 아릿함은 고개를 돌려 직접 내 손을 확인하기 전까지 나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손날에 선명하게 패인 자국, 그 자국마다 맺혀있는 피. 믿기 어려운 이 상황에 나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나를 물고선 후다닥 뒷걸음질 쳐 벽에 납작 붙어있었다. 자기 자신도 많이 놀란 듯 입을 가린 손이 덜덜 떨고 있었다.
"…아니 왜 …"
"무슨 일입니까?"
부엌 입구에서 들리는 익숙해진 고고한 목소리에 내가 얼른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다행히 홍 여사는 그런 나의 행동을 보지 못한 듯 부엌에 들어와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며 이맛살을 찌푸리고만 있었다. 나의 손을 물었던 그녀는 홍 여사가 부엌에 나타나자마자 기절을 할 것처럼 놀라더니, 곧 나의 눈치를 한 번 보고 슥 도망치듯 홍 여사를 지나쳐 부엌을 빠져나가 버렸다. 도망치듯 나가버린 그녀의 뒷모습을 쫓는 듯 뒤돌아 한참을 부엌 밖을 보고 서 있던 홍 여사가 느리게 시선을 내게 두며 나를 천천히 훑었다. 괜히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간 더 수상해 보일 것 같아서 나는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웃으며 "물 마시러 왔는데, 절 보고 놀라셨나 봐요." 하며 식탁에 내려두었던 컵을 자연스레 들어 올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릿한 손에 자꾸만 컵이 흔들려 컵 안에 든 물이 전쟁이라도 난 듯 휘청 휘청거렸다. 손등으로 넘친 물을 바라보았다간 괜히 홍 여사의 시선을 끌까, 나는 자연스레 물이 묻은 아픈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물을 마셨고, 세 번 쯤 나눠 마시려고 했던 한 컵 가득 채운 물을 한 번에 들이키곤 "아, 시원하다!"하고 괜히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속이 빈 트림이 쿨럭 나와 좋지 않은 맛이 솟구쳤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홍 여사를 바라보며 마치 '왜? 무슨 문제라도?'하고 말하는 듯 능청스러운 연기를 해댔다. 아주, 전도연이 울고 갈 연기다.
홍 여사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 "…주인님이 아끼시는 장식품 위에 걸레를 두셨더군요. 어서 치워 주세요."하고 말하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로 부엌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녀의 그림자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크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 손의 상처를 확인했다. 물이 닿아 쓰린 상처에서 옅게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아직도 놀란 가슴은 정리되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물기란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나를 물고 당황스러움과 미안해하는 눈빛을 보내던 그녀의 눈빛이 아직도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왜 날 물었을까. 그렇게나 싫었을까. 뭐가? 내가 자기 손을 잡은 게? 아니면, 치료를 받으러 가는 게? 그것도 아니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자꾸만 불안한 눈빛으로 부엌 바깥을 흘끗거리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와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던 집안사람들까지.
▼
무기력했다. 젖은 이불을 떠안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홍 여사는 내가 주인님이 아끼는 장식품 위에서 걸레를 치우지 않았음에도, 그 뒤 복도를 두 번 더 닦지도 않고 그 복도의 큰 창문을 닦지 않고 방으로 들어와 버렸음에도, 식사를 가져다주면서도 내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나는 보란 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으니, 나 스스로도 나에게 관심을 거두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언제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 있나 스스로 내기를 건 것처럼, 옷도 갈아입지 않고, 혼잣말도 하지 않으며, 그냥 가만히 침대에 걸터앉아 한 뼘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냥 가만히 있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는 상처가 느껴졌지만 내려다보지 않았다. 더, 더 가만히 영원히 그냥 가만히 있고 싶어 버릴 것 같아서.
홍 여사가 밥을 두고 나간 지 한 시간쯤 흘렀을까, 짧은 노크 소리 이후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자박자박하는 걸음 소리를 들으니 홍 여사는 아님이 분명했다. 그녀는 아주 마른 몸매에 어울리게 아주 사뿐한 걸음걸이가 인상적이었으니까. 그 자박자박하고 소릴 내는 걸음은 홍 여사가 밥을 두고 간 테이블로 향하는 듯했다. 그리고 곧 밥그릇의 뚜껑을 열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달그락, 닫혔다. 머릿속에선 이미 밥그릇 뚜껑을 열어보는 이의 얼굴을 정해놓고 멋대로 상상을 하고 있었다. 하얀 피부에, 날카로운 눈 … 까만 정장… 사실 그렇게밖에는 상상이 되질 않았다. 난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을뿐더러, 첫째 날을 제외하곤 매일 어두울 때 그를 보았으니까.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그의 얼굴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적막이 흘렀다. 아니, 완전한 적막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빗소리가 아까부터 꾸준히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듣기 좋은 청량한 소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째 날에 들었던, 조금은 허스키하지만 탁 트인 시원한 목소리.
"…식사, 안 하십니까?"
대답하지 않으면, 괜히 그에게 '관심받고 싶어요'하는 것 같아 보일까, 나는 조용히 "생각이 별로 없어요."했다. 나의 그 말을 제 식대로 해석한 그가 "혼자 있고 싶으십니까?…나가 드릴까요?"하고 물었다. 괜히 그 말에 빈정이 상했다.
"맨날 혼자였는데, 더이상 뭘 어떻게 혼자 있어요."
내 빈정거리는 말투에 그가 말이 없었다.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는 그의 모습이 상상이 갔다. 그 뒤, 한참을 말이 없어서 나는 그가 문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 나가버렸나 싶었다. 고개를 돌려 확인을 해볼까. 고민하는데 먹먹히 멎어든 빗소리 사이로, 그의 미성이 흩어졌다.
"오늘은 온종일 비가 오네요."
마치 언제나 내게 그런 말을 해왔었던 사람처럼 그가 내게 말했다. '-합니다.' '-합니까?'를 쓰지 않는 그의 평범한 말투는 처음 들어서, 나는 너무 놀라 어깨를 움찔할 틈도 없었다. 나는 나와 같은 창문 밖을 쳐다보며 말하고 있을 민석씨가 상상되었다.
"곧, 장마입니다."
아니 무슨 일기예보야. 픽 웃음이 나오려다 꾹 참곤 투덜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티비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신문도 배달 안 오는데, 어떻게 알았대요."
"잠깐 바깥에 나갔다 온 동료가 전해줬습니다."
거기까지 말을 들은 내가 이불을 살짝 짚으며 고개만 빼꼼 돌렸다. 아주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던지라, 윽 소리가 날 정도로 몸 여기저기가 쑤셔왔다. 하지만 아픈 목에 개의치 않고, 나는 익숙한 자리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시원하게 이마를 드러낸 까맣고 짧은 헤어스타일에, 하얀 피부, 날카로운 눈, 오목조목 예쁜 코와 입술. 안개처럼 뿌옇던 머릿속에 하나하나 자리 잡는 그의 이목구비를 느끼며 나는 그를 향해 말했다.
"나 불쌍해요? 민석씨, 나한테 말 걸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내 말이 끝나자 민석씨는 내게서 시선을 떼고 살짝 천장을 보는 듯 하더니, 다시 원래 그가 이제까지 그랬듯 딱딱한 자세로 고쳐섰다. 꾹 다문 입술이 내 말에 긍정을 대답한 것 같아서, 괜히 입술을 삐죽댔다.
"치, 그렇다고 또 바로 입 다무냐."
나 또한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곤 크게 후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어쩐지 정말 말 다운 '말'을 몇 마디라도 했다는 생각이 들자 저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마음이 살짝 가벼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참에 기지개라고 켤까 하는 생각에 쭈욱 두 팔을 추켜올리는데, 우두둑하는 뼈마디보다 근육이 쭉 늘어나며 다친 손이 더 조여와서, 나는 움찔 얼른 손을 내렸다. 말을 해도 되나, 안되나? 하는 고민을 몇 초하다, 생각보다 긴 시간 고민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려 민석씨를 바라보았다.
"나 여기 다쳤어요."
괜히, 그에겐 응석을 부리고 싶어진다. 내 말에 날카롭던 눈이 동그래진 민석씨가 그 짧은 거리를 뛰어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 곁에 서서 힘없이 축 늘어진 내 팔을 들어 올린 민석씨의 눈이 꽤 심각했다.
"이건 …잇자국…!!"
흥분한 그의 목소리가 혹시나 바깥으로 새어나갈까, 놀란 내가 얼른 민석씨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날 내려다보는 민석씨의 표정이 날 감시하는 감시자도, 그의 직업대로 누군갈 경호하는 경호원도 아니고 꼭 그냥 다친 여동생을 보는 오빠 같아 보여서 괜히 픽 웃음이 나왔다. 사실 더 칭얼대고 싶었지만, 그는 정말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만 같아서 나는 얼른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음… 설명하자면 좀 길고요. 따지고 보면 제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거니까, 홍 여사님이나… 이 박사님이나… 특히. 특히 이 집 주인한테는 저어얼대 말하지 마세요. 저 진짜 안 그래도 이 집에서 왕따인데, 이 사실이 이 집안에 알려졌다간 여기 사람들한테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몰라요."
내 장난기 섞인 말투에도 민석씨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내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치료해야 합니다. 여름이라 상처가 잘 덧나니…"
"피도 멎었는데요, 뭐."
"…"
"…악! 뭐, 뭐하는…!"
갑작스레 상처 부위를 꾹 누르는 민석씨덕에 내가 비명을 지르다 입을 꼭 틀어막으며 주먹으로 그의 팔뚝을 퍽퍽 때렸다. 내가 자신을 두 번이나 때렸음에도 민석씨는 더 심각한 얼굴로 상처를 들여다보며 "근육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대체 얼마나 세게 물었으면…"하고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서 걱정이 묻어난다고 느끼면, 그것은 그냥 내 바람에서 오는 착각일까. 내 손 뒤집어 여기저기를 눌러보는 민석씨를 보다 기억을 잃은 뒤 만난 제대로 된 외간남자가 내 손을 마구 주물럭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괜히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손끝이 두근두근 거리는 것이 민석씨에게 까지 느껴질까 나는 황급히 민석씨의 손에서 내 손을 빼내 뒤로 숨겼다. 민석씨의 눈이 등 뒤로 숨어들어 가는 내 손을 따라 움직이다, 완전히 숨어버린 내 손에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고 보니 진짜 처음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도, 이렇게 가까이서 눈을 마주한 것도. 침을 꼴깍 삼킨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멀쩡한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괜찮아요. 금방, 금방 나으니까."
"이 박사님께 뿌리는 파스랑 소독약 같은 것 좀 받아오겠습니다."
"안…!"
"제가 운동하다 다친 걸로 얘기해둘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한 그가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뒤돌아섰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괜히 마음속 깊숙한 곳이 울컥했다. 감시관이면서 왜 저렇게 잘해주는 거야. 꼭 진짜 지켜주는 사람같이.
그가 막 방문을 닫고 나갔을 때였다.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여사님, 여… 꺄아아악!!>
숨넘어갈 듯한 비명 소리가 온 집안을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별안간, 머릿속에 내 손을 물고 안절부절못했던 여자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침대에서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 모든 관절에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지만 나는 절뚝거리면서도 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손잡이를 돌리는데, 쉽게 돌아간 손잡이에 비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픈 손까지 합세하여 문고리를 돌린 채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기니, 그제야 나는 바깥에서 누군가가 힘으로 문고리를 꼭 잡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사람은 단 한명 뿐이었다. 여전히 바깥에선 여자의 비명 소리가 멎어 들었다, 커졌다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입을 막는 것을 그녀가 계속 방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계속 소리를 질렀다. 한 번만 봐달라고. 하지만 그 소리가 내게는 꼭 살려달라는 것처럼 들렸다.
"문, 문 좀 열어줘요!"
문 바깥에선 어떠한 말도 없었다. 젖먹던 힘을 다해 잡아당기니 문이 아주 살짝 열렸다 다시 쾅 소릴 내며 닫혔다. 그리고 나는 그 잠깐의 틈 사이에서, 볼 수 있었다. 복도 끝을 바라보며 턱의 근육이 불툭해질 정도로 힘을 주어 문고리를 꽉 쥐고 있는 민석씨를 말이다. 나는 쾅쾅쾅 문을 두드리다 문고리를 잡아당기다를 반복했다. 내가 그런 소란을 피우는데도 그녀의 비명 소리는 오히려 더 크게 들려왔다.
<살려줘!!!!!! 살!!>
그리고 마치 그녀의 마이크 선을 누가 강제로 뽑아놓은 듯, 더이상 어떠한 비명도 말도 들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덜컹덜컹 문을 흔들던 나는 마당에서 개들이 컹컹 짖는 소리를 들으며 본능적으로 창가로 뛰었다. 빗줄기에 시야가 흐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마당에 세워져 있던 차에 시동이 걸리고 있었다. 나는 바깥에서 오는 비 때문에 유리가 뿌연 것을 알면서도, 안쪽에서 유리를 벅벅 문질러 닦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나는 곧 발견할 수 있었다. 막 현관을 급한 걸음으로 나오는 덩치 큰 사내와, 그가 어깨에 쌀자루처럼 멘 한 가냘픈 여자를.
축 늘어진 팔, 머리, 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눈에 담고 있는 그때, 머릿속에 휙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주방에 들어와 나와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던 홍 여사의 눈빛. 그리고 이제는 확실해진 이 집안의 암묵적인 약속. 나를 다치게 한 것은 그게 가구이든, 동물이든…사람이든. 이 집 안에 있을 수 없다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있던 그 약속.
그 생각이 들며 멍하니 차 뒷자리에 짐짝처럼 실리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내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나는 굳이 올려다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민석씨라는 것을 알았다. 나와 눈을 마주한 채로 민석씨가 제 등 뒤로 손을 뻗어 한 뼘쯤 열려있던 창문을 닫아버렸다.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가 물 먹은 것처럼 먹먹하게 들려왔다. 잠시 그의 눈을 쳐다보았던 내가 멍하니 그의 넥타이 어딘가로 시선을 던졌다.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듯했던 그가, 낮은 한숨과 함께 퓸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게 내밀며 말했다.
"장마가."
"………"
"시작되었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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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태풍때문에 비가 엄청 내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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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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