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이십 대, 혹은 십 대. 다른 또래와 같이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고, 사고 싶은 옷이나 보고 싶은 공연을 위해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하며, 이름난 맛집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릴 줄도 아는, 나는 아마도 평범한 여자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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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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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상실의 시대
w.MAYO
1화 「299」
그의 집에선 그가 왕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빼곤 누구를 위해 움직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그를 뺀 모든 사람들은 그를 위해 움직였다. 나는 가끔 그가 그들이 숨을 쉴 때 입으로 쉬는지 코로 쉬는지 하는 것이나,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먼저 드는지 물잔을 먼저 드는지까지 조종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그의 위에는 누구도 없었다. 누구도 없었고, 사실 있어서도 안 되는, 이곳에서 군림하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으며, 그에게 낙찰 당한 나 또한 그의 수많은 시녀, 노예 그 뭣 중 한 명이었다.
정신이 들고나서 나는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름, 살던 곳, 나이, 가족, 친구들. 물론 그들을 포함하고 있는 기억 전부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남은 기억들은 오래된 영화의 낡은 필름처럼 뚝뚝 끊겨 드문드문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 기억들이 내 머릿속을 굴러다닐 때면 꼭 끝이 뾰족한 돌멩이들이 우루루 내 뇌 위로 굴러떨어지는 것 같아서, 나는 기억이 날 때가 되면, 차차 생각나지 않을까 하며 억지로 나의 과거를 기억해보려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기억을 잃었으나 나는 아마 이전에 기억을 잃기 전에도 상황에 따라 그냥 그 상황에 적응하고 사는 낙천적인 여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며 말이다.
아직 약에 취해 헤롱거리던 아픈 나를 위함이 아닌 그를 위해 나를 진찰하던 의사는, 당사자인 내가 아닌 그의 비서에게 '워낙 많은 약물을 한 번에 흡수해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상황에 따라 기억이 장기적으로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내가 똑똑히 기억하는 것이 있었다. 유난히, 쓸데없이 깨끗하게 머릿속에 남은 그 기억들은 이따금 밤마다 꿈에까지 찾아와 나를 괴롭히곤 했다.
가로등 밑에서 흔들흔들 가방을 흔들며 집으로 걸어가던 나와, 아마도 내 친구로 추측되는 내 우스운 농담에 깔깔깔 웃던 내 또래의 여자 한 명. 붉은 가로등 너머 어둠 사이에서, 라이트를 끈 채 시동이 걸려있던 유난히 수상하던 커다랗고 까만 봉고차. 그 차 옆으로 다가섰을 때 우루루 나온 모자와 마스크를 쓴 검은 복장의 남자들. 소리 지를 새 없이 틀어막히던 코와 입, 급하게 들이마신 숨에 훅하고 뇌까지 저릿하게 만들었던 약물 냄새, 몽롱한 정신 속에서 느껴졌던 봉고차 시트에서 풍기던 습한 냄새와 역한 담배 냄새와 끈적한 느낌. 정신이 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팔에 꽂히던 얇은 주삿바늘, 차라리 벗기는 편이 나았을 거지 같은 란제리, 온통 검은 공간, 나와 비슷했던 여자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내 옆에 있던 웃는 게 예뻤던 그 여자.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나를 향해 흰자를 치켜뜨고 경기를 일으키던 그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를 우악스럽게 끌어당기던 거친 손길, 그 때문에 옆으로 픽 쓰려져 바닥 위를 기던 그 여자. 어둠 속에서 갑자기 머리 위에서 섬광처럼 터진 하얀 빛. "순수 백 프로 처녀! 사실 오늘 경매의 최상급 물건이라고 할 수 있죠!"하고 소리 지르곤 나를 향해 입맛을 다시던 그 남자의 곰보가 잔뜩 팬 얼굴. 쇤 목소리. 사방에서 삑,삑, 하는 소리와 함께 번쩍거리던 붉은 빛들. 그리고 붉은 빛이 깜빡일 때마다 백만 원도 아닌 천만 원씩 치솟던 금액.
그리고 난 나의 몸값이 2억을 넘어섰을 때 기절해버렸고, 정신이 들었을 땐 이곳이었다.
마치 그 어둠 속을 걷고 있던 그때부터가 진짜 내 세상이었던 듯, 그 이후의 기억들만이 아주 선명했다. 지랄같이.
"아가씨."
낮고 중후한 목소리에 움찔 고개를 들었다. 여집사 홍 여사였다. 그녀는 내가 약물이 해독되지 않아 근 2주간 사경을 헤맬 때 나를 씻겼으며, 나의 입안에 밥을 떠넣어 주고, 내 옷을 갈아입힌 이 집 안에서 아마 그다음으로 가장 권력이 높은 사람이었다. 왜 나이 많고 직급이 높은 그녀가 직접 나를 돌보아주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었지만, 그녀 빼고 다른… 시녀, 시종… 아 좀 현대에 걸맞는 적당한 부름이 없나. 뭐…아무튼 이 집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나와 말을 섞어주지 않고 있기에, 오히려 그녀가 나를 돌보아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늘 누구씨, 하고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는 늘 나를 아가씨라 불렀다. 그것은 이곳에 옴과 동시에 나의 기억 저편으로도, 그리고 어쩌면 세상에서도 사라져버린 내 이름을 그녀가 알지 못해서가 아닐까 추측했다.
나는 그녀의 시선에 상념에 빠져 멍하니 손에 들고 있던 걸레를 야무지게 바닥에 문지르며 "네 여사님?"하고 대답했다. 내가 대답하고도 참, 납치되어 온 사람 치고 아주 친절하고 밝은 목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방에 식사 가져다 놓았습니다."
"아… 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인가 봐요."
"마저 마무리하시고 식사하세요."
넉살 좋게 건넨 대화에도 자신의 할 말을 마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는 그녀의 사뿐한 뒤꿈치를 멍하니 바라보다 나는 걸레질을 멈춘 채 내가 닦던 복도를 슥 훑어보곤, 다시 복도의 코너로 사라지는 그녀의 단정한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사실 늘 물어보고 싶었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늘 부엌에서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면서, 나만 방으로 식사를 가져다주는지. 하지만 결국 오늘도 하지 못했다.
왠지, 나의 물음에 입을 꾹 다물어버릴 홍여사의 표정에 담긴 대답을 보면 그 대답을 모르겠지만, 아니 잘은 모르겠지만, 상처를 받아버릴 것 같아서.
방으로 돌아오니 작은 티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고급스런 쟁반이 보였다. 그 위에 딱 한 끼 먹을 만큼 정갈하게 담긴 끼니마다 바뀌는 네 가지의 반찬과 기본적인 김치, 밥, 그리고 국물류가 어디 <잘 차려진 한국인의 밥상>이란 주제로 잡지에 실려도 될 법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아 멍하니 그 식사를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멍하니 밥그릇을 뚜껑을 열고 수저를 들었다. 사실 이런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왠지 일 하고 난 뒤 방 안에서 덩그러니 혼자 식사를 하는 내 모습이 너무 처량하고 나의 기구한 팔자가 서러워서 상을 뒤집거나 그릇을 집어 던지거나 하는 포악한 행동을 하며 엉엉 울었지만, 결국 내가 집어 던진 그 그릇의 파편들과 음식의 찌꺼기들도, 모두 다 내가 치워야하며, 엎어버린 밥은 다시 주지 않으며, 결론적으로 이 곳에서 나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부터는 가끔 울컥 눈물이 나기는 하나 꿋꿋하게 모든 반찬을 다 비워냈다.
식사를 마친 뒤 그릇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가니, 역시나 한곳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던, 아직 식사 중인 몇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지금까지 나의 말에 한 번도 시선을 주거나 네 아니오의 대답도 해주지 않은 그들은 저들끼리는 속닥거리며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나는 그게 이 집에서 겪었던 일 중 가장 서러웠다. 기억을 잃어 안 그래도 외로운 나를, 더욱 더 외롭게 만드는 그들이 너무 미웠다. 그리고 아마 그 것을 지시했을 홍여사도, 어쩌면 홍 여사에게 그것을 지시했을 그 또한 미웠다.
"주인님 오신다."
복도를 울리는 홍여사의 낮은 외침에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허둥지둥하는 모습 없이 아주 빠르고 간결한 몸짓으로 식사를 치우고 몸을 단정했다. 설거지통에 그릇을 넣던 나도 어느덧 서럽도록 익숙한 몸짓으로 그들과 다름없이 몸을 단정하곤 꼬리를 물고 일렬로 부엌을 나가는 그들의 맨 뒤에 서서 복도를 걸었다.
현관 앞 벽에 일렬로 쭉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 아주 장관이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주인님은 그 장관을 보는 사람치고 표정이 늘 어딘가 썩어있었다. 내가 이렇게 속으로 썩어있다던가, 싸가지라던가. 이런 표현이나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의 표정은 더 볼만해질 텐데, 죽다 살아난 나는 또다시 죽고 싶지 않기에 한 번 더 다문 입술을 꾹 눌러 칠칠치 못한 입을 단속시켰다.
뒤에 두 명의 수행비서, 혹은 경호원을 늘 달고 다니는 그는 신발을 벗고 익숙하게 자켓을 벗었다. 그러면 얼른 가장 앞줄에 서 있던 사람이 그가 자켓을 벗는 것을 도와주고 그것을 받아들었다. 나는 가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왜, 신발도 벗겨주고 발에 슬리퍼도 신겨주지. 밥도 떠먹여 주고 말이야. 하고 속으로 이죽거렸다.
몸을 단정히 한 사람들이 보람도 없게 그들에게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고 피곤한 눈빛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눈빛이 아주 잠깐 나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잠깐 닿았다 떨어진 시선일 뿐인데도 그는 그사이에 마치 뜨거운 불덩이를 내게 얹어놓기라도 한 듯 이상하게 그 시선을 받으면 얼굴이 뜨거웠다. 나는 그럼 그때는 그런 시선을 내게 준 그가 아니라 나를 속으로 욕했다. 이 속물, 변태. 하고.
하지만 그의 시선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사실 이곳에 만약 나 빼고 젊은 여자가 한 명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백 배고 천 배고 공감해주었을 부분이다. 그는 안에만 열다섯명, 밖에도 열 몇 명은 되는 사람들을 부리고 2억이 넘는 돈을 주고 나를 산 재력과 권력을 가진 것치고, 늙지도 않았으며, 배가 나오거나 머리가 벗겨졌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많아 봤자 삼십 대 초반. 아마도 어리면 이십 대 중반쯤 돼 보일만큼 젊었으며, 까맣고 결 좋은 피부에 뚜렷하고 남자다운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객관적 미남이었다. 게다가 늘 옷에 싸여있지만 딱 벌어진 어깨라던가, 고개를 쭉 들어 올려다보아야 하는 커다란 키는 또 어떻고. 물론 매일 같은 복도를 세 번씩이나 닦게 하는 그 지랄 맞은 까다로움이나, 제 아래 누구 없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한 거만함만 보면 아주 뭐 같은 놈이 분명했지만 뭐 그 정도 재력에 그 정도 권력을 저 나이에 가진 놈치곤 저 정도 성격이 양반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를 흘끗 보고 지나치는 듯했던 그가 여전히 뒷모습을 보인 채 말했다.
"옷 들고 따라와."
그의 목소리는 늘 어딘가 불만에 차있는 듯 퉁명스러웠다. 나를 정확히 짚어 말을 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나는 자연스레 맨 앞에 서 있던 사람에게서 그의 겉옷을 받아들고 그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그의 옷에서 옅은 담배 냄새와 스킨 냄새가 났다.
그의 뒤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서서 익숙하게 그의 옷장으로 다가가 옷장 문을 열고 빈 옷걸이에 자켓을 걸었다. 적막 속에서 자켓을 건 옷걸이를 옷장에 걸고 뒤돌아 자연스레 그에게 다가가 그가 푸른 넥타이 또한 받아들었다. 언제 꺼내 물었는지 입엔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문 채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말했지만, 그의 시선을 받으면 나는 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곤 했다. 애써 침착한 얼굴로 뒤돌아서는데, 그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갑작스런 상황에 윽하는 소리와 함께 휘청하고 기울어지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서니, 그가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빼내 바닥에 던지곤 부드럽지 못한 손길로 내 턱을 쥐어챘다. 그리고 역시나 배려심 없는 손길로 휙 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를 보고 있지 않음에도 그가 내 뺨을 바라보고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어쩐지 눈에 그려졌다.
"이거 뭐야."
안그래도 퉁명스러운듯한 말투에 진짜로 불만이 더해졌다. 나는 아까 낮에, 나도 모르게 어딘가에서 긁혔던 뺨에 난 실같은 상처를 떠올리며 "아."하고 짧게 탄식했다. 으득하고 이가 뭉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뭐냐고!"
나는 그의 고함에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죄송합니다."하는 인사는 구질구질하지만 아주 빠르고 작게 읊조렸다. 그 뒤, 그는 누가 이랬어. 어쩌다 다쳤어? 하는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그는 이상했다. 그는 평소 내게 관심이 없는 듯 굴다가도 나도 깨닫지 못할만큼 내 몸 어딘가 작은 상처가 나더라도 그것을 아주 빠르게 발견하곤 그것에 극도로 예민하게 굴었다. 설마 그가 나를 걱정하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도, 나를 거칠게 다루는 그를 보며 그냥, 2억을 넘게 주고 산 제 재산에 흠집이 가는 것이 죽도록 아까운 거겠지. 하고 늘 결론을 내렸다.
그가 씩씩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가 더 폭주하기 전에 설명을 해야겠다 싶어 얼른 입을 뗐다.
"그게 언제 난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거실 가구를 닦고 나서 보니까…"
"거실 가구 뭐."
나는 그의 불퉁한 목소리를 들으며 내일 잠에서 깨면 거실 가구 몇 개는 부서져서 정원에서 활활 타고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언제 난 건지는…"
내 말에 그가 내 상처를 보던 시선을 내 눈으로 돌렸다. 일렁이는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니 어쩐지 속 깊은 곳이 울렁거려 얼른 고개를 숙였다. 휙 내 턱을 놓은 그가 "나가."하고 낮게 말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곤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에서 뛰지 말라던 홍여사의 당부도 잊고 도망치듯 방에 뛰어와서 잠시 문에 등을 기대곤 가슴을 쓸어내렸다. 터벅터벅 홀리듯 침대로 걸어가 털썩 앉아있기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똑똑하고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물론 예상이 가는 인물이었다.
"이 박사입니다."
"들어오셔도 돼요."
내 말에 부드럽게 문이 열렸고, 하얀 가운을 입은 내가 이곳에 처음 올 때부터 나를 진찰했던 중년의 의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늘, 늘 오늘처럼 내가 다친 것을 확인한 그는 바로 의사를 보내 나를 치료하게 했다. 어디에 부딪혀 작은 멍이 들었건, 오늘처럼 찢겨 상처가 났건 어디를 어떻게 다치던 그는 의사를 보내 나를 치료하게 했다.
익숙하게 내가 앉은 침대 위에 가져온 구급상자를 풀어놓은 그에게 나 또한 익숙하게 상처가 난 뺨을 내밀었다. 뺨에 소독약이 닿아도 따끔하지도 않을 만큼 아주 작은 상처여서,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소독약이 묻은 거창한 거즈나, 의료용 핀셋을 보기가 조금 민망했다. 그러다, 갑자기 툭, 하고 머릿속에 끼얹어진 아까 그의 그 일렁이는 눈빛에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
"다른…그…직원분들이 다쳐도 이렇게 치료해주시나요?"
입 밖으로 내뱉으니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더 빨리 듣고 싶어져서 나는 볼에서 그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아예 이 박사를 향해 돌아앉았다. 하지만 그는 나의 적극적인 행동이 무색하게 어떠한 대답도, 표정도 없이 구급상자를 정리해 달칵 닫곤 침대에서 일어섰다. 늘 말을 할 때마다 위아래로 움직이던 그의 이마에 깊게 팬 두 개의 주름까지도 고요했다. 나는 일어서는 그를 따라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내일 되면 거즈는 떼어내셔도 됩니다. 물은 안 들어가게 해주시고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기대를 처참히 뭉갤 만큼 사무적인 말이었다. 그럼 그렇지. 여기 사람들이 뭐 내 말에 제대로 대답해준 게 뭐가 있나. 물어본 내가 등신이지. 후 한숨을 뱉곤 "네."하는 대답과 함께 그대로 눕고 괜히 심술이 나 휙 몸을 돌려 누웠다. 등 뒤로 달칵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 나갈 때와 다르게 오늘은 배려심 있게 '불 끌까요?'하고 묻는 것을 잊어버린 듯한 이 박사를 보며, 아마 나의 질문이 그를 꽤 당황하게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지레짐작했다.
거즈가 붙은 뺨을 베개에 비비며 살짝 몸을 웅크렸다. 내 턱을 움켜잡았던 그의 손길이 아직도 턱 어귀에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에 괜히 고개를 숙여 턱을 몸에 비볐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는 이상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분명 이렇게 걸레질이나 하고 집에 온 그의 옷이나 받아주려 이곳에 2억이 넘는 몸값에 팔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자를 홀라당 벗겨 값을 매겨 판매한다는 것은, 그곳에선 적어도 나를 그에게 성 노예로 팔았단 뜻인데, 나는 이곳에 온 이후 홍 여사와 이 박사를 제외한 사람에게 내 맨살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나는 가만히 배고 있던 팔을 빼내 손목을 보았다. 「299」라는 선명한 숫자가 불에 탄 듯 강렬한 흉터로 손목에 남아있었다. 그것은 나를 여기에 넘긴 그 매춘시장에서 여자들을 구분하기 위해 새긴 번호라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통증을 없애거나, 감각을 없애거나 하는 수없이 많은 마약을 맞았음에도, 이 숫자를 새길 때, 너무 아파서 입에 물린 수건을 뚫고 짐승 같은 비명을 뿜어냈던 것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여전히 생각 날 때마다, 나를 울컥하게 하는, 이 집에서 그를 처음 본 날. 머릿속이 산산조각이 나버린 내가 온종일 울다가 그를 만나고, 그가 나를 샀다는 것을 듣고 절박하게 그에게 매달려 "내 이름,내 이름이 뭐예요."하고 물었을 때, 그가 힘없는 내 손목을 들어 보곤 툭 손목을 떨구며 내게 한 말이었다.
"299."
299. 그 거지 같은 숫자가 그게 내 이름이라고. 그렇게 나를 완벽한 성 노예로 이름을 지어준 것치고, 그는 바쁜 것인지 뭔지 집에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올 때마다 내게 그런 성적인 것을 요구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늘처럼 옷 시중을 들게 하거나, 목욕물을 받게 하거나 하는 정도. 사실 목욕물을 받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 혼자 속으로 같이 씻자고 하면 어떡하지 하며 혼자 속으로 별 상상을 다했었는데, 정말 목욕물을 다 받자마자 가운을 입고 들어온 그는 냉정하게 내게 "나가."하고 말하며 나를 내보냈다. 그에 대한 무서움이 조금 가셨을 때, 그가 나를 정말 건들지 않는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가 왜 나를 건들지 않을까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고민을 했는데, 내 머릿속으로 나는 결론은 정말 딱 하나뿐이었다.
뭐, 너도나도 사니까 덜컥 나를 사놓고, 막상 가까이서 보니까 제 취향이 아니었나 보지 뭐. 하는.
그런 생각에 왠지 기분이 나빠져 쳇하고 콧방귀를 뀌곤 돌아누워서 아, 씻자. 근데 너무 졸리다. 하는 생각을 반복하며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누군지 예상이 갔지만, 그 예상이 가는 문밖의 인물 또한 내 속을 비비 꼬이게 하는 이 집안의 사람 중 탑 쓰리에 드는 사람이었기에 대답 없이 씻는 것을 포기하며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아주 조금의 정적 끝에 조용히 문이 열렸다. 그 뒤 아주 작게 달칵 소리가 들려왔고, 아주 먼 곳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듯하더니 곧 불이 꺼졌다.
내 속을 비비 꼬이게 하면서도 이상하게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라서, 나는 방 안에 들어와 불을 끄고 어둠 속에 가만히 서 있는 그 인물이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가만히 그에게 장난을 걸었다.
"들어왔을 때 나 옷도 안 갈아입고 자서 안 씻고 자는구만? 하고 더럽다고 생각했죠."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어쩔 수 없어요. 의사쌤이 상처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랬거든요. 난 정말 씻고 싶은데."
나는 아예 눈을 뜨고 돌아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쭈욱 기지개를 켜다 휙 고개를 내려 매일같이 그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아 온통 까맣던 주변이 점점 밝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눈이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져 이윽고 그의 모습 또한 찾아냈다. 늘 같은 자리에 서서 밤새 나를 지켜보는 나의 경호원. 이라고 말하면 우습고 나를 감시하는 감시자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맞겠다. 지난날 몸이 회복되자마자 나는 탈출을 시도했었고,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마당에 풀어놓은 미친개들때문에 정말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만에 잡혀 질질 도로 집안으로 끌려들어 왔고, 그 뒤 이렇게 낮엔 일하는 사람들의 감시를 받으며 밤엔 자기 말론 경호실장이라지만, 경호원인지 조폭인지 실제론 알 수 없는 이 남자의 감시를 받으며 사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내가 창문을 열고 탈주했다는 것을 들은 이 집의 대단하신 주인님은 그 뒤 집안의 모든 창문을 정말 환기가 겨우 될 만큼의 한 뼘 거리만큼만 열리게 모두 뚜드려 박는 공사를 해버렸다. 그래서 이젠 내가 여기서 죽어서 나가는 것이 이 집을 나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 되어버렸지만 우습게도 난 죽을 용기는 없었다.
근데, 왜 나는 그렇게나 이 집이 싫으면서도, 나를 밤새 못 도망가게, 그리고 맘대로 죽지 못하게 감시하는 이 남자가 따뜻한가.
"민석 씨 아까 정원에 있는 거 봤는데. 그 미친개들이랑 놀아주는 거."
'오늘부터 밤새 아가씨 곁에 있을 경호실장 김민석입니다.'
이 집에서, 나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얘기해 준 사람이라서. 그 말 이후 그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대꾸를 안 해주었지만, 난 그냥 그가 내게 말해준 이름 하나로 아주 많은 위안을 받고 있었다. 말 못할 만큼 아주 많은 위안을.
그 뒤로도 나는 한참 그에게 마치 묶어뒀던 보따리를 와르르 풀어놓듯 주절주절 말을 읊어댔다. 아주 가끔 그가 대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듣고 있죠?" 라거나 "자는 거 아니죠?"하고 물어가면서까지. 그러다가, 자연스레 잠이 들었고, 잠결에 새벽 쌀쌀한 기운에 움츠러든 내 몸 위로 이불이 덮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안녕하세요 마요라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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