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w.MAYO
5화 「평화」
왜, 하필 오늘이야. 나는 김종인의 팔을 어깨에 짊어지고 거의 질질 끌고 가다시피 하며 녀석의 방으로 가는 내내 속으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냥, 복도에서 야간 경비를 돌고 있을 경호원들에게 던져두고 얼른 거실에 뿌려놓은 나의 이불과 속옷을 챙겨 들고 민석씨가 깨기 전에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근데, 근데…!
"왜 하필 오늘 세미나냐고!"
나는 김종인을 침대에 던지듯 놓으며 외쳤다. 낮에 몇 대의 봉고차로 나뉘어 집을 나서는 경호원들을 보며 내가 물었을 때, 민석씨가 흘리듯이 '아, 세미나.'하고 짧게 대답하곤 무전을 받고 방을 나선 것이 이제야 생각났기 때문이다. 정말 최소한의 사람만 남는 것 같았는데, 에이씨 이 집은 나한테 감시관 붙여놓을 사람은 남겨두면서, 집주인 지킬 경호원은 다 어딜 내보낸 거야? 궁시렁거리며 씩씩 거칠어진 숨을 내뱉다, 나는 내가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그 불편한 자세 그대로 잠을 자고 있는 김종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천사다. 천사야."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져 있는 녀석의 다리 하나를 침대 위로 끌어 올려주곤 살짝 틀어져 아플 것 같은 허리도 바로 해 주었다. 그리고 나니 불현듯 녀석의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빨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김종인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 입술의 아릿아릿한 통증이 더불어 느껴졌다. 벌컥 하고 떠올라버린 키스에 울컥해져 버려 "이 자식 뭘 잘했다고 내가 이 고생을…"하며 손을 확 쳐들었다가, 그 와중에도 순간 어디를 때려야 할까 고민하며 손을 든 채 이곳저곳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을 든 채 몇 초 고민하다 내려친 곳은 종아리였다. 기껏 고민하다 때린 부위가 너무 소심한 곳인가 싶어 혼자 속으로 자존심이 상했지만, 잘못 때렸다가 녀석이 잠에서 깨기라도 한다면 그땐 내가 영영 깊은 잠에 빠지게 될 수도 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팔짱을 낀 채 서서 새근새근, 그러나 어쩐지 그렇게 편안한 표정은 아닌 얼굴로 잠이 든 김종인을 내려다보다, 문득 이 방에 처음 왔을 때 보았던 액자를 떠올렸다. 남자아이 셋이 나란히 잔디 위에 엎드려 턱에 꽃받침을 하고 찍은 그 귀여운 사진이 든 액자가. 나는 팔짱을 낀 채 시선을 돌려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같은 위치에 놓여있는 액자를 확인하곤 천천히 책상 앞으로 다가간 내가 액자를 들어 올렸다. 굳이 김종인을 보고 있지 않았어도 난 이사진이 가끔가다, 꽤 자주 떠오르곤 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여전히 쿨쿨 자고 있을 김종인을 바라보곤 다시 고개를 돌려 사진을 바라보았다. 맨 왼쪽은 누가 보아도 김종인이고… 가운데 덧니가 귀여운 예쁘장한 남자아이…그리고 진짜, 정말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강아지같이 귀여운 남자아이까지.
"컸을 때 사진은 없는 거 보니, 지금은 안 친한가 봐요."
"…."
"그렇지, 당신 같은 사람이랑 누가 친구를 하겠어요."
옆의 둘과 다르게, 조금 어색하게 웃고 있는 어린 시절의 김종인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 말이야 억측이지만 김종인이 늘 외로워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도 물론 내 억측일 수 있고, 내가 이 집안에서 그가 웃거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김종인은 어떻게 웃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죽도록 싫어했던 주인 놈이랑 키스했다고 아주 뿅 갔니? 싶어 민망함에 입술 위를 긁적이며 다시 뒤돌아 흘끗 김종인을 바라보려던 나는, 나를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김종인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엄마!'하고 매우 놀라 떨어트릴 뻔 한 액자를 품에 얼른 끌어안았다. 그리고 이어서 품에서 느껴지는 액자의 느낌에 흠칫 몸을 떨곤 얼른 돌아서서 책상 위에 액자를 내려놓은 내가 다시 김종인을 바라보았을 땐, 여전히 몽롱한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종인이 보였다. 아, 잣댔다. 하는 생각도 잠시, 김종인이 얼굴을 들어 베개를 고쳐 베며, 나를 향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와."
아주 낮게 가라앉았음에도, 그 목소리가 어쩐지 자상해서, 나는 김종인이 여전히 나를 그 현이인지, 현아인지 하는 여자와 혼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난 줄 알았다면 아주 날듯이 달려와서 냉큼 액자를 뺏어 들고 '진짜 죽고 싶어 이래?'하는 소릴 하며 으르렁거렸겠지. 스스로 한 비교에 어쩐지 기분이 상해버려서 내가 소심하게 "싫은데."하고 대답하곤 두려움에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눈치를 살피니, 내 말을 들은 김종인이 베개에 조금 더 얼굴을 묻으며 하하하 웃더니 "얼른."하며 따듯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나를 불렀다.
김종인의 그 웃음이, 그 웃음의 음절 하나, 하나가 발자국이 찍히듯 쿡쿡 내 속에 박히는 것 같아서 나는 꼭 첫 방문객인 닐 암스트롱을 맞이하는 달이 된 것 같았다. 닐이 찍는 그 발걸음을 느끼며, 달 또한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 묘하고 이상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왼발을 쿵 바닥에 구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달아나지 않는 이상한 느낌에 "왜이래?"하곤 혼잣말까지 했다. 저 술에 떡이 된 김종인 말고, 누군가가 내 모습을 보았더라면 저 여자가 미쳤나? 했을 수도 있겠다.
나는 끈덕지게 날 따라붙는 김종인의 시선에 결국 김종인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한 걸음쯤 앞에 멈춰선 내가 반짝이는 김종인의 입술에 괜히 머쓱해져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며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더 가까이 와."
김종인의 목소리에선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 여자한텐, 저렇게 쉼 없이 웃어주었을까.
"아 그냥 여기서…으악!"
가까이 오라는 말에도 내가 발끝을 툭툭 땅에 구르며 퉁명스럽게 말을 잇는데, 어지럽지도 않은 지 벌떡 상체를 일으킨 김종인이 그 긴 팔을 쭉 뻗어 내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정말 그대로 몇 발 엉거주춤 침대 앞으로 휙 끌려다가 결국 침대 위로,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스레 안쪽으로 자리를 옮긴 김종인이 원래 누워있던 자리에 엎어져 버린 내가 '헙!'하고 숨을 들이켜자마자, 김종인의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 내 오른쪽 어깨를 지나 왼쪽 어깨에 닿아 그대로 잡아 나를 돌려 눕게 했다. 강함 힘으로 갑자기 휙 김종인의 품에 안겨버린 내가 "왜 이래!!"하고 소리치며 깔리지 않은 왼손으로 녀석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떨어지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녀석이 아예 나를 단단히 끌어안아 버려 내 외침은 녀석의 가슴팍에서 웅웅 벌처럼 맴돌 수밖에 없었다. 순간 의심이 들었다. 이 새끼 이거, 술 깬 거 아니야?
"야."
"……."
"야!"
소심해서 종아리를 찰싹거릴 땐 언제고, 겁대가리를 상실한 내가 그 좁은 틈에서 고개를 살짝 위로 들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지만,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몇 번 더 큰소리로 녀석을 부르던 나는, 내 뒷목을 간질이는 녀석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녀석이 아주 금방 또 잠이 들어버렸고, 나에겐 나를 단단하게 감은 녀석의 팔과 다리, 그리고 내 정수리까지 단단하게 잡고 있는 이 녀석의 턱을 빠져나갈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 또한 깨닫고 말았다. 거실에 두고 온 내 이불들과 속옷이 생각나 우는 목소리로 일어나라고 징징거리듯 소리쳤지만, 눈꺼풀을 닫으며 귓구멍에도 셔터가 닫혔는지 김종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답답한 공기에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어쩐지 아까보다 훨씬 편안해진 얼굴로 잠이 든 김종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짜 어떡하지. 눈을 질끈 감고 울상으로 안 그래도 아픈 입술을 더 잘근잘근 깨무는데, 별안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손길에 움찔 몸을 떨었다. 뭐지? 그나마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김종인의 팔뚝 위에 얹었다. 그의 팔뚝 힘줄이 움직이는 느낌으로 나는 잠결에 김종인이 내 등 뒤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집어 문질문질 거리고 있음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난 녀석이 잠에서 깼나 싶어 다시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녀석은 여전히 새근새근 자는 중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1시 30분에서 2시가 훌쩍 넘었을 때까지, 그리고 또다시 3시가 다 되어 내가 더는 녀석을 밀어낼 힘도, 눈꺼풀을 열어둘 힘도 남아있지 않아 천천히 스르르 잠에 빠져들 때까지, 녀석은 꼭 '아직도 네가 여기 있나.'하고 확인하듯, 그렇게 문득문득, 내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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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에서 깬 종인은, 누군가 제 옆에 누워있는 것을 보곤 놀라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였다. 아니 왜…? 인상을 찌푸리고 기억을 해보려 해도 머리만 아플 뿐 도저히 지난밤이 기억나질 않았다. 발가벗은 여자 두 명과 호텔 방에서 눈을 떴을 때도 당황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아래위로 옷까지 착실하게 입고 있는 그녀를 보는 것뿐임에도 당황함이 역력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종인은 저도 모르게 저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정장 바지에, 와이셔츠,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였다. 아니 근데 그건 둘째치고 왜… 얘가 여기에… 종인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밤에 쫓아 들어갈까 봐, 쟤가 어디서 자는지 방도 알려주지 말라던 놈이. "
문 앞에서 들린 준면의 목소리에 그녀를 바라보던 종인이 움찔 놀라 뒤돌아보았다. 문에 기대어 선 채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준면이 종인의 시선에 다시 입을 뗐다.
"직접 방으로 끌고 오냐."
"…내가?"
"뭐, 딱히 네가 끌고 왔다기보단, 쟤가 널 부축해서 여기까지 오다가 이 사달이 벌어진 것 같지만."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오, 그래?"
종인은 준면의 능청스러운 연기 톤에 미간을 팍 찌푸렸다. "나 뭔 짓 했어? 뭔 짓 했어?" 속사포처럼 이어 붙인 종인의 물음에 준면은 지난밤을 떠올렸다. 종인에 의해 밖으로 쫓겨나갔던 준면과 형규는 걱정이 되어 바로 옆 베란다 창문에 달라붙었고, 그 모든 상황을 볼 수밖에 없었다. 거실에 있는 이불과 그녀의 속옷을 제일 먼저 집어 든 이도, 준면이었다. 하지만 준면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아니, 별로."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분명 두고두고 좋은 놀림감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2시간 내로, 출발 해야 해."
"어."
"저대로 두고 갈 거야?"
준면의 말에 고개를 돌려 자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종인이 아까보다 현저히 작아진 목소리로 "깨워야지."했다. 문에 기대어 서 있던 준면이 다가와 종인 대신 "저기요."하고 손을 뻗었지만, 종인이 빠르게 그런 준면의 손목을 낚아채며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왜?"
"5분만."
"…야. 늦는다."
자신의 타박에도 귀찮다는 듯 나가라고 손짓하는 종인을 보고, 준면이 푹 한숨을 쉬며 인상을 찌푸렸다. "5분이라고 했다."하며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며 방 밖으로 나가는 준면을 눈으로 좇던 종인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주먹부터, 팔뚝, 팔꿈치, 어깨, 머리 순으로 아주 느리고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그녀의 곁에 누운 종인이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단잠에 빠진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가 눈을 뜨고 있었더라면, 아직도 종인이 취해있는 거라고 단정 지을 법한 다정한 눈빛이었다.
베갯잇에 눌린 하얗고 통통한 볼살도, 그에 살짝 벌어진 입술도, 가랑가랑 하고 작게 고는 코골이 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던 종인이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부어있는 듯한 그녀의 입술에 시선이 꽂혔다. 눌려서 그런 건가, 아님, 자는 중에 입술이 잘 붓나. 그런 생각을 하며 볼 위에 어지럽게 흐트러진 잔 머리카락을 조심스러운손길로 걷어낸 종인이, 곧 제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뺨을 덮었다.
열린 창 밖으로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든 것 중 평화롭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평화로운 얼굴로 잠이 든 그녀의 뺨을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가만히 손으로 덮어두곤 빤히 바라만 보았다. 만지면 깨어질까 두려워하는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가만히 상체를 숙여 그녀의 볼록한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댄 종인이, 맞닿은 이마에서 느껴지는 두근거리는 박동 소리를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너에게 가는 모든 소음은 내가 대신 들을 테니, 너의 평화는 언제나 고요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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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흔들 거리는 느낌에 몽롱한 꿈속에서 서서히 현실로 정신을 끌어오던 나는, 내가 단순히 몸이 흔들거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 놀라 번쩍 눈을 뜨니, 검은색 자켓 카라에 붙은 눈에 익은 금색의 경호원 배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 뒤를 이어 움직일 때마다 사부작 사부작 코에 닿는 자켓에선 익숙한 스킨 향기가 나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을 굳이 보지 않아도 이 사람이 누군지 너무나도 잘 알아버린 내가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 지난밤, 그리고 새벽의 순간들이 죽음을 앞둔 사람 시야를 스쳐 지나가는 그 주마등이 내 눈앞에 기차처럼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아마도 침대에서부터 나를 이렇게 안아 들고 왔을 테지. 무거울 몸무게보다, 엄한 곳에서 딥슬립을 해버린 것에 대한 부끄러움의 무게가 더 무거워서 나는 끝까지 자는 척을 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다시 마치 원래 깨어난 적도 없는 척 스르르 눈을 감는데, 머리 위에서, 피곤함이 가득한 쇤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으면, 미안하단 소리라도 하지."
아직은 익숙 치않은 민석씨의 반말에 내가 움찔하며 눈을 다시 번쩍 떴다. 고개를 살짝 드니, 여전히 내가 아닌 앞을 보고 걷는 민석씨의 얼굴이 보였다. 턱 끝에 맺힌 땀을 보고 내가 손을 뻗었으나, 민석씨가 고개를 뒤로 빼며 "하지마."했다. 딱딱한 존댓말에서 벗어났으나 평소보다 더 무서운 분위기에 내가 눈치를 보며 다시 팔을 슬그머니 내렸다. 천천히 반말하겠다더니, 차라리 존댓말을 했으면 더 나았을 법한 분위기에 내가 어쩔 줄 모르겠어서, 어색하게 웃으며 이 품에서 벗어나 제대로 서서 이야기를 하려고 몸을 버둥거렸다.
"안 그래도 힘드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아니 그러니까 그냥 걸어서…"
"다 왔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민석씨가 살짝 숨을 참으며 나를 고쳐 안았다. 그리고 내 등 뒤로 민석씨의 손에 의해 방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 다 왔구나. 민망함에 민석씨의 자켓 자락을 쥔 채 하하 기어들어가듯 웃었다. 민석씨는 방 안에서 나를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굳이 나를 안고 침대까지 걸어와 침대에 앉히듯 나를 내려놓았다. 목소리는 꼭 휙 집어 던질 것 같더니 나를 내려놓는 손길이 꽤 조심스러웠다. 김종인이었으면 냅다 집어 던졌겠지. 에이, 아니다. 애초에 안아서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김종인이 생각나 버린 내가, 허리를 펴고 제 이마와 볼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있는 민석씨에게 말했다.
"김종인은요?"
"…이름 어찌 알았습니까?"
"어…아…그냥 어쩌다가…"
어물쩍 대답하는 나를 바라보는 민석씨의 눈빛이 꽤 날카로워 보여서 나는 나도 모르게 민석씨의 발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미 없이 콩콩 침대에 발을 부딪치는데, 민석씨가 "갔을 땐 비서분만 계셨습니다."하고 대답하곤 자리를 뜨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다시 고개를 휙 든 나는, 민석씨가 문 앞에서 1.5리터짜리 생수병을 들고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김종인에 대한 물음은 뒤로 접고, 민석씨를 보며 눈치를 보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 찾았어요?"
"찾기만…!"
내 말에 물을 마시다 울컥한 목소리로 말을 띄우던 민석씨가 급격하게 치솟은 제 목소리를 느꼈는지 금세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리곤 한숨을 쉬며 눈을 아주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그래, 밤새 찾았을 것이 분명하다. 깨어난 순간부터 날 찾을 때까지 내가 설마 그 방에 있는 것을 모르고 이 집의 수많은 방을 뒤지고, 마당을 돌아보고 했겠지. 민석씨 성격이면 누구에게 도움도 요청하지 못하고 혼자 쭉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나는 입이 다물어졌다. 내가 어제 방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그리고 새벽에 나와 김종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대체 어떻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이미 욕이란 욕은 다 하고 김종인 앞에서 자살하겠다고 소동까지 피우고 또 울고 이래놓고 김종인 방에서 누가 들어 올려도 모를 만큼 깊게 잠든 것 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 일일 텐데.
민석씨가 다시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하지. 하며 작게 한숨을 내뱉는데, 민석씨는 그대로 창문으로 걸어가 창문을 열며 "애들 돌아오네."하고 혼잣말했다. 열린 창문 틈으로 정말로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차들이 들어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나서도 민석씨가 뒤돌아 나를 잠시 쳐다보기만 할 뿐 별 말이 없어서, 마음이 가시방석에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중요 부분은 빼고서라도 그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할 것 같아 "저 민석씨…"하고 민석씨를 부르는데, 민석씨가 다시 돌아본 창문을 보며 "어. 뭐야?"하며 인상을 찌푸렸고, 마침 지직거리며 도착한 무전에 귀에 꽂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손으로 짚었다. 나는 아까완 다른 분위기로 심각해진 느낌에 말을 멈추고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런 나를 민석씨가 한 손으로 막아 아주 가까이에 가진 못 했지만, 뒤에 붙은 조금 모양이 다른 봉고차 한 대와, 맨 뒤에 있는 검은 승용차 한 대는, 적어도 이 집에서는 본 적 없는 차였다. 나는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좋지 않은 두근거림이었다.
"애들 차 뒤에 뭐야. 왜 두 대가 더 들어와? 문 닫아! 닫아!"
민석의 고함에 줄줄이 이어져 들어오던 봉고차의 열을 끊고 경호원들이 달려가 문을 닫았다. 간발의 차이로 문을 잠갔음에도 처음 보는 봉고차 한 대가 그대로 밀고 들어올 생각인지 대문에 차를 쾅 들이박았다. 높은 철문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심장이 요동쳤다.
<실장님. 실장님. 지금 내려와 보셔야…>
마당에 있던 민석씨에게 무전을 하던 경호원도, 민석씨도 말을 잇지 않았다. 앞에 줄을 이어 들어왔던 우리 봉고차 문이 열리며, 눈에 익은 경호원들을 게워내듯 바닥으로 밀어낸 낯선 남자들이 우루루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바닥에 뒹구는 경호원들의 엉덩이를 토닥이듯 들고있는 연장으로 툭툭 치곤, 고개를 들어 집 전체를 훑어보았다. 민석씨가 빠르게 내 손을 잡아 제 등 뒤로 끌어당겼다. 멈칫 본 그의 얼굴이 경계심에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민석씨의 등 뒤에서 그런 민석씨의 날 선 표정을 멍하니 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하고 있을 때, 민석씨가 뒤돌아 내 어깨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절대 나오지 마."
"………"
"나오지 말라고. 한 발자국도, 이 방에서. 소리도 내지 말고. 어디 옷장 안에 들어가 있으면 더 좋고."
"무슨…무슨 상황이에요?"
"대답해.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겠다고."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나를 가만히 보던 민석씨가 씩 웃고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내 어깨에서 손을 떼자마자 예리해진 눈빛으로 귀를 짚으며 "몇 놈이야. 빨리빨리 수 파악 안 해!"하고 고함치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닫힌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렸다. 본능적으로 엎드려서 기듯이 창문으로 다가간 내가 창문 귀퉁이로 눈만 내밀어 밖을 살폈다. 딱 봐도 조폭 깍두기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딱 우리 경호원 수의 두 배정도로 많았다. 어깨에 하나씩 연장을 짊어지고도 어떠한 말이나 행동 없이 마당에 일렬로 쭉 늘어선 조폭들을 바라보았다. 쳐들어온 사람들 같지 않게 오와 열을 맞추어 서 있는 모습이 이상했다. 단순히 들어오게 된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 느낌. 현관문 쪽에서 민석씨의 모습이 보였다. 이상하게, 자꾸만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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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석은 귀에 꽂힌 이어폰을 풀러 현관문 옆에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날카로운 표정으로 문밖을 살피며 현관문을 나서는 민석의 뒤로 홍 여사가 따라붙었다. 그녀를 힐끔 본 민석이 그녀를 제지하며 "방에 들어가 계세요." 했지만, 홍 여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큰 도련님인 것 같습니다."
홍 여사의 말에 민석이 문고리를 돌리다 말고 뒤돌아 물었다.
"…외동 아니십니까?"
"호적상으로는 그러하죠."
더는 말해 줄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문 홍 여사를 보며 민석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오지 마세요."하며 문고리를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을 잡고 있던 경호원들을 붙잡은 사내들로 인해 집 문은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그 열리는 문을 똑바로 바라보며 민석이 마당으로 내려서는 돌계단을 밟았다.
열린 문 안으로 부드럽게 들어온 검은 차와 봉고차 안에서,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빼입은 덩치가 아주 크거나, 아주 날렵해 보이는 사내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을 보며 민석이 제 옆의 경호원들에게 "내가 지시하기 전까진, 움직이지 마."하고 단단히 말했다.
민석이 경호원들을 지나쳐, 쭈욱 늘어서 있는 조폭들을 무시한 채 제일 뒷차로 다가서려 하는데, 줄 맞추어 서 있던 조폭의 제일 앞에 서있던 사내가 민석의 앞을 막아섰다. 민석이 눈만 들어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살집이 있고 체격이 좋은 건장한 사내 앞에서, 조금 작은 키의 민석이 더 작아 보였는지 뒤에 서 있던 조폭 건달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뭐, 어딜 가. 나한테 말해.나한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우리 형님께서 그 …사장님을 만나 뵙고 싶어하시는데 말이야."
아주 건들거리고, 깔보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 말투에 흔들리지 않고 민석이 여전히 딱딱한 표정과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그녀에게 보였던 긴장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미리 약속을 잡지 않으시면 만나실 수 없습니다."
"미리 약속을 잡지 않으시면 만나실 수 없습니다~!"
그 뒤에서 빼빼 마른 한 남자가 민석의 말을 따라 하며 웃자, 오와 열을 맞추어 서 있던 조폭들이 모두 다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민석은 표정 변화 없이 그의 진한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제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깔깔거리며 웃다 민석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숙인 사내가 민석의 도전적인 시선에 심기가 불편해진 듯 "야, 뭘 봐. 이새끼야."하며 둔탁하고 커다란 손을 들어 민석의 뺨을 툭, 툭 때렸다. 뒤에 서 있던 경호원들이 움찔 몸을 앞으로 나섰으나 그보다 먼저 앞선 것은 민석이었다.
"악!"
제 팔목의 두 배쯤 되는 사내의 손목을 잡고 꺾어버린 민석이 고통에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손에서 떨군 연장이 챙그랑 소리를 내며 마당을 굴렀고, 식구의 굴욕에 욕을 거칠게 뱉으며 연장을 들어 올린 조폭들을 검은 차 안에서 나온 40대 후반쯤 돼 보이는 흰 머리의 남자가 손짓 하나로 막았다. 하지만 그를 못 본 민석에게 손이 잡힌 사내는 그대로 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민석의 발목을 쥐어 끌어당겼다. 엄청난 힘에 그대로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넘어진 민석에게 사내가 본격적으로 달려들었고, 민석 또한 다시 빠르게 일어나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그 와중에 자켓 단추를 푸르고, 어깨에 붙은 잔디를 털어내는 민석의 여유에 사내가 더 열이 받은 듯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가 달려올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흰 머리의 남자는 차 안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는 더이상 그를 말리지 않고 팔짱을 끼고 섰다.
아침 햇빛이 창창한데도 잔뜩 어두운 차 안. 뒷자리에 앉아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무료하다는 듯 바깥 상황을 보며 하품을 하던 어린 사내가 곧, 점점 흥미로워하는 얼굴이 되었다.
"복싱…무에타이…태권도까지? 이햐, 발차기 죽이네. 다리가 어떻게 저렇게 돌아가? 뭐야? 저놈 뭐야?"
"이 곳 경호팀 경호실장입니다."
"이야, 비리비리하게 생겨서 힘도 좋고. 몇 살이야? 쟤는 저런 애들이랑 붙을 급이 아닌데? 데려오고 싶다. 어? 데려오고 싶어!"
아이처럼 흥분한 제 보스를 보곤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난처한 얼굴로 "알아보겠습니다."했다. 아이처럼 희열에 들뜬 사내는 곧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은 제 식구를 보고도 민석을 향해 손뼉쳤다. "죽인다!"하며 하하하하 발까지 구르며 웃는 모습에 운전석의 사내가 남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민석은 발밑의 남자를 바라보다 다시 자켓 안쪽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아내곤 다시 천천히 검은 차로 다가갔다. 차 바로 앞에 서 있던 흰 머리의 남자와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흰 머리의 남자는 민석을 막지 않았고, 민석 또한 흘끗 보기만 하고 지나쳐 차 뒷좌석 창문을 똑똑 노크했다. 창문은 아주 쉽게 스르륵 내려갔다. 민석은 창문이 열리며 나타난 해맑은 표정의 사내에 당황함을 숨기느라 어려웠다.
"안녕? 종인이가 꽤 괜찮은 애를 데려왔네~"
아주 밝고 쾌활한 목소리였다. 표정은 더 밝았다. 하지만 민석은 그 사내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활발하게 웃고 있지만 여기저기 깊고 얕은 날렵한 흉터가 많은 것도 그러했고, 웃고 있어도 느껴지는 사람을 짓누르는 그 무거운 기가 한 몫 했다. 하지만 민석은 아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미리 약속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에에…그래?"
잔뜩 아쉬워하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제 앞의 운전자에게 "어떡하지 그럼, 오리야?"하며 묻던 백현이 살짝 고개를 비스듬히 하여 아리송한 표정으로 "근데…너"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차 밖의 민석을 바라보았다. 웃고 있던 눈이 어쩐지 광기에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내가 인사했는데, 왜 씹어?"
그리고 차 안의 남자가 빠르게 차 문을 열어젖혔다. 강하고 빠르게 열린 문에 퍽 소리를 맞아 뒤로 밀려난 민석이 날아드는 주먹에 간신히 자세를 낮추어 주먹을 피했지만, 바로 아래에서 치고 들어오는 빠른 주먹을 떨어진 체력으로 인해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어퍼컷을 맞고 뒤로 쿠당탕 나가떨어졌다. 다시 빠르게 일어섰지만, 이가 부러졌는지 민석이 잇조각을 퉤 뱉어냈다. 뱉어난 잇조각에 엉겨 붙어있던 핏덩어리가 잔디를 붉게 물들였다. 민석이 뱉은 잇조각을 보며 "우와~"하고 손뼉을를 친 백현이 다시 벌떡 일어나 단단하게 자세를 취하는 민석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있지."
"……"
"사람은 무모하면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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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이 등장! 아주 신박한 또라이라서 제가 아주 공을 들여 쓸 캐릭터입니다
종인이가 여주의 옷자락을 만지며 잠들었죠
실제로 애정결핍 증상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행동이랍니다.
그냥...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허허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첫 편이네요
긘장된돵
암호닉은 꾸준히 받고 있습니다
댓글과 사랑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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