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백도클첸] black pearl D. 04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0/f/1/0f143d40a66894aedb48fafe8fb88867.jpg)
black pearl D.
w. 비슈엔
거대한 파도가 백현을 감싸안아 올랐다. 물기둥 속에 갇힌 백현은 가라앉는 중에 뭐라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손을 스쳐나가는 건 물뿐이었다. 발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머리 위에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물보라가 치는 물기둥 안에서 백현은 발버둥을 쳤다. 백현아. 익숙할듯 익숙치 않은 낯선 목소리가 백현을 불러왔다. 물기둥의 전체를 울리는 그 목소리는 누굴까. 숨이 턱턱 막혀 목을 죄어왔다. 살려줘. 그리고 아득하게 정신을 잃으려 할 때, 다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현아!
“흐억!!!!!!”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꿈이었다. 숨이 뻥 뚫렸다. 사슬처럼 목을 죄어왔던 물보라는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꿈이 너무 잔인했다. 아니, 혹시 꿈이 아닌 꿈을 가정한 쓰러지기 전까지의 상황을 회상했던 실제는 아닐까. 상체를 일으킨 백현은 온몸이 무겁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살짝 내려 몸을 보니 축 젖어 무거워진 겉옷들이 보였다. 겉옷들을 바닥에 널어놓곤 한숨을 돌리자 주변에 쓰러져있는 선원들이 눈에 띄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부서지지 않고 멀쩡한 배와 푸른 하늘에 떠있는 새털구름이 눈에 띄었다.
“…산 거야?”
죽지 않았다. 한명도 빠짐없이 모두 살아남았다. 백현은 서둘러 배의 끝으로 달려갔다. 백현의 눈이 동그라져 놀랄 때즈음은 이미 멀리 톈주항이 보이고 난 후였다. 이게 어찌 된 것일까. 백현은 머리를 쥐어싸맸다. 바다에 잠기기 전, 그러니까 백현이 눈을 감기 전을 회상한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토네이도와 높이 솟아올라 배를 덮치려하는 파도, 다들 그 재앙이 두려워 눈을 감거나 놀라 실신했을 땐 경수는 정말로 사악하게도 꺄르르거리며 웃어대고 있었다. 백현은 조용히 뱃기둥에 묶여있는 경수를 쳐다보았다. 밧줄에 묶여 눈을 감고있는 경수는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 모를 정도로 고요하게 잠들어있었다. 그의 도톰한 입술을 보니 돛을 내리라고 소리지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런 예외의 경우가 있었던가.”
아니, 예외의 경우가 아닐 수도 있다. 운으로도 치부할 수 없는 게, 절대 버틸 수 없는 재앙을 만났다. 분명 이론적으로 판단하면 저의 판단이 맞았다. 돛을 높여 토네이도에게서 밀려나는 것. 물론 토네이도와 가까워 확률은 50 대 50 이었지만 그래도 돛을 내리는 것보다는 확률이 있었다. 하지만 돛을 내려서 배도 부서지지 않고 살았다는 것, 그 경우는 단 하나라고 생각된다. 블랙펄의 재앙. 우릴 죽이려다가 마음이 바뀐 것일 게다. 하지만 왜?
“…쿨럭!”
뒤에서 들리는 기침소리에 백현은 빠르게 뒤돌았다. 물을 뱉어내며 거친 기침을 내뱉는 사람은 다름 아닌 도경수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저를 쳐다보는 도경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바람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는 나 때문에 산 거에요. 당신의 판단대로 했다면 죽었을 거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계속 쳐다보는 백현의 시선이 신경쓰이지 않은 듯 백현의 뒷풍경을 바라보던 경수는 활짝 웃었다.
“톈주항이 보여요.”
“…….”
스르륵, 경수의 몸을 묶어뒀던 밧줄이 풀린다. 아마 낡은 밧줄이 그 거대한 재앙에 못버티고 끊긴 것 같았다. 하지만 백현은 신경쓰지 않았다. 아직은 살짝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우리를 살린 건 저 아이니까.
도경수는 살짝이라도 건들면 넘어질듯이 힘 없이 걸어왔다.
“키가 틀어져버린 것 같은데, 저기까지 어떻게 갈 거에요?”
바람이 잘 불지 않아 돛을 펼쳐서 가기엔 시간도 오래걸릴 것이고, 아니면 아예 움직여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파도를 탈 수도 없는 것이, 수면도 잔잔했다. 아무래도 보트를 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레이가 정신이 들었는지 잠긴 목소리로 캡…틴. 이라며 저를 불렀다. 백현이 빠르게 달려가 머리를 받쳐들자 레이는 물을 뱉어냈다. 몇분 전 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란 그 눈.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 눈동자.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을 못하는 흔들리는 시선까지.
“정신이 들어?”
“이, 이게 어떻게….”
“일단 다들 깨어나면…, 깨어나면 생각해보자.”
곧장 일어나 레이는 알겠다며 쓰러진 선원들을 깨우려 선원들에게로 다가갔다. 백현은 바다에 빠질듯이 상체를 내밀어 멀리있는 톈주항을 보는 경수를 바라보았다.
넌 대체 뭐야. 넌 내가 생각하는 단순한 또라이가 맞는 걸까. 처음 저 아이를 만났을 때 저 아이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던 말을 생각한다.
「블랙펄은, 거울을 가지고 있지 않아.」
거울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건 거울이 무서워서일까? 만약 무서워서라면 왜 무서운 걸까. 백현은 눈을 꾹 감았다. 점점 주변에 소리가 많아지는 걸 보면 다들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듯 했다.
도경수가 말한 것을 그냥 장난이라고 넘길 수도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도경수의 말은 뭔가… 뭐라 말을 깔끔하게 할 순 없지만 느낌상 신뢰가 가득 담겨있는 것 같아 무시할 수 없었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지 않아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지 않는다는 건 자신이 형체가 없다는 건가? 영혼만 존재하는, 그니까 쉽게 생각하면 귀신같은 존재인가? 더 깊게 빠져들어가려하자 백현은 머리를 흔들었다. 대충 생각하자. 거울이 무서운 거야 블랙펄은. 그래 블랙펄은 귀신이라고 생각하자.
* * *
깨어난 선원들이 예상치 못하게 시간이 지체된 것을 알고 몸을 추스릴 새도 없이 닻을 내리고 정신없이 보트를 타서야 톈주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들 톈주 선착장에서 벗어나는 동안 계속해서 블랙펄의 재앙이 아니었을까? 라며 수군거릴 때 경수는 옆에서 조잘거리며 애써 무시하려는 백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뭘.”
앞만 보고 선착장을 빠져나가는 백현의 손목을 붙잡은 경수는 말해보라며 팔을 흔들어댔다. 백현은 팔을 뿌리치며 쏘아댔다. 이거 안 놔?
“사람 여럿 목숨 살려준 건 고마운데, 아직 너한테 살갑게 대할 마음 조금도 없어.”
“뒤에 선원들 말을 들어보면 블랙펄의 목소리가 들렸다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갑자기 내뱉는 생각치도 못한 말에 뭐라하려던 입을 꾹 닫은 백현은 고개를 돌려 경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왜?”
난 내 이름을 불렀던 그 목소리가 블랙펄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입밖으로까지 나오려던 말을 꾹 참은 백현은 무엇때문에, 라는 질문 밖에 하지 못했다. 생채기가 난 발과는 다르게 뽀송뽀송하고 하얀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경수는 백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야 블랙펄은 까탈스러우니까? 크흐흣.”
백현은 그 장난스러운 속삭임이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고 무서웠다. 뭔가가 익숙했다. 말투가 익숙한지 목소리가 익숙한지, 아니면 방금 그 대사가 익숙한지 확실하지 않아 단정지을 순 없지만 그냥 뭔가가 익숙했다. 두루뭉술하게.
“캡틴!”
근데 그게 단지 익숙해서? 겨우 그 익숙한 느낌 때문에 무서운 건가?
“캡틴?”
“어, 어어.”
그래. 그냥 뭔가 익숙해서 그랬다고 치자.
평소답지 않게 너무 깊게 생각에 빠져들었다. 백현이 고개를 돌리자 세훈이 안내를 했다. 물어보니까, 저기 골목으로 들어가야한대요. 백현은 잠시 멈춰섰다. 골목 안에는 작고 낡은 집들이 옹기종기 꿰차있었다. 집들로 좁아터질 것 같은 골목에서 코를 흘리며 작은 공을 가지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아이들이 보였다. 남녀 구분없이 꾀죄죄한 게 딱 이 골목에 어울리는 아이들이었다.
“나랑 타오만 들어간다. 나머지는 기다려.”
“예!”
“나는?”
예상치 못한 걸림돌이 있었다. 도경수. 이제 보니 경수는 여전히 맨발이었다. 백현이 자신의 발을 보고 인상을 찡그리자 전혀 개의치 않다는듯 웃으며 그대로 더러운 골목 바닥을 밟아 백현에게로 다가온 경수는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나도 데려가줘. 라면서. 하지만 동정심 유발하기는 틀렸다. 이미 백현은,
“안 돼.”
경수를 무시한 채 타오와 골목길을 들어간 뒤였다. 경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변백현 나쁜 놈.”
선원들은 다들 그런 백현의 모습을 알고있었던 듯 조용히 경수를 이해해주려 아무런 움직임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흐힛. 다시 해맑게 웃는 경수는 골목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큼큼. 백현이 사라진 골목을 보던 선원들이 경수에 연민을 느꼈는지 다들 조금씩 말을 건네려고 목을 가다듬었다. 언제까지 함께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중요한 건 현재이기 때문에.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하려던 루한이 제일 먼저 경수에게 말을 걸었다.
“경수씨. 캡틴, 아니 백현이는 자신과 가깝지 않은 상대가 자신의 대해 알려고 하는 걸 싫어해요.”
“…….”
“그니까 백현이 비위를 잘 맞춰주라구요, 내 말은.”
“…….”
“응?”
“응~ 알았어요.”
백현이는 친해지고 나서야 퍼주는 스타일이니까, 경수씨가 이해해요. 경수씨가 백현이랑 친해지고 싶어하는 거, 우리 눈에도 아주 잘 보여. 그러니까 조금만 참고 백현이한테 맞춰줘요.
루한의 부탁을 들은 경수가 약간 씁쓸한 듯 표정을 뭉개트리자 서둘러 찬열이 와하하- 웃으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노력했다. 다행히도 경수는 찬열의 웃음에 같이 꺄르르 웃었고 찬열은 해맑게 웃는 경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식으로 소개해줘. 나 너가 도경수라는 것 밖에 몰라.
“음, 백현이 나이는 몇이에요?”
“스물 여섯.”
“...나도 스물 여섯!”
“진짜로?”
“응!”
찬열은 이어서 더 묻기 시작했다. 어느 새 다 골목길에 쪼그리고 앉아 경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평범하게 생겨가지고는 하는 행동이나 생각이 이상하리만큼 특이했기 때문이었다. 찬열이 좀 더 솔직해지자면, 도경수의 프로필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토네이도 때 돛을 내리라는 역발상을 한 것이 궁금했다. 분명 코앞까지 다가온 토네이도 앞에서는 다들 돛을 올릴 생각을 할 텐데 어떻게 돛을 내릴 생각을 했을까. 아니, 돛을 내리면 완벽하게 죽는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토네이도말야.”
“응?”
“어떻게 그렇게 할 생각을 했어? 그 토네이도, 블랙펄의 짓이야? 응?”
“…….”
“응? 도경수?”
‘블랙펄’ 이라는 단어에 귀를 쫑긋 세우는 그들은 점차 경수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숙여 웅얼거리길래 뭐라고? 하며 더욱 다가가자 경수는 고개를 벌떡 세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사람들이 알고있는 블랙펄은 다 틀려.”
“뭐?”
“진짜 블랙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 난 그 거의 없는 사람들 속에 속해있고.”
“뭐가 틀리다는 건데?”
“뭐가 틀린지 찾는 것보단 진짜를 알고있는 사람을 찾는 게 더 편할 거야. 백현 아니면 블랙펄에 대해 말하기 싫어.”
“왜?”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백현은 날 버리고 갈 것이 분명하니까. 뭐, 진실을 알고있는 다른 사람들은 겁쟁이들 밖에 없어서 말 안 해주겠지만. 이라는 말 끝으로 경수는 배고프다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혹시 모르지. 사람을 위장한 블랙펄이 나타나 훼방을 놓을지도.”
“…….”
더러운 시멘트 바닥 사이로 핀 아담한 꽃 한줄기를 떼어 향기를 맡는 경수는 굉장히 여유로웠다. 그의 말에 경직되어 쳐다보는 선원들과는 다르게 굉장히 편해보였다. 꽃잎을 한잎씩 떼어 버리던 경수는 옷을 탈탈 털고 일어섰다.
“근데 블랙펄은 좋아하는 것이 생겨서 그러진 않을 거야, 아마.”
“응…?”
좋아하는 것? 경수의 말을 듣던 선원들은 곰곰히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이 뭐길래? 아니 그것보다도, 진짜를 아는 사람을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그들의 목소리를 듣던 경수는 작게 웃었다. 여럿이 괴로워하니까, 그리고 또 괴로우니까 좋아하는 것이 블랙펄의 마음을 좀 알아줬음 좋겠어.
* * *
“B가 저희 집을 찾아오시다니, 영광이에요.”
금괴를 쓸어만지던 백현은 찻잔을 건네오는중년여성에게 고맙다는 짤막한 인사를 하고는 찻잔을 곧바로 입에 가져갔다. 여자의 빨간 립스틱을 칠한 인조적인 입술이 눈에 띄었다. 차는 이곳 톈주에서만 피는 꽃의 잎을 따서 우려낸 것이라고 중년여성은 소개했다.
백현은 낡아빠져 부서질 것 같이 요상한 소리를 내는 의자에 앉아 작은 집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재가 가득한 벽난로 위에 놓인 액자를 발견한 백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액자를 가져왔다. 액자에 담긴 사진에서는 중년여성과 그의 남편쯤 되어보이는 남성과 한 여자아이가 행복하게 웃고있었다.
“제 딸이에요.”
“이름이?”
“쯔양이에요.”
어쩐지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지더라니.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여자아이, 골목길에서 공을 굴리며 뛰어다니던 아이들 무리 중 한명이었다.
백현은 귀엽게 웃고있는 사진속 아이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짓다 액자를 내려놓았다. 예쁘네. 쯔양.
“아니요, 예쁘기는요. 저 아이는 정말 사람을 답답하게 해요.”
“왜지?”
“블랙펄 현상수배금이 얼만 줄 아시죠?”
1조 2천억. 굉장히 큰 돈이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큰 블랙펄 현상수배금은 돈 냄새에 미치는 사람들이 침을 흘리며 헥헥댈만한 액수였다. 그래서 킹슈르에서 블랙펄을 잡겠다고 술에 취한 귀족들과 해적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었지. 짤막한 회상을 끝내고 중년여성을 쳐다보자 그녀는 이마를 짚고있었다. 저 아이를 죽이는 시늉으로 협박이라도 해야할까요.
“며칠 전에 사실은 블랙펄에 대해 알고있다고 어떡하냐며 울면서 그러더라구요.”
“뭐?”
블랙펄을 안다고? 중년여성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도 B처럼 세지는 않지만 작은 해적단에 선원으로 일하고 있어서 귀띔이라도 해주고 싶어서 쯔양에게 말하라고 했는데.”
“…….”
“애가 겁을 잔뜩 먹어서는 말을 절대 못한다고하고 도망치더라구요. 아마 블랙펄에 대해 말하면 죽는다는 소문때문에 그런가봐요.”
정말 저러다가 미친년되면 어쩌나몰라. 중년여성은 잔인했다.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딸자식 목숨따위는 중요치 않게 생각한다. 백현은 달달하게 느껴졌던 꽃차가 씁쓸하게 느껴질즈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앉아있던 타오는 백현이 일어나자 같이 일어나 금괴가 담긴 상자의 뚜껑을 닫아 자물쇠로 잠궜고 중년여성은 벌써 가시게요? 라며 호호 가식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아무 향이 안 나는 듯한 이 집에서 갑자기 여성의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역겨웠다. 인공적인 그 냄새. 더러운 냄새.
“이 정도면 되겠지? 5천이야.”
돈가방을 식탁에 대충 던지듯이 올려놓자 얼굴빛이 밝아지면서 빠르게 열어보고는 웃음짓는 여자였다. 그녀는 활기차게 웃으며 금괴가 또다시 생기면 연락하겠다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역겹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가식적인 여자의 집을 나선 백현은 입안에 맴도는 꽃향에 침을 연신 뱉어냈다. 더러워.
“캡틴. 저 아이.”
상자를 들고 옆에서 걸어오던 타오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르켰다. 까무잡잡한 타오의 길쭉한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아까 그 중년여성의 집에서 본 사진속 여자아이, 그니까 쯔양이 꽃을 따며 옆쪽 골목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분홍색 꽃원피스를 입은 쯔양은 하루종일 뛰어놀았는지, 한쪽으로 묶은 머리가 산발이 되어있었고 코를 마셔대며 낡은 신발로 돌맹이를 툭툭 걷어찼다. 그 모습이 왠지,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모습이었다.
“먼저 가서 기다려. 난 저 아이를 만나고 갈게.”
옷에 걸치고 있던 남색 롱 자켓에 묻은 먼지를 털어대던 백현은 타오를 등진 채 그 골목쪽으로 걸어갔다.
한편 그 시각 경수는 점점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 * *
쯔양은 살짝 겁을 먹은 얼굴로 백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기야 이 골목에서 보지도 못한, 딱 봐도 해적처럼 보이는 외관을 보고 놀란 것임에 틀림없었다. 백현은 살짝 웃어주었다. 나쁜 사람 아니라고 알려주는 미소였다. 그런데도 쯔양은 경계심을 풀지않고 뒷걸음질을 쳤다. 백현은 한숨을 후욱, 내쉬고는 쪼그려앉아 쯔양의 손목을 붙잡았다. 갑작스런 터치에 놀랐는지 몸을 크게 부르르 떠는 쯔양은 11살 쯤 되어보였다. 쯔양을 보니 그때의 그 일이 떠올랐다. 필로폰 도둑. 도경수. 부르르 떠는 몸짓이며 꾀죄죄한 모습에 알맞지 않은 어여쁜 외모. 딱 그를 연상시키기에 좋았다.
“누, 누구세요.”
“비슈엔 호 선장 B.”
“B, B요? 아저씨가 B에요?”
동그라진 눈으로 백현을 쳐다보는 쯔양은 눈을 요리조리 굴려 백현의 외관을 쳐다보았다. 백현이 항상 자기를 B라고 소개를 하면 다들 놀라곤 했다. 무섭고 까탈스럽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어리고 순해보이는 외모때문일까.
백현은 쯔양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앉을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렴. 쯔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경계심이 바짝 들은 쯔양이 백현의 손을 잡고 걸어온 곳은 낡은 의자가 있는 허술한 골목이었다. 톈주에는 인구밀도가 높아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있어 골목이 많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많은 줄은 몰랐다.
“쯔양.”
“…제,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너희 엄마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거든.”
“…그 여자를 엄마라고 칭하지마세요. 언제 날 죽일지 모르는 사악한 마녀에요.”
쯔양은 손톱을 톡톡 깨물며 다리를 떨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행동과 말투는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였다. 쯔양은 이어서 말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맞고 자랐어요. 저는 그 마녀의 사랑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사랑을 받기 위해 여러가지를 생각하다가 알았어요, 블랙펄이면 되겠다고.
“블랙펄에 대해서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예전에 8살 때 아빠가 일하시는 배에 몰래 숨었던 적이 있어요. 제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 배는 항해를 했었죠. 물론 엄마라는 여자는 저를 신경 안 쓰니까 찾지도 않았겠죠.”
“근데?”
“아저씨들이 다 자고있을 때, 갑갑해서 밖으로 나온 적이 있었어요. 그때 봤어요. 폭풍우가 치고 파도가 일으는 바다 위에 서 있던 블랙펄.”
그래서 제가 본 대로 엄마한테 말하면 엄마는 잘했다고 저를 쓰다듬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줄줄 알았어요. 그리고 제가 블랙펄에 알고 있다고 말하자마자, 엄마는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저를 협박했어요. 말하라고. 꼭 그렇게 협박 안 하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더라면, 가식이어도 좋으니 다정하게 물어왔더라면 저는 속아서라도 엄마한테 말했을 거에요. 저는 목이 졸릴 때 알았어요.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갈라져도 저 여자는 내 엄마가 아닐 것이라고.
쯔양은 어느 새 울고있었다.
“나에게 블랙펄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겠어?”
“싫, 싫어요.”
쯔양은 몸을 떨면서 완강히 거부했다. 아저씨, 미안한데요. 지금 아저씨가 우리 엄마처럼 보여요…. 흐으윽. 쯔양은 백현에게서 멀어지다가 결국 의자에게서 떨어져 바닥에 넘어져버렸다. 백현이 황급히 손을 뻗자 쯔양은 덜덜 떨어대며 이것 역시 거부했다.
“난 너희 엄마가 아니야.”
“흐으윽… 흐으. 엄마를 죽여주세요.”
“…뭐?”
“엄마를, 그 마녀를 제발…! 죽여주세요!!”
흐아앙- 쯔양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힘 없이 뻗어있는 그녀의 다리에 떨어졌다. 딸이 엄마를 죽여달라고 울면서 애원을 했다. 백현은 할말을 잃은 채 쯔양을 쳐다보았다.
쯔양은 끅끅대며 젖은 속눈썹으로 백현을 쳐다보았다. 잔뜩 찡그려진 얼굴이었으나 백현은 찾아낼 수 있었다. 진심으로 죽여달라는 눈빛을.
“아빠만 있어도 돼요, 나는.”
“…….”
“죽여주세요. 그럼 말해드릴게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아니다 싶었다. 백현은 좋게 타이르기 위해 다가가려 상체를 숙이자 쯔양은 다가오지말라며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백현은 자신의 굳은 얼굴에 또 겁을 먹을까봐 올라가지도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웃었다.
“알았어.”
“…흐으.”
“먼저 말해주면 죽여주지.”
“진짜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응.”
쯔양은 서서히 울음을 멈춰가기 시작했다. 제가 알고있는 것만 말할게요. 그리고 쯔양의 말을 들었을 땐, 백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어갔다. 뒤에서는 쯔양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백현은 무시했다. 그게 원래 백현의 성격이니까.
모르는 상대에게 조금도 동정심을 갖지 않는 것, 그게 백현이니까.
쯔양이 불쌍한 게 아니다. 쯔양의 어머니라는 그 여자가 역겹고 더러운 것 뿐이다.
「블랙펄의 성격이 이기적이고 괴팍에서 맘대로 재앙을 일으키거나 날씨를 바꿀 수도 있지만 블랙펄의 몸상태에 따라서도 날씨가 바뀌어요. 제가 본 바다 위의 블랙펄은 피를 흘리고 있었어요. 블랙펄이 점점 괴로워하자 폭풍우는 점점 심해졌구요. 블랙펄의 얼굴은 보지 못했어요, 안타깝게도.」
백현은 골목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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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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