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아르(noir)
w. 려안
프로필(profile)
" 그대로 계속 가, 아직 따라잡힐 위험은 없으니까 "
- 뭐? 아직이라니, 그럼 언젠가는 있다는거냐?
" 닥쳐, 그리고 너보다 형이니까 말놓지마 "
내가 존경해오던 형사들과 평소 나를 여자라고 깔보았던 형사들, 아무튼 어림잡아 30명 정도 되는 형사들이 일제히 무대 위 연약하게 서있는 여형사인 나에게 시선을 쏟아냈다. 나는 스크린 화면을 가득 채운 민윤기의 사진을 어설프게 가리키며 잠겨있던 목을 풀었다. 제발, 어쩌면 마지막 기회였다. 일년 전 부터 끈질기게 추적해 온 사건이었다. 포기할 줄 모르는 나를 보며 모두들 시간 낭비일뿐이라고, 그만두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지만 나는 느리게나마 꽤 쓸만한 정보들을 수집했고 드디어 구체적인 사건 전개에 대한 발표를 할 기회를 얻었다. 내가 천천히 입을 열자 다시한번 나에게 많은 시선들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 본명 민윤기, 평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고 조직, 누아르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인물입니다. 보통 차 안이나 건물 옥상 같은 곳에 숨어 조직원들에게 명령을 내리죠. 한 마디로 우리를 가지고 놀 수도, 아니면 우리에게 결정적인 힌트를 줄 수도 있는 놈입니다. 나이는 23살, 어리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이 조직에서는 두번째로 나이가 많아요. 그러니까 연령대가 낮은 조직이라 할 수 있죠. 모두 알고는 계시겠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실력으로는 최상급이니까요. "
" 형이고 나발이고, 내 목숨 책임 못 질거면 그만두라고 "
- 그러다 진짜 죽고싶지? 내 말 안들으면 너네 다 죽는거야
" 나 죽으면 제일 아쉬워 할 사람이 누군데, 나 같은 파트너 어디서 못구해 "
- 형들, 제발 그만 싸워요
다음 사진으로 자료 화면을 넘기자 여기 저기서 탄성이 들려왔다. 그럼 그래야지, 내가 어떻게 구한 사진들인데. 특히 김남준, 이녀석은 가장 모습을 많이 드러내는 반면 항상 선글라스나 마스크로 얼굴을 감추는 탓에 사진을 찍는데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혹여나 사진이 날아가지는 않을까, 근무실과 집, 그리고 개인 노트북, USB 까지 곳곳에 저장해두는 터라 누가 보면 내가 이 놈의 소녀팬이라도 되는 줄 알것이다. 형사들 틈에 앉아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웃어보이는 정호석을 살짝 흘겨본 뒤, 나는 꽤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셨을 누아르의 보스입니다. 김남준. 나이는 22살이고 이 바닥에서는 명성이 자자하죠. 실패율 0%, 성공률 100% 라는 수식어가 붙는 녀석인 만큼 실력은 말 할것도 없습니다. 보통은 마약 거래나 사람을 찾는 브로커 쪽에서 활동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정치계와도 결탁 할 만큼 인지도가 높습니다. 영화 속에서만 나오던 주인공들을 재현하는 듯 하다고 해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소문 처럼 거론되고는 합니다. 하지만 워낙 철저하고 빠른 터라 증거라고는 남기지 않는 녀석입니다. "
" 형들 보다는 제 미래가 더 창창한거 몰라요? "
- 넌 나 따라오려면 멀었어, 김태형
" 남준형 저 무시하지마요.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야 박지민 너 지금 웃었냐? "
이번에는 김태형의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꽤나 부담스러운 크기였는데, 이녀석의 외모 역시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생겼다. 직업만 아니였어도 딱 내스타일이었는데. 나는 마이크를 다시 들어올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의 발표를 경청하는 형사들에게 말했다.
" 21살, 김태형이라는 한때 해커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인물입니다. 천재적인 두뇌와 잠재력을 가진 놈이죠. 중학생 때 교육청 홈페이지를 해킹하여 조사를 받은 기록이 있으나 형사법에 따라 형사 미성년자 신분으로 곧바로 풀려났습니다. 조직 생활을 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습득력이 굉장히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아직 실적은 미흡한 상태라 많은 정보는 없지만 앞으로가 상당히 기대되는 놈이에요. 아마 형사님들 골머리 좀 썩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머지않아 민윤기와 함께 조직의 결정을 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 같군요. "
" 아 미안, 근데 진짜 웃겨서 "
- 박지민 너 지금 어디야, 당장 여기로와라 죽고싶냐?
" 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나만 죽는게 아니라 너도 죽을 수 있는데 괜찮겠냐? "
- 잡담 그만해, 너네가 여유부릴 실력이라도 된다고 생각해?
정확하게 카메라를 향하고 있는 녀석의 시선에 모두들 놀란 듯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박지민은 장난끼가 많은 놈이었다. 몰래 사진을 찍으려고 따라 붙으면 귀신같이 알아내서 당당하게 포즈까지 취하는 녀석이었으니. 사실 이녀석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딱히 우리 쪽에서 녀석을 구속할 만큼의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 이름은 박지민이고 나이는 아까 김태형과 같은 21살입니다. 제일 우리들의 약을 올리는 놈이죠. 조직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녀석을 구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박지민은 보통 기업체, 브로커들의 뒷치다꺼리를 맡고 있어요. 쉽게 말하면 심부름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물건을 조달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조직을 운영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에요. "
" 그렇게 잡담하다가 실수라도 하면, 책임 질 능력도 없잖아 "
- 맞아요, 다들 이제 일에 집중 좀 하죠.
" 역시 정상인은 전정국 뿐이야 "
사실 김석진은 조직생활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많은 재산을 거느리고 있는 놈이었다. 정말 왜 조직 활동을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나중에 녀석들을 잡아들이면 수사하는 내내 눈을 즐거울 수 있겠군. 나야 나쁘지않아, 범죄자라고 해서 매일 험악하고 수염난 대머리들만 득실거릴 필요는 없잖아?
" 24살 김석진, 보스인 김남준 보다도 가장 먼저 조직에 합류한 인물로 사실상 가장 위에 있는 놈이라 보시면 됩니다. 평소에는 큰 영향력을 지니진 않지만, 워낙 뒷배경이 좋은 놈이라 조직이 위기를 맞게 된다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조직원입니다. 뒷배경의 근원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대기업이라는 건 확실한 셈이죠. 아마 누아르가 한번도 수사망에 잡히지 않을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도 김석진의 배후세력이 아닐까 싶네요. 조직 내 포지션 주로 스파이가 될 수 있습니다. "
" 시끄러워서..집중을 할 수가 없네.. "
- 전정국 패기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 인이어는 일하라고 끼는거지 형들 잡담하는 소리 들으라고 끼는 건 아니잖아요 "
나름 핵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 조직의 막내인 전정국의 차례가 되었다. 아마 가장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일 것이다. 어린 나이에도 전혀 꿀리지 않는 분위기와 실력. 아무튼 앞으로가 기대되는 무서운 놈이다. 새싹일 때 밟아놓지 않으면, 정말 어떻게 될 지 정말 상상도 되지 않는다. 형사들도 스크린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대며 옆사람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 마지막이네요. 아직 고등학생인 전정국이죠. 하지만 녀석이 이름을 여러개를 사용하면서 이곳저곳 수시로 학교를 옮겨다니는 터라 파악하기가 쉽지않습니다. 특히 마약 거래시 물품을 숨기기 가장 좋은 학교 교실을 이용한다는 엽기적인 소문도 있습니다. 나이는 19살이지만 아직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고, 한동안은 졸업을 미룰 것으로 예상되네요. 또 미래에는 행동대장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녀석입니다. "
이로써 나의 첫 발표이자, 마지막 발표가 될 수도 있는 꽤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마칠 시간이 되었다. 끝으로 수사 계획을 발표 할 차례였다. 물론 내가 지금 많은 이들 앞에서 내 생각을 밝힌다고 해서 이대로 진행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나의 의견이 반영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내가 긴장한 티를 애써 숨기며 입을 여는데 여기저기서 수근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크린 화면이 나가버렸다. 당황한 내가 리모컨을 찾아 전원버튼을 눌러보았지만 기계의 문제가 아니였다. 앉아서 지켜만 보던 정호석이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 민윤기 짓이에요. 우리가 수사를 시작했다는 걸 눈치챈게 틀림없어요. "
" ...아니, 김태형 작품일 가능성도 있지 "
" 아무튼 누아르 녀석들 짓인건 분명하니까요 "
" ..하 "
속 깊은 곳에서 다시한번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거의 다 됐었는데, 타이밍 한번 죽여주시는군. 나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했고 급하게 결성된 대책 회의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어정쩡하게 발표를 마무리지었다. 회의실로 올라가는 내내 정호석은 기가 죽은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나를 위로했다.
" 아, 선배 그렇게 기죽을 필요는 없잖아요. 진짜 엄청 멋있었다구요. "
" 멋있긴..마지막에 다 말아먹었어 "
" 어차피 마지막 연설 부분은 아마 했어도 다들 귀기울이지 않았을 걸요? "
" ..그래 맞는 말이다 "
" 앞부분만 잘하면 됐어요, 어쨌든 누아르 조직원 녀석들은 확실하게 밝혔잖아요 "
나는 정호석의 위로아닌 위로에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 문을 열었다. 먼저 노트북을 켜서 파일을 확인했지만 '누아르 프로젝트' 파일은 지워진지 오래였다. 누아르가 아무리 대단한들, 내가 개인소지하고 있는 USB까지 건들이지는 못할게 뻔하니 상관은 없었다. 내가 자켓 주머니를 더듬거리는데 정호석이 내 옆자리 의자를 끌어낸 뒤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아무 느낌도 잡히지 않는 자켓 주머니에 급하게 손을 넣어 확인했지만 텅비어있을 뿐이었다. 내 어깨에 팔을 두르는 정호석을 밀어낸 뒤 급한 언성으로 말했다.
" 없어..없다고!! "
" 예?..뭐가 없다는거에요, 선배? "
" USB,,USB가 없다고..!!! "
정호석도 꽤나 놀랐는지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분명..분명 내 몸에 계속 지니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누가 가져간거냐고. 장난끼가 많던 정호석도 내 눈치를 살피며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하긴 정호석 녀석도 나와 함께 사진을 찍으러 다녔기 때문에 화가 나는건 똑같을 것이다. 심각한 우리 둘에게 동료 형사들이 다가왔다. 각자 자리에 착석한 뒤 가장 경력이 많은 형사가 입을 열었다.
" 너무 낙담은 하지마, 그래도 수사는 할 수 있으니까 "
" ..네 "
" 먼저 조는 두명씩 짜는게 어때? 김형사랑 호석이랑 둘이 말이야 "
" 뭐..저랑 호석이는 항상 같이 해왔으니까요, 좋은거 같아요 "
" 좋아, 그럼 나머지들도 둘씩 짝을 이루는거야 "
" 좀 급한 감이 없진 않지만, 내일 당장 현장으로 가는게 어떨까요? "
내일은 누아르 녀석들이 인천공항에 출몰할 계획이다. 워낙 변덕진 녀석들이라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르지만, 누아르를 체포하려면 이정도는 감수해야 할 사항이었다. 다행히 모두 내 의견에 찬성을 했고 우리는 밤새 작전을 세웠다. 아예 근무실에서 새벽을 지새울 생각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이것 저것 자료들을 정리하는데,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지 어느 순간 부터 의자에 기대어 고개를 삐딱하게 한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 하여튼, 몸도 약하면서 "
누군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조금씩 잠에서 깨려는데 정호석의 목소리와 함께 내 몸 위로 따뜻한 담요가 덮이는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눈을 뜨려 했지만 이번에는 정호석이 내 옆에 앉아 자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대게 하는 탓에 괜히 어색한 상황이 연출될 거 같아 계속해서 자는 척을 했다. 곧 정호석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 했지만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이게 누구야, 우리 보스님 아니야? "
- 야 정호석, 죽고싶냐?
"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않나? 겨우 몇 분 노출된거 가지고 프로답지 않게 이러기야? "
- 내가 그 여형사 발표 시작 전에 사진 싹다 지우랬지
" 아무튼 마무리는 잘 처리했으니까 너무 화내지는 마라. 그건 그렇고 내일 10시쯤 공항으로 출발할거 같다. 알아두라고. "
- 알겠으니까, 내일은 그 여형사 잘 붙잡고 있어라. 하여튼 엄청 설치니까.
" 김여주는...건드리지마, 내가 책임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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